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들>은 <오! 수정>(2000), <북촌방향>(2014), <그 후>(2017)를 잇는 홍상수의 네 번째 흑백영화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차갑게 빛나는 겨울 햇살도, 흥청거리는 취객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의 흑백영화는 겨울이 제격이라고 생각해온 우리들에게 <풀잎들>의 가을은 낯설고 기괴하지만, 은근하고 새롭다. 심지어 이 사람들은 북촌 골목에 숨어 있는 카페에 모여들어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영원히 북촌을 맴돌 운명을 타고 난 자들처럼 카페 앞에 심겨진 고무 대야의 여린 잎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간혹 골목 어딘가로 산책을 떠났다가 자신이 앉았던 테이블로 돌아온다. 카페는 홍상수가 펼쳐놓은 죽음과 사랑에 관한 대화의 장, 귀가 밝고 눈이 매서운 자의 관찰기, 가을밤의 술 한 잔을 예찬하는 쓸쓸하고 헛헛한 사람들의 초상이 된다.
홍상수가 패닝과 줌을 사용해서 현실과 초현실의 틈을 벌여놓거나, 일상과 무의식이 찢어지면서 불현듯 죽음이 출몰했음을 떠올리면, <풀잎들>은 그가 다른 것에 집중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이미지는 명료하지만 강렬하고 압축적이지만 입체적이고 소박하지만 강직하다. 시종일관 운동하는 시선이 엿보고 엿들은 각각의 이야기 조각이 자족적으로 존재하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건네지면서 하나의 입방체가 되어간다.
실내의 패닝이 만들어내는 수평적 움직임에 따른 감각의 확장과 계단을 오르내리는 기계적인 반복에서 발생하는 진공과 갇힘의 대비도 눈여겨볼만하다. 패닝에 따른 수평운동이 반복될수록 좁은 테이블이라는 표면과 그곳에서 발설되는 볼썽사나운 감정들이 전이된다.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비루하고도 처절한 변명, 죽은 자를 끝끝내 떨쳐낼 수 없을 것이라는 퉁명스런 합의, 고달픈 육신을 뉠 방 한 칸조차 없는 빈궁함에 대한 토로와 조심스런 거절, 함께 글을 쓰고 싶다는 난데없고도 괴상한 부탁, 검은 비닐에 돌돌 감아놓은 술을 함께 마시자는 제안에 따라 사람들(과 그들이 차지했던 면들)이 분리되거나 넌지시 모여든다.

카페 바깥과 내부를 오가는 걸음과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이파리를 바라보고 골목 너머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시선은 불멸성과 무용함을 동시에 느끼게 만들고 초현실로의 도약과 맴도는 죽음마저 끌어안는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그들 모두의 하루는 한적함과 웃음소리, 고성과 독백, 어른거리는 죽음과 삶, 고귀하고도 부박한 사랑, 집요한 대화의 시간을 거쳐 소진되거나 재생되는 생의 의지를 긍정하기에 이른다. 그에 비해 수직성에 주목한 계단은 철저하게 프레임 내부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에 기계적이고 강박적인 왕복 움직임은 오히려 운동의 소멸, 정지된 육체로 향한다.
부단히 움직여도 제자리걸음일 뿐인 당당한 쓸모없음은 식당 벽에 길게 드리우던 그림자로 확장되면서 영화 표면에 내재된 초현실적 순간과 조우한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처음 등장하는 포커스 이동과 그림자는 이미 죽어버린, 고귀한 사람의 초현실적 귀환이자 죽음마저 끊어낼 수 없는 그림자의 개입이다. 홍상수는 큐비즘 회화가 입체적인 면들을 해체시켜 고착된 보기의 방식과 감각의 질서를 교란시킨 후 재배치한 것처럼 동일한 공간을 다른 각도에서 조망한다. 각기 다른 면들이 중첩되거나 분리되고 합해지는 과정을 통해 현실과 사람과 세계와 영화가 서로의 면에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포섭되고 확장된다. 즉, 서사와 형식과 영화의 신묘한 일치를 이루기 위해 <풀잎들>은 전위성을 공고하게 표명한다. 세계의 다면성과 다층성을 이토록 명쾌한 이미지로 불러내고 펼쳐놓고 분해하고 조립함으로써 우리는 듣기, 쓰기, 보기, 타인, 자아, 꿈, 삶, 죽음, 사랑, 비천함, 초라함, 고귀함이 일순간에 만개하고 사라지는 광경을 목도하게 된다.

풀잎들 GRASS 제작 전원사 감독·각본 홍상수 출연 김민희, 정진영, 기주봉, 서영화, 김새벽, 안재홍, 공민정, 안선영 배급 전원사, 콘텐츠 판다, 무브먼트 제작연도 2017년 상영시간 66분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개봉 2018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