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없는 더블링
<메이드 인 루프탑> 정휘·이홍내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1-06-20

“로맨틱 코미디는 왜 만들어. 자기계발서는 누가 썼어. 어차피 뻥이면서~어차피 뻥이면서~” 벽에는 별자리를 수놓은 패브릭 포스터가 걸렸고, 천장엔 앙증맞은 가랜드와 앵두 전구가 달렸다. 취향과 개성을 마음껏 뽐내는 이 자그마한 옥탑방에서 두 청년이 기타 들고 노래한다. 하와이안 셔츠를 입은 봉식(정휘)과 체크 셔츠 차림의 하늘(이홍내), 그들이 희망 고문을 일삼는 세상을 향해 던지는 조소와 저주는 더없이 상쾌하고 한없이 유쾌하다. 하늘과 봉식의 기막힌 코러스는 로맨틱 코미디의 촌스러운 공식을 따르지 않겠다는, 자기계발서의 헛된 조언을 베끼지 않겠다는 영화의 약속이자 선언이기도 하다. <메이드 인 루프탑>은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2012) 이후 8년 만에 돌아온 김조광수 감독의 신작. <자이언트 펭TV> 작가이자 배우 겸 감독인 염문경이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특히 이홍내와 정휘가 뿜어내는 분방한 에너지는 어쭙잖은 위로가 지겨운 청춘들에게 놀라운 생기를 불어넣는다. 작년 여름 옥탑방, 아니 ‘루프탑’에서 신나게 뛰어논 뒤 두 배우에게도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 이홍내는 <경이로운 소문>(OCN, 2020)의 최강 ‘빌런’ 지청신 역으로 눈도장을 확실히 찍었고, 2013년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으로 데뷔한 정휘는 현재 <와일드 그레이>에서 ‘휘보시’로 활약 중이다. 영화에선 열정 따위 집어치우라고 외치지만, 사실 둘은 누구보다 열정의 힘을 믿는 청춘. 그들이 품은 열정은 대체 뭘까. “한 뜨거움 한다”며 싱그럽게 웃는 두 배우를 만났다.

 

 

개봉 앞두고 광주, 대구, 부산 등 전국 곳곳에서 시사회를 열었다. 마침 6월은 성소수자 인권의 달(Pride Month)이기도 하다. 코로나19로 퀴어문화축제 등 다양한 행사가 예년처럼 열리지 못하는 상황이라 많은 이가 <메이드 인 루프탑>을 반가워할 것 같다.

정휘_ 거리 두기를 하다 보니 객석이 꽉 찬 모습을 볼 순 없지만, GV로 관객과 만나며 기운을 얻는다. 질문도 많이 해주시고 우리 이야기도 집중해서 들어주셔서 감사하다.

이홍내_ 지난 5월, 감독님과 함께 셋이서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에 다녀왔다. 극장이 너무 좋았다. 공간도 마음에 들고, 관객도 많이 와서 기억에 남는다. 일정 마친 후에는 순두부도 먹으러 가고. (웃음) 유쾌한 영화로 가 닿길 바랐는데, 그 마음이 전해진 것 같아서 만족한다.

정휘_ 지인들도 재밌게 봤다며 축하해줬다. 보통 독립영화라고 하면 대중성과는 거리가 먼, 조금은 어두운 작품을 떠올리지 않나. 특히 퀴어영화의 경우, 우울한 정서를 담은 작품이 많은데, <메이드 인 루프탑>은 딱 청춘영화 느낌이 나서 좋았다고 하더라.

 

쨍한 여름 느낌이 난다.

이홍내_ 작년 8월에 촬영했다. 영화에는 옥탑 풍경이 예쁘게 나왔는데, 사실 자외선이 엄청난 현장이었다. (웃음)

정휘_ 촬영 감독님의 열정에 감동했다. 온몸이 햇빛에 새까맣게 탔거든.

이홍내_ 난 머리카락이 없다시피 하다 보니 두피가 너무 뜨겁더라. 정수리에 선크림 바르고 찍었다. 아쉬운 장면도 있다. 하늘이랑 봉식이가 막걸리 마시면서 대화하는 장면인데, 그때 눈을 제대로 못 떴다.

정휘_ 맞다, 햇빛을 좀 가리려고 천까지 걸었는데도 눈이 부셨다. 청춘영화에 한 번쯤 나오는 장면이지 않나. 인물들이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는 신.

이홍내_ 멋지게 탁 바라보고 싶었는데, 진짜 눈이 멀 것만 같더라. (웃음)

 

그래도 분위기는 충분히 전달했다. 막걸리를 마신다는 설정도 ‘힙’하다. 

이홍내_ 정확한 이유는 작가님이 아시겠지만, 소시민이라는 위치와 청춘이라는 세대가 막걸리로 연결된다고 봤다. 친구들이 대학 다닐 때 학교 잔디밭에 둘러앉아 막걸리를 마셨다고 하더라. 그런 느낌이어서 좋았다. 듣기만 했지, 실제로 해본 적은 없거든. (웃음)

정휘_ 낭만적이었다. 옥탑방 풍경과 와인 잔에 채운 막걸리. 어떻게 보면 어울리지 않는 것들의 조합인데, 문득 ‘청춘이란 이런 거구나!’ 싶더라. 

<메이드 인 루프탑>
<메이드 인 루프탑>

하나부터 열까지 갖춘 상태에서 노는 게 아니라, 그때그때 주변에 있는 것들을 모아 판을 만든다.

정휘_ 맞다, 레스토랑에서 와인 잔에 와인을 담아 마시는 건 좀 빤하잖아. 부조화 속에 청춘 감성이 묻어나서 좋았다. 전통 발효주를 마신다는 점에서 한국적이기도 하고.

 

실제로 선호하는 주종은?

이홍내_ 난 생긴 것과 다르게 와인을 좋아한다. 주량이 높지 않은데, 와인은 좀 덜 취하더라. 대화 나누면서 마시기도 좋고. 

정휘_ 나도 와인 좋아하는데, 와인은 일단 개봉하면 다 마셔야 하지 않나. 시간이 지날수록 맛이 변하니까. 그래서 요즘에는 위스키를 조금씩 공부해보고 있다. 하루에 한 잔 정도 마시면 부담스럽지 않고, 보관하기도 편리하다. 집에서 ‘혼술’하기에 괜찮은 것 같다.

이홍내_ 근데 우리 영화에서는 막걸리 마시고, 여기서는 와인이랑 위스키 얘기하고. (웃음)

정휘_ 에이, 막걸리도 너무 좋아하지. 여럿이 함께 마실 때는 막걸리가 좋다.

 

코로나19로 인해 뒤풀이라든지 제대로 회포를 풀 자리가 없어서 아쉬웠겠다. 현장에서 둘의 호흡은 어땠나. 나이도 비슷하고, 둘 다 경상도 출신이다. 이홍내 배우는 양산, 정휘 배우는 경산.

이홍내_ 많이 친해졌다. 휘랑 공통점이 많다. 근데 출신지는 영화를 찍고 난 다음에야 알았다.

정휘_ 처음 봤을 때부터 서울말로 대화했으니까. 사실 초반에는 봉식이가 사투리를 쓴다는 설정도 있었다. 순자 씨와 대화할 때만. 연습 과정에서 사투리를 사용한 적도 있는데, 결국 서울말로 통일했다. 순자 씨는 전라도 사투리, 나는 경상도 사투리, 다른 사람은 표준어를 쓰다 보니 산만하게 느껴지더라.

 

포스터만 봤을 땐 둘이 커플이라고 생각했다.

정휘_ 근데 알고 보면 우리는 각자 연인이 있고.

이홍내_ 반전이라면 반전이지. 영화를 본 관객 중에는 하늘과 봉식이 연인이 되는 먼 미래를 상상하시는 분도 있을 것 같다. 내가 그랬거든.

정휘_ 아, 각자 헤어지고 시간이 흐른 다음에 우리 둘이? (웃음) 

이홍내_ 그런 상상도 해볼 수 있는 게 우리 영화의 매력 아닐까. (웃음) 영화에서 모든 등장인물과 만나는 유일한 인물이 나였다. 한 사람만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모든 배우가 최선을 다했고, 무엇보다 감독님의 열정이 대단했다. 즐겁고 유쾌하게 촬영장 분위기를 만들어 주셨다. 여느 현장과 마찬가지로, <메이드 인 루프탑> 또한 시간 면에서 여유롭지는 않았다. 정신없이 바쁜 순간이 많았는데,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애쓴 덕분에 어려움 없이 잘 마무리했다.

정휘_ 많은 영화 현장을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메이드 인 루프탑>은 특별하다. 훌륭한 배우라고 늘 좋은 사람인 것은 아니지 않나. 근데 이번 현장에는 홍내 형을 포함해서 신기할 만큼 좋은 사람들만 모인 듯했다. 서로 의지할 수 있었고, 오랫동안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이영진

정연 역으로 출연한 염문경 배우는 <메이드 인 루프탑> 각본을 쓰기도 했다. 연출과 작가가 한곳에 모인 현장이라 배우로서 의지가 됐을 듯하다. 영화만 봐도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느껴지더라.

이홍내_ 맞다, 심지어 작가라는 것도 잊고 연기했다. 문경 님도 그러길 바라셨다. 괜한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해 주셨고, 촬영할 때는 그저 정연이라는 인물 자체로 다가와 주셨다. 아, 그러고 보니 호흡이 안 맞는 배우가 한 명 있었지. 고양이! (웃음) 동물과 촬영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 다들 스탠바이하고 아리(고양이) 컨디션만 기다렸다가 딱 찍는 식이었다. 

정휘_ 그래도 옥탑방에 있을 때는 괜찮았던 것 같은데.

이홍내_ 정민(강정우) 집에서는 맹수를 보는 듯했다. 거의 표범이었다니까. (웃음) 

 

이홍내 배우는 김조광수 감독에게 캐스팅을 역으로 제안했다고. 그때부터 하늘 역을 맡고 싶었나.

이홍내_ 역으로 제안을 했다기보다는 간곡하게 부탁드렸던 거다. 감독님을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그전부터 소속사 대표님께 시나리오가 있으면 내용과 장르에 상관없이 읽어보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난 영화도 좋아하고 책 읽는 것도 좋아하거든. 그러다 대표님을 통해 우연히 <메이드 인 루프탑> 시나리오를 읽었는데, 하늘이라는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대표님은 어려울 거라고 말씀하셨다. 그동안 작품에서 내가 보여준 모습은 대부분 공격적이고 거친 느낌이지 않나. 감독님이 하늘 역에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미지를 가진 배우를 찾는다고 대표님이 그러더라. 

 

대본이 무척 마음에 들었나 보다.

이홍내_ 사실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작품은 무조건 해야만 해!’ 같은 마음은 아니었다. 뭐랄까, 하늘이라는 인물과 나 사이에 어떤 공감대가 형성되는 느낌에 가까웠다. 한편으로는 내가 잘못 느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심스러운 대본이기도 했다. 쉽게 접근하거나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감독님과 대화하면서 좀 더 알아보고 싶었다.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맞는지 감독님께 확인 받는 시간을 기다렸던 것 같다.

 

원래 적극적인 편인가. 

이홍내_ 상황마다 다르지만, 연기할 때는 적극적이려고 애를 많이 쓰는 것 같다.

 

진심은 통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늘처럼 ‘밀당’하기보다는 일단 부딪히고 보는 스타일?

이홍내_ 맞다, 깨지더라도 부딪혀보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결과가 어떻든 최선을 다하면, 적어도 후회는 없으니까.

이홍내 ⓒ이영진
정휘 ⓒ이영진

감독은 정휘 배우를 <팬텀싱어>(JTBC, 2020)에서 처음 봤다고 했다. ‘Proud of your boy’(<알라딘> OST)를 부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는데, 이 노래 가사가 영화 속 봉식의 마음처럼 들리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안심시키며 새로운 삶을 다짐하는 모습이니까.

정휘_ 가사를 생각하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다. 사실 감독님께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는 의아했다. <팬텀싱어>에서 보여준 이미지나 감수성은 봉식과 결이 꽤 다르니까. 어쨌거나 갑작스럽긴 해도 기분 좋게 찾아온 기회였고, 무엇보다 대본이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웠다. 감독님이 나를 점찍었다는 건 몰랐다. 일단 만나보고 결정하겠다는 이야기인 줄 알고, 큰 기대 없이 미팅에 나갔다. ‘캐스팅이 안 되더라도 너무 낙심하지 말자’고 생각했는데, 감사하게도 감독님이 그날 바로 함께하자고 말씀해주셨다. 

 

감독과 처음 만났을 때,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 오디션 같은 느낌은 아니었을 듯한데.

정휘_ 내가 미팅하던 날, 홍내 형도 그 자리에 왔다. 사실 형이 오기 전에 감독님과 그런 얘기를 했다. 대본만 봤을 때는 하늘 역을 나한테 줘야 할 것 같은데, 봉식 역을 줘서 놀랐다고. 그랬더니 감독님이 “우리한테 하늘이는 이미 있다”고 하시더라. 누구인지 아주 궁금했는데, 잠시 후에 반삭을 한 훤칠한 청년이 등장했다. (웃음) 

이홍내_ 밤톨이였지. (웃음) 

정휘_ 근데 리딩하고 대화를 나눠보니 형이 왜 하늘이가 됐는지 알겠더라. 사람 자체가 사랑스럽다. 보통 짧은 머리를 귀엽다고 느끼기 어려운데, 형은 귀엽게 소화하더라.

이홍내_ 사실 휘가 생각한 게 맞다. 원래 하늘이는 휘처럼 잘생기고 아름다운 인물이었다. 근데 감독님이 대본을 수정해주셨다. 밤톨이 느낌에 맞춰서. (웃음) 나는 감독님과 처음 만났을 때, 살아온 얘기를 주로 했다. 내가 자란 환경이라든지 상경하고 아르바이트하던 시절에 관해 말씀드렸고, 대화하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날 휘 얘기도 들었다. 꼭 함께하고 싶은 배우라고 하시더라. 만나기 전에 미리 인터넷에서 검색해봤다. 사진과 영상으로 봤을 때도 봉식 역에 잘 어울리겠다는 느낌이었다.

정휘_ 인연이라는 게 신기하다. 감독님이 나한테 연락하기 전에 공연하는 지인에게 배우를 물어본 적이 있다고 하더라. 근데 그분도 나를 추천했다는 거다. 사실 나는 감독님도 그렇고, 그분도 잘 모르거든. 만날 사람은 어떻게든 만나는구나 싶다.

 

그동안 출연한 뮤지컬 중에는 <베어 더 뮤지컬>이나 <와일드 그레이>처럼 퀴어를 다룬 작품도 있었다. 다만, 봉식처럼 ‘하이텐션’인 인물을 맡은 것은 처음인 듯하다.

정휘_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영화와 비교하면, 두 작품은 분위기도 어둡고 시대와 공간도 전혀 다르다. <와일드 그레이>는 19세기 영국을, <베어 더 뮤지컬>은 과거의 보수적인 미국 가톨릭 학교를 배경으로 한다. 반면, <메이드 인 루프탑>은 현재를 살아가는 청춘 게이들의 이야기다. 앞으로 한국에서 퀴어를 다루는 작품을 만든다고 할 때, 분위기나 방향성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동시에 누구나 고민하는 삶의 문제를 다루는 작품이기도 하다. 나 또한 90년대생으로서 많은 부분에 공감했다.

 

관객 입장에선 ‘변신’이라고 느낄 법한 작품이다. 두 배우 모두에게 장편영화 주연은 처음이고, 전작과 이미지도 사뭇 다르다. 준비 과정은 어땠나.

이홍내_ 딱 그런 말을 들을 타이밍인데, 사실 나로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경이로운 소문>보다 <메이드 인 루프탑>을 먼저 촬영하기도 했고, 변신이라고 생각하면 도리어 힘만 들어갈 것 같다. <메이드 인 루프탑>을 준비할 때는 인물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이해하는 일이 가장 중요했다.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처음에는 게이, 동성애자, 퀴어 등과 같은 용어조차 어렵게 느껴졌다. 혹시 당사자를 불쾌하게 하는 단어는 아닐까? 나도 모르게 혐오 표현을 하는 건 아닐까? 그런 고민을 감독님께 털어놓았고, 차근차근 배워 나갔다. 쉽게 여기지 말자고, 함부로 흉내 내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정휘_ 내 젊음을 그대로 표현하는 동시에, 내면에 집중하려고 했다. 감정 표현이 변화무쌍한 인물이다 보니, 자칫하면 마냥 가볍고 생각 없는 애처럼 보이겠더라. 봉식이 고민하고 걱정하는 바를 떠올리며, 밑바탕을 이루는 정서를 채우려고 했다. 직업이 BJ여서 방송하는 장면도 많이 연습했다.

ⓒ이영진

BJ 연기를 태연하게 소화하더라. 

정휘_ 유튜브나 아프리카TV에서 ‘텐션’ 높은 BJ 위주로 찾아봤다. 그들의 말투, 리액션, 표정, 화법 등을 연구하며, 봉식에게 어울릴 법한 것을 찾아내는 과정이었다. 몸으로 흡수할 때까지 오래 걸렸다. 나는 그렇게 발랄한 편은 아니거든. (웃음) 혼자 동영상 찍어 가며 연습했는데, 다행히 촬영할 때는 단번에 오케이를 받았다.

 

봉식만큼이나 하늘도 뻔뻔한 구석이 있다. 이홍내 배우는 눈에 확 띄는 초록색 정장을 입고 청계천을 걸어야 했는데, 현장에서 부끄럽진 않았나. (웃음) 

이홍내_ 아, 그때 근처 건물에서 불이 났다. 소방차와 경찰차가 여러 대 출동했는데, 지나가던 사람들은 모든 게 영화 촬영이라고 생각한 거다. 눈앞에 카메라를 든 사람이 보이니까. ‘마블 영화인가?’ 하면서 전부 나와서 구경하고. 그래도 나는 최대한 뻔뻔함을 유지하려고 하는데, 외려 감독님이 너무 부끄러워했다. (웃음) 

 

하늘과 봉식 모두 평범한 20대 청년이고, 영화 또한 유쾌하고 발랄한 분위기를 이어간다. 한편, 영화에는 가족 내 커밍아웃이라든지 동성 파트너의 보호자가 될 수 없는 문제, HIV 보균자로서 느끼는 갈등 등 묵직한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다.

이홍내_ 영화에서 하늘이가 다양한 일을 겪지만, 인위적으로 감정을 잡지는 않았다. 대신 촬영 들어가기 전에 감독님과 충분히 대화를 나눴고, 상대 배우와 연기하는 순간에 집중하려고 했다. 하늘은 MZ세대의 보편성을 지닌 인물이고, 나 역시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년으로서 이입할 여지가 많았다. 하늘의 사랑 또한 다른 이와 모양이 다를 수는 있어도 사랑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봉식과 민호가 공원에서 자연스러운 스킨십을 나누는 장면을 좋아한다. 동성애자 커플은 주변 시선을 피해 어두운 곳에서 만난다는, 또는 그래야 한다는 생각을 깨뜨리는 대목이다.

정휘_ 나도 혼자서 대본을 볼 때는 봉식의 상황과 마음을 많이 고민했는데, 막상 촬영에 들어가서는 그런 부담을 느끼지는 않았다. 오히려 상대 배우와 교감하는 데 집중했다. 민호 역을 맡은 곽민규 배우의 눈을 바라봤을 때, 즉흥적으로 느껴지는 감정이 크게 작용했다.

 

영화에서 듀엣을 부른다. 정휘 배우야 워낙 노래 잘하기로 유명한데, 이홍내 배우도 수준급이더라. 

이홍내_ 벽을 느꼈지. 노래방에서는 고음도 착착 올라가고 나름대로 잘하는 편이거든. 근데 촬영에 들어가니 박자를 못 맞추겠더라. 노래 외에 할 것도 은근히 많았다. 악기까지 똑딱똑딱해야 하고. 휘한테 많이 기댔다. 흔들림 없이 나를 리드해주더라. 솔직히 너무 당황했다. 촬영하기 전까지 그 신을 걱정한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

정휘_ 내 눈에는 귀여웠다. 너무 하늘다운 모습이어서.

이홍내_ 다시 찍을 수 있다면, 그 신을 조금 더 리드미컬하게 소화하고 싶다. 후시 녹음할 때도 아쉽기는 마찬가지였다. 녹음실에 들어갔는데, 이야, 거기서도 안 되더라. 계속 반 박자씩 늦었다. 연기할 때보다 더 떨렸다. 휘는 확실히 다르더라. 할 거 딱 하고, “더블링 할게요” 이러고. 난 더블링이 뭐냐고 물어봤잖아. 

정휘_ 내가 진짜 그랬다고? 아니, 거기에 더블링 할 게 뭐가 있다고. (읏음)

이홍내_ 이번 작품을 계기로 내 실력을 알았다. 이제 어디 가서 노래 잘한다는 소리는 절대 안 한다. 

정휘_ 나는 오히려 노래처럼 안 하려고, 말하듯 부르려고 노력했다. 동시대 청년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가사이지 않나. 풍자적인 내용이기에 감미롭게 부르면 별로일 것 같더라. 스튜디오에서 녹음할 때는 세밀하게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호흡에 신경을 썼다. 노래하는 호흡이 아니라 말하는 것처럼. 

이홍내_ 듣고 보니 정반대다. 나는 거의 ‘슈스케’ 나간 심정이었는데? (웃음)

정휘_ 그러니까 나는 노래를 안 하려고 하는데, 형은 옆에서 “와, 프로는 다르다!”면서 계속 칭찬하고.

이홍내_ 심지어 휘는 기타를 치면서 노래하잖아. 쉬운 일이 아니거든. 연기하면서 잠깐 잊었던 거다. 얘가 유명한 뮤지컬 배우라는 걸.

정휘_ 나 공연할 때 보러 와라. (웃음)

ⓒ이영진

두 배우도 인물만큼이나 치열한 20대를 보냈을 것 같다. 배우가 꿈이었던 이홍내 배우는 모델로 일을 시작했고, 정휘 배우는 본래 꿈이 가수였다고.

이홍내_ 여기서 정정을 해야겠다. 서울에 처음 왔을 때, 모델 에이전시에 들어간 건 사실이다. 근데 회사에 소속된 2년 동안, 모델로 일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프로 모델로서는 너무 부족한 상태였고, 차라리 모델 지망생이었다고 말하는 편이 적절하다. 모델에서 배우가 됐다고 말하는 건, 왕성하게 활동하는 다른 모델 출신 배우들에게 실례라고 느껴진다.

정휘_ 나도 정정하고 싶다. 노래를 좋아해서 중학생 때 가수를 꿈꾸기는 했지만, 어쨌든 예고에 진학한 후 연기를 접하면서 배우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가수를 포기하고 배우가 된 것이 아니라, 배우가 되고 싶어서 꾸준히 노력했다. 

 

과거 기사에는 아이돌을 꿈꿨다는 이야기도 있어서.

정휘_ 그러게, 너무 와전됐다. (웃음)

이홍내_ 나도 그 기사 봤다. 근데 경산에서 휘처럼 생겼으면, 연예인 하라는 말을 많이 들었을 거다. 

정휘_ 아무래도 시골에서 자랐다 보니. 서울 와서 현실이 그리 녹록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이홍내_ 나는 고향에 있을 때도 들어본 적이 없다. “네가? 배우를?” 이런 반응이었지. (웃음) 

 

그것도 놀랍다. 배우라는 꿈은 어떻게 갖게 됐나.

이홍내_ 어찌 보면 하늘이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나는 하고 싶은 것도, 할 줄 아는 것도 딱히 없었다. 남보다 탁월한 게 없는, 모든 면에서 보통인 애. 근데 영화를 엄청나게 좋아했다. 동네가 워낙 시골이어서 극장도 없었다. 주말마다 도시락을 싸서 비디오방에 갔다. 대여섯 편을 보고 저녁 9시가 되어서야 비디오방을 나왔다. 그때는 대학에 연극영화과가 있다는 것도 몰랐고, 연기학원을 본 적조차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대학에 입학했는데, 바로 자퇴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저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그때부터 프로필 돌리고 오디션 보면서 하나씩 시작했다. <메이드 인 루프탑> 시나리오를 읽고 김조광수 감독님 찾아가듯, 일단 부딪혔던 거다.

정휘_ 형이 진짜 뜨거운 사람이다. 곁에 있으면 열정이 느껴진다.

 

성격 나온다. 아무 연고도 도움도 없이 ‘맨땅에 헤딩’했을 텐데, 서럽진 않았나. 

이홍내_ 서럽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다. 내 친구들과 선배들, 아직도 맨땅에 헤딩한다. 지나온 시간 모두 애틋한 추억이고, 계속 연기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물론 20대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웃음) 다만, 그때나 지금이나 마음가짐에는 변함이 없다. 예전에는 출연해도 몽땅 편집되거나 등이나 어깨만 나오기 일쑤였다. 그래도 매 작품에 최선을 다했고, 대사 한 줄 받으면 며칠씩 고민하며 준비했다. 어떤 작품이나 역할이 특별하다기보다는 내가 거쳐온 과정 자체가 특별한 것 같다. 왜 포기하지 않았는지 생각해보면, 결국 답은 하나다. 재밌어서. 지금 인터뷰하는 것도 그렇다. 다른 영화인의 기사를 방에 붙이던 애가 몇 년 후에 배우로 인터뷰할 줄 누가 알았겠나. 앞으로도 재밌는 일이 많이 생길 것 같다.

ⓒ이영진

정휘 배우가 왜 뜨거운 친구라고 말했는지 알겠다. (웃음) 정휘 배우는?

정휘_ 예고 진학 후, 교내 공연에 참여하면서 연기에 흥미를 느꼈다. 홍내 형과 비슷하다. 대학에 들어갔지만 바로 나왔고, 군대 다녀온 다음에는 무작정 부딪히는 식이었다. 사실 배우가 되고 싶다고 처음 생각했을 때, 가장 하고 싶은 건 영화였다. 필름 메이커스에서 오디션 소식을 찾아봤고, 단편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다만 영화나 드라마의 경우, 공개 오디션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연기를 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연스레 공연 오디션을 많이 봤다. 덕분에 연극과 뮤지컬을 계속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군대가 일종의 계기였다. 그때 연기를 향한 열망이 엄청나게 커졌다. 

이홍내_ 맞다, 나도 그랬다.

정휘_ 불침번 설 때마다 속으로 되새겼다. 나가면 연기해야지, 포기하지 말고 진짜 열심히 해야지. 이번에 필모그래피를 정리하다가 알았는데, 2년마다 영화를 하나씩 찍긴 했더라. 단역이든 조연이든, 역할을 가리지 않고 꾸준히 연기해왔다는 사실에 만족한다.

 

영화를 향한 애정이 느껴진다. 이홍내 배우는 좋아하는 배우의 인터뷰를 오래된 순으로 정렬해서 읽는다고.

이홍내_ 벽에 기사를 한가득 붙여두기도 했다. 특별히 어떤 말이 좋아서라기보다는, 그냥 그렇게 해놓으면 영화인이 될 것만 같았다. 당장은 연기할 기회도 없고, 영화 근처에도 못 가고 있지만.

정휘_ 아, 어떤 기분인지 안다.

이홍내_ 경제적으로 부족했어도 잡지는 꼬박꼬박 사서 읽었다. 거기에 돈을 쓰는 건 아깝지가 않았다. 그런 나에게 스스로 만족했던 것 같다. (웃음)

 

그때가 언제인가.

이홍내_ 연기하러 서울로 올라왔을 때. 20대를 그렇게 보냈다.

 

30대는 어땠으면 좋겠나. 

이홍내_ 겁내지 않기를 바란다. 책임감과 더불어 부담감이 조금씩 생기는 시기여서 스스로 경계하고 있다. 좀 더 안정적인 길을 선택해야만 할 것 같은 순간이 찾아오는데, 그러지 않으려고 한다. 끊임없이 도전하고, 그 과정을 소중히 여기면서 30대를 보내고 싶다.

정휘_ 나도 20대에는 한 ‘뜨거움’ 했다. (웃음) 욕심 많고 의욕만 앞섰다. 친구들은 그때 내 눈에 독기가 가득했다고 하더라. 성공하겠다는 생각으로 앞만 보고 달렸다. 머리가 깨지든 말든, 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맨땅에 헤딩했지. 이제 좀 여유로워지고 싶다. 앞만 보고 달리는 게 아니라, 가끔 옆도 돌아보고 나와 함께 가는 사람도 챙기길 바란다. 지금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 <메이드 인 루프탑>처럼 멋진 기회가 또 올 거라고 생각한다. 

 

지난 4월 첫 번째 공연을 올린 ‘원승휘프로젝트’(이지원 연출가와 홍승안, 정휘 배우가 2020년 결성한 창작 프로젝트)는 순항 중인가.

정휘_ 마냥 순조롭다고 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공연 제작이라는 게 열정만으로는 어려운 일이더라. 금전이나 실무 등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지만, 대충 하고 싶지는 않다. 다행히 그런 부분에서 친구들과 마음이 잘 맞는다. 열심히 준비해서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 지금은 도약하기 위해 잠시 심호흡을 하는 시간이다.

이홍내 ⓒ이영진
정휘 ⓒ이영진

창작자로서 어떤 갈증을 느꼈나.

정휘_ 공연계의 시장 흐름이나 관객이 추구하는 방향을 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술적 가치관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설령 관객에게 잘 팔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재미있고 행복하게. 말은 이렇게 하는데, 나도 진짜로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저지르고 나니 주변에서도 반응이 극과 극이다. 응원한다, 아니면 미친 거 아니냐. 그래도 응원이 더 많다. 우리가 좀 기특한가 보다. (웃음)

이홍내_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지. 

 

드라마와 뮤지컬 등 다양한 매체에서 활동 중이다.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영화만의 매력을 꼽는다면.

정휘_ 공연은 무대 전체를 관람하는 매력이 있다면, 영화는 확실히 섬세한 작업이다. 눈빛이나 눈가의 떨림 하나하나가 영화에서는 크게 작용하지 않나. 배우로서도 표현력이 넓어지는 느낌이다.

이홍내_ 영화는 내게 제일 친한 친구이자 탈출구였다. 비디오방에서 뉴욕과 할리우드를 알았고, 파리와 서울을 구경했다. 아직도 기억하는 짜릿한 순간이 있다. 중학교 2학년 때 선생님이 영화를 틀어줬는데, 누가 “저 배우는 누구야?”라고 물어봤다. 선생님도 모르고, 다른 학생들도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그때 나 혼자 “덴젤 워싱턴!”이라고 외쳤다. 지금은 영화 제목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느꼈던 짜릿함은 여전히 생생하다. 아무도 모르고 나만 아는 것, 그걸 친구들 앞에서 떳떳하게 알려주는 기분이 좋았다. 영화를 좋아하고 즐겨 본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약간 ‘덕후’ 같은 마음으로 영화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정휘_ 나도 비슷하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 고전영화, 예술영화를 틀어줬거든. <자전거 도둑>(비토리오 데 시카, 1948) <커피와 담배>(짐 자무쉬, 2003) 같은 작품들. 

이홍내_ 난 그런 건 힘들어했다. (웃음) 

정휘_ 나도 재미는 없었다. 근데 일반적으로는 잘 모르는, 나만 아는 영화가 생긴 것 같아서 좋았다. 괜히 어린 마음에 ‘예술이란 저런 거야’ 생각하기도 하고. 

 

둘이 ‘영퀴’하면 재밌겠다. (웃음) 

이홍내_ 마이너 취향일 것 같지만, 블록버스터도 엄청나게 좋아한다. 나는 시기마다 파고드는 분야가 조금씩 달라진다. 중학교 때는 배우를, 이후에는 감독을 팠다. 한참 장르별로 찾아보던 시기도 있었다. 지금은 다큐멘터리를 좋아한다. <메이드 인 루프탑>을 찍을 때도 다큐멘터리를 많이 봤다. 애니메이션도 좋아하고, 진짜 가리지 않고 본다. 최근에는 <미나리>(정이삭, 2020)를 재밌게 봤다. 

정휘_ 오, 나도 <미나리> 좋았다. 잔잔하면서도 울림이 크더라. 사실 한국영화를 보면서 대사 외우는 게 취미 아닌 취미다. 친구랑 대화하다가 상황에 맞는 영화 대사를 툭 던지면, 친구도 아무렇지 않은 척 다음 대사를 잇고. (웃음) 그렇게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통하는 재미가 있다.

 

차기작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나. 이홍내 배우는 천명관 감독의 <뜨거운 피> 개봉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이홍내_ 곧 새로운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다. 영화와 드라마를 촬영하는 중이고, 지금과는 또 다른 열기가 있을 테니 기대해도 좋다.

정휘_ <와일드 그레이>를 마친 후, 8월부터 석 달 동안 <메리셸리>라는 창작 뮤지컬을 공연할 예정이다. 아직 정해진 작품은 없지만, 좋은 영화로 또 관객과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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