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름은 부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단편 <옥상자국>(2015)에서 할머니를 통해 5.18의 역사를 돌아보며 주목받은 양주연 감독의 장편 데뷔작 <양양>은 긴 침묵을 깨고 나온 이름에 관한 영화다. 술에 취한 아버지의 전화 한 통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가족 안에서 금기와 비밀에 부쳤던 존재로 시선을 향한다. 집안 누구도 감독에게 알려준 적 없던 사람, 아버지의 “고모처럼 되지 말라”는 비탄 섞인 말 속에 남아 있던 인물. 감독은 그 말이 왜 자신에게 불길하게 남았는지 곱씹으며, 낙인을 대물림하는 대신에 카메라를 들고 스스로 고모를 찾아 나서기로 한다. 영화는 실사와 애니메이션, 감독 자신의 목소리를 교차하며 수면 아래 묻혀 있던 존재를 조금씩 볕이 드는 곳으로 끌어 올린다. 이는 죽음으로만 기억되는 한 여성의 삶을 되살리는 동시에, 그 이야기를 전하는 ‘나’의 얼굴을 점차 또렷하게 그리는 과정이다. 그렇게 고모를 찾아 헤매는 길은 결국 감독 자신을 알아가는 길로 이어진다. 다큐멘터리 창작자로서의 고민과 의지, 여성으로서 겪는 수많은 경험과 감정이 장면 안에서 연신 진동한다. 감독은 그 흔들림을 피하지 않고 몸과 마음을 실어 함께 움직여 본다. 고모의 이름을 다시 부르고 자신의 언어를 마련하는 여정. <양양>은 다큐멘터리가 나에게서 출발한 질문이자 우리의 이야기이며, 함께 쓰는 애정 어린 편지임을 보여준다. 상실과 불안을 통과하여 새로운 사랑을 터득한 양주연 감독과 만났다.
술 취한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던 그날 기분은 어땠나. 갑자기 판도라의 상자가 눈앞에 떨어졌던 상황인데.
그날이 2015년이니 벌써 10년 전이다. 영화 만드는 동안 편집 감독들에게 비슷한 질문을 여러 번 받았다. 아빠한테 전화받았던 순간 기분이 어땠는지, 아빠가 인터뷰에서 동생과 나를 비교했을 때는 마음이 어땠는지, “그때 주연의 감정은 뭐였냐”는 질문을 반복해서 들었다. 그런 질문에 익숙해지고 나서는, 누가 묻지 않아도 스스로 계속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 많았다. 그때의 기분을 하나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가장 크게 남은 건 당혹감이었다. ‘왜 나한테 이런 말을 하지?’라는 의문이 가장 먼저 들었다. 동시에 ‘부정이 탄다’는 생각도 스쳤다. 이전까지 고모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는데, “고모처럼 되지 말라”는 아빠의 말로 인해 이미 고모와 내가 엮여버린 느낌이 들었다. 어떤 불길함으로만 남은 듯한 존재와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엮여 있다는 사실이 불쾌했고, 피하고 싶었다. 동시에 아빠에게 화가 났다. ‘잘 지내던 나한테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지? 왜 나를 힘들게 하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빠졌던 것 같다. 결국 고모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기까지 오래 걸렸던 이유는, 그 관계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도 드러내고 싶지 않았고, 당시엔 창피하다는 생각까지 했다.
고모라는 존재가 부끄러웠던 건가, 아니면 자신이 고모를 그렇게 생각한다는 사실이 더 무거웠던 건가.
고모랑 내가 아빠의 말 속에 엮여 있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내가 그 영향 아래 있다는 것이 이상하리만큼 창피하게 느껴졌다. 외면할 수 있다면 외면하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여러 감정이 터져 나왔다. 특히 아빠에 대한 분노가 컸다. ‘왜 가만히 있는 나를 건드리지? 대체 아빠는 나를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기에 내가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를 그렇게 쉽게 던지는 거야?’ 그리고 한 번 말한 후로는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기에 아빠가 무책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러 생각이 겹치면서 내가 나를 힘들게 했던 것 같다.
그 후로 감독이 묻기 전까지, 아버지와 고모 이야기를 다시 나눈 적은 없었나.
전혀 없었다. 한 3년쯤 지난 뒤, 영화를 만들기로 마음먹고 나서야 처음으로 그 이야기를 꺼냈다.


모 아니면 도다. 그러면 영화 속 첫 번째 인터뷰 장면이 고모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나눈 첫 대화였던 건가.
그때가 정말 처음이었다. 고모는 우리 안에서 굳이 말하지 않고 넘어갈 수도 있던 존재이기에, 그 말을 꺼내는 순간 자체를 영상으로 담아두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처음부터 장편영화를 염두에 두고 촬영을 시작한 건 아니었다는 뜻인가.
장편을 만들고 싶기는 했다. <옥상자국>을 완성한 후였고, 단편을 계속 만들다 보니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었다. 다만, 앞으로 펼쳐질 상황을 예측하기는 어려웠다.
<옥상자국>에는 감독의 외할머니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 후라면 가족들도 감독을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인지하고, 어떤 작업 과정을 거치는지도 대강 파악했을 때다.
아빠와 2018년 여름에 처음 인터뷰를 했는데, 안 그래도 쉬는 시간에 물으시더라. 이제 자신도 <옥상 자국>에 나오는 외할머니처럼 되는 거냐고. (웃음)
아버지는 어떤 분인가. 술을 드셔야만 속엣말을 풀어 놓으시는 편인가.
그때와 지금의 아빠는 또 다른 사람이고 우리의 관계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다만, <양양>을 찍을 때 당시 아빠는 나에게 벽처럼 느껴졌다. 그때는 아빠가 일을 하고 계셨고, 일상에서 대화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늘 일하느라 바쁘셨거든. 그러다 가끔 늦은 밤에 술에 취한 채로 귀가하셔서 여러 이야기와 하소연을 늘어놓으시곤 했다. 어릴 때부터 그게 참 싫었다. 자다가 중간에 끌려 나와서 이야기를 듣는 것도, 아빠가 술에 취했을 때와 안 취했을 때 다른 사람이 되는 것도 이해가 안 됐다.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생각하기도 했다. 술에 취해야만 자기 감정을 털어놓는 사람이 되는 게 두려웠거든. 지금은 아빠가 퇴직하고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져서, 오히려 예전보다 대화가 늘었다. 자주 보니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이야기도 많아지더라. 덕분에 요새 새로운 모습의 아빠를 보고 있다.
영화는 고모와 아빠 등 여러 가족을 경유해서 결국 감독인 ‘나’에게 초점을 향한다. 영화를 만들면서 ‘내 이야기를 해야만 작품이 완성되는구나’, ‘내가 카메라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구나’ 하는 깨달음은 언제쯤 찾아왔나.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스스로도 직감은 했지만, 주변에서 피하지 말라고 말해준 덕분에 확실히 알았던 것 같다. <옥상자국>을 작업할 당시엔 나는 카메라 뒤에 있는 사람이었고, 질문하는 역할로서 가족 곁을 지키는 존재였다. 가족을 담고 있으나, 다큐멘터리스트로서 이 이야기가 단지 우리 가족만의 것은 아님을 보여주고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 했다. 그러다 보니 ‘이 영화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는 충분히 드러났나?’라는 질문이 남더라. <옥상자국> 이후 <양양>을 만들겠다고 결심한 배경에는 ‘이것은 고모의 이야기인 동시에 내 이야기’라는 확신이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막상 고모를 알아가는 여정 속에서 나를 어떻게 드러내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카메라가 비추는 피사체로서 내 얼굴과 목소리를 마주하는 일이 어색하고 괴롭다 보니 자꾸 도망가고 싶고. 함께 작업한 강사라 피디와 고두현 피디, 편집을 맡은 이진주, 베로니카, 이연정 감독 덕분에 불편함을 이겨낼 수 있었다. “영화에서 주연이 어떤 사람인지 드러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과정이니 안심해도 괜찮다.”라고 계속 말해줘서 큰 힘을 얻었다. 결정적으로 내 마음을 움직인 말은 이거였다. “고모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에 어떤 변화도 보여줄 수 없지만, 주연은 다르다. 영화에서 변화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이 이야기를 시작한 주연이다.” 그 말을 듣고 깨달았다. 결국 이야기를 시작한 사람도, 끝을 내야 하는 사람도 나라는 사실을. 처음엔 고모를 불길한 존재로 느꼈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게 나랑 상관없는 사람으로 남겨둘 수도 있었는데, 고모에게 굳이 다가가고, 부딪히고,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 모든 과정이 결국 내가 거쳐 온 시간을 돌아보는 일이더라. 어느 순간 ‘나는 사실 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구나’ 인정하게 됐다.

그 와중에도 앞서 말한 것처럼 감독으로서의 거리와 가족으로서의 감정이 동시에 작동할 수밖에 없는데, 이번 영화에서는 그 균형을 지키는 것이 더 어려웠을 듯하다.
균형을 지키겠다는 생각 자체가 어느 시점부터 허물어졌다.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믿음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 거다. ‘왜 다큐멘터리스트는 늘 카메라 바깥에서 거리를 유지해야만 할까? 나는 왜 그런 강박을 가졌을까?’ 되묻게 됐다. 그러면서 ‘객관적 시선이라는 게 무슨 뜻이지?’라는 질문도 따라왔다. 제작 당시에도 지금도 <양양>을 사적 다큐로 칭하는 말을 쉽게 듣는다. 물론 그런 식의 분류도 당연히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여러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공적 다큐란 무엇인가? 사적 다큐와 공적 다큐라는 카테고리를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 영화에 가족을 등장시키고 또 내가 출연하기에 <양양>을 사적 다큐로 분류하는가? 하지만 모든 다큐멘터리는 결국 감독 자신에게서 출발한다고 본다. 감독이라는 존재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느냐, 혹은 간접적으로 존재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감독이 지닌 관점 자체는 여전히 모든 이야기에 필요하고 유효하다. 그렇기에 나는 오히려 그 분류를 확장하고 싶었다. <양양>은 사적이면서 동시에 공적인 이야기라고 확신했고, 사적/공적 경계를 허물고자 했다. 카테고리를 무너뜨리며 다큐멘터리의 형식적 틀을 넓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러다 보니 다큐멘터리스트로서의 거리감을 고집하기보다는 그 거리 안에 나를 더 적극적으로 투영해 보자고, 그럴 때 이야기에 힘이 더 생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됐다. 나의 출연 여부나 내레이션 등의 구성 요소와 상관없이, 앞으로 만들 작품 또한 결국 나로부터 시작된 질문이자 응답이 아닐까 한다.
그런 면에서 카메라의 위치와 화면 구도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피디로 참여한 고두현 감독이 촬영도 병행했는데, 촬영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논의한 부분은 뭐였나.
<양양>은 즉흥적인 사건을 따라가는 흐름이 아니다 보니, 촬영을 미리 준비할 수 있었다. 촬영 계획서를 세세히 작성해서 피디와 촬영감독에게 사전에 공유했다. 레퍼런스 이미지를 기반으로 구도를 정리했고, 주요 레퍼런스로 삼은 작품 중 하나는 <비밀의 역사>(마리아나 오테로, 2003)였다. 다큐멘터리지만 모든 장면을 픽션처럼 연출한 작품이다. 감독이자 딸이 가족의 비밀을 찾아가는 이야기인데, 대화 장면이 많다. 투샷 구성과 차나 집 안에서 공간을 활용하는 방식이 인상 깊었다. <양양>에서 나와 엄마의 대화 장면을 찍을 때 특히 그 영화의 이미지를 참고하여 구도를 잡았다. 아빠의 두 번째 인터뷰 장면의 경우, <스트롱 아일랜드>(얀세 포드, 2017)에서 영감을 받았다. 일부러 조명과 카메라를 정중앙에 두고, 빛이 아빠를 정확히 비추게 했다. 고모라는 사람과 고모를 둘러싼 기억이 이야기조차 되지 못했던 시간이 워낙 길지 않았나. 그 장면에서 모든 존재와 이야기를 불러내는 느낌으로 찍고 싶었다.
‘픽션처럼 찍은 다큐멘터리’를 레퍼런스로 삼았다는 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무드가 중요했나.
무드도 중요했다. 정확히 말하면 준비를 많이 해서 찍고 싶었다는 뜻이다. 즉흥성에 기대기보다는 분명한 의도와 이유를 갖고 촬영하려 했다.
인터뷰 장면은 주로 집 안, 즉 인물의 생활 공간에서 촬영했다. ‘준비를 많이 해서’ 찍는다면 스튜디오를 빌려 조명 세팅을 멋지게 연출할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생활 공간을 고집한 이유가 있나.
우리 가족은 집에서 촬영했는데, 고모의 친구들은 스튜디오를 빌려 찍었다. 실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고모 친구 중 한 분을 인터뷰할 때, 처음에는 그분이 실제로 생활하는 공간에서 찍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욕심을 가졌다. 본인 공간을 오픈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에 그분을 설득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어렵게 허락받아서 카메라와 조명을 바리바리 챙겨 갔는데, 막상 촬영하며 당황했다. 사전에 그 공간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상태로 급하게 세팅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영상 이미지가 엉성하게 나오더라. 그때 확실히 배웠다. 인물의 생활 공간을 담는 것보다 중요한 건 영화의 무드와 어울리는, 우리가 미리 준비하고 맞춰볼 수 있는 공간을 찾는 거구나. 결국 양해를 구하고 재촬영했다. 그분의 집 대신 영화 이미지 톤에 맞는 카페를 섭외했고, 이후에도 인터뷰 공간들은 사전 답사를 통해 적절한 곳을 섭외했다.


고두현 피디는 감독의 배우자로서 <양양>에 출연하기도 한다. 둘의 평소 모습과 일상을 볼 수 있는데, 그 중 식사 자리에서 “너 어제 설거지 안 했더라” 핀잔하는 장면이 재밌더라. 안경을 닦으며 시선을 피하는 모습이 왠지 연기 같기도 하고. (웃음)
연기는 아니다. 평소 대화할 때도 눈을 잘 안 봐서 내가 늘 말하거든. “내 눈을 봐!” (웃음) 최대한 카메라가 없는 것처럼 우리 일상을 기록하자 했는데, 생각보다 어렵더라. 가장 힘들었던 건 ‘주연의 일상’을 어떻게 보여줘야 할지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양양> 만드는 것 외에는 일상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거든. 일하고, 작업실 출퇴근하고, 거리를 걷는 장면 말고는 딱히 보여줄 것이 없었다. 그나마 두현과의 관계를 통해 내 일상이 드러나겠다 싶어서 출연을 제안했는데, 사실 영화에서 주연이라는 캐릭터를 어떻게 등장시킬지는 작업 내내 고민이었다. 본래 주연이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나오는 편집본이 있었다. 그 버전에서 주연은 대학생이다. 아빠에게 고모 이야기를 들은 직후의 20대 여성. 지금은 주연의 결혼 장면으로 영화를 여는데, 그 편집본에서는 대학 시절 사진과 영상을 인트로에 사용했다. 작업하면서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10년 전 기억을 불러와야 했으나 ‘그때 마음은 어땠지? 그 시절 나는 어떤 사람이었지?’ 아무리 곱씹어도 20대의 나를 잘 떠올리지 못하겠더라. 그러다 보니 영화를 어디에서, 어떻게 끝내야 할지도 알 수 없게 됐다.
시간을 거슬러 20대의 감정과 상황에 머무르기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시간이고, 내 삶은 계속 흘러가고 있으니까. 고모 이야기를 처음 전해 들은 시점부터 매일 갱신되는 현재 사이에는 너무 많은 ‘나’가 존재했다. 타임라인에서 어느 지점을 택해 고모와의 여정을 보여줄 것인가. 그걸 결정하기까지 고민을 거듭했다. 20대 주연으로 시작한 버전에서는 대학 졸업 이후를 다루며 다른 여성들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내용을 담았다. 고모가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기에, 주연은 고모와 닮았으면서도 다른 선택을 하는 인물로 설정했다. 하지만 제작 기간이 길어질수록 현실의 나와 영화 속 주연의 간극이 커졌다. 작업 일지를 찾아보니 2018년, 내가 딱 서른이 되던 해에 카메라를 들고 아빠를 찾아가면서 <양양>을 시작했더라. 30대 대부분의 시간을 이 영화와 함께 보냈다. 그 와중에 30대 초반과 중반, 후반은 또 다르다. 실제 나와 내 삶은 끊임없이 움직이는데, 영화 속 주연은 여전히 20대에 머물러 있으니 괴리감이 생겼다. ‘사람들은 영화 속 주연을 곧 나라고 생각하겠지. 그런데 저 인물은 지금의 나와 너무 먼데…’
결국 그 차이를 받아들일 수 없어서 기존 버전을 포기했나.
어떻게 극복할지 고민하다가 완전히 엎기로 했다. ‘현재 나의 가장 큰 고민은 뭐지?’ 화두를 자문하다 보니 새로운 구성 방안이 보였다. 이미 결혼하고 30대에 접어든 나. 아이를 갖고 싶은 나. 계속 영화를 만들고 싶은 나. 당시 내게 중요한 질문은 ‘여성 필름메이커로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였다.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 출산 이후에도 창작을 지속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웠고, 그것이 여성이자 창작자로서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이기도 했다. 그런데 기존 버전에는 ‘주연이 결혼했다’는 사실조차 없으니, 논의가 정체된 느낌이 들었다. 현재의 내가 갖고 있는 질문을 중심으로 영화를 재구성하기로 마음먹고, 가급적 <양양> 속 주연과 현실의 주연이 동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 결과 주연을 대학생이 아닌 창작자, 결혼한 여성, 스스로 선택한 가족의 형태를 고민하는 인물로 새롭게 그릴 수 있었다.
영화 중반부까지 주연은 주로 참는 사람처럼 보인다. 부모와 대화하는 장면에서는 표정이 일순 어두워질 뿐 속상함이나 반발심을 말로 표현하지는 않더라. 마음을 미처 정리하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촬영 중임을 의식해서인지 궁금했다. 감독은 속내를 누구에게 털어놓았을까 싶기도 하고.
대개 두현에게 힘들다고 얘기했던 것 같은데, 영화를 만드는 일이 고통스럽기만 한 건 아니었다. 동료들과 함께 세상에 없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설레고 즐거운 순간도 많았다. 왜 이런 질문을 했는지는 이해한다. 영화에는 나의 지친 모습, 감정이 드러나는 솔직한 표정이 담겼으니까. 편집 감독들이 기가 막히게 그런 컷들만 찾아냈다. 내가 촬영하면서 속으로 ‘이건 쓰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했던 장면들 말이다. 예를 들어 아빠가 나보다 남동생이 똑똑하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당시 나는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딱히 중요한 말도 아니라는 생각에 ‘이건 무시하자’ 했다. 인터뷰를 보통 3시간 진행하다 보니, 워낙 많은 이야기가 나오거든. 근데 편집 감독들은 신기하게도 그런 순간을 찾아내 영화에 넣더라. 편집본을 보고 놀라서 질문한 적도 여러 번이다. “이게 꼭 필요할까요?” (웃음) 내가 편집했다면 <양양>에는 주연의 전혀 다른 표정들이 담겼을지 모른다. 최대한 예쁘고 사랑스러운 나를 보여주고 싶었을 테고, 실제로 그런 컷도 많았다! 근데 편집 감독들은 “주연이 너무 웃고 있어요. 너무 행복해 보여요.”라며 잘라내더라.

사실 감독의 ‘본체’는 해맑은 T에 가깝지 않나. (웃음)
알다시피 난 웃음이 많은 사람이다. 얼마 전 언론‧배급 시사회를 마쳤는데, 한 기자님이 나의 웃는 사진을 올리며 ‘드디어 웃음을 되찾은 양주연 감독’이라고 제목 붙이셨더라. 영화의 힘이 크구나 했지. (웃음)
편집 감독들의 수가 통했네. 주연 캐릭터를 특정 이미지나 문구로 정리하기도 했나.
구체적으로 명시한 바는 없으나, 편집 과정에서 늘 중심에 두었던 것은 주연의 감정이다. 아빠의 전화를 받은 주연의 감정을 어떻게 볼 것이냐. 두려움, 당혹감, 호기심 등 여러 선택지가 있었고, 편집 초기에는 두려움을 택한 버전도 있었다. 지금보다 톤이 훨씬 진지해지더라. 두려움을 극복하는 서사를 만들다 보니 주연의 표정도 어둡고, 고모 이야기도 더 충격적인 방향으로 편집해야 했다. 그러자 현실의 나와 영화 속 주연 사이에 또 다른 거리가 생겼고, 결국 편집 감독들과 수없이 이야기를 나눈 끝에 첫 감정을 호기심으로 바꿨다. 두려움으로 시작한 버전의 경우, 공감하기 어렵다는 피드백도 많았거든.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 활동하는 작업자에게도 프리뷰를 보여주고 수십 개의 피드백을 받았다. 감정선이 이해되는지, 공감하는지 계속 확인하면서 편집했다. 공감하기 어렵다는 반응이 나오면 ‘우리가 우리끼리만 가고 있구나’ 싶어서 과감히 방향을 틀고 수정했다. 그러다 보니 편집만 거의 3년이 걸렸다. 편집본이 수십 개였고, 내레이션도 수십 번 고쳐 썼다. 끝없이 다듬고, 지우고, 다시 세우는 과정이었다.
편집 감독이 세 명이었고, 피칭과 제작지원을 포함해 국내외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감독으로서 중심을 잡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
<양양>을 통해 정말 많이 배웠다. 나로서는 세계가 확장되는 경험이었다.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의 매력과 가능성을 새삼 실감했고, 해외까지 작업자들과의 네트워크가 넓어지니 이야기의 폭도 훨씬 커졌다. 물론 감독으로서 중심을 잡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래, 차라리 헤매자” 싶더라. 혼자 작업을 시작할 무렵에는 저널리스트로서 접근했던 면이 있다. 한 여성의 죽음을 ‘사회적 부검’하는 프로젝트로 기획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프레임에 갇히지 말자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다. 오히려 그 기획을 놓아버림으로써, 어그러짐과 혼란 속에서 더 많은 확장을 경험했다. 감독으로서 중심을 잃은 적도 잦았지만, 항상 중심을 지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렇다고 영화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내가 찾은 방법은 동료들에게 의지하는 거였다. 때로는 감독이 아니라, 주연이라는 인물로서 프로듀서와 편집 감독에게 마음을 털어놓았다. 작업 전반에서 내가 존중받는다고 느꼈던 덕분이다. 감독으로서뿐 아니라 이야기의 화자이자 등장인물로서도, 나의 감정과 서사를 기다리고 믿어주는 환경에서 작업했다. 그 안정감 덕분에 내 속도와 리듬을 지키며 천천히, 끝까지 갈 수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피드백이 있나. 예상치 못했지만 마음 깊이 남았던 말이라든가.
독인큐베이터(*dok.incubator: 다큐멘터리 제작의 지속성을 고민하며 체코 프라하를 기반으로 2010년에 설립된 조직. 세계 각국의 다큐멘터리 제작을 지원하는 국제 프로그램을 수개월에 걸쳐 운영하는데, 한국을 포함하여 아시아에서는 <양양>이 최초로 참여했다.)를 통해 여러 나라의 편집자, 프로듀서와 함께 작업했는데, 그 경험 자체가 큰 자극이었다. 다들 놀라울 정도로 열려 있고, 이야기의 본질을 고민하는 태도를 보여줬다. 몸은 한국에 있을지언정 작업의 기준과 감각은 세계 곳곳의 다큐멘터리스트들과 함께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으로 한정하면 다큐멘터리 작업자가 그리 많지 않은데, 시야를 조금 돌리면 어디에나 있구나 싶었거든. 각자 사는 곳도, 문화도 다르지만, 작업을 대하는 태도와 열정은 맞닿은 데가 있다는 걸 느꼈다. 독인큐베이터 워크숍을 종료하던 날, 세계 지도를 받았다. 서른 명 가까운 동료들이 각자 활동하는 나라를 지도에 표시하고 메시지를 주고받으면서 헤어졌다. 지도를 펼쳐 놓으니 온 세계가 다큐멘터리스트로 꽉 차 있었다. 매일 연락하지 않아도, 당장 못 만나도 그 지도를 보면 든든하다. 다큐멘터리라는 언어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내겐 큰 힘이자 또 다른 재미를 줬다. 지금도 마음에 품고 있는 피드백 중 하나는 해외 편집 감독이 해준 말이다. “고모와 할아버지는 대화를 통해 관계를 바꾸지 못했지만, 너와 아버지는 대화를 통해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그 변화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바로 <양양>이고, 나는 그것이 곧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멍했다. 그때까지 고모의 죽음을 파헤치고 삶을 복원하는 데에 초점을 맞췄지, 이걸 사랑의 이야기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 내가 놓치고 있던 부분이 뭐였는지 되돌아보게 해준 피드백이었다.


애니메이션이나 내레이션도 후반 작업 과정에서 편집 감독들의 의견이 반영된 선택이었나.
애니메이션은 편집 이전에 양홍지 감독과 1년간 작업해서 이미 완성해 놓은 상태였다. 상대적으로 제작비가 더 필요했기에, 애니메이션 파트를 위한 펀딩을 먼저 진행했다. 초반 기획 단계부터 애니메이션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고모를 보여주는 것은 흑백 사진뿐이었는데, 그 정지된 이미지를 영화에서 어떻게든 움직이게 하고 싶었다. 또 고모와 나의 만남을 보여주기에도 애니메이션이 가장 어울린다고 확신했다.
왜 하필 애니메이션이었나.
당시 애니메이티드 다큐멘터리를 많이 찾아봤다. 흥미로웠던 작품 중 하나가 <크리스 더 스위스>(안야 코프멜, 2018)였다. 죽은 삼촌의 여정을 쫓는 조카이자 감독의 이야기로, 실사 촬영과 애니메이션을 병행하여 완성했다. 네덜란드 영화 <러브 이즈 포테이토>(알리오나 반 데르 호르스트, 2017)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러시아 대기근 시기의 가족사를 다루는데, 현실의 인터뷰와 애니메이션이 교차하면서 과거의 시간을 복원해 낸다. 두 작품을 보면서 애니메이션이 단순히 사건을 재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다큐멘터리의 언어와 세계를 확장하는 장치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현실에서 재현 불가능한 과거를 소환하고, 그 불가능한 시간에 생명을 불어넣는 방식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픽션의 영역을 활용하며, 오히려 다큐멘터리의 감정적 진실을 더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지점이 있었다. 마치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사람처럼 설렜던 기억이 난다. 애니메이션이라는 세계를 더 알아보고 싶었고, <양양>을 통해 시도하고 싶었다. 도전 의식을 갖고 ‘한번 겪어보자!’ 하며 뛰어들었다. 그렇게까지 힘들 줄은 모르고. (웃음)
레퍼런스 폭이 넓다. 요즘도 해외 작품을 꾸준히 찾아보나.
주로 영화제 프로그램을 참고하고, 함께 작업한 동료들이 추천해주는 작품도 챙겨 본다. 해외 다큐멘터리 플랫폼이나 전문 사이트를 통해 국내에서는 접하기 힘든 작품들을 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세계 곳곳에서 어떤 다큐멘터리 언어들이 시도되고 있는지 살펴보고 있다.
해외 작업자들과의 협업은 작품의 지역성과 특수성보다는 보편성에 집중하는 선택처럼 보인다.
<양양>을 만들면서 당연히 한국 관객만 상상하진 않았다. 해외 관객에게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컸고, 자연스럽게 보편성과 특수성을 함께 고민하게 됐다. 흥미로운 건, 해외에 나가니까 오히려 ‘한국적인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자주 하게 된다는 점이었다. 한국에서는 아무도 “한국적이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그 안에 살고 있으니까. 그런데 유럽에서 <양양>을 상영했을 때, 관객들은 “아버지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게 흥미롭다”고 말했다. 그들에겐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문화다 보니,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질 수밖에 없던 거다. 반면에 한국 관객은 우리 세대의 아버지들이 대체로 감정을 드러내는 데 익숙하지 않다는 점을 이미 안다. 그러한 차이를 접하면서 ‘나는 감정을 쉽게 표현하지 못하는 문화에서 자라온 사람이구나, 어쩌면 영화 속 주연이라는 캐릭터도 그 영향을 받았겠구나’ 생각해볼 수 있었다. 한편, 해외 작업자들은 “한국이라는 공간을 영화에 좀 더 적극적으로 드러내면 좋겠다”는 피드백을 주기도 했다. 이야기가 벌어지는 공간으로서 한국, 그중에서도 광주라는 도시를 어떻게 보여줄지 고민하게 되더라. 서울과 비교해서 광주가 이미지적으로 확연히 구분되지 않기도 하고. 지역성을 시각화하는 일, 사회적·정서적 공간을 영화 안에서 어떻게 구현할지는 앞으로도 탐구할 부분이다. 결국 보편성과 특수성은 분리된 문제가 아니고, 두 축을 맞물리면서 고민하는 과정 자체가 내 작업의 중요한 방향이 된 것 같다.
영화 후반부에 감독은 할머니와 어머니, 고모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서로 다른 세대의 여성을 연결한다. 더불어 그간 몰두해 온 여성 서사를 되짚으며 전작과 <양양>을 한 줄기로 잇는다. 영화의 초점이 고모에게서 ‘주연’으로 이동하는 결정적 순간이자 지난 작업을 총망라하는 방식인데 부담스럽지는 않았나.
‘여성주의적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의도로 영화를 시작한 적은 없다. 단지 그때그때 재미있는 것, 더 알고 싶은 것을 향해 움직였다. 질문을 따라가고 파고드는 과정 자체가 즐거움이었다. 이야기 구성에서 느끼는 부담감의 경우, 제작 중후반부에 접어들면서는 거의 사라졌다. 영화 작업이 길어질수록 ‘이건 내 자의식과 고집을 내려놓는 일’이라는 걸 배웠기 때문이다. 특히 편집 감독들과의 협업 과정에서 그걸 많이 느꼈다. <양양>의 모든 촬영 소스를 검토하고 몇 년간 마음을 다해 작업한 이진주 편집감독은 독인큐베이터에서 처음 만났다. 진주 감독은 베를린에서 편집을 공부하는 중이었고, 우리는 어렵게 유럽과 한국을 오가거나 원격으로 작업해야 했다. 시차로 인해 새벽에 비디오 미팅을 하며 수많은 밤을 함께 보냈다. 초반에는 많이 부딪혔다. 서로 잘 모르고 방식도 다르니까. 하지만 해를 거듭하다 보니 3년 차에는 동기화가 되더라. ‘그 장면 고치자고 말하는 걸 깜빡했네’ 하고 나중에 편집본을 보면, 진주 감독이 어떻게 알았는지 이미 수정해 놓은 식이었다. 어느새 호흡이 맞춰진 거다. 마음이 통하는 관계라고 확신한 다음부터는 진주 감독이 뭘 제안하든 부담보다 신뢰가 먼저 생겼다.


다큐멘터리 작업자들은 외롭게 싸우는 경우가 많은데, 감독은 덜 외로웠던 듯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그렇게 긴 시간 일상과 창작을 연동하면서, 언제 어떻게 완성되리라는 보장도 없이 동료들과 힘을 합쳐 영화를 만든다는 건 어떤 느낌인지 궁금하다.
갑자기 진주 감독을 만난지 얼마 안 됐을 때가 떠오른다. 당시 많이 불안했다. 나를 드러내고, 내 이야기로 타인의 이해를 구하는 일이 두려웠다. 문득 진주 감독에게 물었다. “사람들이 주연을 좋아해 줄까요? 이 영화에 공감할까요?” 그때 진주 감독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네, 당연하죠. 저를 보세요.” 그 말이 참 고마웠다. 물론 두현이나 다른 친구들도 “괜찮아, 잘될 거야”라고 말해줬지만, 나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 확신이 쉽게는 안 생겼거든. 가족이니까, 친구니까 좋은 얘기 해주는 거다 싶고. (웃음) 근데 진주 감독이 자신 있게 말해줘서 큰 힘을 받았다. 그런 순간이 진주 감독을 포함한 여러 동료와 함께 작업하고 싶은 이유이기도 했다. <양양>을 세상으로 내보내기 전에 나부터, 우리 팀부터 충분히 설득되어야 했다. 두현 피디만으로는 불안을 소화할 수 없어 사라 피디에게 협업을 제안했고, 사라 피디가 와서 온마음으로 북돋는 데도 힘드니까 진주 감독이 오고, 그 뒤로 베로니카와 연정 감독까지 합류했다. 그렇게 몇 년간 내 걱정과 고민, 동료들의 신뢰와 인정이 뒤섞이면서 이 영화를 완성했다. 돌이켜보면 그 엎치락뒤치락하는 과정이 <양양>의 또 다른 서사였던 것 같다.
<양양>을 ‘호명 다큐멘터리’라고 부르더라. 감독에게 ‘이름’은 어떤 의미인가.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공기 같은 것. 예컨대 처음 만난 자리에서 누가 이름을 잘못 부르면 마음이 딱 닫히지 않나. 이름은 공기처럼 아무렇지 않게 오가지만, 또 전부가 되기도 한다. 나를 “주연”이라고 부를 때는 그냥 스쳐 들을 수도 있는데, “주현”이라고 잘못 부르면 그 말밖에 안 들린다. 이름이란 그런 것이다. 사소해 보이지만 전부가 되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모든 게 되기도 한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행위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에는 어떤 이름을 좇고 있나. <양양>처럼 오래 걸리면 안 될 텐데.
최대한 빨리 완성하는 게 목표지만 또 영화마다 자기만의 운명이 있는 것 같더라. 그 운명이 이번에는 조금 앞당겨지기를 바랄 뿐이다. 육아와 병행하느라 느슨하게 작업하고 있긴 한데, 5‧18민주화운동 성폭력 피해 생존자 모임 ‘열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모임 자체는 작년 8월에 결성됐고, 나는 12월부터 촬영을 시작했다. 이 문제가 세상에 드러난 건 2018년 한겨레신문 인터뷰를 통해 피해 사실이 공개되면서부터다. 그간 5‧18 관련 조사에는 ‘성폭력’이라는 항목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2018년부터 증언이 차츰 나오기 시작했고, 국가보고서에서도 처음으로 성폭력도 국가폭력의 일부로 논의되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이전까지 본인을 드러내길 주저하던 피해자들도 작년에야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다. 20명 안팎의 인원이 모임을 꾸렸고, 만남을 천천히 이어 가고 있다. 작년 12월에는 ‘열매’ 회원들이 국가를 상대로 집단소송을 제기했는데, 나는 그때부터 팔로우하면서 이 이야기를 어떻게 영화로 만들지 고민하고 있다. <양양>에서 경험한 바와 같이, 결국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세상에 꺼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고모의 존재를 알고 나서 바로 이야기할 수 없었다. 혼란, 수치심, 불안, 그리고 자기검열을 통과한 다음에야 말이 터져 나왔고, 그 발화의 결과가 <양양>이었다. ‘열매’에 모인 분들의 경험도 이제 막 발화하는 시점 같다. 무엇보다도 그분들이 밝고 유쾌하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서로 웃고, 농담도 주고받으면서 함께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감독이 ‘당사자성’이라는 질문을 다시 맞닥뜨리겠구나 싶다. <양양>에서 고모 친구가 인터뷰를 거절하며 “고모는 그거 안 원할 것 같은데”라고 말하자, 잠시 영화에 정적이 흐른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확신이 있었다. 고모는 그저 피해자로, 불명예의 존재로 낙인찍힌 채 남겨지길 원하지 않았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고모 친구분에게도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않냐고 대답할 수 있었다. 고모의 죽음을 떠벌리듯 다뤄도 된다거나 모든 것에 앞서 ‘진실을 파헤쳐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고모의 존재를 불명예로 가두는 사회적 시선에 관해 묻고 싶었다. 적어도 고모가 “고모처럼 되지 말라”는 아빠의 말 속에, ‘되지 말아야 할 존재’로 갇히길 원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물론 이야기를 시작하고 끌어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5‧18민주화운동의 맥락에서 ‘성폭력’을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혁명의 역사 속에서는 모두 투사이길 요구받기에, 피해자의 존재를 인정하길 꺼린다. 내게는 그 괴리가 흥미롭게 다가온다. 성평등 같은 진보적 가치를 어떤 대의 안에서 구호로 말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지만, 그 가치를 각자의 일상에서 얼마나 또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나는 그 간극을 드러내야 우리의 관계가 변화하고 세계가 확장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일상에서의 혁명, 즉 자신과 공동체의 모순을 마주하는 용기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작업 또한 <양양>과 문제의식이 맞닿는 부분이 있다.
말이 나온 김에 일상 속의 혁명, 잘 되고 있나. 영화에서 다짐한 대로 “시끄러운 가족”을 만들고 있는지?
쉽지는 않지만 노력하는 중이다. 어떤 때는 유연해야 하고, 또 어떤 때는 단호해야 한다. 두 태도 사이에서 늘 고민한다. 일상은 결국 그런 차이와 충돌이 공존하는 자리니까. 가끔은 삐걱거리기도 하고, 단호함이 오히려 관계를 악화시키기도 한다. 그래도 계속 고민한다. 그냥 넘어가는 식으로 상황을 벗어나기보다는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나눠야 하는 것을 나누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