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영이라는 이름을 슬그머니 세상에 알린 단편 <캐쉬백>(2019)부터 두 번째 장편 <지느러미>를 완성한 지금까지, 고우는 마치 박세영의 영화를 성립시키는 필요조건처럼 존재해왔다. 둘의 인연을 되짚다 보면 이미 10년 전에 만들었다는 미공개 단편 <지느러미>가 등장하는데, 그렇게 보면 장편 <지느러미>는 박세영과 고우가 오래도록 품어 온 과제이자, 한 시기를 갈무리하는 첫 번째 피날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우를 향한 박세영의 끈덕진 애정은 유튜브에서도 그 연원과 궤적을 찾아볼 수 있다. 10년 치 작업 포트폴리오이자 영상 일기장인 그의 채널에는 220여 편의 영상이 쌓여 있고, 스크롤을 내리다 보면 고우가 결성한 밴드 ‘유기농맥주’의 공연 영상이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박세영은 고우를 참 많이도 찍었다. 스트레인지 프룻, 채널1969, 신도시 같은 클럽을 돌고 합주실까지 따라다녔다.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고우, 얼굴을 찡그리거나 허공을 응시하는 고우, 몸을 흔들다 특유의 저음으로 말을 건네는 고우가 꾸준히 박세영의 카메라에 담겼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정신 나간 음악이 가능할지” 궁리한다는 고우가 각별히 좋아하는 영화는, 커트 코베인의 생애 마지막 행적을 모티프로 삼은 <라스트 데이즈>(구스 반 산트, 2005). 그가 꼽은 명장면은 산속을 하염없이 걷는 남자를 카메라가 멀찍이 따라가는 오프닝이다. 박세영도 고우에게 비슷한 주문을 했다. 한 사람은 멀리서 걸어오는 몸을 찍고 싶어 했고, 다른 한 사람은 그렇게 바라보는 영화를 좋아했다. 서로의 취향을 알기도 전에 두 사람은 이미 같은 장면 안에 있었던 셈이다. 이후 고우는 <다섯 번째 흉추>(2023)를 비롯한 박세영의 여러 작품을 통과했다. 속속들이 알지 못하면서도 같은 방향으로 걸어온 덕분에, 박세영 감독과 고우 배우는 공동의 세계를 이뤘다. 지나간 시간만큼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두 사람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여전히 서로를 “세영 씨”와 “고우 씨”라고 부른다. 그들의 세계가 어디로 흘러가든, 함께 시작한 이상 “죽을 때까지 같이” 이 긴 시퀀스를 이어갈 작정이다.
박세영 감독이 고우 배우와 함께 인터뷰하고 싶다고 먼저 제안했다. 둘이 오랫동안 작품을 함께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번 대화에도 고우 배우가 꼭 함께하기를 바란 이유부터 듣고 싶다.
박세영_ 고우 씨는 이 영화의 시작뿐 아니라 내 영화의 시작을 함께한 배우다. 내 첫 영화부터 지금까지의 작업을 놓고 볼 때도 그렇고, <지느러미>의 시작과 끝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도 고우 씨가 필요했다. 애초 <지느러미>는 우리가 2016년에 찍은 단편 <지느러미>에서 출발했다. 나로서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진학해서 만든 첫 영화였고, 고우 씨에게도 첫 영화였다.
고우_ 단편 촬영할 때 다른 분도 계셨지만, 주로 세영 씨와 둘이 움직였던 기억이 난다. 캠코더를 들고 저 멀리 가서는 끝에서부터 걸어오라고 하더라. 별다른 대사도 디렉션도 없었다. 그러고는 걸어오는 모습을 계속 찍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걷지?’ 하면서도 그냥 저벅저벅 걸어갔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순간이 <지느러미> 세계관의 가장 초기 모습을 담고 있는 것 같다.
박세영_ 당시에는 연출하는 법도 몰랐고 배우와 소통하는 것도 무서워했다. 가까이 찍지 못하고 멀리서 배우를 추격하듯 촬영했다. 영화를 어떻게 찍어야 하는지 몰랐던 시절의 감각이 담긴 작품이다.
고우_ 나도 연기가 처음이었으니 둘이 비슷한 상황이었다.
멀찍이 떨어진 채 인물을 바라보는 쇼트는 현재도 이어지는 특징인데.
박세영_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이 인물을 멀리서 찍는 경우가 많았기에, 나도 그렇게 찍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작업 초기, 배우에게 바짝 다가가지 못했던 데는 실제로 디렉션을 주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박세영 감독 유튜브 채널을 들어가 보니, 2016년에 만든 단편 <지느러미>의 흔적이 남아 있더라. 약 40초 분량의 ‘예고편’은 붉은 강변에서 작업복을 챙겨 입는 듯한 남자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박세영_ 당시 <지느러미>는 거대한 고래와 싸운 끝에 고래의 지느러미만 낚아챈 한 낚시꾼 이야기였다. 낚싯대를 고치기 위해 오랜 시간 걸어서 가게를 찾아간 낚시꾼이 사장을 붙잡고 고래와 벌인 싸움을 길게 묘사한다. 잔인하고 거대한 전투에 관한 이야기인데, 듣다 보면 관객은 그 일이 실제로 벌어진 것인지 또는 낚시꾼이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한지 확신할 수 없게 된다. ‘저 사람이 고래와 싸운 게 맞나?’ 의심하지만, 끝까지 분명한 정보는 주어지지 않는 거다. 결국 낚시꾼은 낚싯대를 고쳐 돌아가고, 다시 고래와 싸울 준비를 하면서 영화가 끝난다.
그때도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설정했나.
박세영_ 아니다. 그냥 이촌한강공원에서 찍었다. (웃음)


설명만 들으면 대사량이 상당했을 것 같다.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이 떠오르기도 하고.
고우_ 세영 씨가 어느 정도 대사를 써서 보내줬지만 그대로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연기하다 보니 다른 이야기가 계속 들어왔고, 상황에 몰입하면서 애드리브가 많이 나왔다. 촬영 자체도 재미있었고 캐릭터도 흥미로웠다. 혼자 낚시하러 갔다가 낚싯대가 부러져서 먼 길을 걸어가는, 그리고 또다시 싸우러 돌아가는 인물이었다. 혼자서 싸워나가는 그 감각이 재미있게 다가왔다.
박세영_ 다만, 실제 결과물엔 방금 이야기한 것들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고 할 만큼 만듦새가 조잡했다. 학교에 가서 교수님께 영화를 보여드렸는데, 더 볼 것도 없다면서 당장 끄라고 하시더라. 알고 보면 나름 결석 한번 없이 학교 열심히 다니는 모범생이었는데, 이상하게 선생님들은 내 영화를 싫어했다. (웃음)
고우_ 그 무렵 세영 씨에게 전화가 왔다. 교수한테 한 소리 들은 다음이라, 풀이 확 죽어 있더라. “누군가는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근데 교수님의 말도 결국 한 사람의 평가일 뿐이지 않냐.”라며 마음을 다잡으려 했던 기억이 난다. 언젠가 세영 씨가 실력을 더 쌓고 나도 지금보다 경험을 좀 채우고 나면, 그때 <지느러미>를 다시 찍자고 이야기했다.
고우 배우는 ‘배우’라는 역할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 처음에는 ‘친구’ 혹은 ‘비전문 배우’라는 수식이 따라붙었지만, 이만큼 필모그래피가 쌓였다면 정체성을 새롭게 자각했을 법하다.
박세영_ 지금까지 출연한 단편영화만 해도 열다섯 편이다. 최근에는 네이버에 배우 프로필도 등록했더라.
고우_ 프로필용으로 찍어둔 사진이 없어서, 예전에 제주도에 놀러 갔을 때 애인이 필름 카메라로 찍어준 사진을 올렸다. 기회가 생긴다면 프로필 사진도 한번 제대로 찍어보고 싶다. (웃음) 그러게, 지금 와서 보면 먼저 시작한 음악보다 연기 경력이 더 풍성하다. <지느러미> 개봉하면서 나도 그 시간을 정리하게 된다. 오래 붙잡고 있던 작업이 드디어 극장에 걸린다고 하니 후련하기도 하고. 다만, ‘내가 주연한 영화’로 여긴다기보다, 우리 관계의 연장선에서 맞이한 결실에 가깝다. 물론 변화는 있다. 예전에는 그저 박세영의 친구이자 함께 작업하는 동료로서 영화를 찍었다면, 이제 내 위치와 능력을 고민하게 된다. <지느러미> 촬영할 당시, 현장에 커피차가 온 적이 있다. 나로서는 낯선 상황이었지. 고마운 마음으로 그 풍경을 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앞으로 박세영 영화에는 더 많은 스태프가 붙겠지. 박세영도 연출이나 촬영 면에서 계속 발전하겠지. 나도 이 작업을 이어가려면 배우로서 어떤 기술과 태도를 더 갖춰야 하지 않을까.’
답변을 듣는 박세영 감독은 왠지 흐뭇해 보인다.
박세영_ <지느러미> 촬영을 2022년에 시작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작업한 지 한 7년 만에, 그것도 영화를 열 편쯤 찍고 나서야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웃기다. (웃음)
고우_ 솔직히 그전까지는 “잠깐 와서 도와줘”라는 말에 응하는 정도의 느낌이었다. 단편 <캐쉬백>(2019) 때도 아무 생각 없이 세영 씨가 시키는 대로만 따라가며 찍었다. 그러다 <지느러미>를 찍는 과정에서 뭔가 생각도 마음도 달라졌는데, 촬영 중간에 갑자기 그러니까 혼란스럽고 힘들더라. 앞에서 했던 연기가 전부 잘못된 것만 같고, 반대로 후반에는 너무 의식한 바람에 과하게 힘을 주기도 했다. 함께 연기했던 김푸름, 연예지 배우를 보면서 초조했다. ‘와, 진짜 잘한다. 큰일 났다. 이미 촬영 중간까지 왔는데 나는 어떡하지?’
그런 내적 변화를 박세영 감독도 눈치챘나. 두 사람이 그 문제에 관해 따로 이야기를 나눈 적 있는지?
박세영_ 영화라는 걸 시작했을 때부터 호흡을 맞춘 배우가 고우다. 그전까지는 주로 친구들과 작업했으니 <지느러미>에서는 연기를 직업으로 삼은 배우들과 함께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만나는 일이 고우 씨에게는 긴장감을 주고, 전문 배우들에게도 새로운 경험이 되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막상 촬영에 들어가니 특별한 차이는 느껴지지 않았다. 모두 성실하게 합을 맞추고 리허설했다.


고우 배우의 내면에서는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고우_ 속으로는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계속 고민하면서도 최대한 리허설에 따라갔다. 전작에서는 항상 친구들과 합을 맞췄기에 촬영도 우당탕 좌충우돌하는 느낌으로 흘러갈 때가 많았는데, <지느러미>에선 전문 배우들이 중심을 잡다 보니 ‘이걸 이렇게 하는구나!’ 하며 옆에서 관찰하게 되더라.
박세영_ 고우 씨는 신체를 사용하는 장면이 많았다. 달리고, 목이 졸리고, 숨고, 민첩하게 움직여야 했다. 촬영 초반부터 그런 장면을 연달아 찍으면서 진이 다 빠졌고, 점점 핼쑥해져 갔다. 막바지엔 이성적 사고가 멈추고 동물적으로 반응하는 상태가 됐다. 모든 상황에 즉각 리액션할 수 있는, 완벽한 배우의 자질을 갖춘 상태였다. (웃음)
결국 연기를 고민하는 것조차 사치인 상황이 펼쳐진 셈이다.
고우_ 연일 촬영하다 보니 갈수록 지쳐갔다. 거의 탈진 상태였지. 실은 첫 회차에 달리다가 넘어지는 신을 찍다가 갈비뼈에 금이 갔다. 옷에 소품을 넣은 상태였는데, 경험이 없으니 그게 위험하다는 것조차 몰랐다. 결국 소품을 빼놓지 않고 그대로 품은 채 구르다가 갈비뼈를 찍었다. 첫날 촬영을 시작한 지 4시간밖에 안 지났을 때다. 처음에는 아프다고 말도 안 했다. ‘조금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하고 촬영을 이어갔다. 그러다 다른 장면에서 상대 배우가 나를 넘어뜨렸는데, 너무 아파서 순간 소리를 확 질렀다. 상대는 영문도 모르고 놀랐지. 지금 동작 때문이 아니라 원래 다친 곳이라고 설명했지만, 이 일로 촬영을 미루면 큰 민폐를 끼칠 듯했다. 예산이 빠듯한 독립영화 현장인 데다, 이미 조율해 놓은 일정이란 게 있으니까. 참을 만하다고 판단해서 그대로 촬영을 이어갔다. 대부분 괜찮았는데 달리는 신에서는 호흡이 힘들더라. 저절로 신음이 나왔는데, 그런 소리가 영화에 자연스레 담겼다. 컨디션이 안 좋으니 인상도 점점 피폐해지고. 그게 또 지나고 보니 영화랑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웃음)
이야기를 들으면 두 사람은 동료보다는 전우에 가까운 듯하다. 박세영 감독이 1996년생, 고우 배우는 1985년생이다. 나이 차이가 꽤 나는데, 어떻게 만나서 친구가 됐나.
박세영_ 영화학을 부전공하던 친구를 통해 알게 됐다. 밴드를 하는 멋있는 친구가 있다면서 소개해 줬다. 페이스타임으로 처음 인사했는데, 고우 씨가 나를 보자마자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로큰롤 정신이었나. (웃음)
박세영_ 그렇다. 나쁜 의미는 아니었고, 처음부터 아주 편하게 대한 거다. 그게 고우 씨의 첫인상이었다. 이후 고우 씨가 활동하는 록밴드 ‘유기농맥주’의 공연을 거의 매번 쫓아다니며 기록했다.
왜 그렇게까지 따라다녔나.
박세영_ 당시 영화과에 다니고 있었지만, 학교생활이 쉽지는 않았다. 솔직히 학과 친구들과 영화를 찍을 기회도 많지 않았고, 교수님도 내가 찍는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저기 가면 멋있는 사람이 잔뜩 있는 거다. 그냥 그 친구들한테 붙어 다녔다.
감독 지망생이 음악가를 만나서 “나중에 내 영화 음악을 맡아달라” 제안하는 건 자연스럽다. 근데 감독은 영화 출연을 부탁했다. 고우 배우에게서 무엇을 봤기에 그를 카메라 앞으로 불러냈나.
박세영_ 기본적으로 내가 화면에 담고 싶은 사람을 찍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당시 학교 연기과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기도 했다. 다른 학생들 대부분은 대화 장면 위주의 안정적인 작품을 만들었는데, 나는 그런 영화를 잘 만들 자신이 없을 뿐만 아니라 별로 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대체로 운동성이 많이 느껴지는 것들이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고우 씨가 떠올랐다.
고우_ 그전에 세영 씨의 다른 친구가 과제를 위해 나를 촬영했던 적이 있다. 뮤직비디오 같은 작업이었고, 조금 과장된 연기를 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나중에 세영 씨가 따로 연락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영화를 찍고 싶은데 출연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서 흔쾌히 응했다.

전부터 피사체가 되는 일에는 익숙했나.
고우_ 퍼포먼스도 했고, 음악하면서 무대에도 섰기에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건 익숙했다. 한 번은 1인 7역의 음악극도 했다. 주변에 미술 하는 친구들이 많아서 공연에 참여할 기회가 생겼는데, 원래는 노래만 해달라는 제안이었다. “아니, 나는 퍼포먼스를 해볼래”라고 해서 직접 내용을 짜고 무대에 올렸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영화 출연을 제안받았을 때도 부담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가볍게, 자연스럽게, 별생각 없이 시작했다고 해도 벌써 10년 차다. 어떻게 열다섯 편 넘는 영화에 출연했나. 처음의 단순한 마음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선택 같다.
고우_ 물론 나도 기준은 있다. 아무거나 하지는 않는다. 시나리오를 봤는데 재미없으면 안 한다. 박세영의 시나리오는 재미있었다. 같이 수다 떨고 어울리다 보면 사람 자체도 참 흥미롭다. 그래서 이 사람과 뭔가를 계속 잘해보고 싶었다. 원래 영화를 즐겨 보는 편인데, <캐쉬백>을 찍을 때부터 박세영만의 색이 뚜렷하게 보였다. 앞으로 독특한 작품을 선보일 창작자라고 생각했고, 그렇다면 이 친구와 협업하는 일이 나한테도 좋은 자극을 주지 않을까 했다. 실제로 옆에서 자극받는다.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하는 창의성을 계속 발견하거든. 서로의 작업이 꼭 일대일로 대응하는 것은 아니지만, 작업을 대하는 태도에 관해 많이 배운다.
고우 배우가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작업이 재미없다면 참여하지 않는다고 말했듯, 박세영 감독 역시 단지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계속 불러온 것은 아닐 거다. 박세영 감독에게 고우는 어떤 영화적 재료인가.
박세영_ 창작하려면 현장이 즐거워야 하고, 현장이 즐거우려면 함께하는 사람들이 좋아야 한다. 성격이 좋지 않은 사람과 작업하는 일이 힘들다. 되도록 착하고 서로 잘 어울리는 사람들로 현장을 구성하려 한다. 무례하고 가부장적인 사람들과는 작업하고 싶지 않다. 그런 사람을 감당하다 보면 내가 스트레스받고 위태로워진다. 차라리 안전한 작업 환경을 만든 뒤 그 안에서 위험을 감수하는 편이 낫다.
좋은 사람들과 작업하고 싶다는 이야기는 지난 인터뷰에서도 했다. 그런데 한 사람의 성품이나 가치관은 오래 지켜봐야 알 수 있지 않나.
박세영_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사람은 자기를 과시하고 싶어 하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도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드러낸다. 나는 함께 작업할 때 그런 욕구로 인한 불편함이 없었으면 한다. 본래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최근에도 고우 씨와 광고 영화를 하나 찍었다. 고우 씨가 누군가를 추격하는 역할로 등장한다. 스무 시간 가까이 여러 장소를 돌아다니며 계속 달렸다. 기존에 우리가 영화를 찍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큰 현장이었다. 스태프도 200명 정도였고 로케이션도 쉼 없이 이동했다. 멀리서 고우 씨를 지켜보는데, 그냥 뭐라고 해야 할까. 잘 모르겠다. 정확히 정의할 수는 없지만, 고우 씨는 항상 내 현장에 있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어떻게든.
실제로 <다섯 번째 흉추>(2023)에는 일종의 부적처럼 고우 배우를 데려갔구나 싶더라. 영화의 문을 여는 장면에 짧게 등장하지 않나.
박세영_ 늘 영화 안에서 자기 역할을 다한다. 때로는 하나의 상징처럼 존재하고, 다른 때는 구체적 인물이 되기도 한다. 중고 거래업자, 용달 기사, 전도사 등 다양한 인물을 연기했는데, 전부 잘 어울린다. 고우 씨와 작업하면 확실히 현장에 안정감이 생긴다. 혼자서 모든 걸 준비해오거든.
어떻게 연기할지 예측할 수 있다는 뜻인가.
박세영_ 아니, 배역을 완전히 ‘디깅’해서 혼자 전부 준비하기에 오히려 예상하기 어렵다. 모범생처럼 정말 성실하게 온갖 것을 연습하고 조사한다. 그래서 나는 고우 씨가 준비해 온 뭔가를 깨뜨리려고 하는 편이다.

<지느러미>에서 예를 들자면?
고우_ 낚시터 사장에게 여러 종류의 낚싯대를 거론하며 물어보는 장면이 있다. 대본을 처음 봤을 때부터 그 대사가 마음에 들었다. ‘낚싯대’라는 어감이 멋있더라. 낚시 좋아하는 사람이 봐도 ‘제대로 알고 말하네’ 느꼈으면 해서 낚싯대 종류와 명칭 등을 많이 찾아봤다. 영화에서는 짧게 편집됐지만, 긴 낛싯대부터 점차 짧아지는 순서대로 이야기하는 장면이었다. 그걸 잘 살리고 싶어서 많이 준비했다. 물론 연기의 큰 줄기에 관해선 세영 씨에게 확인받는다. 동시에 말투라든지 의상과 소품 등 디테일에도 신경 쓰려고 한다. 실제로 촬영에 쓸 장갑도 직접 중고 거래로 구했다. 중간에 분실했지만, 이 인물이라면 그 장갑을 반드시 껴야 할 것 같아서 촬영 전날 마련했다. 글쎄, 성실하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무엇보다 창피한 게 싫다. 아무리 준비해도 부족하다고 느끼고, 완벽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불안하다. 모든 요소를 계획한다는 뜻이 아니라, 어느 정도 준비를 마쳤다는 상태에 이르지 못하면 불편한 거다. 어떤 작업이든 마찬가지다. 음악도 줄곧 같은 방식으로 해왔으니, 그게 내 스타일 같다. 물론 영화에서는 미리 준비한 것을 깨뜨리거나 순간적으로 대응해야 할 때가 있다. 순발력이 필요하다 보니 가끔은 ‘이걸 어쩌지?’ 싶기도 하다.
박세영_ 생각해 보면 나는 감독에게 정답을 기대하는 배우와 합을 잘 맞추지 못하는 듯하다. 배우가 그걸 원한다면 답을 줄 수야 있겠지만, 감독을 절대적 존재로 여기는 사람과는 함께 작업하는 즐거움이 덜하다.
그래서 고우 배우와는 여러 번 만나도 계속 재미있나 보다. 자신만의 풀이를 갖고 현장에 나타나니까.
박세영_ 고우 씨가 알아서 뭔가를 들고 와 툭툭 던지면, 그때부터 그걸 바라보며 같이 고민하는 느낌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그렇게 작업해왔다.
고우_ 최근 현장에서 만났을 때도 느꼈는데, 박세영 감독의 작업 방식을 음악으로 표현하면 프리재즈에 가깝다. 배우를 자유롭게 풀어놓은 다음, 그 모습을 자기 흐름과 속도대로 담는다. 본인도 카메라 움직임이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이 친구를 찍었다가 저 친구에게로 넘어간다. 그런 재즈적인 면이 있다.
김푸름, 장요훈, 정회린 등 박세영 감독과 작업한 배우들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대체 언제, 어떻게 찍힐지 알 수 없는 현장이니 배우로서 골탕 먹는 기분이 들 법도 한데, 다들 그 불확실성을 즐겁게 받아들이더라.
박세영_ 배우들도 때로는 그런 순간을 바라는 듯하다. 생각보다 촬영 조건을 유연하게 흡수하고 카메라를 받아들인다. 대개 일반적인 영화 현장에서는 미리 정해놓은 대로 찍지 않나. 그렇게 규격화되고 정제된 감각이 화면에 담기는 걸 내가 못 견딘다. 동시에 배우들은 나와 카메라의 상태에 영향받는다. 내가 답답해지고 카메라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배우들도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물론 내가 모든 배우를 대변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고우 배우는 작품을 거듭하며 어떤 변화를 체감하나. 감독과의 소통에서 둘만의 방식이 자리 잡았는지도 궁금하다. 매번 새로운 요구를 받는다고 느낄 수도, 이제 말없이도 통하는 사이가 됐을 수도 있을 텐데.
고우_ <지느러미> 촬영 당시, 연기에 자꾸 힘이 들어가는 것이 과제였다. ‘내가 너무 힘을 주고 연기하나?’ 다음 작품에서는 반대로 힘을 빼보자고 생각했다. 평소 쓰는 힘에서 절반만 사용하자는 마음으로 촬영장에 갔고, 있는 듯 없는 듯 최대한 힘을 빼고 연기했다. 근데 세영 씨가 오케이 사인만 계속 내는 거다.
박세영_ <슬라이드 스트럼 뮤트>(2025) 찍을 때?
고우_ 아니, <누가 내 십자가를 훔쳐 갔는가?>(공개 예정). 별다른 디렉션 없이 촬영이 진행됐다. 주요 인물들은 따로 있으니 그들에게 집중하는 것이 맞다고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나?’ 싶었다. 촬영 마치고 집에 가는데 계속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진 것의 50퍼센트밖에 쏟지 않았으니 제대로 찍지 못한 기분이었다. 실은 ‘이제 연기를 그만둬야 하나?’라는 생각까지 했다. 너무 우울해져서. 음악할 때는 반대다. 연주든 작곡이든 나를 마음껏 쏟아붓는 일이 재미있고 신난다. 반면에, 영화는 여러 사람과 합을 맞춰야 한다. 그 속에서 내 몫을 충분히 해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자 우울해졌다.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 작업은 하지 말자’라고 입장이라, 이제 관둘 때가 왔구나 싶었다. 그러다 나중에 세영 씨를 만나서 같이 편집본을 봤다. 사운드 작업하신 분이 “고우 씨 연기가 정말 늘었다. 다른 배역들 사이에서도 잘 보인다.”라고 했다더라. 그 말을 듣고 ‘다시 가보자!’ 했다. (웃음)
박세영_ 정말이다. 이제 배경에 스며들었더라. 따로 디렉션을 줄 필요가 없었다.
고우_ 앞으로 힘을 탐구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배역마다 어느 정도 힘을 쓸지, 장면마다 어떻게 다르게 조절할지 스스로 찾아보는 중이다. 주변에 동료 배우들은 많지만, 함께 술을 마시면서 연기에 관해 편하게 물어볼 만큼 가까운 배우는 별로 없다. 지금은 관련 도서를 몇 권 읽고 있다. 그렇게 나만의 방식이 조금씩 쌓이는 것 같다. 음악도 독학으로 시작했다. 느리더라도 나에게 가장 편한 방식으로 가자고 마음먹었다.


반대로 박세영 감독이 고우 배우를 통해 발견한 가능성은 무엇인가. ‘이 사람과 함께라면 이런 것까지 해볼 수 있겠다’라고 생각한 순간은?
박세영_ 우리 관계에 관한 내 개인적 목표는 명확하다. 같이 시작했으니 죽을 때까지 어떻게든 함께하자는 것이다. 앞으로 어떤 길을 가든 우리는 계속 합을 맞출 테고, 때마다 그 방법을 찾는 것이 내 몫이라고 본다. 앞선 질문에 답하자면, 사실 현장에서 고우 씨와 직접 나누는 대화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잠깐 쉴 때나 마주치고, 그 외엔 소통이라고 할 것도 없다. 고우 씨는 주로 연출팀과 이야기를 나눈다. 연출팀과 가깝게 지내는 모습을 보면 행복하다. 촬영장에서 나는 보통 카메라를 들고 멀리 있기에 고우와 직접 대화하기 어렵다. 배우에게 필요한 것을 챙겨주거나 대기 시간을 함께 보내는 건 연출팀이다. 고우 씨가 스태프나 동료 배우들과 어울리는 걸 보면 이제 현장에 익숙해졌구나 싶어서 좋다.
고우_ 크루라고 표현할 만큼 스태프 대부분 세영 씨와 오래 함께한 분들이다. 나도 그 틈에 끼어 장난치고 논다. 원래 카메라 앞에 낯선 사람들이 있으면 긴장감이 상당히 크다. 그런데 한 사람씩 알아가다 보니, 다들 착하고 선한 사람이구나 싶더라. 어느 정도 관계에 신뢰가 쌓이자, 연기에 더 몰입할 수 있었다. ‘잘 찍어주겠지. 나는 내 것을 하자.’ 배우든 스태프든 웬만하면 현장에서 모두와 친해지려고 한다. 한편, 세영 씨가 말한 대로 우리는 점점 더 말을 생략하는 듯하다. 쉬는 시간에 만나면 “파이팅” 한마디하는 정도다.
박세영 감독이 아닌 다른 감독의 작품에도 출연할 의향이 있나.
고우_ 의향은 예전부터 있었다. 번호를 알려달라고 한 분은 많은데 아무도 연락하지 않더라. (웃음) 기회가 생긴다면 다른 감독과도 작업해 보고 싶다. 그렇다고 그게 목표라는 뜻은 아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일도 아니고, 이 친구와 작업하면서도 충분히 재미를 쌓아갈 수 있으니까. 다만, 늘 열려 있다. 물론 시나리오를 읽어보고 재미없으면 안 한다. (웃음)
<지느러미>에서는 무엇이 가장 큰 재미였나.
고우_ 오메가라는 역할 자체가 흥미로웠다.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했다. 뛰고, 걷고, 넘어지고, 어딘가에 부딪히고, 누군가에게 맞는다. 인물을 표현하는 데 필요한 상태를 끊임없이 몸을 쓰면서 만드는 과정이 매력적이었다. 인물에게 일어나는 변화도 재밌었다. 오메가는 어느 장벽을 넘어서기 전까지 굉장히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캐릭터인데, 일련의 사건을 거치며 점차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다.
10년 전에 만든 단편 <지느러미>와 비교하면, 현재 장편까지 유지된 이미지나 감정은 무엇인가.
박세영_ 카메라의 시선은 유지됐다. 멀리서 바라보는 방식, 그걸 단편보다 조금 더 잘 구현했다고 본다. 그 시선이 무엇에 따라 윤리적이거나 비윤리적일 수 있는지, 인물의 감정을 어떻게 차단하고 드러낼 것인지에 관한 관심도 여전히 남아 있다.
<지느러미>에서 오메가는 국가에 등록된 뒤 장벽 밖으로 추방된 채 오염된 바다의 청소 노동에 동원된다. 감독은 이들을 소수자와 이주노동자, 서울 중심의 사회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과 연결해 설명했다. 오메가라는 존재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박세영_ 여러 출발점이 있지만, 우선 내 신체적 경험과 거기서 비롯한 결함이 오메가의 조건을 만들었다. 오메가의 여정에는 할머니의 죽음도 영향을 미쳤다. 코로나19 초기에 돌아가셨는데, 제대로 된 장례 절차 없이 할머니를 묻어야 했다. 전통적 장례 문화가 사라진다면 우리는 죽음과 상실을 어떻게 감당할지 문득 궁금해졌고, 유교적 질서와 윗세대가 사라진 뒤에 찾아올 세대 간 단절에 관해서도 고민하게 됐다. 더불어, 통일 이후의 한반도도 상상했다. 삼팔선이 사라지는 대신, 한반도 전체를 둘러싼 거대한 장벽이 세워지는 풍경이 떠올랐다. 형태만 달라질 뿐 장벽 자체는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예감이었다. 인간은 끊임없이 누군가를 차별한다. 남한과 북한이 더는 서로를 차별할 수 없게 된다면 그다음에는 누구를 차별할까. 아마 소수자를 더욱 심하게 차별할 듯했다. 그런 상상 속에서 오메가가 만들어졌다.

지느러미와 갈퀴발 같은 신체적 특징을 오염과 기형, 공포의 이미지로 표현할 때 생기는 위험도 고민했을 텐데, 차별받는 존재의 몸을 장르적 볼거리로만 소비하지 않기 위해선 어떤 기준이 필요했나.
박세영_ <지느러미>는 사실 근미래가 아닌, 동시대를 다루는 영화라고 본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좋음과 나쁨을 명확하게 나누는 이분법이 많다. 이 영화를 촬영하던 코로나19 시기의 화두 중 하나는 위생이었다. 손 씻기에 관한 지침이 생겼고, 위생은 존재와 행위를 나누는 기준이 됐다. 깨끗함과 더러움, 적합과 부적합, 옳고 그름이 연결됐다. 집 밖에서는 사람들과 대화조차 나누기 어려웠고, 집에 돌아오면 더러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감염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위생 강박도 생겼다. 나는 그런 이분법을 깨보고 싶었다. 영화는 인간과 오메가를 구별할 수 있는 외형적 표식을 일부러 보여주지 않는다. 인간이 누군가를 가리키며 “쟤들이 오메가다!”라고 말할 뿐이다. 그들은 오메가를 대단히 불결한 존재로 취급하지만, 정작 인간이든 오메가든 더러움과 못생김의 정도는 비슷하다.
흥미로운 점은 이 디스토피아를 맹목적인 관료주의와 ‘통일 대한민국’의 전체주의가 지배한다는 사실이다. 1960년대 ‘반공’ 포스터나 북한 선전물을 연상시키는 디자인이 눈에 띄는데, 통일과 코로나19라는 서로 다른 시간 감각을 어떻게 시각화하려 했나.
박세영_ 북한을 떠올린 적은 없다. 내가 상상한 건 미국이 떠난 뒤의 한국이었다. 미국이 부재한다면 한국 사회가 지금보다 훨씬 더 한국적인 모습으로 변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이퍼캐피탈리즘의 상징이 사라지고, 맥도날드며 버거킹도 없어지고, 폰트도 손 글씨체로 돌아가고. 영화에 최대한 한국적인 모습을 담으려고 했다. 한국에서 미국이 사라진 걸 보고 싶었다. 전쟁 직후부터 남한에는 미국, 북한에는 중국과 러시아가 들어오지 않았나. 극단의 문화가 혼종된 상태에서 외부 영향이 사라지면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 궁금했다.
잿빛 풍경이다 보니 계절을 유추하기 어려운데, 실제로는 어느 계절에 촬영했나.
박세영_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모두 찍었다. 4년에 걸쳐 촬영했으니까.
고우_ 촬영할 때마다 머리카락 길이를 똑같이 맞춰야 했다. 시차가 생기다 보니 감정이 잘 연결되지 않을 때는까 봐 촬영 전날에는 미리 촬영지에 가서 주변을 둘러봤다. 같은 음악을 반복해서 듣기도 하고.
어떤 음악이었나.
고우_ 취향이 너무 드러나서 말할 수 없다. (웃음) 촬영할 때는 그 음악을 영화 OST로 쓰면 좋겠다고까지 생각했는데, 완성된 영화를 보고 깨달았다. 내 상상 속 영화와 실제 스크린에 구현된 영화는 다를 수밖에 없구나. 그 음악은 오메가의 감정선을 연결하기 위해 내게 필요했던 것이고, 영화음악은 작품 전체를 봐야 하니까. 결과적으로 영화에 사용되지 않은 게 맞았던 것 같다. 그래도 4년 동안 촬영할 때마다 즐겨 들었다.
감독을 지켜보면서도 그때는 미처 몰랐다가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달은 것이 있나. 한 사람이 무언가에 몰두하고 관심사를 옮겨가는 과정을 오랫동안 곁에서 봐왔을 텐데, 고우 배우가 생각하는 박세영 영화의 주제는 무엇인가.
고우_ 계속 바뀌기 때문에 잘 모르겠다. 한 사람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주제를 안다는 건 그 인간을 전부 파악했다는 뜻 아닌가. 나 자신도 잘 모르는데 박세영을 어떻게 다 알겠나. (웃음) 작품마다 ‘이번에는 이런 테마 속에 있구나’ 느끼는 정도다. 그래도 일관된 감각은 있다. 현실적 세계 안에 현실에서는 벌어지지 않을 것 같은 기이한 요소가 조금씩 들어간다. 그 기이함의 형태는 작품마다 다르지만, 현실과 미묘하게 어긋난 감각만큼은 계속 존재한다. 그게 박세영 영화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지느러미>에서는 그 기이함이 어떤 순간에 가장 잘 드러난다고 보나.
고우_ 영화가 현실과는 다른 세계를 그리고 있으니 전반적으로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낚시터가 가장 기이함을 자아낸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주요하게 그려지는 집단은 공무원이다. 그리고 공무원이 아닌, 그 세계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는 장소가 낚시터다. 어떻게 보면 낚시터에 모인 이들과 그곳 풍경을 통해 이 세계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인물들의 긴장감이 특별히 높지는 않지만, 각자 자기만의 세계를 지니고 있다.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묘한 기분이 든다.

현실적인데, 현실에서 똑같은 풍경을 찾아보라고 하면 결코 찾을 수 없다. ‘대체 어떤 세상이지?’ 싶고.
고우_ 지저분한 얼굴이 이 세계에서는 일상적이라는 점도 재미있었다. 촬영장에서 분장할 때는 얼굴에 자꾸 무언가를 덧칠하길래 ‘왜 이렇게까지 하지? 왜 이래야 하지?’ 싶었지만, 굳이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나중에야 ‘물이 부족한 세계’로 설정했다는 걸 알았다. (웃음)
일부러 씻지 말고 촬영장에 오라는 주문도 했다던데.
박세영_ 맞다. 화장도 하지 말라고 했다.
고우_ 많은 영화가 배우를 예쁘고 깨끗하게, 화면에서 어떤 불순물이 느껴지지 않도록 담으려고 한다. 그래야 보기에 안정적이기 때문일 텐데, 세영 씨는 그와 완전히 반대되는 방향으로 간다. ‘이 친구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걸까?’ 싶어서 재미있다. 그렇다고 ‘박세영은 이런 사람이다’라고 판단을 내리지는 않는다. 사람을 알아갈 때는 눈앞에 있는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 가장 재미있는 것 같다. 굳이 모든 걸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지금 표면에 드러난 것만 바라보는 편이 나는 좋다.
주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계속해서 그 세계에 뛰어드는 배우가 있다니, 감독으로서 든든하겠다. 기억에 남은 고우 배우의 명장면은 무엇인가. 프레임 안에서 특별히 좋았던 순간이 궁금하다.
박세영_ <지느러미>에서 좋아하는 장면은 피아노실에서 오메가가 두 번째로 등장하는 컷이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미아와 오메가의 얼굴이 반사를 통해 겹친다. 한 명은 실제고 다른 한 명은 반사된 모습이라 두 사람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도록 찍었다. 그때 고우 씨의 표정이 좋았다. 자는 건지, 미아를 나쁜 의도로 쳐다보는 건지, 다정하게 바라보는지, 혹은 자기가 피아노를 치고 싶은지 알 수 없다. 여러 방향으로 열려 있는 복합적인 얼굴이었다. 그 장면은 뭐랄까, 정말 이상하다. 시선도 그렇고, 긍정과 부정을 가리지 않고 무엇으로든 해석될 수 있는 얼굴이다.
두 사람 모두 서로를 쉽게 해석할 수 없어 더 좋아하는 듯하다.
고우_ 세영 씨가 엉뚱한 주문을 할 때가 종종 있다. <지느러미> 낚시터 장면에서 한 번은 자고 있으라고 하더라. 처음에는 그냥 졸면 되는 줄 알았는데, 세영 씨는 완전히 피곤에 절어서 나가떨어진 사람처럼 누워 있기를 바랐다. 그런 자세로 자본 적이 없어서 처음엔 당황했다. ‘여기서 감독이 말하는 잠은 이런 수준까지 가야 하는구나’ 싶어서 재밌기도 하고. 낚시터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잠들어 있기를 원했다. 그 모습들이 낚시터 특유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처지고 가라앉는, 몽유하는 느낌. 엉뚱하기보다 ‘박세영답다’ 느낀 주문도 있다. 또 나한테만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가서 걸어오라고 하더라.
박세영_ 고우 씨가 알겠다며 내가 가리킨 쪽으로 걸었는데, 출발점까지 가는 데만 10분이 걸렸다. (웃음)
고우_ 그러니까 그 신을 한 번 찍는 데 20분 넘게 걸리는 셈이다. 출발점으로 갔다가 다시 카메라 앞으로 돌아와야 하니까. 산세도 험하고 풀숲 안으로 들어가면 가시가 많았다. 그래도 ‘한번 해보자, 해보자’ 하며 걸어갔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바닷가에서는 저 멀리 진흙밭에서부터 걸어오라고 하기도 하고. 이제는 뭐 익숙하다. 사실 가장 좋아하는 주문이기도 하다. 체력적으로는 힘들지만 촬영 자체는 재밌다.
특별히 전사를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인물이 지나온 시간과 감정을 축적하는 방식이기도 하고.
고우_ 재미있게 본 영화 중 하나가 구스 반 산트의 <라스트 데이즈>(2005)인데, 오프닝에서 주인공이 산속을 걸어 다니는 모습을 오래 따라간다. 그 길고 고요한 장면을 좋아한다. 인물이 멀리서부터 걸어오는 모습을 관찰하는 걸 관객으로서 좋아하기에, 배우로서도 그런 주문을 받는 일이 좋다.
박세영_ 인물이 움직이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싶다. 솔직히 말하면 실제 시간을 담고 싶은 것이다. 한 사람의 몸이 화면 안에서 2~3분 동안 걷는 모습을 바라볼 때, 여러 개의 컷을 연결하는 것보다 그가 지나온 여정이 더 잘 느껴진다.
다른 작업과 달리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일은 고우 배우에게 어떤 자극을 주나.
고우_ 원래 사진 찍히는 것도 싫어하고 카메라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낯설고 쑥스럽다. 친구가 나를 영상으로 찍는 것도 웬만해선 불편하다. 한 번은 유튜브 하는 분이 부탁해서 수락했는데, 말은 괜찮다고 했지만 실제로 촬영에 들어가자 잘 못하겠더라. 그런 의식 없이 카메라 앞에 설 수 있는 건 영화뿐인 것 같다. 영화가 아닐 때는 가능하면 렌즈 안에 담기지 않는 편을 가장 좋아한다.


박세영 감독은 주로 어떤 카메라를 사용하나.
박세영_ 아리 알렉사 미니와 아리 알렉사 35. <지느러미>도 그 카메라로 찍었다. 그렇게 안 보이지? 캠코더로 찍은 것 같지? (웃음)
그건 아니고, 고우 배우가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을 만큼 크기가 작은지 궁금했다.
고우_ 영화 카메라는 어떤 것이든 괜찮다. 찍히는 걸 싫어한다기보다 낯설어하는 것에 가까우니까. 오히려 영화 카메라는 일반 카메라보다 훨씬 크니까 누군가가 나를 찍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저 멀리 어떤 가구나 사물이 놓인 것처럼 느껴진다. 결국 다른 작업과 마찬가지로 영화가 내게 주는 재미는 ‘몰입’이다. 배우로서 연기할 때나 음악가로서 노래할 때, 혹은 예전에 퍼포먼스를 했던 경험 등을 굳이 장르별로 나눌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나는 온전히 집중하고 몰입하는 순간 자체를 좋아한다. 그 뉘앙스라든지 지속 시간은 작업마다 다를 수 있지만, 카메라 앞에서 연기할 때나 무대에서 연주할 때나 몰입한다는 점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배역이나 비중은 중요하지 않다. 그냥 즐겁다. 현장에서도, 촬영 준비하면서도 여전히 즐겁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작업할 때마다 설레고, ‘내가 이런 곡을 만들다니. 제법 잘 만들었는데?’ 싶기도 하다. 오래 작업하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는데, 가능하면 그런 감각에 사로잡히지 않으려 한다.
그 마음을 유지하는 비결이 있나.
고우_ 모르겠다. 그냥 재미있다. 아는 것도 재미있지만, 모르는 건 더 재미있다. 아직도 좋고 설렌다. 매번 몰입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오고, 그때마다 설렘을 느끼는 것 같다.
재미가 작업의 동력이라는 말은 익숙하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는 당연히 재미있지만, 오래 하다 보면 결국 ‘잘하니까 재미있는’ 단계에 이른다. 잘하기 위해 노력하고, 노력한 만큼 능숙해지지만, 그 재미에도 한계가 있지 않을까. 어떻게 늘 새로운 마음을 품을 수 있는지 궁금하다.
고우_ 오래전에 트위터에서 사진 한 장을 봤다. 류이치 사카모토가 새로운 사운드를 채집하고 무척이나 기뻐하며 환하게 웃는 모습이었다. 그 사진이 내게 큰 영향을 줬다. ‘평생 음악을 해온 사람도 새로운 발견 하나에 저토록 기뻐하는구나. 나도 그런 마음을 계속 간직해야겠다.’ 평소에도 그 사진이 문득 떠오른다.
박세영 감독은 어떤가. 한 작품을 오래 붙들기도 하고, 여러 프로젝트를 동시에 굴리며 작업한다. 때로는 일상을 지키기는커녕 영화에 간, 쓸개 다 내어주는 사람처럼 보이는데.
박세영_ 모든 순간이 진심으로 재미있다. 즐겁지 않은 순간은 단 하나도 없다. 이제 감정 소모도 사라졌다.
예전에는 왜 감정을 소모했고, 어떻게 거기에서 벗어났나.
박세영_ 감정을 소모할 만한 일이 항상 생겼다. 돈이 부족하고, 상황이 지연되고, 이것도 안 된다고 하고, 저것도 하지 말라고 하고. 그런데 이제 사고방식이 바뀌었나 보다. 예전엔 그런 상황을 제약으로 느꼈다면, 지금은 재빨리 플랜 B를 가동한다. 모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려고 한다. 무한 긍정! (웃음)


계기가 있나. 그래야만 계속 버틸 수 있으니까?
박세영_ 정말 힘든 작업을 한 번 겪었다. 사방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듯했다. 그러다 보니 내 목표를 상실했고, 나중에는 클라이언트조차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어쨌거나 상대 의견을 최대한 존중하는 것이 좋은 태도라고 여기며 3~4개월간 그 작업에 매달렸다. 그 시기를 통과하고 나니 어떤 환경에 던져져도 작업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 있게 됐다. 거리가 생기면서 여유가 찾아왔고, 작업도 더 즐거워졌다. 이후에는 모든 작업에 이전보다 성실하고 즐겁게 임하고 있다.
작업과 자신을 분리한다고?
박세영_ 이제는 완전히 분리한다.
‘오프 모드’의 박세영이 존재한다니 놀랍다. 평생 그 스위치가 안 생길 줄 알았는데.
박세영_ 생겼다. 아마도? 오프 모드는 뭐 밥 먹을 때…
고우_ 여기서 거짓말하면 안 된다. (웃음)
박세영_ 사실 내가 지나치게 달린다 싶으면, 옆에서 누군가가 멈춰준다. 그러면 스위치를 끄고 잠시 숨을 돌리면서 다른 곳을 둘러보는 것 같다.
다행이다. 이제 정말 스위치를 끌 시간이다.
박세영_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겠다. <다섯 번째 흉추> 개봉했을 무렵 리버스와 처음 인터뷰했고, 벌써 그때로부터 3년이 지났다. 당시엔 압구정에서 만났는데, 오늘 망원동에서 만나니 편하고 좋다. 그리고 고우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인간이기에 매번 새롭다. 감사하다. (웃음)
말이 나온 김에 고우 배우도 소감 한마디 부탁한다. 더 오랜만에 리버스와 만났는데.
고우_ 5년 만에 다시 찾았다. 서울독립영화제2021에서 상영한 <TCR> 인터뷰로 정재훈, 박다함 씨와 함께 인터뷰했다. 나도 압구정 스튜디오 갔던 게 기억난다. 오토바이를 타고 갔는데 되게 멀게 느껴졌다. (웃음) 요즘에는 오토바이 대신 자전거를 많이 탄다. 5년 전에도 박세영 감독과의 작업이 재미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잘하고 있다” 대답했고, 바로 다음 해 <지느러미>를 찍기 시작했다. 첫 촬영이 2022년 10월이었거든. 시간이 그렇게 흘렀구나 싶다.
박세영_ 사실 <지느러미>를 현재의 영화라고 볼 수는 없다. 나는 코로나19 영화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동시대를 반영하면서도 늘 얼마간 시차를 두고 관객 앞에 도착한다. 이제 ‘팬데믹 영화’로 칭할 작품이 쌓이는 시점 아닐까. 무엇보다 감독이 여러 번 갈아엎으며 4년에 걸쳐 만든 걸 어쩌겠나. (웃음)
박세영_ 그래서 솔직히 내게 이 영화는 일기 같다. 한 시기에 쓴 일기이자, 하나의 사건을 두고 여러 사람이 함께 쓴 일기다. 그 시간을 계속해서 돌이켜 생각한 과정이 영화에 담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