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생각해 봐. 네가 여길 왜 못 떠나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도 왜 못 떠나는지.” 흑백 화면 속에 담긴 이 도시는 아슬아슬하게 버티는 모양새다. 공기 오염은 한층 심각해졌고 물가는 숨통을 조여 오듯 치솟는다. 마스크로 코와 입을 가린 채 고층 빌딩 사이를 꾸역꾸역 통과하는 무리에 신동(김대건)이 껴 있다. 열 살도 안 된 어린 집주인은 건물을 리모델링한다며 얼마 전 월세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난처해하는 신동에게 친구 ‘오타쿠’(신영규)가 ‘월월세’와 ‘천장세’를 일러준다. 월세를 내는 세입자는 임차한 집 일부를 임대해 월월세를 받고, 월월세마저 감당하기 어려운 세입자는 천장으로 기어 올라간다. 꼬리 물기 하듯 세에 세를 붙이며 을의 을을 양산하다가 끝내 몇몇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진다는 이야기. 친구가 전한 주거 빈민의 아비규환은 허무맹랑한 도시 괴담이 아니라, 현재 신동이 사는 세계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망설이던 신동은 결국 집주인의 횡포를 막아낼 요량으로 월월세 세입자를 집에 들인다. 그는 읊조린다. “더 늦기 전에 여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
윤은경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세입자>는 데뷔작 <호텔 레이크>(2020)를 선보인 후 4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공포라는 장르적 특성을 공유하지만, 이야기의 결을 가르는 세계관은 극명히 다르다. <호텔 레이크>가 폐쇄된 호텔이라는 기묘한 공간을 통해 심리적 공포를 탐구했다면, <세입자>는 도시 속 평범한 주거지를 디스토피아적으로 재해석하며 보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공포를 그린다. 감독은 이제 호러 무비의 문법을 익히고 다양한 장치를 활용해 쾌감을 조성하는 일에서 한 발짝 나아가, 호러 무비가 우리 시대의 고민을 투영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는지 시험하는 듯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와 통제할 수 없는 힘에 대한 두려움을 파고든다는 점에서 주제 의식은 이어지나, 개인의 트라우마와 기억을 파헤치는 데 집중했던 <호텔 레이크>와 다르게 <세입자>는 공동체와 시스템이 만들어 낸 구조적 억압과 부조리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 특징이다. 일상 공간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을 예리하게 포착함으로써, <세입자>는 빈부 격차와 계급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직시하도록 유도한다.


인물들은 동시대 한국 사회를 여실히 반영하는 동시에, 고딕 영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여기에는 ‘귀신 들린 집’이나 ‘공포의 대저택’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집에 사는 일 자체가 공포를 견디는 일이며, 집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유령처럼 허공에 떠다닌다. 신동은 고딕풍 공포영화에서 볼 법한 희생자 캐릭터와 유사성을 지니고, 신동의 집에 들어온 ‘월월세 커플’은 우아하고 귀족적인 의상에 분장을 더해 기이한 매력을 뽐낸다. 영화는 그들에게 현대적 디테일을 부여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며, 집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설득한다. 월세 세입자와 월월세 세입자의 동거는 필연적으로 갈등을 빚는다. 이는 소음이나 예의범절의 문제에서 그치지 않고, 점차 서로를 적대시하는 병리적 현상으로 발전한다. 신동과 커플은 갑과 을로 끊임없이 존재를 계급화하는 사회에서 곤궁한 처지를 공유하는 세입자들이자, 애초 동등하지 못한 관계다. ‘월월세 커플’은 신동의 집 화장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월월세남(허동원)은 나이에 상관없이 신동을 형님이라고 높여 부른다. 시간이 갈수록 그들은 서로 의심하고 압박하면서 어떻게든 저보다 약한 존재를 찾아내려 안간힘 쓴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신동을 타이르며 이것저것 알려주던 친구는 말끝에 이런 경고를 덧붙인다. “근데 우리를 위하는 정책이 있겠냐.” <세입자>에서 집은 더 이상 안식처로 기능하지 못한다. 방과 화장실, 작은 거실로 이루어진 이 평범한 실내 공간은 영화의 주요 배경이자 사회의 축소판이며, 풍자와 염려가 반씩 섞인 그럴듯한 상상이다. <세입자>에서 주거는 인물과 서사를 움직이는 핵심축으로 작용한다. 온갖 계약서의 세부 조항,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음산한 소리, 인물을 감시하거나 구경하는 존재로 인해 집은 기이하고 초현실적인 무대로 탈바꿈한다. 좁은 집안에서 벌어지는 이웃 간의 갈등이라든지 임대인과 임차인의 불화는 개별적 문제가 아니라 반복되는 사회구조적 악몽을 상징한다. 세입자들이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은 단순한 경제적 어려움을 넘어,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세계에 갇혀 있다는 존재론적 공포로 확대된다. 한편, 집 밖의 공포는 더하다. 모든 것을 돈으로 판가름하고 “유능함과 잠재력”까지 값을 매기는 사회에서 신동은 죽지 못해 산다. 그의 유일한 희망은 회사에서 새 지사로 발령받아 이 도시와의 관계를 청산하는 것, 모두가 꿈꾸는 신도시 ‘스피어2’로 터전을 옮기는 것이다. 그러려면 천장세 계약부터 해지해야 한다. 신동은 결심한 듯 천장에 올라간다. 과연 무엇을 마주하게 될까. 천장 세입자는 세간에서 떠드는 대로 기행을 일삼는 좀비 같은 행색일까, 아니면 내 친구 혹은 나를 닮은 모습일 수도 있을까.


<세입자>는 흑백 화면에 고전적이고 고딕적인 분위기를 펼쳐 놓는다. 색채의 부재는 공간과 인물 간의 긴장감을 극대화하며, 이는 절제된 카메라 움직임과 결합해 집이라는 공간의 폐쇄성과 비현실감을 동시에 드러낸다. 영화는 비슷한 편집과 사운드를 반복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신동이 악몽을 꾸다가 현실로 돌아오는 장면이 재차 등장하고, 현악기를 활용한 높은 옥타브의 사운드가 귓가에 연신 울려 퍼진다. 이러한 요소는 공포감을 서서히 고조시키면서 신동이 바라는 ‘탈출’이 요원하다는 사실 또한 되새긴다. 배우들은 꿈과 현실, 실제와 환상을 유연히 왕래하며 영화의 형식과 세계관을 완성하는 데 힘쓴다. 김대건은 주연으로서 세입자의 나약함과 소시민적 분노를 섬세히 표현한다. 일상적 톤을 유지하며 극에 안정감을 불어넣는 동시에, 복잡한 내면을 밀도 있게 그려 몰입감을 더한다. 한편, ‘월월세 커플’로 등장한 허동원과 박소현은 영화 속에 서늘한 기운과 예기치 못한 위트를 고루 심는다. 두 배우는 극의 긴장감을 조율하며,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터져 나오는 실소와 지극히 인간적인 풍경에 내비치는 비소를 모두 경험하게 한다.
세입자 The Tenants 감독 윤은경 출연 김대건, 허동원, 박소현 제작 올로미디어 배급 인디스토리 제작연도 2024년 상영시간 89분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개봉 2024년 12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