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묘하고 박력있는
SIFF 2025 <무관한 당신들에게-이신자> 황현빈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Festival / 2025-11-27

<카지노>(디즈니+, 2022)에서 이름도 없는 ‘안치영 아내’로 등장해 화제를 모았고, <LTNS>(TVING, 2024)에서 바람을 피우는 유부녀 수지 역으로 눈도장을 찍었다. <장미맨션>(TVING, 2022)에서는 경찰, <닥터로이어>(MBC, 2022)에서는 몽골인 가사도우미, <에스콰이어>(JTBC, 2025)에선 결혼정보회사 대표 역할을 맡았다. 단정한 단발과 차분한 눈매가 황현빈의 트레이드 마크. 서늘하면서도 신뢰감을 주는 인상이 작품 곳곳에 스며들어 때로는 안정감을 부여하고 때로는 반전을 획득한다. 드라마에서 활약해 온 그가 제51회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옴니버스 영화 <무관한 당신들에게>로 극장을 찾는다. <미망인>(박남옥, 1955)을 재해석한 단편 <이신자(異晨者)>에서 70년 전 이민자가 연기한 신으로 분한다. 시대극의 외피 속에서 그는 망설임 없는 움직임으로 감정의 파고를 드러내는가 하면, 뜻 모를 표정에 복잡한 심경을 담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스크린으로 부딪혀오는 기세가 남달라서 만남을 청했다. 실제 황현빈은 그가 연기했던 어떤 인물보다 훨씬 자유로워 보였다. 인터뷰 말미에 “누가 황현빈에 대해 물으면 ‘웬만한 건 다 하겠다고 나설 사람’이라고 말해줘야겠어요” 농담하니, 큰 웃음을 더하며 “부지런히 소문 좀 내줘요” 받아친다. “아직 총알이 많이 남아서” 무서움보다는 의욕이 앞서고, 연기에 정답은 없으니 힘껏 달려나갈 뿐이다. 생각에 얽매이는 대신, 안 가본 자리로 몸을 움직이는 사람. 황현빈이 올해 끝에 도착한 곳은 어디일까.

 

 

스타일링의 큰 변화 없이도 매번 다른 얼굴처럼 보인다. “아, 그 작품에 나온 배우였어?” 하고 뒤늦게 놀란 적이 여러 번인데.

얼마 전 종영한 <에스콰이어> 오디션에서도 같은 얘기를 들었다. 감독님이 <LTNS>를 재밌게 봤다면서 대체 어느 에피소드에 나왔냐고 묻더라. 작품마다 꽤 다른 인상으로 보이는 것 같은데, 사실 장점인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하나의 이미지로 딱 각인되는 편이 배우로서는 더 유리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가 하면  오디션장에서 “연기는 좋은데 도시적인 외모 때문에 시대극과 안 어울린다”라는 얘기도 들은 적 있다. 근데 내 본모습은 완전히 촌스럽거든? 전문직이나 부유층 역할을 맡다 보니 그런 일도 생기는 듯하다. 가능하면 여러 방면으로 총알을 좀 쏴야 하는데. (웃음) 친구들은 “얘는 밑바닥 정서에 더 가까운 앤데 신기하다”라며 놀린다. 매체 연기를 시작한지 4년쯤 됐는데, 그래도 짧은 기간에 역할을 다양하게 만났다. <닥터로이어>에서 몽골인 캐릭터를 맡았을 때는 솔직히 당황했다. 다른 국가라면 그렇게까지 어렵진 않았을 텐데 처음엔 막막하더라. 촬영 들어가기 두세 달 전부터 입 모양, 발음, 말투 등을 연습했다. 아주 큰 역할은 아니라 할지라도 시청자에게 보일 만한 인물이었기에 최선을 다했고, 다행히 결과도 긍정적이었다. 운이 좋았다. 돌이켜 보면 모든 작품과 인물이 그렇다. 내가 카메라 앞에서는 확실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다. 지인들은 “네가 일상에서도 계속 배우 같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연극할 때도 그랬다. 공연 끝나면 무장 해제된 사람마냥 평소처럼 까불며 돌아다니는데, 팬들한테 혼났다. 제발 카리스마 유지해달라고. (웃음)

 

자연인 황현빈과 배우 황현빈 사이에 갭이 큰 편이구나.

근데 다들 그렇지 않을까? 누구와 있느냐,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모습을 달리 한다. 나는 그런 질문 받을 때 제일 힘들다. “무슨 역할 하고 싶어요? 원래 성격은 어때요?” 왜냐면 때마다 다르거든. 배우로서는 늘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고. 솔직히 ‘이 역할은 도저히 못 하겠다’ 싶은 것도 없다. 나는 남자 역도 해보고 싶고, 외계인이 들어와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연극과 영화, 단편 등 작업 영역에도 갇히고 싶지 않다. 최근엔 되려 감독님들이 어려워한다. “단편도 찍으세요?”라며 조심스레 묻는 DM이 종종 오거든. 작품이 좋으면 장르나 규모에 상관없이 하고 싶다. 시나리오가 가장 중요하다. 독립영화에도 좋은 작품이 얼마나 많나.

 

여름에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첫 공개한 <혀>(임다슬, 2025)로 주목 받았다. 시체스영화제도 다녀왔고.

임다슬 감독님도 <LTNS>에서 나를 처음 보고 기억해뒀다가 이번에 연락을 줬다고 하더라. <혀> 촬영은 이상할 만큼 순조로웠다. 오동민 배우와도 “이렇게 해볼까? 저렇게 하면 더 좋겠는데?”라며 적극적으로 소통했다. 시체스영화제도 즐거웠다. 첫 방문이었는데 시간과 마음을 내어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라. 관객 반응이 실시간으로 와서 재밌었다. 옆 좌석에 나이 지긋한 관객이 앉아 계셨는데, 클라이맥스 씬에서 내 팔꿈치를 툭 치며 웃더라. 나도 따라서 그를 툭 치며 웃고. (웃음) 얼마 후 이종수 감독님에게 <이신자> 캐스팅 제안을 받았다. <혀>를 인상 깊게 봤다며 연락을 준 거다. 시나리오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곧장 출연하겠다고 했다. 감독님이 “그래도 시나리오는 보셔야죠”라며 말리는 입장이었는데, 작품 취지가 이미 마음에 들어서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답했다. <이신자> 현장도 무척이나 즐거웠다. 내가 계속 장난 치니까 감독님이 “누가 현장에 조카를 데려왔어?” 농담할 정도였다.

<이신자>
<미망인> ⓒ한국영상자료원

<이신자>는 박남옥 감독의 <미망인>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오리지널 작품은 예전에 본 적이 있나?

몇 년 전 유튜브에서 ‘한국 최초의 여성 감독’이라는 설명과 함께 짧은 영상으로 본 적은 있었다. 제대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정말 대단하다 싶을 만큼 재미있더라. 대사들도 좋고. 종수 감독과 일찌감치 방향을 잡았다. ‘원작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톤은 맞춰야 한다, 그래야 관객에게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갈 수 있다.’ 대사 톤 맞추는 작업을 가장 먼저 했고, “이 장면에서는 조금 과하게 가볼까요? 그 부분은 평소 배우님처럼 말해 볼까요?”라며 여러 버전을 시도했다. 

 

목소리를 다양하게 쓰면서 미세한 톤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 인상적이다. 묵직한 소리를 내다가, “여인의 강짜가 더 무서운 걸 몰라?” 같은 대사는 표독스러울 만큼 하이 톤으로 소화한다. 

후시녹음은 따로 하지 않았다. 다만 대장간 장면의 경우, 편집본을 보고 내가 아이폰으로 여러 버전을 다시 녹음해 감독님에게 보냈다. 기존 음성의 볼륨이 좀 작았거든. 갑자기 흥분해 큰 소리를 낼 인물이 아니라고 봤기에 특별히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는데, 현장음이 들어오며 대사가 묻히더라. 감독님이 그 부분만 내가 보낸 녹음 파일 중 하나를 선택해 후반 작업에 사용했다. 내 입장에선 그게 신의 한 수였다. 남들은 차이를 모를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중요한 부분이었다. 한편, “여인의 강짜가 더 무서운 걸 몰라?”는 감독님과 몇 번씩 대화하며 맞춘 대사다. 영화 콘셉트에 맞게 상상력을 더 얹자고 판단했고, 현장에서는 의상과 소품이 갖춰지면서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조성됐다.

 

고전영화의 무드를 저예산 환경에서 구현하는 건 쉽지 않다. 의상과 소품을 언급했지만, 영화를 봐도 어떤 부분에서는 한계가 눈에 띤다. 그 와중에 배우들이 뻔뻔하다 싶을 만큼 집중력을 유지하던데.

글쎄, 나는 연극을 했던 경험이 있어선지 몰입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어쨌든 상대 배우뿐만 아니라, 옷과 칼 등 실제로 보고 만질 수 있는 사물이 존재하지 않나. 힘을 받을 만한 요소가 많다고 느낀다. 게다가 감독님이 흐름을 잘 본다. 어느 순간 ‘이 테이크다’ 싶은 공기가 잡히면 놓치지 않고 이어간다. 칼 장면에서 집중력이 생겼을 때, 이전 장면으로 돌아가서 두 씬을 이어가자고 하더라. 호흡이 맞아떨어지니 나도 훨씬 몰입하게 됐다. 아, 그리고 칼 그림자 장면은 내 덕분에 생긴 거다! 쉬는 시간에 그림자 놀이한다고 혼자 또 장난치는 중이었다. 벽에 대고 손으로 이것저것 모양 만들었는데, 감독님이 보더니 “아이디어 좋은데요?” 라며 즉흥으로 찍었다. (웃음)

 

고전영화 특유의 절도 있는 연기를 선보이면서도 미묘한 감정 변화를 드러낸다. 특히 신이 남자를 떠나기 전에 내비치는 미소는 알쏭달쏭하기까지 하다. 의도적으로 투박한 연기를 하는 동시에 내면의 진동을 표현하는 과정은 어땠나.

마지막 표정이 가장 힘들었다. 감정이 하나일 수 없으니까. 작별에 대한 결심이기도, 새로운 시작을 향한 의지이기도 하다. 어떤 관객은 저주를 내리는 것 같다고 하더라. (웃음) 표정뿐만 아니라 신이 짐을 가지러 걸어가는 장면도 한참 고민했다. <미망인>을 보면 인물들의 움직임이 아주 심플하고 정확하다. 대사도 마찬가지고. 그런 리듬을 <이신자>에 가져오고 싶었다. <미망인>에서 신이 거울을 보며 다짐하듯 말하는 장면이 있지 않나. 신은 욕망을 바로바로 표출하는 편인데, 그 속을 들여다보면 여자이자 엄마로서 느끼는 여러 갈등이 일렁인다. 그 묘하고 박력 있는 무드를 <이신자> 마지막 장면에서 써보려 했다. 원작과의 연결성이 관객에게 가 닿지 않을지라도 스스로는 맥락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군더더기를 최대한 빼야 하는 작업이고, 이종수 감독의 연출 또한 미사여구를 덧붙이는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다. 배우로서는 이런 방식이 어떻게 다가왔나. 자유로웠는지, 아니면 답답하기도 했는지?

내게는 연기론이라고 할 게 없다. 작품마다 방식이 다를 뿐이다. 셰익스피어도 안톤 체홉도 훌륭하지만, 그 둘을 연기하는 건 전혀 다른 일인 것처럼 말이다. 고전의 특징을 이어받되 그것에 제한되지 않으려 했다. 완벽히 재현하는 데 목적을 두면 그저 성대모사하듯 인물이 단순해질 듯했다. 분위기와 정서에 집중하고, 나머지는 대본에 충실하고자 했다. 단순하게 임하는 것이 답인 것 같다. “여기서는 반드시 이래야 해”라는 원칙이 없었기에 자유로웠다.

황현빈 ⓒ이영진

주변인들이 ‘갭 차이’를 느끼는 이유를 알겠다. ‘호기심 천국’ 같은 사람이구나 싶거든. 연기론이 없다는 건 작품 세계의 모든 것이 궁금하다는 뜻이다. 아이처럼 “이건 뭐야? 저건 뭐야?” 하며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사람인데, 겉보기엔 무게감 있고 명석한 이미지다.

너무 빨리 간파당했네. (웃음) 내 연기의 원동력은 호기심과 결핍에서 나오는 것 같다. 나는 ‘어떤 배우가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특별히 해본 적이 없다. 답이 없는 질문이지 않나. 그러니까 연기가 재밌는 것이고. 오히려 “연기란 무엇이다” 하고 정답을 알면, 연기를 안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단지 내가 아는 것은, 내게 연기가 좋은 일이라는 거다. 연기는 나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미망인>이 다루는 주체성, 욕망, 용기 같은 주제는 현재의 나에게도 유효하다. 박남옥 감독님의 삶을 보면서 힘을 얻었다. 속으로 되물었다. “박남옥 감독님은 어떻게 영화를 찍었는데, 네가 <이신자>를 허투루 해? 집중해야지. 네가 이 정도로 치열하게 살아? 너라면 그 시대에 아이 업고 영화를 만들 수 있겠어?” 불평하지 말고 열심히 하자는 생각이 들더라.

 

박남옥 감독은 시대와 세대를 건너 사명감을 불어넣는 존재인 것 같다. 

내가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나 싶긴 하지만, 돌이켜볼수록 감사한 일이다. 그런 사람 한 명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는지, 그런 심지 하나가 마음에 얼마나 큰 이야기를 불러일으키는지. 서울독립영화제에 오는 친구들에게 꼭 <미망인>을 먼저 보라고 했다. 그거 봐야 우리 영화 훨씬 재밌게 볼 수 있다고.

 

올해 선보인 두 편의 단편 <이신자>와 <혀>는 기이한 호러라는 공통점이 있다. 고전 공포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들도 있는데, 혹시 감독과 공유한 레퍼런스가 있다면.

그럴 수가 없었다. 여기서 또 갭 차이가 발생하는데, 사람들이 말하는 ‘황현빈의 거짓 같은 3대 진실’이 있다. 술 못 마시고, 놀이기구 못 타고, 무서운 영화 못 본다. (웃음)

 

그렇다면 평소 즐겨 보는 장르는?

딱히 정해져 있지 않고 그날 기분에 따라 달라진다. 만약 비가 온다고 하자. 그러면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박흥식, 2001)가 보고 싶어진다. 그 영화에 담긴 비 내리는 장면이 떠오르거든. 요즘은 이종수 감독님 작품 이야기를 주변에 많이 한다. 감독님한테 전작을 보여달라고 했다. 당신은 내 연기 영상을 봤을 거 아니냐, 나도 당신 작품을 보고 싶다. (웃음) 그래서 <부모 바보>(2023)와 <인서트>(2024)를 봤다. <인서트>도 좋은데, <부모 바보>는 정말… 다들 안 믿겠지만 나는 엉엉 울었다. 주변에도 꼭 한 번 보라고 추천했다. 얼마 전에는 <여름이 지나가면>(장병기, 2025), <첫여름>(허가영, 2025)도 재밌게 봤고.

 

말하면서 표정이 시시각각 달라진다. 뭔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데 본래 겁이 없는 편인가?  

나는 원대한 목표를 꿈꾸기보다 ‘오늘 하루 잘 살자!’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릴 적부터 잠들기 전에 죽음을 종종 곱씹고는 했다. 우울하거나 무거운 의미로서가 아니라, ‘내일이 반드시 오리라는 보장은 없구나’ 같은 감각이었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더 재미있다. 내일은 또 무슨 일이 벌어질까 하고. 배우로서 내 쓸모에 선을 긋지 않으려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연극에서는 내 나이를 훨씬 웃도는 역할을 자주 맡았다. <칠수와 만수>에서는 진선규 선배가 만수 역을, 내가 만수 엄마 역을 했다. 물론 연극이라 가능한 설정이지만, 그런 경험을 꾸준히 쌓다 보니 어떤 작품이나 배역을 만나도 겁을 먹지는 않는 편이다. 두려움보다 “해볼 수 있겠다”는 감정이 먼저 든다. 무엇보다 되돌아보면 모든 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앞서 말했듯 <LTNS>를 찍지 않았다면 <혀>의 임다슬 감독을 못 만났을 테고, <혀>에 출연한 덕분에 <이신자>의 이종수 감독과 작업할 기회가 생긴 것이지 않나. 좌충우돌했던 시간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스트레스 받는 순간도 있지만 결국은 감사한 마음으로 회복하게 된다.

황현빈 ⓒ이영진

어디서 인연이 이어질지 모르니, 매 순간 긴장하고 완벽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낄 법도 한데. 그렇게 가벼운 마음가짐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

한 번은 어떤 공연을 보는데 막 내리고 나서 선배들이 배우 한 명을 혼내더라. 그런데 나는 그 배우 연기가 제일 좋았다. 알고 보니 그날이 그 배우의 첫 무대였다. 당연히 떨렸겠지. 테크닉이 없으니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진심으로 말하는 것뿐이고. 근데 나는 그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 떨면서 진심을 전하는 모습이 정말 그 인물 같았다. 이런 경험을 보면, 굳이 완벽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연기는 본질적으로 주관적이다. 누군가에게는 좋아도, 누군가에게는 별로일 수 있다. 어떤 배우도 매번 100퍼센트 완벽한 연기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해방감을 느끼거나 둘 중 하나인데, 기왕이면 해방감을 택하는 편이 낫다고 본다. 

 

시원시원하고 곧은 인상인데 예상 외로 움직임이 유연해서 놀랐던 적이 있다. 어릴 적엔 춤을 췄다고. 

지금은 어머니가 하나님을 믿으시지만 원래 무당이셨다. 어느 날엔가 푸닥거리를 해야 한다며 나를 한국 무용 학원에 보내셨다. 그러다 초등학교 2학년쯤 됐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무용을 그만두라고 하시더라. 나도 나인 게 그 어린 나이에 단식하면서 떼를 썼는데, 하루는 엄마가 마당에서 무용복과 사진을 불태우고 있었다. 내가 귀가하는 시간에 맞춰서 ‘너는 앞으로 절대 춤을 못 춘다’ 보여주려고. 그때는 되려 울지도 않고 ‘그렇구나’ 했다. 대신 그날부터 길에서 춤을 췄다. 몸을 쓰고 싶은데 달리 갈 곳이 없으니까. 옛날에는 동네에 붐 박스 들고다니는 오빠들 있었거든. 공원에서 카세트 틀어놓고 춤추면 나도 그 옆에서 따라 했다. 춤이 제일 재미있었다. 학교에서는 잠만 자고. (웃음) 그 후 성인이 될 무렵 JYP 오디션을 봤고, 합격해서 잠시 활동했다. 당시엔 연습생으로 들어간 줄 알았는데, 지금 보면 댄서였던 것 같다. 관계자가 비도 박지윤 백댄서부터 시작했다며 곧 노을이 데뷔하니 백댄서를 하라고 하더라. 자유롭게 창작 안무를 하던 사람이 갑자기 백댄서를 하려니 어땠겠나. 좀이 쑤실 수밖에. 남자 댄서와 여성 댄서를 다르게 대하는 방식에 화도 나고. 춤을 평생 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늙을 때까지 재밌게 할 수 있는 건 뭘까?’ 자문했다. 그때 불현듯 떠오른 것이 연기였다. 짐 싸서 무작정 대학로로 갔다.

 

삶의 방향을 단번에 틀기란 쉽지 않을 텐데.

나도 신기한데, 내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다. ‘연기는 어쨌든 몸’이라고 생각한다. 만 시간의 법칙을 믿는다. 춤을 만 시간쯤 췄으니 몸을 쓰는 데 두려움이 없다. 최근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폴 토마스 앤더슨, 2025)의 숀 펜을 보면서 그가 몸을 쓰는 방식에 매료됐다. 자기 몸에 그 인물을 체화하기까지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그 과정은 일면 고통스럽겠으나, 연기하는 기쁨이자 재미이기도 하다.

 

‘베스트’를 뽑는 걸 어려워한다고 했지만 묻고 싶다. 황현빈 배우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 있다면.

누구 한 명을 고르기는 어려운데, 배우로서 롤 모델은 있다. 진선규 선배. 내가 극단 ‘간다’에서 데뷔할 때, 함께 연기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좋은 사람이다. ‘우리나라에서 선규 선배가 배우로서 이름을 올리지 못하면 나도 이 길을 안 가도 된다’라고 생각했을 정도다. 인성 좋고, 연기 잘하고, 상대 배우 배려하고. 그런 배우가 성공하지 못하는 세상이면 나도 굳이 연기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요즘도 가끔 연락한다. 주로 연기 얘기하는데, 변함 없이 든든한 선배다. 그런 사람이 잘 되어야 한다는 내 생각도 여전하다. 다만, 배우는 항상 선택을 기다리는 입장이고, 어떤 사람은 아주 높이 올라갔다가 하루 아침에 내려오기도 한다. 그 사이 새로운 사람이 등장하는가 하면, 누군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압도적인 실력을 선보인다. 흐름은 바뀌기 마련이다. 내가 컨트롤 할 수도 없다. 어떤 이는 그래서 조급해진다고 하는데, 나는 반대로 ‘그러면 더 자유로워도 괜찮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천성이 그렇다. 어릴 적에도 마찬가지였다. 집은 가난했지만 나는 나대로 하고 싶은 걸 했다. ‘이 가난은 내가 바꿀 수 없는 거네. 그러면 좋아하는 거 하자.’ 장점만은 아니다. 부모님은 “쟤는 왜 저렇게 생각 없이 살까?” 걱정하시거든. (웃음) 대충 사는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나한테는 자연스러운 방식이다. 

 

대충 산다기보다는 대차게 사는 쪽이다. 두려움이 없다고 하니 앞으로 보여줄 모습이 기대된다. 

아직 총알이 많이 남았지. 해보고 싶은 건 많다. 예를 들면 <범죄도시>처럼 주로 남자들만 등장하는 액션 장르에서 여자 형사를 꼭 한 번 맡고 싶다. 기존의 구조를 깨보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남장 또는 여장과는 다른, 정말 ‘남자 역할’을 해보는 것도 욕심난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그런 시도가 거의 없으니까. 충분히 해봤다는 생각이 안 들어서 두려움도 없는 것 같다. 유일한 공포는 나이를 먹으면서 기회가 줄어들까 하는 점이다. 내가 역할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해도 나를 보는 시선은 그럴 수 있으니. <파과>(민규동, 2025) 같은 작품을 보면서 긍정 회로를 돌린다. 배우로서 움직임에 자신감과 호기심을 느끼는 만큼 액션은 꼭 하고 싶고, 언젠가 좋은 기회가 오기를 바라며 준비하는 중이다. ‘이걸 내가 할 수 있을까?’ 싶은 일을 만나면 마음이 동한다.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고, 낯선 이들과 만나서 좋은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몰랐던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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