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난 사랑에 흠뻑 취해서
<하트> 정가영·이석형·최태환
글 차한비 사진 김혜미 / Interview / 2020-02-29

정가영의 남자 보는 눈은 남다르다. 영화 속 가영은 늘 어떤 남자를 원하는데, 구애는 은밀하지도 정중하지도 않다. 헤어진 애인을 찾아가서 다짜고짜 한 번만 자자고 조른다거나, 인터뷰를 핑계로 술자리에 불러내서는 하루에 몇 번까지 자위해봤냐고 질문하는 식이다. 남자들은 어이없어하며 화를 내지만, 각자 다른 이유로 가영이 건넨 말과 술에 동참한다. 능글맞은 가영과 당황한 남자들 사이에 밤새도록 대화가 오갈 때, 영화에는 두 사람의 ‘케미’는 물론 남자 배우가 지닌 고유색이 자연스레 드러난다. <비치온더비치>(2016)에서 김최용준은 사랑스럽고 유쾌했으며, <밤치기>(2018)의 박종환은 까칠하면서도 다정했다.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인 가영 앞에서 두 배우가 밀고 당기며 제 자리를 지켜낸 덕분에, 관객은 마지막까지 영화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결국 정가영의 남다른 안목이란, 감독으로서 작품에 필요한 능력과 매력을 고루 갖춘 배우를 찾아낼 줄 안다는 뜻이다. 세 번째 장편 <하트>(2020)에서도 감독은 밝은 눈으로 남자를 선택한다. 스크린에서 서로 다른 힘을 발휘하며 2부로 구성된 영화를 흥미진진하게 이끌어간 이석형과 최태환, 그리고 연출과 연기를 겸한 정가영을 한자리에서 만났다. 영화 대사만큼이나 쉴 새 없이 이어진 그 날의 대화를 옮긴다.

 

 

정가영 감독은 의외로 친한 배우가 없다고 들었다. 작업 전에는 거의 모르는 상태에서 캐스팅한다고.

정가영_ 영화를 안 만들 때는 거의 집에만 있다. 특별히 친분을 쌓은 배우가 있다기보다는 영화와 드라마 등 여러 작품을 보면서 눈에 들어오는 배우를 찾는 편이다. ‘저 배우님 너무 괜찮다, 나중에 꼭 작업해야지!’ 하면서 나만의 리스트에 저장해둔다. (웃음)

 

배우를 선택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정가영_ 얼굴과 분위기가 역할에 어울리는 것만큼이나 얼마나 애정을 갖고 시나리오를 바라봐주느냐가 중요하다. 내 영화가 워낙 밀도 높은 작업인 데다가 주제와 소재 면에서 평범하지는 않다 보니, 나만큼이나 이 이야기를 좋아해야 작업으로 이어지더라. 일단 재미있다는 반응이 나오면 같이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트>의 두 배우 모두 그런 면에서 열정을 보여주었다.

<하트>

성범과 제섭을 연기한 두 배우에게 각각 기대하는 바가 달랐을 텐데.

정가영_ 성범은 가영과 이상한 모양의 우정을 나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징글징글한데 떼어낼 수는 없는 거다. 우정인 듯 아닌 듯 애매한 관계에서 이석형 배우가 ‘츤데레’ 같은 모습을 잘 보여주길 바랐다. 제섭은 어떻게 보면 영화에서 가영을 혼내는 캐릭터이다. 혼내긴 하는데 따뜻해야 한다. (웃음) 감독과 배우 사이에서 느껴지는 신경전이든, 여자와 남자 간에 오가는 연애 감정이든 둘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이 필요했다.

 

배우들은 캐스팅 연락을 받고 어땠나. 이미 정가영 감독 작품을 본 상태였나?

이석형_ <밤치기>를 재밌게 봤다. 촬영 전에도 여러 번 보면서 어떻게 연기해야 다른 느낌을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최태환_ 감독님과 미팅하고 돌아와서 제일 먼저 단편 <혀의 미래>(2014)를 봤다. 좋은 의미에서 충격적이었는데 <비치온더비치>를 보고 나니 더 기대되더라.

정가영_ 석형 배우는 <비치온더비치>를 안 보고, 태환 배우는 <밤치기>를 안 봤다. 다들 하나씩만 봐주네? (웃음)

 

이석형, 최태환 배우도 전작에서 눈여겨보고 리스트에 올려두었던 배우들인가.

정가영_ 맞다. 이석형 배우는 <꿈의 제인>에서 처음 보자마자 언젠가 같이 작업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정말 동물적으로 연기한다는 인상을 받았거든. 그러다가 몇 해 전 영화제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보통 내가 정가영이라고 소개하면 다른 남자 배우들은 지나가는 말로라도 “다음 작품에서 만나고 싶어요”라고 하는데, 석형 배우는 인사만 하고 휙 가버리는 거다. ‘어라, 요놈 봐라?’하며 호기심이 생겼지. (웃음) <하트> 캐스팅을 제안하며 처음으로 길게 대화해봤는데, 생각보다 말도 잘 통하고 즐거웠다. 최태환 배우는 드라마 <밀회>를 보고 나서 기억해둔 배우였다. 극 중 유아인 배우의 친구로 등장하는데, 개구쟁이 같은 친근함을 지닌 동시에 남성미도 느껴져서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시나리오에 적극적으로 호응해주어서 마찬가지로 즐겁게 촬영했다. 현장에서 날 챙겨준 유일한 배우이기도 하다. (웃음)

<하트>
<하트>

배우들은 시나리오를 읽고 단번에 결정했나. 뭐에 끌리던가.

이석형_ 보통은 대사를 연습하며 실제로 일어난 일처럼 느끼려고 노력하는데, <하트>의 경우는 감독님이 써놓은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감정이 나오더라. 총을 쏜다거나 베드신처럼 이전까지 경험하지 못한 연기를 해볼 수 있던 것도 큰 재미였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면과 대사가 이어지니 끝까지 결말을 가늠할 수 없더라. 전형적이지 않은, 되게 영화적인 시나리오였다.

최태환_ 나 역시 현실과 허구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느낌이 좋았다. 경계를 오가면서도 중심을 잡는 감각이 훌륭하다. 이런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세계관을 가졌는지 너무 궁금하더라. 촬영할 때도 감독님 세계에 잠시 놀러 온 듯했다. 관객처럼 지켜보며 감독님은 어떻게 연기하는지 구경도 하고. 카메라 앞에서 자유분방한 에너지가 정말 좋거든.

 

전작에 비해 여러 변화가 엿보이지만, 남녀가 주고받는 긴 대화와 롱테이크 촬영은 여전히 유지된다. 정가영 감독은 완벽히 구현된 시나리오로 유명한데, 연기하는 배우들 입장에서는 어떻게 대본을 소화하는지 궁금하다.

이석형_ 대사가 많긴 했지만 딱히 부담스럽진 않았다. 연기할 때 대화를 주고받으며 감정이 변화하는 순간을 즐기는 편이다. 긴 대사를 해볼 수 있다는 점이 오히려 매력으로 다가왔다. 연습은 마라톤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쭉 달려가는 식으로 진행했다. 아무래도 혼자 무턱대고 외울 때는 불안정할 수밖에 없는데, 감독님과 함께 연습하면 대화 흐름을 익히기가 훨씬 수월했다.

 

특별히 기억나는 대사가 있나. 촬영 마치고 나서도 계속 머릿속에 맴도는 이야기랄지.

이석형_ “이제 너 보호 안 해”라는 대사가 떠오른다. 더는 가영을 받아주지 않겠다는 뜻인데, 보호라는 단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아선지 낯설게 느껴지더라. 성범과 가영이 사귀는 사이라든가 어떤 동등한 관계가 아니라, 마치 팬과 아이돌 같은 구도처럼 보였다.

정가영_ 약간 주종관계 느낌이지. (웃음)

최태환_ 하나만 꼽기는 어렵다. 거의 모든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여자들은 유부남이 한 번씩 꼬인다”라는 대사를 보고 나서는 주변에 물어보기도 했다. “중독되면 어떡해요?”라는 대사도 오래 생각날 것 같다. 결국 특정한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기보다는 이런 이야기를 떠올려낸 감독 특유의 정서가 가장 큰 매력이었다.

최태환 ⓒ김혜미
이석형 ⓒ김혜미

대사가 길고 많은 이유는 결국 가영이 솜씨 좋은 이야기꾼이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에도 모자에 콘돔을 넣어 다니는 남자라든지 잠들지 않는 사람에 관한 이론 등 온갖 이야기가 등장한다. 어디서 이런 아이디어를 얻나.

정가영_ 그냥 이상한 생각이 날 때마다 메모장에 써놓고, 시나리오 쓸 때 거기서 하나씩 가져온다. (웃음)

최태환_ 거의 천일야화다. 끊임없이 이야기가 나온다.

 

정가영 감독은 <하트>를 통해 시도해보고 싶은 게 많았던 듯하다. 지금까지 해온 작업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구성과 장르, 공간, 미술 등 욕심을 낸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정가영_ 이야기와 캐릭터가 중심이 되는 영화를 만들다 보니, 상대적으로 그림을 보는 재미는 떨어질 수밖에 없더라. 이번에는 영화진흥위원회 제작지원으로 예산을 확보했고, 내가 꾸리고 싶었던 방식으로 스태프를 모았다.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집중한 건 콘티였다. 촬영감독과 거듭 논의하며 열심히 작업했고, 촬영 장소도 이전보다 늘어난 상황이라 공간에 관한 고민도 많았다. 공포영화로 전환되는 장면이나 노출 연기의 경우, 그동안 영화를 찍으며 언젠가 꼭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베드신은 감독으로서나 배우로서나 용기가 필요했겠다.

정가영_ 과연 내가 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기도 했는데, 다행히 이번 작품에서 시도해볼 만한 구간이 있었다. 완성도가 높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배우와 스태프가 서로 의지하며 순조롭게 촬영한 덕분에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함께 잘 찍어보자는 마음이 통했던 것 같다.

 

베드신 직후 화면은 갑작스레 음산해진다. 공포영화의 공식이라고 할 법한 요소를 한데 모아내면서도 단조롭지 않게 연결한다.

정가영_ 도전해보고 싶었다. <그것이 알고 싶다>나 <토요미스테리극장> 같은 방송 프로그램을 좋아하거든. 재연 장면이 나오면 너무 무서운데 푹 빠져든다. (웃음) <하트>에서 호러신은 인물의 죄책감을 드러내는 장치이자 현실을 반영하는 꿈이다. 미술과 분장도 처음 해보는 경험이었고, 후반 작업 과정에서 사운드도 세심하게 조율했다. 죄책감을 형상화할 방법을 고민하다가 음향 기사님이 제안해주신 대로 아이 울음소리나 신음, 물 떨어지는 소리 등을 섞었는데 붙여보니 재밌더라.

<하트>
<하트>

연기와 연출을 겸하기가 힘들지 않나. 사실 <하트>를 보면서 이제 당분간은 연기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가영_ 맞다. 그게 보이는구나. 이번에 확실히 알았다. 연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웃음) 전작과 달리 이번에는 심리적으로 지친 상태에서 속마음을 토로하는 인물을 보여주어야 했다. 내가 그 감정이 아닌데 인물에 이입한다는 게 쉽지 않더라. 몰랐으니 덤빈 거다. 당연히 어떤 장면에서는 어색한 모습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 돌이키기도 어려운 상황이라 감행했다. 오죽하면 편집 포인트가 ‘최대한 자연스럽게'였다. 연기로 비웃음당하지 않도록. (웃음) 한편으로는 점점 연출에 욕심이 커지면서 좀 더 집중할 필요를 느낀다. 현장에서 모니터 앞에 있으면, 별수 없이 모니터 뒤를 챙기는 일에 소홀해지는 순간이 생기거든. 있어야 할 곳에 있자고 마음먹었다. 앞으로 좋은 배우를 만나는 게 중요하겠지.

 

배우들은 누구보다 연기하는 어려움을 깊이 느낄 텐데, 현장에서 정가영 감독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다. 연기하는 감독과의 작업은 어떤 경험이었나.

이석형_ 대개 작업하면 감독님과 거리가 있는 편이었다. 일에 집중하는 데 필요한 부분이기도 했고. 이번에는 감독이자 배우로서 호흡을 맞추다 보니 훨씬 가까워지더라. 그게 좋은 점이었고, 사실 어려웠던 점도 같은 맥락이다. 연기할 때는 서로 맞춰 나가다가, 컷하면 포지션이 바뀌어서 확인받는 상황이 되니까. 눈앞에는 같은 사람이 있는데 환영처럼 둘로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긴장과 이완을 반복했던 것 같다.

최태환_ 비슷한 걱정을 품고 현장에 갔는데 생각보다는 수월했다. 아예 제섭이라는 캐릭터는 손으로만 등장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2부는 일종의 인터뷰로 진행되는데, 질문보다는 대답이 중요한 상황이기에 오히려 감독님이 더 많이 보이면 좋을 것 같았다. 언제 어떻게 컷을 할지, 그다음엔 어떤 상황이 될지 촬영 내내 궁금해하며 지켜봤다.

정가영_ 2부 재밌지 않나? (웃음) 전작은 시나리오에 나온 대로 찍었는데 이번에는 프로덕션 여건상 뒤죽박죽일 수밖에 없었다. 2부 첫 신이 첫 촬영이라 현장이 어수선했는데, 태환 배우가 흔들리지 않고 안정적으로 이끌어나갔다.

 

2부는 상대적으로 1부보다 짧지만, 충분히 임팩트가 느껴진다. 대화 내내 감독과 배우의 권력 관계가 엎치락뒤치락하며 긴장감을 불어 넣는다.

정가영_ 1부 시나리오를 쓰고 나서 고민이 많았다. 장편 분량은 아닌데 1부 내용을 더 늘리기도 어려웠다. 그때 <팬텀 스레드>(폴 토마스 앤더슨, 2017)를 보고 힌트를 얻었다. (웃음) ‘거장도 이런 귀여운 생각을 하는군!’ 하면서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2부를 붙여보자고 마음먹었다. 사실 태환 배우가 촬영 전에 많이 물어봤다. 배우가 감독에게, 그것도 작품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사까지 밝힌 후에 그런 식으로 행동한다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니까. 다소 인신공격에 가까운 내용을 포함하기도 하고 말이다. 여러 차례 이야기를 나눴는데, 결국 명확한 합의를 내렸다기보다는 “어쨌든 우리는 같이 할 거야, 하는 거야!” 하며 대화를 마쳤다. (웃음)

ⓒ김혜미

이석형 배우는 아직 관객에게 낯선 얼굴이다. 어떻게 연기를 시작했나.

이석형_ 원래 꿈은 만화가였다. 만화를 좋아했고 창작욕도 있었다. 어려서부터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뭔가 만들어내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더라. 그러다 어느 날 만화가의 삶을 다룬 책을 봤는데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고되고 고통스러운 일인 거다. 그때 만화가가 되겠다는 꿈은 단념하고 영화에 관심이 갔다. 감독이 되고 싶었다.

정가영_ 뭐라고? 처음 듣네.

이석형_ 어쩌다 보니 작게나마 영화를 연출할 기회도 생겼다. 근데 그것도 쉽지 않아서. (웃음) 중간에 관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 견디긴 했지만, 이후로 더는 연출자라는 포지션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 배우로 빠진 거다. 뭐가 되었든 영화에는 끼고 싶으니까.

 

연출을 포기하고 배우가 되다니 특이한 시작이다. 연출할 때 가장 어렵다고 느낀 부분은 무엇인가.

이석형_ 배우의 책임감과 연출의 책임감은 좀 다르다. 그때는 자존감이 낮을 때라 내가 연출자로서 프로덕션을 잘 못 꾸려낸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산산조각 나더라.

정가영_ 보고 싶다. 석형 배우 마음 산산이 부서지는 현장! (웃음)

이석형_ 이제는 잘 복구해서 끄떡없이 붙어 있다. (웃음) 어쨌거나 배우일 때는 연출처럼 0부터 100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관계가 얽히고설키는 상황도 아니다. 다만 연기를 못하면 오롯이 내 책임이다.

정가영_ 듣다 보니 내가 왜 연기하는지 깨달았다. 연출만 하면 너무 짜증나고 힘들거든.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다. 현장에서 도망가고 싶고.

이석형_ 그 말이 딱 맞다. 결국 도망가고 싶다는 느낌 때문에 연출을 관두었다. 그 후 연기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학원에 등록했다. 당시 학원에 <꿈의 제인> 캐스팅 팀이 왔다. 오디션에 통과해서 병욱 역으로 출연했다.

 

<꿈의 제인>이 데뷔작 맞나? 한참 완성하게 활동할 시기였을 텐데 <하트> 전까지 3년 정도 필모그래피가 비더라.

이석형_ 당시 촬영 마치고 군에 입대했다. 전역하고 바로 <하트>를 찍었다. 텐션이 엄청나게 올라가 있을 때 촬영했다는 거지.

 

텐션?

이석형_ 민간인이 된 텐션. 인생이 두 배로 행복한 텐션이다. (웃음)

 

최애 만화는?

이석형_ 『간츠』(오쿠 히로야)와 『시가테라』(후루야 미노루).

이석형 ⓒ김혜미

극 중에서 성범은 가영에게 “네가 뭐가 있어? 네가 XX 뭐가 있어?”라고 다그친다. 세 사람은 자신의 강점이 뭐라고 생각하나. 뭐가 있는 배우인가.

이석형_ 나부터? 음, 일단 어리다. 특이하게 생겼다. 목소리가 좋다.

정가영_ 바로 나오네. 대단한데?

최태환_ 자존감이 대단한 친구야.

정가영_ 목소리는 중요하지. 무의식중에 나도 신경 쓰는 부분이다. 영화에 워낙 말하는 장면이 많으니, 좀 더 듣기 편안한 목소리에 끌리는 것 같다. 아, 강점이라. 나는 뭐라고 말하지?

최태환_ 너무 어렵다. 우린 서로 말해주면 안 되나?

정가영_ 그게 좋겠다. 태환 배우는 우선 키가 훤칠하고, 패션 센스가 좋다. 거기에 따뜻한 마음! 정말 다정다감한 사람이다.

최태환_ 그럼 감독님은 아담한 키와 매력적인 정서에 천진난만함을 갖춘 거로. 특유의 맑음이 있다. 계속 대화하고 싶어지는 사람이다.

 

최태환 배우는 영화 출연은 오랜만이지만, 최근까지 드라마 <싸이코패스 다이어리>(tvN, 2019)와 <초면에 사랑합니다>(SBS, 2019) 등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분명 아는 얼굴인데도 배역마다 이미지가 확 바뀌어서 곧장 알아보기 어렵더라.

최태환_ 다행이다. 내가 맡은 인물에 애정을 갖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 좋다. 역할에 맞게 옷을 갈아입으려고 노력한다.

 

본래 연기자가 아니라 모델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분야라서 초반에는 힘든 점도 많았을 텐데.

최태환_ 고등학생 때 모델로 데뷔했다. ‘앞으로는 연기할 거야!’라며 결단하듯 접은 건 아니었다. 내게는 자연스러운 경로였다고 해야 할까. 이미 모델에서 연기자가 된 선배들이 많았고, 언젠가 나도 그렇게 되리라고 여겨왔다. 햇수로 치면 연기한 지 7년쯤 되었는데, 오히려 시작할 때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가 이제야 여러 고민과 욕심이 생겨난다. 정신을 차려 보니 ‘아, 진짜 정신 차려야겠구나!’ 싶어진달까. (웃음) 잘하고 싶다. 욕심은 느는데 자존감이 낮아서 걱정이다. 좀 더 나를 믿고 잘하는 일에 몰두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최태환 ⓒ김혜미

자존감에 관해서는 이석형 배우에게 조언을 구해보면 좋을 듯하다. (웃음)

이석형_ 진지하게 묻는 건가? (웃음)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지. 계속 혼잣말하면서 추스른다. “난 좋은 사람이다. 난 잘하는 사람이다.” 결국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내가 제일 먼저 듣는다. 어떤 말을 듣고 사느냐에 따라 태도와 마음가짐도 달라진다고 믿는다. 나도 분명히 자존감이 낮았던 시기가 있는데,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부분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 못하는 건 버리고 잘하는 걸 더 키워내는 거다.

정가영_ 비슷하다. 요즘 “난 행복한 사람이다. 나는 행복을 선택했다.”고 중얼거린다.

최태환_ 다들 뭐야. 나도 요즘 ‘행복 전도사’로 산다. 다들 행복하면 좋겠다. 주사로 행복을 읊을 정도라니까. (웃음) “작은 것부터 시작해야 해,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아!” 이러면서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한다.

정가영_ 맞다. 책 읽기, 운동하기, 연출 공부하기 등 소소한 루틴을 만들고 매일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이석형_ 근데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는 결국 자신에게 별로인 부분이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정가영_ 그거 내가 저번에 감자탕집에서 했던 말 아닌가? 누가 정의하기를 자존감은 자기 자신을 최고로 사랑하는 감정이 아니라, 자신에게 부족하고 결핍된 면이 있다는 사실을 존중하는 태도라고 하더라.

이석형_ 아니, 내 말은…

정가영_ 저기 반박하지 말아 줄래요? (웃음)

이석형_ 내가 말한 건 내 생각이라고요.

정가영_ 아, 네네. (웃음) 근데 내 경우엔 나를 불쌍히 여기는 과정이 어려웠다. 내가 불쌍한 구석도 있는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기가 싫더라. 동정 받는 상황을 진짜 싫어하거든. 최근에 심리 상담을 받으면서 동정과 연민이 꼭 나쁘지만은 않다는 이야기를 듣고 굉장히 충격 받았다. 나는 늘 남보다 우월하고 잘났다고 생각했지, 한 번도 나 자신을 불쌍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근데 마음을 열어보니 아닌 거다. 우월감이 큰 사람이 오히려 자존감이 낮다고 하더라.

 

연출 공부는 어떻게 하나.

정가영_ 여러 차례 반복해서 봤던 영화를 사운드 제거하고 다시 본다. 그럼 영화 내용이 아니라 촬영, 콘티, 미술 같은 부분에 집중하게 되더라. 10분이라도 매일 하자는 목표를 세웠고, 확실히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연출에서나 생활에서나.

 

영화제에서 <하트>를 공개한 이후, 왓챠 별점이 처음으로 2점대를 기록해서 당혹스러웠다고. 평소보다 냉담한 관객 반응이 자존감에 영향을 미쳤을 듯도 한데 지금은 잘 회복했나?

이석형_ 진짜? 2점?

정가영_ 2.8 정도 된다. 이제 모든 걸 받아들였다. (웃음) 사실 <하트>가 나에게 가져다준 것에 관해 생각할수록 만족감이 크다. 얼마간 까먹고 지냈는데, 최근에 내가 이 작품을 왜 찍었는지 다시 되짚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내 안에 머무는 여러 질문과 고민을 작품으로 남기는 과정에서 전작과는 다른 방식으로 소화해야 할 지점이 있었다. 그걸 성공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나에게 <하트>는 유의미하고 보람찬 작업이다. 멋진 시도도 많이 해봤고.

ⓒ김혜미

두 배우에게는 <하트>가 무얼 가져다주었나.

이석형_ 긴 대사를 외울 수 있다는 자신감. (웃음) 여러모로 풍부한 연기를 경험해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영화에서 총을 잡거나 불륜을 저질러본 것도 전부 처음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배우로서 정말 귀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런 연기가 나오는구나, 하며 개인적으로 많이 알아가고 배우는 시간이었다.

최태환_ <하트>는 내게 정가영 감독을 주었지. (웃음)

정가영_ 오늘 이 시간이 제발 안 끝나면 좋겠다. (웃음)

최태환_ 진심이다. 내가 속한 환경에서 만나본 적 없는, 종이 전혀 다른 것 같은 사람이라 작업하는 내내 무척 신선하고 즐거웠다. 돌이켜보니 감독님을 만나고 나서 나에게 꽤 많은 변화가 생겼다. 내가 날 바라보는 시선이나 세상을 대하는 사고방식에 영향을 받았다.

정가영_ 말은 이렇게 해주면서 내가 전화하면 안 받더라.

최태환_ 이럴 건가? 나도 섭섭한 거 많다.

정가영_ 오늘 술 마시자. (웃음)

 

“배우님은 재수 없어서 제섭이에요?”라는 가영의 말에 제섭은 “감독님은 정이 가서 정가영인가?”라고 받아친다. 성범은 생각해둔 것 없나?

정가영_ 아, 진짜 성범 배우가 잘해줬다. 너무 멋있고 훌륭하고…

이석형_ 아니, 지어달라고요.

정가영_ 생각이 안 난다. 성범 배우가 직접 지어보면 어떨까.

이석형_ 그럼 범이 들어가니까 호랑이 같은 느낌으로? 약간 야수 같은.

정가영_ 호랑이 느낌 있다!

최태환_ 역시 자존감이 상당하다. 그렇지, 호랑이 좋지. (웃음)

 

<하트>는 정가영의 다음을 기대하게 만든다. 영화에서 ‘세 번째 영화’라든가 ‘서른’이라는 단어를 힘주어 말한다고 느꼈다.

정가영_ <비치온더비치>부터 <하트>까지 세 작품을 완성한 후에 감독으로서 1막이 종료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표현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는 특별한 고민이나 의도 없이 영화를 만들었다. 마치 재채기가 나오니까 재채기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한테 작가적 재능이라는 게 있으니까 한번 해봐야지 싶었고, 오히려 인터뷰나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영화를 놓고 말하기 시작하면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느껴지는 지점이 있었다. 지금 작업 중인 작품이나 앞으로 할 영화에는 다르게 접근해볼 생각이다. 개인적으로 중요한 시기를 통과하는 중인 것 같다. 돌아보니 나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비슷하더라. 함께 마음공부도 하고 심리상담도 받는다. 결국 페미니즘 열풍과 무관하지 않은 변화라고 생각한다. ‘멘탈 케어’라는 게 결국 과거 속 자신과의 화해를 의미하지 않나. 페미니즘을 접하면서 그때 그건 내 잘못이 아니란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이상해서, 우리가 유별나서 벌어진 일이 아니었던 거다. 나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니 자신감도 붙고 철도 좀 드는 것 같다. (웃음)

<비치온더비치>
<밤치기>

차기작으로 CJ에서 시나리오를 개발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가영_ 일단 제목은 <서른>이다. (웃음) 이병헌 감독의 <스물>(2015)과는 또 다른 영화가 되리라 기대한다. 제작사와 투자사가 생기고 이전과 다른 규모와 방식으로 작업하면서 나름 새로운 모험을 겪어내는 중이다. 분명히 힘들어지는 순간이 있을 텐데, 그때 너무 가라앉지 않기 위해 기준을 정리했다. 독립영화는 10명 중에 2-3명만 좋아해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상업영화라면 적어도 7-8명은 좋아해야 한다. 재미를 충족시키기 위해 피드백을 거친다고 이해하니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과정이더라. 해낼 수 있다는 생각도 들고.

 

그런데도 타협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면?

정가영_ 없다. 이를테면 내가 아주 재밌는 대사를 써놨는데 제작사나 투자사가 재미없게 바꾸길 원하지는 않으니까. 재미는 유지하되 좀 더 많은 사람이 좋아할 방향은 무엇일지 궁리하는 거다.

 

영화에서도 그렇고 실제로도 ‘재미’라는 단어를 자주 쓴다.

정가영_ 작업의 핵심이라고 생각하거든. 기본적으로 내가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재밌기 때문이다. 관객 또한 반복적이고 평범한 일상에서 재미를 찾기 위해 극장에 가지 않나. 기대하는 만큼 만족시키고 싶기에 약간 강박이라고 할 정도로 웃음에 예민한 편이다. 객석에서 웃음이 안 나오면 괜히 불안하다. 사실 소리 내어 웃지 않아도 얼마든지 흥미롭게 영화를 볼 수 있는데, 머릿속에는 ‘얼마나 재미없으면 저렇게 정색할까?’하는 걱정이 쌓인다.

 

<하트>는 지금까지 만든 영화 중 가장 재미없는 제목이다. 인터넷에서 검색도 잘 안 된다. (웃음)

정가영_ 그러게, 듣고 보니 그렇다. 심지어 원래는 ‘사랑’이었다. (웃음) 중간에 ‘멜로’로 바꾸었다가 귀여운 제목이 좋겠다는 판단에 최종적으로 <하트>가 되었다. 사실 여전히 ‘사랑’이 마음에 남긴 한다.

 

왜 ‘사랑’인가.

정가영_ 이건 사랑에 관한 영화이니까.

ⓒ김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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