김정영의 연기에는 특유의 말랑함이 있다. 마냥 보드랍거나 뻣뻣하지 않으면서, 그 둘 사이를 능청스럽게 오간다. 보고 있으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어쩜 저렇게 자연스러울 수 있지?” ‘자연스러운 연기’라는 표현은 이제 너무나 흔해서, 배우에게 붙일 수사로 적절하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여러 영화에 크고 작은 역할로 등장해 여유로운 호흡과 리듬으로 화면을 물들이는 김정영을 보고 있으면, 다시금 그 말을 곱씹게 된다. 우리가 특정한 배우의 연기를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배우가 ‘정말로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해서’이기도 하겠지만, 그가 끊임없이 연기라는 활동을 통해 이 세계의 질감을 투명하게 비춰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김정영은 종종 전자로 설명되나, 실은 후자에 가까운 배우다.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매 순간 부단히 ‘연기’하고 있다. 이토록 엄청난 집중력으로 그는 크게 소리치지 않고도 분노와 슬픔을 짙게 표현하고, 느릿한 말 한마디로도 공기의 온도를 낮춘다. 상황이 과장돼있는 경우에도, 연기만큼은 자연스럽다. 오래도록 단련된, 귀한 재능이다. 눈 밝은 창작자들이 알아본 덕에, 그는 ‘암흑기’ 같았던 30대를 지나 ‘아주 좋은 전환점’이라 자평하는 지금에 도달했다. <경아의 딸>은 장편 주연작이라는 점에서 특히나 의미 있는 작품. 경아(김정영)의 딸 연수(하윤경)가 디지털 성범죄의 피해자가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리는데, 경아 입장에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세계로의 한 발이다. 여기 이 문턱에 닿기까지, 배우 김정영은 어떤 시간을 통과했을까?
감독님께 들었는데, 경아가 사과하는 어른이어서 좋다고 하셨다면서요. 전주에서 짧게 진행된 포토월 인터뷰에서는 영화 찍으며 반성했다고도 하셨어요.
“나도 험한 꼴 다 겪고 살았어.” 이런 말을 쉽게 내뱉고 살진 않았나,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2차 가해를 하진 않았을까 하는 반성을 했죠. 우리도 다 그랬어 하는 말, 부끄럽잖아요. 근데 그 말이 이해되기도 해요. 저도 살아남은 50대 여성이고요. 그래서 경아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영화 보시고는 어땠어요? 경아 입장에선 본인이 알지 못하는 딸의 시간을 마주하게 됐을 텐데요.
연수 보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후반부에 “그거 나 아니야” 할 때 너무 아프더라고요. 영상을 보고 퍼뜨리는 사람들이 잘못한 건데, 여자들이 계속 자기변명을 해야 되는 상황도 짜증 났고요. 다 보고 났을 땐 연수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겼어요. 아마 보시는 분들 다 그렇지 않을까 싶어요.
작품을 쉬지 않으시고 드라마 주연도 하신 적 있지만, <경아의 딸>은 장편에다가 일종의 투 톱 주연 영화인 셈이니 새로운 경험이었을 듯합니다.
카메라 앞에서나 무대에서나, 제가 이야기를 이렇게까지 끌고 가는 역은 아주 오랜만에 맡았어요. 작년에 장영남 씨와 <F20>이라는 드라마를 하긴 했는데, 거기서도 서브에 가까웠고요. 그런 점에서 <경아의 딸>은 저한테 되게 의미 깊은 작품이에요. ‘주인공이 이런 거구나!’ 했어요. (웃음) 체력을 보강해야겠다고 생각했죠.
한창 드라마 촬영 중이시죠? <안나>는 촬영을 마쳤나요?
<안나>는 다 찍었고요, 지금은 <더 글로리>라고 김은숙 작가님 신작을 촬영 중이에요. KBS에서 방영하는 <어쩌다 마주친 그대>도 찍고 있고요.
<경아의 딸>은 지난해에 촬영했으니 그리 오래된 기억은 아닐 듯합니다. 감독님께서 굉장히 오랫동안 꼼꼼히 준비하신 작품으로 알아요. 처음 제안받았을 때 어떠셨어요?
처음엔 이 영화가 디지털 성범죄를 다루는, 엄마와 딸의 이야기라고 대략적으로만 들었어요. 그리고 시나리오를 읽었는데 모녀 관계에 좀 더 집중하는 얘기란 인상을 받았어요. 너무 소재만 부각되고, 딸을 위해 헌신하는 엄마의 얘기였다면 제 감상이 또 달랐을 거예요. 그런데 자극적이지 않아서 좋았어요. 담담하게, 있을 법한 일을 잘 풀어냈다는 인상이었죠. 그래서 감독의 전작인 <야간근무>(2017)를 찾아봤어요. 마침 그 영화에 나오는 김예은 배우가 저랑 같이 공연했던 인연이 있어요. 잘 성장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죠. 영화도 되게 잘 봤고요. 그래서 흔쾌히 하자고 했어요. 그 기억이 나네요.
어떤 게 가장 눈에 들어오는 이야기였나요?
힘든 사건을 겪은 후에 뭐가 일사천리로 해결되는 이야기는 아니잖아요. 카타르시스가 별로 없죠. 되게 지난한데, 또 인물들은 다 자기 사정이 있어요. 그 안에서 조금씩 나아지는 인물들을 그리고 있다는 게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특히 엄마인 경아는 되게 답답해 보일 수 있어요. 열심히 살았지만 보수적이고, 사회의 피해자이지만 저항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거든요. 착하게만 살면 된다고 믿었고, 딸이 교사가 됐으니 어느 정도 그 결과가 드러난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집도 있고요. 그런데 그걸 깨고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 성숙한 어른이 되는 거죠.
근래 촬영한 영화 목록을 훑으면, <아워 바디>(한가람, 2018), <82년생 김지영>(김도영, 2019), <69세>(임선애, 2019), <내가 죽던 날>(박지완, 2020) 등 여성 감독과 작업한 경우가 많아요.
<자유로>(황슬기, 2017)도 있어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했는데, 김정은 감독이 아마 그 영화와 <아워바디>를 보고 저를 캐스팅했을 거예요. <자유로>에서도 엄마인데요, 택시 기사예요. 딸은 중국에 있고요. 택시까지 팔아서 딸한테 돈을 보내고, 거기 가서 제2의 인생을 살아보려고 하는 인물이에요. 영화가 하루 동안의 여정을 다뤄요. 그런데 친구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하다가 중간에 꼬이기도 하고, 결국 딸이 원하지 않아 돌아오게 되죠. 그래서 다시 친구를 찾아요. 그렇게 둘이 차 타고 떠나요. 30분 정도 되는 영화인데, 저는 아주 좋았어요. 찍으면서 즐거웠고요.
<야간근무>와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하네요.
버디무비죠. 마지막에 떠날 때 조금 촌스러워도 선글라스를 끼는데, 우리끼리 <델마와 루이스>(리들리 스콧, 1991) 얘기도 하고 그랬어요. <경아의 딸>에서 경아 친구 미자로 나오는 이지하 배우와 같이 찍은 영화예요. 그때 인연이 됐죠.
이지하 배우, <F20>에도 나오잖아요.
그렇죠. (웃음) 굉장히 좋은 배우예요. 연극계에서는 이미 너무 유명하시죠. 30대 때 많은 상을 섭렵하신 스타거든요. 저는 변방의 극단에 있어서 만날 일은 없었어요. 그냥 알고만 있었죠. 그런데 황슬기 감독이 연극 보고 섭외했어요. 둘이 딱 합을 맞춰봤는데, 너무 잘 맞더라고요. 그렇게 세 작품을 같이 했어요. 그나저나, 맞아요. 여자 감독님들께서 많이 불러주시네요.
독립영화나 규모가 작은 영화에서는 여성 감독들이 연출을 맡을 기회가 비교적 많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여성 창작자들과 작업하면서 체감하신 바가 있으세요?
사실 여성 감독, 남성 감독이 크게 다르다고 느끼진 않아요. 사람마다 스타일이 다르니까요. 제가 남연우 감독과도 작업을 꽤 했는데, 소수자 이야기나 여성 문제에 관심 많은 감독이에요. 백승화 감독과도 재밌는 작업을 해왔고요. 물론 여성 감독들이 여자들 얘기를 직접 해주니까 시원한 건 있죠. (웃음)
김정은 감독에 대한 인상은 어땠나요?
매우 조용했어요. <경아의 딸> 같은 느낌이에요. (웃음) 움직임이 흐트러지지 않으면서도, 밝고 잘 웃는 사람이에요.
주로 어떤 질문을 주고받으셨어요?
아무래도 경아의 대사, “걸레가 따로 없더라.”에 대한 얘기를 정말 많이 했어요. 경아라면 어떤 말을, 어떻게 했을지 찾아가는 과정이 있었죠. 딸과 대화할 때 어디까지 말하고, 얼마만큼 원망할 것인지도 찾아야 했고요. 하여튼 엄청 집요했어요. 감독님이 끝까지 안 놓았어요. 그런데 꼭 본인 대사만 고집하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경아가 미안하다고 말할 때까지의 변화를 단계별로 찾고 싶어 하셨던 것 같아요. 사실 그 외에는 경아가 말이 별로 없어요. 말이 많은 영화가 아니죠.
고요함 아래서 엄청나게 치열했던 현장이네요.
일 얘기밖에 안 했던 것 같아요. (웃음) 또 코로나 시국이었잖아요. 엄혹했던 때라 단체 회식 한 번 못했어요. 그래서 이번에 전주에서 셋이 얘기 많이 했어요. 술도 마시고요. 서로 속내도 털어놓고, 이런저런 얘기도 했죠. 그때는 내가 살아온 얘기, 내가 살아남았다고 생각하는 일들에 대해서 말했던 것 같아요. 그걸 곱씹다 보니까, <경아의 딸> 같은 이야기가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여튼 험난했으니까요.
보통 출연이 결정되고 배역을 준비할 때 어떤 걸 먼저 하세요? 루틴이 있을까요?
다른 배우들하고 똑같을 것 같은데요? 외형적인 것과 내면적인 것을 준비하기 시작하죠. 음, 상상을 되게 많이 해요. 잠도 잘 안 자고, 밤에는 베란다에 서서 생각을 계속해요. 저는 그래야 하더라고요. 그 시간이 없으면 되게 불안해요. 연극은 늘 같이 연습하는데, 매체로 오니까 고민을 나눌 사람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혼잣말을 굉장히 많이 하고, 걷거나 운전하면서도 연습하고요. 그런데 운전하면서는 안 하려고요. 되게 위험해요. 갑자기 감정이 확 올라올 때가 있거든요. 상상? 생각?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요? 전에 배두나 배우의 인터뷰를 인상 깊게 봤어요. 연기하기 위해서 가슴을 말랑말랑하게 유지하려고 한다더라고요. 그게 와닿았어요. 제가 다른 것으로 차 있거나, 집안일이 너무 많으면 참 힘들죠. 작품 할 때 한 몇 달만 방 얻어서 나가 있으면 원도 한도 없겠다고, 남편한테 자주 말했어요.
상상과 생각으로 나를 가득 채우는 과정이 꼭 필요한 거네요.
그게 너무 행복해요. 그 생각만 하면서 살 수 있다면 정말 좋겠죠. 그런데 그럴 수 있는 조건이 아닌 거예요. 최근에 작업실을 하나 냈었는데, 바로 공연을 하게 됐고 결국 얼마 안 가 문을 닫았어요. 나이 들면 작업실 많이들 내요. 혼자 있고 싶어서.
하윤경 배우와는 어떤 이야기를 주로 나누셨어요? ‘우리가 닮았나?’ 하고 생각해보신 적도 있으실 듯해요.
닮았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전주 레드카펫에 서니까 그 얘길 하더라고요. 아무래도 짙은 화장을 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웃음) 저는 하윤경 배우를 <최고의 이혼>에서 처음 봤어요. 그게 아마 매체 데뷔작일 거예요. 제가 그때 배두나 배우를 좋아해서 그 드라마를 봤는데, 거기서 윤경 배우를 보고 되게 매력 있다고 생각했어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만큼 눈이 깊다고 할까요? <경아의 딸> 작업하면서는 생각만큼 많이 만나지 못했어요. 전주에서 얘기한 게 훨씬 많죠.
감독님은 닮은 점을 보셨던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요. (웃음) 아, 윤경이한테 그런 조언을 많이 들었어요. 매체를 전공한 친구거든요. 찍을 때 “어, 난 실제로는 안 보이는데?” 하면, “영화는 평면이기 때문에 선배님이 보시는 느낌만 주셔도 저 각도에서는 보는 걸로 연기가 될 거예요.”하는 식으로 도움을 많이 줬어요. 무대는 입체적이다 보니, 꼭 내가 뭘 봐야만 봤다고 연기하거든요. 저한테는 그런 방식이 익숙하니까, 카메라 앞에서 좀 답답했어요. 그런데 카메라 워크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윤경이가 좋은 조언을 해줬죠. 늘 고마웠어요.
실용적인 조언이네요.
맞아요. 말이 많은 친구는 아닌데, 내가 어디서 답답해하고 있는지 알아보고 도와줬어요. 화보 찍을 때도 그랬고요. 젊은 친구들한테 배울 게 많죠.
<경아의 딸>은 모녀 관계에 집중하면서도, 불법 촬영이나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 등도 두루 다루는 영화입니다. 경아 역시 남편의 폭력에 시달렸던 과거가 있죠. 사적인 경험과 그것을 가로지르는 사회적 맥락이 함께 들어있다고 할까요. 배우 입장에서도 표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고민을 하셨을 것 같아요.
전체적인 조율은 감독님이 하시는 거고, 전반적인 그림이 있으셨을 텐데요. 경아 같은 경우는 표현이 너무 세지면 인물이 일그러진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저도 그게 차츰 이해됐어요. 그런데 배우로서 도드라지고 싶은 본능이 있었어요. 우는 연기를 하면 더 잘 울고 싶고, 때로는 잘 웃기고 싶기도 하고. 그걸 감독님이 잘 다듬어나가셨죠. 남들 보기에 계속 답답하게 살던 사람이 마지막이 돼서야 변하는 이야기인데, 그걸 중간에 계속 해소해버리면 안 되잖아요. 그럴 수 있는 인물이라면 이미 이전에 털어버렸겠죠. 하지만 전 좀 더 시원하게 연기해보고 싶기도 했어요. (웃음)
경아는 극 중에서 가장 많이 변하는 인물이에요. 자기가 살던 세계를 벗어나서 새로운 세계로 한 발을 딛는데, 이런 궤적을 본인 언어로 정리해보신 적이 있나요?
작품 보시고 여성연대까지 말씀하시기도 하더라고요. 하지만, 도와달라는 요청에 같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손 내밀어주는 게 연대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이 영화는 어떻게 연대까지 나아가는가를 보여주는 거죠. 변호사인 상순, 친구 미자, 여고생 다 그래요. 연대로 가기 위해서는 자기 각성이 필요한데, 그런 각성의 순간이 경아에게 있었다고 봐요. 그걸 통해 연대로 나가려는, 서로한테 힘이 되어주는 이야기라고 할까요? 경아만 놓고 보자면, 나이 들었지만 다시 성장하는 이야기죠. 감독님은 PC방에서 블라인드를 통해 햇빛이 경아 얼굴로 훅 들어오는 장면을 그 각성의 순간으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어요. 거기서 경아는 본인이 정말 사랑하는 딸에게, 지금 2차 가해하는 그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걸 깨달아요. 저도 그 장면 찍으면서 내가 연기하는 인물에 대해 확 이해했어요.
감독님께 김정영 배우가 등장하는 장면 중에서 기억에 남는 대목을 꼽아달라고 부탁드렸더니, 연수를 찾아가서 밤에 골목에서 싸우는 장면을 말씀하시더라고요. 연수가 떠난 뒤 경아가 텅 빈 얼굴로 골목에 서 있는데, 그 표정이 정말 압권이라고요.
그 장면을 얘기하셨구나. 그때 정말 악조건이었어요. 연수 뒤쪽 빌라에서 TV 소리를 너무 크게 틀어두셔서 음향 문제가 있었거든요. 제작부가 올라가서 사정하는데, 문을 안 열어주더라고요. 그러다 ‘레디 액션’ 하면 또다시 볼륨을 올리고요. 그분도 나름의 스트레스가 있었을 텐데, 하여튼 힘들었던 기억이 나요. 집중해서 서로의 대사가 미끄러지지 않게 받쳐주려고 굉장히 애를 썼죠.
모니터로 보는 사람과 다르게 느낄 수밖에 없군요.
맞아요. (웃음)
완성된 영화로 보실 땐 그 장면 어떠셨어요?
제 연기는 볼 때마다 조금씩 아쉬워요. 객관적으로 평하려면 세월이 지나야겠죠.
그럼 연수가 등장하는 장면 중에 마음에 남는 순간을 꼽아주실 수 있나요?
친구한테 “그거 나 아니야.”라고 말할 때요. 저 진짜 울었어요. 그리고 다들 얘기하시지만, 마지막에 횡단보도 건너는 장면이요. 가슴이 벅차요. 엔딩 크레딧 올라갈 때 윤경이가 부른 노래도 나오거든요. 아무래도 나이 차이가 나니까, 볼 때마다 귀엽기도 하죠. 감독님하고 둘이 동갑이에요. 영화 보면서 기특하고, 귀엽고, 또 속상하고 그랬어요.
경아를 떠올리면 ‘마른 얼굴’이라는 표현이 떠올라요. 한편으론 매체에서 연기하실 때 얼굴 근육을 많이 쓰고. 말하자면 얼굴의 표현력이라고 할까요? 그것에 대해 어느 정도로 체감하면서 연기하세요?
그게 어땠어요? 저는 어떻게 고쳐야 하나 고민해요. 아무래도 연극을 했잖아요. 처음에 어떻게 배우로 훈련됐는지가 중요할 텐데, 연극을 할 땐 온몸과 온 얼굴을 다 써서 연기했어요. 그렇게 습관이 들어서 매체 연기를 할 때도 조절이 잘 안되더라고요. 드라마를 하다 보면 시선을 떨어뜨리지 말아 달라는 디렉팅을 듣기도 해요.
구체적인 디렉팅을 소화하지 못해서 아쉬워지는 걸까요? 모니터링하면서도 아쉬운 게 보이세요?
음, 근육을 쓸 때 제대로 잘 쓰면 좋겠어요. 매체에서는 사소한 동작도 되게 크게 와닿거든요. 불필요한 얼굴 근육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어요. 특히 브라운관, TV에서 볼 때 그래요. 제가 이러면 어떤 드라마 감독님은, 왜 거기에 자기를 맞추려고 하냐고도 하세요. (웃음) <경아의 딸>은 아무래도 영화고, 편하게 할 수 있는 역할이어서 그런 의식을 덜 했어요. 근데 보면서 또 그래요. “얼굴을 또 저렇게 들었네, 허리도 좀 바르게 세우지.” 제 습관이 다 보여요.
거슬린다는 의미에서 말씀드린 건 아니에요. (웃음) 그리고 꼭 바른 자세가 아니어도, 김정영 배우에게는 멋있는 태가 있고요. 미자와 둘이 나오는 장면들이 기억나는데, “필요 없으니까 궁금해하지 마.” 하거나, 과거에 남편한테 맞은 얘기 하면서 “여기 사람들 다 내 욕했다.” 할 때 굉장히 서늘하고 무서워요. 이때 대사를 꽤 천천히 하는데, 특유의 리듬감이 있어요. 원래 급한 걸 싫어하세요?
아뇨, 성격 되게 급해요. 그런데 그러면 사고가 자주 나니까, 천천히 하려고 노력하죠. 자꾸 넘어지고 자빠지거든요. 마음은 급한데 몸이 느린 사람이라고 할까요? 생각해보면 원래 마음이 급한 사람도 아니었어요. 빠른 사회에서 살다 보니 내가 나를 들들 볶았던 거죠. 연기할 때 말 느린 것 때문에 지적 많이 받았어요. 저는 누가 나한테 말할 때도 천천히 해줬으면 좋겠어요. (웃음) 아무튼 좀 천천히 말하는 편인데, 그러면 지루할까 봐 나름의 리듬감을 찾은 거죠. 이렇게 느리게 말하면 누가 내 대사를 들어줄까 싶어서요.
말씀드린 장면 외에, 다른 영화에서도 강하거나 서늘한 모습을 꽤 보여주셨어요. 대표적으로 드라마 <십시일반>이 그렇고, <내가 죽던 날>의 상사도 카리스마가 엄청나죠. <69세>의 식당 주인도 떠오르고요. 연출자나 주변 동료들한테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는 얘길 종종 듣곤 하세요?
<십시일반> 감독님이 코멘터리 하는 영상을 본 적 있는데, 제가 예술 하는 사람 같은 느낌이 들어서 캐스팅했다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드라마 하면서 만난 제일 큰 역할이었는데, 분위기 덕을 본 거죠. 젊었을 때 그런 역을 좀 했어요. <나쁜 남자>(김기덕, 2001)에서 여자 포주를 연기했는데, 거기서 남자를 엄청나게 때리거든요. 최덕문 배우는 저한테 그때도 맞고, <자유로>에서도 맞았네요. (웃음) 그러다가 30대 때는 기억날 만한 작업을 거의 못 했고, 그러다가 엄마 역할을 많이 맡게 됐어요.
보스나 흑막 같은 역할에도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누아르나 스릴러 장르는 어떠세요?
너무 하고 싶죠. 저, 잘할 것 같아요. (웃음) 드라마 <더 킹>의 김은숙 작가와 뒤풀이 자리에서 만났는데, 어떤 역을 하고 싶은지 묻더라고요. 사회적 위치나 꾀를 통해서가 아니라, 물리적으로 남자를 때리고 싶다고 했어요. 코미디도 하고 싶어요. 그런 기회 얻기가 쉽지 않은데, 점점 다양해지고 계속 변할 거라고 봐요.
말씀하신 정도의 센 역할은 아니지만, <69세>의 식당 주인도 가끔 생각나거든요. 담배 피우면서 딱 등장하는데, 영화의 호흡을 더 깊게 만들어주죠. 짧은 분량이지만 되게 절제된 연기를 보여주셨어요. 본인만의 연기관이 있으세요?
저는 처음부터 배우가 관객한테 “내가 지금 이렇게 느끼고 있어요. 좀 알아주세요.”라고 구걸하면 안 된다고 배웠어요. 그런데 그러고 싶은 욕구가 한편에 있거든요. 더 웃기고 싶고, 나 이렇게 잘 운다고 말하고 싶은 거죠. 그 싸움을 항상 하는 거예요. 돋보이고 싶다고 생각하다가도, ‘잠깐만, 이게 맞나? 나중에 후회할 것 같은데?’ 하는 거예요. 과잉되지 않으면서 연기를 잘한다는 건 뭘까 늘 고민해요. 또 하나 중요한 건 말하기예요. 제가 있던 극단 ‘한강’은 공동창작을 했어요. 그래서 말을 말처럼 하지 않으면 엄청나게 혼났어요. 그런 것들이 내 연기의 철칙으로 남아있죠. 그런데 연기하다 보면 그게 다가 아니거든요. 보여주기식 연기가 필요할 때가 있어요. 계속 흡수해야 하는 연기의 영역들이 있는 거죠. 아까 말했듯이 매체, 특히 TV에서는 너무 번잡스러운 움직임은 피하고 인물이 어느 정도의 카리스마를 가지고 연기해야 해요. 노련한 배우들은 그걸 잘하는데, 저도 배우고 싶죠. 그런데 사실 그걸 훈련할 수 있는 곳은 현장이거든요. 정말 많이 하고 싶어요.
감독님께 김정영 배우를 어떻게 수식하고 싶은지 여쭤보니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가는 배우’라고 하셨어요. 차분하고 침착하게 이성적인 면모를 보여주다가도 어떤 때는 뜨거운 에너지로 감정적인 면모를 보여주시기도 한다고요. 집중력이 좋아서 빙의되는 것 같다는 말도 하시던데, 본인도 순발력과 집중력이 좋은 편이라고 느끼시나요?
저는 기술이 빼어난 배우는 아니에요. 무대에서도 그랬어요. 몸을 되게 잘 쓴다거나, 노래를 잘한다거나 그런 게 별로 없었죠. 그래서 집중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어요. 그걸 유지하려면 되게 힘들어요. 그런데 해야죠. <여고괴담4 - 목소리>(최익환, 2005) 찍을 때, 누가 부르면 딱 보고, 울고, 떨어져 죽는 장면이 있었거든요. 그걸 하려고 온종일 집중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지 않으면 바로 안 나오니까요. 잘하는 배우들은 놀다가도 하는데, 저는 그렇지는 못해요. 그러다 보니 부담이 커지고, 그런데 밖으로 드러내지는 못하고. 그러니까 술을 마시죠. (웃음)
그러니까, 순간 집중력이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계속 집중 상태에 있다는 거군요.
그래야만 해요.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계속 생각하고 있으면 스트레스가 가득 차거든요. 그 상태에서 딱 하고, “했다.”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러면 집에 바로 못 가고 계속 서성이게 돼요. 연극을 할 땐 ‘털어내고’ 집에 간다고 표현했어요. 무당이 굿하는 거 본 적 있어요? 제가 거기서 알바했었는데, 작두를 타고 나면 무대 뒤에서 막걸리며 음식을 계속 먹어요. 떨쳐내는 거죠. 배우랑 되게 비슷해 보이더라고요. 하고 나면 큰 게 쑥 빠져나가는 거예요.
앞서 멋있는 태가 있다고도 말씀드렸는데, 액션을 하셔도 잘 어울리지 않을까요?
무대에서 한번 했어요. 여자 네 명이 남자들에게 대항하는,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이라는 연극이에요. 무대에서는 간단히 끝났지만, 액션을 연습하는 과정이 너무 재밌었어요. 카타르시스가 있었죠.
운동하신 적은 없으세요?
운동권이었죠. (웃음) 아까도 최덕문 배우 얘길 했는데, 예전에 극단 ‘차이무’와 함께 작업할 때 제가 운동했다고 하니까, 무슨 종목을 했냐고 묻기에 대답했죠. “투포환이요.” 그 이후로 되게 오랫동안 많은 배우들이 제가 투포환을 한 줄 알고 있었어요.
<경아의 딸>을 촬영하며 얻은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젊은 친구들과 작업할 기회가 있었다는 게 정말 큰 행운이에요. 현장에서 다들 진중했고, 어른스러웠어요. 이 작업이 아니었다면 제가 계속 옛날얘기만 하면서 살았을 거예요. 그리고 저의 이런 경험을 또래 중년 여배우들이 굉장히 부러워해요.
지리학을 전공하다가 연극반에 들어갔고, 졸업하면서 극단에 들어가기로 하셨다고요. 연기의 어떤 점이 좋아서 그런 선택을 하셨어요?
저는 원래 연극영화과 가고 싶었어요. 고3 때죠. 그때는 감독을 하고 싶었는데, 담임선생님이 집에 돈 많으냐, 네가 예쁘냐고 묻더라고요. 아니라고 대답하니까 그럼 무슨 수로 예술대에 가냐고 해서 포기했어요. 그리고 대학에 가서 운동을 했죠. 처음에 연극반을 했고, 이후 단과대 학생회장을 했어요. 그때 학교에서 우금치 100주년 기념공연을 했는데, 극단 ‘한강’의 연출님을 섭외하고, 제가 매니저 같은 역할을 한 거죠. 그런 경험을 하고 나서 졸업했는데, 지하철 타고 가면서 미래에 대해 고민해보니 연기가 재밌겠더라고요. 가슴이 막 뛰었어요. 그래서 극단을 찾아갔어요. 안 된다고 오지 말라는데, 계속 갔죠. 그렇게 청소부터 시작하게 된 거예요.
왜 그렇게 가슴이 뛰었을까요?
모르겠어요. 그냥 연극이 만들어지는 모든 과정이 다 너무 재밌게 느껴졌어요.
가장 처음 섰던 무대를 기억하세요?
<노동자를 싣고 가는 아홉 대의 버스 2>라는 작품이에요. 극단 들어간 지 1년 반 만에 하게 된 작품인데, 원래 저는 오퍼였어요. 그런데 ‘현경’ 역할을 맡은 선배 언니가 극단을 나간 거예요. 순회공연을 해야 하는데 ‘빵꾸’가 난 거죠. 그런데 제가 오퍼를 했으니까 대사를 다 알잖아요. 그렇게 들어가서 공연하게 됐어요. 현대자동차 노조 초청공연이었을 거예요. 야외무대에서, 일인다역을 했죠. 데뷔작이에요. (웃음) 정식 대학로 무대는 <교실 이데아>라는 창작극, 서태지의 음악을 가지고 만든 작품이고요.
영화엔 2000년부터 출연하셨어요. <실제상황>(김기덕, 2000)이 첫 출연작인가요?
<번지점프를 하다>(김대승, 2000)도 비슷한 시기에 찍었어요. 어느 게 먼저인지는 모르겠네요.
영화를 시작한 계기는요? 결혼도 2000년에 하셨던데요.
대학로에 바람이 불기 시작했어요. 제가 극단을 나올 무렵이었는데, 그때 ‘사상 최대의 오디션’이라고 명계남 선생님과 몇몇 영화사들이 함께 여는 오디션이 크게 열렸어요. 대학로에 포스터가 엄청나게 붙었죠. 그때 오디션 보고 <번지점프를 하다>를 하게 된 거예요. <실제상황>은 오디션 공고문에 ‘연극배우 우대합니다’라고 쓰여 있었어요. 실시간으로 카메라가 쫓아가는 콘셉트니까요. 그렇게 인연이 닿아 <나쁜 남자>까지 하게 됐는데, 그 이후에는 애매했어요. 영화 쪽에선 단역이 있다가 없다가 했고, 극단 나오고 출산하니까 연극도 하기가 어렵더라고요.
지금은 배우로서 어떤 지점을 지난다고 여기세요?
아주 좋은 전환점에 있어요. 이상하게 우울감이 좀 가시고 있고요. 마음이 자유로워요. 그전에는 탓을 많이 했어요. 남 탓도 하고 사회 탓도 했는데, 그게 결국은 동전의 양면이에요. 그러면 또 내 탓을 하게 되거든요.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이 생기죠. 좋은 모델이 많이 보여서 그런 게 아닐까요? 윤여정 선생님도 계시고, 이정은 언니도 있고요.
지금 하고 싶은 일은 어떤 건가요?
영어 공부하고 싶어요. 새로운 언어를 배우면 세계가 확장되는 기분이 들거든요. 또 요즘은 글도 쓰고 싶어요. 실제로 방송작가협회 같은 데서 도전하는 언니들도 있어요. 그게 꼭 결과가 나와야 하는 게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서 좋을 거라고 봐요. 저는 애 키우면서 언어가 짧아졌다고 생각해요. “말 좀 하자!”는 마음이었어요. 글 쓰면서 언어를 정제하고, 사고도 정화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물론 좀 더 다양한 연기도 해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