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묻고, 찍다
JIFF 2019 <아무도 없는 곳> 김종관
글 정지혜 사진 소동성 / Festival / 2019-05-05

김종관 감독은 산책자다. 종로 일대와 남산 근처를 소요하길 즐긴다. <조금만 더 가까이>(2010), <최악의 하루>(2016), <더 테이블>(2016)을 꾸준히 본 관객이라면, 그의 이러한 습성을 금방 눈치 챌 것이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도 낮의 뒷길을 맴돌고, 밤의 길목에서 서성인다. ‘걷는다’는 이 단순한 움직임을 반복하며 극 중 인물들은 때론 상념에 빠지고, 때론 근심을 벗는다. 무수한 걷기의 시간을 보낸 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기어코 존재의 실마리를 길어 올릴 것이다. 자신이 오랫동안 걸어온 동네의 소로를 영화의 배경과 이야기의 중심으로 끌어오고 그 안에 창작자로서의 자기 고민을 섞어온 김종관 감독.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 ‘영화는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 그의 중얼거림은 여전히 길 위에서 계속되고 있다.

그런 김종관 감독에게 올해는 더없는 시도의 한 해가 될 것 같다. 뮤지션이자 배우 이지은을 주인공으로 4명의 감독이 만든 4편의 단편 모음 <페르소나>(2019)에서 김종관은 단편 <밤을 걷다>를 연출했다. <밤을 걷다>는 죽은 자와 산 자가 재회해 안타까운 작별의 인사를 전하는 어느 밤의 길목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곧이어 그는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의 시네마프로젝트로 장편 <아무도 없는 곳>을 만들었다. 죽음을 둘러싼 상실감이 짙게 배어난다는 점에서 <밤을 걷다>와 나란히 두고 보게 되는 영화다.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에 앞서 <아무도 없는 곳>을 미리 보고 김종관 감독에게 대화를 청했다. 영화의 형식적 측면은 심화되고 내용상으로는 깊이를 더하면서 그는 특유의 무드를 한결 선명하게 그리는 중이다. 올해 하반기에는 일본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03)의 한국판 리메이크 작을 연출할 계획이다. ‘김종관 멜로’의 연장 혹은 변곡에 대해 물었다.

 

 

서울 종로구 서촌에 거주하며 동네 산책을 즐기는 거로 압니다. 산책이 오랜 습관이고 산책자로서 발견한 골목 이야기를 책 『골목 바이 골목』에 담기도 했습니다. <최악의 하루> <더 테이블>에서는 감독이 잘 아는 공간이 배경이자 또 하나의 인물처럼 등장합니다.

걸으면서 쓸데없는 걱정을 털어 내기도 하고 내 한계를 생각하게 되기도 하죠.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는 사색이 되고, 내 근심과 불안이 창작의 아이디어로 이어지기도 해요.

 

<아무도 없는 곳>의 창석(연우진)도 길 위를 걷고 몇몇 인물들을 만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창석이 만나는 인물들의 에피소드가 챕터를 이루는 옴니버스 구성입니다. 주인공이 공간을 이동하며 여러 사람을 만나는 <최악의 하루>, 한정된 공간에서 인물들이 대화를 주고받는 <더 테이블>의 연장인 동시에 형식적으로 보다 다양한 장치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올해 2월에 10회 차로 찍은 <아무도 없는 곳>의 시나리오가 지난해 여름에 촬영한 <밤을 걷다>보다 먼저 나와 있었어요. 오랫동안 해보고 싶었던 이야기였습니다. 다행히 전주 시네마프로젝트의 막차를 타서 제작이 진행됐습니다. 최근의 장편 작업과 형식적으로 닮았죠. 내용상으로는 <최악의 하루>, <더 테이블>을 끝낸 뒤 고민했던 것이 반영됐어요. 나이를 먹으면 관심사가 바뀌잖아요.

<아무도 없는 곳>

그 고민이라는 게 혹시 나이 듦과 죽음에 관한 것일까요. <밤을 걷다>와 <아무도 없는 곳>은 이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무척 닮았습니다. 현실적 공간 안으로 꿈과 환영이 들어오기도 하고요.

전부터 관계에서 오는 상실을 창작의 과정과 연계해 풀어가길 좋아했어요. 전보다 좀 더 하드하게 풀었다고 할까요. 내 안의 고민을 표현하고 싶다, 표현할 수 있겠다 싶을 때가 있는데 그런 시기였던 거 같아요. 사람이 나이 들면서 깨치고 성숙해지지만 항상 나아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육체적으로 노화하면서 불안전해지기도 하고 마음이 꼬이기도 하고요. 전에 하지 않던 실수도 하면서 흐트러져요. 마냥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죽음이나 그로 인한 상실감이라는 게 자연스레 더 크게 다가와요. 또 한편으로는 기억의 불완전성에 관심이 많죠. 기억은 변형되기도 하고 내 기억이 정확하지도 않을 때도 많고. 또 지난해 뮤지션 박효신 씨의 <별 시>(別 時, 2018)의 뮤직비디오 작업을 비롯해 몇 개의 단편 작업을 진행했는데 그런 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친 것 같아요. <별 시>와 <밤을 걷다>에도 공통의 무드가 있어요. 또 <별 시>에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도 중요하게 나오는 공중전화 부스도 나와요. 더는 사람들이 쓰지 않는 공간이 주는 정취와 비현실성이 있죠. 공중전화를 오가는 쓸쓸한 사람들, 홈리스, 술 취한 여자, 상실감에 빠져 우는 여자 등이 등장해요. 사실 커머셜한 작업 현장에서는 어두운 느낌이나 쓸쓸한 사람들이 나오면 꺼리는 분위기가 있는데요. 박효신 씨가 그러더라고요. “자신이 노래를 들려주고 싶은 사람들은 바로 이 사람들”이라고요. 박효신, 정재일 두 뮤지션의 지원으로 제약 없이 편하게 작업했어요.

 

<아무도 없는 곳>은 소설가인 창석의 창작 과정에 관한 영화로도 보입니다.

창석 본인도 큰 상실을 경험한 상태인데요, 그가 며칠간 상실의 슬픔을 떠안고 사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게 돼요. 창석은 누구보다 만난 사람들의 상실감을 잘 이해할 거예요. 창작자로서도 마찬가지예요. 사람들의 경험을 잘 듣다 보면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창작자인 나의 시선이 생기죠.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를 보면서 나라면 여기까지 질문했을 법한 지점을 넘어서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더 질문해가는 걸 봤죠. 인물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영화였어요. 그런 의미에서 좋은 창작이라는 건 있는 거 같아요.

ⓒ소동성

<아무도 없는 곳>이 잠정적으로는 창작자로서 가볼 수 있는 데까지 가본 작품이라고 보면 될까요.

내 머릿속에 여러 질문이 있는데 아직 이야기로 뻗어 나갈 길을 찾지 못한 게 있어요. <아무도 없는 곳>은 길을 찾은 경우고요. 부족함도 있겠지만 내가 해보지 않았던 걸 더 해봤기에 전보다는 좀 더 많이 가본 기분이에요. 창작자로서 많은 걸 시도하고 도전했어요. 적은 예산으로 10회 차에 영화를 완성하면서 나름 새로운 시도를 했는데 사실 새로운 시도라는 건 안전하지 않은 방식으로 갔다는 거죠. 앞으로는 상업영화를 앞두고 있으니 무리한 도전은 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 세상에 도전하라고 내게 돈을 주는 건 아닐 테니까요. 내가 가장 잘 아는 방식으로 균형 있는 영화를 만들어야겠죠. 그런 면에서 <밤을 걷다>, <아무도 없는 곳>은 창작자로서 해보고 싶고, 알고 싶었던 걸 해본 경우에요. 촬영 때 하루하루가 즐거웠어요.

 

창석 역의 연우진 배우와는 <더 테이블>로 인연을 맺었습니다. 대사의 양도 많지만 창석은 만나는 상대에 따라 다른 리액션과 대화법을 구사해야 했기에 그만큼 세심한 연기가 필요했을 거 같아요.

챕터마다 대화의 성격이 달라요. <더 테이블> 때도 한 신이 10분~15분이 넘는 대화 장면이 있었죠. 긴 대사는 쓰는 입장에서도 쉽진 않지만 그걸 영화적으로 시각화하기도 어려워요. 긴장감을 계속 쌓아가야 하니까요. <더 테이블>이 두 인물 간 대화를 주고받으며 긴장을 쌓아가고 관객이 이들의 대화를 엿듣는 방식이었다면, <아무도 없는 곳>은 한 사람이 말하고 상대가 듣는 식이에요. 그러다보니 극중 화자가 관객에게 직접 말하는 것 같아요. 대화 형식도 에피소드 별로 달라서 이걸 어떻게 구현할지도 도전적인 부분이었어요. 그만큼 좋은 배우들이 있어야 했죠. 창석은 오히려 말을 듣는 입장이고 많은 사람들이 창석에게 와서 말을 해요. 창석은 다양한 상대의 여러 에너지를 받아내야 하니 창석 자체가 강한 기운을 갖기 보다는 물 흐르듯 감정과 기운을 흘려보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어요. <더 테이블> 때 연우진 배우의 연기가 상당히 인상적이었고 새로운 배우를 만난 느낌이었고요. 작은 표정, 눈빛을 아주 세밀하게 나눠서 연기하는, 액션이 아닌 리액션의 연기가 뭔지를 잘 아는 배우에요. 이런 세심한 연기가 좀 더 좋은 평가를 받았으면 좋겠어요.

<더 테이블>

이번에도 몇몇 인물들이 길을 걷습니다. 하지만 ‘걷는다’는 행위보다도 걷는 이들조차 다 사라진 아무도 없는 공간, 텅 빈 거리 그 자체에 보다 주목하고 있습니다.

병렬식 에피소드나 옴니버스식 전개라고 해서 구성적 매력을 취하지 못하는 건 아니라고 봐요. 대구, 은유, 메타포 등을 잘 써서 흐름을 만들어주면 영화에 시적 운율이 생기죠. 운율이 있는 영화이길 바랐어요. 운율이나 중의적 표현을 쓰는 건 예전부터 좋아했거든요. <폴라로이드 작동법>(2004)도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지만 폴라로이드의 특징을 말하는 영화이기도 하고. 또 영화 속 폴라로이드 카메라에는 내 개인사가 얽혀 있기도 하고. 여러 레이어를 둬 구조적인 실험을 하면서 리듬감을 만들어 봐요. 그러다 보면 하나의 공간에 마치 다른 세계가 밀려오는 느낌이 들 때도 있고요. <아무도 없는 곳>은 그걸 극대화해 현실 안에 비현실이 밀려오지만 그걸 ‘판타지’라고 명확하게 제시하기보다는 그런 기운을 전하는 데 초점을 맞췄죠. 현실일 수도, 비현실일 수도 있는 그 상태. 물음표로 남겨두는 거죠. 영화가 끝났을 때 관객들이 정서적 자극을 받으면 좋겠어요. 이야기 사이사이에 이런 공간이 하나의 패턴으로 작용하고, 같은 공간이라도 다른 시간대에 보여주며 현실과 비현실, 꿈 등이 섞이기도 하고. 어느 게 현실적 공간인지 명확하지 않게 해 분위기를 만드는 게 중요했죠.

 

4월 11일 넷플릭스를 통해 <페르소나>(제작 미스틱스토리, 기린제작사)가 공개됐어요. 이지은 배우를 두고 영화를 제작하고 넷플릭스 플랫폼으로 유통되는 새로운 경험을 했습니다.

미스틱스토리의 윤종신 대표에게 제안을 받았어요. 작업할 기회가 한 번이라도 더 생긴 거죠. 상황과 조건만 허락된다면 웬만한 제안이 오면 마다하지 않아요. 작업을 하면 배우는 게 분명히 있거든요. 물론 작업을 많이 함으로써 누군가에게는 뻔하고 긴장감 없는 감독이라는 선입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겠죠. 하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창작자로서 계속 뭔가를 만들어내고 싶은 에너지가 있는 사람이에요. 넷플릭스로 공개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봤고, 반응도 좋았어요. 넷플릭스에 들어가면 항상 영화를 볼 수 있으니까. 장기적인 호흡으로 영화가 노출되는 거라 그 점도 좋고요. 극장 상영의 매력과 향수야 물론 있죠. 하지만 그걸 고집할 수 있는 건 언제나 권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채플린도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늦게 넘어간 배우잖아요. 무성영화의 영웅이었으니까요. 크리스토퍼 놀란도 자기 권력이 있으니까 여전히 필름 작업을 할 수 있는 거고요. 극장용 영화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걸 잘 알지만 내게 창작적 자유를 줄 수 있는 건 때론 새로운 플랫폼이에요. 플랫폼의 가짓수가 늘어난다는 건 창작자에게는 좋은 일 같아요. 내가 기회를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다 보니 일단 생존해야 하고, 내 나름의 위치를 만들어가야 하고, 나라는 창작자를 신뢰해주는 사람들이 많은 세계로 가야 하죠. 계속 길을 찾아야 해요. 매일 실패하면서. 품위를 유지하며 갈 수 있는 건 전혀 없더라고요.

 

<페르소나>에 참여한 4명의 감독은 배우 이지은을 자신만의 ‘페르소나’로 두고 각자의 해석으로 단편영화를 만들었어요. 이지은 배우에게 어떤 인상을 받았나요. 그게 <밤을 걷다>에 어떤 식으로 반영됐을까요.

이지은 배우와는 <페르소나>의 전체 감독들과 제작사 관계자들이 있는 자리에서 처음 만났어요. 사람은 다면적이고 또 첫인상에서 알 수 있는 건 극히 제한적이겠지만 기본적으로 차분한 인상 속의 쓸쓸함이 느껴졌어요. 피곤해 보이기도 하고 지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당시의 내가 느끼던 우울함이 있었는데 그런 내 감정과 배우가 주는 느낌을 이야기로 풀어 보면 어떨까 싶었죠. 그렇게 써 내려갔어요. 이 프로젝트는 기본적으로 배우가 마음에 들어해야 진행할 수 있는 프로젝트인데 이지은 배우가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좋아해 줬어요. 영화의 내용에 공감을 잘 해줬고요. 초고에서 거의 바뀐 부분 없이 그대로 영화화됐죠.

<밤을 걷다>

<페르소나>는 이지은 배우의 영화 데뷔작이고 처음으로 촬영한 게 <밤을 걷다>로 알아요. 촬영에 들어가기에 앞서 사전 준비 과정에 나눈 이야기나 그 방식에 관해 듣고 싶습니다.

촬영에 앞서 이지은 배우가 상당히 진지하게 임해줬어요. 시나리오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 처음으로 둘이 만났죠. 서촌 인근의 카페에 이지은 배우가 혼자 모자를 푹 눌러쓰고 편한 차림으로 나왔어요.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곧바로 시나리오 얘기만 했죠. 그렇게 본론만 얘기하고 헤어졌는데 그게 되게 편하고 좋더라고요. 그런 작업의 방식이 (<아카이브의 유령들>(2014), <최악의 하루>, <더 테이블>을 함께한) 한예리 배우와의 작업 방식과도 비슷해요. 미사여구 없이 핵심만 이야기하는데 그 과정에 오히려 좋은 동료애가 생겨요. 이후 이지은 배우에게 촬영장소인 종로구 권농동 일대의 길을 같이 한번 걸어보자고 했죠. 이번에도 이지은 배우가 일을 마치고 혼자 택시 타고 왔더라고요. 중요 공간을 다 한 번씩 걸어보며 내용 파악을 했어요. 제작에 앞서서 배우와 시나리오에 관해 깊이 있게, 충분히 이야기를 나눴다는 게 상당히 인상적이었죠.

 

이지은 배우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창석이 만나는 중요한 인물인 미영으로도 등장해요. <밤을 걷다> 이후 곧바로 다음 영화(이지은의 장편 데뷔작인 셈이다.)를 김종관 감독과 함께했습니다.

나로서는 정말 고마운 일이죠. <밤을 걷다>를 작업하며 인간적인 관계가 생겼고, ‘내가 다음 작품으로 뭘 준비하고 있고, 그 과정이 정말 재밌다’는 얘기를 편하게 하게 됐어요. 미안한 면도 있어요. 워낙 많은 시나리오를 받는 배우인데 사실 아무 돈도 안 되는 작업으로 제안을 했으니…. 기분 좋게 시나리오를 한번 읽어 봐줬고 미영 캐릭터를 하고 싶다고 말해줬어요. 나로서는 정말 큰 지원군을 얻었죠. <밤을 걷다>에서 지은이라는 역할로 유령, 죽은 사람을 한번 연기해서인지 <아무도 없는 곳>의 미영의 리딩에서도 그런 톤이 잘 살아나요. 이지은, 연우진 배우가 리딩할 때 스산하고 쓸쓸한 톤으로 느리게 대화를 이어가는데 두 사람의 호흡이 정말 좋더라고요. 큰 자극 없이 물 흐르듯 진행되는 이들의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웠어요. 잘 찍어야겠다 싶더라고요. (웃음)

<아무도 없는 곳>

함께 작업한 동료로서 이지은 배우의 장점, 강점을 말해보자면요.

균형감이 좋은 배우에요. 드라마를 통해 연기가 잘 다져져 있는데다 배움도 빠르죠. <밤을 걷다>의 문어체 대사가 전달하기 쉽지 않을 수 있는데요. 가사를 직접 쓰고 노래하는 사람이다 보니 그걸 오히려 시적으로 잘 전달해주더라고요. <밤을 걷다> 때도 좋았지만 <아무도 없는 곳>에서는 연기적으로 한층 깊어진 걸 느껴요.

 

<더 테이블>의 경우, 영화의 제작 규모는 작지만, 상업영화 현장에서 큰 역할을 맡는 배우들이 대거 합류했습니다. 한번 인연을 맺은 배우들이 계속해서 다음 작품을 같이 하기도 하고요. 감독의 연기 연출 방식이나 배우와의 관계 맺는 법이 연기자의 신뢰를 얻었다는 의미일 테고 배우가 원하는 부분을 채워주는 작업 현장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배우는 기본적으로 아티스틱한 면모가 있어요. 돈으로만 움직이지 않죠. 연기자로서 살아 있는 뭔가를 표현하고 싶은데 상업영화는 그 갈증을 풀기에 한계가 있을 때가 많잖아요. 제가 그 타이밍을 잘 노린 걸 수도 있어요. (웃음) 내 작업이 무대 위에서 긴 호흡으로 대사를 주고받는 식이라 일면 연극적이죠. 배우들이 그런 부분에서 연기해보고 싶다는 매력을 느끼는 게 아닐까요. 내가 시나리오를 썼을 때 내 첫 번째 지원군은 배우들이에요. 내 얘기에 가장 빠르게 호응해주고 시나리오를 잘 봐주는 이들이죠.

ⓒ소동성

단편 <거리 이야기>(2000)로 연출을 시작한 이후 장편과 중단편을 오가며 작업해왔고, <더 테이블>로 의미 있는 스코어를 내기도 했습니다. 김종관 감독의 꾸준한 작업과 그 방식을 두고 자체 제작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상업영화에 비하면 <더 테이블>은 많은 흥행을 거둔 건 아니에요. 손해를 보지 않은 정도입니다. 시스템을 갖추려고 매번 노력하지만,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이해해준 부분이 커요. 그래서 미안한 마음이죠. 배우의 경우도 아무리 작은 규모의 영화 작업이라고 해도 그 작업을 할 때 본인이 떠안아야 하는 위험이 있거든요. 상업영화처럼은 못 되도 제대로 시스템을 갖춰서 적법한 개런티를 주면서 일할 수 있는 판을 만들고 싶어요. 그러려면 나라는 사람의 브랜드가 생겨야겠죠.

 

단편영화 작업을 꾸준히 해왔습니다. 한국에서는 단편영화를 장편으로 가는 징검다리로 치부하거나 과소평가하는 면도 있어 마음 고생한 순간도 많았을 텐데요. 한편으로는 가능한 규모에서 영화 작업을 꾸준히 이어가기 위한 창작자 나름의 자구책이 반영된 선택이었을 거 같아요.

말을 아껴야겠네요. (웃음) 넷플릭스 같은 플랫폼에서 단편영화가 활성화되니까 장점도 있어요. 물론 그런 플랫폼에 소개되는 단편들이 점점 상업성이 짙어지는 것도 사실이죠. 단편영화는 새로운 시도를 해볼 여지가 많아요. 일종의 옴니버스 형식의 <카우보이의 노래>(2018)를 보면서도 단편 형식으로 얼마나 이야기를 세련되게 풀 수 있는가를 다시 느꼈죠. 좋은 문학선집을 보는 듯했어요. 앞으로 플랫폼이 다양화되면 단편영화 시장 자체도 많이 열릴 테고 다양한 시도가 있지 않을까 기대해요.

 

올해 가을에는 일본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03)의 한국판 리메이크 영화 <조제>를 연출합니다. <더 테이블>, <아무도 없는 곳>에 이어 볼 미디어의 구정아 대표와 손을 잡았고 워너브라더스 코리아가 배급을 맡았어요. 지금까지 해온 작업과 다른 규모의 프로젝트입니다.

처음으로 상업자본이 들어가는 영화에요. 구정아 대표와는 오랜 친구로 그간 아이디어나 프로젝트를 많이 공유해왔죠. <조제>는 2016년쯤 내가 먼저 리메이크를 해보고 싶다고 말했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구정아 대표가 관심을 보여줬고요. 판권을 사고 시나리오가 나오기까지 오래 걸렸고 그사이 다른 작품을 함께하게 됐죠. 친구에서 동료로 관계가 바뀔 때 발생할 수 있는 긴장감을 무사히 잘 넘기면서 서로 신뢰가 쌓였어요. <더 테이블> <조제> 모두 여성 캐릭터가 많이 나오는 만큼 내가 균형감을 유지하는데 구정아 대표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과 시각에 도움을 많이 받아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원작이 워낙 인기가 많아 부담이 클 것 같습니다. 동시에 멜로영화에 관심이 많은 만큼 한국판 <조제>만의 서정과 특징을 만들어보자는 기대도 있을 거 같고요.

원작을 워낙 좋아했어요. 일본에 갔다가 원작 영화의 프로듀서 중 한 분을 만났는데 리메이크를 해볼 생각이 있느냐고 묻더라고요. 누가 해도 리스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럴 생각이 없다고 말했죠. 근데 돌아와서 가만 생각해보니 어쩌면 내가 오랫동안 해보고 싶었던 멜로영화가 원작 영화의 인물들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 그들의 사랑 이야기일 수도 있겠더라고요. 멜로영화만큼 사람 사이의 아이러니를 들여다보기 좋은 장르가 없어요. 하지만 무게감 있는 멜로는 독립영화에서도 환영받기 어렵고 로맨틱 코미디가 중심인 상업영화에서도 쉽지 않죠. 원작이 만들어진 지 10년도 넘었고 한국과 일본 사회도 매우 다르니까 나의 시각으로 시도해볼 수 있는 얘기가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원작이 가진 힘이 있으니까 상업 자본을 받아서 무게감 있는 멜로를 만들 수 있을 거 같았고요. 어떻게 해도 욕은 먹겠지만 이상하게 자신감이 있어요. 겁먹어서 만들지 않은 적은 없었으니까요. 큰 도전이지만 내가 해보고 싶은 걸 해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커요. 가을부터 3개월 정도 촬영하고 내년에 개봉하는 게 목표에요. 촬영은 즐겁게 진행될 거 같아요. 영화가 공개됐을 땐 살아남는 게 중요하겠죠. 어떻게 다음 단계로 갈 것이냐, 그 문제니까요. 50대, 60대가 돼서도 영화를 계속 찍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요.

ⓒ소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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