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한 번
<두 사람>
차한비 / Choice / 2025-02-12

봄이 오는지 새싹이 파릇파릇하게 돋아난 잔디밭에 나이 지긋한 아시안 여성 둘이 손을 잡고 서 있다. 그들 뒤로는 나치에 희생당한 동성애자 추모비가 보인다. 우연히 들른 파독 간호사 사진전에서 반박지은 감독은 김인선과 이수현의 사진을 보자마자 깊이 매료됐다. 생김은 달라도 차림은 비슷하고, 카메라 렌즈를 응시하는 눈빛이며 미소를 머금은 입매는 볼수록 닮은 인물들. 추모비만큼 굳건한 자세를 유지하는 이들은 연인이 틀림없었다. 노년에 접어든 한국인 레즈비언 커플은 너무 낯설어서 신기하기까지 한 존재였고, 감독은 두 사람의 정체를 수소문했다. 연락이 닿고 보니 베를린에서 유학 중이던 감독과 마침 사는 곳이 가까웠다. 인선과 수현은 아파트 문을 열어줬고, 감독은 두 사람의 식탁에 앉아 대화를 청했다. 

영화 속 식탁에는 때마다 새로운 것이 올라온다. 갓 지은 콩나물밥을 먹는 사이, 카메라는 연인의 취향과 규칙으로 가득한 집안 풍경을 둘러본다. 카푸치노와 빛바랜 사진이 나란히 놓이는 날에는 인선과 수현이 각각 독일로 이주한 과정과 이유, 파독 간호사로 일했던 경험, 1985년의 눈부신 첫 만남까지 이야기가 차근차근 펼쳐진다. 한편, 두 사람이 교회 신도들과 납작 복숭아를 나눠 먹는 장면은 그들에게 가족과 신앙이 어떤 의미이며 얼마큼의 무게를 지니는지 짐작하게 한다. 식탁에서 시작했던 대화는 거실로, 집안 곳곳으로, 그리고 점차 밖으로 뻗어 나간다. 인선과 수현은 고장 난 분무기를 고치고 전구를 갈아 끼우며 하루하루를 손질하는가 하면, 학생을 가르치거나 집회에 참석해 제 의견을 외치기도 한다. 

<두 사람>
<두 사람>

영화는 그들 삶의 갈등과 모순을 적극적으로 파헤치는 대신, 그들이 함께 꾸려 가는 일상을 과장 없이 관찰한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인물들과 동행하는 태도는 공간을 만들어 낸다. 인선과 수현의 표정을 살피고 방금 그들이 던진 농담의 뜻을 헤아려 볼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넉넉하면서도 성실하게 가 닿는 시선 덕분에 영화에서 인선과 수현은 그저 신기하고 유별난 대상이 아니라, 아시안, 외국인, 여성, 이주민, 노동자, 성소수자, 노인 등 다양한 정체성을 포함하는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지나친 개입 없이 조심스러운 태도를 견지하는 와중에도 감독과 인물은 점차 유대를 형성해 간다. 감독은 카메라 너머에서 인선의 컨디션을 걱정하며 정기 검진을 챙기고, 교회 건물의 나선형 계단을 느릿느릿 오르는 수현을 기다리기도 한다. 화면 안으로 들어오지 않되, 그들이 눈물을 훔치는 순간에 말없이 옆을 지키거나 때로는 못다 한 말은 없는지 청해 들으며 같은 공간에 머무른다.

달라붙지 않으면서도 교감할 수 있는 적정한 거리, 이는 인선과 수현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둘 사이는 개인의 영역을 존중하려는 노력으로 완성된다. 성향도 욕구도 서로 다른 이들은 종종 따로 시간을 보낸다. 인선이 책을 쓰는 동안 수현은 스톤월 항쟁 50주년 시가행진에 참석하고, 수현이 교회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는 시간에 인선은 집에서 쉬는 쪽을 택한다. 두 사람은 오랜 시간에 걸쳐 함께하는 법을 터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꾸 잔소리한다고 툴툴대면서, 그리움을 노래로 달래면서 상대와 보폭을 맞춰 걸으려 애쓴다. 어느덧 노화와 질병 등 생애 주기에 따른 위기도 무시할 수 없지만, 그들은 “행복해질 권리”를 스스로 누리고자 하며 서로 몸과 마음을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 

<두 사람>
<두 사람>

“사는 건 예행연습이 없으니까. 정말 사랑하고 함께 생활하고 싶은 사람과 살고. 그게 중요한 거 아니겠어요?” <두 사람>의 영문 제목은 ‘Life unrehearsed’다. 리허설 없는 오직 한 번뿐인 삶, 인선과 수현은 서로를 발견했고 제 마음을 외면하지 않았다. 영화는 두 사람이 동반자로서 더불어 지낸 40년이라는 세월을 마냥 찬미하지도, 인선과 수현을 무적의 존재로 묘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그들을 통해 삶이란 시시때때로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배우고, 그 속에서 유머와 애정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지 넌지시 일러준다. 물기 어린 순간보다 햇볕 드는 식탁에서 마주 앉는 습관을 아껴 왔기에, 두 사람은 여전히 삶을 활기차게 대한다. 영화는 그렇듯 겉보기엔 반복적이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역동성을 지닌 둘의 하루하루를 뒤쫓으며, 누구와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 조용히 묻는다. 


두 사람 Life Unrehearsed 감독 반박지은 출연 김인선, 이수현 제작 반박지은필름 배급 반박지은필름, 시네마 달 제작연도 2024년 상영시간 80분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개봉 2025년 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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