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이 경기의 최종 스코어는 몇 대 몇일까. 사실 기술만 따지면 가영(정가영)은 선수로서 빵점이다. 아니, 그마저도 후하다. 차라리 마이너스로 보는 편이 좋겠다. 원하는 걸 얻지도 못했을뿐더러 다음을 기약할 만한 여지조차 날려버렸으니까. 하지만 끝까지 경기를 지켜본 사람이라면 가영이 공격수의 자질을 타고났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상대편의 심장을 철렁하게 만드는 공격수는 현란한 드리블이나 감각적 슈팅을 자랑하는 선수가 아니라 무슨 수를 써서든 골대를 향해 돌진하는 선수다. ‘가영’은 골에 집착한다.
가영은 시나리오 자료 조사를 위해 진혁(박종환)을 술자리에 불러낸다. 자료 조사는 어디까지나 가영의 주장일 뿐이다. 두 사람이 소주 한 병을 두고 마주 앉은 순간부터 만남의 진짜 목적은 의심스러워진다. 수상한 인터뷰의 첫 질문은 이러하다. “오빠, 하루에 자위 두 번 해본 적 있어요?” 진혁은 당황하며 가영이 시작하려는 작업의 정체를 확인하려 들지만 이내 다음 질문이 날아든다. “그럼 세 번은요? 네 번은? 세 번 반은?”
영화의 공간은 술자리에서 술자리로 이동한다. 밤은 깊어가고 취기는 오르지만, 가영은 지칠 줄 모른다. 천하의 공격수답게 대사를 치며 영화를 누빈다. ‘가영’의 질문은 아슬아슬한 수위를 넘나들지만 ‘영화 작업’이라는 방패 덕분에 그럭저럭 능청을 유지한다. 속내가 빤히 드러나는 질문과 희롱에 가까운 태도에도 불구하고 진혁은 대답을 거부하지는 못한다. 어쨌거나 질문의 필요와 불필요, 혹은 적절과 부적절을 판단하는 쪽은 가영이기 때문이다.
묻고 대답한다는 단순한 흐름에서 대화의 주도권을 쥔 사람은 질문자인 가영이다. 가영은 우위를 점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먼저 말하고 계속 물을 것. 진혁은 항변한다. 그는 가영보다 연장자이고 애인도 있다. 하지만 가영은 물러서지 않는다. 흥미로운 건 가영이 온갖 플러팅을 시도하면서도 시종일관 진지함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진혁의 대답을 노트에 받아 적는 행위는 남자의 말이 지닌 가치를 증명하기보다 가영 자신의 위치와 중요성을 부각한다. “이건 그냥 제 생각 쓰는 거예요.”


정가영 감독의 영화에는 법칙처럼 다음의 세 가지가 곧잘 등장한다. 말과 술, 그리고 가영. 가영은 남자들에게 말을 걸고 술을 권하면서 능란하게 관계를 주도한다. 감독이 각본과 연출뿐만 아니라 연기까지 도맡는 일이 드물지는 않지만, 정가영 감독이 가영이라는 캐릭터를 구축하는 방식과 그 에너지는 좀 더 집중해서 들여다 볼만하다. 전작 <비치온더비치>에서 가영은 헤어진 남자친구를 무턱대고 찾아간다. 영화는 끊임없는 대화의 핑퐁으로 구성되고 가영은 새로운 연애를 시작한 전 남자친구에게 섹스를 요구한다. 단편 <내가 어때섷ㅎㅎ>에서는 여자친구를 찾아 온 선배에게 외로워 보인다며 서슴없이 연애를 제안한다.
영화 속 가영들은 누구보다 말과 술의 힘을 믿으며, 그것들을 무기처럼 장착한 채 질문하고 요구하고 제안한다. 정가영 감독의 영화가 통쾌함과 재미를 안겨주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역할 전환에 있다. 가영은 대화의 판을 깔고 손에 쥔 패를 흔들어 보이며 상대를 긴장하게 만든다. 남자들의 진심어린 충고에도 걱정을 가장한 비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철저하리만치 관계의 주와 부를 나눈다. 카메라는 남과 여,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비추지만 화면을 장악하는 쪽이 누구인지는 금세 판가름이 난다. <밤치기>에서 가영은 영화라는 권력을 차지함으로써 진혁에게 마음껏 질문하고 그 대답을 평가한다. 진혁이 가영에게 질문을 되돌리려 하자 ‘가영’은 이렇게 쏘아붙인다. “저한테 물어볼 거면 오빠도 시나리오 써야 돼요.”
“오빠, 키스 잘해요?”, “오빠, 몸 좋아요?”를 질문하던 가영은 급기야 “저 오빠랑 자는 건 불가능하겠죠?”라고 묻는다. 남자는 그런 가영을 두고 까분다거나 불쾌하다고 표현하지만, 가영은 별로 주눅 든 기색도 없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며 구애를 작정한다. 영화 속 두 사람의 밤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영화의 속성을 닮았다. 무엇이 진실인지,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점차 모호해지다가 결국 중요하지도 않게 되어버린다. 남는 것은 가영의 결말이다. 그것이 “형편없는 진짜 결말”이든 이상적인 “최고의 결말”이든 영화의 끝은 오늘 밤의 제안자 가영의 몫으로 오롯이 남아 있다.
가영은 연마하지 않은 기술의 소유자다. 아직 만들지 못한 영화의 감독인 것과 마찬가지다. 영화 속 가영은 자신을 스스로 “영화 좋아하는 사람” 또는 “시나리오 작가”로 명명할 뿐 감독이라 칭하지 않는다. 결말 없이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는, 미처 영화가 되지 못한 ‘아이디어’를 떠들면서 진혁에게 쉴 새 없이 제안하고 그 제안을 수락할 기회를 준다. 이 빈약하고도 뻔뻔한 밀어붙이기는 과연 제안의 기술이 될 수 있을까. 타고난 공격수인 가영에게 경기의 최종 스코어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가영은 그저 골대를 두드리는 일에 열중할 뿐이고, 완급 조절에 실패할지언정 그 막무가내로 힘을 갖는다. 가영이 어떤 결말을 선택하는지 관객은 끝까지 지켜볼 것이다. 치기 어린 오늘 밤, 최종 스코어가 몇 대 몇인지 궁금해하면서.

밤치기 Hit the Night 제작 레진엔터테인먼트 감독 정가영 출연 정가영, 박종환, 형슬우 배급 무브먼트 제작연도 2017년 상영시간 84분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개봉 2018년 1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