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구덩이
<맨홀> 권소현·김준호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5-11-19

<맨홀>에서 선오와 선주는 마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처럼 서로 다른 방향으로 기억을 향해 간다. 한 사람은 지하로 내려가 잃은 시간을 붙잡으려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지상에서 그 기억을 멀리 두며 전진하려 한다. 김준호와 권소현은 이 신화적 구조를 바탕으로 ‘기억과 고통’이라는 유구한 주제를 각자의 얼굴에 펼쳐 낸다. 가정폭력을 일삼던 아버지가 순직하여 국민 영웅이라는 칭호를 얻는 사이, 선오와 선주는 제 삶의 방향을 어디로 둘지 고민에 빠진다. 둘은 남매이지만, 결국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남는 사람들이다. 영화 속 선오는 맨홀 아래에서, 선주는 무대 위에서 자신의 생존 방식을 찾는다. 한 사람은 더 깊어지고, 다른 한 사람은 더 높아지지만, 둘 다 빛을 향해 움직인다는 점에서 닮았다. 두 배우도 각자의 궤도에서 밝은 곳을 바라보는 중이다. 김준호는 영화와 드라마를 오가며 리듬을 익히고, 권소현은 작품 활동 중간에 틈틈이 뒤늦은 학교 생활을 이어가며 유튜브 채널 운영을 병행한다. 새로운 미래를 기대하며 한창 걸어가고 있는 배우들인데, <맨홀>에서 보여준 연기에는 왠지 저 아래까지 한 번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온 사람의 기개가 느껴진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처럼 지하와 지상을 부지런히 왕래하며 저만의 길을 내기 위해 궁리하는 두 배우와 잠시 동행했다. 

 

 

김준호 배우는 <화려한 날들>(KBS2, 2025) 촬영이 한창이라고. 개봉이 겹쳐 평소보다 바쁘겠다.
김준호_ 경사지, 경사.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가했는데, 일이 한 번에 몰리는 것 같다. 촬영과 프로모션 일정이 겹치면서 하루하루 바쁘게 지내고 있다. <화려한 날들>은 5월에 촬영을 시작했다. 초반에만 해도 분량이 많지 않아서 촬영 공백이 꽤 있었는데, 회차를 거듭하면서 분량이 많이 늘어났다. 내게도 새로운 경험이다. 주말 드라마다 보니 시청자 반응을 반영해서 캐릭터 비중과 이야기 흐름이 조금씩 바뀌기도 하더라. 작가님과 감독님이 그때그때 완성도를 조정하는데, 내 입장에선 처음 생각했던 방향과 달라지기도 해서 신기하고 재밌다.

 

권소현 배우도 분주하긴 마찬가지다. 여름부터 유튜브 ‘입장권소현’을 시작했고, 얼마 전에는 <새벽의 Tango>(김효은,2025)로 베를린한국독립영화제도 방문했던데.
권소현_ 뇌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느낌이다. 유튜브를 시작하면서 스스로 약속했다. 일주일에 한 편은 업로드하자. 다들 날 보면서 왜 저렇게 사서 고생하나 싶을 거다. 세상 누구도 요청한 적 없는, 내가 나랑 한 약속일 뿐이지 않나. 근데 이상하게 틀이 잡히고 책임감이 생긴다. 베를린은 정말 좋았다. 춥기도 했지만, 해외에서 처음 관객을 만났던 자리라 뜻깊었다. 한국 관객과 비슷한 부분에 공감하는 모습을 보며 놀랐고, 국내보다 확실히 퀴어적 관계에 관한 질문이 많아서 새롭기도 했다. 지금은 <맨홀> 개봉을 기다리면서 신작 준비 중이다. 특별출연이라고 했는데 18회차 중 8회차 출연 분량이더라. ‘이게 특별출연 맞나?’ 싶긴 하다. (웃음) 그래도 평소보다 마음에 부담은 훨씬 덜하다. 이번 주부터 촬영에 들어간다. 로드무비라 지역 촬영이 많아서 이곳저곳 돌아다니게 될 것 같다.

 

유튜브에서 새 작품 미팅하는 모습을 봤다. “저 궁금한 거 있어요!”라며 적극적으로 질문하던데, 원래 대본 받으면 감독과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인가.
권소현_ 실은 감독님을 한 번 뵙지도 않은 상태에서 대본만 읽고 출연을 결정했다. “저 하겠습니다!” 하고 곧장 베를린으로 떠나게 된 거다. 촬영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라 온라인 미팅을 진행했다. 말한 대로 대본을 받고 나면 질문거리가 생기고, 그때 최대한 감독님과 의견을 나누려고 하는 편이다.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후루룩 읽는데, 두 번째 읽을 때부터는 인물의 결이 잡혀야 한다는 생각으로 접근한다. 인물의 동기를 분명히 알고 가야하기에 궁금한 부분은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한다.

김준호_ 시나리오 단계에서 스스로 정리가 안 되면 현장에서도 연기하기가 쉽지 않다. <맨홀>의 한지수 감독님이 꽤 애먹으셨을 거다. 내가 워낙 감독님 붙잡고 이것저것 물어봤거든. 감독님뿐만 아니라 소현 누나와도 자주 연락했다. 그렇지? 우리 막 통화하면서 서로 질문하고 의견 공유하고. 

권소현_ 선오, 선주 남매의 어머니 역으로 출연하신 박미현 선배님까지 셋이서 계속 연락했다.

김준호_ 배우끼리 이야기한다고 해서 정답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실마리를 찾아갈 수 있지 않나. 그렇게 대화하는 과정에서 가까워졌던 것 같다. 전화로 친해진 사이다. (웃음)

<맨홀>
<맨홀>

세 배우 모두 마음이 급했나 보다.
김준호_ <맨홀> 촬영 초반이 특히 그랬다. 1~4회차에 거의 모든 가족 신이 몰려 있었다. 내가 선오로서 누나, 어머니와 감정적으로 가장 격하게 부딪히는 부분이 그때였는데, 크랭크인 하자마자 그런 장면들을 찍어야 하니 준비가 되는 동시에 긴장도 컸다.

권소현_ 원작 소설이 있는 작품이라 부담도 있었다. 보통 원작을 읽은 분들은 2차 창작에 아쉬움을 토로할 때가 많으니까. 가능하면 많은 상상을 펼쳐본 다음, 동료들과 함께 테두리를 다듬어 나가는 과정을 거쳤다. 

김준호_ 시나리오를 놓고 누나랑 이야기를 정말 많이 했다. 누나는 완전히 학구파거든. 치열하게 생각하고 고민한 덕분에 비어 있는 부분을 우리 스스로 채워갈 수 있었다. 

권소현_ 사실 몸으로 할 줄 알아야 하는데. 준호처럼 바로 느껴서 움직이질 못하니 머리를 굴리는 거다. 선주는 처음엔 이름조차 없는 인물이었다. 혼자 선주 노트를 만들어서 이런저런 서사를 상상했다. 어떤 사람인지, 이 상황에는 어떻게 반응할지. 영화에서 선주가 시신을 발견하는 장면이 있는데, 아무래도 감이 안 잡혀서 시신 사진을 찾아보기도 했다. 

 

<맨홀>은 선오와 선주 남매를 중심으로 폭력의 연쇄에 관해 질문한다. 두 인물은 각각 맨홀과 무대라는 공간을 상징하는 존재이기도 한데, 각자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권소현_ 공간에 관해 함께 상상할 시간적 여유는 솔직히 없었다. 맨홀의 경우, 어떻게 설정된 공간인지 궁금했는데 세트로 꾸려진다고 하더라. 촬영을 시작하면서 실제로 볼 수 있었다. 바깥은 맨홀처럼 보이는 공터였지만, 그 아래 구덩이 속은 모두 세트였다. 그러니까 뚜껑만 외부 촬영지에 있고, 우리는 아래 파인 공간으로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식이었다. 처음엔 이 이질감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는데 차차 익숙해졌다. 한편으로는 맨홀과 무대 사이의 공백을 내 방식대로 메워보려 했다. 연기를 통해 선주라는 캐릭터와 접점을 찾고 싶었거든. 원래 난 화를 잘 못 내는 성격인데, 연기를 하면서 감정을 표현하고 표출하는 법을 조금씩 배웠다. 그 과정에서 해묵은 감정을 해소하기도 했고. 선주 역시 연기를 통해 고립감과 불안감 등 오래 쌓아온 감정을 해소해가는 인물이라고 봤다. 그러면서 점점 연기에 매료되고 지난날을 딛고 살아가게 됐을 거라는 상상도 했다.

김준호_ 맨홀 세트는 촬영 날 처음 봤다. 대부분 촬영지는 사전에 감독님과 몇 번 방문했는데, 세트의 경우 미리 짓는 데에 예산과 기간 등 한계가 있으니 그렇게까지 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내부에 진입하자마자 몰입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내부는 빛 한 줄기 안 들어오도록 어둡게 꾸며져 있고, 미술과 소품도 꼼꼼히 챙겨놓은 상태였다. 공간이 주는 중압감이 있었다. 세트 안에 들어가면 갑자기 다른 세계에 온 것 같더라. 그런 힘이 선오의 심리 상태를 연기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선주는 폭력을 직접 재현하기보다 기억의 흔적으로 보여준다. 남매의 갈등이 고조되는 장면이 떠오른다. 선오가 “역겨우니까 착한 척 그만해!” 윽박을 지르자, 선주는 “그럼 어떻게 할까?”라며 차갑게 되묻는다.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한 말투지만 실은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는 상태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면서도 의연함을 연기했던 어릴 적 얼굴이 그 순간 자연스레 겹쳐 보이더라.
권소현_ 그 장면을 찍을 때 고민이 많았다. 선주는 시간이 지나도 완전히 괜찮아지지 않았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폭력을 잠시 잊고 살다가도 뭔가 건드려지면 반응이 확 올라오는 인물이라고. 실제로 삭제된 신들이 있는데, 선오가 변해가는 것이 구체적으로 보이는 대목들이다. 예컨대 선주가 남자친구와 키스하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을 선오가 목격한다. ‘누나에게 다른 사람이 있구나. 다른 공간이 생겼구나’ 그걸 계기로 선오의 감정이 비틀리기 시작한다. 

김준호_ 그 장면 아쉽다. 내가 누나 방에 들어가서 서늘하게 쳐다보고 그랬지?

권소현_ 대사도 있었는데 잘 기억이 안 나네. 

김준호_ 영화의 시간 순서로 따지면 삭제된 그 장면이 누나랑 처음으로 맞붙는 신이었다. 누나가 선오에게 자기 방에서 나가라고, 거울 좀 보라고 한다. 

권소현_ 맞다, 기억난다. 거울 봐라. 지금 너한테서 아빠 얼굴 보인다. 

 

선오가 아버지를 닮아간다는 뜻의 정확한 워딩이 있었네.
권소현_ 선주 입장에서는 그 변화를 감지하고 경계하는 지점이 있었을 거다. 선오가 밀쳐서 쾅 하고 넘어질 때, 분명히 그 트라우마가 되살아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강인하게 버텨야 한다는 마음이 작동했던 것 같다. 몸은 얼어붙지만, 여기서 지면 안 된다는 마음. 선주는 그 순간 아버지를 떠올렸을 테고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끼면서도 ‘상황을 뚫고 나와야 한다’ 다짐한다. 그 마음을 잘 표현해보고 싶었다.

권소현 ⓒ이영진

선오에게 아버지는 존재 자체가 버튼이다. 그 버튼이 눌리면 돌연 이성을 잃는다. 순간 폭발적인 에너지를 내는 김준호 배우의 집중력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원망, 죄책감, 수치심이 뒤엉킨 복잡한 감정을 표현했는데.
김준호_ 오히려 분노나 격한 감정은 접근하기 쉬웠던 것 같다. 표현에 초점을 맞추면 어렵지 않게 드러낼 수 있는 부분이고. 그런데 선오의 감정은 단순히 ‘화가 난다’는 게 아니고, ‘왜 나는 저렇게 못하지? 같은 일을 겪었는데 나는 어째서 누나처럼 다음 장으로 나아갈 수 없지?’라는 열등감, 혹은 상대를 미워하면서도 닮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잔뜩 엉켜 있다고 느꼈다. 선주는 스스로 감정을 관리하고 제 삶을 살아가려 하지 않나. 머릿속으로는 ‘저게 맞다’고 선오도 생각하지만, 정작 자신은 그럴 수가 없으니 누나가 미워지는 거다. 누나가 틀렸다고 우기는 것이 아니라, ‘맞는데 나는 할 수 없어’서 자괴감이 쌓인다. 복잡한 싸움을 지속하는 인물로 다가왔고, 그러다 보니 단순히 ‘아버지를 증오한다’로 접근하면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왜 아버지를 인정 못하지? 왜 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수 없지?’ 그런 질문을 안고 싸우는 게 선오의 본질이라고 느꼈다. 아버지를 향한 감정을 그저 1차원적인 증오와 경멸로 정의했다면, 연기가 지금보다 단조로워졌을 것 같다. 최대한 다양한 면모를 끌어내려고, 소현 누나와 미현 선배님 등 상대 배우의 연기와 감정에 반응하면서 복합적인 상태를 유지하려고 했다.

 

어떤 마음인지 짐작이 간다. 선오에게 선주는 엄마보다도 더 진한 애착 관계를 형성한 사람이다. 유약하고 위태로운 시절, 생의 가장 비참한 시간을 같이 겪어 냈으니까. 후반으로 갈수록 ‘내가 이렇게 불행한데 넌 왜 괜찮아? 왜 나만큼 안 불행해?’라고 질책하는 듯하더라.
김준호_ 어떤 인간이든 비겁해지는 순간이 있다. 상대가 나보다 좋아 보이면 억울해지고, 왜 나랑 다르게 살아남았는지 질투하기도 한다. 그런 감정이 당연히 선오에게도 있었을 거다.

권소현_ 개봉 앞두고 영화를 다시 보는데, 문득 선오가 선주의 옷깃 끝자락 한쪽을 계속 잡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선오는 엄청나게 관찰하는 사람이다. 밖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주변을 관찰하면서 속으로 감정을 부풀리다가 어느 순간 팡 하고 터뜨린다. 감정의 밀도를 표현하는 모습에 새삼 감탄했다. 

 

선오가 살인을 저지른 후 찾아가는 사람도 결국 선주다. 고백 장면에서 선오의 음성이 인상적이었다. 어릴 적에 데려갔던 맨홀을 기억하냐며, 누나는 왜 어느 순간부터 그곳에 오지 않았냐고 묻는다. 가냘프다 싶을 만큼 연약한 목소리에 원망과 애원이 깃드는데, 그 또한 촬영 초반에 찍은 장면이라니 놀랍다.
김준호_ <맨홀>을 통해 배운 것 중 하나는 ‘이해해야 연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늘 옳지는 않다는 거였다. 감독님께 뭔가를 물었을 때, 가끔 “나도 지금은 잘 모르겠어”라는 답이 돌아왔다. 감독과 배우가 완벽하게 알아서 그 장면을 찍는 것이 아니라, 찍으면서, 서로 대화하고 조정하고 확인하면서, 어떤 장면을 찾아가는 방식도 있다는 걸 경험했다. 처음엔 ‘정리가 안 됐으니까 표현이 안 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런 채로 연기했을 때 더 본능적인 감정이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 고백 장면에서도 명확한 디렉션은 없었다. 다만, 촬영하면서도 긴장했고 실제로 가장 집중했던 신 중 하나다. 선주와의 관계에서 쌓아 왔던 감정이 한꺼번에 올라온 것 같다. 집에서 찍은 장면들은 감정 배분에 신경을 썼다. 에너지와 결을 비슷하게 가져 가면 인물이 단조로워지고, 영화적으로도 매번 감정을 폭발하기만 해선 안 되기에 조율이 필요했다. 선주에게 고백하는 순간에는 마음 깊숙이 응어리졌던 뭔가가 툭 터져 나온 듯했다. 당연히 겁도 났을 테고. 

 

그와 동시에 첫사랑의 설렘, 또래들과 나누는 활기, 만성적 우울감 등까지 표현해야 했다.
김준호_ 확실히 친구들을 만나는 날과 누나나 엄마를 만나는 날을 비교하면 현장의 무게감 자체가 달랐다. 친구들과 촬영하는 날에는 정말 재밌게 찍었다. 어느 날은 날씨 문제로 촬영이 딜레이됐는데, 우린 그것도 모르고 다 같이 모여 사진 찍으며 놀았다. PD님은 속이 타들어갔을 텐데, 한편으로는 우리의 그런 에너지 덕분에 힘이 났다고 하시더라. 애들이 다 환하게 웃고 있으니까. 나 역시 친구들의 기운을 받아 리프레시할 수 있었다. 반대로 엄마나 누나와 찍을 때는 모두 좀 가라앉은 상태였고, 스태프들도 그 기류를 맞춰줬다. 자연스럽게 현장 분위기가 인물에 스며드는 느낌이 있었다.

 

본래 가족, 친구, 동료 등 관계마다 보여주는 얼굴이 다르지 않나. 다면성이 자연스레 드러난 듯하다.
김준호_ 감독님도 선오가 집 안과 밖에서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길 원했다. 친구들에게는 드러내고 싶지 않은 모습이 있지 않나. 동시에 그걸 완벽하게 감추기란 불가능하고, 문득문득 스치듯 보이게 마련이다. 감독님이 ‘밖에서는 숨기고 싶은 면이지만, 결국 어렴풋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고 조언하셨다. 그 부분을 더 세밀하게 고민하면서 인물의 입체성을 살리고자 했다.

김준호 ⓒ이영진

연기하면서 신체 표현을 의식한 부분이 있나. 선오와 선주에게 몸이 기억의 저장소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선오의 몸이 기억에 짓눌려 휘청거린다면, 선주의 몸은 기억을 뒤로하고 타인 앞에 나서는 것처럼 보인다.
권소현_ 무대 연기할 때 몸을 특히 신경 썼다. 연극 자체가 처음이라 어려웠다. 무대 연기라는 것도 어렵고, 액션과 동선도 어색하고. 매번 그 장면을 볼 때마다 얼굴을 가리고 싶을 정도로 민망한데, 어쨌든 무대에서 촬영하는 동안에는 ‘몸을 여는 연기’를 의식했다. 그래야 대사도 나오고 움직임도 생기더라.  

김준호_ 신체 표현까지 설정하진 않았는데, 내가 생각한 선오의 성격과 특성이 몸으로 표현된 듯하다. 선오는 결국 주체적이지 못한 인물이다. 좀처럼 앞장서지 않고, 어떤 일이 벌어져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하고, 무리에서 겉돌고, 늘 한 발 뒤에 물러 서서 지켜보는 사람. 때로는 친구들이나 가족과 어울리기도 하지만, 혼자 엇박자를 타다 보니 결국 어정쩡한 위치에 머문다. 그런 캐릭터의 성질이 몸에 반영된 것 같다. 긴장에 움츠러든, 무게에 위축된 몸으로. 

 

선오가 극을 이끄는 핵심 인물이라면, 선주는 수면 아래를 담당하는 인물 같다. 볼수록 궁금한 인물이고, 배우도 스스로 이런저런 전사를 많이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이를 테면 어릴 적 선오를 처음으로 맨홀에 데려갔던 날. 선오가 누나는 이런 곳에 왜 왔던 거냐고 물으니 선주는 “그냥 뭐” 하며 말끝을 흐린다. 권소현 배우라면 이 빈칸을 채워 놓고 연기했을 듯한데.
권소현_ 대본에는 없었지만 혼자 상상으로 채워 갔다. ‘아이는 여기를 대체 어떻게 찾았을까?’ 선주는 걷고 또 걷다가 그 공간을 발견했을 듯했다. 나만 아는, 나만 알고 싶은 장소. 혼자 도망치고 싶었을 수도 있다. 어린 나이에 ‘어디든 숨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면, 아무도 찾지 않을 것 같은 그 장소가 귀하게 느껴졌을 거다. 아이 혼자 힘으로 맨홀 뚜껑을 어떻게 열었을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뭐 그만큼 절박했겠지. 강하고 고집스러운 동시에, 아이니까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보면 맨홀은 어린 선주의 공포를 표현한 공간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고 나니 그 장면이 어린 날의 맹세처럼 다가오더라. 선주로서는 유일한 개인 공간, 최후의 보루를 선오에게 공유해 준 것이지 않나.
권소현_ 맨홀은 안전한 아지트이자 선주만의 작은 무대였을 거다. 그곳에서 혼자 소리도 질러보고 울어도 보고, 공간 자체를 작은 세계처럼 느꼈겠지. 아빠를 피해서 선오랑 도망쳤을 때 떠오르는 곳이 맨홀밖에 없었을 것 같다. 그 어린 나이에도 선오는 자신이 지켜야 하고 지킬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선주가 ‘연극’이라는 예술로 감정을 제어하고 관리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무대 장면을 어떻게 준비했는지 궁금한데, 별도 대본이 있었는지 또 어느 정도로 완성된 상태였는지?
권소현_ 감독님이 전체 대본을 써주셨다. 처음엔 다른 희곡을 모티브로 만들다가, 저작권 문제로 결국 창작 대본을 만들어주셨다. 실제 공연처럼 중간에 안 끊고 원테이크로 촬영했다. 

김준호_ 촬영 시간이 무척 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사도 영화에 삽입된 것보다 훨씬 많고. 

권소현_ 숙지해야 할 대사와 동선이 많았다. 그 장면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선주의 존재감이었다. ‘나는 선오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어. 나는 여기에 잘 살아 있어.’라는 걸 보여줘야 했다. 상대 역으로 김경남 배우와 호흡을 맞췄는데, 연극 경력이 많은 분이라 여러모로 도움을 받았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계속 질문하고, 편하게 얘기 나누면서 준비했다.

 

영화에 삽입된 대사들이 되게 절박하지 않나. 벌레도 죽여선 안 된다고 미친 듯이 소리 치다가 엔딩에서 난 흘러가고 싶다고, 더 믿어보고 싶다고 말한다. 마지막 대사를 읊는 목소리가 정의롭다 싶을 만큼 깨끗해서 선오의 일그러진 표정이 눈에 확 들어오더라.
권소현_ 대사 자체가 편한 말이 아니었다. 시적이고 선언적인 느낌이 있었다. 그 말은 선주의 다짐이기도 했고, 크게는 영화를 통해 선주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이기도 했다. 아마 그러니까 선주도 그 작품과 역할에 끌리지 않았을까. 이번 기회로 무대 연기를 경험하면서 ‘표현’이라는 걸 고민하게 됐다. 영화 연기는 감정 사이사이에 생각해볼 여지가 있고, 여운을 남길 수도 있다. 근데 무대에서는 좀 더 선명할 필요가 있다고 해야 하나. 틈 없이 채워야 한다는 생각에 꽉꽉 눌러 담으려 했는데, 그래서 ‘지금 내가 너무 과한가?’라는 걱정도 들었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를 계속 검열했던 것도 같고. 어떤 작품이든 내 연기가 전부 마음에 들 수는 없지만, 그 장면은 특히 고민이 컸다. 

김준호_ 나도 무대 연기는 해본 적이 없는데, 누나를 보면서 신기했다. 나라면 어떻게 연기했을까 싶고. 솔직히 촬영 당시에는 선오 입장에서 누나가 정말 미웠던 기억이 난다. ‘나는 여전한데, 누나는 저렇게 살아 낸다고? 아, 싫다.’ (웃음)

권소현_ 진짜 그 순간 선오였네. (웃음) 이번에 무대에 서면서 그건 확실히 알았다. 두 다리로 지면에 서는 것이 기본이구나. 다리에 힘을 싣고 지면을 지탱할 줄 알아야지, 그게 안 되면 내가 내 무게에 못 이겨서 휘청거리더라. 

<맨홀>
<맨홀>

조만간 연극 도전하겠는데?
권소현_ 그럴 수도 있다. 해보면 좋을 것 같다. 실은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겁이 난다. 혼자 ‘대사를 까먹으면 어쩌지?’ 불안한 상상도 하고. 연극은 매번 객석의 반응이 달라지지 않나. 그때마다 내가 어떤 연기를 하게 될지 궁금하다. 나는 관객과 어떻게 소통하고 에너지를 주고 받을까. 어떤 대단한 경험이 기다리고 있을까. 언젠가는 꼭 해보고 싶다.

 

김준호 배우는 감정뿐만 아니라 체력 면에서도 챌린지가 있어 보였다. 여름, 야외, 밤 촬영이 많고, 때리고 맞고 뛰는 신이 연속한다.
김준호_ 오히려 좋았다. 그 시기에 그런 삶을 바랐거든. 연기에 전력을 쏟고, 퇴근하면 기절하듯 자고, 일어나자마자 촬영장 달려가는 생활이 너무 좋았다. 매일 100퍼센트를 쓰는 느낌이었다. 몸 쓰는 장면을 찍고 나면 활력이 생길 만큼 체력적으로는 전혀 힘에 부치지 않았다. 차라리 감정을 응축해서 잔잔하게 끌어가는 신이 힘들다면 힘들었다. 어떤 면에선 더 에너지를 써야 하니까.

권소현_ 액션 신 찍은 다음날엔 컨디션 괜찮았나? 현장에 놀러간 적이 있는데 걱정됐거든. 오토바이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아무래도 액션 신을 찍다 보면 몸에 힘이 들어가니 ‘근육통 심하겠는데?’ 싶었다.
김준호_ 오토바이 신은 대역으로 찍었다. (웃음) 액션 신의 경우, 안전에 유의하여 촬영했다. 하천에서 맞는 장면은 무술 감독님의 손길로 완성했다. 정말 안 아프게, 안 다치게 잘 때리시더라. 맞으면서도 ‘어? 괜찮네?’ 싶었다. 돌이켜보면 액션 신 찍으면서 되려 속이 시원해졌던 것 같다. 몸으로 거칠게 부딪히며 감정을 발산하다 보니 후련하더라.

 

촬영지는 대부분 일산처럼 보이는데.
김준호_ 아파트를 포함한 일부 공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일산에서 촬영했다. 특히 하천이 분위기가 정말 좋았다. 한여름이라 풀이 무성하게 자란 상태였는데, 영화의 정서와 잘 맞아떨어졌다.

권소현_ 게다가 아름답게 담겼더라. 하천이나 놀이공원 장면. 내가 없던 장면이니까 영화로 처음 봤는데, 친동생이 놀고 연애하는 모습을 몰래 보는 느낌이었달까. (웃음)

 

서로 감정이 치닫는 장면이 많다 보니 촬영장에서 말 붙이기 어려운 분위기 아니었을까 했는데, 예상 외다. 들을수록 화기애애하고 에너지 넘치는 현장이었네.
김준호_ 집에서 묵직한 장면을 찍을 때를 빼고는 다들 꽤 편하게 지냈다.

권소현_ 나한텐 대부분이 묵직한 장면이었다. 출근하면서부터 마음이 무거웠지.

김준호_ 그래서 누나에게 말 걸기는 조금 어려웠던 것 같기도 하다. 누나는 감정 몰입을 위해 촬영 전에 미리 준비하는 스타일이거든.

권소현_ 약간의 거리감이 연기에 도움을 준 부분도 있다. 선오와 선주는 중간에 따로 사는 시기가 있고, 그사이 선오도 많이 변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묘하게 어색함이 감도는 분위기가 오히려 좋았다. 사실 나는 불안도가 높은 편이다. 비단 촬영장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계속 돌려야 그나마 덜 불안해진다. 그래야 변수가 생겨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고. 속으로 혼자 감정과 상황을 계속 생각하다 보니, 어느 순간 자연스레 말이 없어진다. 

김준호_ 미현 선배님도 그런 스타일이다. 지켜보면서 많이 배웠다. 왜 선배님들과 함께 작업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지 깨닫는 현장이었다.

 

엄마 역의 박미현 배우의 경우, 두 배우와 비교하면 출연 분량은 제일 적은데 가장 근거리에서 폭력을 경험한 인물로 등장하니까.
김준호_ 프리프로덕션 때부터 미현 선배님이랑 거의 매일 폭력과 트라우마 관련 영상들을 공유했다. 만날 때마다 긴 대화를 나누며 인물의 역사를 구축했던 것 같다. 

권소현_ 감사하게도 미현 선배님께 위안을 많이 받았다. 선배님은 나와 달라서 뭐든 ‘척 하면 척’일 줄 알았는데, 늘 고민하시고 때로는 나보다 더 불안해하시기도 했다. 자신도 긴장하긴 마찬가지라고, 언제나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씩 헤쳐 나갈 수밖에 없다고 말씀해주셨다. ‘아, 나만 떨고 있는 건 아니구나’ 싶었고, 그렇게 후배와 진심으로 이야기를 나눠주시는 모습을 보며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영진

소현 배우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는 것처럼 준호 배우도 스스로 불안과 긴장을 낮추기 위해 하는 행동이 있나.
김준호_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쓸 뿐, 나도 속으로는 ‘이거 어떻게 하지?’ 계속 걱정했다. 다만, 그 미칠 것만 같은 상태가 선오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권소현_ 그러다 얘도 불쑥 불안함이 튀어나온다. 혼자 있다가 “누나” 하며 스윽 옆으로 와서 앉고. 

김준호_ 선배님들과 함께하는 장면에선 많이 의지했지. 미현 선배님한테 가서 손 붙잡고, 누나한테 기대고. 덕분에 안심하고 집중할 수 있었다.

 

<맨홀>은 가정폭력 생존자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생존자로서 엄마, 선주, 선오 모두 동일선상에 있지만, 생존 기술도 회복 방법도 각자 다르다. 연기하면서는 인물들의 선택과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였나.
권소현_ 각자 방식이 다르다는 게 좋았다. 특히 엄마라는 인물이 어떻게 결말을 맞는지가 개인적으로는 가장 마음에 들었다. ‘엄마라서’ 무조건 감내하는 게 아니라, 엄마로서 느끼는 불안과 무서움을 아이에게 그대로 드러내는 모습이 기존에 잘 볼 수 없던 엄마 상이라 좋았다. 연약하면서도 정직한 선택이라고 본다. 한편, 세 사람 중에서는 선주가 가장 보편적인 인물이 아닐까 싶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상처를 극복해서 앞으로 나가려고 하는 사람. 내가 상처를 대하는 방식과 선주의 방식이 닮아서 다행이라고 느꼈다. 난 무조건 마주해야 되거든. 상처를 똑바로 봐야 한다. 나를 아프게 했던,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도 만나야 한다. 그래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 선주도 분명히 그 과정을 겪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주는 아빠를 증오했으나 아빠의 장례식장에서도 울고, 그 후 추모식에도 참석한다. 그 자리에 안 가는 것을 회피라고 생각하니까. 선오는 선주를 이상하게 보겠지만, 그건 선주가 상처를 견디고 회복하는 방식이다. 

 

더는 아프지 않을 때까지 상처를 후벼파는 쪽이네.
권소현_ 눈을 감고 돌아서기를 반복하면 감정이 계속 따라오거든. 상처를 전부 긁어내야 괜찮아진다. 아픈 걸 혼자 끌어안고 있으면 갑자기 꿈에 나타난다. 그러면 난 또 ‘이불킥’하고. 한 번은 대면해서 끝을 맺어야 거기서 벗어날 수 있다.

김준호_ 지금 드는 생각인데, 선오는 누나의 5~10년 전을 살고 있는 상태 아닐까. 아픔이 있는데, 어떻게 처리할지 모르는 거다. 아무도 그 과정을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나는 <맨홀>을 성장영화라고 생각한다. 선오는 스스로 헤쳐 나갈 방법과 방향을 몰라서 더 아파 한다. 주변에 상황을 공유하거나 비슷한 고통을 겪는 사람들과 고민을 나눠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왜 나는 안 되지? 나만 못난 놈인가?’ 하며 분노하고 짜증을 느낀다. 그러면서 아주 더디게 자신을 이해해 간다.

권소현_ 시행착오를 너무 세게 겪는 인물이다. 선오를 무조건적으로 위로할 수도, 응원할 수도 없다고 본다. 다 덮어놓고 안아주기엔 선오가 한 일은 명백한 범죄니까. 선오를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길 뿐,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엔딩이 현실적이라고 느꼈다. 모든 선택엔 책임이 따라오니까. 

 

촬영 준비하는 내내 골치 아팠던 장면이 있나. ‘이 신이 다가오고 있구나’ 하며 압박을 느꼈던 장면.
권소현_ 연극 장면. 압박감도 있었지만 몰입도도 높았다. 무대에 올라가기까지는 현장을 예측할 수 없어서 떨렸다. 나도 내가 어떻게 할지 예상이 안 되고. 혼자 유튜브로 연극 움직임 관련 영상도 많이 찾아봤고, 계속 런을 돌려보면서 가능한 한 철저하게 준비했던 것 같다. 막상 촬영하면서는 즐거웠다. 상대 배우와 주고 받는 호흡, 직접 신체를 움직이면서 생기는 에너지에 힘을 얻었다. 

김준호_ 엄마와 누나랑 찍는 장면, 그리고 법정 장면이 제일 긴장됐다. 법정 신이 하필 마지막 촬영이어서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졌다. 시나리오 단계부터 핵심 장면으로 지목했던 신이고, 관객에게 굉장히 다양한 질문을 던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동안 쌓아놓은 감정과 서사에 집중하며 연기하려고 했다. 이 영화는 폭력을 특정한 ‘누군가의 탓’으로만 돌리지 않는다. 동시에 선오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세상만 원망하는 애도 아니다. 여러 각도에서 결말을 고민해볼 수 있기에 연기하는 입장에서도 재밌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법정에서 선오가 변호사의 어떤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는 부분인 것 같다. 그 순간 인물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안도? 절망? 선오도, 엄마도, 선주도 각기 다른 감정으로 무너졌을 것 같다.

 

선오는 또 다른 의미로 족쇄를 차는 순간이기도 하고.
김준호_ 그렇지. 결국 진 거지.

권소현_ 나는 유일하게 선주만이 선오가 ‘그렇다’고 답하기를 기다렸다고 생각한다. 변호사를 소개해 주고, 어떻게든 선오를 설득하려 했던 것도 선주였으니까. ‘그래도 살아가게는 해야지’라는 마음으로 동생을 바라봤을 거고, 그 장면을 연기할 때도 선오에게 속으로 간절하게 외쳤다. ‘제발 말해. 제발 그렇다고 해.’ 비겁할 수도 있는데 그 순간에는 가족이 우선이라는, 일단 이 고비를 잘 넘겨야 한다는 이기심이 들었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준호가 안쓰럽기도 했다. 안절부절 못하는 게 느껴졌거든. 촬영장을 빙빙 돌고 영화 속 선오처럼 손을 계속 긁는 걸 보면서 지금 되게 복합적인 감정이구나, 불안함이 가득하구나 싶었다.

김준호_ 법정 장면은 정말 그랬다. 극 후반이기에 그때쯤엔 거의 선오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뭐든 혼자 감당할 수 없고, 누구한테 좀 의지하고 싶은데 그마저도 서툰 상태. 자립하지 못한 아이처럼 누나와 엄마 사이를 왔다갔다 했던 기억이 난다. 아, 친구들을 열심히 피해 다녔다. 마지막 촬영인 데다 워낙 친하다 보니 어울리다 보면 괜히 붕 뜰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근데 법정 신은 영화가 이 장면을 위해 달려왔다고 할 만큼 중요한 장면이었다. 자칫 내가 집중력을 잃어서 앞서 쌓아온 것을 망치면 너무 아까울 듯했다. 중압감이 상당했는데 최대한 정신을 붙잡으려 노력했다.

권소현 ⓒ이영진

권소현 배우는 이 영화의 핵심을 뭐라고 생각했나. 영화를 완성하는 결정적 장면을 떠올려 본다면.
권소현_ 선오가 다시 맨홀을 찾아가는 장면. 결국 인물이 다른 갈 곳을 찾지 못하는 상황이 됐을 때, 그 공간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선오에게 맨홀은 양수처럼 따뜻한 동굴이기도 하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 자체로 질문을 던지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불행은 어째서 그토록 익숙하고 달콤할까 싶기도 하고.
권소현_ 맞다. 거기엔 시신도 있었고, 영화적으로나 인물에게나 여러 의미가 겹쳐진 공간이니까. 선주가 선오에게 그곳을 내어준 순간도 떠올리게 되고. 혼자서 또 다시 그곳을 찾아가는 선오가 애처롭더라.

김준호_ 나는 청소년센터에서 만난 문 선생님과의 대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선오는 왜 아무도 피해자에 관해서는 내게 말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가장 중요한 걸 놓치고 살아가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 장면이 그런 선택에 제동을 걸어준다고 봤다. 대사 중에서는 희주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희주가 선오를 어떤 애인지 모르겠다고 하자, 선오는 “나도 내가 징그러워”라고 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싫어질 때가 있는데, 그런 혐오와 무지가 포함된 대사 같아서 흥미롭게 다가왔다. 유의미하기도 하고.  

 

안 그래도 두 배우가 대사를 어떻게 연습하고 준비했을지 궁금했다. 준호 배우의 경우, 방금 언급한 대사를 포함해 자칫 잘못하면 지나친 자기 연민으로 다가갈 법한 대사가 더러 있다. 한편, 소현 배우는 영화 초반 “연극이 그렇거든. 수염 난 마흔 살 아저씨가 자기가 계속 십 대 소녀라고 우기잖아? 그러면 진짜 십 대 소녀가 되고 보는 사람도 그렇게 믿게 돼. 그게 연극의 세계야.”라며 상당히 길고 문어체에 가까운 대사를 한다. 둘 다 어려운 대사가 많았는데 잘 소화해 내더라.
권소현_ 그 대사 진짜 어려웠다. 읽을 때는 술술 읽히는데, 막상 입 밖으로 내뱉으면 말이 안 붙을 때가 있다. 갑자기 말도 안 되는 톤이 나와 버리고. 연습실에선 괜찮았는데 오디션장에선 첫 마디부터 꼬여서 ‘망했다’ 싶은 적도 있다. 나는 입에 붙을 때까지 여러 번 말해보는 편이다. 아까 말한 대사도 촬영 전까지 계속 연습했다. 어디서 음절을 끊을지, 어떤 호흡과 타이밍이 자연스러울지, 어떤 톤이 과하지 않을지를 혼자 실험했다. 한 문장 안에서도 그렇게 변주하면서 나만의 균형점을 찾는 과정이 필요한 것 같다.

 

촬영장 들어가기 전에 플랜 A부터 C까지 준비하고 갈 것 같다.
권소현_ 딱 플랜을 짜고 들어가는 건 아닌데, 사전에 여러 경로를 생각해 보는 편이다. ‘이거 어색하면 어떡하지?’ ‘이게 안 되면?’ 걱정이 많아서 책임감도 크다. 어렸을 때는 실수해도 “죄송합니다!” 하고 넘길 수 있었는데, 지금은 나를 믿고 기회를 준 분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크다.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그래서 작품 들어가면 살이 빠진다. 신경을 많이 쓰니까. 멍하니 있다 갑자기 대사 연습하고, 친구랑 얘기하다가도 대사 한 번 맞춰달라고 조르고. 나도 민망한데 멈출 수 없더라. (웃음)

김준호_ 나도 연습 방식은 비슷하다. 아직은 할 때마다 어렵고 한 가지 방법을 모든 작품에 적용하기도 쉽지 않아서 나만의 루틴을 찾아가는 중이다. 어떤 대사를 맡으면 최소한 입에 붙을 정도까지는 감정 없이 외워두고, 그다음부터는 조금씩 다르게 해본다. 똑같이 하는 건 의미 없다고 생각해서, 매번 다른 방향을 시도해보려고 한다. 그래야 새로운 게 왔을 때 유연하게 받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거든. 연습하면서 혼자 영상도 찍고, 돌려보고, 상대 배우 대사를 녹음해서 받아보고… 다들 엇비슷한 패턴일 텐데, 일단은 그렇게 이것저것 가능한 방법 모두 활용하고 있다.

 

찾아나가는 과정에 있구나. 혹시 권소현 배우처럼 학업, 유튜브 제작 등 본인만의 프로젝트가 있나.
김준호_ 나도 뭔가 하고 싶긴 한데 그런 능력이 없나 보다. 특히 누나처럼 유튜브를 하려면 훈련이 필요한 것 같다. 혼자 찍고 편집하고, 생각보다 품이 드는 일이지 않나. 대신 운동은 꾸준히 한다. 웨이트는 거의 매일 하는 것 같다. 

권소현_ 운동 꾸준히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그게 진짜 쉽지 않다.

김준호 ⓒ이영진

서로의 첫인상과 현인상을 비교하면 바뀐 부분이 있나.
권소현_ 난 있다. 처음엔 모범생인 줄 알았다. 어떻게 보면 조금 ‘노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웃음) 그런데 함께 촬영하고 현장에서 지켜보니 상황을 리드하는 면이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중재하고 연결하고, 생각보다 사회성이 있는 친구더라. 붙임성 좋고 정 많은 성격이다. 

김준호_ 누나 첫인상? 슈퍼스타. 포미닛 시절부터 팬이었고, 그중에서도 누나의 빅 팬이었다. 누나한테도 몇 번 말했다. 노래 진짜 열심히 들었다고. 지금은 언제든지 편하게 연락할 수 있는 사이가 되어 좋다.

권소현_ 이런 얘기 들으면 얼떨떨하다. 내가 언제 아이돌이었나 싶고. 전생 같다.

 

흔히 말하는 ‘아이돌 출신 배우’ 중에서도 바닥부터 차곡차곡 쌓아 온 느낌이 있다. 방금 전 연극 무대에서 긴장했다고 말했는데, 실은 그보다 훨씬 크고 화려한 무대에 수없이 오르지 않았나. 압박과 경쟁이 대단한 세계에서 살아남았고, 지금은 그 기억이 희미할 만큼 연기에 정직하게 임하고 있다.
권소현_ 예전엔 큰 무대의 긴장감을 무대에서 동력으로 삼을 수 있었다. ‘좋아, 이제 올라간다!’ 하면서 그 순간의 도파민을 만끽했고 살아 있음을 느꼈다. 근데 연기를 하면서는 그런 긴장감을 억제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자칫하면 연기에 힘이 들어가고, 그럴수록 표현이 과해지니까. 긴장감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한편으로는 주변 피드백에 골몰하기도 했다. 아이돌 출신 배우에게 자주 따라붙는 말이 “뭘 해도 아이돌 같다”는 거다. “리액션이 과하다. 사람 냄새가 안 난다.” 과거엔 그런 말에 상처도 받았다. 대체 ‘사람 냄새’가 뭔지, 어떻게 해야 몸에 밴 리액션을 없애고 텐션을 뺄 수 있을지 연구했다. 그런 시간이 나를 조금씩 바꾸어 놓은 것 같다.

 

소현 배우가 허술해 보이면 그런 대로 또 뭐라고 할 사람들이다. 너무 마음 쓰지 않으면 좋겠다. 아이돌 활동이 전생처럼 느껴지는 데는 배우가 선택하는 작품들의 영향도 있다. <그 겨울, 나는> <딜리버리> <새벽의 Tango> <맨홀> 등 감정의 여운이 남는 인물들을 주로 연기했다. 특별히 끌리는 인물이 있나.

권소현_ 인물에 상처가 있으면 눈길이 간다. 연민이 생기고, 안아주고 싶어진다. 아이돌 활동 시절엔 밝고 힘 있는 에너지로 사랑받았지만, 내 안엔 오래전부터 어두운 감정도 있었다. 그 깊이감 있는 감정 덕분에 영화 연기에 더 집중할 수 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생일>(이종언, 2019)이 첫 작품인 것도 그렇고, 드라마보다 영화가 내 정서와 더 잘 맞는 이유도 같은 맥락인 것 같다. 발랄하고 활기찬 인물보다 마음속에 뭔가가 고여 있는 인물이 잘 어울린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실제로 본인이 많이 참는 성격이라 그런가.
권소현_ 혼자서 삭히는 스타일이다 보니, 그런 인물에게 좀 더 공감할 수 있다. 잘 표현해볼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생기고. ‘이 친구는 여기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순간 말을 아낀 이유는 뭘까?’ 하며 인물의 여백을 채워가는 것이 내가 나와 인물을 위로하는 방식인 것 같기도 하다.

김준호_ 누나를 만나서 내가 힘들었던 얘기를 하면, 별 말 없이 누나가 한숨을 깊게 한 번 쉰다. 그러면 난 위로가 되더라. 이따금 어떤 경지에 오른 사람처럼 보일 때가 있다. 어느 정도의 생각과 마음이 없으면 저 한숨은 안 나오겠다 싶은 느낌. 그래서 감독님이 누나한테 사연이 묻는다고 표현했나 보다. 

 

준호 배우는 오디션이나 미팅 자리에서 주로 어떤 말을 듣나.
김준호_ 생각보다 활발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특히 드라마에서는 영화보다 표현적인 인물을 맡을 때가 많으니 처음부터 무드를 잘 잡으려고 한다. 일종의 전략 같은 건데, 그렇게 인물에 맞춰 톤을 올려서 가면 연기하는 데 도움이 되더라. 

<맨홀>
<맨홀>

둘 다 진지한 배우들이구나 싶다. 각자 생각하는 ‘좋은 배우’란 어떤 사람인가. 그리고 지금의 자신은 그 기준에서 어디쯤 와 있다고 느끼나.
권소현_ 내가 생각하는 좋은 배우는 잘 스며드는 배우다. 내 ‘추구미’를 색으로 말하면 베이지거든. 물론 한때는 튀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다 해봐야지, 나도 강렬한 색을 드러내야겠어” 했던 시기도 있는데, 결국 베이지가 제일 좋더라. 포미닛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화려한 원색들 사이에서 나도 그 원색이 되려고 치열하게 노력했던 적도 있다. 근데 안 되더라. 원색을 따라가려고 하면 내 색도 없어지더라. 언뜻 평범해 보일지언정 베이지가 존재감이 없는 색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잘 스며들어 있는 색. 그 기준에서 나는 지금 흰색에 살짝 물감을 탄 정도 아닐까? 

 

유튜브 해보니 어떤가. 직접 촬영하고 편집하면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목소리를 듣는 시간도 늘어났을 텐데. 카메라 앞뒤를 일상적으로 오가는 경험이 어떤 기쁨을 주는지?
권소현_ 활력이 생긴다. 스스로 ‘일’을 만들고 꾸준히 한다는 점에서 불안감도 낮아졌다. 배우라는 직업은 선택받아야 지속할 수 있다. 기다림이 필수인데, 나는 막연한 기다림에서 오는 불안이 늘 힘들었다. 근데 유튜브는 내가 나에게 준 일이다. 그걸 해내는 책임감이 하루를 꽉 채워준다. 동시에 말한대로 내 생김과 말투도 계속 관찰하게 됐다. 예전엔 잘 몰랐던 부분이 눈에 들어오더라. ‘말할 때 입술 모양이 저렇구나. 나는 생각보다 부끄러움이 많구나. 혼자 있으면 좀 더 대담해지는구나.’ 그렇게 보면 유튜브가 일기장 같은 역할을 해주는 것 같다. 조회수나 댓글에 휘둘리지 말고 계속하자는 마음이다. 악플도 가끔 달리는데 크게 상처받지는 않는다. 도리어 ‘내 영상이 그분 알고리즘에 닿았네!’ 하는 반가움이 앞선다. (웃음) 정성스럽게 답글을 달면 무례해서 죄송하다며 사과하거나 댓글을 스스로 삭제하는 분들도 있고. 하나하나 내게는 모두 소중한 반응이다. 

 

어쩌면 배우로서 공부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관찰하고 소통하며 타인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 가는 과정이지 않나.
권소현_ 인간의 다양한 심리를 보게 되는 것 같다. 실은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내 인생의 중요한 한 장면을 담은 단편영화 연출이다. 글쓰기가 어려워서 막막했는데, 최근 유튜브 콘텐츠를 제작하면서 연출에 대한 감을 조금씩 익혀가는 것 같다. 혼자 편집하면서 스토리를 만들지 않나. 컷을 이어 붙이고, 장면 순서를 바꿔 보고, 음악을 넣기도 하고. ‘이렇게도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구나’를 체험하는 중이다. 그렇다고 당장 영화를 만들겠다는 뜻은 아니다. 내게는 뜻깊은 장면인데 글로 풀자니 자기 연민 같고 오그라든다. 아직은 준비 중이라고만 해두자. (웃음)

 

모두 부끄러운 처음이 있는 법이니까. (웃음) 준호 배우는 어떤 배우를 목표로 하나.
김준호_ 자꾸 바뀌는데 요새는 계속 후회하는 배우가 좋은 배우 아닌가 한다. 많이 후회하고 아쉬워하면서 노력하고 싶다. 그러다 나중에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경력이 쌓이면 ‘이제 그만 후회하자’는 마음이 들지도 모른다. 그때가 오면 또 다른 전환점이 될 텐데, 그전까진 부족함을 인정하는 마음으로 배우고 싶다. 무뎌지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하면서 나를 잘 돌보려고 한다. 

 

연기의 어떤 점이 제일 좋나. 힘들어도 이것 때문에 못 그만두겠다 싶은, 배우를 붙잡는 매력은?
김준호_ 어떤 순간에 완전히 살아 있다고 느낀다. 연기 전공자가 아니라서 개인적으로 레슨과 워크숍 등을 거치며 배워가는 입장인데, 연습하다 보면 즐거운 순간이 많다. 연기 잘하는 사람도 참 많고, 호흡을 주고 받는 것도 재밌고. 결국 연습과 실전 사이의 간극을 줄여가는 과정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오차를 줄이고 줄이다가 어느 날 현장에서 그 감정이 딱 맞아떨어지면, 거의 기적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신인이고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 보니 그 밀도를 매번 만들기란 어렵지만, 그래도 잊기 싫은 순간들을 더러 경험했다. ‘나 연기 계속할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더라. 아팠는데도 후련하고, 부족한 대로 감사한 순간. 그 기쁨을 조금씩 더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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