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말미에 농담처럼 물었다. “둘이 무슨 <유리가면>의 마야와 아유미예요?” 김현목은 대본을 받으면 엑셀에 정리한다. 가능한 만큼 잘게 쪼개고 수없이 붙여 가며 익힌다. 철저한 준비에는 본인이 맡은 인물뿐 아니라 상대 배역과 주변 공간까지 포함된다. 경우의 수를 계산하며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현하는 전략가. 자판기 같다거나 챗GPT를 배우로 형상화한 버전이라는 우스갯소리를 시원하게 웃어넘기는 건, 자신을 믿을 수 있을 만큼 노력했기 때문이다. 촬영장에서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기 위해 완벽을 꾀하는 김현목이 아유미라면, 조유현은 마야다. 남들에 비하면 영화 데뷔가 늦었으나 그간 크고 작은 연극 무대를 경험했고, 모델 활동에 수영과 탈춤까지 몸을 쓰는 일이 익숙하다. 탄탄한 체력에서 나오는 특유의 길고 큰 호흡은 영화에서도 존재감을 발산한다. 즉흥성과 신체 에너지를 활용해 순수한 몰입을 꿈꾸는 그는, 실제로 겪고 느낀 바를 화면에 전달하는 감각파.
이쯤 되면 물과 불의 대결 같지만, 박준호 감독의 데뷔작 <3670>에서 둘은 예상을 웃도는 앙상블을 선보인다. 조유현은 ‘탈북 게이’ 철준을, 김현목은 ‘남한 게이’ 영준으로 분한다. 이들의 관계를 사랑과 우정이라는 커다란 단어로 뭉뚱그리기엔, 그리하여 닮아서 가까워졌다가 달라서 멀어지는 이야기로 요약하기엔 영화 속 두 남자가 주고받는 것들이 너무 많다. 노래방에 갈 때마다 아는 곡이 없다며 마이크를 내려놓은 채 웃고 말던 철준. 관계의 모양도 마음의 행방도 확신할 수 없는 와중에 같은 노래만 고집하던 영준. “정해진 이별 따위는 없”다며 “아름다웠던 그 기억에서 만나”자고 힘주어 말하던 이가 떠나고, 남은 사람은 긴 답장을 부친다. 편지의 마지막 문장은 몇 번이고 스크린에서 울려 퍼진다. “빙빙 돌아올 우리의 시간처럼 인생은 회전목마” 박준호 감독까지 세 사람이 자리해 아름다운 기억 속에서 연거푸 다시 쓰이는 그들의 시간을 전한다.
조유현 배우는 데뷔작으로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됐고, 김현목 배우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배우상을 받았다. 두 배우를 향한 관심이 높은데, <3670>과는 어떻게 만났나.
조유현_ 감독님이 미팅해보고 싶다며 먼저 연락을 주셨다. 오디션 보고 합류했다.
박준호_ 철준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알아봤는데 마음에 딱 들어오는 배우가 없었다. 유튜브에서 ‘서울독립영화제 배우프로젝트’ 60초 연기 영상을 쭉 봤다. 본선도 아니고 예선 영상에서 조유현 배우를 발견했다. 딴딴하면서도 순박한 이미지가 철준이랑 어울릴 듯했다. 인스타그램을 찾아서 뒷조사 좀 해보고 DM을 보냈다. (웃음) 요즘 SNS를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이나 추구하는 바가 보이지 않나. 자기가 어필하고 싶은 부분을 모아서 보여주는 공간이니까. 그런 판단이 늘 정확한 것은 아니겠지만, 당시 내 기준에서는 이 배우가 괜찮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스타그램으로 본 조유현 배우는 어땠기에?
박준호_ 꾸밈이 없었다. 본인이 참여한 연극 등 작업 기록을 모아둔 것이 대부분이었다. SNS에 모든 일상을 전시하거나 비싼 물건이라든지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것들을 올리는 사람도 많은데, 유현 배우는 투박하리만치 담백했다.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도 철준과 어느 정도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현목 배우는 캐스팅 초반에는 우리 리스트에 없었다. 시나리오상 철준과 영준이 97년생이다 보니 배우 나이도 그에 맞춰 생각했거든. 91년생인 조유현 배우를 캐스팅하면서 영준 역 배우의 나이도 조정하게 됐다.
김현목_ 철준이한테 고맙네. 나이를 올려준 덕분에!
배우들 나이는 쉽게 가늠할 수가 없지. 김현목 배우는 작년에도 <우리는 천국에 갈 순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한제이, 2024)에서 교복을 입지 않았나.
김현목_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 자세를 바꾼다. 교복 입으면 괜히 더 구부정하게 다니지. 키가 작아 보이도록, 좀 더 왜소한 몸을 만든다. 정장 입으면 딱 어깨 펴고 허리 세우고. (웃음)
박준호_ 신기하게 나이를 안 먹는다. 이미 작품을 통해 아는 배우이기도 했고, 예전에 단편영화 오디션장에서 마주친 적도 있었다. 현목 배우가 거의 처음으로 매체 나올 무렵이었는데, 지금까지 기억할 정도로 인상에 남았다. 대체로 에너지가 밝은 사람인데 무표정하게 있을 때는 차갑게 느껴지기도 하더라. 영준 역에 현목 배우가 언급되는 순간, 바로 ‘잘 어울리겠다!’ 싶었다. 실은 연락하면서도 너무 기대하지 않으려고 했다. 현목 배우는 매니지먼트에 소속된 상태인 데다 드라마 촬영도 계속하고 있으니 독립영화 출연은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다. 미팅조차 어려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곧장 연락이 닿아서 만났고 다행히 이야기가 잘 풀렸다.
김현목_ 내 인스타그램도 염탐했나? 어때 보이던가?
박준호_ 개인 계정인지 회사에서 관리하는 공식 계정인지 모르겠더라. 사진 외에는 이렇다 할 문구도 없고. 진실성이 없어! (웃음) 농담이고 현목 배우 인스타그램 보면서도 감이 왔다. 이 사람은 자연인 김현목과 배우 김현목을 분리하면서 일상을 챙기는 타입이구나.
김현목_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그 또한 영준이라는 캐릭터와 맞아떨어지는 면이고. 감독님의 걱정과는 달리, 나로서는 미팅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미팅이라고는 해도 내겐 오디션이나 마찬가지였다. 배우들 원래 그렇거든. 친구들이랑 대화하다 보면 말로는 여유롭게 “그냥 뭐 미팅 하나 있어서” 하는데, 알고 보면 다들 면접 가는 거다. (웃음) 사실 배우로서 <3670> 같은 대본을 만나는 것은 생각보다 흔치 않다. 핍진성 있는 이야기, 빌리버빌리티(believability)를 지닌 인물을 맡게 되는 경우가 의외로 없거든. 나처럼 자타가 공인하는 ‘다작 배우’라고 할지라도. (웃음) 한 인물의 서사를 폭넓게 그려보고 싶었다. ‘걔가 그래서 이랬구나, 걔는 앞으로 이럴 거야”라는 식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까지 이어서 보여줄 기회가 없다는 데에 늘 갈증을 느꼈다. 다만, 아쉬움에 갇히기만 했던 것은 아니고, 배우로서 일하는 것에 의미를 두며 연기 활동을 지속했다. 나는 지금껏 행위의 전후 사정을 굳이 따져 묻지 않아도 되는, 그보다는 짧은 순간의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배역을 주로 맡아왔다. 한 인물이 멀리서 달려온다고 치자. 그러면 ‘왜’ 달렸는지는 생각보다 중요치 않더라. 달려와서 힘들다는 것, 숨이 차서 헉헉대는 느낌이 중요하다. 놀라는 연기도 마찬가지다. 보통은 그 인물이 왜 놀랐는지, 더 혹은 덜 놀랄 수도 있었는데 왜 이 정도인지 그리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에 비하면 <3670>의 영준은 훨씬 복잡한 캐릭터였다. 배우로서 욕심이 났다. ‘귀염귀염’하고 사랑스러운 인물인데 왜 볼수록 외로운 느낌이 들까. 그런 부분을 잘 표현해 보고 싶었다.


조유현 배우도 시나리오 읽자마자 욕심이 생겼나.
조유현_ 내가 보기에도 철준과 나는 닮은 구석이 많았다. 감독님도 그런 부분을 찾으려고 했던 것 같은데, 철준의 단단함과 불안함 모두 나 또한 지니고 있는 것들이었다. 나는 경력이 많지 않기에 오디션을 볼 때 발췌 대본이 아닌 시나리오 완성본을 받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근데 이번에는 감독님이 전체 대본을 보여주면서 주연을 찾는다고 했다.
김현목_ 미팅하기도 전에 대본을 통째로 주셨다. 발췌 대본이면 그 부분만 바짝 준비해 가면 되는데 전체를 받으니까 생각이 많아지더라. 전체적으로 작품 해석도 해야 할 것 같고,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장면이랑 감독님 생각이 다르면 어쩌나 싶고.
박준호_ 아, 그랬나? 나는 통대본 주면 배우들이 훨씬 편할 것 같아서 보낸 건데?
김현목_ 연기 준비하기에 편한 것은 맞는데, 그래도 통대본 받으면 그 부담감이 있지.
조유현_처음엔 나를 철준과 영준 둘 중 누구로 생각하나 했는데, 대본 읽어보니 철준이구나 싶더라. 철준 입장으로 읽어보니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무조건 해야지!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오디션 준비를 열심히 했다. 근데 오디션 보고 나서 속상했다. 스스로 마음에 안 들었거든.
떨어졌다고 생각했나.
조유현_ 당연히 탈락이라고 생각했다. 나름대로 생각하고 준비한 것들이 있는데 현장에서 제대로 못 보여준 듯했다. 근데 감독님이 대사를 몇 개 읽어 보라고 하더라. “이번엔 이렇게 해볼래요?”라며 같은 대사를 다르게 읽기도 하고. 그땐 오히려 큰 욕심이나 의도 없이 임했는데, 감사하게도 그 모습을 좋게 봐주셨던 것 같다.
박준호_ 물론 연기가 중요하지만, 캐스팅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신경 쓰는 것 중 하나는 배우 본연의 모습과 캐릭터가 얼마나 일치하느냐다. 이미지, 분위기, 성격 등이 어느 정도 맞지 않으면,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아쉽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다. 재밌는 게, 유현 배우는 오디션장에서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냥 조용히 와서 준비한 연기 묵묵하게 하고 가는 느낌. 그러다 오디션 마치고 자리 정리하는데 가방에서 버건디색 볼캡을 슬그머니 꺼내더라. 시나리오에서 보고 챙겨 왔다고. 사진 찍으면서 ‘모자 쓰면 이런 느낌이구나, 괜찮네’ 생각했다. 그러고는 헤어지기 직전에야 “오디션 오는 내내 ‘회전목마’ 들었습니다”라며 어필하는데,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을 굳혔다. 철준이 편의점에서 영준이랑 대화할 때 아무 말도 못 하다가 마지막에 한마디 하는 모습이더라.
김현목_ 듣고 보니 유현이에 관해 생각했던 것들이 좀 더 확실하게 다가온다. 샌프란시스코영화제에 갔을 때 같이 여행하듯 시간을 보내며 대화를 많이 나눴다. 한 번은 유현이가 연기에 관한 고민을 털어놓으며 영화를 보면 부끄럽고 민망하다고 하더라. 근데 촬영 당시 기억을 되짚어 보면, 나는 유현이가 남의 연기를 따라가지 않고 자기대로 있는 걸 높이 샀다. 나랑 동갑이지만 매체 경험은 많지 않다는 말을 듣고 사실 제일 걱정했던 부분이거든. 어찌 됐든 이야기 흐름상 영준을 비롯한 주변 친구들은 다채롭게 움직여야 했다. 유현이가 그걸 보면서 ‘그래도 저 친구들이 나보다 능숙하고 경험이 많으니까 저 에너지를 따라가는 게 맞겠다, 나도 저렇게 해야겠다’라고 혹여나 착각하면 어쩌나 싶었다. 그럼 이도 저도 아니게 될 테니까. 근데 걱정할 필요 없었다. 현장에서 보니 심지가 있더라. 말로는 “내가 잘 모르니까 많이 도와줘” 해도 본인 시선과 방향대로 딱 중심을 잡았다. 근데 이 얘기를 했더니 유현이는 갑자기 또 아니라고, “따라갈 걸 그랬나? 나 좀 이상한가?” 이러고. (웃음)
조유현_ 어차피 이게 따라가고 싶다고 따라갈 수 있는 영역도 아니다. (웃음)

서로 달라서 근사한 화음을 이룬 듯하다. 그간 김현목 배우는 많은 작품에 현실감과 유머를 가미하는, 소위 감초 역할을 해왔다. 이때쯤 양념 말고 뚝배기 자체로 연기하는 모습을 봤으면 했는데 <3670>으로 갈증을 얼마간 해소한 것 같다. 한편, 조유현 배우는 연기 스타일이 정반대에 가깝다. 무대 경험을 증명하듯 호흡이 길고 신체 에너지를 극대화한다. 김현목 배우처럼 사전에 전략을 철저하게 짠다기보다는 현장에서 에너지를 받는 타입인데, 호흡을 맞추는 과정에서 둘이 어떤 팁들을 공유했는지 궁금하다.
김현목_ 우선 별다른 팁을 공유하지 않았다는 점이 팁인 것 같다.
조유현_ 우리는 촬영 끝나고 이야기를 많이 했지.
김현목_ 영화제 일정 소화하며 한결 가까워졌다. 같이 지내다 보니 대화가 진솔하게 오가더라. 촬영 당시를 돌이켜보면 꽤 조심스러웠던 것 같다. 나로서는 유현이를 존중하고 싶었고, 유현이도 나를 그렇게 대해 줬다. 내가 유현이한테만 특별하게 굴었던 것은 아니고,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 대부분과 거리를 유지하는 편이다. 근데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유현이가 “실은 네가 좀 어려웠다”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 난 우리 ‘짱친’인 줄 알았는데? 뭐 지금도 나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웃음) 출근해서 “어이 왔어~” 인사하면 상대도 자연스레 “어이~” 하고 받아주는 식이었다. 각자 메이크업 받고 대본 읽다가 촬영 들어가면 프로 대 프로로 딱 자기 할 일 하고. 각자의 바운더리를 지키면서도 함께 가는 느낌이었다.
조유현_ 연기를 준비하고 촬영하는 과정, 연기라는 영역에서는 터치하지 않는 쪽에 가까웠다. 현목이 어려웠다는 건, 나의 주관적 느낌에 불과하다. 현장에서는 영준이가 현목이라서 편했거든. 그러니까 어느 정도 거리감을 유지하며 나를 존중해주는 태도가 좋았다. 너무 가까워지면, 그래서 바운더리를 깨버리면 오히려 불편했을 텐데, 현목이 덕분에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연기할 때도 도움을 받았다. 현목이가 영준이 되면 나도 철준이 됐다. 아까 말한 것처럼 현목과 다른 친구들이 상황과 움직임을 만들면, 나는 그대로 받아서 반응하면 됐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어색함, 설렘, 소속감 같은 감정이 자연스레 생기더라.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느끼는 바를 연기에 적용했다는 뜻인가?
조유현_ 나와 철준의 상황이 그만큼 비슷했다. 조유현의 입장에서도 장편영화 촬영장이라는 공간, 한 인물을 긴 호흡으로 따라가는 일 자체가 익숙하지 않았다. 그 익숙하지 않음을 연기에 활용했던 것 같다. 영화 속 철준도 나처럼 낯선 세계에 입문해서 여러 가지를 처음으로 경험하고 있으니까. 촬영할수록 그 상황의 조유현도, 철준도 점점 익숙해졌다. ‘97 송아지’ 친구들이 철준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가는 장면이 떠오른다. 그 전에 이틀 동안 집 장면을 혼자 찍었다. 쓸쓸했지. 휴대폰 구글 맵에서 고향집 찾고, 영준이랑 전화하는 연기하면서 “아니, 아니, 거기 말고” 혼잣말하고. (웃음) 그러다 사흘째 되는 날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기분이 묘했다. 발 디딜 틈 없는 방을 둘러보고, 잠든 영준에게 이불 덮어주고, 다 같이 짜장면 먹고. 그렇게 복작복작한 방에 있으니까 진짜 온기가 느껴지더라. 모두 떠나고서 개인 컷을 찍었는데, 빈집인데도 곳곳에 그 포근함이 남아 있었다. ‘맞아, 애들이 여기 있었지.’ 말한 대로 나는 전략가 타입은 아니라서, 그때그때 현장에서 느낀 것들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했던 편이다.
감독도 같은 효과를 겨냥해서 일부러 시나리오 순서대로 촬영한 건가?
박준호_ 사실 의도했던 것은 아니고 공교롭게 맞아떨어졌다. (웃음) 유현 배우의 장점은 확실하다. 현장 집중력이 좋고, 본인 해석과 무드를 잘 지킨다. 철준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원하지 않는 뭔가에 휩쓸리는 일이 거의 없다. 고집이 있는데 이기적인 성격은 아니라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는다. 두 배우가 좋은 관계로 지내주어 고마웠다. 둘 사이가 삐걱대면 나도 힘들었을 텐데, 그 부분에는 신경을 안 써도 될 만큼 편했다. 현장에서 두 배우를 보는데 ‘정말 어른이네’ 싶더라. 성격부터 인물에 접근하는 방식과 연기 스타일 등 서로 다른 점이 참 많은데, 성숙한 자세로 상대방을 존중하며 둘만의 합을 맞춰 냈다. 또 현목 배우가 말로는 본인만 생각했다면서 유현 배우한테 거리를 되게 둔 것처럼 표현하지만, 내가 보기엔 둘이서 꽤나 가깝게 지냈다. 현목 배우가 이것저것 챙기면서 유현 배우 차도 많이 태워주고. (웃음)

연기만 봐도 시야가 넓은 게 드러난다.
박준호_ 현장에서 소름 돋은 적이 있다. 철준이 모자를 벗어 던지는 장면인데, 그 후 영준의 발밑에 떨어진 모자를 인서트로 찍고 있었다. 10초쯤 지났을까, 촬영 감독이 카메라를 위로 들어 올렸다. 감정 따라서 카메라 움직이는 걸 좋아하거든. 직전까지만 해도 띵까띵까 풀어져 있던 현목 배우가 어떻게 알아챘는지 그 순간 바로 감정을 잡더라.
김현목_ 원래 모자만 찍기로 했는데, 그래도 발은 하나 걸려야겠다 해서 발만 대고 있었다. 근데 뭐가 스윽 하고 올라오는 느낌이 드는 거다.
박준호_ 너무 능숙하니까 소름 돋는 거 있지? 표정 싹 변하고. 다들 감탄하면서 엄청나게 웃었다.
김현목_ 챗GPT를 배우로 형상화하면 이런 모습이려나. (웃음)
<3670>은 게이 커뮤니티와 탈북민 공동체를 오가며 소속감과 소외감을 탐구한다. 두 배우는 상반되어 있으면서도 연결된 감정들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듣고 싶다.
김현목_ 영준은 상대에게 매번 ‘너와 나의 닮은 점’을 이야기한다. 편의점에서 철준과 재회했을 때도 공통 요소를 조목조목 짚어서 열거한다. 우리 동갑이야, 나도 같은 동네 살아, 너도 그 담배 피는구나 등등. 인물을 분석하는 나만의 노하우인데, 우선 그가 과하게 하는 것을 찾는다. 유난 떠는 부분이 무엇인지, 얘가 무엇에 자꾸 건드려지는지. 왜냐면 반대 지점에 결핍이 있거든. 예를 들어 어떤 인물이 늦잠을 잤다고 하자. 지각할까 봐 머리도 안 감고 부랴부랴 집을 나섰는데, 갑자기 집으로 돌아오더니 신발에 깔창을 넣고 나간다. 그러면 이 인물에겐 키가 콤플렉스구나 싶은 거다. 인물이 ‘굳이’ 하는 말과 행동을 찾다 보면 그가 좀 더 입체적으로 그려진다. 영준의 경우, 동일성을 추구하는 점이 핵심이라고 이해했다. 철준이 처음에는 자기소개서를 못 쓰다가 친구들을 만나면서 달라지지 않나. 나는 그 변화를 철준이 타인과 동일시를 경험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도 확장된 거라고 봤다. 어떤 집단에서 홀로 고립되지 않고, 동일한 요소를 공유하는 타인과 뭉쳐 있는 것. 그런 부분이 인물에게 일종의 실존적 근거를 마련해 주는 느낌이 들었다. 반면에 영준이 극 후반으로 갈수록 힘들어하는 이유는, 자기 존재를 더는 동일시할 수 없어서라고 봤다. 서로 다른 점이 눈에 들어오면서 동질감보다 이질감이 크게 다가오니, 제 존재에 대한 근거를 찾지 못하고 불안해한다. 그러다 사실 철준은 그 근거를 남과 똑같아지는 데서 찾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차이를 무릅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북에서 남으로 온 순간부터 철준은 ‘우리와 다른 존재’로 부각되는데, 그래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하나둘씩 헤쳐 나간다.
동일시와 관련해 영준의 변화를 드러내는 장면은 뭐라고 생각했나.
김현목_ 엔딩에서 영준이 내리는 결정이 중요하게 다가왔다. 두 인물의 로맨스에만 집중하면 슬픔을 자아내는 부분이지만, 영준을 연기한 입장에서는 ‘얘가 드디어 용기 내는구나’ 싶었다. “우리는 똑같아”에서 벗어나 세계를 넓게 보려고 하는 거다. 새로운 시도를 다짐하는 뉘앙스를 연기에 넣으려 했고, 개인적으로도 영준을 응원하고 있다. 잘 살았으면 좋겠다.


조유현 배우에게 소속감과 소외감은 어떻게 다가왔나.
조유현_ 나는 철준이라는 인물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했다. ‘탈북 게이’라는 정체성을 “소수자 중의 소수자”로 표현하는데, 그 프레임이 내가 철준을 이해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더라. ‘소수자’ 철준은 왠지 더 외로울 것 같고 더 소외당할 것 같고. 그렇게 막연한 느낌만 앞서니 도리어 인물에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철준의 감정은 이미 시나리오에, 거기서 묘사하는 상황에 드러나 있었다. 내가 더 외롭게 더 소외된 것처럼 연기할 이유도 없고, 그건 철준에게도 민폐라고 느꼈다. 철준이 가만히 소외당하고 있을 것 같지도 않았거든. 소외감보다 소속되고 싶은 욕구가 훨씬 큰, 움츠러들기보다는 당당하게 걷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외로움을 강조할 필요가 없듯 그 당당함 또한 꾸며내지 않기로 했다. 철준 또한 영화에서 분명히 변화한다고 생각한다. 무리에 소속되어 간다든지, 영준을 향한 시선이 미묘하게 달라진다든지. 철준이 영준에게 이상형을 묻는 대사가 있다. 영준이 귀여운 사람을 좋아한다고 답하는데, 그 순간 철준이 보이는 반응에서 이 인물의 속내가 드러난다고 봤다. 카페에서 영준에게 자기소개서 보여달라고 하는 장면도 떠오른다. 어쩐지 영준은 가라앉은 상태인데, 철준은 “오늘 애들 모인다는데 너는 안 갈 거야?”라며 이때까지 한 번도 없던 말투로 떠들지 않나. 눈치 없이 들뜬 느낌. 그런 부분에서도 ‘철준이 이 관계에 진짜 적응했구나’ 싶었다. 다만, 인물 레퍼런스가 없다 보니 초반에 자문을 거쳐야 했다. 실제 함경북도 청진에서 온 친구를 만나서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고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말한 대로 언어와 문화 등 캐릭터 구축 과정에서 각자 조사하고 공부해야 할 부분이 있었는데.
김현목_ 언어를 익혀야 하는 유현에 비하면, 나는 여유 있는 편이었다. 감독님이 프리 프로덕션에서 신경을 많이 써주셨다. 촬영할 공간들에 미리 방문해서 우리끼리 시간을 보내도록 해주셨거든. “여기서 이렇게 찍습니다, 저렇게 찍습니다” 하는 식으로 설명만 듣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술집이면 가서 술도 마시고 음식도 주문해서 먹고 그랬다. 노래방 가서 노래 연습도 같이 했다. 그렇게 사전에 공간을 익혔던 것이 연기에 큰 도움을 줬다. 여기서 어떤 장면을 찍는다는 사실 파악을 넘어, 감각의 전달이 이뤄졌던 것 같다. 그 공간이 주는 무드, 영준이 좋아하거나 불편하게 여겼을 부분들. 그런 것을 미리 느끼고 상상해본 덕분에, 현장에서도 ‘영준화’가 비교적 수월했다.
조유현_ 공감한다. 게다가 나는 스킬이 없어선지, 처음 들어간 곳에서 익숙한 것처럼 연기하기가 아직 어렵다. 그 공간에서 머무르다 보면 분위기도 느껴지고, 그곳만의 규칙도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아주 단순한 것, 예컨대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 마시는 정도라도 한 번 해보는 것과 안 하는 것은 다르더라. 현목이 말한 대로 촬영 전에 공간을 경험하며 여러 가지를 구체화할 수 있었다. 언어의 경우, 이북 사투리를 익혀야 하니 걱정이긴 했다. 언어 자체가 낯설기도 했지만, 디테일이 고민스러웠다. 철준은 이미 한국에서 7년을 살았다. 북한 친구들과 대화할 때랑 남한 친구들 앞에서 말할 때 언어에 당연히 차이가 날 듯했다. 대구 출신인 나도 그렇거든. 서울 친구들 만나거나 일하는 자리에서는 사투리를 최대한 안 쓰려고 했으니까. 단순한 이북 사투리가 아니라, 사투리를 쓰지 않으려는 노력이 포함된 이북 사투리. 그걸 어떻게 구사할 것인지 많이 고민했다. 자문해준 친구에게 대사 녹음을 부탁해서 반복해 들으며 연습했다. 북한 친구들과 대화하는 장면에서는 최대한 그 음가를 따라했고, 나머지는 정확도를 떨어뜨려 어렴풋하게 말했다. 그러다 보니 본래 내 말투가 섞인, 어딘지 애매한 이북 사투리가 나오더라. 아, 그리고 함경북도 사투리가 경상도 사투리랑 억양이 비슷한 데가 있다. 나한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웃음)
소수자를 재현하는 과정에서 감독은 어떤 원칙과 목표를 세웠나.
박준호_ 우선 편견과 스테레오 타입에서 벗어나려 했다. 탈북자의 경우, 보통 매체에서 다루는 이미지와 내가 실제로 만난 사람들 사이의 괴리감이 크다. 그게 부당하다고 생각했고, <3670>에서는 여러 탈북자 캐릭터가 등장하는 만큼 가능하면 다양한 면을 보여주고 싶었다. 언어도 전형적인 이북 말투 대신에 내가 흔히 듣는, 남한화 된 사투리로 담았다. 원래 영화계에서 활동하는 이북 사투리 강사들이 있는데, 일부러 그분들 말고 내가 평소에 보는 유튜버를 섭외했다. 말투도 적당했고 나이도 비슷해서 잘 맞았다. 캐릭터 설정하면서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를 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탈북자가 과거의 배경이나 경험으로 규정되는 존재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보였으면 했다. 게이 커뮤니티를 다루는 일 또한 비슷한 맥락이었다. 최대한 현실적으로 담고 싶었고, 특히 공간을 기록하는 것에 노력을 기울였다. 세트가 아닌 실제 장소를 섭외해서 찍었는데, 이 공간들이 여태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비가시화된 공간을 아카이빙하는 것이 감독에게는 어떤 의미였기에?
박준호_ 한국 사회에서 LGBT는 아직 법적·제도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퀴어라는 존재가 사실상 사회적으로 지워진 것이고, 그 문화 또한 환대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이 커뮤니티는 스스로 문화를 형성해 왔다. 동갑 모임이나 술 번개 등은 정말 다른 나라 어디에도 없는, 한국에만 있는 독특한 문화거든. 그렇게 직접 문화를 만들고 향유하며 지금껏 역동적으로 일궈 왔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로웠다. 문화유산의 가치가 있다고 봤기에 영화로 기록하고 싶었다. 극화되거나 장르화된 방식이 아니라, 가급적 현실 그대로. 게이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아무래도 미디어에선 소위 여성스럽거나 ‘끼스러운’ 면모를 강조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다. 다양한 모습을 그리는 것이 목표였고, 오디션부터 그 부분을 중요하게 봤다. 다행히 배우들이 의도를 헤아려줘서 자연스럽게 담을 수 있었다.
의도는 제목에서도 드러난다. 커뮤니티 은어를 제목으로 사용했다. 소수자로서 ‘우리 말’을 갖는 경험은 혁명에 가깝다. 우리만 아는 언어, 우리만 모이는 공간, 우리만 즐기는 놀이, 우리만 통하는 규칙. 그와 같은 것은 환대와 배제의 속성을 동시에 지닐 수밖에 없는데, <3670>에서는 이를 어떻게 표현하려 했나.
박준호_ 특정한 사례를 딱 꼽긴 어렵지만, 방금 이야기한 것이 결국 핵심이다. 철준과 영준의 로맨스에서 장애물로 작동하는 것은 커뮤니티 그 자체의 속성이다. 이렇게 정리하면 냉정해 보일 수도 있지만, 영준이 철준을 환대하다가도 자기 생존을 위해 결국 그를 배제하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에서는 게이 커뮤니티를 다뤘지만, 어쩌면 끈끈한 공동체일수록 담이 높은 것일지도 모른다. 담이 높은 만큼 결속력이 강해지는 것일 수도 있고. 그런 양면성을 드러내려 했다. 퀴어 커뮤니티는 은밀한 공동체다. 진입 장벽이 높기에, 영화 속 대사처럼 다들 용기를 내야 발을 들일 수 있다. 낯선 이를 쉽게 환영할 수만은 없는 처지고, 그래서 적응 과정이 힘들다. 겨우 적응해 발을 붙였는데 여기서 또 배제당하는 것은 엄청나게 피곤한 일이고. 나는 철준과 영준이 바로 그 소수자 커뮤니티의 특성으로 인해 어긋났으면 했다. 보통 퀴어 영화에 등장하는 장애물은 혐오세력 같은 외부의 명백한 빌런이다. 하지만 나는 커뮤니티 내부에서 갈등이 촉발되는 상황을 원했다. <3670>은 게이 커뮤니티를 미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공동체의 명과 암을 동시에 보여주려 했다. 어쩌면 그것이 게이 커뮤니티가 지닌 특수성이지 않나 싶다. 당사자 피드백에서 “괴로울 정도로 공감됐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또 하나 기존 퀴어 로맨스 서사에서 아쉬웠던 점은 이성 로맨스 서사의 틀에서 성별만 바꿔놓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실상 별다른 특색이 없는 이야기가 되고 마는데, 영화에 커뮤니티 내부의 관계 문제가 들어오면 다양한 레이어가 생기면서 훨씬 흥미로워진다고 생각했다.
성소수자와 탈북민 등은 존재 자체를 종종 부정당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감독으로서 메시지를 좀 더 선명하고 강력하게 던지는 방식도 고민했을 텐데, <3670>은 담론을 키우는 대신 일상의 갈등을 세밀하게 따라가기를 택했다.
박준호_ 속마음은 그냥 외치고 싶지. (웃음) 그런데 내가 탈북자 커뮤니티에서 사람들을 만났던 경험을 떠올려 봤다. 누구도 나에게 설교하거나 가르치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되더라. 관객도 마찬가지 아닐까. 이 영화가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를 성실하게 담아서 보여준다면, 그렇게 제시하기만 해도, 관객은 자연스럽게 설득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굳이 설교할 필요는 없었다.

한편 <3670>에서 소속감과 소외감만큼이나 중요한 또 다른 감정은 열등감이라고 봤다. 비교하고 안달 내고 조바심에 안절부절못하는 감정. 이십대 중후반이라는 나이 설정도 눈에 띈다. 철준은 입시를, 영준은 취직을 준비하는 지망생이기에 둘 다 사회에서 ‘미완’의 상태로 인식된다.
박준호_ 일부러 나이를 그쯤으로 잡았다. 누구는 취업 준비생이고 누구는 이미 취업이 됐을 만한 나이대. 초고 쓸 무렵에는 93년생이었는데 영화 준비하는 사이에 시간이 지나면서 97년생으로 변경됐다. (웃음) 열등감에 관해서는 처음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나에게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였다. 특히 영준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그랬다. 영준은 말하자면 ‘남한 게이’의 대표적인 혹은 보편적인 캐릭터로 등장하지 않나. 관객 눈에 영준은 일종의 평범함을 지닌 인물로 보일 텐데, 어떤 특성이 필요할지 고민했다. 주변에 묻기도 하고 관찰도 하면서 생각했을 때, 열등감이 떠올랐다. 아까 현목 배우가 동일시에 관해 얘기하지 않았나. 나는 비단 게이 커뮤니티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자체가 동일시 압력이 굉장히 심하다고 생각한다. 유행에 민감한 것도 같은 이유다. 스투시 유행하면 다 스투시 입고 다니고. 게이 커뮤니티에서 실제로 어떤 헤어 스타일이 하나 유행하면 다 똑같이 자른다. 97 동갑모임 배우들 머리를 아이비리그 컷으로 자르지 못한 것이 내내 아쉽다. (웃음)
김현목_ 아, 그랬구나. 하기야 머리 자르고 전부 책임져 줄 수도 없고. (웃음)
박준호_ 철준 집에서 친구들이 다 같이 자는 날, 현관에 흰색 나이키 에어 포스가 가득 모여 있는 장면이 나온다. 그 신발들 특별히 주문한 거다. 동일시 압력이 높은 환경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려 했다. 글쎄, 근본적인 이유가 뭘까. 과도한 입시 경쟁? 다들 어릴 적부터 줄 세우기를 겪으면서 1등이 아니면 열등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라지 않나. 내가 진단하기엔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2~30대 대부분이 열등감에 시달리는 것 같다. 자연스레 캐릭터에도 그런 고민이 반영됐고, 열등감 때문에 연애가 성사되지 않는다고 봤다. 좋아하는데 좋아한다고 말도 못 하고 티도 못 낸다. 고백했다가 거절당할까 봐. 그렇게 답답한 상황만 이어지는 것이 요즘 현실과도 맞닿는다고 느껴졌다.
김현목_ <3670>이 보통 영화가 아니라니까.
박준호_ 갑자기 또 왜 이러나. (웃음)
조유현_ 근데 진심이다. 열등감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도 처음 나눴는데, 들으면서 생각해 보니 감독님 말에 일리가 있다.
영준과 철준으로서는 열등감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다뤘나. 둘 다 나이로 따지면 성인인데 사회적 신분이나 위치, 특히 관계 맺기에서는 거의 초심자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조유현_ 철준을 연기하는 과정에서 열등감에 집중하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열등감을 지닌 영준과의 대비가 선명하게 보였던 것 같다.
박준호_ 열등감은 사회적으로 학습되고 만들어지는 감정이니까. 철준은 그러한 감정을 배운 적이 없는 인물이다. 실제 탈북 청소년들과 만나서 얘기하다 보면 열등감을 언급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상대가 어떤 상황에서 열등감을 느낄 거라고 상상하지도 못하고. 그래서 철준은 “아까 민성이한테 전화 왔는데”라고 영준에게 툭툭 말하는 거다. 그 순간 영준이 ‘왜 나한테는 전화 안 하고 얘한테 했지?’ 하며 속상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니까. 기본적으로 스스로에게 자신감도 있고.
김현목_ 왜 나한테는 연락 안 하나. 기분 나쁘다! (웃음) 나는 영준을 ‘열등감 덩어리’라고 느꼈다. 대사 곳곳에서도 그 단서가 보였다.
박준호_ 계속 자기는 못생겼다고 하고.
김현목_ 아, 정말 그 장면 찍으면서 연기에 자신이 없었다. 납득이 안 돼서. (웃음) 영준에게는 현택이라는 열등감을 자극하는 명확한 대상이 있었다. 과거에 뭘 어쨌든 그냥 “현택이 참 대단해” 하면 될 것을 “나는 걔가 잘나가는 걸 이해를 못 하겠다”라는 식으로 표현한다. ‘시작점에서는 비슷했는데, 왜 지금 걔는 되고 나는 안 되지?’ 같은 생각을 계속하는 거다. 영준은 늘 비교 속에 있는 인물처럼 보였다. 철준과 공통점을 찾으려 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열등감이 발동할까 봐 겁나서 미리 선을 긋는 태도처럼 느껴졌다. “너는 이런 점이 멋있어”라고 인정하는 게 아니라 “너는 나보다 잘난 것도 못난 것도 없어, 우리는 똑같아”라고 굳이 말하려는 점이 그렇다. 결핍에서 비롯된 열등감의 발현이라고 봤다. 영준이 자기소개서 쓰는 장면도 떠오른다. 자기소개서는 거창하게 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를 잘 팔기 위한 텍스트다. 하지만 영준은 거기에 능숙하지 못하다. 모임에서는 활발하고 리드하는 모습도 보이지만, 정작 사회에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순간에는 명쾌하게 써 내려가지 못하는 거다. 왜냐면 스스로 이렇게 생각하니까. ‘나는 다른 이들보다 뛰어나지도 않고 심지어 더 별로야. 나는 나를 팔 용기도 자신도 없거든.’ 아마 오래전부터 영준은 열등감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던 게 아닌가 싶다.

소외감도 열등감도 그러고 보면 젊은 감정 같다. 단, 애매한 젊음이다. 늙었다고 하긴 이르지만 어리지도 않은 나이, 성공도 실패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 감독도 그처럼 애매한 젊음에 시달렸던 날이 있을 텐데.
박준호_ 영화 준비하는 단계에서 우연히 트위터에선가 글을 하나 보고 무릎을 탁 쳤던 기억이 난다. 우리 영화가 20대 후반의 이야기인데 솔직히 유치찬란하지 않나. 쪽지에 마음에 드는 사람 누구 썼냐면서 묻고 따지고. 근데 또 어느 정도 현실이란 말이지. 계속 고민했다. ‘이야기가 너무 유치한가? 리얼하긴 한데?’ 그러다 그 글을 봤다. 성소수자는 10대 시절에 자기 감정을 온전히 표현해 본 적이 없기에 사춘기가 지연된다고, 20대 때 커뮤니티에 나와서야 감정적 사춘기를 맞이한다고 하더라. 나이와 감정에 어떤 시차를 느낄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이 영화에서도 ‘지연된 사춘기’의 모습이 드러났으면 했다. 그러면 이야기도 충분히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요새 사람이 성숙한다는 개념을 잘 믿지 않는다. 나이를 먹으면서 성숙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한 꺼풀만 벗겨내면 누구나 여전히 아이라고 본다. 우리 부모님도 여전히 사소한 일에 삐지시거든. (웃음) 한편 <3670> 만든 후 친구가 얘기해서 알았는데, 나는 항상 어딘가에 적응하지 못해 배회하거나 이 사회와 맞지 않아서 고민하는 인물들을 다루고 있더라. 아마 개인적 경험에서 온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사회와 안 맞는다고 느꼈다. 부조화. 예를 들면 내가 여수 출신인데, 친구들처럼 사투리를 심하게 쓰지도 않았고 입맛도 달랐다. 해물을 거의 안 먹거든. 왠지 나만 다른 세상에서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금도 어느 공동체에서든 소속감을 잘 느끼지 못하는 편이다. 그러니 겉으로는 신경 안 쓰는 듯해도 속으로는 ‘내가 여기서 잘하고 있는 걸까? 다들 괜찮은가?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볼까?’ 많이 의식한다. 이건 나만의 문제라기보다 누구나 어느 정도 겪는, 개인과 사회의 갈등이라고 본다. 그래서 이 영화의 주요한 감정으로 다뤘던 것 같고.
영화 만들면서도 사회와 아귀가 잘 맞지 않는 느낌을 받나.
박준호_ 항상 그렇다.
그럼 작품을 선보일 때마다 너무 불안할 듯한데.
박준호_ 그래도 이번에는 나은 편이다. <3670>을 제외하면 소위 말하는 ‘빅 영화제’에 갔던 작품이 거의 없다. 여러 영화제에서 상영했던 단편 <은서>(2019)도 호평과 혹평을 나란히 들었다. 학교 교수님은 아예 평가를 거부하셨다. 하실 말씀이 없다는 뜻이었다. 내 영화가 가닿지 않는구나 싶어 막막했다. 누군가에겐 전혀 소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스럽더라. 뭐랄까, 감수성이라고 하면 너무 좋게 포장하는 것 같긴 한데.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만 공감하는구나. 나와 마음이 다른 사람은 아예 이해 자체가 안 되나 보다.’ 그런 생각이 들다 보니 내가 만든 영화들의 확장성이 크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항상 따라다녔다. 다행히 <3670>은 많이들 재밌게 봐주시는 것 같다. 요즘은 기쁘다.
김현목_ <3670>의 다른 점은 뭐였을까? 사람들에게 왜 가 닿았을까?
조유현_ 감독님이 달라진 건가?
김현목_ 감독님이 점점 기득권에 포함된다는 뜻은 아니겠지? (웃음)
박준호_ 아, 내가 세상에 좀 적응했나? (웃음)


배우들은 어떤가. 애매한 젊음에 시달리는지, 아니면 세상에 소속감을 느끼면서 살고 있는지?
조유현_ <3670> 작업하면서 소속감을 많이 느꼈다. 함께한 영화 팀에도 그렇고, 우리 영화로 영화제에 가는 경험도 뜻깊었다. 그간 관객으로만 영화제를 찾았지, 전주국제영화제나 샌프란시스코영화제처럼 큰 영화제에 배우로서 초대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경험 자체가 연기 생활하는 데 있어 소속감을 안겨줬다. 사실 연기는 내게 늘 이벤트 같은 느낌이었다. 일상을 잘 살아야 연기를 잘할 수 있다는 말에 공감하지만, 연기할 기회는 어쩌다 오는 거니까. 내게 연기를 가르쳐주신 선생님이 그러셨다. “산책하듯 연기해라” 에베레스트 오르듯 연기하지 말라고. 근데 내겐 연기가 산책이 아니라 등반처럼 느껴졌다. 너무 귀한 기회니까, 매번 에베레스트 오르는 사람처럼 힘들여 준비하는 거다. 평소엔 내가 연기자인지, 수영 강사인지, 아니면 탈춤 추는 사람인지 나조차 모르겠고. 주객이 전도되는 느낌 속에서 내가 하고 싶은 연기라기보다는 해야 할 것 같은 연기를 하다 보니 오히려 길이 잘 안 풀리기도 했다. 나이는 먹어가는데,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3670> 만나기 한 3년 전부터 그런 고민을 많이 했다. 근데 지금은 조바심 내지 않으려고 한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주변에 내 나이를 물으면 실제보다 5살, 많게는 10살까지 어리게 보더라. 나이가 많다는 생각도 결국 비교에서 오는 건데, 그러면 내가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는 뜻 아닌가. ‘사람들이 생각보다 날 어리게 보는구나. 내가 건강을 유지하면, 난 5년, 10년을 번 셈이네.’ 언젠가부터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고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길게 보며 살자고 다짐하는 순간,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더라. 지금 이렇게 영화 이야기하는 시간이 재밌고 즐겁다. 은근히 불안도가 높은 편인데, 이런 시간 덕분에 불안보다는 긍정적인 기운을 많이 얻는다.
“산책하듯 연기해라” 일전에 김현목 배우는 “배우가 아닌 것처럼 살아라”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는데.
김현목_ 김초희 감독님이 그랬다. 배우라고 괜히 힘주지 말고 일반인처럼 살라고. 그러고 보니 비슷한 얘기네. 나는 방금 유현이 얘기 들으면서 속으로 “또 한 수 배웁니다” 했다. (웃음) 유현이처럼 마음을 고쳐먹는 것이 내게는 참 어려운 일이다. 아까는 세상 이치를 깨달은 사람마냥 동일시만 해서는 안 된다, 차이에서 실존적 근거를 찾아야 한다, 말하지 않았나. 실제로 그러려고 한다. 책도 찾아서 읽고 ‘그래, 동일시가 답이 아니야. 오히려 동일한 사람 만나면 피해야 해. 나랑 다른 사람을 만나서 살아 있음을 느껴야 해.’ 생각하며 공부하려고 애도 써본다. 근데 돌아서면 불안하다. 다를수록 불안하고, 애매함의 극치다. (웃음) 나도 이 시간이 참 좋은데 결국에는 또 다른 일을 해야 한다. 이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다른 곳에서 또 일을 구해야 하는 거다. 재미있는 시간만으로 생활을 지속할 수는 없다는 것. 올인원 에센스처럼 하나로 다 아우르면 좋을 텐데, 그게 안 되거든. 어쩔 수 없이 화장품을 여러 개 번갈아서 써야 하는 상황에 늘 직면해 있다. 말하다 보니까 나 되게 영준스럽네. 연기를 하고 싶으니까, 하고 싶은데 어려우니까 이런 생각이 계속 드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난 연기의 퍼포먼스 측면을 놓고 볼 때 유현이가 부럽다. 열등감이 아니다. 인정한다. 뭐냐면 연기에는 별수 없이 감각적 동력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 같거든. 나는 그 부분이 안 되다 보니, 영준에 빗대어 표현하면 자기소개서 쓰는 실력을 더 키우려고 하는 느낌이다. 감각을 발휘해 인물을 체화하고 구현하는 것에 스스로 한계가 있다는 생각에, 차라리 텍스트를 완벽히 숙지하겠다고 욕심내는 거다. 이해하려 노력하고, 이해했다고 말하고 다니고. 물론 그 능력도 배우에게 중요하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더 능력 있는 배우는 유현의 모습이거든. 그러니까 배우로서는 저쪽을 지향하는데, 먹고 사는 문제를 등한시할 수 없으니 이쪽도 살펴야 하고. 그 사이에서 애매모호함이 발생하는 듯하다. 두 갈래를 잘 합치하면 좋을 텐데.
조유현_ 나는 현목이를 보면서 ‘저런 배우가 되고 싶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늘 자신에게 없는 것을 갈망하고.
조유현_ 왜냐면 난 현목이처럼 안 되거든. 실제로 느껴야만, 느낀 것을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프로라면 감각하지 않고도 연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 그만큼 경험을 쌓지 못했고, 기술도 없다. 직접 경험하지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스스로 힌트를 얻어 연기를 풀어나갈 수 있을까. 현목이를 지켜보며 ‘와, 저걸 어떻게 하는 거야?’ 궁금했는데, 그 답을 찾는 것이 앞으로 내게 남은 숙제라고 본다. 실은 내가 또 현목이한테 연기에 관해 배운 경험이 있거든. 조만간 전지 훈련을 살짝 계획해 보면 어떨지.
김현목_ 아, 그거 비싼 건데~ (웃음)
조유현_ 현목 캠프 한 번 열어주시면 감사히 참여하겠다. (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