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불면, 하늘 보고
<힘을 낼 시간> 현우석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5-01-07

이십 대 중반에 은퇴했다. 아이돌 데뷔하고 계약 기간만큼 활동했으니 완전히 실패했다고 할 수는 없는데, 있으나마나 한 인지도와 통장 잔고를 보면 성공했다고 할 수도 없다. 애매함은 결점이라서 수민(최성은), 사랑(하서윤), 그리고 태희(현우석)는 조용히 떠난다. 뒤늦은 제주도 수학여행에서 태희는 분위기메이커를 자처한다. 등장할 때부터 인물 중 가장 하이톤을 맡는다.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침잠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눈치를 살피며 분위기를 띄우고, 해사한 미소를 앞세워 영화 전체에 실없는 농담이 끼어들 만한 여지를 마련한다. 동시에 태희는 아주 긴 그림자를 지닌 인물이기도 하다. 배우 현우석이 빚은 태희는 일찌감치 눈에 띄었다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영화에 웃음과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인 줄 알았는데, 웃음 뒤에 몰래 숨겨 놓은 아픔을 전달한다. 그 괴로움은 눈물이나 무표정처럼 웃음에 대한 극단적 대비가 아니라, 또 다른 웃음으로 묘사된다. 타인을 즐겁게 하려는 웃음, 얼어붙은 상황을 무마하려는 웃음, 나를 좀 봐달라는 웃음. 그러니까 현우석은 태희를 웃음의 프로페셔널로 만든다. 긴 시간 공들여 완성한 웃음이 스크린을 채울 때, 태희는 제 사연을 구구절절 읊지 않아도 그간의 기쁨과 슬픔 모두 껴안고 달리는 사람이 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좋아하면 울리는>(2019)으로 데뷔한 이래, 현우석은 “운이 좋았다”고 자평할 만큼 쉼 없이 신작을 만났다. <아이를 위한 아이>(이승환, 2022)로 금세 장편영화 주연을 맡았고, <빅슬립>(김태훈, 2023) <돌핀>(배두리, 2024) <힘을 낼 시간>(남궁선, 2024)을 차례대로 개봉했다. 그 속에서 그는 인간관계의 배신감을 극복하고 도전을 거듭할 만큼 목표지향적인 청년이 되는가 하면,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허둥대는 어리숙한 소년이기도 했다. 그중 태희는 미래의 시간을 먼저 경험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현우석에게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무력감과 상실감을 아직 피부로는 느끼지 못했던 시기에 태희를 연기하며 잠을 설쳤는데, 촬영 후 그와 엇비슷한 터널을 통과하며 깨닫게 됐다. 태희가 그때 했던 말이 이런 뜻이었구나. 영화 속 대사처럼 “내가 여기에 있다”라고 말하려면 정말 용기 내야 하는구나. 어두컴컴한 터널을 힘내서 걸어 나온 지금, 현우석은 어떤 빛을 바라볼지 궁금했다. 웃고 있다면 어떤 웃음을 지을지도.

 

 

2024년 마지막 날은 어떻게 보냈나.

독감으로 고생하다가 갑자기 친구들이랑 등산을 가게 됐다. 새벽에 산에 올라가서 일출을 보려고. 나름 무장하고 갔는데도 춥더라. 어쩌다 보니 정상적인 코스를 벗어나서 좀 오래 돌아갔거든. 4시간 넘게 산을 탔다. 지나가는 등산객이 한 명도 없었는데, 정상쯤 다다라서 둘러보니 다들 옆쪽에 있는 편안한 길로 줄지어서 올라오더라. (웃음) 그날부터 감기 기운이 다시 오르다가 이제야 회복했다.

 

등산은 어디로? 

북한산. 밤이라 주변이 온통 캄캄했다. 친구들이랑 무섭네 마네 하며 엄청나게 호들갑 떨면서 올라갔다. 정작 일출은 제대로 못 봤다. 날이 살짝 흐렸거든. 누구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하고, 또 누구는 “아무리 봐도 저게 다 뜬 것 같다” 하고. 결국 중간에 타협해서 내려왔다. 바다 쪽으로 간 사람들은 일출다운 일출을 본 것 같던데. 아무튼 그렇게 몸을 쓴 덕분에 새해 첫날은 조용히 맞이했다.

 

새해를 맞이하는 기분이 남다를 듯했다. 지난 3년간 공개한 출연작만 대여섯 편이 넘는다. 호흡이 짧은 작품도, 비중이 적은 역할도 아니었다. 특히 작년에는 촬영과 개봉 일정을 동시에 소화하느라 분주했다.

운이 좋았다. 2024년을 꽉 채워서 단단하게 보냈던 것 같다. 그래도 일만 했다는 느낌은 아니다. 어쨌거나 영화 촬영은 두세 달 내에 마무리되지 않나. 바쁘다고 해도 중간중간 여유가 있더라. 그 여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가 작년의 화두였다. 그러면서 여행도 많이 다니고, 이것저것 새로운 걸 해보려고 했다. 또 감사하게도 신작으로 여러 영화제에 초청받았다. 덕분에 빈틈이 꽤 많았을 시간이 알차게 채워졌다. 새해는 어떠려나. 기대와 호기심보다는 사실 걱정이 앞선다. 작년만큼 올해도 열심히 살 수 있을까 싶고. 그래도 요즘 기운이 좋다. 걱정을 털어 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좋은 에너지와 결과물들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도록 끌어당겨 주고 있다.

<힘을 낼 시간> 촬영 현장
<힘을 낼 시간> 촬영 현장

연기하고 싶다고 해서 모든 배우가 연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운 좋게 기회를 얻었다기엔 스스로 많이 부딪쳤겠구나 싶은데. 본래 일 욕심이 많은가.

욕심은 많은 편이다. 내가 노력했다는 사실을 짚어주니 마음이 따뜻해지는데, 사실 이만큼 일한 데엔 운이 가장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한다. 안 그래도 연말에 친구들과 이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어느 업계든 그렇겠지만 이쪽 일이 참 어려운 것 같다고. 주변만 봐도 실력 있는 사람이 수두룩한데, 그중 몇몇만 기회를 얻거든. 물론 뭔가를 고민하고 인내하고 부딪쳐서 만들어 낸 결과지만, 그 또한 운이 따랐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누군가가 나를 바라봐줬기에 할 수 있던 일이고, 덕분에 작품과 경력을 쌓을 수 있었다. 운이 좋았다고, 감사하다고 말해야 하는 상황 같다. 어떤 말이든 조심스럽긴 한데,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드물지 않나. 내가 남들보다 열심히 했기에 여기까지 왔다고 하면, 왠지 타인의 노력을 깎아내리는 것만 같다. 나는 나대로 노력했고, 누군가는 나보다 더 열심히 했을 거다. 작년에는 그저 내게 조금의 운이 따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한두 번 생각해서 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같은 일을 하는 또래 친구들과 대화를 자주 하는 편인가?

친하게 어울리는 무리가 있다. 그중에 모델을 하고 싶어 하는데, 아직은 길이 잘 안 풀리는 친구들이 있다. 내가 모델학과에 진학하기도 했고 모델로 일을 먼저 시작했다 보니, 진로에 관한 이야기를 종종 나눈다. 처음엔 친구를 돕고 싶다는 마음에 어떤 방향성이라든지 루틴, 마음가짐 등을 조언했다. 근데 그 친구들도 이미 알더라. 다 알고 충분히 노력하는 상황이다. 지금은 “타이밍이 곧 오겠지”라며 서로 북돋는 시간을 많이 보내려고 한다.

 

각자의 때가 있을 테니까. 함께 기다려줄 사람이 있어 다행이다.

때라는 것, 내게 알맞는 때가 오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참 무섭고 어려운 것 같다. 모두 실력이 있다고 전제하면, 그 기다림에서 뭔가가 결정되는 것 같기도 하고. 친구들은 정말 큰 힘이 된다.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다. 마냥 노는 것도 스트레스 풀리고 좋긴 한데, 진지하게 대화를 나눈다는 건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각자의 깊이뿐만 아니라, 우리의 관계도 깊어지는 걸 느낀다.

 

안 그래도 <힘을 낼 시간> 속 태희처럼 친구라고 부를 만한 동료가 곁에 있는지 내심 궁금했다. 일할수록 가족이나 학창 시절 친구에게는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생기지 않나.  

수민, 사랑, 태희의 관계는 특별하다. 그렇듯 어떤 껍데기도 쓰지 않은 상태에서 생각과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기란 정말 쉽지 않으니까. 그런 친구 한 명 있으면 다행인 정도인데, 이것도 운이 좋다고 표현할 수밖에. 친구들이 서로 지켜주고 끌어준다는 건 대단한 힘이다. 내가 나이를 그리 많이 먹은 것은 아니지만, 해가 넘어갈수록 주변에 사람이 사라지는 걸 느낀다. 예컨대 이 업계에서 “우리 같이 힘내자!” 했던 이들이 초반에 100명이었다면, 점점 그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든다. 이상한 외로움이 생기더라. 서로 대화하고 공감하고 이해해 주는 관계들이 줄어들다 보니 요즘엔 조금 외롭다는 생각도 든다.

 

말한 대로 젊다. 아직 20대 초반이고, 10대에 데뷔했더라. 모델로 데뷔해서 금세 연기 활동을 시작했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듣고 싶다.

초등학교 6학년 무렵이 기억난다. 지금 생각하면 신기한데, 난 진로를 일찌감치 고민했다. 키가 원체 크다 보니 주변에서 모델이나 연예인 해보라는 얘기를 곧잘 들었다. 그때부터 모델과 배우를 꿈꿨고 중학교 3학년쯤 예술고등학교 진학을 결정했다. 그러다 때마침 길거리에서 캐스팅이 됐다. 본가인 강원도 춘천에 명동이라고 있거든. 그곳에 놀러 갔다가 모델 에이전시 명함을 받았다. 그렇게 16세부터 지금까지 쭉 달려왔다. 모델로 얼마간 활동하고 나서 연기에 도전했다. 첫 오디션을 18세에 봤고, 데뷔작 <좋아하면 울리는>(넷플릭스, 2019)을 만났다. 

현우석 ⓒ이영진

주변의 권유나 기대를 떠나서 본인이 하고 싶은 일, 되고 싶은 모습을 자각했던 순간은 언제였나.

우선은 완성된 작품과 그에 따라오는 반응을 보는 것이 좋았다. 부모님도 좋아하시고 친척 어른도 반가워하셨다. 한동안 그런 결과물만 보고 살았다. 그 과정에서 물론 자부심과 보람도 많이 느꼈다. 근데 스무 살을 기점으로 한 차례 생각이 전환됐다. 처음 주연을 맡은 장편영화 <아이를 위한 아이>(2022)로 이승환 감독님을 만났는데, 하루는 감독님이 “우석아, 넌 뭘 보고 살아?”라고 물으셨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그동안 타인의 반응을 많이 보고 살았더라. 정작 내가 뭘 좋아하고 바라는지 명확히 말하기가 어려웠다. 덕분에 나를 탐구하기 시작했고, 언젠가부터는 “하늘을 보고 살아요”라고 답한다. 바뀌지 않는 것, 계속 그 자리에 있는 것. ‘난 하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후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갈수록 내부가 채워지는 느낌이 들더라. 외부 요소에 지나치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가는 중인 것 같다. 

 

“뭘 보고 살아?”라는 질문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도 기억하나. 

감독님이랑 철학적이거나 시시콜콜한 얘기하길 좋아한다. 아마도 <아이를 위한 아이>에서 내가 연기한 도윤이라는 인물을 놓고 의견을 나누던 중에 질문하셨을 거다. ‘도윤이는 대체 뭘 보고 살기에 그렇게 단단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 그날 대화의 주제였던 것 같다. 이 아이가 외적인 영향에 휩쓸렸다면 진작 무너졌을 텐데, 어떻게 자기 길을 스스로 택했을까. 도윤이는 시니컬하면서도 목표가 뚜렷한 인물이었다.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는 사람. 결국 ‘도윤이는 뭘 보고 살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현우석은 뭘 보고 살아?’라는 질문으로 넘어갔던 것 같다. 

 

도윤만큼이나 배우 현우석도 확고한 방향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매번 도전을 거듭하는 점이 특히 눈에 들어온다. 작품 장르만 해도 미스터리, 드라마, 로맨스 등으로 다양하고, 연기하는 인물의 연령대도 10대부터 20대 중후반까지 폭이 넓은 편이다. 게다가 교복을 입는 인물일지언정 반항아부터 모범생까지 다채롭다. 어떤 의도로 필모그래피를 채워가고 있나.

최대한 배우는 자세로 임하려고 한다. 그래도 새로운 도전은 늘 무섭다. 한 발짝 떼는 일에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더라. 주변에서 많이 도와주셨다. 이것도 운이다. 항상 좋은 작품, 좋은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에 들어갔다. 그러면 나도 좋은 사람이 되고자 더 노력하게 되고, 한편으로는 나도 좋은 사람이기에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생각도 든다. 배우는 자세로, 허투루 하기보다는 신중하게 시간을 쓰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문제는 안 보이는 곳에서 혼자 고민하는 시간이 자꾸 늘어난다는 거였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이 자주 말씀하셨거든. 자랑하지 마라,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너무 티 내지 마라. (웃음) 고민거리나 스트레스를 홀로 감당하면서 못내 힘들었는데, 다행히 현장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며 차츰 소통하는 법을 익혔다. 생각보다 도와주려는 사람도 많고, 자연스레 성장하는 면도 생기더라. 그렇게 하나씩 배우는 중인가 보다. 배움, 말하다 보니 그 외에는 정말 뭐가 없다.  

 

신인의 포지션이지만 데뷔와 동시에 비중 있는 역할을 소화하고 있다. 연달아 주연을 맡으며 부담이 크지 않을까 싶었는데, 방금 답변에선 겸손과 자신감이 고루 느껴진다. 

처음 주연을 맡았을 때는 무거웠다.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근데 막상 현장에 가보니 어느 역이든 똑같더라. 성실함이 기본이다. 인사 잘하고, 감독님 이야기 경청하고, 스태프분들 존중하고. 결국 그게 전부인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책임감이 강한 성격이다. 주연을 맡으면 부담감과 무서움도 느끼지만, 그와 동시에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 잡는다. 최대한 의연하게 대처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사실 주연이라는 타이틀은 지금도 무섭고, 앞으로도 무서울 것 같다. 다만, 현장에 계신 분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믿으면 딱히 못 할 것도 없더라.

 

<힘을 낼 시간> 현장 얘기를 해보면 좋겠다. 우선 팀으로 호흡을 맞춘 최성은, 하서윤 배우와는 어땠는지 궁금하다. 세 배우의 연기 경력이라든지 경험의 폭이 달라서 서로 도울 부분이 많았을 듯한데. 

두 누나가 나를 인간적으로 많이 끌어줬다. 성은 누나야 워낙 연기 경험이 많으니 의지할 수 있었고, 서윤 누나는 <힘을 낼 시간>이 데뷔작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편안했다. 서로 사람으로, 동료로 대하면서 뭉치는 힘이 생겼던 것 같다. 누가 더 잘하네, 누가 더 오래했네, 그런 비교 없이 그냥 수민, 사랑, 태희로 존재했다. 감독님도 자연스러움을 중요하게 여기셨다. 카메라가 따라갈 테니 자유롭게 연기하라고, 우리 영화의 주제가 바로 그거라고 하셨거든. 인간 대 인간으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마음이 통하다 보니, 훨씬 자유롭게 상황에 녹아들 수 있었다. 보통 인물이 셋이면 화면 프레임 안에서 상대를 가리지 않게끔 배우마다 위치를 정해 놓는다. 이번 영화에서는 그런 규칙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그냥 사랑이는 여기 있고 수미는 여기 있고 태희는 여기 있는 거다. 언제든 위치가 바뀌어도 되고. 내게는 이런 현장의 환경 자체가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덕분에 배우들 간에 유대감도 순조롭게 쌓였던 것 같다. 

현우석 ⓒ이영진

향수로 치면 베이스노트, 미들노트, 탑노트가 빈 곳 없이 조화롭게 구성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확실히 팀워크가 느껴진다.

사실 현장은 치열하기도 했다. 배우끼리 상의도 많이 하고. 연기적 스킬보다는 캐릭터의 내면을 파악하는 데 시간을 쏟았다. 지금 수민이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 사랑이는 무슨 생각해? 그때 태희 마음은 어떤 것 같아?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대화를 주고받는 식이었다. 

 

현장에서 바로 그 단계에 돌입하는 것은 어려울 텐데, 사전에 배우들이 따로 모여 시간을 보내기도 했나.

촬영 준비할 시간이 넉넉하지는 않았다. 셋이 처음 만난 날, 되게 어색하고 데면데면했다. 이래도 괜찮을까 싶었는데, 성은 누나가 “우리 가면 쓰지 말자”고 딱 얘기하더라.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는 상황에서 보통은 듣기 좋은 말만 오가고 그러지 않나. 굳이 약점을 보여줄 필요 없으니 솔직한 얘기는 꺼내지 않으려 하고. 근데 성은 누나가 말문을 열어줬다. 어차피 시간도 없고 빨리 친해져야 한다, 가면 쓰지 말고 힘든 거 있으면 편하게 얘기하자. 그러면서 진짜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태희는 시야가 넓은 인물이다. 눈치가 빨라서 사랑스러운데, 한편으로는 눈치가 너무 빨라서 안쓰럽기도 하다. 시나리오 보면서는 어떤 생각했나.

감독님께서 처음부터 인물을 정확하게 설명해 주셨다. “태희는 무해한 웃음을 가진 친구야.” 태희는 힘든 상황도 무던하게 대처하는, 속으로 잘 삼키는 친구라고 생각했다. 마음이 바다 같은 사람. 대체로 잔잔한 표면을 유지하는데, 가끔은 넘쳐 오르기도 하는 사람. 평소 시나리오를 받으면 내가 맡은 역할에 집중해서 읽는데, <힘을 낼 시간>은 처음부터 신기하게 작품 전체가 눈에 들어왔다. 캐릭터 하나씩 따로 떼어 놓고 파악한 것이 아니라, 전체가 그려졌다는 뜻이다. 감독님이 인물에 딱 맞는 배우들을 캐스팅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은 누나가 중심을 잘 잡아줬고 서윤 누나도 사랑이라는 역할을 멋지게 해냈다. 걱정했던 건 나였다. 초반에는 내가 태희를 연기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거든. 태희는 나랑 좀 다른데, 내가 이렇게 무해하고 깊은 바다 같은 인물을 소화할 수 있을까? 근데 감독님과 대화를 나누며 ‘아, 내가 태희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다. 다른 배우들도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감독이 그만큼 확신했다는 의미인가? 

놀라운 믿음을 줬다. 솔직히 어렵지 않나. 의심할 수도 있고, 말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근데 감독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는 신뢰를 보여줬다. 덕분에 영화 안에서 잘 놀 수 있었다.

 

그 부분이 궁금했다. 남궁선 감독도 인터뷰에서 말했거든. 초반에 긴장한 현우석 배우에게 “하고 싶은 거 다 해봐. 우리가 어떻게든 최고를 만들어 낼 테니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해봐.”라며 북돋아 줬다고. 근데 하고 싶은 거 다 해보라는 말을 들으면, 되려 난처하거나 어렵게 다가오지 않을까 싶기도 하더라. 

나도 무서웠다. 그 말을 들어도 무서웠던 거다. 촬영장에서 남몰래 밤새는 일도 잦았다. 새벽 내내 ‘이런 톤으로 해볼까? 저런 톤으로 해볼까?’ 하며 대사 연습하다가 잠을 못 잔 채로 현장에 나갔던 거다. 근데 막상 현장에 가면, 전날 고민한 것들이 싹 날아갔다. 그냥 그 공간에 놓인 캐릭터로서 무의식중에 뭔가를 하고 있더라. 그러면서 서서히 깨달았다. ‘혼자 고민하는 건 고민도 아니구나.’ 감독님이 나를 믿고, 눈앞에 수민과 사랑이라는 인물이 있고, 또 우리에게 벌어진 상황이 있다. 중요한 건 그뿐이었다. 고뇌했던 시간이 무색해질 만큼 현장에 가면 자유로웠다. 그전까지 족쇄를 차고 혼자 방 안에 갇혀 있다가 촬영을 시작하는 순간 족쇄가 착 풀리는 느낌이었다. 

현우석 ⓒ이영진

촬영장에서 해방감을 느꼈네. 압박감에서 풀려나 태희가 될 수 있던 이유는 뭐였을까?

마법 같은 일이었다. 혼자 있을 때는 자신을 많이 질타하기도 했다. 왜 감정이 이것밖에 안 나올까? 이건 진실한 감정이 맞나? 근데 현장 가면 뭔가 되더라. 나도 몰랐던 것이 나와서 신기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난 힘든 일을 빨리 잊는 쪽이다. 그래서 주변에 “안 힘들어”라고 말할 때가 많다. 근데 생각해 보면 힘든 시간이 어디로 증발하는 게 아니거든. 고민과 울음과 괴로움, 그렇듯 수많은 것이 겹겹이 쌓여서 현재를 이루는 거다. 태희도 비슷하다. 태희를 연기하는 동안 여러 가지를 연구하고 그 과정에서 힘들기도 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좋은 기억뿐이다. 힘들고 괴로운 순간이 모이고 쌓이다가 어느 순간 태희라는 순수한 인물 하나만 딱 남은 느낌이다. 그렇기에 현장에서도 계산되지 않은 감정이 나왔고, 관객들에게 그 마음이 가닿지 않았을까 싶다. 

 

순수라는 표현에 일리가 있다. 태희를 포함해 인물 모두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꽁꽁 감추는 편인데, 다들  음흉해 보이지는 않거든. 어떤 면에서는 속엣말을 터놓지 못할 뿐 굉장히 투명하다는 생각도 들고. 

편집된 장면 중에 솔직함에 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다. 사람을 못 믿는다, 솔직하지 못하다는 내용의 대사였다. 그 장면이 실제로 삽입되지는 않았지만, 시나리오를 되짚어 보면 솔직함과 순수함은 영화의 키워드 중 하나이기도 했다. 촬영 막바지에 다다를수록 작품 안에서나 밖에서나 세 친구가 좀 더 솔직하게 서로를 대한다는, 순수하게 믿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팀워크라는 것이 확실히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팀워크라면 일가견이 있다. 드라마 <치얼업>(SBS, 2022)으로 ‘베스트 팀워크상’을 받은 적이 있잖나. 

그러게, 팀워크가 내 삶의 키워드네. (웃음)

 

남궁선 감독과의 팀워크는 어땠나. 감독마다 연출 스타일도, 배우들과 관계 맺고 현장을 운영하는 방식도 천차만별이다. 남궁선 감독과의 협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순간은.

감독님은 천재다. (웃음) 현장에 변수가 많았다. 제주도 날씨도 종잡기 어렵고, 아무래도 적은 예산으로 찍다 보니 돌발 상황도 계속됐다. 근데 감독님이 모든 변수를 아우르더라. 대처 능력이 뛰어나다는 뜻이다. 바람이 많이 불면 아예 그 바람을 활용하는 식이었다. 상황 판단이 빠를뿐더러 현장에서 최대한 유연하게 움직이려고 하셨다. 감독님의 능력을 확인하면서 나도 믿음이 쌓였다. 

 

연기 준비하며 실제 아이돌 문화나 경험을 참고하기도 했나. 개인적으로 찾아본 자료가 있다면.

<다큐 3일> 같은 다큐멘터리 방송을 통해 일상적인 모습을 관찰하려고 했다. 결국 레퍼런스는 레퍼런스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자료든 느낌과 분위기를 파악하는 정도로 접근했다. 또한 아이돌이라는 직업군에 제한해서 생각하기보다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맞닥뜨리는 주제에 초점을 맞췄다. 어쨌거나 사람마다 힘든 시간을 통과하고, 그 안에서 뭔가를 선택함에 따라 후회하고 아쉬워한다. 제 마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내게는 그 질문이 핵심으로 다가왔다. 다큐멘터리를 보면서도 그 부분을 살펴보려고 했다.

<힘을 낼 시간>
<힘을 낼 시간>

전작 <돌핀>(배두리, 2024)에서 소녀시대 출신의 권유리 배우와 호흡을 맞췄다. 당연히 조언을 구하지 않았을까 했는데. 

전혀 생각을 못 했다. 그러게, 유리 누나가 있었네! 탑아이돌이자 훌륭한 배우이고, 인간적으로 존경하는 사람이다. 촬영 시작하기 전에는 막연한 편견이 있었다. 누나는 워낙 스타니까. 근데 얼마 안 가서 내가 색안경을 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리 누나는 현장에서 누구 못지않게 발로 뛰는 사람이다. 다 같이 식사할 일이 생기면 누나가 직접 밥집을 검색해서 데려가기도 했다. 현장 분위기를 편안하게 끌어줬다. 정상에 있는 사람은 다르구나 했던 기억이 난다. 저런 겸손함을 배워야겠다 했지. 말하다 보니 진짜 신기하다. 유리 누나한테 물어볼 생각을 못 했다니. (웃음)

 

그만큼 정신없이 달렸다는 뜻이겠지. 작년 <돌핀>과 <힘을 낼 시간>을 개봉했고, 영화제에서 <너와 나의 5분>(엄하늘)을 공개했다. 얼마 전엔 <단골식당>(한제이) 크랭크업 소식도 들렸고. 

나 열심히 살았구나.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되네. 개봉을 준비하는 작품이 몇 편 더 있다. 관객과 만나는 날이 기다려지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새로 만날 작품이 기대된다. 2025년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불안함이 프리랜서의 매력인가 싶다.

 

힘을 내기 어려웠던 순간도 있나. 문득 ‘이 길이 맞나?’ 하고 주저하게 됐다든지. 

고비는 늘 찾아오는 것 같다. <힘을 낼 시간>을 마치고 거의 1년간 어떤 작업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당시 여러 생각과 감정이 교차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왜 이러고 있지? 그 시간을 거친 후에 <힘을 낼 시간>을 보니 촬영할 때와 느낌이 또 다르다. 특히 “내가 여기에 있다”라는 대사가 주는 울림에 놀랐다. 촬영 당시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던 것 같다. 고민하기는 했지만 마음 깊이 와닿진 않았다. 근데 나름대로 힘든 시간을 한 번 겪고 나니 저절로 이해되더라. 경험치가 중요하다는 걸 느꼈다. 아무 일도 없는 1년은 막막했다.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대개 집에서만 시간을 보냈다. 새로운 자극도 없고, 안 해봤던 것을 시도하려는 노력도 멈춘 시기였다. 근데 그렇게 해서는 무엇도 달라지지 않더라. 일이 없는 시간을 잘 버티면서 단단해지기 위해서는 도전해야 한다는 것, 도전할 용기를 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즘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장소다. 집이 아닌, 내게 익숙하지 않은 장소로 가봐야 하는 거다. ‘내가 새로운 곳에 가야 새로운 일이 시작되는구나. 그래야 또 뭔가를 이루어 낼 수 있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힘을 낼 시간> 속 수민, 사랑, 태희도 제주도라는 새로운 장소로 애써 떠나지 않았나. 무기력해서, 돈이 98만 원밖에 없어서 포기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셋은 용기를 내서 제주도에 갔던 거다. “내가 여기에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은 그들 스스로 만들었다고 본다. 내가 거기에 있다고 말하려면, 정말로 내가 거기에 가야 하는구나 싶다. 언제 만날지 모르는 작품을 기다리며 감정적 소모가 심했는데, 돌이켜보면 날 담금질하는 계기가 됐던 것 같다. 성장통이라는 말을 싫어하지만, 덕분에 성장했다는 생각도 들고. 이제 비슷한 고비가 찾아와도 ‘나 이거 뭔지 알아’ 하며 전보다 덜 당황할 테니까. 

 

스트레스는 운동으로 푼다고. 그러고 보니 <치얼업>에서는 응원 안무를, <빅슬립>에선 액션을 소화했다. <너와 나의 5분>에서는 공부도 운동도 잘하는 고등학생으로 등장한다. 기본적으로 몸 쓰는 일에 자신이 있는 듯한데.

운동 신경이 좋은 편이라고 자부한다. 유연하지는 않은데, 몸을 움직이는 일 자체에 재미를 느낀다. 나가서 무작정 뛰면 아무 생각도 안 나고 좋다. 작년 봄부터는 ‘천국의 계단’을 탄다. 

 

천국을 볼 정도로 힘들다는 운동 아닌가? 말한 대로 새로운 장소에 갔구나. (웃음) 

그렇지, 새로운 장소에 가서 새로운 일을 해봤다. 재밌더라. 천국의 계단을 1시간씩 탄다. 이 말을 들으면 주변에서 다 놀라는데, 하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그 정도 지나가더라. 물론 몸은 힘들지만 잡생각이 없으니 개운하다. ‘이 계단을 넘어지지 않고 올라야겠다’라는 생각만 남거든. 나한테는 좋은 스트레스 해소법이다.

현우석 ⓒ이영진

생각이 되게 많다는 얘기로 들린다. 

생각을 멈추게 하려고, 머릿속을 비우려고 몸을 혹사하는 타입이다. 러닝도 좋아하고.

 

주로 혼자 할 수 있는 운동을 고르는 편인가? 

운동도 그렇고, 평소에도 혼자 시간 보내기를 즐긴다. 현장에서 에너지를 유지하거나 집중할 때도 혼자 말없이 있는 편이다. 다른 분들께 오해가 가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만히 멍을 때린다.

 

음악도 좋아하겠다. 

잔잔한 음악을 좋아한다. 오래된 노래를 즐겨 듣는데 김광석, 유재하 님의 노래는 늘 플레이리스트에 있다. 운동할 때도 발라드를 듣는다. 천국의 계단이든 러닝이든 웨이트든 난 ‘파이팅 넘치는’ 음악보다는 잔잔한 발라드를 들으면서 할 때가 더 좋더라. 빠르고 강렬한 음악은 심장을 너무 빠르게 뛰게 하거든. (웃음) 평소 긴장도가 높은 편이라, 조용조용하게 나를 진정시키는 음악에 마음이 간다.

 

몸 쓰기를 좋아하지만 에너제틱한 스포츠맨과는 거리가 멀다. 차라리 반복적인 움직임을 통해 무의 경지에 다다르려는 수행자에 가까워 보인다. 

어떤 면에서는 그것도 책임감의 일부분인 것 같다. 내가 정해 놓은 루틴이 어그러지면 마음 아프더라. 웃긴 얘긴데, 작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신점을 봤다. 어떤 직업이 좋을지 물어봤더니 배우 아니면 스님이 됐을 거라고 하더라. 혼자서 좀 버틸 줄 알아야 한다는 점에서 두 직업에 연결 고리가 있는 것 같다. 영화에서 태희도 명상하지 않나. 그게 태희 스스로 정한 일종의 루틴 아니었을까 한다. 

 

운동 말고도 루틴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있나. 

식단, 그리고 사람도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언젠가부터 만나는 사람만 만나게 되더라.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사교적인 분들을 보면 부럽긴 한데, 나는 혼자 있거나 아주 편한 몇몇을 만나야 기운을 얻는다. 또 루틴이라기보다는 항상 명심하려는 것이 있다. 감사한 마음. 그건 시간이 얼마나 흐르든, 어떤 작품에 들어가든 변하지 않는 기본자세다. 내가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현장을 대해야 함께하는 동료, 실력을 지녔으나 선택받지 못한 사람 모두 기만하지 않는 거라고 생각한다. 

<돌핀>
<아이를 위한 아이>

왠지 침대 머리맡에 ‘겸손과 감사’라고 써 붙여 놓았을 듯하다. 그러면 마음가짐을 떠나서 연기 스타일이나 접근 방식은 어떻게 변화했다고 보나.

처음엔 글만 봤다. 텍스트에 갇혀 있던 셈인데, 막상 현장에서 보니 많은 것이 달라지더라. 완성된 영상은 거기서도 또 달라지고. 그걸 깨달은 다음부터 감독님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대사도 문장 자체를 외우는 것보다 의미를 파악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a는 a고 b는 b, 1 더하기 1은 2. 과거에는 이렇게 수학적으로 접근했다면 이제는 변수를 생각하게 됐다. 전후 맥락을 살펴보면서 ‘이건 다르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고민해 보고, 감독님께 여쭤본다. 감독님이 아이디어를 수용해 주시면 새로운 걸 같이 시도한다. 그러면서 연기를 전보다 즐기게 된 것 같다. 감독님들은 배우가 제일 중요하다고 말씀하신다. 아무리 글을 잘 쓰고 현장 세팅을 잘해도 결국 관객은 배우의 연기를 따라간다는 뜻이다. 근데 반대로 배우 입장에서는 감독님이 제일 중요하거든. 작품을 총괄하는 역할이고, 감독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다 보니 가능하면 소통을 많이 하는 방식이 좋지 않을까 한다. 실은 작품이 없는 기간에 단편영화를 한 편 찍어 봤다. ‘연출이란 뭘까?’ 궁금했거든. 와, 정말 쉽지 않더라. 

 

아무것도 안 했다더니 큰일을 했네. 

좋아하는 배우들이랑 모여서 작은 규모로 찍었다. 덕분에 카메라 앞이 아닌 뒤에 서는 법을 조금이나마 배웠다. 안 해봤으면 영영 몰랐을 거다. 감독은 이 정도 무게를 견뎌야 하는구나. 어깨가 진짜 무겁더라. 내가 배우인데도 막상 배우에게 연기 디렉팅하려니 말문이 막히고. 

 

직접 출연하지는 않았고? 

연출만 했다. 처음엔 익숙한 일이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디렉팅이라는 게 생각보다 어렵더라. 종종 현장에서 감독님들이 추상적인 디렉션을 주면, ‘대체 무슨 뜻이지?’ 알쏭달쏭했다. 근데 나도 그렇게 하고 있더라. “안개처럼 걸어와 줘. 하늘을 나는 느낌으로.” (웃음) 그래도 좋은 경험이었다. 

 

코로나19를 계기로 배우들이 스태프를 꾸려 직접 영화를 제작하는 일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무력감을 해소하는 방법이자, 새로운 활로를 뚫는 시도다. 그 과정에서 감독과 배우가 자극을 주고받기도 하고. 꼭 완성해서 관객들을 만나면 좋겠다.

아직은 외장하드에만 보관해 놓고 있다. 올해 작업을 마무리해서 영화제 출품 등을 시도해보려고 한다.  

 

작품이 없어 쉬었다고는 하지만 계속 일을 벌였던 셈이다. 차기작에 관해선 어떤 고민을 하는 중인가. 이 타이밍에 만났으면 하는 작품이 있다면. 

<힘을 낼 시간> 개봉하면서 큰 용기를 얻었다. ‘이제 <힘을 낼 시간>이 나오네. 행복하다. 앞으로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생각만 해도 좋은 기운이 계속 흘러나오는 듯했다. 여기저기 자랑해도 부끄럽지 않은, 내게 그만큼 소중한 작품이다. 설령 고비가 또 한 번 찾아오더라도 올해는 이 기운으로 잘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차기작을 기대해 본다면, 최근에는 공포 장르가 궁금하다. 아무래도 잔잔한 드라마나 가족 이야기를 많이 했어서 그런지, 이제는 공포나 스릴러처럼 장르적 쾌감이 있는 작품을 만나고 싶다. 

 

공포라면 겁을 주는 쪽, 아니면 겁을 먹는 쪽? 

겁에 질려가는 내 모습을 보고 싶다. 아직 못 봤거든.

현우석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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