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뼘이라도 꼭 같이
<담쟁이> 우미화·이연(with 한제이)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0-10-28

담쟁이는 넝쿨 식물이다. 끝이 세 쪽으로 벌어진 잎은 심장과 비슷한 모양이고 줄기는 지치지 않고 덩굴손을 뻗는다. 조그맣게 틔운 이파리가 한여름 담장을 빼곡하게 채우는 모습은 활기차기도 하고 일면 애틋하기도 하다. 한제이 감독은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도종환, 「담쟁이」)라는 시구에서 사랑과 용기를 읽었다. 3년 전 시나리오 초고를 완성했을 때는 ‘담쟁이들’이라는 제목을 붙였지만 이후 ‘들’이라는 접미사를 들어냈다. 담쟁이는 그 자체로 집합명사이기 때문이다. ‘우리’나 ‘가족’이라는 단어처럼 말이다. 레즈비언 커플인 은수(우미화)와 예원(이연), 그리고 갑작스러운 사고로 엄마를 잃은 아이 수민(김보민)은 현실의 벽을 마주한 담쟁이 잎과도 같다. 세 사람은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 감싸 안으려 하지만, 사회라는 높은 벽은 그들을 가로막고 좀처럼 비켜나지 않는다. 데뷔작을 통해 묵직한 질문을 던진 한제이 감독에게 우미화와 이연은 더할 나위 없는 은수와 예원이었다. 가족으로 살아가기 위한 분투에서 두 배우는 각자의 방식대로 사랑과 용기를 실천하며 극의 중심을 이룬다. 어느새 영화 바깥에서도 자연스레 어깨를 두르고 손을 잡는 사이가 된 세 사람을 초대했다. 추억으로 남은 촬영 뒷이야기를 전하느라 웃음이 끊이지 않던 화기애애한 현장을 옮긴다.

 

 

두 배우가 눈앞에 있으니 자꾸 은수와 예원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된다.

이연_ 상관없다. 우리도 현장에서 그랬거든.

한제이_ 나는 촬영 마치고 나서도 한동안 못 빠져 나왔다. 배우들은 다음 작품을 준비해야 하니 본래 자리로 돌아가는데, 나는 편집하면서 매일 화면으로 은수와 예원을 봐왔으니까. 작업을 끝내고 다시 만났을 때는 ‘내 은수랑 예원이는? 다들 어디 갔어?’ 같은 느낌이었다. (웃음)

 

작업 후에도 돈독하게 지낸다고 들었다. 현장 분위기가 정말 좋았나 보다.

한제이_ 이 작품은 내 데뷔작이기도 하지만, 두 배우가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장편이기도 하다. 시작하는 마음이 잘 모였던 거 같다.

이연_ 다들 합심해서 열정적으로 임했다. 그런 에너지 덕분에 같이 만들어 나가는 영화라고 느낄 수 있었다.

 

우미화 배우는 연극 무대에 오랫동안 서오다가 2018년 무렵부터 드라마 <SKY 캐슬> <블랙독> 등에 출연했고, <담쟁이>를 통해 스크린으로까지 영역을 넓혔다. 시나리오 첫인상은 어땠나.

우미화_ 내가 활동하지 않은 영화라는 영역에서 이렇게 진중하고 좋은 작품으로 날 찾아주었다는 게 무척 고맙고 반가웠다. 난 <담쟁이>를 가슴 먹먹해지는 사랑 이야기로 읽었다. 우리 영화, 멜로잖아. (웃음) 은수와 예원의 사랑이 참 예뻐 보였고 그만큼 안타깝기도 했다. 출연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예정된 다른 작품과 촬영 일정이 겹쳤다. 아쉽지만 못하겠다고 고사했지. 감독도 많이 아쉬워하면서 다른 배역으로라도 나와 줄 수 있느냐고 묻더라.

한제이_ 수민이 엄마, 그러니까 은수의 언니 역할을 부탁드렸다. 근데 이후 선배님이 출연하신 연극을 보러 갔다가 마음을 바꿨다. 꼭 선배님과 해야겠더라. 결국 촬영 일정을 3개월 미뤄서 다시 캐스팅했다.

우미화 ⓒ이영진

전주국제영화제 상영 당시 진행했던 인터뷰에서 한제이 감독은 우미화 배우의 눈에 매료됐다고 말했다.

한제이_ 은수는 대사보다 눈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한다. 선배님 눈동자가 되게 깊다. 특별히 뭔가를 말하지 않아도 눈을 보면 풍부하게 채워지는 느낌이더라. 눈물이 고인 것처럼 눈망울이 항상 촉촉해서 슬퍼 보이기도 하고. 지금은 그런 느낌이 좀 사라지셨는데. (웃음)

우미화_ 아니, 나한테 자꾸 “선배님 우세요?”라고 묻는 거다.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이연_ 말씀은 이렇게 하시지만 사실 현장에서 자주 우셨다.

우미화_ 촬영 전에 눈물 한 번씩 빼고 들어갔지. 카메라 앞에서는 꾹 참고. (웃음) 처음 작품을 만난 순간부터 연기하는 내내 예원이를 떠올리면 마음이 갑갑해졌다. 둘한테는 현실의 벽이 너무 높지 않나. 얼마 전에 서포터즈 시사회를 열었는데 그곳에서도 울었다. 관객 한 분이 영화에 나오는 시 「담쟁이」 를 듣고 싶다고 하셨거든. 시를 읽다 보니 별 수 없이 눈물이 나더라.

 

우미화 배우는 연기를 오래 해온 만큼 작품을 보는 눈도 날카로우리라 짐작한다. 특히 연극은 같은 작품을 여러 번 실연하면서 작품의 전체 구조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능력을 기르지 않나. <담쟁이>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이유는 뭐였나.

우미화_ 연극 작업에서는 캐릭터보다 작품이 가진 힘을 중요하게 본다. 나무를 보고 나서 서서히 숲으로 가는 배우가 있는가 하면, 나처럼 숲을 먼저 바라본 다음 나무에 집중하는 스타일도 있는 거 같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 들여다보고 그걸 기준으로 작품을 선택한다. 무대 연극은 일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기보다는 다양한 시각과 관점을 통해 일상에 새롭게 접근한다. 어떻게 하면 일상을 다른 방식으로 보여줄 수 있을지 고민하고, 이 과정에서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도드라지게 만든다. <담쟁이>를 만났을 때도 은수라는 캐릭터를 상상하기 전에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먼저 살펴봤다. 흔히 성소수자를 일상적으로 접하기 어려운 존재라고 여기는데,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동안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지점에 관해 보여줄 수 있다면 너무 좋을 거 같더라. 그런 작품에 내가 참여한다면 더 좋고. (웃음)

<담쟁이>
<담쟁이>

캐릭터에 관해서도 듣고 싶다. 배우들은 각각 은수와 예원을 어떤 사람, 어떤 연인이라고 생각하나.

우미화_ 사실 연기할 때는 고정적인 상을 정해두지 않았다. 미화의 은수가 연이의 예원을 만났다고 생각하거든. 현장에서는 예원이가 연이 같고 연이가 예원이 같았다. 연이는 어때?

이연_ 무슨 말인지 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촬영 전에 선배님과 자주 데이트하면서 대화를 많이 했다. 선배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라든지 선배님에게서 느낀 분위기 같은 것들이 머릿속에 이미 입력되어선지 딱히 ‘은수는 이럴 거야’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한제이_ 그러게, 나도 생각해본 적이 없네. 2회 차까지는 두 사람이 딱 붙는다고 느끼지 못했는데, 욕조에서 목욕하는 장면을 촬영한 다음부터는 자연스럽게 둘이 은수와 예원으로 보였다. 어떤 분위기나 감정을 표현해달라고 요청할 필요가 없었다.

우미화_ 나는 그때 좀 불안하기도 했지.

한제이_ 다 좋다고 해서? (웃음)

우미화_ 그래, 감독을 믿지만 내가 뭘 하든 계속 “오케이”라고 하니까. 배우가 한 인물을 만났을 때 스스로 채워야 하는 부분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생각하는 게 정답이 아닐 수도 있지 않나. 감독이 다른 방향으로 가자고 하면 그렇게 했을 텐데, 별 말이 없으니 오히려 ‘진짜 맞나?’ 싶었다.

한제이_ 진짜 좋았다. 프리 프로덕션 과정에서 여러 차례 이야기를 나눈 다음이라 가능했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우미화_ 하긴 우리가 공유한 감정을 현장에서도 쭉 밀고 간 덕분에 지금의 결이 만들어진 거 같다. 결이라는 건 사실 순간순간이 모여서 이뤄지는데, 현장에서 조금씩 표현을 달리 했다면 지금과는 또 다른 영화가 됐을 거다.

한제이_ 지금의 결이 좋다.

한제이 ⓒ이영진

영화 속 은수와 예원의 집에 함께 찍은 사진이 여러 장 붙어 있더라. 촬영 전에 데이트하면서 틈틈이 찍은 건가.

이연_ 맞다, 틈만 나면 선배님을 찾아갔다. 괜히 연락해서 “선배님, 저 대학로 근처인데 뭐하세요?”라고 물어보고. (웃음) 둘이서 낙산공원에서 산책도 하고 길상사에 다녀오기도 했다. 개봉 앞두고 ‘인생네컷’ 포스터를 공개했는데 그 사진도 촬영 전에 찍은 거다.

한제이_ 처음으로 다 같이 만난 날이었다. 리딩을 끝내고 “술 좋아하세요?”라고 조심스럽게 물었는데 두 분 눈빛이 반짝반짝하더라. (웃음) 뒤풀이하면서 남겼던 사진을 모아 포스터를 만들었다. 촬영 중간에 휴차가 생겼을 때 부산에 놀러가서 찍은 사진도 있다. 미화 선배님이 공연을 하셨는데, 함께 연극도 볼 겸해서 여행하는 기분으로 갔다. 1박 2일 동안 같이 먹고 자고 했지. 그때 선배님이 바닷가 모래사장에 ‘연애인’이라고 쓰셨는데, 그게 이연 배우 팬클럽 이름이 되었다.

우미화_ 둘이서 나를 하도 ‘연예인’이라고 놀려서 연예인 아니라고, 나는 연이 애인이라고 했거든. (웃음) 워낙 연이를 자주 만나다 보니 주변에서는 그만 좀 만나라고 하더라. 촬영 전이며 휴차며, 심지어는 촬영 끝나고 나서도 종종 봤으니까.

이연_ “너네 끝났잖아!” 같은 반응인 건가.

한제이_ 이제 개봉이니까 다시 시작이지, 뭐. (웃음)

 

자연스러운 부부 ‘케미’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이연_ 신기하게도 실제 성격은 극과 반대다.

한제이_ 시나리오에서는 예원이가 ‘댕댕이’ 같은 느낌인데, 실제로는 연이가 좀 더 차분하다.

우미화_ 대신 내가 재롱을 많이 떨었지. (웃음)

이연_ 나는 무뚝뚝한 구석이 있는 편이다. 선배님은 차가운 이미지 때문에 다가가기 어려워 보이지만, 알고 보면 정도 많고 무척 다정한 분이거든.

우미화_ 사람들이 이면을 못 보고 말이야! (웃음) 그동안 연극이나 드라마에서도 대개 전문직을 맡았다. 선생님 역할도 <담쟁이>를 포함해서 여러 번이었다. <블랙독>에서는 수학 선생님이었고, 내년 1월에 올리는 연극에서는 심리학과 교수 역이다.

한제이_ 지적인 느낌이 있어서 그렇다. 근데 사실 선배님이 몸을 정말 잘 쓰시거든. <담쟁이>에서 휠체어를 사용할 때도 너무 금방 적응하셔서 일부러 못 타는 척 연기했을 정도다.

우미화_ 연극하면서 춤도 추고 몸 쓰는 훈련을 오래 했다. 나는 스스로 ‘체육 배우’라고 자부한다. 은수가 휠체어를 타고 가다가 넘어지는 장면이 있는데, 시사회에 왔던 후배가 그때 얼굴을 부딪치지 않았냐면서 걱정하더라. “왜 이래, 나 체육 배우잖아.”라고 대답해줬지. 부상 없이 잘 끝냈다.

한제이_ 그날 현장에 무술 감독님이 와 계셨는데, 딱히 디렉팅할 부분이 없다며 감탄하시더라. (웃음)

<담쟁이>
<담쟁이>

호흡과는 별개로, 부부를 연기한다는 점에서 톤 앤 매너를 고민했으리라 예상한다. 오래된 연인이자 한 집에 사는 가족다운 친밀감을 드러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영화에서 둘러대듯 “사촌언니”와 “친한 동생”처럼 보이지 않도록 적절한 긴장감을 줘야 했다.

이연_ 스킨십에 과한 긴장이 담길까 봐 걱정스러웠다. 같이 산지는 3-4년 정도 되었고 연애는 그보다 더 오래했다는 설정이었다.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처럼 보이거나 ‘썸’을 타는 느낌으로 가닿아서는 안 됐다. 터치 하나하나에 신경 쓰다 보면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이상해지리라 판단했다. 그런 이유로 촬영 전부터 꾸준히 만나면서 익숙해지려고 했고, 서로 스킨십도 서슴없이 하려고 노력했다.

우미화_ 연이가 스킨십을 많이 하더라. 나중에는 조몰락거리지 좀 말라고 그랬지. (웃음) 생각해보면 가족은 정말 편안한 공동체 아닌가. 부부 사이에서 중요한 건 설렘이 아니라 ‘내 편’이라는 감각 같다. 우리는 한 집에서 생활하며 함께 사는 관계이지 거기서 연애를 하는 건 아니니까. 껴안고 뽀뽀도 하지만, 때로는 장난으로 헤드락을 걸 수도 있는 사이. 딱 그렇게 보이길 바랐다.

한제이_ 나이 차이 때문에 이들을 연인이나 부부로 인식하지 못하고, 이모와 조카 사이 정도로 지나치는 사람도 있을 거라 예상했다. 굳이 긴장감을 불어 넣을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아는 사람 눈에는 보일 관계이니까.

 

극중 은수가 자극을 주는 사람이라면 예원은 그에 반응하는 사람이다. 자연스레 처음에는 예원에게 감정을 이입하는데, 영화를 다시 보면 은수에게 마음이 가더라. 다만 은수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왜 이런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는지 직접 이야기하는 순간은 드물다. 예원은 은수의 속내를 헤아리느라 바빴을 듯하다.

우미화_ 은수가 아닌 우미화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이었다. ‘왜 이래야만 할까?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부딪치면서 함께 해결하려고 하면 좋을 텐데.’라고 생각했지. 초반에는 그런 지점을 놓고 감독과 길게 대화를 나눴다. 근데 어느 순간 은수가 했던 말을 곱씹게 되더라. 대사의 조각을 이어 붙이며 은수가 살아왔을 시간을 가늠해봤지. 은수가 예원에게 “사는 것만큼 중요한 거 없어”라고 말하지 않나. 어쩌면 은수에게 삶이란 버티는 일이 아니었을까 싶더라.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며 본인의 정체성을 자유롭게 드러내지 못하지만, 그렇게 견디면서 살아온 힘으로 어떤 결정을 내린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은수로서 감당하기 벅찬 큰 사고를 겪기도 했고. 예원을 향한 사랑이 부족하다기보다는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소화하고 다시 마주할 때까지 얼마간 시간이 필요했던 거 같다.

이연_ 예원은 사랑을 의심하지는 않았을 거다. 연기하는 동안 나도 그랬다. 사랑에는 변함이 없지만 우리를 둘러싼 상황이 뜻대로 흘러가주지 않았다. 그렇게 시시각각 변해가는 상황 때문에 사랑마저 변하지 않도록 더 노력했던 거 같다. 은수야 지금 당연히 힘들 테니 예원은 '나라도 잘해야 한다. 나까지 은수를 힘들게 하지 말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한제이_ 예원이 은수에게 딱 한 번 “우리 변하는 거 없지?”라고 묻는다. 예원이 불안감을 표출하는 장면인데, 그때조차 예원은 은수를 믿는다고 봤다.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까 봐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거듭 힘든 상황이 펼쳐지다 보니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던 거다.

이연_ 그때 난 속으로 직감했다. 은수 눈에 눈물이 왕창 고여 있었다고! (웃음) 아, 뭔가 일어나겠구나. 우리가 이전과 다름없이 마냥 행복할 수는 없겠구나. 그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가더라.

우미화_ 그래도 우리 한참 좋았잖아. 법원이 안 도와준 거지 우리는 노력했어.

<담쟁이>
<담쟁이>

지금 정말 은수와 예원의 대화 같다. (웃음) 영화에서 드물게 평화롭고 안전한 느낌을 주는 장면에는 꼭 물이 나오더라. 함께 목욕하는 장면이나 수민과 바다에 놀러가는 장면이 여운을 남긴다.

한제이_ 캐릭터의 이미지 설정과 연결되는 부분이다. 애초 예원은 물, 은수는 나무나 흙에 가까운 인물로 구상했다. 예원은 물처럼 흘러가고 변화하는, 포용력을 지닌 캐릭터다. 반면에 은수는 바닥에 뿌리를 깊게 내리는 인물이다. 안정적이고 강인하지만, 어떻게 보면 융통성이 없기도 하고 때로는 꺾이기도 한다. 바다에는 물과 흙이 모두 있지 않나. 목욕탕이나 욕실이 제한적인 공간이라면, 바다는 서로 다른 것들이 어우러질 수 있는 드넓은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는 바다가 그리움의 장소이기도 하다. 미래를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 순간만 놓고 봤을 때는 더없이 행복한 장면이라 바다에서 찍고 싶었다.

 

바다에서 촬영한 장면은 배우들에게도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을 듯한데.

이연_ “마음을 채우려면 산으로 가고 비우려면 바다로 가라”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바다에서 예원은 아무 일 없는 척하며 웃지만, 마냥 행복할 수만은 없었을 거다. 항해를 결정하는 사람은 은수다. 은수가 선택하면 예원은 받아들여야 하는데, 방향을 섣불리 예측하기 어려울뿐더러 예원은 곧 다가올 ‘암흑기’를 이미 직감하지 않았나. 예원에게는 바다가 슬픔의 장소인 거 같다. 고집을 비워내려고, 은수가 어떤 선택을 하든 감당해야 한다고 마음을 다독이는 시간이겠지. 이어지는 시퀀스에서 예원은 어딘지 모르게 붕 떠 있는 느낌을 준다. 슬픔을 티내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모든 행동이나 표정에 과장된 밝음이 묻어나더라. 연기하면서 그게 자연스럽겠다고 생각했다. 마음 밑바닥에 슬픔이 깔린 상태이니까.

우미화_ 은수는 오히려 미래를 가늠하기보다는 온전히 그 순간에 집중했던 거 같다. 사고 이후 매일 매일 숨 가쁘게 달리지 않았나. 현재에서 잠시 벗어나는, 은수를 쫓던 괴로움에서 풀려나 그저 먼 곳을 바라보는 순간이다. 가장 잔잔한 시간이자 마음 놓고 머물렀던 공간이어서 기억에 남는다. 현실을 전부 잊을 수는 없지만, 함께 바다에 가기로 했던 예원에게 약속을 지켜서 기뻤을 거다. 은수에게는 바다가 위로의 장소이지 않았을까 싶다.

이연 ⓒ이영진

영화 후반부에 은수는 집을 떠나며 예원에게 편지를 남긴다. 이 편지를 우미화 배우가 직접 썼다고.

우미화_ 지방 공연을 갔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썼다. 종이를 펼쳐놓고 한참이나 생각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결국 그 문장으로 편지를 시작했다. 두 사람은 서로 밉고 싫어서 헤어지는 게 아니지 않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순간을 떠올리니 막막했다. 예원도 힘들지만 은수도 못지않으리라 여겼다. 연이의 예원, 나의 은수로 만난 우리에 관해 썼다.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 시간이 정말 감사하고 행복했거든. 돌이켜보니 그런 기억이 가득해서 편지를 쓰면서도 눈물이 나더라.

이연_ 실제로 촬영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 편지를 읽지 않았다. 첫 테이크에 곧바로 머리가 띵 하고 울렸다. 글자가 눈에 제대로 들어올 리가 없는 상황 아닌가. 사부작사부작 이상한 말만 잔뜩 써놓고! (웃음) 그때까지 버텨온 게 순식간에 무너지면서 분노가 올라오더라. 편지도 편지이지만, 예원 입장에서는 통장을 발견하는 순간부터 화를 참을 수 없었을 거다. 그게 무얼 뜻하는지 아니까. 다만 감정은 감정대로 두되, 폭력적으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의연하게 받아들인다는 건 말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선을 넘는 행동을 할 것 같지도 않았다.

우미화_ 편지가 내용일지 상상해본 적도 없어?

이연_ 상상할 수가 없지. 선배님과 똑같다.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은수가 뭐라고 할지 전혀 가늠이 안 되더라.

한제이_ 미화 선배님은 일부러 다른 방에 숨어 계셨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예원의 시야에 은수가 자리하면 집중하기 어려울 거라면서.

이연_ 처음 모니터할 때는 뒤에 계신지도 몰랐다. 돌아봤더니 선배님도 막 우는 거다.

한제이_ 난 웃었다. 너무 좋았거든. (웃음)

우미화_ 우리가 괴로워할수록 감독은 기분 좋아 보이더라. 속으로 그랬지. 제이한테는 계획이 다 있구나. (웃음)

<담쟁이>
<담쟁이>

영화는 두 사람의 과거를 플래시백으로 보여준다. 은수는 국어 선생님이고, 예원은 ‘담쟁이’를 ‘담배쟁이’로 알아들을 만큼 공부에는 영 관심이 없는 학생이다. 둘이 어떤 과정을 거쳐 연인이 되었을지 상상해보면 예원의 끈질긴 구애가 그려져서 웃음이 나더라. 두 사람의 과거만큼 미래도 궁금한데, 몇 년 후를 담은 작품을 만들 생각은 없나.

한제이_ 전사는 배우들과도 공유했다. 예원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우연히 동네에서 은수와 마주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은수가 마음을 열기까지 꽤 긴 시간이 필요하지. 자세한 건 소설로 쓰려고 했는데.

이연_ 그럼 ‘영업 비밀’ 아닌가. (웃음)

한제이_ 후속작은 계획에 없다. 열린 결말로 끝맺은 이유는 은수와 예원, 그리고 수민이 함께 행복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굳이 미래를 확정하고 싶지는 않고, 다만 우리끼리 ‘과연 어떻게 될까?’라는 이야기를 나눈 적은 있다.

우미화_ 지금 예원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지만,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몇 년 후에 은수가 집으로 찾아갔을 때, 다른 여자가 등장할 수도 있는 거다. (웃음)

이연_ 선배님은 계속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랑이 영원할 거라고 장담하지는 마. 예원은 그러지 못할 수도 있어.”

한제이_ 은수는 그런 인물이다. 예원이 자신을 기다려주길 내심 바라면서도 아니라고, 현실은 꿈과 다르게 흘러갈 거라고 말한다. 어떤 관객은 예원을 두고 판타지에 가까운 인물이라고 말씀하시더라. 그렇게 사랑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인물이 어디 있냐면서.

이연_ 저 여기 있어요! (웃음)

 

생활동반자법이 제정되거나 동성혼 법제화가 이루어진 다음으로 시간적 배경을 설정한다면 어떤 드라마가 펼쳐질까. 어쩌면 그게 영화가 하고 싶은 말일 수도 있겠다.

한제이_ 세 사람이 다시 한 집에 모여 사는 그림이 떠오른다. 세상이 조금이나마 바뀌고 난 다음이라면 또 다른 이야기를 시작해볼 수 있겠지. <담쟁이>를 만들면서 배우와 스태프들과 “우리 영화를 공개했을 때, 차별금지법이나 생활동반자법이 기사에 한 줄이라도 나오면 성공이다”라는 대화를 나눴다. 그런 면에서 이미 목표했던 바를 이룬 것과 다름없다. 내가 보고 싶어서 시작한 작품이지만, 누군가에게 위안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나 역시 용기를 얻었다. 가족이라는 개념을 편협하게 바라보지 않으면 좋겠다. 가족은 생각보다 다양한 형태일 수 있고, 은수와 예원은 영화 속 인물인 동시에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들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 아끼며 살아가길 원한다.

이연_ “영화는 변화할 힘이 없는 사건에 영향을 미치고, 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변화하려면 일단 알아차려야 한다.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인식하고 자신이 속한 풍경을 살펴보는 계기로 이 작품이 가닿는다면 참 행복할 거 같다. <담쟁이>에는 다양한 이슈와 관계가 등장한다. 분명한 건 영화에 차별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는 점이다. 이런 사실을 알아차리고 나면 누군가를 응원할 수도, 새롭게 행동할 수도 있다고 믿는다.

우미화_ 영화를 찍는 동안 『선량한 차별주의자』(김지혜, 창비, 2019)라는 책을 읽었다. 나 역시 살면서 선의를 핑계로 누군가를 차별했던 순간이 있겠구나 싶었다. 악인이어서 차별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말로는 ‘너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실은 내가 옳다고 고집하며 제대로 바라보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거 아닐까. 관객 한 명 한 명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들이 무얼 느끼는지에 따라서 여러 질문이 시작될 거 같다.

한제이_ 감독으로서 욕심을 좀 보태자면, 무엇보다 재밌게 관람하시길 바란다. 영화가 끝나면 ‘아, 왜 이렇게 찝찝하지?’ 하면서 한 번 더 보시고. (웃음)

이연_ 그런 식으로 n차 관람하는 거다. (웃음)

한제이_ 어떤 인물에 집중하느냐에 따라서 다른 영화처럼 느껴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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