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바로 그거!
<충충충> 백지혜·한창록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6-06-16

“If you will suck my soul, I will lick your funky emotions.” 1969년에 발표된 Funkadelic의 노래 ‘Mommy, What’s A Funkadelic?’ 첫 머리가 주술처럼 흘러나오는 동안, 음울한 색채를 띤 화면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태동하듯 꿈틀거린다. 그건 알에서 깨어난 새가 아니라, 성냥갑만 한 껍데기를 비집고 나오는 벌레들이다. 징그럽고 혼란스러운 이미지 위에, 영화는 과감하게도 혹은 냉담하게도 세 아이의 생일 파티 장면을 덧씌워 놓는다. 케이크를 들고 고래고래 노래하는 용기(주민형), 전자담배를 손에 쥐고 소원을 비는 지숙(백지혜), 둘 사이를 뛰어다니며 장난치는 덤보(신준항). <충충충>은 이 셋을 단순한 친구 사이가 아닌, 사회 바깥으로 밀려난 ‘벌레들’처럼 그린다. 결핍과 약점을 서로 알아보며 그런대로 균형을 맞추던 이들의 관계는, 전학생 우주(정수현)의 등장으로 위기에 처한다. 

영화는 이 흔들림을 정제된 드라마가 아니라, 거친 핸드헬드 촬영과 채도 높은 색감, 밀어붙이는 사운드로 담아낸다. Y2K 감성의 파편적인 이미지들 속에 청춘의 충동과 충돌, 그리고 끝내 충격으로 치닫는 시간을 날것 그대로 풀어놓는다. 그중에서도 지숙은 복잡한 얼굴을 지녔다. 외모에 대한 강박과 자기혐오를 안고 살아가는 지숙은, 버림받는 것에 익숙해서 버림받기를 죽도록 싫어한다. 자신을 바라보는 용기의 마음을 알면서도 적당히 이용하는 데 만족하며, 그 애정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공백을 우주를 통해 메우려 한다. 물질로든 정서로든 자본이라고 부를 만한 게 아무것도 없는 여자애. 불법 다이어트약을 하루에도 몇 알씩 삼키며 제 몸에 대한 통제 감각에 매달리는 열여덟. 

백지혜는 지숙의 모순 한가운데로 성큼 걸어 들어갔다. 손쉽게 동정하거나 단죄하기를 거부한 채, 욕망과 불안, 수치심과 우월감 사이를 쉼 없이 널뛰었다. 한창록 감독은 그런 인물을 이해하는 척하거나 판결하는 대신, 끝까지 아이들의 시점 안에 머물고자 했다. 조심스레 말을 고르던 감독과 호쾌하게 말을 잇던 배우는, 이 영화가 “에러의 집합”이자 “진짜 좋고, 진짜 끔찍한 영화”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어쩌면 <충충충>은 극과 극의 반응이 동시에 터져 나올 때 비로소 자기 자리를 찾는 영화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최고로 기억되고 또 누군가에게는 최악으로 손꼽힐 작품. 어느 쪽이든 좋다. 배우 말대로 그 불화의 지대에서 “대화가 시작”될 것이며, ‘영화란 무엇인가?’에 관한 감독의 고민은 현재 진행형이다.

 

 

2009년에 서울예술대학 영화과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영화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영화 공부를 시작한 지 15년 만에 첫 장편을 완성했고, 해를 넘겨 드디어 개봉한다. 데뷔를 고민하면서 아이디어도 욕심도 많았을 텐데, <충충충>을 완성하기까지 어떤 관문을 통과했나.

한창록_ 어디선가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데뷔작으로는 10대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게 좋다고 하더라. 어쨌든 나이를 계속 먹으면서 감독 자신이 점점 10대와 멀어지기 마련인데, 그렇다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이었던 것 같다. 그 말에 공감했다. 그사이 이것저것 써보긴 했지만, 결국 <충충충>으로 돌아오더라. 2020년쯤 이 아이템을 처음 구상했는데, 그때도 막연하게 이걸로 첫 장편을 찍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나간 시절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찍은 영화는 아니라고 느꼈다. 감독에게 10대라는 시기, 청소년이라는 대상은 과거가 아닌 현재구나 싶던데. 청춘의 상처와 외로움을 아름답게 재현하는 방식에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려 했나.

한창록_ 지난 시절을 추억하려는 마음은 아니었다. 다만 어린 배우들과 소통해야 하니까, 그런 면에서는 한 살이라도 어릴 때 하는 게 맞지 않을까 했다. 사실 영화 취향은 밝고 따뜻한 영화도 좋아한다. 보는 건 다양하게 다 좋아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내가 만들려고 하면 어두운 것들을 다루게 되는 경향이 있다. 왜 그런가 생각해 보면, 내가 겁이 많아서 그런 것 같다. 뭘 모르는 상태가 무섭다. 불편하고 어두운 것들은 대개 내가 잘 모르는 상태로 남아 있을 때가 많지 않나. 그런 걸 알고 싶다. 두려움을 떨치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관련 소재들을 찾고, 거기에 집착하는 경향이 생기는 듯하다. 이번 작품의 경우, 2017년 미국 워싱턴주 벤턴 카운티에서 발생한 살인미수 사건에서 출발했다. 어릴 적부터 가깝게 지낸 소년과 소녀가 있고, 전학생의 등장으로 소녀의 삶이 어그러지자 소년이 전학생을 죽이기로 계획한다. 당시 CCTV에 소년이 빨간 복면을 쓴 모습으로 포착됐는데, 그 이미지가 한동안 머릿속에 남았다.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되짚어보면 <배창호 SHOW>(2019), <구경>(2024), <예행연습>(2025) 등에서 지속적으로 현실과 꿈,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뒤섞는 작업을 이어 왔다. <충충충>으로 이어지는 감독만의 관심사가 있는 듯한데.

한창록_ 많은 영화과 학생이 그렇듯이, 나도 스무 살부터 ‘영화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많이 고민했던 것 같다. 말이다. 어떤 사람은 영화를 환상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꿈이라고 말하지 않나. 나도 나름대로 답을 구하려 했고, 그런 고민이 쌓이면서 이 영화의 질감에도 포함된 것 같다. 실제로 단편에서 시도했던 연출 방식도 <충충충> 안에 많이 가져왔거든. 

<충충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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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계급 격차, 외모 자본, 온라인 문화, 젠더 감각 같은 동시대 사회 문제가 강하게 스며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걸 분석하거나 교훈적으로 정리하는 대신에, 인물들의 충동과 감정 상태에 집중했는데.

한창록_ 메시지에 관한 고민은 줄곧 있었다. 결국 영화에서 어떤 의미를 포함하고 드러낼 수 있는 부분이 결말일 텐데, 그 신을 정말 많이 고쳤다. 촬영 직전까지도 영화를 어떻게 끝내야 할지 몰랐다. 콘티 작업 막바지에도 촬영감독과 엔딩에 관해 계속 이야기하고. 그러다 결국엔 ‘이 영화는 아이들의 시점에서 끝나야 한다’라는 생각이 들더라. 어른의 시선이 개입되는 순간, 영화 밖으로 튕겨 나오는 느낌을 받았거든. 마지막은 용기 시점, 그러니까 죽은 자의 시점으로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누구도 이 상황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고 봤다. 영화가 이해하는 척하면 오히려 어설프게 보일 듯했다.

 

백지혜 배우는 <충충충>의 결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나.

백지혜_ 납득했고, 그래서 이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었다. 인물에게 어느 정도 적당한 거리를 두었기에 뭔가를 강요한다는 느낌이 없었다. 이 시나리오가 무언가를 소비하고 있다는 인상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포기하거나 방관하는 태도라고 할 수도 없었다. 쭉 지켜보는 느낌이었다. 그게 이 시나리오가 지닌 가장 큰 힘이라고 봤다. 캐릭터나 사건은 파격적이고 충격적인데, 그저 가십으로만 사용하지 않는 자세가 좋더라. 

 

완성된 영화를 정확히 짐작하기 어려운 시나리오였을 것 같다. 실제 영화는 편집과 이미지, 음악의 힘이 강한데, 배우 입장에서는 촬영 전에 그 모든 걸 예상할 순 없지 않나. 무엇을 믿고 출연을 결심했나.

백지혜_ 일단 말이 나온 대로 감독님이 이런 식으로 편집하실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다만, 내가 연기할 지숙이라는 캐릭터를 포함해 모든 인물의 결핍이 입체적으로 느껴져서 마음에 와닿았다. 무엇보다 감독님 전작 <구경>(2024)을 보고 확신을 얻었다. 단편에서 그만큼 완성도 높은 작업은 처음 본 것 같다. 내가 그동안 기다렸던 감독을 찾아낸 느낌이었다. ‘이런 감독이라면 내게 무엇을 이야기해도 내가 믿고 갈 수 있겠다. 서로 논리로 싸울 필요가 없겠다.’ 시나리오와 전작만으로도 충분히 설득이 됐다. 감독님을 만나서 되게 기쁘고 반가웠다. 온전히 나를 맡길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겼으니까.

 

감독은 “겁이 많아서” 잘 모르는 것들에 관심이 간다고 했는데, 그런 면모는 배우와도 닮은 것 같다. 낯선 것을 향한 호기심만큼 조심성도 많은 사람이라는 인상이다. 지난 인터뷰를 찾아보니 지숙을 연기하기 위해 섭식장애 관련 책과 논문을 일일이 찾아봤다고. 

백지혜_ 진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 그 질환이 있는 이들이 무엇을 겪는지, 어떤 과정을 통과하는지 알아야 한다. 오히려 모르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표현이든 상상이든 ‘진짜’에서 시작해야 힘이 있다고 본다.

 

관객으로서는 지숙을 바라보기가 난처할 정도였다. 너무 보기 싫은 곳인데, 너무 정확한 지점을 가리키고 있으니 ‘가짜네, 별로네’ 하며 외면할 수가 없더라. 백지혜 배우의 ‘리얼한’ 존재감과 방향성이 영화 안팎으로 중심을 잡아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이너스’의 감정으로 모인 인물들 사이에서도, 기술과 에너지가 각기 다른 세 배우 사이에서도. 

백지혜_ 내가 그런 걸 했는지 잘 모르겠는데. (웃음)

한창록_ 지숙 역으로 노련한 사람을 캐스팅하고 싶었다. 배우마다 성향이 다른데, 지혜 배우를 만나고선 엄청 똑똑하고 정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디렉션을 주면 바로 반응할 줄 아는 배우였고, 에너지도 굉장히 셌다. 잘 맞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직감이나 직관에 의존하는 편이거든. 

<충충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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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 애초에 보물찾기하듯 배우들을 골라낸 걸까 싶기도 했다. 우주 역의 정수현 배우는 연출 경험이 있어선지 시야가 넓고, 덤보 역의 신준항 배우는 드라마 현장에서 갈고 닦았을 유연함이 눈에 띄었다. 한편, 용기 역의 주민형 배우는 정제되지 않은 에너지를 내뿜는다. 근데 모든 배우가 그에 짓눌리지 않고 기세 좋게 받아치더라. 인물들이 삼각관계를 이룰 때마다 조마조마하면서도 흥미로웠다.

한창록_ 현장에서 본 지혜 배우는 딱 중간 포지션에 있는 사람 같았다. 신준항 배우와 정수현 배우가 분석적이고 테크닉적인 면모가 강했다면, 주민형 배우는 인물 안으로 들어가려는 메소드적 성향이 컸다. 지혜 배우는 그사이를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배우라는 느낌을 받았다.

백지혜_ 배우끼리도 감독님이 캐스팅을 정말 잘하신 것 같다고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캐릭터의 속성을 배우 본인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거든. “대체 날 어떻게 알고 캐스팅하셨지?” 하면서 우리끼리 신기해했다.

한창록_ 영화 속 삼각관계 자체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가져왔다. 그 사건에서도 삼각관계가 흥미로웠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두 친구는 무슨 관계이고, 그들 사이에 불쑥 나타난 전학생은 어떤 존재인가. 내겐 그 사건이 고전 하이틴 드라마의 ‘흑화’ 버전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삼각관계라는 구조에 이미 긴장감이 있지 않나. 사람들이 흥미로워하고 보고 싶어 하는, 언제나 갈등이 만들어지는 구조다. 용기와 지숙이라는 인물은 어딜 가든 한 커플쯤은 있을 법한 유형이라고 봤다. 서로 결핍이 있기에 끌리는데, 특히 남자아이 쪽은 여자아이에게 제 모든 사랑을 바침으로써 자기 상처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구원받고 싶어 한다. 그런 유형의 사랑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존재하는 듯하다. 물론 해피엔딩을 고민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착한 남자는 재미없다’라는 말도 있듯 너무 뻔한 기승전결은 피하고 싶었다.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의 나쁜 예처럼 보이기도 하고. 백지혜 배우는 현장에서 어떤가. 질문이 많은 편?

한창록_ 많이 대화했나? 잘 모르겠다. 물론 이야기를 나누긴 했지만, 현장은 워낙 바쁘게 진행됐다. 대신 촬영 전에 리딩을 많이 하려고 했다. 배우 캐스팅이 막바지에야 완료됐는데, 그 기간 안에서도 5~6회 정도 리딩을 했다. 현장에선 최대한 디렉팅하지 않고 배우들이 자유롭게 할 수 있게끔 두려고 했다. 크게 의견이 다르지 않은 이상은. 웬만하면 리딩할 때 모두 잡아두고, 현장에서는 되도록 빨리 찍으려고 한다. (웃음)

백지혜_ 나는 그 시스템이 참 좋더라. (웃음) 리딩 단계에서 감독님이 원하는 걸 듣고, 내가 준비해 간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자 따로 질문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준비한 다음 현장에 가면, 공간과 상대 배우에게서 전해지는 감각을 느끼면서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었다. 원하는 만큼, 원하는 곳까지 가도 되는구나. 아주 자유로운 동시에, 큰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있다는 안전감도 있었다.

 

촬영지는 어디였나.

한창록_ 홍성이 많았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가 홍성 쪽에 있어서, 가급적 그 근처로 로케이션을 구하려 했다. 인천에서도 좀 찍고.

백지혜_ 용기와 지숙의 어린 시절을 재현하는 그 폐건물 부지가 인천이다. 실제로도 거의 디스토피아 같은 풍경이라, 나도 처음 가서는 놀랐다. 엄청나게 추웠던 기억이 난다.

 

그 장면에서 지숙과 용기가 서로 울음 배틀하듯 감정을 쏟는다. 연극적이기도 하고, 동화 같기도 하더라. 

백지혜_ 감독님 전작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고, 그걸 인상적으로 봤다. 그 장면을 이런 방식으로 재해석할 수 있구나 싶어 신기했다. 마치 내가 퍼포머가 된 기분이었다. <충충충> 찍으며 그런 순간이 종종 있었다. 내가, 우리가, 지금 장면이 어떤 현대미술 작품처럼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끔찍한데, 그게 또 환상적으로 재탄생하기도 하고. 관객에게 어떤 감정이나 상황을 바로 눈앞에 탁 내보이는 것이 아니라, 한 차례 더 생각할 시간을 주는 방식이다. 그게 이 영화의 매력 아닐까. 어떤 면에선 좀 끔찍하게 아름답다. (웃음)

 

그 퍼포먼스라는 부분에 관해 묻고 싶었다. 지숙은 관객을 갈망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또 다른 자신을 만들어 수행하는 인물 같다. 말하자면 지숙은 배우인 셈이다. 백지혜 배우가 감정에 몰입하는 순간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감정을 만들어 내는 순간 자체를 연기하는 듯했다.

백지혜_ 그 포인트를 놓고 감독님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지숙은 결국 상처와 아픔, 결핍을 이용해서 사랑받으려고 하는 인물이다. 예를 들어 우주에게 자기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할 때, 나라면, 그러니까 실제 백지혜라면 왠지 부끄럽고 민망해서 우주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말했을 거다. 그런데 감독님은 상대를 끝까지 보면 좋겠다고 했다. 상대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계속 확인하는 거다. 그 시선에 관한 이야기를 여러 번 했다. 지숙은 우주를 쳐다보면서, 반응을 살피면서 말한다. “이것 봐. 나 불쌍하지 않아?” 하는 식으로. 결국에는 어떤 쇼를 펼치고 있는 거다. 지숙을 연기할 때 가장 중요했던 포인트이기도 하다.

백지혜 ⓒ이영진

그러다 보면 심리적으로도 알게 모르게 영향받았을 텐데.

백지혜_ 특별한 변화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촬영 당시 찍은 사진들을 다시 보고 놀랐다. 내가 이렇게까지 수척했나 싶을 정도로 너무 파리한 얼굴이라서. 

한창록_ 분장해서 더 그렇지 않을까?

백지혜_ 분장 안 하고 찍은 그냥 일상 사진도 그렇더라. 지금이랑 몸무게가 되게 차이 나는 것도 아닌데, 사진으로 보면 완전히 다른 사람 같다. 

 

감독은 오히려 촬영 끝나고서 핼쑥해지지 않았을까 싶다. 혼자 편집실에서 보냈을 시간이 궁금한데.

한창록_ 편집을 혼자서 마친 건 아니다. 본래 김지현 편집기사님이 1차 편집을 해주셨는데, 아무래도 내가 생각했던 느낌이 아니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고민하다가 우선은 내가 전체적으로 한 번 편집하기로 했다. 호기롭게 시작했지. 그런데 너무 오래 걸리더라. 밤을 새워 작업하면 한 30초 분량 나왔다. 그런데 다음 날 보면 그 30초가 이상하게 느껴지고. 그걸 고치다가 다음 날도 30초 만들고. 진행 속도가 이렇다 보니 후반 작업에만 반 년 넘게 걸렸다. 실은 그 무렵에 졸업이 다가오고 있었다. 졸업하면 선생님들에게 코멘트를 받기도 어렵지 않나. 그렇게 일종의 데드라인이 생기고 나서, 속도 내어 부랴부랴 작업했다. 당시 학교에서 진행된 장편 프로젝트가 세 편 정도였는데, 나 빼고 다른 친구들은 이미 완성한 상태였거든. 나만 아직도 편집하는 중이라 불안했다. 그래도 가능한 만큼 이것저것 다 해보고, 능력이 닿는 만큼 시도했다. 선생님들도 그렇고, 주변에서 “이 영화는 연출자가 편집할 수밖에 없다”라고 했다. 어떻게 보면 일반적 편집에서 ‘에러’라고 걸러지는 것들이 <충충충>에서는 필요한 거니까. 그걸 선택할 권한도 감독에게 있고. 결국 내가 1차 편집본을 만들고, 이후 편집자와 함께 감정선을 고민하며 매무새를 다듬어 나갔다.

백지혜_ 이 영화는 인물이나 이야기뿐만 아니라, 편집마저 ‘에러’의 집합이네. 마음이 아프다. (웃음)

한창록_ 촬영 다 마치고 회식하러 이동하는 차 안에서 혼자 생각했다. 이 영화의 형식 자체가 용기와 닮아 있구나. 나 역시 <충충충>이 데뷔작이고, 그만큼 마음을 다했다. 이 영화가 살아 남아야 다음 영화를 찍을 수 있기에, 어떻게든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싶었다. 진짜 발악을 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점이 용기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백지혜_ 우리 다 마찬가지였다. 살아 남으려고 다들 발악했다. 그래선지 전우애 같은 게 생기더라. 나중에 배우끼리 이야기한 적도 있다. 각자 자기 자리에서 엄청나게 칼을 갈던 사람들이 <충충충>에서 만났구나. 다들 칼 하나씩 차고 여기로 모였구나.

 

현장에서 즉흥으로 만들어 낸 부분이 얼마쯤 될까. 어안 렌즈로 촬영한 왜곡된 이미지, 핸드헬드 카메라의 거친 흔들림, Y2K 감성을 드러내는 색채와 조명 등 콘셉트가 확실한 편인데. 

한창록_ 제작 환경이 정말 열악했다. ‘어떻게 하면 이 예산 안에서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가 미션 아닌 미션이었다. 예산을 구체화하고 촬영을 준비하다 보니 “신을 줄여라”, “더는 안 된다”라는 말이 나오더라. 원래도 오래된 캠코더를 활용해서 찍는 분량이 있었는데, 그때 고민 끝에 캠코더 분량을 확 늘렸다. 차라리 캠코더로 다 찍자. 그러면 회차를 안 줄여도 되고, 소수 인원으로 찍을 수 있으니까. 어떻게든 계획한 만큼 찍겠다는 마음이었다. 만든 이야기를 압축하는 것도, 한 공간에서 그걸 재미있게 풀어 나가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데다, 인물들이 공간을 이동하면서 생기는 정서가 있다고 봤다. 조명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했다. 어차피 발전차를 부를 돈은 없으니 “그래, 우리는 정신으로 가자” 했다.

백지혜_ 진짜 기합으로, 기세로 밀어붙이는 거네.

한창록_ <릴리슈슈의 모든 것>(이와이 슌지, 2001)을 보면 ‘뻥조명’ 때려서 가지 않나. ‘그래, 정신이다!’ 김종수 촬영감독님한테 말했더니 “그렇게 하시죠”라며 쿨하게 받아주셨다.

백지혜_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구나. (웃음)

 

방금 말한 <릴리슈슈의 모든 것>을 포함해 여러 레퍼런스가 언급됐는데, 실제로 감독에게 등대가 되어 준 작품은 뭐였나. ‘나도 저기까지는 해볼 수 있겠다’ 혹은 ‘저 이상까지 가보고 싶다’라는 식으로 자극과 믿음을 준 영화들은?

한창록_ 무언가를 넘어서겠다는 생각까지는 못 했던 것 같다. 그저 좋은 작품에서 때마다 필요한 것들을 조금씩 가져왔다. 예를 들면 마티유 카소비츠의 <증오>(1997)는 영화 대사로도 인용했는데, 그 영화만의 정서와 거친 느낌을 가져오고 싶었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2000년대 초반 디지털 캠코더로 촬영된 작품이기에 촬영 방식을 참고할 수 있었고, 워낙 점프 컷이 많다 보니 “어떻게 편집점을 여기서 붙였지?” 싶은 부분들도 눈여겨봤다. 자연스레 왕가위 영화나 90년대 홍콩영화도 떠올렸다. 저항성을 담은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아서 펜, 1967) <이지 라이더>(데니스 호퍼, 1969) 같은 뉴아메리칸 시네마 작품을 많이 찾아보려 했다. 공부하면서 접했던 영화를 다시 꺼내보며 ‘여기서 가져올 수 있는 거 없나? 여기서 새롭게 해볼 거 없나?’ 고민했다. 오마주할 부분이 있다면 <충충충>에서 적극 활용하고 싶었다. 요즘 10대들이 콘텐츠를 소비하는 방식도 그렇지 않나. 오리지널을 그저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2차, 3차 창작한다. 그런 방식이 이 영화와도 잘 맞겠다고 생각했다.

한창록 ⓒ이영진

백지혜 배우는 앞서 연기하며 자유로움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필모그래피를 보면 장르나 규모, 주제에 상관없이 다양한 작품을 성실하게 만났구나 싶은데, 이번 현장에서 유난히 해방감을 느꼈던 이유는 뭘까.

백지혜_ 그러게. 왜 나는 자유로움을 느꼈지? 생각해 보면 영화에서 지숙이 행하는 그 모든 것은 사실 내가 현실에서 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숙을 멀게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나랑 많이 맞닿은 캐릭터로 다가왔다. 지숙은 내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욕망을 거리낌없이 드러내는 인물이다. 현실에서는 그럴 수가 없는데, 지숙이 되자 그 욕망을 마구 드러내도 문제 없더라. 그 세계에 녹아들며 즐거움을 느꼈던 것 같다. 

 

그 욕망이란 건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일까.

백지혜_ 여러 가지가 섞여 있다. 사랑도 받고 싶고, 원하는 걸 갖고 싶고, 상대를 내 마음대로 하고 싶기도 하고.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얘는 당연히 다 받아줄 거야.’ 그 이기적이고 거센 욕망을 드러낼수록 지숙과 더 가까워졌다. 일상에서 그랬다면 분명히 문제가 생길 텐데, 영화에선 오히려 득이었던 거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했던 건, 현장의 수평적 분위기였다. 일하다 보면 수직적 관계에 놓이는 경우가 많은데, <충충충>에선 같은 위치에 선 동료로서 이 영화를 위해 함께 간다는 감각이 있었다. 훨씬 자율성이 있었다. 연기하면서도 ‘이렇게 해도 괜찮을까? 이거 아니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을 다른 때보다 덜 했다. 

 

그렇다고 배우끼리 많이 맞춰보는 방식도 아니었을 것 같다.

백지혜_ 맞다,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웃음) 근데 또 신기하게 거기서 오는 시너지가 있더라.

 

영화 속 인물들은 서로 좋아하고 동경하는 동시에, 공격하고 상처 입힌다. 지숙 또한 눈앞에 있는 상대를 미워해서라기보다 자신을 견디지 못해 점차 뒤틀리는 것처럼 보였다. 여러모로 강렬한 경험이 되었을 작품인데, 다 마치고 나선 어떤 감정이 남았나.

백지혜_ 글쎄, 촬영하고 나서 시간이 꽤 흘렀기에 감정은 희미하다. 지금 기억에 또렷한 건 추위 정도? (웃음) 인물의 감정을 떠나 백지혜로서 깨달은 바는 있다. “인생은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 생각을 언제 했냐면,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를 공개하고 난 다음이었다. 아주 화려하고 소란스러운 밤을 보내고 서울로 돌아왔다. 당시 공연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자전거 타면 집에서 대학로 연습실까지 20~30분 정도 걸려서, 몸도 풀 겸 항상 자전거를 타고 갔다. 여느 날처럼 페달을 구르는데, 갑자기 누가 귀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마음의 목소리가 들리더라. “지혜야, 인생 쉽게 안 달라져. 지금처럼 묵묵히, 하던 대로 열심히 해.” 왠지 처음에는 조금 슬펐다. 그러다 그 말을 되새겼다. 맞지, 나 원래 이렇게 살았지. 그냥 계속해야지.

 

인생은 결국 그렇게 달라지지 않을까. “지금처럼 묵묵히, 하던 대로 열심히” 바꿔 가는 사람 같다.

백지혜_ 조금씩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도 했다. 인간 백지혜의 인생에서는 내가 주인공이 아니어도 되니까, 배우로서는 주인공 하게 해달라고. 나한테 운이 있다면, 삶 말고 연기에 전부 쓸 거라고. 영화 속에 있을 때, 현장에서 연기할 때가 제일 좋다. 다른 인물로 분하고, 그걸 통해 관심받는 그 순간에 내가 제일 살아 있다고 느낀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나 진짜로 이걸 원하는구나’ 자각했고, 약간 영혼을 판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웃음) 인생에서는 주인공 아니어도 된다고, 내 운은 다 연기에 쓰겠다고. 

 

인간 백지혜보다 배우 백지혜가 더 귀한가? 

백지혜_ 연기할수록 점점 그렇게 되는 것 같다. 사실 말은 이렇게 해도, 나는 이미 인간 백지혜를 충분히 아끼고 있다. 그러니까 아직은 연기하는 백지혜에게 조금 더 힘을 몰아줘도 되겠다는 마음이다. 연기할 때면 매번 두렵다. 현장에서 내가 뭘 했는지도 모르겠고, 잘했는지는 더 모르겠다. “좋았다” 칭찬을 들어도 진짜 좋았던 걸까 싶고. 매 순간 불안과 의심과 자기 검열이 연속한다. 

백지혜 ⓒ이영진

완성된 작품 속 자기 모습을 봐도 여전히 잘 모르겠나.

백지혜_ 때마다 다르다. “저건 조금 다르게 해도 좋지 않았을까?” 하며 아쉬워할 때도 있다. 그러다 어떤 장면은 “저걸 저렇게 했네. 다시 해도 못 하겠다.” 싶기도 하고. 감독님의 선택을 보면서 “저기서 그 장면을 쓰셨구나. 다행이다.” 하는 마음도 든다. 

 

<충충충>에서는 어떤 장면에서 “다시 해도 저렇게는 못 하겠다” 싶었나.

백지혜_ 용기가 숨어 있는 장소로 우주를 데려 가는 장면이 있다. 우주가 떠난 후, 지숙이 용기에게 소리 지르며 원망을 퍼붓는다. 그 장면을 보는데, 저건 한 번뿐이었다는 생각이 들더라. 계획이야 어떻게 세웠다 할지라도, 그날 현장에서 나온 연기는 계획과는 전혀 다른 뭔가였거든.

 

그러면 긴 과정을 마친 지금, 감독에게 진하게 남은 감정은 무엇인가.

한창록_ 왜 영화를 자식 같다고 하는지 알겠다. 워낙 오래 붙잡고 있다 보니 그런 느낌이 든다. 지금은 수험생으로 돌아간 것 같기도 하다. 불안하고 초조하고. 어쨌거나 이제 떠나보낼 생각하면 시원섭섭하다. 이 친구가 밖에 나가서 사랑받았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별수 없이 아쉬운 마음이 공존한다.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구했나.

한창록_ 아직 못 찾았다. 때마다 바뀌기도 하고, 그때그때 질문하면서 답을 찾아야 하는 것 같다. 나도 계속 변하고 있으니까.

 

첫 장편을 완성하는 과정은, 결국 “나는 이런 감독이구나”라는 자기상을 파악하는 시간이기도 했을 거다. 스스로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것이 있다면.

한창록_ 그 역시도 계속 바뀔 수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영화감독을 꿈꿨던 시간을 돌이켜보면 모든 게 신기하고 생경하다. 내가 장편을 찍긴 찍는구나. 개봉이란 걸 하긴 하는구나. 학부 시절부터 ‘언제 장편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오래 품고 있었으니까. 막연하게나마 기대감도 아주 조금은 생겼다. 영화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로 먹고살 길이 열리지 않을까.

 

이전 인터뷰에서 “영화로는 생계유지를 할 수 없어서 내가 영화를 하는 사람이 맞나 하는 질문이 맴돌고, 그러면서 조금씩 나태해진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고민이 정리됐다는 뜻인가.

한창록_ 거의 10년 가까이 홍대 쪽에서 아르바이트했다. 레게 바에서도 일했고, 그 인터뷰를 할 때쯤에는 연남동 문어숙회 식당에서 일했다. 그 뒤에는 칵테일 바에서 가장 오래 일했다. 그 모든 아르바이트를 딱 지난달에 그만뒀다. 10년간 나의 주 수입원은 파트타임 일자리였는데, 앞으로는 어떻게 되려나 싶다. ‘진짜 영화로 먹고살 수 있을까?’ 하다가 ‘영화가 직업이 되는 게 맞나?’ 하고. 물론 개봉한다고 영화로 먹고살 수 있는 상황이 펼쳐지는 건 아닌데, 이제 뭔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백지혜_ 뭔가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모습이 꼭 용기 같다. “이젠 알 것 같아. 내가 뭘 해야 될지.” (웃음)

한창록 ⓒ이영진

몇 해 전 ‘문경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을 소재로 장편 시나리오를 개발 중이라고 했는데, 그 작품은 진행 중인가.

한창록_ 아직 시나리오까지는 못 갔고, 트리트먼트 단계에서 헤매고 있다. 답을 못 찾은 것 같다. 그래도 ‘언젠가는’이라는 생각으로 아이템을 갖고 있다. 이것도 2011년에 실제 일어났던 사건이다. 문경 돌산에서 한 남자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채 발견됐다. 수사 결과, 이 사람이 스스로 못을 박았다고 밝혀졌다. 팔에 구멍을 뚫어서 매달렸다는 거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그것이 알고 싶다>(SBS)에서도 소개한 사건이고, 방송에서 남자의 가족과 사이비 종교를 둘러싼 개인사가 드러나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이것도 <충충충>과 맞물리는 데가 있다. 타인과 교류할 수 있는 현실 세계를 버리고 이탈하는, 어긋난 신념을 좇아 자기 세계 안으로 깊이깊이 들어가는 인물. 내가 그런 인물과 사건에 호기심을 느끼는가 보다.

 

왜 끌리는지 이유도 생각해 봤나.

한창록_ 잘 모르겠다. 본능적으로 궁금하다. 아마도 그 행동과 선택의 이유를 알 수 없어서 그런 것 같다. <충충충>도 실제 사건 자체가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사건 디테일이 영화 안에 비슷하게 남아 있다. 지숙이 성적 행위를 매개로 전학생을 불러내서 죽이려고 하는 부분이나, 용기가 빨간 복면을 만들어 쓰는 부분. 특히 빨간 복면을 쓴 행위가 궁금했다. <스파이더맨>(샘 레이미, 2002)에서 피터 파커가 각성하고 나서 마스크를 만들지 않나. 그런 영웅 심리를 닮은 건가? 그만큼 세상에 자신을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컸던 건가? 이런저런 궁금함이 모이고 불어나면서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했던 것 같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불가해한 사건을 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아 보인다. 실제로 <그것이 알고 싶다> 같은 프로그램을 즐겨 보는 편인가.

한창록_ 좋아한다. 매주 봤다. 다양한 사건 중에서도 특히 미결 사건에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봤다. 그런데 요새는 수사가 워낙 잘돼서 웬만하면 미스터리 없이 해결되더라. 그때부터 흥미를 잃었다. (웃음)

 

완결된 범죄 사건을 다루는 프로그램도 나름 재미있지 않나. 권선징악이 주는 안도감도 있고.

한창록_ 나는 오히려 반대인 것 같다. 현실은 정확한 결말이나 안도감과 거리가 멀다 보니, 보고 나면 ‘내 현실은 이렇지 않은데’라는 괴리감이 더 크다. 

 

다음엔 감독이 어떤 이야기를 들고 나타날지 기대된다. 아르바이트도 관두었다고 했는데, 미래를 좀 더 구체적으로 고민하는 시기 아닐까 싶다.

한창록_ 글쎄, 실은 잘 모르겠다. 독립영화를 할지 상업영화를 할지도 결정하지 못했고, 솔직히 내가 뭘 하고 싶은지도 아직 못 찾은 것 같다. 목표가 명확해야 어디 가서든 “저는 이런 게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할 텐데, 그 중심을 못 잡고 있다는 느낌이다.

 

왜 길을 못 정하는 것 같나. 하고 싶은 게 되게 많은 사람 같은데.

한창록_ 새로운 걸 쓰고 싶다. 근데 그중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나도 안다. 원래 이럴 때는 그냥 시작하는 게 답이다. 밖에 나가서 땅 파다 보면 어떤 답이 나올 텐데, 눈앞에 자잘하게 해야 할 일들이 있다 보니 그걸 처리하다가 시간이 어영부영 가버리는 것 같다.

백지혜 ⓒ이영진

그런 면에서는 행동력 있는 백지혜 배우의 자세를 배울 필요도 있겠다.

백지혜_ 우리 MBTI가 그렇다. 나는 부지런한 P, 감독님은 게으른 J. (웃음) 게으르다기보다는 완벽주의에 가깝지 않은가 싶기도 한데, 나는 완벽함에 다다르기는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 그냥 하는 쪽이다. 일단 시작하고 본다.

 

미식가 같다. 요리의 장르와 세팅에 구애받지 않고 한 술 떠서 맛 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대단한 한 방을 기다리기보다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부지런히 체험하는 탐험가 같기도 하고. 

백지혜_ 뭐든 부딪혀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직접 겪어봐야, 먹어봐야 그게 뭔지를 안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상처받고 후회가 생기기도 한다. 근데 상처받고 후회하면서, 그렇게 기뻐하고 슬퍼하면서 산다. 내가 일희일비하기로 알아주는 사람이거든. (웃음)

 

부딪혀 보길 잘했다 싶은, “지나고 보니 이 선택은 참 좋았다”라고 할 만한 순간은? 

백지혜_ <충충충> 오디션 보러 갔을 때가 떠오른다. 작품과 캐릭터에 관해 감독님과 대화를 나눴는데, 그때 내 동생에 관해 이야기했다. 나는 관찰을 좋아한다. 책과 논문에 등장하는 이들을 지켜보기도 하고, 주변 사람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그의 심리와 행동 패턴을 살펴본다. 이를테면 “이 사람은 왜 이런 신발을 골랐을까?” 하는 식이다. 감독님도 관찰했다. 말할 때 종종 팔을 다른 쪽 손으로 붙잡는 자세를 취하는데, 그건 어떤 습관인지 궁금하더라. 저 자세가 감독님한테 어떻게 작용하는 걸까? 편안함을 주나? 그렇게 남들을 지켜보는 일이 내겐 재밌고 자연스럽다. 지숙과의 접점을 찾은 것도 관찰 덕분이었다. 동생이 어릴 적 불안정했던 시기가 있는데, 당시 모습이 지숙의 행동 패턴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느꼈다. 그 이야기를 오디션에서 감독님께 공유했다.

 

결론적으로 <충충충>이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는 뜻이네.

백지혜_ 감독님이 선택해 준 거지.

한창록_ 서로 선택했지.

백지혜_ 같이 작업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아무 의심 없이 나를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감독을 만났다.

 

그러면 감독에게 버팀목이 되어준 것은 무엇이었나. 

한창록_ 물론 나를 지지해 주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큰 힘을 얻었지만, 스스로 다잡으려고 많이 노력했던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결과와 상관없이 나 자신에게 창피하지 않은 삶을 살고 싶다. 이따금 흔들려도 그런 마음으로 나를 붙잡으며 하루하루 가는 거다. 

 

자신에게 꽤 높은 기준을 적용하는 듯한데, <충충충>에는 얼마나 만족하나.

한창록_ 할 수 있는 걸 다 했기에 만족스럽다. 다만, 그 만족과 별개로 여전히 고민한다. 더 좋은 영화가 될 방법이 있었을까? 그런 방향도 있었을까? 인터넷 검색하면서 작품 관련 코멘트를 전부 찾아보려 하는데, 호불호가 크게 갈리더라. 그러면 두 시간쯤 산책하며 ‘잘 만든 게 맞나?’ 곱씹는다. 물론 이제 와서 돌이킬 수 있는 건 없다. 찍을 때도 많이 고민했고, 그 모든 선택의 순간에 결정을 내린 것도 나다. 그래도 생각은 계속한다. 이 고민들이 이어져서 다음 영화는 더 잘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한창록 ⓒ이영진

부정적인 감상평에 반박하고 싶지는 않나.

한창록_ 혼자 벽 보고 서서 말할 때도 있긴 한데, 뭐 어쩌겠나. 그럴 수도 있지. 나도 다른 영화 보면서 이건 어떻고 저건 어떻고 그랬는데. (웃음)

백지혜_ 왠지 도사가 되어 가는 것 같네.

한창록_ 계속 붙잡고 있으면 나만 손해니까. 또 일리 있는 평가에 대해서는 고민해야 하는 것도 맞다. 감사하게도 여러 곳에서 응원받고 상도 받았지만, 그렇다고 “역시 내가 옳아, 내 선택이 정답이야”라고 받아들이면 위험하다고 본다. 귀를 열어두려 하고, 오히려 칭찬을 경계해서 듣는다. 부산에서 처음 영화를 공개했을 때도 혼란스러웠다. 괜찮은 건가? 대체 어떻게 되어 가는 거지? 오전에는 객석에서 좋다는 말을 들었는데, 저녁에는 왓챠피디아에 악플이 달리고. (웃음) 지금은 꽤 초연해졌지만, 그 무렵엔 영화제에서 GV 들어갈 때마다 손을 떨었다. 

백지혜_ 나는 이런 마음을 한동안 눈치채지 못했다. GV 기다릴 때 감독님 얼굴이 굳어 있기에 무슨 일이 생겼나 했지. 알고 보니 관객이 영화를 어떻게 봤을까 싶어서 긴장했던 거더라. 요새도 댓글 찾아봤나?

한창록_ 매일 왓챠피디아 들어가서 확인한다. 며칠 전에 별점 하나짜리 코멘트가 올라왔더라. 작품과 나를 분리하기가 쉽지 않다. 작품이 별로라는 말을 들으면 나를 싫어하는 것 같고. 일상에서 누구 한 명만 내게 뭐라고 해도 하루 종일 신경 쓰이지 않나. 그런 기분이다.

백지혜_ 시간이 지나도 분리는 어려울 거다. 내 작품인데 어떻게 떨어질 수 있겠나.

 

관객과의 만남을 기다리는 배우 마음은 어떤가. 촬영하고 거의 1년이 지나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됐고, 또 반년이 지나 개봉을 앞두게 됐다. 누구 못지않게 오랜 시간을 기다렸는데.

백지혜_ 사실 이렇게 빨리 개봉할 줄 몰랐다. 감독님한테도 정말 여러 번 말했다. 예상치 못하게 큰 선물을 받은 느낌이라고. 감독님이 하루에 30초씩 편집하던 때도 나랑 다른 배우들은 “우리 영화 편집하고 있대!” 하면서 마냥 행복했다. 중간중간 감독님이 편집한 분량을 조금씩 보여주기도 했고. 그러다 감독님이 다른 촬영 현장에 스태프로 가신다고 했을 때, 한 번 감독님을 찾아갔다.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나름 “우리가 여기 있다. 잊지 마라.” 어필했던 거다. (웃음) 

 

응원이기도 하고.

백지혜_ 그렇지. 압박과 동시에 응원을 보냈다. 

한창록_ 근데 압박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배우들이 되게 잘 기다려준다 싶었는데. (웃음) 어떻게 되어 가는지, 얼마큼 진행 됐는지 묻는 경우도 없었다. 속으로 ‘다들 초연한데?’ 생각하면서 작업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전부터 독립·예술영화 유통배급지원센터 인디그라운드를 통해 이미 배급사 미팅에 참여했던 것으로 안다. 극장 개봉을 일찌감치 준비한 셈인데.

한창록_ 비슷한 시기에 장편 작업했던 친구가 먼저 ‘독립영화 매칭 워크숍: 퍼스트링크’에 참여했다. 그런 비즈니스 매칭 경험이 없는 터라 미리 준비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에게 이것저것 물어봤고, 퍼스트링크에서 현재 배급사인 엣나인필름과 처음 만났다. 바로 배급이 결정된 것은 아니다. 부산영화제 일정을 마치고 다시 논의해 보자고 하더라. “알겠습니다” 하고는 부산에서 엣나인필름 근처를 기웃거리며 계속 “해주세요” “해주세요” 그랬지. (웃음)

백지혜_ 진짜? 어머, 배우들은 모르는 시간이 있었구나. 감독님이 애쓴 덕분에 선물 같은 개봉이 왔네. 이 영화를 누군가는 좋아하고 또 누군가는 별로라고 할 수도 있다. 근데 나는 그렇게 이야기가 터져 나온다는 점이 이 영화의 매력이라고 본다. 감독님이 말한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도 맞닿아 있는 지점 같다. 대화를 시작하게 하는 영화. 질문을 던지는 영화.

 

<충충충>을 한마디로 소개한다면. 

백지혜_ 친구들한테 말했다. “진짜 좋은데, 진짜 끔찍한 영화야.” 인물들이 처한 환경이 너무 날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마음이 많이 힘들 수 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먼저 봤던 친구가 시사회에 오기로 했다. 좋은 영화라서 다시 보고 싶은데, 솔직히 걱정된다고 하더라. 그 모든 감정과 감각을 또 마주할 생각을 하니 아득한 거겠지. 내가 <서브스턴스>(코랄리 파르쟈, 2024)를 봤을 때 그랬다. 극장에서 두 번 봤는데, 두 번 봐도 너무 재밌더라. 또 너무 고역이고. (웃음)

<충충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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