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좌의 본질
<영화로운 나날>
차한비 / Choice / 2019-12-18

영화(조현철)는 배우다. 영화에게 영화란 하고 싶고 닿고 싶은 꿈이자 언제나 그에 못 미치는 현실이기도 하다. 영화가 일이 될 때 영화는 더는 영화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GV에 오지 않은 감독과 이상한 질문을 던진 관객을 불평하고, 시나리오를 보여주겠다는 형과 아쉽지만 이번 작품은 함께하지 못할 것 같다는 조감독 사이에 둘러싸인다. 꽉 막힌 도로에서 발이 묶인 운전자처럼 영화는 답답하고 불안해진다. “내 연기가 빤한가? 너무 무난하게 살아서 연기가 흐릿한가?” 그때마다 영화를 격려하는 사람은 오랜 연인인 아현(김아현)이다. 아현은 영화의 시끄러운 속내를 다독이고, 때로는 연습하는 영화와 대사를 맞춰주기도 한다. 취향을 공유하며 가꾼 집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이어가던 중 싸움이 벌어진다. 영화가 아현을 꿈 없는 사람이라 칭하자, 아현은 영화에게 현실도 모르는 사람이라 반박한다. “넌 네 연기가 막히면 삶도 막혀? 연기에 대해 고민한 만큼 날 고민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어?” 동거하는 집이 여전하려면 누군가는 공과금을 챙겨야 하고, 맥주를 마시면 빈 캔을 치우는 사람이 있으며, 영화가 양말을 뒤집어 벗어두면 아현은 똑바로 개켜 놓는다. 아현은 일상을 유지하려는 노력에 무심하고 무지한 영화에게 실망한다.

<영화로운 나날>

내쫓기듯 집을 나온 영화는 무작정 걷는데, 정체된 길을 이탈하자 난데없는 만남이 성사된다. 오랜만에 마주친 석호(전석호)는 앞뒤가 맞지 않는 연기 철학을 한참 늘어놓더니, 자신의 애인과 대신 헤어져달라고 부탁한다. 영화는 석호를 연기하며 아현이 했던 말을 반복한다. 한바탕 소동이 끝난 후에 올라탄 버스에서는 누나 혜옥(서영화)과 마주친다. 몇 해 동안 일을 핑계로 고향에 내려가지 않아 만날 일이 없던 누나는 마침 잘 됐다며, 어렸을 적 남매를 돌본 할머니 장례식에 영화를 데려간다. 돌아오는 길에는 우연히 촬영 현장을 지나치다가 감독에게 급히 출연을 요청받는다. 상대 배우는 과거 유학 시절 동기였던 태경(이태경)이다. 영화는 처음에 태경을 알아보지 못하지만,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 덕분에 오래전 기억을 떠올린다. 다른 사람이 되고, 죽은 이가 살아 돌아오고, 옛 시절을 복기하는 기묘한 하루 끝에 영화는 다시 아현에게 돌아간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누구와 함께 살아왔는지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은 영화의 얼굴은 이전과 조금 달라 보인다. 화해한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오늘 하루는 어땠느냐고 묻는다. 영화는 확장된 것 같다고 답한다.

<영화로운 나날>

<여자들>(2016)을 연출한 이상덕 감독의 두 번째 장편으로, 창작의 고통을 겪는 남자 주인공의 로드무비라는 점에서 전작과 유사한 맥락에 놓인 작품이다. 다만 전작과 달리, 영화가 우연히 마주치는 인물은 낯설고 종잡을 수 없는 매력을 지닌 ‘여자들’이 아니란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영화는 옛 친구와 동료, 가족 등 관계를 반성하고 지나간 시간을 되짚게 만드는 사람들과 만난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맞닥뜨리는 과거는 영화에게 변함없는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려준다. 전혀 특별하지 않아서 가장 특별한 일상은 그 자체로 환상적이며, 이는 영화가 고백하듯 “언제나 잊거나 잃는” 진실이기도 하다. 확장과 변화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들여다볼 때 비로소 가능함을 설득하는 데는 무엇보다 배우의 힘이 크다. 조현철은 엉뚱하면서도 주의를 기울이게 만드는 특유의 매력으로 시선을 집중시키며, 신예 김아현은 사랑스럽고 진지하게 인물을 표현한다. 전석호, 서영화, 이태경, 공민정, 문혜인 등 제 몫을 해내는 배우들의 연기가 맛깔스럽게 어우러지며 영화의 가능성을 한층 넓혀 준다.

<영화로운 나날>

 

영화로운 나날 Film Adventure 제작 콧수염필름즈 감독 이상덕 출연 조현철, 김아현, 전석호, 서영화, 이태경 배급 인디스토리 상영시간 87분 등급 12세관람가 개봉 2019년 1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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