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남성스러움이 느껴지지 않으며 베타 메일이라는 콤플렉스가 있는 무해한 남자. 주관은 뚜렷하지만, 연애 경험이 많지 않아 여성 앞에선 다소 약한 모습을 보인다.” <인서트> 오디션 공고에 적힌 인물 소개를 보고 남경우는 ‘난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진주석은 작은 키와 통통한 체격, 흰 얼굴을 지녔다는 점이 특히 자신과는 달랐다. 다만, 엉뚱한 작품 설명에 마음이 끌렸다. “웃기는 영화이긴 한데 마냥 코미디는 아닐 거라고 적혀 있더라고요. 그게 대체 무슨 뜻일까 궁금했어요.” 주인공이 아니어도 좋다고, 다른 배역이라면 자신과 어울릴 수도 있겠다고 스스로 북돋우며 오디션장을 찾아갔다. 그리고 남경우는 퉁명스럽고 볼썽사납다가 끝에 가선 짠하기까지 한 ‘인서트 감독’ 진주석을 완성해 냈다. 영화 촬영장에 예고 없이 등장한 마추현(문혜인)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가 싶더니, 귀 닫고 눈 감은 사람처럼 아무도 묻지 않은 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는다. 주석의 일장 연설이 음소거 처리되는 동안, 불이 꺼졌는지 켜졌는지 알 수 없는 그의 눈동자가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어쩌다 이토록 우습기 짝이 없으면서도 무시하기 어려운 인물을 빚어냈나 싶어 제50회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을 앞둔 남경우를 초대했다.
남경우 배우가 생각하기에 진주석은 어떤 사람인가.
고집스럽고 무뚝뚝하고 꽉 막힌 듯한 느낌의 캐릭터였다. 헤어랑 의상에서도 그런 면모가 드러난다. 애초 감독님이 오디션 볼 때부터 어떻게 입고 왔으면 좋겠다고 주문했다. 예를 들면 등산복이라든가 안경 같은 거. 안경은 내 안경인데 감독님도 긴가민가했던 것 같다. 그러다 영화에서 안경을 썼다 벗었다 하는 것도 재밌겠다고 생각하셨는지 사용하자고 하더라.
캐스팅 이유에 관해서도 들었나.
서로 궁금한 점 물어보면서 자연스레 얘기가 나왔던 것 같다. 감독님 말로는 오디션장 들어올 때부터 이미 걸음걸이에서 느낌이 왔다고 하더라. 말하는 모습도 그렇고. 감독님이 내게 특정한 상을 요구하지는 않았고, 말투나 억양 등 많은 부분을 열어주셨다.
주석은 무감하고 뚱한 인상이다. 실제 남경우는 어떤 편인가.
재밌게도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주석과 비슷하게 본다. 사실 사람도 되게 좋아하고, 친구들 만나면 수다도 많이 떤다. 고민도 얘기하고. 나는 털어놓는 거 좋아하거든. 말하면서 생각이 정리되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이 조언해 주는 것도 귀담아듣는다. 근데 남들 눈엔 무감해 보이나 보다.
어쩌면 그것마저 주석과 좀 닮은 것 같다. 속은 엄청나게 시끄러운 양반인데, 겉보기엔 표정 변화도 거의 없고 감정의 높낮이도 일정하게 유지된다. 그간 필모그래피도 크게 다르지 않은 느낌이다. 캐릭터가 도드라지는 역할보다는 가구처럼 존재하는 인물을 연기한 경우가 많다.
내가 의도해서 작품을 골랐던 것은 아니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흘러갔던 것 같다. 나 역시 다양한 작품과 캐릭터를 접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배우라면 다들 똑같은 마음일 텐데, 갈증은 항상 있다. 근데 일단은 주어진 작품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고, 만약 기회가 온다면 여러 가지를 시도하고 싶다. 그 속에서 나도 새로운 것들을 느끼고.


지금껏 작품에서는 묘하게 욕심 없는 것처럼 보여서 궁금했다. 욕심 있지?
그럼, 욕심 많다. 사람들이랑 얘기 나누다 보면 매번 느끼는데, 기자가 말한 것처럼 대부분 나를 욕심 없는 사람으로 본다. 덤덤한 애구나 하는 거지. 근데 실은 욕심도 많고 나름 속에 열망도 있다. 우리 일이라는 게 그렇지 않나. 처음에는 연기하는 게 좋아서 시작했는데 가면 갈수록 모순을 느낀다. 단지 좋아하고 원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타인에게 선택받아야 지속 가능한 일이니까. 연기를 물론 좋아하지만, 때때로 그 모순을 크게 느낄 때면 미워지기도 한다. 그만큼 욕심이 많다는 뜻이겠지. 속으론 더 하고 싶고, 뭐든 잘하고 싶다. 오해 아닌 오해를 받고 있는데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하나 싶다. 근데 한편으로는 장점이 되기도 한다. 아직은 득을 좀 보는 것 같다.
어떤 면에서?
난 상처를 받았는데 남들 눈에는 무난하게 넘어가는 것처럼 보일 때. 그러면 오히려 내가 그렇게까지 신경 안 써도 되는 일이구나 하며 좀 편안해진다. 사실 난 그리 포용력 있거나 무던한 성격이 아닌데, 나는 내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는데, 남들이 그렇게 봐주는 순간들이 종종 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마음이 괜찮아진다. 평정심을 유지하는 걸 지향하지만, 실제로는 잘 안 되다 보니 노력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면 연기는 어떻게 시작했나.
고등학교 2학년에 연기 학원에 갔다. 대학 입시를 고민하면서 이것저것 해봤다. 공부엔 영 소질이 없는데 뭘 해야 하나. 운동을 좋아했어서 체대 입시 준비도 잠깐 했다. 그러다 우연히 연기 학원 광고를 보게 됐다. 부모님께 말씀 안 드리고 혼자 상담을 받으러 갔는데, 그 상담 선생님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다. “우리는 사람을 만들어 준다. 좋은 사람을 만들어 준다. 연기한다고 공부 놓아버리면 안 된다. 우리는 그렇게 안 한다.” 돌이켜보면 일종의 영업이었던 것 같은데, 당시엔 그 말에 끌렸다. 부모님 설득해서 연기 학원에 등록했다. 막상 해보니 연기에 대한 생각보다 사람에 대한 생각이 넓어졌다. 학원에 오는 친구들에게 되게 자극을 받았다. 그렇게 인사 잘하고 밝고 살가운 친구들을 처음 봤거든. 또 연기 배우면서 거의 태어나 처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원래 컴퓨터 중독자였는데 컴퓨터를 점점 멀리하고 희곡집을 가까이하게 되더라. 뭔가 열중할 대상이 생겨서 기분 좋았다. 자연스럽게 부모님과 유대 관계도 좋아졌다. 나와 내 주변의 변화가 마음에 들었다. 어떤 다짐이나 생각의 전환이라고 할 만한 계기는 없었지만, 이후에도 쭉 연기를 우선순위에 뒀다. 19살 때부터 지금까지 단기적으로만 생각하며 온 것 같다. 근데 단기 목표를 달성하면서 만족을 느꼈고, 신기하게도 원했던 바가 차근차근 이루어졌다. 이렇게 인터뷰도 하고.
언제 가장 재밌나. 목표를 갱신하는 과정에서 가장 성취감을 느끼며 짜릿했던 순간.
사람들이 날 특별하게 봐줄 때인 것 같다. 내 연기를 보고, 나라는 사람을 궁금해하고, 내게 호감을 드러내며 관심을 표현해 줄 때.
캐스팅되고 나서 가장 행복했던 작품은 뭐였나.
당연히 <인서트>. 사실 자신감이 없진 않았다. 이 진주석이라는 캐릭터를 잘할 수 있을 것 같았고, 하고 싶었다. 근데 캐스팅이라는 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니 기대하지 않으려고 했다. 딱 중간을 유지했던 것 같다. 너무 하고 싶었지만, 안 되도 실망하지는 않을 듯했다. 그만큼 마음을 비우려고 애썼다.

잘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지정 대본을 읽었는데, 주석의 대사가 굉장히 쉽게 쉽게 다가왔다. 공감할 수 있었고 여러 면에서 나랑 잘 맞겠구나 싶었다.
예를 들면?
추현이랑 재회해서 파스타집 가는 장면. “제가 엄격함을 가장한 편협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라는 대사라든지 추현에게 방금 웃었냐고 묻는 순간들. 주석이 능글맞은 듯하면서도 마냥 능구렁이 같지는 않았다. 그런 능청스러운 척하는 모습을 보며 내가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사가 은근히 많다. 독백 연기하는 신도 있고.
독백 신에 대한 부담이 제일 컸다. 달달 외우면서 준비했고, 이걸 빨리 잘 끝내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준비 과정에서 감독님과 리허설하며 맞춰봤던 기억도 난다. 한 번은 감독님이 나를 따로 보자고 불러냈다. 아마 감독님이 큰일 났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불안하셨던 거다. 그날 시나리오를 처음부터 끝까지 같이 읽었다. 연기를 연습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흐름을 파악하고 캐릭터를 논의하는 과정이었다. “주석이라면 어떻게 할 것 같으세요? 주석이 어떤 심정일 것 같으세요?”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으며 감독님과 내 생각을 맞춰 나갔다. 다만, 신마다 분석하고 계획하며 연기하지는 않았다. 하나하나 스테이지 깨는 듯한 느낌에 가까웠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이 촬영 현장에 내던져진 나의 상태와 진주석의 상태가 공교롭게 맞물렸던 것 같다. 촬영장을 바라보는 입장, 문혜인 배우와의 관계 등 영화 속 상황과 현실이 꽤 겹쳤다.
중요한 포인트네. 현장에서 감독이 오케이/엔지 사인 내리는 기준을 이해했나.
첫날 첫 테이크에서 이해했다. 그 기억이 아직도 강렬하게 남아 있다. 추현과 주석이 파스타집에 들어간 상황이었다. 바 테이블이라서 따닥따닥 붙어 앉아야 했고, 실제로 파스타를 먹으면서 대사를 말해야 했다. 감독님이 여건상 테이크를 한두 번밖에 못 갈 거라고 사전에 얘기를 해줬다. 슛 들어갔는데 불편하더라. 공간은 너무 조용하고, 움직이기엔 좁고, 파스타를 먹으면서 말하기도 쉽지 않고, 얼마나 먹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어쨌든 불편함 속에서 연기를 마쳤다. 감독님이 다가와서 어땠는지 묻기에, 속으로 ‘어색했나 보네. 한 번 더 가자고 하시겠지?’ 했다. 근데 좋다는 거다. 불편해 보여서 좋았다고. 첫 테이크 이후,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내가 뭔가를 의도하고 정하는 방식이 연기에 정답이 아닐 수도 있구나. 어쩌면 내가 준비하지 못한 순간이 곧 캐릭터가 느껴야 하는 순간일 수도 있겠구나. 불편하라고 세팅한 상황에서 오롯이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그걸 깨닫고 난 다음부터 상황을 더 믿고 의존했던 것 같다. 감독님이 만들어준 상황을 최대한 느끼려 했고, 그 속에서 감독님이 좋은 순간을 잘 포착해 줬다. 만약 감독님이 첫 테이크에서 내가 예상했던 것처럼 연기가 부자연스럽다거나 너무 어색하다고 평했으면 갈피를 잡기 어려웠을 것 같다.
실제 촬영지는 어디였나.
부안, 서울, 광주를 오가며 찍었다. 아무래도 회차가 많다 보니 지역 촬영은 합숙하듯이 다녔다. 대학 MT 간 것 같고 재밌더라. 윤혁진 배우랑 같이 방을 썼는데 옛날 생각도 많이 났다. 혁진이랑 같은 학교 선후배 사이다. 나이는 동갑인데 혁진이가 학교에 먼저 들어갔다. 대학 다닐 때도 친하게 지내던 친구랑 한 작품에 출연해서 붙어 다니니 좋았다. 영화, 연기 얘기도 많이 나누고. 내가 영화와 연기에 관해 방대한 지식을 갖춘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게 대화하는 건 참 좋은 일 같다. GV에서 관객분들 만나는 것도 좋아한다.

연기하지 않는 시간엔 보통 뭘 하며 지내나.
내년에 결혼하는데 미리 신혼집에 들어갔다. 요즘은 집안일 하느라 바쁘다. 호텔에서 발레파킹 일을 하며 돈도 벌고 있다. 촬영할 때마다 일정을 조율해줘서 나한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직장이다.
데뷔 8년차이니 곧 10년을 바라보는 시점이다. 생각이 많을 시기인데.
정말 모르겠다. 내가 어떻게 될지. 그러다 보니 궁금하기도 하고. 하고 싶은 건 분명하다. 연기하고 싶다. 내게 주어진 것을 잘하고 싶다. 올해 <인서트>랑 <공원에서>를 작업하며 즐거웠다. 두 작품이 이렇게 상영이 돼서 많은 사람과 나눌 수 있어서 기쁘다.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다.
만나고 싶은 감독이나 작품이 있나.
당장 떠오르는 감독님은 홍상수. 예전부터 하고 싶다는 생각이야 있지만 쉬운 일은 아니지 않나. 홍상수 감독님 작품 속에 나오는 배우들이 다 신기하다. 연기도 잘하고 되게 독특한 느낌이다. 이질적인 듯하면서 또 자연스러운, 그 특유의 호흡과 분위기를 한번 느껴보고 싶다.
오늘 “잘하고 싶다”라는 말을 몇 차례 했다. 배우가 생각하기에 연기를 잘한다는 건 무슨 뜻인가.
작품을 보는 사람에게 와닿으면, 마음에 남는 순간이 한두 번이라도 있다면 잘한 연기 아닐까. 내 연기가 누군가에게 그렇게 가 닿을 수 있다면 정말 정말 좋을 것 같다.
완성된 영화를 보고 나서는 만족했나.
나 같지 않아서, 내가 연기하는 것 같지가 않아서 좋았다. 내가 아닌 인물이라는 거리감을 느낄 수 있어 스스로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이전에는 작업하고 편집본이나 영화를 보면서 ‘왜 저렇게 연기했지? 이렇게 하면 좋았을걸.’ 아쉬워했던 적이 많다. 마음 한구석에 늘 자의식 같은 게 남아 있었는데 <인서트>는 호흡이 긴 장편 작업이어선지 이상하게 그런 생각이 안 들었다.
새로운 시작을 보는 느낌이다. 연말 연초에 계획한 것들이 있다면.
원래 신년 계획 같은 거 안 세우는 편인데 작년에 한 번 세웠다. 장편영화 주연 맡기. 그러니까 꿈을 이룬 셈이다. 지금도 꿈꾸는 것 같다. 내년에도 좋은 사람들과 좋은 작업 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