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난데없는 비상계엄 선포로 야기된 혼란 속에서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광장을 빽빽하게 채운 젊은이들의 손에는 응원봉이 들려 있었다. 각자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의 이름을 적어 “좋은 세상에서 살게 해줄게”라는 플래카드를 흔들며 밤새도록 노래하고 춤을 췄다. 2024년 12월, 한국에서 일어난 일이다. <힘을 낼 시간>의 주인공들이 이 광경을 봤다면 어땠을까. 드물게, 하지만 눈부시게 빛나는 응원봉을 인파 속에서 찾기도 했을까. 침착하게 일행을 이끄는 자세와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까지 한눈에도 리더 티가 나는 수민(최성은), 이어폰을 낀 채 친구들을 말없이 뒤따르다가 멍하니 딴생각에 잠기곤 하는 사랑(하서윤), 놀이공원에 처음 온 아이처럼 해맑게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태희(현우석). 그들은 실패한 아이돌로 불린다. 이십 대 중반에 그룹 해체를 겪고 은퇴했다. 어릴 적 스무 살이 되면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데뷔해도, ‘망돌’이라는 꼬리표가 붙어도, 소중한 누군가를 잃은 후에도 세상은 끝나지 않았다. 당장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세 사람은 학창 시절 떠나지 못한 수학여행을 가기로 했다. 누구나 하는 일은 뒤늦게나마 꼭 한번 해야 하는 법이다.
세 사람의 여행은 초반부터 삐그덕거린다. 공항에서 나가는 길을 찾지 못해 헤매더니, 겨우 탄 버스에서는 사랑이 캐리어를 놓고 내린다. 수중에 가진 돈은 98만 원이 전부인데, 캐리어를 잃어버린 후 연신 위태롭던 사랑이 사고를 치는 바람에 그마저도 모두 잃는다. 종잡을 수 없는 여정에서 세 친구는 급한 불부터 끄기로 한다. 큰마음 먹고 예약한 펜션은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고, 무작정 귤 따기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는 식이다. 영화는 색감을 비롯한 비주얼적 요소를 통해 인물들의 정서와 이야기에 깊이를 더한다. 서울이 아닌 제주, 야자수가 높이 자란 섬에서 후드와 코트를 껴입은 그들은 때를 못 맞춘 철새처럼 보인다. 겨울은 아직 오지 않았거나 이미 지나간 듯한데, 인물들은 몸을 말고 이불 속으로 종종 숨어버린다. 어스름이 깔린 듯 푸른 빛이 감도는 화면도 기묘한 계절감을 만들어 내는 데 일조한다. 한낮 풍경 또한 영화에서는 동이 트기 전 새벽처럼 시리고 고요한 공기를 담는다. 이는 인물들이 놓인 불확실한 시간과 맞물린다. 뭘 이뤘다고 자부하기도, 전부 의미 없다고 평가하기도 애매하다. 지금까지 경험한 것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도 쉽지 않고, 과거를 과거로만 남겨둘 수 없으므로 미래를 그려보기도 어렵다. <힘을 낼 시간>의 영제는 ‘Time to Be Strong’이다. 끝도 시작도 모호한 가운데 그들은 어떻게 강해질 수 있을까.


<힘을 낼 시간>은 국가인권위원회의 15번째 인권영화 프로젝트로 기획됐다. 영화는 인권 침해라고 불릴 만한 사건을 암시한다. 트레이닝의 수준을 한참 넘어서는 신체적, 정서적 폭력이 그 예다. 이유조차 없는 구타, 거식증과 영양실조를 몰고 오는 다이어트, 부적절한 관계를 강요받는 일, 돈과 법의 이름으로 행하는 착취, 돈 벌어오라는 주문, 족쇄가 된 계약서, 갑작스러운 섹시 콘셉트와 과도한 노출까지. 영화는 특정한 순간을 재연하는 대신에, 인물들 내면과 몸에 남은 고통의 흔적을 바라본다. 속 깊은 표정을 짓지만 사실 수민은 식사 때마다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를 부여잡고 주저앉는다. 태희는 바닷물이 얼마나 차오르는지도 모르고 모래사장에 누워 제 호흡을 붙잡으려 애쓴다. 무기력해 보이던 사랑은 귓전을 때리는 음악 속에 자신을 가둔 채 하염없이 몸을 흔든다. 영화가 암시하고 또 영화에서 벌어지는 사건들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세 사람의 얼굴이다. ‘잘 팔리는 상품’이 되어야 한다는 기획 의도대로 수년을 살아온 이들은 여전히 모든 것을 혼자서, 담담히, 끝까지 해내려고 분투한다. 일을 맡으면 온몸이 부서져라 임한다. 남들보다 열심히, 언제나 웃으며 노력하는 것이 몸에 박혀서다. 그 속에서 영화는 아이돌이 아닌 통증에 시달리는 아이들의 얼굴을 비춘다.
남궁선 감독의 전작 <십 개월의 미래>(2021)에 이어 또 한 번 협업한 최성은을 필두로 믿음직스러운 배우들이 출연한다. 표면적으로 감정의 고저가 명확한 인물들 사이에서 중심을 바로잡는 최성은 덕분에, 현우석과 하서윤 역시 복잡다단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된다. <힘을 낼 시간>은 배우들의 매력을 십분 활용하지만, 그에 기대는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배우들이 보여주지 않는 것, 즉 화면에 등장하지 않고 서사에 포함되지 않는 것까지 상상하게 하는 연출의 힘이 돋보인다. 아이돌 자체가 상품이기에 ‘망돌’은 어떤 면에서 더한 볼거리다. 그러나 영화는 인물들뿐만 아니라 실제로 이 시간을 경험했던 이들 또한 볼거리로 만들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듯하다. 인물과 이야기를 자극적으로 소비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영화에 플래시백을 사용하지 않기로 한 선택과 맞닿는다. 아이돌 사업의 성공 신화가 지워버린 얼굴들을 마주하며 불행과 상처와 괴로움과 무력감을 포용하되, 재연과 흉내 내기는 거부하겠다는 의도다.


<힘을 낼 시간>은 인물들의 속내를 집요하게 파헤치지도, 아이돌 산업의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고발하지도 않는다. 엄격하리만치 단호한 섬세함이 영화를 감싸고 있다. 상처를 파헤치다 더한 아픔을 줄까 봐, 고발에 몰입한 탓에 누군가를 영영 숨게 할까 봐 영화는 바리케이드를 친다. 다만, 한 가지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한다. 수민, 사랑과 그룹 활동했던 애라가 남긴 유언이 그것이다. “내가 여기에 있다. 나라는 사람이 여기에 있다.” 영화는 그들이 여기에 있다고 거듭 말한다. 수민, 태희, 사랑은 힘겨운 시간을 통과하는 서로를 때로는 모른 척하고 때로는 다그치면서 함께 존재하는 법을 배운다. 그즈음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대사는 “넌 혼자가 아니야”로 들린다. 영화는 인물에게 탈출구를 열어주거나 세상을 혼쭐내는 대신, 다음이 있다는 사실을 되새긴다.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세 친구의 옷차림은 조금 가벼워지고, 이들은 다음 여행을 기약하며 제주를 떠난다. 그렇게 작은 일탈을 경험하며 계속해서 움직인다. 어쩌면 세상이 바뀌는 과정도 그와 같지 않을까. <힘을 낼 시간>은 여럿이 함께 힘을 내기를 바라며 띄운 엽서처럼 보인다. 막다른 길에 처했다고 느끼는 이들뿐만 아니라, 누군가를 좋아하고 응원하는 사람에게 가닿을 만한 영화다. 결국 ‘좋은 세상’은 많은 이의 선한 의지와 실천을 바퀴 삼아 오는 것이므로.
힘을 낼 시간 Time to Be Strong 감독 남궁선 출연 최성은, 현우석, 하서윤 제작 국가인권위원회, 비포 위 다이 배급 엣나인필름 제작연도 2024년 상영시간 99분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개봉 2024년 12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