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영 감독은 문서 하나를 휴대하고 다닌다. 총 24장으로 이루어진 PDF 파일에는 ‘미오카의 수수께끼를 풀 단서’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1974년 여름,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된 아이 ‘김미옥’에 관한 정보는 깨진 조각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입양기관, 보육원, 보호소, 구청 등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했지만, 정작 문서마다 기재된 시기와 장소가 달라서 그마저도 신빙성을 확신하기 어렵다. 누군가는 사실을 숨기고, 누군가는 진실을 모른 척한다. 미오카와 동행하던 감독은 입양 경위를 추적할수록 미궁에 빠지는 상황을 보다 못해 그 모든 조각을 직접 그러모아 문서화했다. 파일 하나를 완성할 때쯤 영화 <케이 넘버>의 방향도 분명해졌다. 김미옥과 미오카를 연결하는 실마리보다 중요한 것은 그사이에 누락된 미싱 링크다. ‘김미옥의 일생 타임테이블’은 여전히 미완성이다.
영화에서 미오카 밀러는 어딜 가든 사진을 찍는다. 잃어버린 단서를 찾아 헤매는 것 같기도, 기억나지 않는 시절을 기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친생부모를 찾으려는 미오카의 여정은 과거를 복원하는 행위로 이어지지만, 이는 단순한 개인적 회고에 머무르지 않는다. <케이 넘버>는 입양을 둘러싼 감정과 체계, 무지와 구조, 국가와 개인의 관계를 응시한다. 감독은 삶의 일부를 영화에 내어준 사람들의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엮지 않으려 오래 망설였고, 조심스럽게 질문을 정리했다. “당신은 이 문제에 관해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이 인터뷰는 그 질문이 어떻게 생겨났고,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따라가는 기록이다. 조세영 감독도, 미오카 밀러도 ‘김미옥의 일생 타임테이블’을 미완성으로 내버려두지 않으려 한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조세영_ 영화에 나오는 해외입양인 지원 단체 ‘배냇’의 김유경 대표가 소개해 줬다. 미오카가 먼저 배냇에 연락해서 부모를 찾고 싶다고 도움을 요청했던 상황이었다. 2022년 중반부터 입양인 커뮤니티 내에서 ‘배냇이 친생부모 찾기를 잘 도와준다’는 얘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그 무렵 김 대표가 나에게 연락을 줬다. 마침 미오카도 미디어 노출을 원했기에 내가 촬영을 병행하면 서로 ‘윈윈’할 거라 판단했다.
이전에도 여러 입양인을 만났던 거로 아는데, 미오카의 출연을 빠르게 결정했던 이유는?
조세영_ 처음 만난 날, 오전 8시부터 밤 10시까지 14시간을 함께하면서 인천 일대를 돌아다녔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차량 신도 그날 찍었다. 미오카가 미국에서의 경험과 한국의 첫인상을 이야기하며 상기된 표정을 보여준다. 실제로 조금 들떠 있었고 당시 기분이 화면에 그대로 담겼다. 보통 다큐멘터리를 찍다 보면 촬영 초반에 출연자의 표정이 가장 생생하게 포착된다. 시간이 갈수록 상황에 익숙해지니까. 그날 촬영을 마치고 스태프들과 회의하면서 “저분을 주인공으로 삼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김유경 대표도 마찬가지였고. 그 이유는 아마 영화에 자연스럽게 드러나지 않을까.
미오카 씨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한데?
미오카 밀러_ 어쩔 수 없이 해외 입양인 중에는 분노나 원한을 품고 있는 사람이 많다. 나는 비교적 감정에 머무르기보다는 해결책을 찾아 앞으로 나아가려고 애쓰는 타입이다. 그런 점이 감독님이 나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더는 누군가를 탓하고 싶지 않다. 그보다는 해외 입양이 구조적 문제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해하고자 한다. 물론 그중에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도 있고, 명백한 잘못도 있다. 다만, 나는 한국전쟁 이후 1960~70년대 한국의 정치 및 경제 상황이 매우 어려웠다는 사실 또한 인지한다. 만약 그 시기 국내 상황이 좀 더 정상적으로 흘러갔다면 이와 같은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본다.


앎과 이해에서 오는 차이인 동시에, 개인의 기질을 반영하는 부분이다. 늘 차분함을 유지하는 미오카 씨를 보며 오히려 궁금증이 생기더라. 영화는 해외 입양을 둘러싼 국가적 차원의 기만을 밝힌다. 나의 이주와 입양이 구조적 폭력의 결과라는 점을 인식하고 나선 어땠나. 분노, 혼란, 회의 등 복잡한 감정을 어떻게 소화했는지 듣고 싶다.
미오카 밀러_ 처음에는 분노보다 충격이 컸다. 양어머니가 보내준 서류를 살펴보니 내 기억과 맞지 않는 정보들이 적혀 있었고, 상당히 충격적인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잊고 있던 기억이 다시 떠오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머릿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는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처했다.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던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거든. 서류엔 어떤 목격담이 기록되어 있는데, 마치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처럼 쓰여 있더라. 근데 정작 나는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내 기억을 신뢰할 수 없다는 생각에 스스로에게 의문을 가졌고, 그 일로 인해 한동안 우울증을 겪었다.
관객으로서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 역시 정보였다. 정보를 제공해야 할 기관이 그 책임을 회피하고, 때에 따라 원칙을 다르게 규정한다. 취재 과정에서 체력적으로나 심적으로나 힘에 부쳤을 텐데 어떻게 중심을 잡았나.
조세영_ 내가 해외 입양 문제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2004년부터다. 어느덧 20년 가까이 흘렀고, 입양 기관이 서류를 잘 내어주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대부분은 먼저 기관에 이메일을 보내고, 답이 없으면 갑작스럽게 방문하는 식으로 계획을 짠다. 그러면 당황한 기관 담당자가 서류를 보여주는 경우가 있거든. 입양인들 사이에서 그렇게 알음알음 노하우를 공유하는 셈이다. 최근에는 입양 기관도 이러한 접근 방식에 익숙해져서 훨씬 정교하게 대응한다. 예전에는 카메라만 들어도 당황해서 싸우는 경우가 있었는데 요즘은 오히려 태도가 친절하다. 실질적인 정보를 주지는 않으면서 “도와주고 싶지만 우리가 가진 건 이게 전부다”, “이 서류를 주려면 윗선의 허락이 필요하다”, “기존 요청이 많아서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식이다.
전형적인 관료주의 태도다. 미오카 씨가 서류를 확보한 과정은 어땠나.
미오카 밀러_ 2008년에 처음 한국에 와서 입양 기관을 방문했다.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어서 절망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2015년에 해외 입양인 페이스북 커뮤니티를 알게 됐고, DNA 검사를 통해 친생 가족을 찾았다는 사례들을 접했다. 희망을 안고 DNA 검사에 참여했지만, 당시엔 매칭되지 않았다. 사실상 2008년에 입양 기관을 다녀온 이후, 해볼 수 있는 것은 다 했다고 느꼈다. 더는 이 문제에 매달리는 대신, 내 가정과 커리어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한국을 재방문한 것은 10년이 지난 2019년이다. 같은 서류를 요청했고 역시나 실패했다. 실제로 서류를 확인한 것은 2022년이 되어서였다. 당시엔 방송국 PD였던 지인과 동행했다. 기관 측에서 지인의 직업을 알 리는 없지만, 어쨌거나 지인이 요구하니 한글로 된 원본 서류를 곧바로 주더라. 2008년과 2019년에는 주지 않던 문서를 왜 2022년에야 줬는지 나로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그 후 2023년에는 위탁모의 사진과 여권 사진, 관련 메모 등도 추가로 확보했다.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입양 기관과 해당 체계에 대한 신뢰가 크게 무너졌다. 비슷한 경험을 한 해외 입양인이 워낙 많다 보니 우리 모두가 신뢰를 잃을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조세영_ 예전에 다른 입양인이 기관을 방문할 때 동행한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나를 막아서더라. 친구를 데려오면 안 된다며 출입 자체를 제한했다. 최근에 어떤 분은 입양 당사자만 기관 안으로 입장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공식 규정인지 직원 개인의 방침인지 확인할 필요는 있지만, 어쨌든 그런 식으로 뭔가가 계속해서 바뀌는 중이다. 입양인 대부분은 기관 안에서는 별일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다 밖에 나오면 참았던 분노를 한꺼번에 쏟아낸다. 인터뷰하면서 물어봤다. 왜 기관 안에서는 화내지 않았냐고. “그 자리에서 화내면 나만 손해”라고 하더라.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니까. 재방문하고 재요청해서 어떻게든 서류를 받아야 하니 감정을 터뜨릴 수가 없는 거다. 취재 과정에서 이런 상황을 재차 마주했다.

파편으로 존재하는 단서에 의지할 수밖에 없기에 영화는 얼마간 추리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감독으로서는 영화의 진행 방향을 확정하는 데 애를 먹었을 텐데.
조세영_ 입양인은 자신에게 어떤 서류가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기관은 늘 “이게 전부”라고 말하지만, 다음에 가면 또 다른 서류가 등장한다. 영화에 나온 서류도 그런 식으로 얻었다. 처음에는 한글 원본은 줄 수 없다며 영문 번역본만 줬는데, 몇 년 후에는 원본을 주고. 이렇듯 장기간에 걸쳐서 서류를 하나하나 받아내야만 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 시스템의 문제점을 명확히 드러낸다고 본다. 나 또한 부정확하고 복잡한 정보 앞에서 혼란스러웠다. 결국 미오카의 입양 관련 서류들을 전부 모아서 시기별로 재구성했다. 타임라인을 만들지 않으면 나조차도 정신없고 헷갈리더라. 거쳐 간 기관이 워낙 많은 데다 서류마다 날짜도 제각각이었다. 보호소 아동카드엔 72년으로 적혀 있는 부분이 입양기관 서류엔 70년으로 기재되어 있는가 하면, 최초 발견 시점과 장소도 다 달랐다. 영화에서 이런 오차를 강조하고 싶었지만, 앞뒤 맥락을 설명하자니 내용이 복잡해져서 도리어 혼란을 가중하더라. 결국 편집 단계에서 제외했다.
최초 취재 시점을 2004년으로 보면, 20년 만에 영화를 완성한 셈이다. 입양 당사자와 교류하는 입장에서 마음이 급했을 듯한데 어떻게 시간을 견뎠나.
조세영_ 20년 내내 이 작업만 한 건 아니고, 나로서는 최대한 빨리 만든 셈이다. (웃음) 본격적으로 작업에 돌입한 것은 2018년 무렵이다. 미국에서 추방된 입양인에 관한 기사를 읽게 됐다. 어릴 적 입양을 갔는데 왜 시민권도 없이 불법체류자가 됐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막상 찾아보니 비슷한 상황에 부닥친 입양인이 꽤 많더라. 원인을 추적하다 보니 궁금증이 커졌고, 결국 카메라를 들게 됐다. 당시엔 누가 전문가인지, 어디에 가면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지도 알기 어려웠다. 정부 관계자를 찾아다니고, ‘뿌리의 집’ 같은 입양인 지원 단체에 가서 활동 상황을 살폈다. 동시에 서류를 갖고 있는 입양인들을 만나서 직접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렇게 2019년까지 자료 조사에 매진했는데, 2020년과 2021년 코로나19로 현장 촬영이 불가능해졌다. 온라인 세미나에 참여하고 해당 영상을 녹화하기도 했지만, 사실상 영화 작업은 거의 멈춘 상태였다.
동력을 회복했던 계기는 뭐였나.
조세영_ 2022년에 이경은 박사가 도서 <국제 ‘고아’ 입양 시스템: 그 기원과 발전에 미친 대한민국의 영향>을 펴내고 유럽에서 북토크 투어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따라가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당시만 해도 제작지원이 전혀 없는 데다, 유럽 물가가 비싸서 비용 부담이 컸다.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고민하고 있는데, 같은 작업실을 쓰는 문정현 감독이 “(돈은 없어도) 카드 있잖아요?”라고 하더라. (웃음) 진짜 신용카드 들고 3주간 유럽을 돌면서 어마어마하게 빚을 졌다. 계속 비행기 타고, 숙소도 전부 자비로 해결해야 했거든. 난 거기서 관광을 한 적이 없는데 관광세까지 내야 한다고 그러고. 여러모로 무리한 출장이었다. 그래도 힘을 많이 얻었다. 게다가 출국 준비하며 이전 작업을 한 차례 정리할 수 있었다. 투어 전에 영화진흥위원회와 서울영상위원회에 제작지원 신청서를 냈고, 귀국하고 보니 다행히 지원사업에 선정됐더라. 그때부터 작업에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사실 현재 영화의 내용과 흐름은 거의 편집 단계에서 확정된 것이고, 촬영할 때는 ‘줍줍’하듯이 여기저기서 조금씩 장면을 모아가는 식이었다. 촬영할 때부터 뚜렷한 의도를 가졌다기보다는, 우선 흐름을 쫓으며 기록했다가 나중에 구조를 만들어 낸 작업이다.


제작지원 면접이나 피칭 과정에서 심사위원 반응은 어땠나?
조세영_ 관심은 많았다. 모아놓은 자료가 방대하다 보니 다들 주목하기는 했다. 그런데 아무리 설명해도 입양인을 바라보는 관점이 ‘불쌍하다’, ‘안타깝다’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만들고 싶은 작품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한국 입양 시스템이 어떤 방식으로 잘못 형성되어 왔는지, 그 구조와 역사를 사회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질문하고 싶었다. 결국 영화를 공개하고 나서야 “아, 이런 걸 보여주고 싶었구나”라는 반응이 나왔다. 말로 설명할 때는 입양인과 심사위원 모두에게 제대로 이해받기 어려웠다.
우리가 익히 아는 ‘입양 다큐멘터리’와는 목표, 내용, 어조 등이 다르다 보니 낯설 수밖에. 입양인은 어떤 면에서 어려워하던가.
조세영_ 기본적으로 비당사자가 만든 입양 다큐멘터리가 거의 없다. 동시에 입양인들은 카메라 앞에서 대상화되거나 지나치게 드라마틱한 톤으로 소비된 경험이 많다. 그러다 보니 나를 경계하는 건 당연했다. 사전에 뭐라고 설명하든 내가 카메라를 들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불편할 수밖에 없다. 한편, 작업 과정에서 프로젝트를 소개하다 보면 누구를 찍으라는 식의 조언과 제안을 자주 들었다. 나는 개인의 사연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 아니거든. 누구를 찍느냐보다 어떤 구조를 말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영화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미오카라는 인물이 큰 역할을 한다. 입양은 흔히 ‘구원 서사’로 포장되곤 하는데 <케이 넘버> 속 미오카는 이를 전복하는 결정적인 힘처럼 다가온다.
조세영_ 미오카의 표정이 덤덤한데 연출자 입장에서 어떻게 받아들였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오늘 인터뷰하러 오면서 그 질문을 다시 생각해 봤다. 만약 미오카가 감정 기복이 크고 감정 변화를 잘 드러내는 사람이라면, 관객은 자연스럽게 미오카의 감정에 집중했을 것이다. 그러면 영화가 다루는 입양 시스템과 사회 구조에 관한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작게 느껴졌을 것이고, 덜 보였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미오카는 적절한 주인공이었다.
미오카 밀러_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감독님이 나를 편안하게 해줬다는 점이다. 감독님은 변함없고 꼼꼼한 사람이다. 안전하다고 느꼈다. 카메라가 나를 따라다니는 상황도 큰 불편 없이 받아들였다. 사전에 대사를 짜거나 연출된 장면은 없었다. 눈물이 나는 상황도, 마음이 복잡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그때는 감독님에게 촬영을 중단해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그런 감정들을 외부에 많이 공유하지 않는 사람인 데다, 영화가 그 부분에 집중하길 원하지 않았다. 감독님이 내 의사를 존중해준 덕분에 마음 놓고 참여할 수 있었다.
조세영_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미오카는 이 여정에 굉장히 협조적이었다. 열린 자세로 대화에 응했고 감정이 올라오는 상황을 영화에서 어떻게 다룰지 서로 소통하며 맞춰 나갔다. 미오카가 미국으로 돌아가는 날, 아침 7시에 미오카가 묵고 있던 호텔에 찾아가 함께 아침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도 있다. 감정적인 장면의 경우에도 “영화에 꼭 필요하면 써도 된다”고 해줬다. 나는 편집본을 먼저 보여주겠다고 미오카에게 약속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미오카가 그전에 다른 방송에 출연했던 경험도 있는데, 촬영 후에는 대부분 언제 어떻게 방영되는지 연락을 안 해줬다고 하더라. 국내 미디어 환경에서, 특히 저널리즘 분야에서는 출연자에게 방송 여부나 방향을 따로 설명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내밀하고 사적인 서사를 다룰 때는 반드시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미오카와의 관계에서 그런 원칙을 공유하고 지키려 했다.

미오카 씨가 애향원에서 아이들을 만나는 모습이 떠오른다. 뒷모습에 저렇게 많은 감정과 이야기가 흐를 수 있구나 싶어 놀랐다.
조세영_ 미오카가 정말 힘들어했던 순간이다. 중요한 장면이기에 촬영했고 영화에도 삽입했지만, 당시 찍으면서도 고민이 많았다. 나도 궁금하다. 미오카는 그때 어땠는지.
미오카 밀러_어려운 장면이었다. 나는 입양 전에 애향원이라는 보육시설에 머물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기관 담당자는 그곳이 불에 타서 사라진 바람에 관련 서류를 확인하기 어렵다고 했다. 나중에 김유경 대표의 조사로 그 말이 사실이 아님을 밝혔다. 위치를 옮기긴 했지만 애향원은 여전히 있었고, 그곳에 사는 아이들을 보면서 마음이 너무 아팠다. 한국은 지난 수십 년간 경제적으로 가파르게 성장한 나라다. 그런데도 이토록 많은 아이들이 보육원에 있다니 감정이 북받치더라. 가족과 떨어진 채 그러한 기관에서 지내기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다. 어린 아이들의 경우에는 더하고. 아마 그것은 모든 입양인이 공감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경험일 거라 생각한다. 그날 감독님이 일부러 나를 뒤에서 찍었다. 감정적으로 너무 힘들었기에 보여주고 싶지 않았고, 그 마음을 감독님이 이해해 줬다.
조세영_ 김유경 대표가 웹사이트를 수없이 검색한 끝에 애향원을 찾아냈다. 담당자가 몰랐을 수도 있고, 귀찮아서 대충 넘겼을 수도 있다. 어차피 그곳에 가봤자 우리가 찾는 서류는 없을 거라고 전제한 것 같다. 그런데 의지를 지닌 한국인 조력자가 나서서 판도를 바꾼 거다. 애향원에 전화를 걸어 문의하니 미오카의 서류를 보관하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처음엔 서류 일부만 사진으로 보여줬다. 당사자인 미오카를 직접 데리고 경상도까지 내려가니 그제서야 원본 전체를 보여줬다. 어느 기관이든 결국 담당자 본인에게 책임이 돌아올까 봐 조심스러워하는 것 같다.
영화 중간중간 미오카 씨가 혼자서 아무 말 없이 기다리는 장면이 등장한다. 미오카 씨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지만, 정작 미오카 씨는 그 대화에 참여할 수가 없다. 당사자임에도 어떤 순간에는 철저히 관찰자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일련의 과정에서 미오카 씨는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라봤는지, 언어와 문화 등 낯선 공간에서 정체성과 소속감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궁금하다.
미오카 밀러_ 한국어를 하고 싶었다. 지금도 배우고 싶다. 나이가 있다 보니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아서 쉽진 않지만, 계속 배우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때로는 대화에서 소외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한국에서 단절된 채 강제로 이주당하면서 언어와 문화, 국적 등 많은 것을 상실했다는 감각이 강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감사한 마음이 뒤따랐다. 입양인이 아닌 한국 사람들이 나에게 신경 써주고, 이 여정을 함께해준다는 사실이 정말 고마웠다. 이 모든 일이 내가 의도해서 일어난 건 아니지만, 운명처럼 또 선물처럼 다가왔다. 김유경 대표가 감독님을 나에게 소개해 줬을 때만 해도 인터뷰 한 번으로 만남이 끝날 줄 알았다. 이렇게 영화까지 제작될 줄은 상상도 못했지. 아직도 놀랍다. 남편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사람이 계획하면, 신은 웃는다.” 지금 상황이 딱 그렇다. 내가 예상하지 못한 곳까지 동행해 줘서 고맙다.
조세영_ 어떤 순간엔 그저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전달됐다. 통역할 필요 없이 표정만으로도 서로 상황과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작업하며 어떤 방식으로든 미오카 씨의 삶에 개입할 수밖에 없고, 때로는 활동가로서 곁을 지키기도 했다. ‘기록자’와 ‘동행자’라는 두 역할 사이에서 딜레마는 없었나.
조세영_ 스스로 활동가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물론 자료를 열심히 정리하고 정보를 수집하려 애썼지만, 봉사나 활동 같은 영역에 크게 끌리진 않는다. 나는 늘 감독으로서 미오카를 대했다. 이 영화가 미오카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지 진심으로 고민했다. 미오카가 영화에 담길 원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나로선 더 듣고 싶었다. 만약 미오카가 한국에 오래 머물렀거나 내가 미국에 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그 부분들도 조금 더 열어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출연자의 선택에 맡겨야 할 영역이고, 우리 사이에 시간과 신뢰가 쌓여야 가능한 일이다. 지금은 그 시기가 아니고, 그래서 영화는 현재 버전으로 완성된 것이다. 나는 다큐멘터리 작업에서 촬영의 종결이 곧 관계의 종결까지 의미한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촬영을 마친 그때부터가 시작이다. 편집, 완성, 상영 및 개봉 등을 모두 포함해 감독과 출연자의 관계는 계속 이어진다. 미오카와 나도 영화를 상영하고 관객과 반응을 나누는 과정에서 점점 더 관계의 밀도를 높여 가고 있다. 10년 전에 만든 <자, 이제 댄스타임>(2014)의 출연자들과도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는다. 며칠 전에는 한 분이 전화 와서 “우리 영화도 OTT에 올리면 어때요?”라고 하더라. 그것 참 좋은 생각이라고 답했다. (웃음)
<케이 너머>를 연출하는 감독으로서 가장 잘 해내고 싶었던 것은 뭐였나.
조세영_ 입양인이 지지하는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분들이 삶의 일부를 조금씩 내어줬고, 나는 그것을 엮었다. 영화 작업이 본래 그렇듯, 작품이 나아갈 길은 어느 순간 명확해지기 마련이다. <케이 넘버>는 개인의 운명이나 극적인 서사와는 다른 길을 택했고, 이는 편집을 거듭하며 더욱 선명해졌다. 출산과 비슷하다. 일단 아이를 낳고 나면, 그 아이는 자기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남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영화도 저만의 생명력을 발휘해 관객과 만나야 한다. <케이 넘버>가 세상에 나오기 위해서는 입양인들의 지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물론 입양인의 시선에만 맞춰 작품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고, 해야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 했다. 나로서는 영화가 안고 있는 여러 현실적인 위험을 고려해야 했다. 예컨대 영화 속에서 비판적으로 그려질 수 있는 입양기관 같은 곳에서 이 작품을 문제 삼아 공격하거나, 심지어 법적 다툼을 벌일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기댈 곳 없이 혼자 맞서야 한다면 그 과정은 상상 이상으로 고통스러울 거다. 결국 나와 함께 목소리를 내줄 사람은 해당 문제의 당사자인 입양인들이다. 그들이 이 영화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바랐다.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지금도 ‘소송이 걸리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면 함께해줄 건가?
미오카 밀러_ 물론이지. 동시에 입양 경험은 모두에게 개인적인 것임을 강조하고 싶다. 최근 입양인 페이스북 그룹에 내 이야기를 전하며 <케이 넘버>에 관한 기사도 공유했다. 한 입양인이 “목소리조차 없는 고아들은 어떻게 하냐”고 댓글을 달았다. 입양인이 현재 삶을 누리는 배경은 입양된 덕분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글에서 분노와 혼란이 느껴졌고, 고민 끝에 “기회가 닿는다면 영화 전체를 봐주시길 바란다”고 답했다. 짧은 클립이 아니라 전체를 보고 이해해 줬으면 했다. 다행히 그분이 내 코멘트에 ‘좋아요’를 표시하면서 큰 갈등 없이 대화를 마무리했다. 나는 내 경험을 가지고 다른 입양인과 싸우고 싶지는 않다. 경험은 개인적인 것이고 입양인이 모두 동일한 경험을 하는 것도 아니다. 좋은 가정에서 사랑을 듬뿍 받은 입양인도 존재한다.
단지 해외 입양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것을 넘어, 영화는 국가와 개인의 관계를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 또한 편집 과정에서 정리된 방향인가?
조세영_ 요즘엔 현장에 안 나가다 보니 무식해지고 있는 느낌이다. 내가 세상사에 큰 관심이 없어서 대개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거든. 근데 작업하다 보면 뭐든 배우게 된다. 이경은 박사 덕분에 시민권 문제를 국가와 개인 간의 계약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입양 부모나 입양기관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국가 혹은 국가와 개인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라는 관점이었다. 김유경 대표에게 서류를 어떻게 추적해야 하는지 배웠고, 배냇의 나이 지긋한 활동가에게는 한문 기록이나 옛날 서류를 읽는 방법을 배웠다. 또한 뿌리의집 김도현 목사는 국가 간의 비공식적 협약, 말하자면 정치적 거래 속에서 아이들이 상품처럼 다뤄졌다는 사실을 일러주었다. 하나씩 알아가는 과정에서 내게 가장 끔찍하게 다가온 것은 사실 수령국이다. 하지만 수령국에 접촉하기가 쉽지 않은 데다 예산도 부족하다 보니 그 부분은 접어두어야 했다. 돌이켜보면 뭔가 정해진 계획대로 움직였던 시간은 거의 없는 듯하다. 어떤 과제가 등장할지 예상할 수 없었고, 촬영하다 보니 배우게 됐고, 계속 리서치를 하면서 몰랐던 부분을 채워 갔다. 그러다 자연스레 마무리할 시점에 접어들었다. 이건 다른 작업을 할 때도 마찬가지인데, 이야기를 계속 듣다 보면 어느 순간 인물이든 그가 속한 판이든 다들 비슷한 말을 반복한다고 느낄 때가 온다. 그때가 촬영을 멈출 시점이다.
촬영을 마무리한 시점부터는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나. 촬영 분량이 상당했을 텐데 편집감독과 어떻게 손발을 맞췄는지도 궁금하다.
조세영_ 그간 보고 들은 이야기가 워낙 많기에 버리는 것이 일이었다. 무엇을 넣고 또 덜어낼지 선택해야 하니까. 초반에는 조연출과 3개월 정도 함께 작업했고, 나머지 3개월은 혼자 편집했다. 근데 나는 이미 아는 내용이다 보니 관객이 무엇을 모를지 가늠하기 어렵더라. 이 정도면 알 것 같기도 하고 아닐 수도 있고. 그때 편집감독이 합류했다. 러닝타임으로 치면 3시간짜리 편집본도 있고 2시간 반짜리도 있었다. 편집감독이 “까도 까도 계속 새로운 게 나오는 영화”라고 하더라. (웃음) 나는 당시 버전이 복잡한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려웠기에 최대한 관객의 이해를 돕는 방향으로 편집해 달라고 제안했다. 사실 인물이 많다 보니 편집본이 10편도 넘었다. 나로서는 아쉬운 장면이 많았지만, 인물 구성에 따라 영화의 인상과 주제가 달라지기에 어려운 선택을 거듭해야 했다.


미오카 씨 감상을 듣고 싶다. 관객으로서 본 <케이 넘버>는 어땠나?
미오카 밀러_ 맨 처음 영어 자막 없이 영화를 봤는데도 감정적으로 큰 울림이 있었다. 감독님이 훌륭한 분이라는 걸 다시 깨닫는 시간이었고, 이런 기회가 나에게 주어졌다는 것 자체가 큰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영화에는 내가 몰랐던 정보도 꽤 들어 있었다. <케이 넘버>는 개인의 이야기를 넘어서, 해외 입양이 국가 차원의 문제라는 걸 보여줬다. 덕분에 이 문제가 한국전쟁 이후 수십 년 동안 이어져 왔으며,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입양기관은 여전히 입양인의 요구를 거부하고 무시한다. 우리는 그저 나의 뿌리와 가족, 문화에 대해 알고 싶을 뿐인데 그걸 막고, 서류 제공에도 협조하지 않는다. 영화를 통해 이러한 현실을 지켜보면서 다시금 마음이 아팠다. 동시에 감사함을 되새기기도 했다. 이 다큐멘터리를 계기로 입양인뿐만 아니라, 한국인들 또한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큰 충격이 뒤따르겠지만 말이다.
영화 후반부는 의외로 희망보다 절망에 기운다. 소송 중이던 아담 크랩서는 회의감과 울분에 휩싸인 채 한국에 더는 기대할 것이 없다고 말하고, 간담회에 참석한 외교부 동포청 공무원은 맥락과 분위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 헛소리를 한다. 이러한 흐름은 “한국인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묻는 해외 입양인의 태도와 닮았다. 무지와 무관심을 가장 큰 벽으로 지적한 이유는 무엇인가.
조세영_ 초중반까지 내가 던졌던 질문의 초점이 잘못되었다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다. 본래 내가 떠올렸던 질문은 ‘우리는 해외입양인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였다. 배냇을 주목했던 이유고, 그곳에서 활동하는 평범한 여성들의 대응과 노력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뭔가를 놓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곰곰이 되짚어 보니 입양인들이 건넨 질문 앞에서 당황했던 순간이 떠오르더라. “보통 한국인들은 우리가 한국으로 돌아오는 걸 어떻게 생각해요?”라는 물음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질문 자체가 생소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으로 돌아오는 입양인이 많다는 사실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보통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이 문제를 고민하기는커녕 해외입양인의 존재도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작업 중반부터는 질문을 바꾸었다. ‘우리는 이 사안에 관해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로. 그러고 나니 방향이 좀 더 분명해졌다. 사실 미오카에게 편집본을 처음 보여줄 때 많이 걱정했다. 미오카는 작품 취지를 누구보다 잘 이해했지만, 혹시라도 기대와 달라서 실망하면 어쩌나 싶더라. 출연자는 아무래도 영화보다 자신이 출연한 장면에 집중할 수밖에 없기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기도 한다. 하지만 미오카는 처음부터 큰 그림을 봐주는 사람이었다. 역시 사업을 하는 분이라 그런가. (웃음) 넓은 시야로 나무가 아닌 숲을 보더라.
미오카 밀러_ 운 좋게 다큐멘터리의 메인 캐릭터가 되었지만, 이 영화는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입양인 커뮤니티 전체를 위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내 기준에서는 입양인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묘사했다고 보고, 많은 입양인이 공감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체계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입양인들이 잘 모르는 한국 역사도 담겨 있어서 좋았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고 지속되는지를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건 단지 정부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한국의 가부장제나 유교 문화의 영향을 접하면서 한국 사회 전반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됐다.
앞으로 상영 계획은 어떻게 되나. 해외 배급도 적극적으로 시도할 예정인지?
조세영_ 해외 배급의 경우, 이미 영화제 출품을 마치고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미국 배급이 어려워서 아쉽다. 현지 프로듀서가 없어선지 여러모로 진행이 쉽지 않다. 해외 방송용 버전도 따로 제작하고 있다. 방송과 영화제 측의 요구가 다르기에 공개 시기와 포맷을 조율해야 한다. 영화가 젊은 세대에게 많이 닿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번 시사회에서 한 엄마가 두 딸을 데리고 왔다. 그 중 9살쯤 된 여자아이가 나에게 말을 걸고 싶어 했다. 상영 종료 후 어머니가 잘 봤다며 인사하러 오셨는데, 그 뒤를 따라온 아이가 작은 목소리로 “미오카 언니가 엄마를 찾았으면 좋겠어요”라고 하더라. 그러고는 저만치 걸어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엄마 찾기를 바란다고 미오카 언니에게 꼭 전해주세요”라고 했다. 9살 아이도 같은 마음을 느꼈구나 싶어 인상적인 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