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철은 “타고난 이과생”이었다. 어릴 적부터 기계를 잘 다뤘고 꿈은 로봇 과학자였다. 하지만 80년대 후반, 재단 비리로 얼룩진 상문고등학교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그는 돌연 진로를 수정했다. “내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말해야 한다는 마음이 컸죠.” 당시 정윤철은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장산곶매의 <오! 꿈의 나라>(1988)를 인상깊게 봤고, “나도 영화만 만들면 영사기를 들고 다니면서라도 사람들한테 보여줄 수 있겠다는 망상 아닌 망상”을 품었다. 그렇게 정윤철은 “후천적 영화학도”로 변신했다. 부모의 반대를 물리치고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입학했지만, 막상 대학에서는 영화 공부보다 서클 활동에 열중했다. 교내 방송국에서 16mm 카메라를 들고나와 온갖 집회를 쫓아다녔고,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 현장을 촬영했다. 6월 1일(화)부터 6월 15일(화)까지 인디그라운드(www.indieground.kr) 온라인 상영관에서 공개되는 단편 <기념촬영>(1996)은 성수대교 붕괴 사고로 친구를 잃은 주인공의 기억에 접속한다. 한국사회의 폐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이 작품에서 청년 정윤철은 영화를 매개로 세상과 소통할 방법을 고민한다. 다급하고 절박했던 그때 그 마음을 직접 캐물었다.
감독만큼 영화도 나이를 먹었다. 다시 보는 <기념촬영>은 어떤 느낌인가.
자주 꺼내 본다. 내가 평생 책임져야 할 작품이다. 내 대표작이라는 생각도 든다. 장편도 여럿 만들었지만 무인도에 딱 한 편만 가져간다면 <기념촬영>을 고르겠다. 제 자랑으로 듣겠지만, 지금 봐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사회적 메시지를 강요하지 않으면서 개인적인 이야기로 잘 풀어냈다. 모든 것이 잘 맞아떨어진 결과다. 그동안 연출한 다른 작품을 보면 ‘왜 타협했지? 왜 못했지?’ 하며 아쉬운 점이 눈에 먼저 들어오는데, 이 영화는 아니다. 다시 찍어도 이렇게는 못 찍을 것 같다.
분신처럼 여길 줄은 몰랐다. (웃음)
진짜 나다운 작품이다. 내 자식이구나 싶다. 부족하거나 모자라도 자식이지만, <기념촬영>은 자랑스러운 자식이다. 오래된 영화 같지 않다. 생존력이 강한 이유가 있다. 당시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사고 공화국이지 않았나. 1994년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1995년 삼풍백화점이 붕괴했다. 같은 해에 대구 상인동 가스 폭발 사고가 있었고. 이를 연달아 목격하고 참담해했던 내 시선이 영화에 많이 담겨 있다.
<기념촬영>을 만들었을 당시 25세였더라.
영화를 하고 싶은 여느 20대와 똑같았다. ‘나한테 소질이 있을까?’, 거듭 자문하던 시기였고. <기념촬영> 전에 찍은 단편이 있다. <생일>이라고, 삼풍백화점 사고로 죽은 여동생 생일에 오빠가 위령소를 찾아 생일파티를 열어주는 이야기다. 그때 서초동에 살았다. 정말 아찔했다. 내 어머니도 사고 당일 삼풍백화점에 다녀오셨다. 무작정 학교에서 카메라를 들고 나와 폐허가 된 사고 현장을 찍었다. 촬영은 마음껏 했는데, 만들고 보니 무게감에 짓눌려서인지 나답지 않았다. 엄숙하고 느린, 당시 유행하던 아시아 리얼리즘 문법에 치우친 영화가 됐다. 주변에서도 재미없다고 하고. “뭔지는 알겠는데, So what?” 그런 반응. <기념촬영>을 만들 때는 개인의 내면을 파고들려고 했다.
사고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주인공이 대학생이 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인물의 나이 설정에 관해서도 고민했던 바가 있을 텐데.
삼풍백화점은 우리 동네였고, 성수대교는 당시 재학 중이던 한양대학교 바로 옆이었다. 왕십리에서 택시 타고 넘어갈 때 늘 이용하던 다리였다. 가까운 무학여고도 오며 가며 지나쳤고. 당시 무학여고 학생들이 많이 죽었다. 항상 보던 애들이 그렇게 다치고 떠나는 걸 보면서 가슴이 아팠고, 자연스레 학생을 주인공으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념촬영>으로 제4회 서울단편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과 시네마테크상을 받았다. 당시 신인 감독을 발굴하고 소개하는 중요한 영화제였는데.
본선만 올라가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수상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 영화가 관객에게 가 닿을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그걸 알아야 이 어려운 길을 계속 가지 않겠나. (웃음) 지금처럼 인터넷이 활성화된 때도 아니고, 영화제가 관객과 만나는 유일한 창구였다. 게다가 서울단편영화제는 극장을 대관해서 상영했기에 당시 단편영화 만드는 이들한테는 가장 큰 로망이었다. 스크린으로 본 나의 첫 영화가 <기념촬영>이다. 삼성영상사업단이 투자해서 상금도 지금보다 훨씬 많았다. 당시 최우수작품상 상금이 2천만 원이었으니 요새 물가로 계산하면 거의 5-6천만 원 아닌가. <간과 감자>를 만든 송일곤 감독이랑 공동 수상하면서 상금을 절반씩 나눠 가졌지만. (웃음) 그래도 엄청나게 큰 돈이었다. 덕분에 대학원도 마쳤고. 1회 수상자가 임순례 감독, 2회는 김본 감독, 3회는 정지우 감독. 새로운 감독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면서 유의미한 성과를 냈는데, 얼마 못 가 IMF가 터지면서 삼성영상사업단이 해체되고 영화제도 없어졌다.
1990년대는 한국영화 산업의 구조적 변화가 시작되는 때였다. <기념촬영>이 제작된 1996년에는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기도 했는데.
정말 바글바글했다. 남포동 골목에 옛날 극장 서너 개가 쭉 있었다. <시네마 천국>(쥬세페 토르나토레, 1988)에 나오는 것처럼 사람 냄새 나는 분위기였지. 약속할 필요도 없이 그냥 앉아 있으면 영화 하는 사람들 다 만났다. 요즘에는 영화제 가면 누구는 무슨 호텔, 누구는 어디 모텔 하는 식으로 계급이 나뉘지 않나. 그때는 전부 한곳에 모이니까 오히려 민주적이었다. (웃음) ‘나도 여기에 출품하고 싶다’ 하는 생각도 하고, 이후에 한국영화가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열정도 많이 생겼다. 1990년대 말이 일종의 태동기였다. <쉬리>(강제규, 1998)가 히트를 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변화가 시작됐으니까. DJ 정부 또한 영화계를 많이 밀어줬고.
<기념촬영>을 만들 무렵,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홍상수, 1996) <초록 물고기>(이창동, 1997)를 비롯해 많은 신인 감독들이 새로운 영화를 들고 나왔다. 당시 감독에게 자극을 준 영화 혹은 영화인이 있다면.
홍상수 감독님의 영화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한국에서도 이런 영화가 나오는구나 싶었다. 앞서 (1993년에) 공개된 이정국 감독의 <부활의 노래>(1990)도 떠오른다. 검열이 심의로 바뀌면서 뭔가 시도해보자는 분위기가 문화계에 생겨났고, 독립영화도 장편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이어졌다. 당시 나는 사회 참여적인 미국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 올리버 스톤이나 코스타 가브라스처럼 사회적 메시지를 장르 영화로 풀어낸 감독을 좋아했다. 특히 마틴 스콜세지에 경도됐다. 사실 난 영화광은 아니다. 봉준호, 박찬욱 감독과는 결이 좀 다르지. (웃음) 고등학교 때까지 이과생이었고, 애초 연극영화과를 간 것도 사회적 메시지를 풀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다. 내가 상문고등학교를 나왔거든. <두사부일체>(윤제균, 2001)와 <말죽거리 잔혹사>(유하, 2004)로 두 차례나 영화화된 문제적 학교 말이다. 중학교 때까지는 영화도 많이 안 봤다. 그래 봤자 <천녀유혼>(정소동, 1987) 정도? (웃음) 뒤늦게 영화를 찾아본, 말하자면 후천적 영화학도인 셈이다. 대학에서도 학과 생활보다 서클 활동에 열중했다. 아무도 내가 영화를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과에는 얼씬도 안 하고 학점은 ‘개판’이었으니까.
동아리는 뭐였나.
학교 TV 방송국. 전대협과 한총련이 주최한 집회가 정말 많았다. 나름 영상으로 싸우자는 마인드여서 집회 가서 촬영하는 것이 일이었다. 다녀오면 편집해서 영상 만들어주고. 그러다 보니 학과 공부에는 소홀했지만, 의도치 않게 편집과 촬영을 익히게 됐다. 그러다 문득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지?, 진짜 영화감독이 될 수 있나?, 이런 고민이 들었고. 단편을 딱 세 편만 만들어보자고 결심했다. 세 번 해서 안 되면 접을 작정이었다.
누구와 만들었나. 당시 어떻게 팀을 꾸렸는지 듣고 싶다.
한양대 영화과 후배들과 친구들 몇 명을 모았다. <목포는 항구다>(2004) <화려한 휴가>(2007) 등을 연출한 김지훈 감독이 현장에 와서 좀 도와줬고. 아, 캐스팅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MTM이라는 보조 출연 업체에 가서 직접 오디션도 봤다. 실은 주인공으로 나오는 배우가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다. 그해 여름에 성수대교가 재개통했다. 자료화면부터 미리 찍어놓고, 드라마 촬영은 가을에 했다.
성수대교 도로 표지판을 교체하는 장면도 나온다.
구청에 연락해서 언제 표지판을 떼는지 물어보고 약속을 잡았다. 나도 집요했지. 영화를 찍는다고 하니 구청 직원이 교체 날짜와 시간을 알려주더라.
세련된 편집에 놀랐다. 필름 편집으로 그만큼 만들어내기 어려웠을 텐데.
필름으로 찍고 디지털 편집을 했다. 당시 파이널 컷 프로의 조상 격인 아비드라는 편집기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는데, 내가 활동하던 서클에서 아비드를 구입했다. 충무로에서도 그걸 사용하지 않았을 때니까 디지털 편집으로는 <기념촬영>이 한국 최초였을 거다. 당시 한국영화는 할리우드에 반발하는, 일면 교조주의적 흐름을 따랐다. 독립영화는 느리게 편집해야 하고 클로즈업도 없어야 한다는 식이었는데, 나한테 맞는 옷은 아니었다. 트렌드를 거부하되 도그마를 깨고 내 방식대로 가보려 했다. 덕분에 “컷이 저렇게 빠른 단편영화도 있다”며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운드도 돋보인다. 음악과 더불어 소녀들의 허밍, 영어 단어를 외우는 속삭임, 자동차 경적, 거리 소음 등을 섬세하게 조율했고, 후반부에는 모든 소리를 차단하며 환상적인 순간을 만들어낸다.
후시 녹음이지만 동시 녹음처럼 느껴졌으면 했다. 사운드에만 한두 달을 소요할 정도로 신경을 많이 썼다. 당시 16mm 작품이나 단편영화에서 사운드는 그냥 넘어가는 부분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녹음실에 갖고 가면 진짜 대충해줬거든. 10트랙을 써서 리코딩한다는 건 전문 음반사에서나 가능한 일이었고, 단편영화에서는 딱 2트랙이면 끝이었다. 사운드 효과랑 대사. 그마저도 하루 만에 다 끝내야 했는데, 종일 혼나면서 하는 거다.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아비드로 직접 멀티 트랙 작업을 했다. 여러모로 아비드라는 장비가 없다면 못 나올 영화였지. (웃음)
이번에 인디그라운드에서 상영하는 정지우 감독의 <생강>(1996)에서도 음향을 담당했더라.
그것도 내가 멀티트랙 작업을 해줬다. 아비드 샀다는 소식을 듣고 정지우 감독이 찾아왔다. 임필성 감독의 <소년기>(1998)는 내가 사운드도 맡고 편집도 해줬다. 그해 겨울에 시작해서 봄까지 거의 석 달 가까이 작업했을 거다. 심지어 스테디캠 촬영까지 했다. (웃음)
<기념촬영>에서도 직접 촬영했다. 사고 장면을 노출하지 않는 점, 방에서 울고 있는 학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주춤하며 물러나는 카메라 등 ‘찍는 윤리’에 관한 고민이 느껴지는 부분이 많다.
<생일>을 만들면서 배운 바가 있었다. 그때는 사고 장면을 워낙 많이 찍었던 터라 어떻게든 활용하고 싶었다. 근데 욕심만큼 집어넣었더니 오히려 인위적으로 느껴지더라. <기념촬영>에서는 사고 장면은 최대한 덜 보여주고 감정의 파문에 집중했다. 촬영 윤리를 깊이 생각했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조심스러운 태도가 만들어졌던 것 같다. 누군가의 내밀한 기억을 파고드는 영화다 보니 조심히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뒷모습은 내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요소 중 하나다. <좋지아니한가>(2007)도 그렇고, <말아톤>(2005)도 엄마의 뒷모습으로 시작하지 않나. 뒷모습을 좋아한다. 나는 못 보지만 나의 진실이 담겨 있을 테니까. 뒷모습이 주는 고유한 감정도 있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기념촬영>에는 뒷모습부터 기억이라는 주제까지 내 장편영화를 구성하는 주요 메타포가 담겨 있다.
죽은 친구들을 위해 ‘기념촬영’ 하는 주인공은 감독의 마음을 직접 대변한다.
당시 살아남은 학생이 뭘 하고 싶을지 생각해봤다. 성수대교가 재개통한다는 뉴스를 보고 친구들을 떠올릴 때 마음이 어떨까. 새 다리가 완공되는 순간, 과거의 사고는 잊혀지리라 직감하며 무척 쓸쓸할 것 같았다. 친구들과 세리머니를 하고 싶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기념촬영이라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기쁨도 슬픔도 아닌, 잊지 말자는 의미의 기념촬영이다. 재개통한 성수대교에는 역시나 위령비 하나 없었다. 건너편 뚝섬 쪽에, 사람들이 접근하기도 어려운 숲속에 위령비를 놓더라. 비석이나 명패 세우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삼풍백화점도 마찬가지다. 건물이 무너져서 사람이 600명 넘게 죽었는데, 집값 떨어진다고 저 멀리 양재 시민의 숲에 위령비를 세웠다. 세월호도 안산에 기념관을 못 짓게 하고. 당사자가 아니면 정말 관심 없구나 싶고, 더 큰 문제는 국가 차원에서 교통정리를 못 한다는 거다. 그럼 비슷한 사고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사회적 재난이 유독 마음에 남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학생운동 비슷한 걸 했는데 그냥 다 안타깝더라. 매일 민주주의를 위해 어쩌고저쩌고하지만, 현실에서는 생존 보장조차 안 되니까. 인간의 기본권도 지켜지지 않는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그러다 보니 영화를 통해서 이 어처구니없는, 후진국 같은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여주겠다는 마음이 컸다. 애초 고등학생 때 영화로 진로를 선택한 이유도 그런 맥락이고.
왜 하필 영화였나.
원래 과학자가 꿈이었는데, 뭔가를 말하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기자가 될까? 선생님이 될까? 아님, 소설을 쓸까? 고민하다가 영화가 눈에 들어왔다. 영화는 기술과 예술을 결합한 분야이지 않나. 어릴 적부터 기계 만지기를 좋아했고, 중학생 때는 사진에도 취미를 붙였다. 무엇보다 영화는 많은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었다. 누가 안 틀어줘도 나 혼자 16mm 영사기를 들고 다니면서 상영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후 성수대교 붕괴 사고를 다룬 작품은 2010년대 들어서야 등장했다. <청포도 사탕: 17년 전의 약속>(김희정, 2012) <벌새>(김보라, 2019) 등을 봤나. 감독 입장에서는 어떻게 다가왔는지도 궁금하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을 제대로 다룬 영화가 거의 없다. 나도 책임감을 느낀다. <벌새>는 최근에 봤는데 흥미로웠다. 형식으론 새롭지 않은 성장 드라마지만, 주인공이 중학생이라는 점이 내겐 신선했다. 보통 중학생은 인간으로 안 치는, 고유한 개체로 존중하지 않는 대상이거든. <벌새>를 보면서 ‘영화계가 이걸 놓치고 있었구나’ 싶었다. 외롭고 고독한 주인공이 마음을 준 인물이 갑자기 떠나는 계기가 성수대교 사고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서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 아니었을까. <살인의 추억>(봉준호, 2003)도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내지 않고, 영화에서 사건을 해결해주지도 않는다. 범인이 아니라, 범인을 못 잡을 수밖에 없는 사회적 공기를 이야기하는 작품이니까. <벌새>에도 비슷한 맥락의 서브 텍스트가 있다고 봤다. 주인공이 상실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공기가 담겨 있다. 이런 영화들이 많이 나오면 좋을 텐데 아쉽다.
아직까지는 조심스러운 것 같다. 실제 사건을 픽션으로 만들어내는 일이 어렵기도 하고.
하기야 나도 <기념촬영> 시나리오를 쓰는 데만 6개월이 걸렸다. 당연히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사건에 접근하는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니까. 세월호 참사도 마찬가지다. 오멸 감독의 <파미르>(2018)처럼 사건 자체를 재현하는 게 아니라,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해봤다. 세월호 참사로 세상을 떠난 학생이 아프리카에 사는 애를 매달 후원하며 편지를 주고받았던 거다. 사고 후에 부모는 너무 큰 슬픔과 상실에 잠기는데, 문득 아들이 후원했던 애가 궁금해진다. 우리 아들과 교류했던 그 애는 도대체 누구인가. 이상하게 걔를 한번 보고 싶어서 아프리카로 간다. 그렇게 먼 곳에 사는 낯선 아이와 세월호 희생자의 부모가 만나는 거다.
이렇게 공개해도 괜찮나.
상관없다. 누가 좀 찍으면 좋겠다. (웃음) 어쨌거나 접근 방식을 달리 해야지, 사고를 직접적으로 파고드는 건 단편으론 불가능하다.
문학이나 미술 등에서 영감을 얻는 감독이 있고, 신문 사회면 기사를 스크랩하면서 이야기를 만드는 감독도 있다. 정윤철 감독은 후자겠지. (웃음) 사회적 이슈를 예민하게 관찰하고, 거기에 서정과 드라마를 녹여낸다.
그렇지. 나는 뉴스 쪽이다. (웃음) 영화를 시작할 때는 내 안에 서정이 있을까 싶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어렸을 때부터 감수성은 별로 없는데, 그래도 정은 많다. (웃음) 키우던 병아리가 죽으면 장례식도 치러주고. 지금도 고양이와 함께 살고. 한 작품 끝날 때마다 하나씩 데려왔는데 어느새 다섯 마리다. 얘들과 살면서 소통 방식을 배우고 부족한 감성도 채운다. 자식 낳으면 애 크는 걸 보면서 인생을 다시 산다고 하는데, 동물을 키우면 진화를 깨닫는 신기한 순간을 맞이한다. 인간이 왜 동물의 일부인지 알 수 있다. 동물마다 캐릭터가 전부 다르다. 같은 고양이인데 고통을 참는 방법도, 욕구를 표현하는 방법도 각양각색이다. 인간은 오죽하겠나. 나와 다르다고 고칠 수는 없겠구나, 하면서 상대를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상업영화 감독으로 데뷔한 후에도 <아빠의 검>(2017) <바이크 레이디>(2014) <알파 센타우리>(2010), <잠수왕 무하마드>(2006) 등 꾸준히 단편을 만들고 영화제를 찾는 드문 감독이다. 단편에 특별한 매력을 느끼나.
솔직히 단편이 체질에 맞는다. 단편이 100m 달리기라면 장편은 마라톤이다. 쓰는 근육이 다르다. 단편은 시 같다. 이미지를 던져놓고 관객이 메우도록 여지를 남겨 놓아야 한다. 단편만의 재미가 있기에 작업하면 늘 즐겁다. 장편은 흥행을 염두에 두니 부담스러운 요소가 많은데, 단편은 내가 통제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앞으로 더 하고 싶다. 장편을 좀 쉬고 단편만 수십 개 만들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요즘에는 유튜브라든지 창구가 다양하니까. 결국 시를 쓰는 사람과 소설을 쓰는 사람의 차이인데, 나는 시를 더 좋아하는 거다. 장편은 완성하고 나면 뿌듯하지만, 만드는 과정이 너무 힘들다.
속전속결하고 싶은 건가.
시나리오 작업이 굉장히 고되다. 남의 시나리오로 연출하면 좋을 텐데, 기회가 별로 없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9수 만에 고시 합격했다고 대단하다고 하잖아. 우리는 평생 고시 공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웃음) 지금까지 장편 4편을 찍었지만, 시나리오는 몇 편이나 썼겠나. 수십 편이다. 인생이 소모되는 느낌도 있다. 데뷔한 지 얼추 18년이지만 영화감독으로 산 시간은 3-4년쯤 될까. 꽃이 언제 피는지, 낙엽이 언제 지는지도 모르고 글만 쓰다 보면, 때때로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다. 동료들도 비슷한 부담감을 토로한다. 시나리오 좀 그만 쓰고 싶다고. 봉준호 감독도 아직 10편을 못 만들지 않았나. 과연 채울 수 있을까? 봉 감독이라면 채울 수 있겠지. (웃음) 근데 20편은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옛날에 임권택 감독님은 100편 넘게 만들었는데.
영화산업의 문제이기도 하다.
작가를 키우지 않고 제대로 대우하지 않은 탓이다. 시나리오 작가들이 전부 방송사로 가지 않았나. 시나리오 작가 중에 롤모델로 삼을 이가 없다. 이름을 알만한 시나리오 작가조차 없다는 게 한국영화의 문제이자, 제작자들이 가장 잘못한 부분이다. 그러니까 감독한테 다 뺏기는 거다. 이제 감독이 제작하잖아. 제작자가 작가를 관리하고 키웠다면 감독이 그렇게 못한다. 한 작품만 주세요, 하겠지. 지금 감독 입장에서는 본인이 쓰고 찍는데 왜 제작자가 필요하겠나. 한국영화는 작가 키우는 일에 올인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다른 콘텐츠 부문에 잡아먹힐 거다.
연출자로서 방향을 고민하는 시기일 거라고 짐작한다. 지금은 어떤 작품을 준비하나.
<대립군>(2017) 이후 시나리오를 서너 편 썼는데, 영화계 상황 등 여러 이유로 홀딩하고 있다. 최근에는 드라마도 퀄리티가 되게 좋아졌고, OTT도 있고. 굳이 영화만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도 든다. 좋은 프로젝트를 알아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