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보고 있으면 수시로 너털웃음을 흘리게 되는 다큐멘터리다. ‘두 사람’, 김인선과 이수현은 어린 나이에 파독 간호사가 되어 타지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들은 이윽고 서로를 만나 ‘사랑하는 당신’과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조심스레 손을 잡은 레즈비언 커플에게 세상은 때로 상처를 냈고, 어느덧 나이 들고 병든 몸은 달려 나가는 마음을 자꾸만 멈춰 세운다. 얼마든지 비장해질 수 있건만, 두 사람은 환하게 웃기만 한다. 매일 아침 함께 밥을 지어 먹을 수 있어서, 당신의 등허리에 로션을 발라줄 수 있어서, 고요한 밤에 손을 맞잡고 춤출 수 있어서 마냥 행복하단다. 이들의 웃음은 전염성이 세서, 카메라는 물론이고 그 너머의 관객까지 절로 미소 짓게 만든다. 귀여운 투정과 놓치기 십상인 농담은 예상치 못한 웃음을 부른다. 웃음은 두 사람의, 그리고 이 영화의 가장 큰 무기다. 그저 둘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자꾸만 듣고 싶어서 카메라를 들었다는 반박지은 감독은 일상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다양한 주제를 길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여성, 퀴어, 이민자, 돌봄의 고민을 엮어내며 가족 같은 시간을 쌓은 세 사람, 그 이야기를 들어봤다.
<두 사람>을 처음 상영했던 2022년에 한국에 돌아오려 한다고 했다. 그런데 여전히 독일에 거주 중이다.
2023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영화관에서 일하다가 일종의 시민단체에 취업을 해버렸다. 아마 한동안은 독일에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한국에 오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독일에 있으면 계속 타자화된 사람, 안 보이는 사람으로 사는 느낌이다. 한국에서 같이 활동하던 친구들이 그립기도 하고.
베를린예술대학에 다녔다. 졸업 후엔 어떤 일들을 한 건가.
베를린에 요크 키노(Yorck Kino)라는 체인 영화관이 있다. 여름이면 야외극장을 여는데, 300kg짜리 스크린을 세운다. 그걸 설치했다가 내리는 일을 했다. 지금은 이민자의 건강을 위한 단체에서 일한다. 이민자 중에서도 동양인을 대상으로 한다.
인선의 활동과 연결되는 듯하다.
인선 님 촬영하다가 단체 대표님을 알게 됐다. 그분이 호스피스에서도 일을 했거든. 그래서 영상 작업을 몇 번 했고 이제는 취업했다. 단체에서는 1세대 이민자, 그러니까 독일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 독일로 이주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 나 역시 1세대다. 그곳에서는 임파워먼트 워크숍을 열고, 그걸 운영할 강사 양성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이민자와 이민자가 아닌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행사도 운영한다. 올해부터는 상담이나 인종차별 관련 사건을 수집하는 활동을 하려고 한다.
그간 이산하 감독의 <손님 노동자> 프로듀서로도 합류했다. 아직 작업 중이라고 알고 있는데.
엑셀을 잘 다루니까 회계 같은 걸 잘 정리할 수 있겠다 싶어 시작했다. 생각이 없었지. (웃음) 그 외에도 트리트먼트 디벨롭이나 연출적인 부분에서 감독님을 도울 수 있는 역할을 같이 하고 있다. 다만 직장 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 많이 몰두하지 못해 좀 아쉽다. 나 말고도 독일인 피디님이 한 분 더 있다.
어떤 인연으로 함께하게 됐나.
베를린에 ‘미투아시안스’라는 성폭력 피해자 지원 단체가 있다. 인선 님 따라다니면서 거길 촬영하게 됐고, 거기서 이산하 감독님을 만났다. 파독 간호사를 찍고 있다고 하더라. 나 역시 파독 간호사를 찍고 있는 거니까 그게 인연이 됐다.
국내 영화제에서 처음 공개한 이후 해외에서도 <두 사람>을 상영할 일이 많았다. 다양한 관객을 만나며 여러 경험을 했겠다.
첫 해외 상영이 런던퀴어영화제였다. 한국에서는 2~30대 관객을 많이 만났는데, 그곳에서는 머리가 하얀 노인 분들도 많이 봤다. 그게 흥미롭고 좋더라. 한국에서도 인선 님, 수현 님과 비슷한 세대의 관객이 영화를 보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거든.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아시아영화제에 참석한 일도 기억에 남는다. 두 분 모시고 기차로 6시간을 달려서 갔는데, 타일랜드 출신 프로그래머가 두 분 말씀을 듣고 감동했는지 눈물을 보였다. 물론 퀴어영화제도 중요했지만 그렇게 동양인끼리 만나는 경험 역시 되게 중요하다고 느꼈다. 외국에 사는 이민자이기 때문에 할 수 있던 경험, 당사자로서 느낀 바가 있으니 더 와 닿았을 거다.


2022년 8월에 두 분이 결혼했다는 소식으로 영화가 마무리된다. 막연히 늦었다고만 생각했는데, 독일에서도 2017년이 되어서야 동성혼이 법제화됐더라. 제도적 변화를 체감할 일이 있었나.
그전에 이미 생활동반자법이 있었다. 마음만 먹었다면 두 분도 법적으로 관계 정립을 할 수 있었을 거다. 어쨌든 결혼의 계기는 인선 님의 병일 거라고 짐작한다. 최근에도 결혼에 관해 여쭤봤는데, 병원 갈 때 가족이라고 얘기할 수 있어 좋다는 얘기를 가장 많이 하시더라. 서로가 보호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게 안심이 되는 듯하다. 서류 한 장이 진짜 큰 역할을 한다. 2017년에 시청에 걸린 무지개 깃발을 본 기억이 난다. 독일도 이렇게 변화하는구나 싶었다.
결혼은 수현이 적극적으로 제안했다고. 세세한 절차나 서류들을 차곡차곡 챙기는 모습이 그려졌다.
두 분 캐릭터가 확실히 다르지. (웃음) 아무래도 행정 절차가 좀 복잡하게 느껴질 텐데, 당시 독일에서 두 분을 인터뷰했던 분들이 그 업무를 도와주셨다.
두 분한테 본인을 ‘칼로’라고 소개했다는 말로 영화가 시작한다. 무슨 뜻인가.
한국에서 쓰던 활동명이다. 2007년에 차별금지법 제정이 좌절되면서 활동을 시작했다. 프리다 칼로의 사진집을 보다가 너무 좋아서 이름을 따 왔다. 영화에서 별로 밝히고 싶지는 않았는데, 두 분이 나를 칼로라고 부르셔서 어쩔 수 없었다.
서두에서 전시회 사진을 보고 두 사람을 찾아갔다고 언급한 이후에는 감독의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는다. 영화에서 감독의 존재감을 굳이 드러내지 않은 이유가 있나.
영화에 절대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나한테 주인공은 두 분이니까 그들의 이야기로만 영화를 꾸려나가고 싶었다. 그런데 너무 밀착 취재를 하는 바람에 내 목소리가 계속 들어갔지. (웃음) 그것까지 다 빼버리면 이야기가 진행이 안 되더라. 진짜 필요한 부분에 한해서 최소한으로만 넣었다. 다만 관객이 화자가 누군지는 알아야 할 것 같아 초반에 내레이션으로 나를 소개했다. 두 분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 질문을 던지는 역할로만 나를 남겨 놨다.
덕분에 카메라 너머로 말을 건네는 몇몇 순간이 깊은 인상을 남긴다. 초반부에 한국행을 앞둔 인선에게 감독이 병원에 다녀오는 게 좋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잠시나마 셋이서 서로 염려하고 마음 쓰는 생활 공동체를 꾸린 느낌이 들더라.
그때만 해도 촬영 초반이라 별생각이 없었다. 그 건강 검진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없었던 거다. 그런데 나중에 편집할 때 보니 그때 이미 검진 이야기가 나왔더라. 당시에는 지금처럼 가까운 관계는 아니었는데, 돌아보니 서로 건강을 챙기고 염려하는 출발점이었던 것 같다. 다는 아니지만 인선 님의 캐릭터를 조금씩 알게 되면서 걱정하는 마음이 생겼다. 왠지 가야 할 것 같은데 안 간다고 하시니까, 나름대로 압박을 했다. (웃음) 그때 병원에 가셨다면 많은 게 달라졌겠지. 아마 한국에 오는 게 힘들 수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워낙 의지가 강한 분이라 결국 당시에는 안 가셨다.

두 분이 왜 손을 잡고 다니지 않느냐는 질문도 중요하다.
편집을 꽤 했을 때 다시 여쭤본 거다. 따로 날을 잡고 그간 못 물어봤던 것, 나한테 명확하지 않았던 것들을 물었다. “아픈 데 약 발라주고 등허리에 로션 발라주고 우리는 그게 섹스지.”라는 말도 그날 나왔다. 손을 잡는다는 것, 되짚어 생각해 보면 그게 나의 시작이었다. 두 분의 손잡은 사진을 보고 찾아간 거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프로덕션을 만드는 데 정신이 없어서 핵심을 잃고 촬영을 진행했다는 자각이 들더라. 다만 왜 손을 안 잡으시냐고 물었을 때 별생각은 없었다. 연차가 오래된 커플은 막 붙어 다니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수현 님이 눈에 띄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고 하시잖나. 그 답변이 되게 복합적으로 느껴졌다. 물론 사회의 시선이야 있겠지만 어쨌든 두 분은 독일에 산다. 두 분이 독일에서는 ‘너는 너고 나는 나’라는 말씀을 자주 하시기도 했거든. 그럼 사실 손을 잡고 다녀도 되는 건데 그러지 않았다. 다양한 이유가 섞여 있을 거라고 짐작한다.
둘의 인생에 고난이 많았을 테지만 영화는 그걸 굳이 드라마틱하게 다루지 않는다. 두 분의 화법도 비장함과는 거리가 먼 듯하고, 감독 역시 그런 지점을 강조하지 않는다.
두 분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은 게 많아서 그런 배경은 아무래도 후순위가 됐다. 그리고 두 분한테 확실히 의연한 측면이 있다. 인종 차별에 관해 어떤 사건들이 있었는지 궁금해서 물어보기도 했는데, 딱히 답해주지 않으셨다. 아마 살아내기 위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예민하게 받아들이면 한도 끝도 없을 텐데 의연한 삶의 태도를 유지하셨기 때문에 오랫동안 이겨내면서 사실 수 있었을 거다. 인선 님이 항상 당당하게 살면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본다.
그런 태도가 인생 이야기를 구구절절 풀어내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공감을 만든다. 저 인물을 닮고 싶어진다고 할까.
힘들었던 일도 웃으면서 얘기하실 때가 많다. 지나간 일에 대해 시점을 바꿔보는 거다.
물론 두 분의 성격 차이가 두드러지지만, 명랑함은 매우 큰 공통점이다. <두 사람>은 그러한 웃음과 밝음을 포착하고 싶어 하는 영화로 보인다.
가끔 농담을 던지시는데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다. 나만 알아듣는 거다. (웃음) 인선 님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 수현 님이 등에 약 발라주면서 다음 달부터 월급을 인상해 주기로 했다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있잖나. 나중에 번역가님이 그게 농담이었냐고 물어보시더라. 사실 첫 장편이라 찍으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두 분한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무식하게 다 찍으려고만 했다. 그러다 편집하며 많은 게 결정됐다. 관계가 쌓이면서 내 시야가 확장됐고, 뭐가 중심에 와야 하는지 많이 고민했다.
어떤 중심을 찾았나.
처음부터 사랑 이야기를 찍고 싶다는 건 확실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무엇인가에 관해 피디님, 편집 감독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 두 분이 같이 있을 때만이 아니라 떨어져 있을 때 드러나는 모습 또한 사랑이고, 아플 때 서로를 돌보는 시간도 사랑이더라. 또 이 사랑이 안에서만 머무는 게 아니라 밖으로 흘러 나가기도 한다. 다른 세대의 사람들을 만나고, 같은 아파트 주민을 돌보기도 하면서 말이다. 두 분을 통해 참 많이 배웠다.
개봉 준비하며 편집을 좀 더 손본 것 같던데?
몇 군데 추가했다. 인선 님 편지도 그중 하나다. 진짜 쓰고 싶었는데 이전 편집에서 빠졌었다. 안 되겠다 싶어서 넣을 구석을 찾아냈다.
과거의 편지가 현재 인선의 목소리로 낭독되는데 그 힘이 엄청나다.
두 가지 버전으로 읽으셨다. 하나는 굉장한 신파 톤이다. (웃음) 다른 하나는 좀 정적이고. 그 둘을 섞었다.


정보를 미리 알려주지 않고 관객이 인물과 자연스럽게 동행하도록 편집했다. 이들이 어딜 가는지,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대화로 유추하며 상황에 빠져들게 하는 방식이다.
장소가 바뀔 때마다 자막을 다는 방식으로도 편집해 봤다. 그런데 그러다 보면 흐름이 끊기더라. 두 분의 이야기 자체를 보여주면서 쭉 흘러갈 수 있게 만들고 싶었다. 자연스러운 흐름을 만든 건 김새봄 편집 감독님 덕분인데. 다른 설명을 붙이지 않은 것도 중간에 멈추지 않게 하고 싶어서다. 난 두 분이 정말 매력적인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클로즈업 샷도 많이 찍었다. 최대한 두 분을 아름답게 담고 싶었고, 관객도 나만큼 가까이에서 두 분을 느끼길 바랐다.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따라가면서 말이다.
자연스럽게 정보나 자료 대신 제스쳐나 대화에 집중하게 된다. 언급한 대로 인물의 매력과 두 사람의 관계가 먼저 눈에 들어오고.
정말 귀여우시지 않나. (웃음) 편집하면서 어떻게 두 분 관계를 잘 보여줄 수 있을지 많이 고민했다. 사소한 장면, 예를 들면 전구 가는 모습도 이번에 추가했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서로 투닥거리는 듯한 그런 장면이 캐릭터성을 많이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사다리에 올라가 전구를 가는 건 인선이다. 수현은 어려서부터 남자애들처럼 하고 다녔다는데, 영화에서는 요리하고 화초 가꾸는 모습이 많이 나온다. 다른 기사에서 보니 수현은 “기계 수리에 능하고 오토바이를 잘 타는 사람”이기도 했다고. 둘의 일상을 따라가며 일종의 고정관념이 비틀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점이 재밌다.
수현 님이 오토바이, 자전거, 자동차를 좋아했다는 이야기나, 동료들과 춤추러 가서 다가오는 남자들을 물리쳤다는 이야기도 해주셨다. 그러니까 우리가 부치 같다고 생각하는 모습. (웃음) 그런 부분이 빠지게 되어 아쉽지만, 그래서 수현 님의 돌보는 성격이 좀 더 강조될 수 있었다는 생각도 한다.
영화에 등장하진 않지만, 1970년대 레즈비언들이 모여들었던 명동 ‘샤넬다방’ 같은 공간을 오히려 감독이 소개해 주었다는 일화가 인상적이더라.
아마 두 분이랑 시기가 겹칠 텐데, 서울에 계시지 않았으니까 그런 공간을 모르시더라. 그래서 알려드렸고, 부치나 팸 같은 용어도 가르쳐드렸다.
‘바지씨’와 ‘치마씨’도 떠오른다.
그런 용어가 있냐면서 되게 즐거워하셨다. 수현 님은 그런 단어는 몰랐지만, 계속 여자를 만나며 사셨다. 본능적으로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최근에 들었는데, 같이 파독 간호사로 독일에 갔던 분 중에 한국으로 돌아간 친구가 있다고 하시더라. 오랫동안 단짝인 친구를 다시 만나서 지금은 같이 살고 있다고. 그러니까 주변에 나 같은 사람들이 없는 게 아니었다고.
두 분이 손잡고 찍은 사진을 보고도 누군가는 그냥 지나칠 수 있다. 무언가 알아보는 감각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걸 모녀 관계로 보신 분도 있다. 사람마다 인식이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싶어 충격을 받기도 했다. 나는 그 장소를 알고 있으니 의미가 좀 더 크게 다가온 것도 있다. 나치 박해를 받은 동성애자 추모비가 있는 곳이다.


사진가 야지마 츠카사의 작품이라고. 사진은 어떻게 찍게 된 건가.
원래 알고 지내던 작가인데, 어느 날 갑자기 사진을 찍자고 했단다. 일본 분인데 독일에 살다가 지금은 한국에 계신 거로 안다.
인선의 과거 사진 중에 기차 창문가에 앉아 있는 모습이 있다. 그런데 비슷한 구도로 찍은 현재의 장면이 영화에 삽입돼 있다. 일부러 찍은 건가.
아니다. 이번에 포스터 만들면서 그 사진을 다시 봤는데 구도가 똑같더라. 너무 신기했다. 인선 님 특유의 포즈와 제스쳐가 있어서 그런가보다.
인선의 ‘이종문화 간의 호스피스’ 활동이나, 서로의 삶을 살뜰히 챙기는 둘의 모습을 통해 자연스럽게 돌봄에 관한 고민이 확장된다.
영화 찍기 전에는 돌봄에 대해 크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크게 아파본 적도 없고, 누군가를 돌봐야 했던 것도 아니라서. 그런데 두 분 만나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게 확장됐다. 두 분이 서로를 돌보는 걸 보며 매번 놀란다. 어떻게 저게 가능한가 싶고. 얼마 전에는 수현 님이 이런 말씀도 하셨다. 어린 나이에 타지 생활을 하느라, 어머니가 한국에서 돌아가신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고. 어머니를 돌보지 못했던 미안함 같은 게 남아있으신 듯하다. 지금은 인선 님을 어머니라고 생각하신다고. 그러면 이 관계는 뭘까? 나는 두 분을 다 이해할 수 없을 거다.
내 고정된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 관계라는 점이 좋은 것 같다. 생각을 계속 열어준다고 할까.
정말 그렇다. 또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된다. 참 대단하다는 생각도 자꾸 들고.
가족이란 게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된다.
나한테도 가끔 가족이나 다름없다고 말씀하신다. 괜히 도움받는 걸 미안해하시기도 하지만, 그래도 가서 TV라도 고쳐드리고 일상을 교류하며 살고 있다. 아, 행정 처리를 하는 게 돌봄이라고 말씀하신 적도 있다. (웃음)
베를린에서 처음 두 분을 만나고 한인교회에도 나갔다고. 한인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이 있기도 한데, 어떤 경험이었나.
나도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개인의 삶에 간섭할 것 같고, 되게 좁은 사회일 것 같고. 그런데 막상 가보니 다르더라. 대부분 파독 간호사분들이셔서 역사의 산증인을 만나는 기분이었다.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목소리 내는 분들도 많으시고. 사실 좀 과몰입했다. 교회 다니면서 세례를 받았거든. (웃음)

2019년에 촬영 시작하면서 저렴한 보급형 카메라를 샀다고. 독일 촬영은 거의 혼자 진행했는데, 어떤 점이 어려웠나.
세월이 지나서 다 기억나진 않지만 어려운 점은 정말 많았다. (웃음) 두 분이 10층에 사셔서 집에 빛이 잘 들어오는데, 얼굴에 포커스를 맞춰 찍으니 화이트가 다 날아가 버리더라. 색 보정할 때 다시 살아나지도 않았다. 더 좋은 카메라나 렌즈를 썼다면, 스태프가 더 있었다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은 항상 남지만, 그냥 내 상황에 맞게 찍었다고 생각한다.
촬영자와 대상 간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드러내는 영화는 아니지만, 땀방울까지 포착하는 클로즈업이 인물 가까이에 있고 싶은 마음을 보여준다.
가까이서 찍는 것과 멀리서 찍는 것 중에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난 가까이서 찍는 걸 선택하는 경우가 많을 거다. 정말로 가까이에서, 아름답게 찍고 싶었다.
한편 두 분은 노년이고, 무릎도 좋지 않아서 이동 속도가 꽤 느리다. 촬영하면서 차츰 영화에 맞는 속도를 찾아갔으리라고 짐작한다.
두 분을 찍기 전에 할아버지를 찍은 적이 있다.
<대교집>(2018)의 주인공이 감독의 할아버지인가?
맞다. 노인을 찍는 것의 장점이 그 속도인 것 같기도 하다. 막 뛰어서 따라잡아야 하는 상황은 없으니까. 두 분 속도에 맞춰 같이 느리게 걸으려 했고, 카메라 눈높이를 낮춰서 두 분을 작지 않고 커 보이는 사람들로 담으려 했다.
김다형 피디가 독일 촬영에 동행하기도 했나.
주로 한국에 계셨지만, 독일에서 같이 촬영한 적도 있다. 그즈음 인선 님이 병원에 입원하셔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싶어 둘 다 난감하고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난다. 이걸 찍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로 대화도 많이 나눴다. 카메라를 쥐고 있다는 게 권력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결국 촬영은 하지 않고 병원 갈 때마다 동행했다. 그렇게 따라다니면서 치료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영화에는 입원 초기에 눈 딱 감고 한 번 찍은 장면이 들어갔다.
인선이 서울 퀴어문화축제에 참석한 2019년 영상에 별 모양 응원봉이 잠깐 등장한다. 그걸 보고 있으니 다양한 퀴어 깃발이 휘날리는 오늘날의 광장이 떠오르더라.
2010년대 초반에 퀴어퍼레이드를 홍대에서 했던 적이 있다. 그 당시만 해도 길거리에서 퀴어 깃발을 보는 게 지금보다 더 어려웠다. 그때 인근 상가와 협업해서 퀴어 깃발을 꽂았던 게 기억난다. 그때 느꼈던 감동 같은 게 있다. 그런데 지금 뉴스를 보면 항상 무지개 깃발이 보인다. 독일에는 슈퍼에만 가도 무지개 깃발이 붙어있다. 이제는 당연하게 느껴지는 거다. 그러고 보니 많은 게 달라졌구나 싶네.


담담하게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듯한 음악이 인상적이다. 이지헌 음악 감독은 이번에 영화 작업을 처음 했다고.
음악 감독님도 미투 아시안스에서 만났다. 실험적인 현대 음악을 하는 분이다. 같이 해볼 만하다는 생각에 제안했고 흔쾌히 수락해 주셨다. 스태프를 꾸리면서 처음 해보는 사람끼리 서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첫 장편이고, 다형 피디님도 장편 다큐멘터리는 처음이었다. 편집 감독님은 두 번째 작업이었다.
네마프(서울국제대안영상예술페스티벌)에서 상영했던 <온 더 바운더리>(2019)라는 단편 실험영화에도 인선이 등장한다.
경계에 서 있는 사람들에 관한 작품이다. 20대부터 70대까지, 정체성이나 국가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 바운더리에 서 있는지, 그걸 어떻게 건너가는지 표현하려고 했다.
홈페이지에 그간의 작업과 활동을 올려두었다. ‘퀴어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사회적, 시스템적으로 거스르기 힘든 견고한 사회의 관념에 질문을 던지기 위해’ 작업하고 있다는 소개도 써두었고.
관심 가는 건 그때그때 다르지만, 그게 사람이든 사물이든 사회에서 정해 놓은 규범 밖으로 나가는 존재에 시선이 간다. 홈페이지에 아름다운 것을 기록한다는 말도 써두었는데, 내가 미적 감각은 또 없기 때문에 그건 하고 싶은 방향에 대한 언급이라고 생각해 주면 좋겠다. (웃음)
애니메이션이나 실험 영상을 작업하기도 했다. 다양한 형식에 대한 관심은 여전한가.
그때그때 영감을 받는 대로 작업했다. 처음부터 영화를 하려고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영상을 하고 싶기는 했다. 보는 사람이 시간을 써야만 한다는 게 재밌다. 다큐멘터리 작업은 정말 힘들지만 그만의 매력이 있다. 그렇게까지 무언가에 몰입하는 경험은 살면서 쉽게 할 수 없으니까.
다음 작업도 계획하고 있나.
지금은 없다. 다만 두 분의 모습을 더 기록해 두고 싶어졌다. 나이가 더 드셨고, 변화된 모습도 있고.
새해 계획은.
턱걸이 10개. 지금은 5개 정도 한다. 재작년에 처음 시작했을 때는 1개 정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