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수 감독을 만나본 사람들이 입을 모아 하는 얘기가 있다. “영화와 다르게 너무 점잖은 분이에요.” 그럴 만도 하다. 지난 10년간 고봉수의 영화 앞에는 날 것의 독립영화, B급 코미디, ‘웃픈’ 현실 자체라는 수식이 줄기차게 따라붙었다. 마음만 앞설 뿐 관계의 결을 읽지 못해 좌충우돌하는 그의 주인공과 달리, 고봉수는 자신이 그려온 궤적을 차분한 어조로 짚어내곤 했다. 동시에 누구보다 부지런히 영화를 만들었다. 특유의 코미디 감각과 경쾌한 연기로 주목받은 데뷔작 <델타 보이즈>(2015)를 시작으로, <튼튼이의 모험>(2017) <습도 다소 높음>(2020) <빚가리>(2022) 등 해마다 신작을 내놓았다. 스크린에 기세 좋게 덤벼드는 배우들은 ‘고봉수 크루’로 불렸고, 감독의 실험정신은 “고봉수가 고봉수 했다”라는 믿음직스러운 평가로 돌아왔다.
매번 다른 것을 시도했으나 늘 고봉수다웠던 10년. 열정 넘치는 그가 신작을 공개하는 일이야 새삼스럽지 않지만, <귤레귤레>는 ‘고봉수다움’이라는 울타리를 살짝 박차고 나간다. 미련과 상처로 과거에 매여 있는 대식(이희준)과 정화(서예화)는 대학 시절 이후 오랜만에 카파도키아의 그린 투어에서 재회한다. 대식은 제멋대로인 상사 원창(정춘)과 출장길에 올랐고, 정화는 전 남편 병선(신민재)과 재결합을 가늠하는 중이다. ‘귤레귤레’는 튀르키예어로 작별 인사를 뜻한다. 해묵은 과제와 마주해 각자의 방식으로 이별을 치르는 인물들은 현재의 고봉수를 투영한 듯하다. 단편영화 200여 편을 찍으며 영화 만드는 법을 터득했던 것처럼 온갖 장르를 탐방하며 하나부터 열까지 몸으로 부딪쳐 배운 시간. 한세월 기쁨과 한계를 익힌 그는 이제 자신의 영화를, “이게 나”라고 여겼던 정체성을 갱신하려 한다. “고봉수가 고봉수 했다”라는 문장은 앞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까.
<귤레귤레>는 데뷔 10년 차에 처음으로 해외 로케이션을 감행한 작품이다. 익숙한 환경을 벗어나 촬영을 진행하면서 가장 크게 달라진 건 무엇이었나.
일단 내 마음가짐이 달랐다. 한국에서는 편집하면서도 재촬영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있으니까 마음이 좀 느슨해질 때도 있었다. 그런데 해외에서는 ‘여기서 실수하면 끝이다’ 싶은 긴장감 때문에 평소보다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됐다. 아침마다 기도도 하고, 더 단단한 마음으로 촬영에 임했다. 튀르키예에 열흘간 머물면서 7회차 정도 찍었다.
이희준 배우와 처음 작업했던 <습도 다소 높음>의 경우, 촬영 스케줄이 훨씬 타이트했다고 들었는데.
당시는 1회차로 촬영을 마쳤다. 배우 일정상 반나절만 촬영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나처럼 독립영화 하는 사람한테는 흔치 않은 기회였기에 제한된 시간 내에 어떻게든 완수해야 했다. 이번에는 그때보다 여유가 있던 편이다.
로케이션은 어떻게 섭외했나. 사전 답사에 드는 시간과 비용도 만만치 않았을 듯하다.
촬영지는 이미 카파도키아 ‘그린 투어’ 코스로 정해져 있었다. 극 중 대식이 길을 잃는 데린쿠유 지하도시는 삼각대를 세우고 촬영하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되었다고 해서 그곳만 촬영지를 따로 찾았다. 실제로 가이드 생활을 오래 한 이스마엘에게 한적한 장소를 추천받아서 진행했다. 사실 나와 스태프들이 선발대로 현지에 먼저 도착해서 가장 노력을 기울였던 부분은 이스마엘의 캐스팅이다. 워낙 말도 재밌게 하고, 성격도 좋고, 얼굴도 잘생겼다. 이 사람이 영화에 나오면 분명히 재밌는 요소가 될 거라 생각했는데, 처음엔 이스마엘이 부담스럽다며 거절했다. 여러 번 설득한 끝에 결국 출연을 결정해줬다.


연기 경험이 전혀 없다기엔 능숙하던데.
이스마엘이 참 신기한 친구다. 부담을 표했던 것과는 달리, 촬영을 진행할수록 점점 캐릭터에 빠져들어서 정말 배우처럼 연기하더라. 카파도키아에서 10년 가까이 가이드로 일한 프로다. 직접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예전에 유튜브에서 그를 봤던 적이 있다. 어떤 유튜버가 그를 인터뷰했는데, 이스마엘이 말을 재미있게 잘하더라. 한국어도 능숙하고. ‘저런 사람이 <귤레귤레>에 가이드로 나와주면 어떨까?’ 생각만 하던 차에, 주변 동료들이 그러면 수소문해서 한번 얘기라도 나눠 보자고 하더라. 다행히 연이 이어져서 재미난 캐릭터가 완성됐다.
평소에는 애드리브가 많은 현장으로 알려져 있는데, <귤레귤레>는 전작에 비해 계획성이 두드러진다. 이 또한 해외 촬영이라는 환경 변화의 영향인가.
이번엔 제대로 된 시나리오가 필요했다. 영화진흥위원회 제작 지원을 받아야 했거든. 게다가 여러 배우와 짧은 시간 안에 튀르키예에서 촬영을 진행하는 상황이었다. 부담이 컸고 겁도 났다. 준비를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대사라든지 전체적인 시나리오 작업을 치밀하게 했다. 아내 이주예 감독과 각본을 함께 집필했다. 와이프는 나와 다르게 멜로 영화 마니아여서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극 중 그린투어에 참여한 모녀로 등장하는 박은영, 김수진 배우도 와이프의 첫 장편 <보조바퀴>(2021)를 보고 캐스팅했다. 연기도 마음에 들었고 두 배우가 실제로 모녀 사이이기도 하다. <보조바퀴>에서 김수진 배우가 인상적이어서 와이프에게 “원래 연극 하는 분이야?” 물어보니, 젊은 시절 배우를 꿈꿨던 일반인이라고 하더라. <귤레귤레>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실지 기대하며 배역을 제안했다.
안 그래도 각본 작업 과정이 궁금했다. <귤레귤레>는 유머의 밀도가 비교적 낮은 작품이다. 혹시 이번엔 웃기고 싶지 않았던 건가?
이희준 배우가 멜로 영화를 하고 싶어 했다. 배우가 먼저 작업 의지를 보여준 상황이다 보니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최대한 빨리 시나리오를 건네고 싶었고, 와이프와 어떤 멜로가 좋을지 상의했다. 마침 그 시기에 유튜브에서 카파도키아 벌룬 영상을 우연히 보게 됐다. 열기구들이 쭉 하늘 위로 올라가는데 한쪽에 이렇게 서 계시던 분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더라. ‘저분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 왜 벌룬을 보다가 눈물이 났을까?’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차에 이희준 배우가 벌룬에서 뭔가를 향해 인사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거기서부터 <귤레귤레> 시나리오를 시작했다.
아주 구체적인 장면, 그것도 엔딩부터 시작했다는 뜻이다.
김지운 감독이 <반칙왕>(2000) 기획 당시, 타이거 마스크를 쓴 남자가 어떤 여자에게 꽃다발을 전하는 모습부터 떠올린 것처럼 말이다. 벌룬에서 인사하는 장면이 출발점이었다. 과거와 ‘귤레귤레’ 하는, 미래를 충실히 살아가야 하는 우리를 응원하는 영화를 만들어보자 싶었다. 멜로이자 성장 영화로 기획했다.

음악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튀르키예 음악 한 곡과 근래 인디 신에서 사랑받는 최유리의 ‘동그라미’, 허회경의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삽입했는데, 음악 선정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와이프랑 나도 워낙에 인디 밴드 음악을 자주 듣는다. 특히 허회경 씨랑 최유리 씨 노래가 귀에 꽂히더라. 와이프가 노래 하나에 빠지면 그것만 반복해서 듣는 타입인데, 평소 드라이브하면서 두 곡을 종종 들었다. 어느 날 문득 노래 가사가 <귤레귤레>의 내용과 잘 맞는다고 느껴졌다. 우리가 요청한다고 해도 과연 이 곡들을 쓸 수 있을까 싶었는데, 두 아티스트 모두 흔쾌히 음악 사용을 허락해 줬다.
각본뿐만 아니라, 공동 작업자로서 아내가 다방면에 영향을 줬다는 느낌이다. 인복이 있다고 해야 할까.
돌이켜보면 촬영 내내 운이 따랐다. 일단 날씨가 너무너무 좋았다. 촬영 전날에 큰 우박이 한 번 쏟아져서 촬영이 중단될까 봐 굉장히 불안했다. 근데 막상 촬영 시작하고 나선 끝나는 날까지 계속 날씨가 좋았다. 벌룬투어 같은 경우는 실제로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취소된다. 벌룬이 안 뜨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비가 좀 오다가도 촬영할 때 되면 그치더라. 갑자기 무지개까지 뜨고. 튀르키예 현지인 분들에게도 도움을 많이 받았다. 워낙에 다들 선하고, 누군가가 어려움에 처하면 자기 일처럼 생각해 준다. 영화에 등장하는 식당도 현지인 한 분이 섭외해 줬다. 우리 상황을 듣고는 지인에게 연락해서 “한국에서 영화팀이 왔는데 너희 피자 가게 좀 빌려줘”라며 바로 다리를 놓아주더라. (웃음) 좋은 사람들과 촬영하다 보니 매 순간 행복했다. 벌룬 장면도 현지 투어에서 일하는 기사가 직접 찍었다. 전문가가 나섰으니 얼마나 편했겠나. 척하면 척이었다. 우리가 요구하는 대로 찍어줘서 계속 감탄하며 봤다. 이희준 배우가 촬영 마지막 날 이렇게 총평을 남겼다. “감독님, 제가 보니까 감독님 현장은 하느님이 도와주시는 것 같아요.” 불자인 분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 더 감격적이었다. (웃음)
이희준 배우가 먼저 작업 의사를 밝혔다고 했다. <습도 다소 높음> 이후 두 번째 작업까지 의기투합한 건가?
<습도 다소 높음> 촬영 당시, 이희준 배우에게 미안했다. 열악한 환경에 모신다는 게 마음에 걸렸지. 근데 감사하게도 촬영 마치고 희준 배우가 차 한잔 하자고 얘길 꺼내줬다. 그러고 커피를 마시는데 “재밌는 거 있으면 다음 작업도 같이 해요”라고 하더라. 나 같은 사람들은 그걸 또 흘려듣지 않거든. (웃음) “배우님 진짜죠? 진짜?” 그렇게 약속을 받고 곧장 시나리오 작업에 돌입했다. 이희준 배우는 모험심과 열정이 남다르다. 연기 열정이 그만큼 큰 사람은 솔직히 태어나서 처음 봤다. 죽기 전까지 모든 영역을 다 섭렵할 것만 같은 느낌이다. 이번에도 비전문 배우들과 함께하면서 힘든 면이 있었을 텐데, 현장을 굉장히 열린 자세로 받아들였다. 오히려 그런 부분을 유니크하게 여겼고 아이디어도 많이 줬다. 덕분에 촬영일이 하루 늘어나기도 했다. 원래 다음 날이 크랭크인인데 바로 찍자고 하더라. 어차피 다 같이 합숙하는데 뭐하러 내일까지 기다리냐면서. 여러모로 감사하다. 빚진 것도 많고.
집필 단계부터 대식 역의 배우를 점찍었던 셈이다. 전작에서 이희준 배우에게 나르시시스트 감독 캐릭터를 맡겼는데 <귤레귤레>에서는 정반대다. 대식은 자신을 포장하거나 어필할 줄 모르고, 주로 관심을 피해 물러서는 인물이다. 일부러 상반된 캐릭터를 제안했나.
사실 이희준 배우라면 내가 어떤 역할을 주든 완벽히 소화할 거라고 믿었다. <핸섬가이즈>(남동협, 2024) 보면서도 놀랐다. ‘와, 이런 코미디도 해내는구나!’ 새로운 유쾌함이었다. 일전에 희준 배우가 강한 역할만 계속하다 보니 지쳤다는 말을 했던 적이 있다. 강한 겉모습 안에 되게 여러 가지 모습을 품고 있는 배우다. <귤레귤레>의 대식을 통해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면 나뿐만 아니라 관객들도 즐거워할 거라고 확신했다.


서예화 배우와는 첫 작업이었다. 기존 ‘고봉수 크루’의 어느 배우와도 다르고, 그가 연기한 정화 또한 전작의 어느 인물과도 겹치지 않는다. 정화는 예민하지만 차분하며, 너그러우면서도 분명하다. 서예화 배우의 영향인지, 아니면 애초부터 다른 인물을 설계했는지 궁금하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사회성이 있다는 뜻이지? 우리 영화는 대개 사회성 없는 인물들이 모여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정화는 그들과 다르게 자기를 나름대로 지킬 줄 아는 사람이다. 와이프와 나눴던 대화를 바탕으로 떠올린 인물이다. 와이프가 그러더라. “진짜 똑똑하고 일도 잘하고 모든 면에서 완벽한데, 남자 보는 눈이 없는 친구들이 있어.” 나 들으라는 건가 싶어 뜨끔하기도 했는데. (웃음) 아무튼 그런 이야기를 통해 정화라는 인물을 그려나갔던 것 같다. 남자 고르는 기준이 애매한 사람. 특히 ‘돌싱’ 중에 전남편과 똑같은 문제점을 그대로 안고 있는 남자와 재혼하는 경우를 보면서, 어떤 마음인지 궁금해졌다. 취향인가 싶기도 하고. 대식과 마찬가지로 정화 역시 그 모든 것과 ‘귤레귤레’ 한다면, 헤어져야 할 사람과 작별하고 새 출발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그 자체로 시원하지 않을까 싶었다.
대식과 정화의 키스신이 재밌다. 세 번의 키스가 나오는데 순서대로 세 차례 키스를 나눴다기보다는, 세 개의 편집본을 이어 붙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둘은 키스를 한 거야, 만 거야?’ 싶고.
원래는 마지막 장면만 넣을 계획이었는데, 현장에서 장면을 좀 더 추가해 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나로서는 관객에게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주고 싶다. 정화 입장에서 보면 전 남편과는 너무도 다른 대식에게 마음이 끌려 일시적으로 동요했을 수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정화가 대식에게 반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 그래서 대식의 상상이 반복되는 걸 수도 있고, 혹은 대식과 정화의 상상이 교차하는 걸 수도 있다. 관객이 자유롭게 받아들이기를 바랐기에, 일부러 컬러나 사운드 등 아무런 효과를 넣지 않았다. ‘이것은 상상이고 이것이 진짜입니다’라는 식으로 보여주고 싶지 않았거든. 배우들도 재미있어 하더라. 대식이 워낙 지질한 캐릭터다 보니 앞선 두 장면은 대식의 ‘키스 시뮬레이션’ 아니냐며 막 웃고. 관객분들 또한 저마다 느끼는 대로, 편하게 해석해주시면 좋겠다.
한편, 이번 작품 역시 유머의 비중이 작을지언정 유머가 없지는 않다. 그 주체가 중심 인물이 아닌 주변 인물로 옮겨 갔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 것 같다. 앞서 언급한 엄마와 두 딸로 구성된 브이로거 캐릭터들이 영화 내내 리액션 캠 역할을 한다. 정화와 병선의 관계가 위태로워지고 대식은 이성을 잃어 가는데, 그들의 대화와 카메라 속에서 그 상황은 끊임없이 희화화된다. ‘구경꾼’이 영화에 필요했던 이유는 뭐였나.
김수진 배우를 캐스팅한 첫 번째 이유는, 무엇보다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처럼 보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관객이 영화 속 인물들과 함께 패키지여행을 떠난 것처럼 느꼈으면 했다. 누군가가 이 상황을 중계해 주면 관객도 그걸 같이 겪고 목격하는 기분을 느낄 듯했고, 대화에서도 예상치 못한 재미가 생길 거라고 봤다. 그래서 김수진 배우에게 속엣말을 툭툭 던져 달라고 했다. “이 사람은 유튜버예요. 지금 귀한 시간을 내서 딸들이랑 튀르키예까지 왔는데 이 진상들을 만나신 거예요. 상상해 보세요. 투어하는 내내 얘네랑 같이 다녀야 하는데 얼마나 짜증이 나겠어요?” 대사도 따로 안 썼다. 짜증이든 불쾌함이든 그냥 순간순간 드는 감정을 거침없이 말해주십사 부탁했다. 영화에 삽입한 유튜브 촬영 장면 역시 김수진 배우가 직접 찍었다. 카메라 작동법만 알려드리고 이틀 정도 연습한 것이 전부였다. 인물이 잘리는 등 이상한 로우 앵글 컷들이 영화에 나오는데 일부러 그렇게 찍은 것이 아니다. 카메라 조작이 익숙하지 않다 보니 자연스럽게 담긴 장면이고, 결과적으로 촬영과 대사 등 여러 면에서 김수진 배우가 웃음을 만들어냈다. 특히 사운드가 비어 있지 않은 것은 김수진 배우의 공이 크다. “말을 더듬어도 되고, 대사가 맞물려도 상관없어요. 원하는 대로 다 말씀하세요.” 사전에 요청한 대로 정말 편하게 상황에 몰입해 줬다. 액션 장면은 정교하게 합을 짜서 진행했는데, 이를 중계하고 소감을 말하는 부분은 오롯이 즉흥으로 남겨뒀다.

실제로 배우들의 대사가 겹치거나 명확하게 들리지 않는 구간이 있다. 자연스러운 순간을 포착하는 이점이 있는 동시에, 대사의 의미와 분위기를 전달하는 면에서는 고민되는 순간도 더러 있을 듯한데.
그 편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하기에 굳이 고치지 않는다. 한국 사람들 대화하는 모습을 가만히 보면 서로 얘기하려고 말부터 튀어나오지 않나. 이 사람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다음 사람이 말하고, 그건 너무 영화 같은 거지. 현실감이 있는 장면을 만들고 싶어서 말이 엉켜도 그대로 살렸다. 사실 영화적인 대화나 장면들은 이희준, 서예화 배우가 알아서 만들어주거든. 둘의 티키타카는 영화적으로 매우 완성도 있는 장면으로 나왔고 또 다른 장면은 대화 자체의 리얼리티를 살릴 수 있어서 여러모로 만족스러웠다.
서예화, 신민재 배우가 날 선 말을 주고받는 장면이 떠오른다. 다툼이 불거지며 감정이 고조될 때쯤 신민재 배우가 불쑥 결정적인 대사를 내뱉는다.
실제 부부가 싸우는 느낌을 원했고, 신민재 배우가 직접 대사를 만들었다. 민재 배우는 나랑 10년 넘게 작업했던 사람이다 보니 그런 방식에 원체 익숙하다. <델타 보이즈> 독백 신도 상황만 제시하고 구체적 대사는 민재 배우가 스스로 준비해 왔다. 이번에도 민재 배우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활약했다. 서예화 배우에게도 놀랐다. 이런 환경이 익숙하지 않았을 텐데 금세 적응해서 몰입하더라.
신민재 배우와는 <델타 보이즈>부터 꾸준히 협업하고 있다. 그에게서 계속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중인가?
민재는 한마디로 팔색조다. 연기 스펙트럼이 워낙 넓고 할 줄 아는 것도 많다. 이번에도 PD에게 민재를 꼭 병선 역할로 캐스팅하고 싶다고 말하고 일찌감치 약속을 받아냈다. 민재랑 작업하는 건 언제나 즐겁다. 긴 시간 함께한 배우라서 편안할뿐더러 내 작업 방식에 대한 이해도도 높다. 따로 디렉팅하지 않아도 스스로 캐릭터를 만들어오고, 현장에서도 늘 열심히 참여한다. 영화 속 말싸움 장면도 거의 민재가 만든 것이다. 이희준 배우를 포함해 현장에 있던 이들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네가 불쑥 찾아와서 갈등을 일으켜줘”라고 했더니 민재가 얼굴을 벌겋게 분장하고 술 취한 모습으로 나와서 그런 연기를 보여줬던 거다. 내 입장에선 안 좋아할 수가 없지. 어떻게 신민재라는 배우를 안 좋아하고 배기겠나. 병선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보면 알코올 중독에 온갖 문제를 안고 있는 인물이다. 장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데, 정화는 왜 병선을 내치지 못할까? 왜 재결합까지 생각할까? 그런 질문을 던지면서 민재에게 부탁했다. “술을 안 마신 상태에서는 귀엽거나 호감 가는 모습이어야 해. 정화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매력적인 면이 보였으면 좋겠어.” 민재 덕분에 병선이 다채로운 캐릭터로 완성됐다.
이제 감독의 이름을 들으면 고정 배우군, 일명 ‘고봉수 크루’까지 나란히 떠오른다. 오랫동안 같은 배우와 동행하고 있는데, 창작의 안전감과 제한 사이에서 고민은 없는지 궁금하다.
사람의 매력이라는 게 신비롭다. 상대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뜯어보면 계속 새로운 면모를 발견할 수 있는 것 같다. 와이프와 결혼한 지도 6년째인데 여전히 새롭거든. (웃음) 배우들도 마찬가지이고,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마주치는 일반인 또한 다르지 않다. 나는 어떤 사람의 말투나 표정 같은 걸 보면서 “이 사람, 영화에 나오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더러 있거든. 매력적인 분을 만나면 영화에 캐스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 모습을 영화에 박제하고 싶다고 해야 할까. 그분들은 전문 배우가 아니기에, 어떤 면에선 더 부담 없이 연기한다. 그 자연스러움이 영화에서 힘을 발휘하고, 비전문 배우와 전문 배우가 합을 이루면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시너지를 내기도 한다. 항상 그런 순간을 꿈꾸며 작업한다. <귤레귤레>에는 아쉽게도 모시지 못했는데, 예전부터 우리 삼촌을 영화에 출연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튼튼이의 모험>에 코치 역할로 캐스팅했고. 앞으로도 비단 ‘고봉사 크루’뿐만 아니라, 매력적인 일반인들을 계속 발굴해서 영화에 출연시키고 싶다. 내가 작업하는 목적이자 일하면서 얻는 커다란 기쁨 중 하나다.


그건 어떤 욕망일까? 내 영화에 담고 싶다는 소유욕?
글쎄, 소유욕이라기보다는… 나만 보기 아까운 마음에 가까운 것 같다. 재미있는 걸 보면 다른 사람한테도 보여주고 싶지 않나. “야, 이거 진짜 재밌어. 너도 한 번 봐봐.” 그렇게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다. 흥미로운 사람을 발견하면 영화라는 프레임 안에 넣고 싶다. 그때 그의 매력이 평소보다 생생하게 다가오고, 또 다른 의미로 재미가 발현되는 순간들이 있다. 게다가 시나리오대로만 촬영을 진행하는 것이 아니다 보니, 예측불허의 상황과 의외성에서 오는 즐거움도 크다.
감독에게 영화는 앨범이자 전광판 같다. 영화 만들기를 굉장히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만큼 영화 보기를 즐기는구나 싶고.
누군가가 마음에 들면 그냥 자주 만나도 되겠지만, 나는 그를 영화로도 보고 싶은 것 같다. 평소에 아는 사람이 TV에 한 번 나오면 괜히 주변에 막 자랑하고 싶고 그러지 않나. “그 사람 TV 나왔어!” 하면서. 비슷한 심리 아닐까.
수백 편의 단편을 만든 후, <델타 보이즈>로 장편 작업을 시작했고 어느덧 10년이 흘렀다. 작업 초기에는 여유보다 열정이 앞섰을 텐데 언제쯤부터 영화 작업과 개인을 분리해서 보게 됐나.
그 얘기를 하려면 먼저 내 취향부터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맥도날드보다 버거킹을, 마이클 잭슨보다 프린스를, 마돈나보다는 신디 로퍼를 좋아했다. 다들 너바나에 열광하던 시절에도 펄 잼을 더 좋아했지.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타란티노보다는 로드리게스 감독을 선망했다. 그러니까 희한하게도 메이저보다는 B급에 언제나 끌렸다는 말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시선이 조금씩 달라졌다. 이제 와서 마이클 잭슨 앨범을 다시 들어보니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라는 생각이 들더라.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네. 대중을 사로잡는다는 것이 이런 뜻이구나.’ 내가 영화를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진짜 ‘능력’일까? ‘나는 누가 뭐래도 내가 하고 싶은 영화 할 거야. 내 영화를 좋아해 주는 관객만 웃기면 돼. 그들이 재미있어하면 괜찮아.’ 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 대중을 즐겁게 하는 것이야말로 능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변화에는 와이프의 영향도 컸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예전엔 멜로 영화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근데 와이프가 추천한 영화를 보며 놀랐다. ‘이렇게 좋은 영화였다니. 시간이 흘러도 회자되는 이유가 있는 거구나.’ 그런 경험들이 쌓이면서 마음이 바뀌었다. 그래서 <귤레귤레>도 만든 거고, 이제 내 잣대로 어떤 영화를 함부로 평가하거나 재단하지 않게 됐다. 향후 작업에서는 내 취향만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취향을 동시에 고려하려고 한다. 더 많은 사람과 영화를 통해 소통하고 싶으니까.
아내가 권해서 봤던 멜로 영화는 뭐였나.
제목만 들어도 아는 영화들. 멜로 영화의 걸작으로 일컬어지는 <클래식>(곽재용, 2002) <노트북>(닉 카사베츠, 2004) 등부터 봤다. 이상한 고집을 부리며 안 봤는데, 와이프가 일단 보라고 하더라. 사람들이 이만큼 시간이 흘러서도 이야기하고 여전히 그 작품을 찾아보는 이유가 있다고. 내겐 특별한 경험이었다. 영화를 보다가 문득 사람 마음이 이렇게도 움직이는구나 싶더라.

전환의 시기네. 지난 10년간 감독은 “고봉수가 이런 영화도 만들어?”라는 충격보다 “이건 딱 봐도 고봉수 영화다!”라는 인정 혹은 알아차림을 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말하자면 인장을 새기고 싶어 하는 듯했는데.
매번 생각이 바뀌는데, 방금 이야기한 내용이 지난 10년간 내게 일어난 변화의 핵심 같다. 예를 들면 요즘 웨스 앤더슨 영화 보면 누구나 ‘앤더슨스럽다’ 하지 않나. 근데 개인적으로 그의 최고작이라고 생각하는 초창기 영화 <러시모어>(1998)를 보면, 지금 우리가 익숙하게 아는 웨스 앤더슨 스타일은 보이지 않는다. 웨스 앤더슨 영화가 아닌 것 같지. 그런데도 앤더슨 특유의 유머는 그 안에 분명히 존재한다. 이런 과정을 톺아보며 ‘나만의 무언가를 보여주겠다는 욕심으로 나를 정형화하면 안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말하지 않나. 맨날 하는 것 좀 그만하라고. (웃음) 예전 같았으면 나만의 인장을 새긴다는 둥 주접을 떨었을 텐데, 이제는 진짜로 대중이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졌다. 한순간에 생각이 달라졌다기보다는, 말한 대로 10년이라는 시간이 쌓이면서 서서히 변화가 깃든 거다. 사실 저만의 인장을 주장하고 실현할 감독이 전체의 몇 퍼센트나 되겠나. 고봉수표 영화라니, 내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자체가 좀 민망하다.
현재 시점에서 감독이 생각하는 ‘고봉수표 영화’란?
허접하지.
진심으로?
뭐랄까, 다시 보기 부끄러운 영화들도 많다. 이번에 이희준 배우를 비롯해 여러 배우와 함께하면서 많이 생각했다. 노력해야겠다. 좀 더 치열하게 영화를 찍어야겠다. 시나리오 작업도 열심히 하고 콘티도 만들고, 그렇게 고민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려 한다. “나는 원래 영화를 이렇게 만들어”라고 말하는 태도 자체가 굉장히 교만한 거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겸손하게 작업해야지. 요즘 내 키워드는 겸손, 딱 하나다.
과거에 틀렸던 것을 바로잡는다기보다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겪는 듯하다. 교만이라고 표현했지만, 실은 성장 드라마, 흑백 무성영화, 페이크 다큐멘터리, 코로나19 시대 극장을 다룬 메타 영화 등 매번 다른 주제와 포맷을 시도하지 않았나.
그게 바로 교만이었다. 무성 영화도 그렇고, 특히 다큐멘터리 같은 경우는 너무 가볍게 접근했던 것 아닌가 싶어 반성하고 있다. 깊이 고민하고 헌신적으로 작업하는 분들이 그 영역에 정말 많거든. 당시엔 어떻게든 영화를 찍고 싶다는 마음이 앞섰는데, 앞으로는 그런 식으로 달려들지 않기로 했다. 왜 사람들이 한 작품에 그토록 많은 자본과 인력을 투입하는지, 그렇게 영화를 찍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10년 만에 깨달은 것 같다.


향후 10년은 지금과 얼마나 또 어떻게 다를까? 작업 속도, 스타일, 혹은 삶과의 거리감을 예상해 본다면.
시나리오를 정성껏 쓰는 동시에, 앞으로도 훌륭한 배우들을 발굴해서 대중에게 소개하는 걸 목표로 삼고 있다. 한국 영화 르네상스라고 불리던 시절엔 좋은 배우가 넘쳐나지 않았나. 재능 있는 배우를 찾아서 영화에 출연시키는 것 또한 감독의 사명이자 의무라고 느낀다. 물론 유명한 배우들과 함께 작업하는 것도 좋지만, 그 외에 새로운 얼굴을 발굴하는 것도 꼭 필요한 일이다. 최근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다가 믹 재거랑 우피 골드버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예전의 그 젊고 생생한 모습이 아니더라. 시간이 어마어마하게 빨리 흐른다는 걸 체감했다. 허송세월하지 않고, 좋은 작품을 만드는 데에 노력을 더 쏟으려 한다.
그럼 이제 매년 영화를 공개하는 감독을 만날 수 없는 건가?
매년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대충 찍는 것처럼 보이지 않나. 그 말에 구태여 반박하고 싶지도 않다. 그렇지, 대충 찍기도 했다.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는, 공들여서 영화를 만들겠다는 의미다.
한해도 거르지 않고, 심지어 어떤 해에는 두세 편씩 신작을 선보이기도 했다. 단지 대충 찍는다고 가능한 일은 아니다.
노하우가 뭐냐고 묻는 분들도 있는데 사실 별다른 비결은 없다. 다만, 우리 크루가 있었다. 다들 영화를 너무너무 사랑한다. 그 사랑하는 영화 현장에 계속 있고 싶어서, 어떻게든 억지로라도 모여서 촬영했던 것 같다. 사랑이 넘쳐서 일을 계속 벌였던 거다.
관객으로서는 두 가지 마음이 동시에 든다. 오래 세공해서 만들어 낼 다음 영화가 기대되는 한편, 감독마저 영화를 적게 만든다는 것이 아쉽기도 하다.
이것도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버려두면 알아서 또 찍지 않겠나. (웃음) <귤레귤레> 작업이 좋았어서 지금도 와이프와 함께 차기작을 준비하고 있다. “어떤 이야기가 재미있을까? 뭐가 감동적일까?” 논의하며 스토리를 만드는 중이다.
일과 사랑과 가정이 공존하는 환경이다. 어려운 점은 없나.
내게 결혼은 축복이다. 힘들어하는 사람도 많다는 걸 아는데, 난 정말 행복하다. 좋은 짝을 만났다. 아내는 나의 첫 번째 동료이자 친구다.
다음에 만나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감독의 장래 희망은?
당연히 거장 감독. (웃음) 튀르키예 촬영하면서 몸을 잘 돌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체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영화를 오래 하기 힘든 것 같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여든을 넘은 나이에 <그랜 토리노>(2009)를 찍지 않았나. 지금 이 시간에도 새로운 영화를 만들고 있고. 나도 감동을 주는 영화 만들고 싶다. 불평불만 없이 작업하려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처럼 오래오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