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방을 가득 메우는 신음은 섹스의 열기로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뭉치고 굽은 등을 요령껏 밟아주는 연인의 발밑에서 비집고 흘러나온다. <모과>(백소혜, 2025) 속 희지(오지후)와 수건(박종환)은 그토록 부드러운 연인이다. 둘은 40대이며, 각자 연기하고 시를 쓴다. 일상에 달라붙은 것과 꿈결에 흩어지는 것을 자기만의 언어로 벼리는 일에 집중하지만, 세상은 그들에게 만년 지망생 혹은 무명이라는 꼬리표를 붙인다. 오지후는 그 말의 경계에서 오래 서성거렸던 배우다. “유명하세요?”라는 무심한 질문이 실존을 지워버리는 감각을 잘 알면서도, 나와 당신이 서로 호명하는 순간에 사랑을 체감하는 사람. 언젠가 또 어디선가를 막연히 기다리기보다는 지금 여기가 내 집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희지처럼, 오지후도 저만의 시간과 공간을 부지런히 닦았다. 제51회 서울독립영화제를 앞두고 오지후와 만났다. 영화에서 보여준 것과는 사뭇 다른 외양이었으나, 음절마다 정성을 들이는 호흡은 그대로였다. 긴 방황과 고독을 동력으로 삼은 이답게 오지후는 다부지다. 상처가 생길수록 향이 짙어지는 모과처럼 이제 그는 오래 곱씹을수록 더 많은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세계를 기다린다.
2021년 서울독립영화제 배우프로젝트 수상자다. 어느 영화제보다 방문 소감이 남다를 듯한데.
서독제는 내게 전환점을 만들어준 곳이다. 예술 기반의 작업을 오래 해왔지만, 배우프로젝트에서 ‘디렉터스 초이스’를 받기 전까지 영화에 출연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프로필을 아무리 돌려도 연락이 없으니 ‘나는 매체 연기에 맞는 얼굴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 2021년 수상 이후 연락이 하나둘 오기 시작했고, 작품이 쌓여 갔다. 언젠가 권해효 선배님께 “배우 프로젝트가 제 인생의 전환점이었어요”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다. 그랬더니 “아니야, 오지후가 디렉터스 초이스에서 역대 최고 점수 받았잖아. 당신이 잘해서 잘 된 거지.”라며 오히려 나를 높여주시더라. 그 말이 참 고마웠다. 더군다나 <모과>에서 내가 무명 배우로 등장하지 않나. 오늘 할 이야기가 많다. (웃음)
근데 배우도 ‘무명’이나 ‘지망생’이었던 시절이 있나? 언제나 현재 진행형으로, 매번 실전으로, 처음부터 예술가로 살았을 것만 같다.
예술가 정체성은 내 안에 분명히 있다. 작업하다 보면 관객에게 “유명하세요?”라는 질문을 종종 받아왔다. 길거리에서 퍼포먼스를 할 때도, 그림 작업을 할 때도, 공연을 할 때도. 그런데 그 질문을 받는 순간, ‘그럼 나는 무명인가?’라는 감각이 먼저 와버리는 거다. <모과>를 찍고 나서야 깨달았다. 질문 자체가 오류라는 걸. 유명과 무명은 극단의 개념이 아니다. 누군가 “유명하세요?”라고 묻는 순간 내 실존 전체가 가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름이 없는 사람인가? 나는 존재하는데?’ 싶은 감각이랄까. 이 바닥에서 나는 여전히 ‘무명’에 가깝지만, 나름대로 예술을 계속하고 있고 이제 매체 배우로서의 정체성도 새로 생겼다. 해마다 영화제를 통해 얼굴이 소개된다는 점에 감사하다. 사람들이 ‘오지후’라는 배우를 점점 알아봐 주고, 그러면서 조금씩 이름이라는 것도 생기는 듯하다. 결국 외부에서 이야기하는 ‘무명함’은 곧 내 실존의 비가시화라는 걸 이해했다. 그래서 더 드러내고 싶다. 가시화되고 싶다는 마음이고, 그 창구가 영화와 드라마 등 매체라면 좋겠다. <모과> 덕분에 오래된 질문에 대한 답을 얻었다. 내가 가고 싶은 방향을 깨닫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뿐해졌다.
<두 고양이의 이별>(안선유, 2020) <소년유랑>(이루리, 2023) 등 여러 단편에 이어 올해 개봉한 <우리 둘 사이에>(성지혜, 2025)까지 단기간에 여러 작품을 거쳤고, 매번 다른 무드와 역할을 소화했다. 일부러 새로운 모습에 도전했는지, 아니면 때마다 그런 작품이 운 좋게 들어왔던 건지?
운이 좋았다기보다, 기다려서 선택한 것 같다. <두 고양이의 이별> <새들이 사는 마을>(2023) 등 안선유 감독의 작품에는 제작자로 참여했다. 영화를 하고 싶은데 좀처럼 기회가 생기지 않아서 평소 알고 지내던 선유 감독을 부추겼다. (웃음) <소년유랑>은 서독제 배우 프로젝트 이후 감독이 연락을 줘서 함께했고. <모과>의 백소혜 감독과는 일전에 <쉬>라는 작업으로 먼저 연이 닿았다. 당시 감독님이 “선배님이랑 하고 싶은 작품이 따로 있어요. <모과>라고, 지금 시나리오 쓰는 중이에요”라고 말했던 게 기억난다. 실은 <모과> 대본을 받기 전에 몇 달간 고민이 깊었다. 내가 한국 영화의 현실을 너무 몰랐던 걸까. 현장에 들어오니 다들 물리적 나이로만 오지후를 보더라. 40대 배우에게 오는 대본은 죄다 ‘엄마’ 역할이었다. 엄마라서 싫은 것이 아니라, 엄마의 이름도 서사도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엄마’라는 기능만 남은 인물들. 한 달에 예닐곱 편씩 대본이 오는데 엇비슷했다. 만약 내가 “어떻게든 현장에 있고 싶어!”라는 열망에 집중했다면 그 작품들을 다 했을 거다. 근데 곰곰이 생각하니 난 ‘오지후라는 아티스트를 실존하게 하고 싶다, 또렷이 세우고 싶다’라는 열망이 더 컸다. 정중하게 작업을 거절하고 2~3개월 쉬었다. 그 무렵 <모과> 대본을 받았다. 반가웠다. 이건 내 이야기라는 감각이 들었으니까. 박종환 배우와의 호흡도 큰 행운이었다. 굉장히 진지한데 무겁지 않고, 유머러스하면서도 가볍지 않은 사람이다. 확실히 경력에서 나오는 여유와 안정감이 있더라.


영화 보면서 두 배우가 정말 사랑했다고 느꼈다. (웃음)
내가 뒤풀이 자리에서 그 얘기를 꺼냈다. “얘들아, 고백할 게 있어. 실은 나 촬영하는 동안 수건이 사랑했어.” 다들 웃으면서 “저희 다 알고 있었어요!” 하더라. (웃음)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면 바로 다가가지 못하고 말미잘처럼 곁에서 머뭇거리는 스타일이다. 그런 모습을 희지에게서 발견하니 너무 부끄럽더라. 들킨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종환 배우에게도 말했다. “좋아해서 미안하다. 근데 나 종환 씨가 아니라 수건이를 사랑한 거야!” (웃음) 프러포즈 장면의 경우, 첫 테이크에서는 둘 다 오열했다. 수건이 제 미래와 정체성을 조심스럽게 전하고, 희지는 그 뜻을 알면서도 거절하는 상황이다. 둘 다 감정이 터져버렸는데, 감독님이 그 장면에서는 눈물을 좀 아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결국 눈이 충혈된 채로 재촬영했다.
희지는 “내 집은 여기”라는 말로 수건의 청혼을 거절한다. 그 문장에 희지라는 사람의 원형이 들어 있다고 봤다. 불안정하게 떠도는 듯하지만, 알고 보면 기반이 명확한 사람. 자신이 곧 집인 사람.
희지에게 많이 배웠다. 어느 GV에서 ‘희지와 오지후는 닮았나요?’라는 질문을 받았는데, 그 지점은 닮은 것 같다. 나도 스무 살에 집을 나와 오래 떠돌았다. 늘 불안정한 상태다 보니 외롭더라. 외로움과 쓸쓸함이 내 정체성인 셈인데, 그 때문에 흔들리고 지치기도 했다. 때로는 안정감을 갈망하기도 하고. 하지만 창작자 입장에서 보면 그러한 불안정함은 감사히 여길 만한 감각이기도 했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그 흔들림이 결국 나를 움직이니까. 어느 순간부터 ‘이 불안정함을 더 끌고 가다 보면 언젠가 그게 곧 집이 될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게 됐다. “여기가 내 집이에요”라고 말하는 희지의 단단함이 놀랍고 좋았다. 희지는 자기 두 발로 서고자 하는, 창작자로서 스스로 가시화하려고 애쓰는 사람 같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얼굴과 눈빛을 지녔다는 점도 희지와 닮았다. 영화에서 수건도 “희지 씨는 가짜 아줌마”라고 표현하지 않나. 방랑자적 면모 덕분인지 종종 비현실과 현실의 경계에 선 존재처럼 보이는데, 신기하게도 지금까지 연기한 인물들을 모아 보면 ‘사랑’이라는 테마로 묶이더라.
며칠 전 <프랑켄슈타인>(기예르모 델 토로, 2025)을 봤다. 델 토로 영화를 일부러 찾아보는 쪽은 아닌데, 난 이상하게 ‘괴물들의 사랑’ 이야기에 항상 마음이 가거든. <경계선>(알리 아바시, 2019) 속 트롤의 사랑, <티탄>(쥘리아 뒤쿠르노, 20121)에서 알렉시아가 체험하는 기이한 사랑, <셰이프 오브 워터>(기예르모 델 토로, 2018)와 <프랑켄슈타인>까지. 어째서 나는 이런 이야기에 매료되고 마는 걸까? 한참 생각했는데 괴물의 사랑에는 ‘누군가가 외로운 존재를 알아봐 주는 순간’이 있더라. 외로운 나를 누군가가 알아봐 주고, 그때 비로소 내 실존이 드러난다. ‘세상에 나를 알아보는 존재가 있구나’ 느끼는 순간, 그 마음에서 사랑이 발동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내가 연기한 인물들을 사랑이라는 키워드로 묶을 수 있다면, 아마 내가 품어 온 사랑의 의미와 정체성이 스크린으로 흘러나온 게 아닐까 싶다. <프랑켄슈타인>에서 특히 눈에 들어온 인물은 미아 고스가 연기한 엘리자베스였다. 괴물 자체, 그 본연의 존재를 알아보는 마음과 감정. 그것을 나는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모과>의 사랑은 어땠나. 영화를 보니 모과는 맛만큼이나 향이 중요한 과일 같더라. 그런 나이, 관계라는 것이 있겠구나 싶던데.
감독님이 모과는 상처가 나면 날수록 향이 짙어진다는 얘기를 해줬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모과가 특별하게 다가왔다. 영화 마지막에 희지가 시집을 만들어 수건에게 선물하지 않나. 그 장면이 좋았다. 무명 배우와 무명 시인이라는 ‘아직 가시화되지 못한 두 존재’가 서로를 호명하는 순간처럼 느껴졌거든. 누군가를 알아보고 이름을 불러주는 행위, 그게 사랑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물론 다수가 호명해 주면 좋겠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 우리가 쓴 시들이 나온다. 박종환 배우와 나, 감독님이 각자 쓴 글들을 영화로 마주하니 좋더라.
희지는 오디션에서 자유 연기로 “가장 보고 싶은 사람에게 하는 말”을 요청 받는다. 아버지를 향해 제주 방언으로 ‘숨은 눈’ 이야기를 하는데, 그 대사를 직접 썼다고.
대본에는 그냥 “자유 연기”라고만 적혀 있었다. 감독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희지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말을 해보자”라고 결론이 났다. 마침 내가 예전에 써둔 ‘숨은 눈’이라는 글이 떠올라 보여드렸고, 감독님이 좋다고 해서 그대로 대본화했다. 어느 날 식물 관련 책을 읽다가 꽃눈, 잎눈, ‘잠아(잠눈)’라는 개념을 알게 됐다. 숨은 눈이란 말을 처음 들어서 ‘이건 뭐지?’ 했는데, 외부에서 충격을 받든 내부적으로 발동이 걸리든 하면 어떤 꽃눈은 계절과 상관없이 꽃을 피우고 어떤 잎눈은 잎을 낸다는 뜻이더라. 이태원에서 살던 시절, 숨은 눈을 실제로 본 적이 있다. 마당에 목련 나무가 있었는데, 늦가을에 목련 한 송이가 홀로 피었다. 모두 ‘목련은 봄에 핀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꽃은 자기 때를 스스로 정한다. 그때 쓴 글이 ‘숨은 눈’ 이야기다. 꽃이 자기 때에 피어나듯 사람도 그렇다고 믿는다. 꼭 20대에 뭔가를 이뤄야 하는 것도 아니고, 저마다 때가 올 때 피면 된다는 생각이다. 각자의 시기가 있을 뿐이다. 그 문장은 나와 희지를 대변하는 동시에, 자기 때를 기다리는 모든 사람을 향한 말이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면 만개하는 날이 오겠지.

희지는 아버지에게 약속하듯 “느루 가겠습니다”라고 말한다. 단지 느리게 가는 사람이라는 뜻만은 아닌 듯한데.
‘느루’는 표준어는 아니고, 어떤 지역 사투리로 알고 있다. 어감이 좋아서 자주 쓴다. 아버지는 늘 내 속도가 느리다고 걱정하셨다. 어릴 적 운동회에서 달리기하면 친구들은 출발 신호 들리자마자 앞으로 튀어가는데,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달려가는 친구들 구경하고, 풍경 보고, 무슨 산책 나온 애처럼. (웃음) 매번 꼴찌로 들어오니 아버지가 속상해하셨다. 다른 애들은 손에 선물 하나씩 쥐고 오는데, 나는 뭘 하든 남들보다 발동이 늦게 걸렸으니까. 그런 나를 보며 걱정이 많으셨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많이 그리워하고 있다.
유년기에 아버지와 함께 보낸 시간이 많았나.
한집에 살았으니 물리적으로는 가까웠는데, 공유한 시간이 많았다고 하긴 어려울 것 같다. 아버지는 굉장히 가족적인 분이고 로맨티시스트였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로 내가 방황을 꽤 길게 했는데, 그럴 때마다 많이 속상해하셨다. 혼자 제주 바닷가에서 술 마시다가 취한 채로 집에 들어가고. 속된 말로 ‘날라리’였다. 그렇다고 내가 악한 마음을 먹고 누군가를 괴롭히는 성격은 아니다. 그랬다면 무서운 사람이 됐을 거란 생각이 든다. 영화 속 악역들을 보면, 솔직히 ‘나도 저 역할 잘할 것 같은데’ 싶거든. 내 안에도 악한 본성이 있고 선악의 스펙트럼이 모두 공존한다고 본다. 다만 현실의 나는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데 에너지를 쓰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냥 혼자 노는 사람이었다.
고독한 날라리였네.
내게 10대와 20대를 어떻게 보냈냐고 물으면 술뿐이라고 답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이대로 살면 진짜 죽겠구나’ 싶어졌고, 그때부터 각성한 사람처럼 무작정 걸었다. 우스갯소리지만 내가 제주 올레길을 최초로 걸었을 거다. 올레길이라는 게 생기기 전부터 걸었으니까. (웃음) 값싼 운동화를 신고, 제주 시청에서 동쪽 끝까지 이어지는 길을 미친 사람처럼 걸었다. 비가 오든, 발에 물집이 잡히든. 그 시절 내 별명이 『좀머 씨 이야기』(파트리크 쥐스킨트, 1991)에 등장하는 ‘좀머 씨’였다. 항상 어딘가를 걷고 있으니까. 내게 제주는 따돌림의 시간, 고립의 공간이었다.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내가 관계 맺기에 서툰 사람이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어려움을 겪는 나를 누군가가 알아봐 주고 손 내밀어줬다면, 그 시기를 좀 더 건강하게 보내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사람이 부재했기에, 결국 나를 괴롭히고 말았다. 한동안 나한테 제주는 싸늘한 바람과 쓸쓸한 기억이 떠오르는 고향이었다. 그러다 올해 제주여성영화제를 방문하면서 새로운 제주를 알게 됐다. 너무나 따뜻한 환대를 받았거든. 상영 마친 후 영화제 스태프들과 인사하면서 “여러분 덕분에 제주를 다시 사랑하기로 했다”고 감사를 전했다.
그러면 집을 떠나 가장 멀리서 살아본 곳은 어디인가.
베를린.
오늘의 헤어·의상에도 묘하게 베를린 감성이 묻어난다.
최근 작품에서 ‘베를린 유학파 예술가’ 역할을 맡았다. 그 캐릭터 때문에 머리를 이렇게 자른 거다. (웃음) 실제로는 2015년에 약 5~6개월을 베를린에서 머물렀다. 나름대로 ‘셀프 레지던시’를 실행한 결과였다. 당시 우리에게는 세월호 참사라는 공동의 기억과 감각이 있지 않았다. 2014년 4월 16일, 그날 난 제주에 있었다. 올레길 벽화 프로젝트를 맡아서 준비차 내려가 있던 때였다. 점심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는데, TV에서 속보가 뜨더니 곧 “전원 구조”라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안심하고 동료 작가들과 식사를 마쳤다. 근데 오보였지. 프로젝트를 취소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계속 욕지기가 올라와서 뭘 먹을 수도 없고 마음이 너무 힘들더라. 어떻게든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아서 여러 작가와 ‘여우비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림이면 그림, 음악이면 음악, 각자 예술 작업을 통해 세월호 참사를 이야기하는 프로젝트였다. 나는 바디 퍼포먼스를 했는데, 그 퍼포먼스가 유튜브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이곳저곳에서 초청이 이어졌다. 베를린에 가기 전까지 진짜 미친 듯이 공연을 했다. 어느 순간 완전히 소진돼 있음을 깨달았다. ‘쥐어짜고 있구나. 솔직하지 않은 감정이구나.’ 그러자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벤야민이 아무것도 안 풀리면 공간을 바꿔보라고 말하지 않았나. 지도를 펼쳐서 손가락으로 툭 찍은 곳이 베를린이었다.

베를린에서는 어떤 시간을 보냈나.
처음엔 아무 계획도 없었다. 그러다 내 소식이 우연히 알려졌고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교민들에게 공연을 제안받았다. 이것도 직업병인데, 분명히 퍼포먼스 안 하려고 베를린까지 간 것 아닌가. 근데 와중에 혹시 모른다는 마음으로 바디 페인트를 챙기긴 했다. (웃음) 어떤 마음으로 내게 연락했는지 알기에 공연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 도시가 아티스트를 품는 기운이 있다 보니 이후로도 여러 인연이 자연스레 생겼다. 심지어 내가 머물던 숙소 아래층은 퍼포먼스 스튜디오였다. 담배 피우다 궁금해서 슬쩍 봤는데 사람들이 들어오라고 손짓하더라. 마침 즉흥 퍼포먼스를 하는 날이었고 나도 마이크 잡고 10분간 내 이야기를 했지. 베를린에서 벽화 작업도 했다. 벽화를 전시하는 갤러리에서 내 스케치를 보고 마음에 든다며 작업을 의뢰했다. 체류비가 부족했는데, 그 작업 덕분에 여행 경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다 하루는 드라마 촬영 현장을 마주쳤다. 여성 배우 두 명이 담배를 피우고 있기에 겁 없이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짧은 대화를 나눴는데 그들에게서 ‘매체 연기 배우’라는 자부심이 강하게 느껴졌다. 홀린듯 그 기세에 빠져들었고, 한국에 돌아가면 영화배우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렇게 결심했다고 해서 곧장 길이 열리진 않았지만, 그날이 시작점이긴 했다.
최근엔 어떤 캐릭터나 작품을 기다리고 있나.
요즘 고민하는 건 방법적인 한계다. 하고 싶은 바야 많은데 물리적으로 부딪히는 것들이 있다. 나이가 가져오는 장벽도 그렇고, 소속사가 없다는 사실도 고민스럽다. 소속사에 들어가야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걸까, 아니면 지금처럼 독립적으로 움직여도 괜찮은 걸까. 여러 질문이 생기는 시점이다. 그래도 연기를 하면서 느끼는 것 중 하나는, 내 얼굴을 카메라로 봤을 때 객관적으로 나쁘지 않다는 점이다. 제대로 된 옷을 입는다면 더 넓은 세계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윌렘 대포를 좋아하는데, 앞으로는 그처럼 악인 같은 역할도 해보고 싶다. 선악의 경계에서 노는 작업을 기대한다.
영화 <모과>의 희지는 꿈을 꾸지만 동시에 삶의 바닥을 아는 사람이다. 배우는 꿈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견디나. 무엇을 희망하며 살아가는지 궁금하다.
말하기 민망한데, 사실 내겐 원대한 포부가 있다. 나처럼 혈혈단신으로 작업하는, 외로움과 쓸쓸함을 정체성으로 지닌 예술가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고 싶다.
‘공간’이라고 하면, 집이나 학교 같은 개념인가?
그보다 훨씬 크다. 재단을 설립하고 싶다. 매체 연기를 선택한 이유는 여럿이지만, 이런 바람도 얼마간 영향을 줬다. 미술이나 퍼포먼스만으로는 재단의 꿈에 도달하기까지 쉽지 않겠다고 판단했다. 나는 환경, 성소수자 등 ‘문제’라고 불리는 것들을 더는 ‘문제’라는 단어로 묶고 싶지 않다. 그런 주제와 존재가 더는 문제가 아닌 세상을 꿈꾼다. 그러려면 현실적으로 봤을 때, 경제적 힘도 필요하다.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언젠가 내게 힘이 생긴다면 건강하게 쓰고 싶다.
본명은 오소영이다. 지후라는 이름은 스스로 지었나.
엄마가 <애마부인>(정인엽, 1982)의 안소영 배우를 좋아해서 지어준 이름이다. 그 이름을 사랑했지만, ‘오소영’이라는 음가에 깃든 가벼움과 페미닌함이 내 성향과 잘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 조금 더 중성적인 이름을 갖고 싶었다. 오래전부터 글을 쓸 때 ‘오지훈’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는데, 거기서 받침 ‘ㄴ’을 떼어 오지후로 정했다.
한자도 붙였나.
당연히. 어질 지(智), 빛날 후(厚)를 쓴다.
악역 하고 싶다던 배우에게 어울리는 이름 같지는 않은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무서울 수도 있다. 원래 선한 얼굴이 돌변하면 진짜 무서운 거 알지? 윌렘 대포도 인터뷰에서 해맑게 웃으며 “나는 아주 스윗한 사람”이라고 하더라. (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