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탈에서 바운스
<산양들> 유재욱·노다해(with 금효제)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6-07-31

산양은 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의 국제 보호종이다. 인간이 도로를 내며 이동 경로를 끊어놓은 탓에 때때로 길을 잃고 도심으로 내려오지만, 본래 산양은 가파른 절벽과 바위산을 자유롭게 오르내리는 동물이다. 험준한 산악 지대에서 풀쩍 뛰어다니는 산양들의 모습은 길 없는 곳에서 집을 짓는 아이들과 겹쳐 보인다. <산양들>의 인혜, 서희, 정애, 수민은 진로 희망서를 백지로 내고 “생각이 없으면 짐승과 다를 바 없다”는 꾸지람을 듣는다. 그러나 정해진 길이 없다고 해서 나아갈 힘까지 잃은 것은 아니다. 입시와 경쟁이 청소년의 길을 지우는 동안, 네 소녀는 학교 밖으로 달아나 동물을 구하고 비탈진 땅에 자신들만의 쉘터를 세운다. 모험도 안전도 스스로 도모하며, 우선은 숨 돌릴 틈부터 만들 작정이다.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청소년 힙합 크루를 다뤘던 <라임크라임>(이승환·유재욱, 2021) 이후, 유재욱 감독이 두 번째 장편 <산양들>로 돌아왔다. 전작의 생생한 활기는 그대로 유지하되, 인물과 공간을 엮는 솜씨는 한층 단단해졌다. 안정적으로 경력을 이어가는 여성 촬영감독이 여전히 드문 환경에서 <태어나길 잘했어>(최진영, 2022), <아마도 미래는 있다>(윤한나, 2023) 등을 꾸준히 촬영해 온 노다해는 올여름 <이반리 장만옥>(이유진, 2026)에 이어 두 편의 장편을 선보인다. 학교의 반듯한 선에서 야생의 비탈로, 네 소녀의 움직임을 함께 설계한 두 사람을 만났다. 여기에 유재욱과 부부이자 <산양들>을 공동 집필한 금효제 작가가 깜짝 합류했다. 서로를 선택한 세 사람과 함께, 길이 지워진 자리에서 영화가 새로운 길을 만드는 과정을 되짚어 보려 한다.

 

 

감독과 촬영감독 사이에 다리를 놓은 사람이 금효제 작가라고.

금효제_ 단편 <무브 포워드>(김나연, 2022)에서 스크립터로 일했을 당시, 촬영을 노다해 감독이 맡았다. 함께 작업했던 기억이 무척 좋아서 유재욱 감독에게 추천했다. 

노다해_ 두 분이 시나리오를 직접 출력해서 찾아왔던 기억이 난다. 요즘은 대부분 파일로 보내는데, 왠지 미팅에 신경을 써준다는 인상을 받았다.   

금효제_ 어느 정도는 정성을 보여주고 싶었다. 본격적으로 제작에 들어가기 전이기에, 어떤 실체로 제시할 만한 게 시나리오밖에 없기도 했다. 아무것도 정해진 바가 없는 상황이었다. 

유재욱_ 2023년에 노다해 촬영감독을 처음 만났다. 영화진흥위원회를 비롯한 여러 지원 사업을 알아보는 동시에, 촬영감독과 프로듀서처럼 중요한 스태프부터 합류를 제안했다. 특히 촬영감독은 작품에서 큰 역할을 하는 만큼 빠르게 결정할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결국 2024년 영화진흥위원회 제작지원에 선정돼 그해 촬영했다. 

 

<라임크라임>에서는 유재욱 감독이 직접 촬영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별도의 촬영감독과 함께해야겠다고 판단한 이유와 노다해 촬영감독의 전작에서 눈여겨본 점이 궁금하다.

유재욱_ 연출과 촬영을 병행하는 일이 힘들었다. 무엇보다 연출자가 머릿속에 그린 장면만 고집하기보다 촬영감독이 제안하는 새로운 그림과 맞춰 나갈 때, 영화가 훨씬 풍부하고 자연스러워진다고 봤다. 노다해 촬영감독의 전작을 찾아봤는데 <태어나길 잘했어>의 안정적인 화면과 구도가 좋았고, <유산>(남순아, 2021) 같은 장르영화도 무척 재미있었다. 촬영자는 단지 예쁜 앵글과 그림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아니라, 인물을 하나하나 포착하며 서사를 쌓아가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유산>을 보니 카메라가 인물에게 다가가고 물러나는 순간과 거리를 무척 예민하게 조절하더라. 그러면서 어느 지점에서는 정확히 멈추기도 했다. 그 거리감이 관객에게 이 영화를 어떻게 즐겨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알려준다고 느꼈다. 특히 주연을 맡은 한해인 배우의 연기를 포착하고 끌고 가는 방식이 좋았다. <산양들>은 중심인물이 여럿이기에 더욱더 그런 예민함이 필요했다. 함께하면 시너지가 날 거라는 기대가 생겼다.

 

유재욱 감독이 설명하는 동안 금효제 작가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는데.

금효제_ 이야기를 듣다가 예전 대화가 떠올랐는데, 나도 모르게 표정에 드러났나 보다. 노다해 촬영감독과 미팅을 하기 전에, 둘이서 같이 전작들을 살펴봤다. 그때는 지금처럼 정돈된 말로 평가하지 않았다. 그냥 “오, 잘 찍었다!” “와, 좋은데?”라는 말을 반복하는 식이었다. (웃음) 

유재욱_ 굉장히 일차원적으로 반응했다. 평소에도 이런 얘기를 잘 안 하다 보니 부끄럽긴 하다. 

노다해_ 감독님도 나도 서로의 작업을 두고 막 칭찬하거나 뭐가 훌륭하다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으니까. 

<산양들>
<산양들>

노다해 촬영감독은 <산양들>의 어떤 점에 끌렸나. 유재욱 감독이 앞서 말한 대로 중심 인물이 한두 명이 아닌 데다 야외 촬영, 동물 촬영 등 난관이 예상됐을 법한데.

노다해_ 우선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네 명의 여고생이 갑자기 산으로 들어가서 쉘터를 짓는다는 설정부터 흥미롭지 않나. 시나리오가 잘 읽혔고 머릿속에 그림도 선명하게 그려져서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콘티를 짜면서도 유난히 신났던 장면들이 있는데, 그건 시나리오를 읽을 때부터 나도 모르게 ‘여긴 어떻게 찍을까? 이렇게 찍는 편이 나으려나?’ 생각한 부분이었다. 시나리오 페이지를 넘길수록 욕심이 나더라. 여고생들이 등장하고 학교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면 으레 예상하는 방향이 있지 않나. 처음에는 어떤 흐름을 짐작하며 글을 읽었는데, 이야기가 점점 종잡을 수 없는 곳으로 향했다. ‘응? 이렇게 간다고?’ 싶은 순간들이 계속 나타나는 거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의 관계, 또 아이들과 동물의 관계가 매력적으로 변해 갔고, 그 사이에서 영화가 전달하려는 의미가 자연스레 만들어졌다. 개인적으로 의미만 가득한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산양들>은 해석을 한 방향으로 한정하지 않았다. 내게는 자유에 관한 이야기로 다가왔지만, 다른 사람은 전혀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물론 누군가는 영화를 보고 “이런 고등학생들이 어디 있어?”라고 반응할 수도 있다. 근데 영화는 조금 그래야 재미있지 않나. 내가 할 수 없는 일탈을 이 아이들이 대신 해준다는 점에도 끌렸다.

 

유재욱 감독은 만나 보니 어땠나. 시나리오 속 세계를 파악하는 것만큼, 감독이 함께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작업자인지 확인하는 일도 중요했을 텐데. 

노다해_ 그건 몇 번 만난다고 알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나를 포함해 어느 정도 사회생활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회적 가면을 쓰지 않나. 그래서 금효제 작가를 믿었다. (웃음) <무브 포워드> 현장에서 내가 신뢰했던 사람 중 한 명이고, 그분이 선택한 사람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했다. 

 

서로 ‘금효제가 선택한 사람’과 ‘금효제가 추천한 사람’을 믿고 만난 셈이다. 금효제 작가는 두 사람의 조합을 어떻게 예상했나.

금효제_ <산양들>은 솔직히 촬영하기 쉽지 않은 영화였다. 구현할 수 있을지 우리 또한 확신하기 어려운 장면도 많았다. 하지만 내가 아는 노다해 촬영감독이라면 어떻게든 찍어낼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함께 일했던 현장에서 노 감독은 예상치 못한 상황이나 감정적 순간에도 기둥 역할을 해줬다.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하면서 우리가 지금 함께 영화를 찍고 있다는 사실을 계속 상기시켜 주는 사람이었다. 이번 작업에서도 그런 든든함과 즐거움이 공존할 거라 예상했다. 근데 정작 나는 <산양들> 촬영장에는 못 갔다. 콘티 작업 중간에 출산했거든.

노다해_ 사실상 그때부터가 감독과 내게는 진짜 시작이었지. (웃음) 나는 감독과 꽤 잘 맞는다고 느꼈다. 내가 촬영에 몰입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예민해질 때가 있다. 촬영을 위해서 같이 계획하고 약속했던 바가 있는데, 현장에서 이행되지 않는 경우가 생기거든. 그때 찾아가서 “감독님, 우리 이렇게 하기로 했잖아요” 말하면 화를 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감독은 전혀 연연하지 않고, 늘 같은 톤으로 “지금 시간이 부족해서요” 하며 조곤조곤 상황을 설명해 줬다.

유재욱_ 그랬나? 나는 하나도 생각이 안 나는데.

 

싸움이 성립되지 않는 사람이네.

노다해_ 유재욱 감독은 내 의도를 아니까. 내가 감정적으로 화를 내는 것이 아니고, 지금 해결해야 할 일에 집중하느라 그렇게 말한다는 걸 알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나도 이유를 들으면 이해하고.

 

교내 사육장에서 야생의 쉘터로 이동하는 이야기의 출발점은 무엇이었나. <라임크라임>의 소년들이 함께 힙합 크루를 이룬다면, <산양들>의 소녀들은 힘을 합쳐 쉘터를 마련한다. 친구들과 뭔가를 같이하는 경험, 정상 범주에서 이탈하는 움직임이 두 작품을 잇는다.

금효제_ 초기 아이디어는 생존주의였다. 나는 일상에서 생존주의에 관심을 두고 있었고, 유재욱 감독은 그걸 극 안에서 펼쳐보고 싶어 했다. 처음부터 여고생들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여성 한 명을 주인공으로 시작했는데, 각본 작업하면서 네 명의 여고생이 등장하는 이야기로 발전했다.

유재욱_ 나는 청소년 드라마를 좋아한다. 청소년은 해야 하는 것도 많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것도 많다. 금기와 억압에 시달리는 존재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들만의 방식으로 뭐든 돌파할 수 있는 힘이 있다. <라임크라임>을 만들면서도 그 점이 재미있었다. 두 번째 영화도 청소년 이야기로 가되, 여성이 주인공인 모험극을 만들면 굉장히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영화에서 여성 청소년들이 모험하는 이야기를 본 적이 거의 없으니까. 돌이켜보면 청소년 시절에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모험이든 성취든 무언가를 함께 해보고 싶은 욕구가 컸다. 주변에서는 공부하라거나 정해진 방향대로 가라고 말하지만, 그럴 때도 “나는 내 길을 가겠다”라는 마음이 있었다. 독립심이라고 해야 할까. 어릴 적 살던 곳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그린벨트 같은 지대가 나타났는데, 거기서 친구들과 놀고는 했다. 자유롭다고 느꼈다. 우정도 생기고 모험심도 자라나고, 어떻게 보면 그런 기억들이 나와 이 영화의 중심을 잡고 있는 것 같다.

금효제_ 나는 그런 일을 해보고 싶었지만 무서워서 못 했다. 외딴곳이나 출입 금지 구역을 보면 들어가고 싶으면서도 겁이 났다. 너무 궁금한데, 대낮에도 혼자 들어가기는 무섭더라. 그런 마음도 시나리오에 섞여 들어갔다. 영화에서도 처음엔 인혜 혼자 바리케이드를 넘어서 산속으로 들어가지만, 다음에는 친구들을 한 명씩 계속 데려오지 않나. 

유재욱 ⓒ이영진

겉보기엔 넘으면 그만인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 그 담을 넘기까지는 쉽지 않은 경우가 많으니까. 세상에는 생각보다 금지선이 많다는, 특히 여성이나 청소년처럼 사회적 약자일수록 출입을 제한당하는 일이 잦다는 사실을 영화 덕분에 상기해볼 수 있었다. 

노다해_ 그래서 감독님이 말한 자유로움, 해방감 같은 것이 와 닿았다. 게다가 영화에서 보통 청소년들이 출입금지 구역으로 들어간다고 하면, 공사장이나 폐건물 같은 장소를 떠올리지 않나. 그런데 이 아이들은 산으로 들어간다. 도시에서 이탈한 뒤 야생에서 자기들만의 공간을 만든다는 점이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유재욱 감독과 금효제 작가는 공동각본을 어떻게 나눠 썼나. 많은 인물과 장소, 동물을 품은 영화인 만큼 상상력과 독립영화의 제작 조건을 조율하는 과정도 필요했겠다.

금효제_ 먼저 이야기의 큰 흐름을 정한 뒤 장면을 하나씩 붙여가며 계속 토론했다. 그걸 바탕으로 유재욱 감독이 초고를 썼고, 이후에는 둘이서 세부 장면을 나눠 쓰며 고치는 작업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오늘은 5신에서 10신까지 다시 써보자” 하고 각자 쓰다가 모여서 서로 쓴 것을 읽고 이야기하는 식이었다.

유재욱_ 나는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현실적인 조건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닐 수도 있지만. (웃음) 제작지원 등을 통해 만들 수 있는 예산의 한계를 생각하면서 최대 25회차 안에 찍을 수 있도록 썼다. 주요 장소도 일곱 군데 정도로 제한했다. 제작은 컴팩트하게 하되, 완성된 영화는 많은 것을 쏟아부은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싶었다. 지원 심사 과정에서는 야생의 느낌을 지닌 장소를 구하기 어렵다거나 출연 동물의 촬영과 관리가 쉽지 않을 거라는 걱정을 많이 들었다. 그런 우려를 접하며 오히려 더 철저히 준비했다. 실제 촬영을 앞두고 보니 확보한 예산과 일정 안에서는 내가 예상한 것보다 회차가 조금 부족했다. 원래 버스터미널에서 벌어지던 장면을 교실로 옮기는 식으로 조정했다. 나는 그런 변화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꿀 기회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장면을 다시 들여다보다가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와 더 좋아지는 경우도 있고, 촬영에 필요한 에너지를 아끼면 그 안에서 다른 무언가를 더 시도할 수도 있으니까. <산양들>은 독립영화 제작 조건을 생각하면 수행해야 할 미션이 많은 작품이었다. 모든 것을 똑같이 끌고 가다가는 프로덕션 자체가 절뚝일 수 있다고 봤다. 꼭 필요한 한두 개의 중요한 그림은 확실히 가져가되 나머지는 효율적으로 덜어내고 조정해야 했다.

 

전작과 비교하면 확실히 드라마에 안정감이 생겼다. 동시에 특유의 리듬감과 익살은 여전한데, 두 번째 작품을 만들면서 연출적으로 목표했던 바는 뭐였나. 새롭게 장착하고 싶었던 기술이라든지, 포기하지 않고 밀어붙인 부분이라든지.

유재욱_ 솔직히 고백하면 <라임크라임>은 편집 과정에서 삭제한 신이 많았다. 드라마의 흐름을 고려하다 보니 신을 드러내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산양들>에서는 촬영했던 장면을 어떻게든 버리지 않고 전부 다 영화에 활용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니까 그만큼 시나리오를 적절하게 쓰고자 했다. 관객이 기대하는 것, 내가 바라는 것, 그리고 캐릭터가 원하는 것을 어떤 지점에서 최대한 잘 만나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편집 과정에서 이야기가 바뀔 수도 있다. 가능하면 원래 의도대로 영화가 완성될 수 있도록 최대한 바탕을 잘 다져 놓자. 시나리오 쓰는 사람으로서의 강박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이런 목표를 세우고 작업하다 보니 전작보다 시나리오에 완성도가 생겼던 것 같다.

 

<산양들> 속 네 명의 소녀들은 저마다 이상한 구석과 사회에서 결함이나 핸디캡으로 취급할 만한 특성을 지녔다. 흥미로운 것은 청소년의 성장과 모험을 다룬 여느 작품들과 달리, <산양들>은 그들 각자의 방을 비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물들의 내면을 다 안다는 듯 우울이나 트라우마를 파헤치지도 않고, 애초에 그들을 좀처럼 혼자 두지도 않는다.

금효제_ 원래는 방이 등장하는 장면도 있었다. 인혜가 부모님 가게에 딸린 골방을 쓴다는 설정이었는데, 내가 실제로 그런 곳에서 지낸 경험을 반영했다. 수민의 집과 방이 등장하는 버전의 시나리오도 있었다. 그러다 촬영고를 만들며 방 신을 모두 덜어냈다. 각자의 방이 나오지 않아도 인물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들의 방을 대신하는 공간이 쉘터일 수도 있고.

유재욱_ 연출하면서 이 친구들에게 어느 정도까지 접근해야 할지 고민했다. 아이들이 학교와 쉘터에 모여 함께 어울리는 모습을 옆에서 따라가며 바라볼 수는 있다. 그런데 굳이 방까지 들어가서 내면을 속속들이 벗겨내야 할까. 그것이 반드시 더 좋은 접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이 인물들과 성별이 달라서 그런 결정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 영화에서는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일이 중요했다. 그 거리가 코미디를 만들기도 하고, 관객이 인물에게서 한 발짝 물러나 그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도 한다. 그것이 <산양들>의 장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노다해_ 그래서 나는 후반부에 아이들이 차 안에서 대화하는 장면을 좋아한다. 고민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각자 마음속에 품고 있는 불안이 전해지거든. 나 역시 그 시기를 지나왔기에, 아이들이 주고받는 짧은 말이 무의미하게 들리지 않더라. 그러니까 실은 앞날이 확실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인혜는 자신만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다고 느끼지만 다른 친구들의 미래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불안정하다. 두 살이나 많은 수민이는 재수학원에 등록했고, 서희는 자취를 시작하지만 가장 저렴한 고시원에 들어간다. 짧은 대화에서도 그런 사정이 모두 느껴져서 촬영하면서도 많이 이입했다. 레커차가 와서 차를 끌고 내려가는 엔딩도 마음에 남았다. 그 시기에 겪을 법한 모험이 마무리되는 순간인데, 인생은 앞으로도 그런 식으로 계속 수습하고 해결해야 할 것이다. 모두 대학에 붙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식의 ‘해피 엔딩’이 아니라 좋았다. 네 사람은 이제 각자 어디론가 갈 것이다. 앞으로 자주 만나지 못할 수도 있고 오히려 더 가까워질 수도 있지만 아직은 알 수 없다. 야생으로 나가기 직전의 순간, 네 사람이 함께 무언가를 해냈다는 사실만 남긴다. 그런 영화라서 마음이 많이 갔다.

금효제 ⓒ이영진

배우들과는 어떻게 만났나. 비슷한 또래 배우들을 여럿 만났을 텐데, 누구에게 어떤 인물을 맡길지 결정한 과정이 궁금하다.

금효제_ 서희 역의 이승연 배우는 내가 한번 만나보자고 제안했다. <수능을 치려면>(김선빈, 2023)을 보고 굉장히 인상에 남았던 터라, 언젠가 함께 작업하고 싶다고 생각했거든. 당시엔 특정 역할을 염두에 두지 않고, 전부 열어놓은 상태로 만났다. 미팅해 보니 감독과 프로듀서도 다행히 좋다고 해서 일찌감치 캐스팅했다.

유재욱_ 정애 역의 박효은 배우는 만나자마자 마음이 갔다. 당시 중학교 3학년이어서 너무 어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어린 나이에서 나오는 순수하고 맑은 에너지가 영화에 큰 도움이 되겠구나 싶었다. 천진난만한 매력이 있는 배우였다. 동작 하나, 대사 한마디만 해도 그전에 이 인물이 살아왔을 서사가 펼쳐지는 듯했다. 한편, 수민은 원래 병약하고 여리여리하면서 시니컬한 인물로 구상했다. 그런데 최수인 배우를 만나보니 굉장히 씩씩하고 에너지가 넘쳤다. 다른 세 배우와도 확연히 다른 힘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수민에 관한 생각을 바꿨다. 수민이 영리하고 자기만의 방식이 강한 인물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몸이 아픈 부분은 있지만 에너지가 넘치고, 그러면서도 부모에게 시달리는 면이 있으면 훨씬 입체적으로 그려질 듯했다. 수민은 초반에 어느 정도 빌런처럼 보이다가, 넷 중 가장 늦게 무리에 합류한다. 그렇게 강하고 혼자인 데 익숙한 다른 친구들을 인정하고 함께할 때, 그 선택이 더 큰 의미를 얻으리라 봤다. 인혜 역의 박혜진 배우는 이승연 배우와 비슷한 시기에 캐스팅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노다해 촬영감독이 먼저 추천했던 친구다.

 

그러고 보니 노다해 촬영감독은 박혜진 배우와 <태어나길 잘했어>에 이어 두 번째로 만났다.

노다해_ 박혜진 배우가 어린 춘희 역이었다. 실제로 만난 지는 오래됐지만, 연기를 계속하고 있다는 건 알았다. 오랜만에 보고 놀랐다. 그사이 많이 컸더라. (웃음) <태어나길 잘했어>를 찍을 때는 훨씬 어렸고 낯도 많이 가렸다. 말도 거의 없는 친구였다. <산양들>에서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나니 반가웠다. 이제 말도 잘하고, 아주 적극적이더라. 그래도 특유의 말투와 걸음걸이는 그대로였다. 

유재욱_ 우리도 이미 후보 명단에 올려둔 배우였다. 미팅에서 짧게 리딩을 했다. 인혜가 동물에게 말을 거는 장면을 읽었는데, 너무 웃겨서 다들 뒤로 넘어갈 정도였다. 인혜가 가진 너드 특유의 엉뚱함을 혜진 배우가 정말 잘 살렸다. 욕설이 들어간 대사를 시켜본 순간 “이 배우다” 싶었지.

노다해_ 평소에 욕을 안 하는 사람이 억지로 내뱉는 것처럼 어색하면서도 감정은 정확히 담겨 있고. (웃음)

유재욱_ 네 배우를 나란히 놓고 보니, 꽤 멋진 조합을 완성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함께함으로써 네 사람은 서로를 새로운 세계로 거듭 초대한다. 인혜와 서희가 서로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고, 마침내 다른 친구들과 함께 <산양들>의 세계로 걸어 들어가는 흐름이 보였다. 

 

초반에 네 아이가 선생님과 모의 면접을 치르는 장면은 캐릭터를 대단히 효율적으로 소개한다. 카메라는 거의 움직이지 않지만 전경에서 면접하는 인물과 후경에서 기다리는 아이들이 한 화면에 담기고, 저마다 카메라 앞에 머무는 방식도 조금씩 다르다. 학생을 면접하듯 바라보고 판단하며 감시하는 학교의 시선까지 하나의 세팅 안에 들어온다. 어떤 카메라의 특성을 활용했고, 네 인물을 각각 어떻게 보여주고 싶었나.

노다해_ 인물이 네 명이니 어떤 카메라를 사용할지부터 고민했다. 장비는 예산과 연결된 문제라 제작진과 논의해야 하는데, 다행히 감독님이 장비 센터를 운영해서 카메라는 마음껏 쓸 수 있었다. (웃음) 아리의 알렉사 라지 포맷을 선택했다. 화각의 느낌을 살리면서 후경까지 잘 보이게 담을 수 있어서 그 특성을 충분히 이용해 보자고 했다. 앞에서 한 인물이 조명받더라도 뒤편에 다른 친구들이 함께 걸리면 재미있는 화면이 만들어진다. 모의 면접도 한 명씩 따로 나눠 찍기보다 전경에 면접 중인 아이를 두고 후경에 앉아 기다리는 아이들까지 보여주는 편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인물이 앞에 있더라도 포커스를 뒤로 옮겨 다른 친구들의 상황을 보여주는 방식을 많이 활용했다. 아이들을 처음 불러 모으는 장면도 그렇다. 정애가 수민에게 다가가 이야기할 때 뒤편에 인혜와 서희가 걸리고, 카메라가 빠지면서 포커스가 그 둘에게 옮겨간다. 한 인물을 보고 있는 동안에도 다른 인물의 존재가 계속 신경 쓰이게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하니 학교가 얼마나 좁은 공간인지도 느껴지고, 아직 한데 뭉치기 전인 아이들이 이미 하나의 팀처럼 보이더라.

노다해_ 초반에 아이들이 한 명씩 다른 친구를 찾아가는 장면도 작은 미션을 차례로 수행하는 것처럼 찍어보자는 이야기를 나눴다.

 

인혜와 서희가 찬영(이효제) 앞에서 ‘이달의 얼굴’ 표창을 받는 장면도 재밌다. 배우들의 표정, 화면 전환, 카메라의 삐그덕대는 움직임이 독특한 코미디 리듬을 만든다.

노다해_ 그 장면의 촬영 콘셉트는 ‘고등학교 방송반 카메라’였다. 줌을 조금 어설프게 당기면서도 움직임은 과감하게 가져가려고 했다. 처음에는 찬영의 얼굴 클로즈업에서 카메라가 나오는 식이었는데, 감독님이 “저는 찬영이 콧구멍에서 카메라가 빠지면 좋겠어요”라고 하더라. (웃음) 카메라가 움직이는 속도와 줌이 들어가는 타이밍은 테이크를 거듭하며 감독님과 맞춰갔다.

노다해 ⓒ이영진

학교와 야생은 제도와 탈주의 대비만큼이나 조형적으로 다른 공간이다. 직선과 평면으로 이루어진 교실을 벗어나서 아이들은 높낮이와 불규칙한 선으로 가득한 자연으로 향한다. 영화는 두 공간의 차이를 보여주는 동시에, 이를 하나의 연속된 세계로 설득해야 했는데.

유재욱_ 쉘터는 남양주에 있었다. 학교는 두 곳에서 나눠 찍었다. 교실과 급식실 같은 내부 공간은 인천에 있는 학교를 활용했고, 사육장이 있는 외부 공간은 충남 서산에서 촬영했다. 공간을 찾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장소가 가드레일이 있는 길이었다.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인데, 지나치게 판타지적이면 안 됐다. 완전히 깊은 산속은 아니고, 뒤편으로는 도시의 흔적이 보이면서 가드레일 너머로 야생이 펼쳐질 것 같은 곳이어야 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출발해 그곳까지 갈 수 있다고, 갈 만하다고 관객을 납득시킬 만한 공간이 필요했다. 머릿속에는 너무나 당연하고 선명하게 존재하는 장소였는데, 실제로는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거의 포기하고 그냥 산속 같은 곳으로 바꿀 생각까지 했다가 마지막에 제작부가 찾아냈다.

노다해_ 학교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도 신경 썼다. 급식실처럼 통창으로 된 공간에서는 바깥 배경까지 다른 장소들과 연결되어야 했다. 다행히 촬영한 학교에서는 창밖으로 산과 자연이 보였다. 시나리오를 읽으며 학교, 교내 사육장, 쉘터, 완전한 자연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생각했다. 아이들이 갑자기 전혀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가까이에 있던 자연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길 바랐다.

 

쉘터가 드넓은 평지가 아니라 완만한 경사를 품은 지대라는 점도 흥미롭다. 아이들이 쉘터 안팎을 오갈 때마다 관계의 모양도 달라진다. 혼자 떨어져 있거나 무리를 이루는 모습이 언덕과 구조물의 높낮이를 따라 계속 재배열되더라.

노다해_ 로케이션 헌팅을 굉장히 많이 다녔다. 최종 후보는 두 곳이었다. 하나는 크고 드넓은 평원이었고, 다른 하나가 실제로 촬영한 경사진 지대였다. 두 장소를 두고 키스태프들이 모여 회의했는데, 미술감독과 나는 넓고 평평한 장소로 가면 오히려 판타지처럼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림은 멋있겠지만 아이들이 경계를 넘어 도착한 곳에 끝없는 평원이 펼쳐지면 너무 환상적인 공간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싶었다. 또한 미술감독이 경사진 지대를 비닐하우스 등의 구조물 설치에 활용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는데, 그 발상도 재미있게 다가왔다. 다만, 시나리오에 이미 ‘평원’이라고 적혀 있었기에 내 머릿속에 자리 잡은 이미지를 떨쳐내기가 쉽지는 않았다. 

유재욱_ 정말 많이 고민했다. 그때 금효제 작가가 경사진 곳이 좋다면서 “이곳은 둥지 같다”라고 표현했다. 그 말이 크게 다가왔다. 아이들이 드넓은 평원으로 나아가는 것보다 자신들을 품어주는 아늑한 공간에 도착하는 편이 이 영화에는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노다해_ 동시에 나는 인물에게 고유한 성격이 있듯 그 인물이 머무는 공간에도 캐릭터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반리 장만옥>도 그랬고 <산양들>에서도 각 공간에 뚜렷한 성격을 부여하려 했다. <산양들>의 학교는 직선적이고 평평한 공간이다. 깊이가 생기더라도 복도가 길게 뻗어 있는 이미지를 활용하는 정도다. 반면 쉘터와 자연은 비선형적인 공간이다. 지형에 높낮이가 있고, 울타리나 비닐하우스의 선도 반듯하지 않다. 인물들의 동선 역시 학교에서보다 자유롭게 보이도록 신경 썼다. ‘낮저밤이’처럼 시간대에 따라 쉘터의 인상도 완전히 다르길 바랐다. 자연은 낮과 밤에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주지 않나. 햇빛이 드는 낮에는 포근하고 따사롭지만, 밤이 되면 서늘하고 무서운 공간으로 바뀐다. 만약 내 전작들을 연결하는 뭔가가 있다면, 그건 특정한 이미지보다 공간을 하나의 캐릭터로 바라보는 태도일 것이다. <유산>에서도 집 자체가 중요한 캐릭터였다.

 

공간이 지닌 예측 불가의 기운, 거기에 인물들이 달리고 넘어지는 움직임이 더해지면서 영화는 활력을 얻는다. 인물들의 신체적 에너지를 화면으로 옮기기 위해 감독과 촬영감독은 어떻게 역할을 나눴나.

노다해_ 프리프로덕션 단계부터 인물의 동선과 블로킹을 많이 이야기했다. 전경과 후경을 활용해 여러 인물의 움직임을 담는 구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콘티를 짜면서 가장 즐거웠던 장면 중 하나가 아이들이 밤에 사육장으로 동물들을 훔치러 가는 대목이다. 네 사람이 어느 방향에서 들어와 어떻게 흩어지고 움직일지 세세하게 의논했다. 서희가 수시 합격 소식을 듣고 선생님에게 “너는 가라”는 말을 들은 뒤 나머지 아이들만 남는 장면도 한 컷으로 촬영했다. 그런 장면에서는 인물의 연기와 움직임 자체가 리듬을 만들어야 한다. 카메라는 인물에게 다가갔다가 다시 물러나며 관객이 어느 순간에 무엇을 봐야 할지 정해준다. 배우의 동선과 카메라의 움직임을 맞춰가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유재욱_ 세 명이나 네 명이 함께 등장해 앙상블 연기를 펼치는 장면이 많아서 블로킹에 각별히 신경 썼다. 두 사람이 가만히 서서 대화하는 영화가 아니라 인물들이 계속 움직인다. 각자의 감정과 상황을 고려해 누가 높은 곳에 서고 누가 아래에 있을지, 어느 순간에 어디로 이동할지를 콘티 단계에서 정했다. 물론 콘티대로만 찍을 수는 없다. 실제 공간에 가면 동선을 다시 정리하고 배우들과 맞춰본다. 리허설을 보면서 연출을 수정하면 촬영감독이 그 움직임에 맞춰 앵글과 카메라 동선을 다시 조정했다. 그 과정을 반복하는 일이 나도 재미있었다.

노다해_ 사육장에서 서희와 인혜가 만나 처음으로 사료를 나눠먹는 장면도 완성된 영화만 보면 단순해 보인다. 하지만 서희가 언제 들어오고 인혜가 언제 물러났다가 다시 다가올지 타이밍을 정하는 데 고민이 많았다. 찬영의 집에 인혜가 들어가는 장면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어디로 들어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지 합을 정교하게 맞췄다. 동선에서 리듬을 만들어내는 것이 신체 에너지를 활용하는 우리의 방식이었다. 

 

서희가 깊은 구덩이에서 친구들의 손에 이끌려 올라오는 장면은 네 사람의 관계와 우정을 신체로 압축해 보여준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숏과 위에서 내려다보는 숏이 이어지는데 실제 촬영 환경은 어땠나.

노다해_ 어느 사찰이 소유한 야산이었는데 촬영 직전에야 겨우 찾았다. 답사를 갔더니 길조차 없는 진짜 야산이었다. 거의 네발로 기어 올라갔다. “일이 일어나려면 이런 데에서 나겠구나” 싶을 정도였다. (웃음) 촬영팀에 연락해서 집에 있는 배낭을 전부 가져오라고 했다. 손으로 장비를 들고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아니어서 배낭에 나눠 담아 짊어지고 갔다. 실제 구덩이는 화면보다 훨씬 깊고 가팔랐다. 카메라를 좀 더 아래로 내릴 수 있었다면 경사가 확연히 보였을 텐데 물리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화면이 실제보다 덜 험하게 나온 셈이다. 촬영 전에 감독님이 “여기로 올라올 수 있어요”라며 직접 시범을 보였는데, 다들 고개를 저었다니까.

유재욱_ 문제는 나야 한 번 올라간다지만, 서희는 그걸 열 번은 반복해야 했다는 거다. 혼자서는 못 올라갈 사람도 많을 만한 경사였다. 촬영 끝난 뒤 이승연 배우가 다리가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힘들었다고 하더라.

노다해_ 그 야산에서 촬영할 때야말로 모든 스태프가 산양이 된 듯했다. 가파른 비탈에 각자 자리를 잡고 서 있어야 했다. (웃음)

<산양들>
<산양들>

오리와 닭 등 다양한 동물을 촬영한 경험도 듣고 싶다. 영화는 동물에게 묘기를 요구하거나 개와 고양이처럼 익숙한 귀여움을 부여하지 않는다. 소통과 통제가 어려운 대상을 어떻게 연출하고 촬영했나.

유재욱_ 기본적으로 동물에게 연기를 시키지 말자는 원칙을 세웠다. 특정한 행동을 해내길 기다리기보다 각기 다른 순간을 짧게 찍어 편집으로 연결하면 하나의 움직임처럼 보일 수 있으니까. 다행히 <산양들>은 고난도의 동물 연기가 반드시 필요한 영화도 아니었다. 그래도 동물과 함께 촬영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배우가 연기하는 동안 동물이 갑자기 울고 움직이고, 품에 안으면 발톱으로 긁기도 했다. 게다가 닭만 봐도 막상 가까이에서 마주하면 무섭거든. 배우들이 촬영 시 긴장하지 않도록 사전에 동물농장에 가서 직접 동물을 안아보고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 과정이 실제 촬영에서 큰 도움이 됐다.

노다해_ 영화 후반부에 오리가 박혜진 배우 품에 안겨 있는 장면이 있다. 그때는 오리도 배우도 서로에게 익숙해져서 정말 편안해 보였다. 둘이 교감하고 있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도 그렇게 가까이에서 오래 오래를 지켜본 건 처음이었다. 사육장에 물을 받아둔 큰 대야가 있었는데, 사람에게 익숙해지자 오리들이 그 안에서 계속 물장구를 쳤다. 그 모습을 보면서 ‘오리가 정말 물을 좋아하는구나. 그러면 저수지에 들어갔을 때는 어떤 모습일까?’ 상상하게 됐다. 사육장 안의 모습보다 자연에 놓였을 때의 모습을 더 많이 떠올렸다. 닭을 어떻게 나무 위에 올릴지도 큰 과제였다. 결국 이미지 자체는 CG로 합성해서 넣었지만, 촬영하면서 닭이 어떤 나무에 어떤 모습으로 앉아 있어야 자연스러울지 고민했다. 

 

인물만큼이나 동물에게도 일관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이 눈에 띄더라. 

노다해_ 사육장에 갇힌 동물들 곁에서 조류인플루엔자나 프랜차이즈 치킨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나. 그 동물들이 자연 속에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먹거리나 감염원이 아닌 하나의 생명으로 다가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죽은 토끼 민수의 모습을 꼭 보여줘야 하는지 의문도 있었다. 완성된 영화를 보니 그 역시 자연에서 이어지는 생의 일부였다. 바로 다음에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아이들 얼굴이 붙으면서 아이들이 죽음을 감각하는 순간도 생겨났다. 동물을 특별히 귀엽게 찍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동물이 예상과 다르게 움직이면서 계획을 바꾼 장면도 있었나.

유재욱_ 계속 인간과 영화를 찍다가 동물과 작업하니 그들의 특성을 알아가는 과정 자체가 재미있었다. 닭은 생각보다 장난꾸러기인데 밤이 되면 정확히 잠든다. 아이들이 밤에 사육장에 몰래 들어가 동물들을 탈출시키는 장면에서, 우리 상상으로는 닭들이 놀라 날아다녀야 했는데 실제로는 전부 자고 있었다. 깨워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앞선 테이크에서 조금 돌아다니는 모습을 촬영해 둔 게 있어서 그 소스를 활용하고 나머지는 자는 상태 그대로 찍었다. 억지로 움직이게 하기보다 동물의 상태에 맞춰 장면을 완성하자는 분위기가 스태프들 사이에 있었다. 오리 두 마리는 굉장히 친해서 한 마리를 안고 이동하면 다른 한 마리가 졸졸 따라왔다. 간식으로 유인할 수는 없어도 친구로 유인할 수는 있었던 셈이다. (웃음)

 

촬영 전부터 가장 불안했던 장면과 실제 현장에서 가장 마음을 졸인 장면을 이야기해본다면.

유재욱_ 가장 불안했던 건 인혜가 저수지에 들어가 오리 희선이를 데리고 나오는 장면이었다. 적당한 로케이션을 구하기도 어려웠고, 촬영 당일 날씨나 수중 안전처럼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았다. 막상 촬영에 들어가니 인혜도 희선이도 별일 아니라는 듯 척척 해냈다.

노다해_ 내가 가장 마음을 졸인 건 엔딩이었다. 차가 견인되고 네 아이가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해 질 녘에 찍어야 했다. 시간이 촉박했다. 레커차가 한번 가버리면 기회가 없을 듯했다. 다시 올라오는 동안 날이 금세 어두워질 테니까.

유재욱_ 그런데 레커차 기사님이 우리 설명을 잘못 알아듣고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내려가 버렸다. 순간 ‘망했다’ 싶었는데, 다행히 해 지기 전에 다시 돌아와 주셔서 한 번 더 찍을 수 있었다.

노다해_ 보통 레커차 촬영은 차량을 돌리기 쉽고 도로가 넓은 곳에서 하지 않나. 우리는 레커차가 오가기조차 어려운 길에서 해질녘에 찍어야 했다. 여러 조건이 한꺼번에 걸려 있어서 그날이 가장 힘들었다. 그 외에는 크게 힘들지 않았다. 날씨 운도 따라줬고. 태풍 오는 장면도 촬영 당일 하늘이 너무 맑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비는 오지 않으면서 하늘만 흐린 날이었다. 딱 우리가 원하던 날씨였다. 동물들의 돌발 행동은 제작팀이 잘 대처해 줘서 큰 문제가 아니었다.  

유재욱_ 로케이션 접근성이 변수였다. 산지 촬영의 경우, 차를 타고 올라가는 것부터 힘들었다. 경사가 심해서 차가 뒤로 밀릴 정도였다.

노다해_ 촬영지까지 이어지는 비포장도로가 1km가량 됐다. 날씨가 궂은 날에는 차량이 빠지기도 해서 사람과 장비를 다른 차에 나눠 태워야 했다. 장소 자체는 재미있었다. 다음 날 아침 촬영하러 올라갔더니 알록달록한 텐트들이 가득했다. 알고 보니 캠핑 명소더라. 사람들 깨우러 돌아다녔다. “이제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죄송하지만 이동해 주세요.” (웃음)

<산양들>
<산양들>

노다해 촬영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는 여성 인물들이 몸으로 부딪치며 상황을 헤집고 나가는 에너지, 이동과 로드무비의 감각, 소동극에 가까운 코미디가 반복된다. 서로 다른 작품에서도 계속 좇는 이미지나 감각이 있나. 아니면 작업이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흐름인가.

노다해_ 그런 공통점을 의식하며 작품을 선택하거나 촬영하지는 않는다. <이반리 장만옥>과 <산양들>만 해도 컷의 감각이 전혀 다르다. <이반리 장만옥>에서는 서부극 같은 촬영을 시도했다면 <산양들>에서는 한 컷 안에서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인물의 블로킹을 많이 활용했다. <태어나길 잘했어>는 두 작품보다 등장인물이 적어서 인물에게 좀 더 집중했다. 그럼에도 내가 계속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있다면 ‘공간 속의 인물’이다. 공간의 캐릭터성을 잘 살리고 싶다. 단편 작업할 때도 항상 아쉬운 것이 로케이션이다. 아무래도 제작 여건상 공간 선정에 자유롭기 어려우니까. 이야기와 인물, 그에 연동하는 공간을 잘 담아보고 싶다.

 

<산양들> 이후에는 어떤 작품과 장르를 기다리고 있나.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 있다면.

노다해_ 이야기가 중요하다. 다양한 이야기를 만나고 싶다. “나는 이걸 잘하니 이것만 해야지”라고 정하고 싶지는 않다. 요즘은 여름이라 그런지 공포영화도 궁금하고, 대담한 액션 장면이 있는 영화도 해보고 싶다. 인물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는 멜로나 드라마에도 늘 관심이 있다. 오랫동안 가장 좋아한 촬영감독은 로저 디킨스다. 모두가 인정하는 최고의 촬영감독이지만, 한동안 아카데미상을 받지 못해 ‘무관의 제왕’이라고 불렸다. ‘로저 디킨스는 대체 왜 상을 받지 못했을까?’ 생각하며 영화를 다시 봤더니 그 이유를 알겠더라. 촬영이 이야기 자체에 철저히 복무하고 있었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나 <1917>을 보면 엄청난 기교와 에너지가 들어갔는데도 촬영보다 이야기가 먼저 보인다. 나는 그 점이 좋다. 관객이 “촬영이 정말 멋있다. 촬영이 다 했다.”라고 반응한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실패한 것일 수도 있다.

 

상당히 냉정한 기준처럼 들린다. 본인 작업에서는 그 기준을 어떻게 실현하고 싶나.

노다해_ 이야기에 집중하게 만드는 촬영을 하는 것이 목표다. 보통 여성 촬영감독이라고 하면 “여자니까 섬세한 이야기를 잘 찍겠네”라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정확한 말은 아니라고 본다. 물론 사람마다 예민하게 느끼는 지점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여성이어서 섬세하다기보다 나를 둘러싼 환경과 관계 등에 영향받으며 나만의 시각을 갖게 된 결과일 것이다. 주제나 장르 범위를 한정하고 싶지 않다. 여러 작품을 경험하고 경력이 쌓이면, 이야기에 어울리는 이미지를 구현할 뿐만 아니라 촬영 자체에도 자연스레 멋이 생기지 않을까. 내가 찍은 영화들의 룩도 매번 달랐으면 좋겠다. “딱 봐도 노다해가 찍었네” 알아볼 수 있기보다 “이것도 노다해가 찍었어?”라는 반응이 나올 만큼. 그러고 나면 최종적으로는 할리우드 가야지. 영어 공부를 해야겠다. (웃음)

 

유재욱 감독과 금효제 작가, ‘부부 크루’의 다음 포부도 듣고 싶다. <산양들>은 두 사람이 처음으로 각본을 함께 쓴 작품인데, 앞으로도 협업 계획이 있나.

유재욱_ 지금 준비하는 다음 작품을 함께 쓰고 있고, 그다음 작품도 머리 맞대고 구상하는 중이다. 물론 회의하다 보면 고통스러운 순간도 있는데, 큰 싸움으로 번지지는 않는다. 상대가 하는 말이 마음에는 들지 않아도, 듣고 보면 동의할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 (웃음) 새로운 의견을 반영하면서 시나리오가 조금씩 좋아진다고 느낀다. 지금은 여성 프로레슬러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 시나리오는 어느 정도 탈고했다. 그다음으로는 특수분장사가 주인공인 작품을 준비 중이다. 아직 시나리오를 쓰지는 않았고 트리트먼트를 발전하는 단계다.

 

둘에게 로저 디킨스 같은 존재는 누구인가.

유재욱_ 파티 아킨을 좋아한다. 시나리오를 쓸 때면 <천국의 가장자리>(2008)와 <미치고 싶을 때>(2004)를 꼭 한 번씩 다시 본다. 파티 아킨이 튀르키예계 독일인이지 않나. 그의 영화에 담긴 이방인의 시선이 흥미롭다.

금효제_ 좋아하는 감독과 영화가 많고 장르에도 제한을 두지 않는 편이다. 마이클 리 감독을 좋아하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미야자키 하야오, 2002)도 무척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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