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매다 보면
<미망> 김태양·이명하·하성국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4-11-24

김태양 감독의 데뷔작 <미망>은 단편 <달팽이><서울극장><소우>를 차례로 연결한 3막 구조의 영화다. 보통의 연작 시리즈와 달리, 막과 막 사이에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다는 점이 특징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만남과 이별을 거듭하며 차근히 나이를 먹는다. 여기엔 하나의 관계를 요리조리 뜯어보는 집요함 대신, 스치고 멀어지는 인연의 갈래를 그러안는 넉넉함이 있다. 여자(이명하)와 남자(하성국)는 어느 여름 종로에서 우연히 마주쳐 함께 걷고, 구태여 다음을 기약하지 않은 채 헤어진다. 둘은 한참 후, 옛 친구가 세상을 떠난 일을 계기로 재회한다. 다시 광화문 일대를 나란히 걷고, 속마음을 낱낱이 밝히기보다는 서로의 그늘진 부분을 눈길로만 살피다 돌아선다. 뜨겁게 타오르던 열망이 지나간 자리에서 미련과 아쉬움이 일렁인다는 것, 인생의 어느 시기에 받아 든 제 몫의 숙제는 오래오래 풀어야 한다는 것. <미망>은 그런 비밀을 속삭인다. 영화 중반부, 여자는 조카와 통화하다가 “이모 사랑해요”라는 말을 듣고 울음을 참는다. 그토록 티 없는 사랑이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것인지, 살다 보면 문득 깨닫는 날이 온다. 조건 없는 애정을 덥석 받을 만큼 어리지 않아서 눈물을 글썽이지만, 또 그에 힘입어 용기를 낸다. <미망>과 함께한 지난 4년간 김태양 감독과 이명하, 하성국 배우도 마찬가지였다. 세 친구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뭔가를 깨우치며, 무사히 한 발짝 내딛는 모습을 지켜보며 한 시절을 통과했다. 영화를 관객에게 떠나보내는 날, 이들은 감사와 축하와 응원을 담아 서로 인사한다. “너 참 예쁘게 컸다.”

 

 

단편 세 편을 엮어 장편을 완성했다. 개별 단편을 영화제에 공개하기도 했는데, 이 작품들을 장편으로 모을 수 있겠다고 판단한 건 언제쯤이었나.

김태양_ <달팽이>를 이틀에 걸쳐 찍었는데 마지막 씬 촬영하면서 확신이 들었다.

이명하_ 나한테는 첫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음먹었다고 그랬는데? 

김태양_ 명하랑 성국이 횡단보도에서 악수하며 헤어지는 장면. 아, 1회차였구나. 그때 명하가 서울극장에 간다고 했으니, 다음 작품에서는 서울극장을 배경으로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에 같은 날로 곧장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몇 년쯤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저녁으로.

 

촬영 중에 연작을 기획했다는 점도 신기한데, 두 작품에 시차를 만들기로 한 것은 더 놀랍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김태양_ 갑자기 상상으로 우주까지 가는 사람들 있지 않나. 누군가를 처음 만났는데 결혼까지 생각한다거나 애를 낳으면 어떨지 그려본다거나. 내가 이야기를 만드는 방식이 그런 편이다. 일단 하나를 떠올리면 끝까지 쭉 나가게 된다. 이야기 자체가 단순하기도 하고, <달팽이>와 <서울극장>을 동시간대로 잇는 작업에는 별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애초 <달팽이>가 한 편의 시처럼 가닿기를 바랐다. <달팽이>와 <서울극장> 사이에 공백이 있어야 운율이 생긴다고 봤고, 당시 3막 <소우> 또한 어느 정도 계획한 상태였기에 영화의 전체적인 동선을 고려해야 했다. 인물이 거리를 걷는다, 같은 거리를 반대 방향으로 걷는다. 이 흐름이 중요했는데, 실제 동선을 구현하려면 막과 막 사이에 시간 차이를 둬야 말이 되겠더라.

<미망>
<미망>

배우들은 처음 촬영한 날 2막도 찍겠다던 감독을 어떻게 받아들였나. 

이명하_ 당시엔 말하지 않아서 몰랐다. <서울극장> 시나리오를 받고 나서야 앞단의 과정을 들었던 것 같다.

김태양_ <달팽이> 첫 촬영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PD와 음악감독에게 얘기했다. 나는 뭘 찍을 거고, 어떻게 만들 생각이다. 다들 당연히 흘려듣지. ‘그게 되겠어?’라는 느낌이었다. 스태프와 배우들 모두 ‘찍게 되면 그때 가서 말하겠지’라는 식으로 편하게 생각해 줬고, 나도 영화를 찍을 시기가 됐을 무렵 시나리오를 건넸다. 중간에 하성국 배우에게만 <소우> 트리트먼트를 보내며 영화의 전체적 얼개를 공유했다. 이런 흐름으로 진행될 거라고.

 

왜 하성국 배우에게만?

김태양_ 배우 대 연출자로서가 아니라 오랜 친구이자 동료로서 의견을 물었다. 하성국 배우랑 영화 이야기하는 걸 굉장히 좋아한다. 평소 작업 과정에서도 이 친구 의견을 경청하는 편이라 한번 물어봤다. 이러이러한 작품을 만들어 볼까 하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하성국_ 나 뭐라고 했나?

김태양_ 흥미롭다고 했다. “이거 진짜 되기만 하면 재밌을 것 같은데?”

 

영화 속에서만 시차가 생긴 것이 아니라, 실제 촬영도 마찬가지였다. 2019년에 <달팽이>를 찍고 나서 3년 후에 <서울극장>과 <소우>를 찍었는데, 배우 입장에선 영화와 현실이 묘하게 맞닿는 기분이지 않았을까 싶다.  

이명하_ <달팽이> 찍으면서는 완결된 하나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서울극장> 시나리오 보내줬을 때도 실은 독립된 단편으로 여겼다. 명하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나오긴 하지만, 어쨌든 <달팽이>와는 무관한 내용이라고. 그러다 <소우>를 찍으면서야 문득 ‘이게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되는 거구나’라고 체감했다.

 

하성국 배우는 2막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혼자 3막을 기다리던 중이었나.

하성국_ 그때만 해도 <소우> 시나리오가 없었다. 대신 태양에게 2막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전해 들었고, <서울극장> 촬영장에도 갔다.

김태양_ 극장 관객으로 엑스트라 출연했다. (웃음)

하성국_ 촬영장에서 되게 재밌었다. 영화엔 드러나지 않는 시간과 1막부터 3막까지 이어져 완성되는 이야기를 혼자 상상하다 보니 즐겁더라. 

하성국 ⓒ이영진

결국 세 편의 단편영화를 나눠 찍는 방식으로 데뷔작을 만들었다. 4년에 걸쳐 첫 장편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이 쉽진 않았겠으나, 자신감이 없었다면 애초 선택하지 못할 방식이라고 본다. 감독을 곁에서 지켜본 배우들의 생각이 궁금한데.

하성국_ 20대부터 동문수학하며 감독을 오래 봐온 입장에선 이런 결정이 그리 특별하다거나 특이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이 친구는 늘 그랬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 계속 노력했고, 또 계속 단편을 찍었다. 늘 하는 일, 밥 먹듯이 하는 일을 하는구나. 운 좋게 나도 같이하게 됐구나. 그 정도의 느낌이지, <미망>을 만드는 일이 아주 특별한 이벤트처럼 다가오진 않았다.

김태양_ 자신감을 갖고 ‘이 영화를 완성하면 뭔가 될 거다’라는 마음으로 임한 것이 아니라, 그냥 영화가 떠올랐고 ‘시나리오를 썼으니 완성해야지’ 했다. 다만, 이런 실험적 구조를 지닌 작품이 제작지원 내지 투자를 받기란 쉽지 않으니 현실적으로 고민할 부분이 있었다. 그래도 내 아이디어를 실현하기엔 용이한 구성이라고 판단했고, 내가 원하는 걸 해보자는 목표만은 분명했다.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찍고 싶었다. <미망>이 내 삶을 바꿔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어차피 상업 영화가 아니니 하고 싶은 대로 한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이었고, 그 다음엔 동료들과 끝까지 좋은 마음을 나누며 영화를 완성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명하_ 태양이 길게 얘기했지만, 솔직히 몇 년간 이 친구를 지켜본 사람으로서 말하면 그거 자신감 맞는 것 같다. 얘는 못할 거라는 생각을 안 하거든. 무조건 해내고 말겠다는 식으로 돌진한다는 뜻이 아니라, “근데 난 못하지는 않을 것 같아” 그런 느낌이 있다.

김태양_ 비슷한 사고 방식을 갖고 있긴 하다. 못 이겨도 절대 지지는 않는다는 마음가짐으로 살려고 한다.

하성국_ 사실 술 먹으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내가 짱이야!” 

김태양_ 오해다.

하성국_ 무수한 기성 감독들을 언급하다가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다 됐어, 내가 짱이야!” 

김태양_ 그렇다고 하자. 넘어가자. (웃음) 

이명하_ 오늘 셋이 같이 나와서 다행이다. (웃음)

 

감독이 실제로 길을 걷다가 이명하 배우를 우연히 만나고 나서, 그 일화를 바탕으로 <달팽이> 시나리오를 완성했다고 들었다. 하성국 배우와는 같은 학교를 나왔고, 이명하 배우와는 어떤 인연인가.

김태양_ 성국이가 소개해 줬다.

이명하_ 당시 난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한 후였다. 중대 작품 촬영장에서 동갑내기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에게 성국이를 소개받았다. 밥 먹는 중이었나? 

하성국_ 족발집.

이명하_ 어어, 맞다. 그 친구가 “건대 영화과 다니는 친구가 근처라는데 잠깐 오라고 해도 돼?” 묻기에 그러라고 했거든.

김태양_ 하성국 배우가 이명하 배우를 소개해 준 이유는 당시 준비하던 작품이 있어서였다. ‘집까지 무사히’라는 제목의 남매 이야기였다. 성국에게 “동생 역은 네가 했으면 좋겠는데 누나 역을 누가 하면 좋을까?” 물었더니 최근에 만난 배우가 있다며 명하 누나를 얘기했다. 그때 처음으로 셋이 모였다. 영화는 못 찍었지만.

이명하_ 그 이야기 재밌었는데. 

김태양_ 아직도 찍고 싶다.

이명하_ 결국 작품이 중단되면서 한동안 서로 만날 일이 없었다. 태양이랑 우연히 만난 날, 신기했던 게 내가 원래 가려던 길이 아니었거든. 일부러 한번 돌아가 볼까 싶어 걷고 있는데, 저 앞에 익숙한 뒷모습이 보이는 거다. ‘맞는 것 같은데?’ 하면서 다가가 어깨를 두드렸더니 태양이가 딱 돌아보더라. 잠시 같이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러고 며칠 뒤에 갑자기 시나리오를 받았다. 처음에 보내준 시나리오는 지금 버전보다 훨씬 더 그날의 대화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 많았다.

 

우연히 만났다는 거리도 을지로였나.

김태양_ 영화 속에 등장하는 길을 똑같이 걸었다. 실제로 난 이어폰을 낀 채 여자친구와 통화 중이었고, 누가 뒤에서 톡톡 두드려서 돌아보니 명하 누나였다. 앞질러 가서 얼굴을 확인하긴 좀 그렇지 않냐는 대사도 실제로 누나가 했던 말이다. 서로 근황을 묻고, 이 길이 맞는지 저 길로 가야 하는지 살펴보기도 하고. 그러다 누나가 요즘 뭐하면서 지내냐고 묻기에, 난 그림을 그린다면서 ‘그림 규칙(지울 수 없게 펜으로 그리기, 틀리더라도 수정 없이 계속 그리기, 할 수 있는 만큼 선을 최대한 길게 쓰기, 시작하면 반드시 완성하기)’도 얘기해줬다. 우리 얼마 만에 만나는 거냐,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다, 그날 누나 녹색 야상 점퍼 입고 있었다 등등. 영화에 나오는 대사와 상황이 실제로 우리가 우연히 재회한 그날의 일화와 겹친다. 서울극장 앞 횡단보도에 데려다주고 헤어진 것까지도. 마지막에 인사하는데 누나가 “태양아, 우리 언제 영화 찍지?” 묻더라. “얼른 하자. 나도 영화 찍고 싶어. 금방 찍자.” 내가 그랬다. 

김태양 ⓒ이영진

말을 했으니 마음에 남았겠네. 

김태양_ 그게 컸다. 금방 찍자고 얘기를 했으니 금방 찍어야지. 누나랑 헤어지고 그림 수업을 들으러 가서도 자꾸 생각이 났다. 그날 일을 일기로 적은 다음, 누나한테 바로 보냈다. 일주일 후에 시나리오를 완성했고, 한 달 지나서는 <달팽이>를 찍었다.

이명하_ 추진력이 대단했네.

김태양_ 영화 찍자고 처음 모였을 때, 제작비를 마련하지 못하는 바람에 결국 중단해야 했다. 근데 이건 길에서 바로 찍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팀원들을 모으고 촬영 일정을 바로 잡았다. 하필 촬영하는 날 태풍 예보가 뜨더라. 한 달을 미뤘는데 다음 달에도 똑같이 태풍 예보가 떴다. 이건 어쩔 수 없다, 태풍이 와도 찍겠다, 하고 비 내리는 상황으로 설정을 바꿨다.

이명하_ 비가 안 내릴 수도 있던 거 아니었나?

김태양_ 그래서 우산을 들고 다니기로 했지. 중간에 비가 오면 우산을 펼치면 되니까. 명하랑 성국이 1회차, 성국과 수지가 2회차였다. 태풍이 온다고 했는데 막상 1회차 촬영하는 동안 잠잠했다. 1회차와 2회차가 영화 속에선 하루이니 날씨가 너무 다르면 연결이 어색했을 텐데, 다행히 비슷했다. 거리를 걷는 행인들도 다들 우산을 챙겨 든 상태여서 명하랑 성국이 우산을 든 것도 자연스러워 보였고. 

 

을지로는 영화가 출발한 곳이자 서울을 상징하는 풍경이다. 다만, 인파가 오가는 도심이라는 점에서 촬영에 최적화된 공간은 아니다. 실제로 감독은 변수에 대비하고자 시나리오를 여러 버전을 준비하고, 콘티 작업, 테스트 촬영, 리허설 등 사전 준비를 철저하게 했다고 들었다. 이러한 수고를 감내하면서까지 을지로를 포기할 수 없던 이유가 있을까.

김태양_ 단순하다. 하기로 했으니까 했다.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니니, 감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잘하려면 많이 준비하는 게 맞다. 내가 부탁한 일이지 않나. 배우와 스태프는 내 이야기로 모인 사람들이다. 이들이 각자 연기를, 촬영을, 현장 진행을 잘하도록 내가 나서서 준비하는 건 당연했다.

이명하_ 그러면 너랑 내가 종로에서 만났다는 사실이 촬영지를 종로로 선택하게 된 유일한 이유인가? 거기서 만났으니 무조건 거기서 찍겠다?

김태양_ 종로를 워낙 좋아하기도 했고. 그림을 배우고 그리면서 종로를 샅샅이 돌아다녔다. 성국과 종로에서 술도 자주 마신다. 지역에 살다가 서울로 와서 그런가. 종로 일대가 서울을 상징하는 공간처럼 느껴진다.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곳이고, 흥미로운 풍경을 발견할 수 있다. 일단 종로에 가면 기분이 좋다. 기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하성국_ 우리 맨날 하는 말이다. “여기가 기운이 좋아~”

이명하_ 재밌는 곳이지. 시끌벅적한 포장마차 거리 옆에 고개만 돌리면 궁이 보이고. 예전엔 궁을 봐도 별 감흥이 없었는데 30대 되고 나선 참 좋더라. 

하성국_ 울적하면 괜히 광화문 쪽을 걷는다. 이유 없이 기분 좋아진다. 

김태양_ 나도 가끔 기운이 좀 안 좋다 싶으면 경복궁 찾아간다. 

 

연기에 관해서도 사전에 세세하게 약속해 놓는 편이었나. 현장에서는 신마다 모니터링하고 일일이 디렉팅하기 어려웠을 것 같은데. 

이명하_ 촬영하기 전에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줬다. 어떤 영화가 될 것이다, 감을 잡고 연기할 수 있도록. 류시화 시인의 시를 보내주기도 했는데, 그걸 읽으면서 전체적인 느낌을 파악했던 것 같다. 현장에서 집요하게 디렉팅을 한다기보다는 사전에 영화의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편이다. 연기에 관해서는 나를 믿고 맡겨준다는 느낌이었다.

하성국_ 내 경우엔 파트마다 조금씩 달랐다. <달팽이> 촬영할 때는 명하 누나 말처럼 내게 맡기는 느낌이었고, 생각보다 디테일한 디렉팅이 없었다. 모니터링하거나 오케이 테이크를 보니 그렇게 해야 하는 영화더라. 나의 어떤 연기보다는 거리 풍경이라든지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더 중요해 보였다. 인물 위치 정도만 정확히 지켜달라고 요구했고, 그 외 대사 톤이나 감정 등은 자유롭게 열어줬다. 감독은 지금 연기뿐만 아니라, 연기만큼 중요한 다른 뭔가를 보고 있다고 느꼈다. 그런가 하면 <소우>는 현장에서 연기 얘기를 거의 안 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상태였던 걸까?

하성국_ 일단 내가 <소우> 시나리오를 너무 좋아했다. 마음에 안 들거나 수정했으면 하는 부분도 없었다. 태양이 뭘 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달팽이>를 촬영할 때와는 또 다른 시각으로 작품을 바라봤다. 나름 실험을 해보겠다는 마음으로 촬영에 임했다.

이명하 ⓒ이영진

어떤 실험?

하성국_ 세 편을 나눠 찍기는 하지만 이전까지는 어쨌든 한 작품으로 인식했는데, <소우> 시나리오를 읽을수록 그 생각을 안 하고 싶더라. <소우>와 <달팽이> 속 성국이 전혀 다른 인물이어도 되겠다는 느낌이 있었고, 영화에서 그렇게 해보려고 했다. 카메라 앞에 존재하는 것이 이상한 일 같다는 고민을 많이 하던 시기다. 연기나 대사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만 딱 집중하고 싶었다. 나만의 실험이었는데, 태양이가 보면서 별말 안 하더라. 난 감독이 갖춰야 할 덕목 중 하나가 빠른 판단이라고 생각하거든. 이 친구가 그게 좋다. 콘티상 컷 수가 많은 장면도 있었는데, 촬영이 지체된 적은 거의 없다. 때마다 태양이 빠르게 판단해서 이 정도면 충분하다, 다음 신으로 넘어가자, 하더라. 

이명하_ 듣고 보니 우리 진짜 연기 얘기는 별로 안 했던 것 같다. 전체적인 작품 얘기를 오히려 많이 하고.

김태양_ 그런 면도 있는데 실은 배우마다 디렉팅 방식이 달랐다. 성국은 나랑 소프트웨어가 비슷한 사람이다. 당시 내가 배우들에게 원했던 방향과 성국의 실험이 일치한다. 해당 장면의 전후는 내가 생각할 테니, 배우들은 현재 마주한 상황만 생각했으면 했다. 준비해 온 연기를 펼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상황을 느껴 달라고 주문했다. 그 후 리허설하며 조율하는 과정을 거쳤다. 내 눈에 불협화음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으면 앙상블을 다시 맞추고, 또 리허설하고. 캐릭터 해석과 관련해서는 사전에 대화로 합의점을 찾아 나갔다. 명하 누나는 작품의 전반적 내용과 분위기, 캐릭터의 변화 등을 질문했다. 반면에 성국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두 배우가 다른 사람이기에 디렉팅이라든지 소통 방식도 자연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두 배우가 닮은 면도 있다. <미망>을 포함해 그간 필모그래피를 돌이켜보면 캐릭터에 기대지 않는 영화를 주로 선택한다는 느낌이다. 하성국 배우가 말한 ‘실험’과도 이어지는 얘기다. 인물의 감정선이나 극적인 변화를 그리는 작품보다 존재하기에 무게를 두는 작업에 끌리는 이유가 있나. 둘 다 당시 연기하며 어떤 고민을 했는지도 구체적으로 듣고 싶다.

이명하_ 성국처럼 뭔가를 실험한 적은 없다. 자연스레 작품을 만났고, 그때그때 최선을 다해 집중하려고 했다. 특별히 의도해서 작품을 선택하거나 연기를 다르게 시도했던 경우는 없다. 성국은 본인만의 목표가 있는 것 같은데, 난 여태껏 감독이 원하는 그림에 맞추려고 노력했던 편이다. 얘기를 듣다 보니 우리가 이런 점이 반대구나 싶다.

하성국_ 나는 새로운 작품 할 때마다 새로운 과제를 하나씩 갖고 들어간다. 당시 내 고민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카메라 앞에서 뭔가를 연기한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일처럼 느껴졌다. 촬영을 시작한다고 해서 갑자기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인물로 변신하거나, 나랑 아무 상관도 없는 면을 표현할 수는 없겠더라. 결국 그 작품을 촬영하기 전까지 내가 실제로 살아가야 하는 시간이 있지 않나 싶다. 그런 일상의 경험이 응집해서 하나의 목표 혹은 실험 과제가 되고, 나는 그걸 현장에 들고 간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기록을 남긴다. 영화 속 나는 내 과거다. 촬영 후 완성된 영화를 보면 기분이 좋다. 깨끗해지는 마음이 생긴다. ‘이제 제로베이스로 돌아가서 다음 작품 기다리는 동안 또 다른 실험을 준비해야지.’ 그런 마음이 있어야 연기를 예술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다.

 

<도망친 여자>(2019)부터 <여행자의 필요>(2024)까지 거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홍상수 감독 작품에 출연하고 있다. 그 영향이라고 볼 수 있을까. 

하성국_ 어떤 자극이나 훈련을 분명히 경험하지. 홍 감독님 영화 현장도 워낙 특이한 곳이고.

 

끊임없이 제로베이스로 돌아가는?

하성국_ 매일 아침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한다. (웃음) 생각이 없을 수가 없는, 굳이 생각하고 있어야 하는 현장이다. 사실 감독님과 작품을 떠나서 무엇보다 운이 좋다고 느끼는 건, 경력이 2, 30년씩 쌓인 선배님들과 연기할 기회를 얻었다는 거다. 선배님들과 호흡 맞추고, 그분들 준비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얘기 듣고. 그 과정에서 많이 배우고 영감을 얻는 것 같다. 감독님한테는 자주 혼나지만. 

이명하_ 안 혼내실 것 같은데?

하성국_ 엄청 혼난다.

이명하_ …왜 그렇게 하냐고? (일동 웃음)

하성국_ 이거 아니다 싶으면 모니터 보시다 “쯧!” 하고 고개를 돌리시지.

이명하_ 너의 말이 아닌 것처럼 말할 때?

하성국_ 가짜 같을 때. 말이 안 될 때. 

하성국 ⓒ이영진

얘기 나온 김에 말하기에 관해서도 묻고 싶다.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을 사로잡는 영화다. 거리 소음, 발걸음 소리, 빗소리 등 다양한 사운드 위에 인물들의 대화를 얹는다. 두 배우의 음성에 내내 감탄했다. 안정적인 발성과 단정한 말투가 매력적인데, 결정적으로 심심하지 않다. 어른 여자와 어른 남자의 말하기라고 해야 할까. 실제로 캐스팅하면서도 이 배우가 어떤 목소리를 가졌고 어떻게 말하는지를 중요하게 봤는지 궁금하다.

김태양_ 캐스팅에 관해 먼저 얘기하면 애초 이 배우 아니면 안 된다는 확고한 생각이 있었다. 성국만큼 명하 누나도 당시 고민이 많았다. 둘 다 거친 시기를 통과했지.

이명하_ 연기 안 한다고 그랬거든.

김태양_ 성국도 마찬가지였다. 영화 찍기로 해놓고는 촬영하기 일주일 전에 갑자기 연기 안 하겠다고 하더라. 바로 잡으러 갔다.

하성국_ 부산으로 도망을 쳤는데 그날 KTX 타고 쫓아오더라.

김태양_ 막상 가서는 설득도 못 했다. 옆에서 가만히 있다가 서울로 올라와서 문자를 보냈다. 성국이 이 작품을 해야 하는 이유를 쓰면서 그냥 ‘너였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고 났더니 다음엔 명하 누나가 제주도 내려가고. 

이명하_ 내려가지는 않았지. 나 이제 연기 못할 것 같다고, 제주도 가겠다고 말은 했지만. 

김태양_ 아까 소프트웨어가 비슷하다고 했는데, 하성국 배우랑 20대를 같이 보내면서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친구로서 존재하는 자리가 크고, 삶을 함께 알아가는 느낌을 받는다. 영화를 같이 공부하고 연구하는 동료이기도 하다. 한편, 명하 누나와는 하드웨어가 비슷하다. 본능적인 생각의 흐름, 기본 사고 체계와 방식이 비슷한 사람이다. 예컨대 내가 어떤 대사를 고민하고 있으면, 누나도 잠시 후 조용히 다가와서 “태양아, 이 대사는 조금 걱정이 돼”라고 하는 식이다. 내게는 두 배우 모두 꼭 필요했다. 이들이 캐스팅 1순위였고, 사전에 대화를 많이 나눴다. 성국이야 평소에도 종종 만나니 맛있는 거 먹고 술 마시면서 수다 떨었고, 누나랑은 계속 산책하면서 이런저런 잡다한 얘기를 꽤 나눴다.

이명하_ 태양이 남의 이야기를 되게 잘 들어준다. 

하성국_ 배우들이 단아하고 단정한 말투를 쓴다고 표현했는데, 실은 시나리오 자체가 그랬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게 글을 써놓았다. 소프트웨어가 어떻고 하드웨어가 어떻고 하는 말이 결국 감독이 자신의 면면을 배우들에게 묻힌다는 뜻이지 않나. 감독의 어떤 부분을 체화하며 대사를 완성했던 것 같다. 배우의 목소리와 말하기에서 기자가 언급했던 요소들은 한편으론 감독에게 다 있는 부분이거든. 

 

감독과 시나리오의 힘을 부정할 순 없지만 배우 스스로 구현한 면도 분명히 있겠지. 예를 들어 성국은 명하를 만나고 난 후, 연인 수지에게 “내가 잘 기억을 못해도 괜찮아요?”라고 묻는다. 이 대사를 느끼하거나 지저분하지 않게, ‘난 완벽한 사람이 아녜요’라는 뉘앙스 정도만 전달한 건 배우의 능력과 기술 아닐까.

하성국_ 근데 나 그 대사 하면서 감독 생각했다.

이명하_ 나도 속으로 그랬다. ‘저거 김태양 말투인데?’ (웃음) 그 대사 할 때, 성국이 목소리가 태양이 목소리로 들린다. 

김태양_ 내가 대본을 말하면서 쓴다. 글에 내 습관과 기질을 녹여서 배우들을 나의 분신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는 전혀 없다. 그냥 영화에 어울리게 글을 쓰려고 한다. 영화에 맞는 대사를 쓰고, 영화에 맞는 형식을 취하고, 영화에 맞는 카메라 워크를 구현한다. <미망> 시나리오를 쓰면서 이 영화의 대사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울극장>의 박봉준 배우가 대사를 구사하며 어려워했던 기억이 난다. 평소 본인 말투와 다르거든. 그 인물은 어미도 ‘다나까’로 처리하게 했다. 영화 속 영화인 <미망인>(박남옥, 1955)에서 튀어나온 사람처럼 말하고, 옷도 정장 스타일로 입혔다. 봉준 배우가 처음엔 세상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며 힘들어  했는데, 완성된 영화 보고 나선 좋아했다.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봤다며 ‘내 안에 저런 사람도 있었나?’ 생각했다고 하더라. 배우들 각자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을까 싶다.

이명하_ 내 경우엔 상황 덕을 크 본 것 같다. 1막부터 3막까지 계속 등장하는 유일한 인물이 명하다. 정수지 배우를 제외하면 모든 배우를 한 번씩은 만난다. 때에 따라 목소리나 말하기 방식을 의식적으로 바꾸지 않아도, 일상에서 그러하듯 연기하면서도 관계마다 조금씩 다른 색이 나오더라.

 

두 배우에게 <미망>은 시간을 두고 서로를 천천히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달팽이>와 <소우>를 비교하면 어떤가. 상대 혹은 관계의 변화를 현장에서 느낀 적도 있는지. 

하성국_ 변화는 잘 모르겠지만 명하 누나랑 연기하면 늘 재밌다. 나랑 달라서, 나와는 상반된 방식으로 접근하는 게 느껴져서. 똑같이 호흡하고 똑같이 말하는 사람끼리 붙여두면 편하긴 해도 재미는 덜하다. 누나처럼 완전히 다른 배우를 만나면 예측할 수가 없다. 받을 때도 ‘이건 뭐지?’ 하며 흥미롭고, 줄 때도 ‘여기엔 어떻게 반응할까?’ 기대된다. 누나가 당황하면 어쩌나 싶어 살짝 걱정은 하지만.

이명하_ 하나도 안 당황스럽다. 나도 재밌다.

김태양_ 명하 배우는 그걸 즐긴다. 주성치 영화에 나오는 태극권 같다고 해야 하나. 뭐든 다 받아주겠다는 느낌으로 상대를 대하거든. 같이 연기한 배우들이 다들 좋아한다. 모니터 보면 막 재밌어하는 게 느껴진다.

이명하_ 직접 말한 적은 없지만 난 ‘성국이 변했구나’ 느꼈던 적이 있다. <소우> 촬영하면서 성국이 되게 편안해 보였다. 여유가 생긴 느낌이었고, 연기하면서 훨씬 편했다. 성국이 혼자 실험 중이라는 건 몰랐고. (웃음) 연기하다 보면 상대 배우의 감정이나 상태가 내게 전염된다. 상대가 불안하면 덩달아 불안해지는데 <소우>는 전체적으로 편안했다. 성국이 느긋해졌구나 싶었다. 예전에는 더 어렸으니 가시 같은 게 있었는데, 어느새 잘 다듬어진 느낌이었다.

김태양 ⓒ이영진

<미망>도 나이 먹는 일을 다각도로 비추는 작품이다. 인연의 교차와 어긋남, 새로운 직업과 일터를 찾아가는 과정, 가족 구성의 변화, 가까운 이의 죽음 등 삶에 깃드는 크고 작은 소란을 포착한다. 극 중 인물과 마찬가지로 배우들도 영화를 찍는 사이 조금씩 나이를 먹었는데, 영화 보면서는 어떤 장면 혹은 상황에 가장 마음이 가던가. 

하성국_ <서울극장> 후반부를 좋아한다. 조건 없는 마음을 주는 조카와 그에 반응하는 명하 모습이 인상적이다. 명하가 혼자 남아서 이순신 동상 앞까지 걸어가는 장면도 기억에 남는다. 그 시간대를 좋아한다. 왁자지껄한 분위기에서 회식하고 집에 들어가기 전에 혼자 조용히 보내는 시간. 가족과 전화하고 버스 타러 가는 흐름도 좋다.

이명하_ 내가 가장 좋아하는 파트는 3막 <소우>다. 앞선 1-2막보다는 명하가 지나간 시간을 좀 더 다독일 줄 아는 상태가 된 것 같아서. 물론 3막의 명하도 정답을 다 알 수는 없겠지. 근데 어떤 표현이 정확할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은 달라진 것 같다. 그게 좋다. 마지막에 인물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도 마음에 들고. 

 

3막에서 명하가 어떤 종류의 실수는 더는 안 하는 사람이 됐구나 싶더라.

이명하_ 그래, 우리 모두 나이를 먹었거든. 어떤 실수는 안 하고, 또 안 할 수 있다. 

 

명하가 어른스러워 보이는 이유 중 하나는 사과를 잘해서다. “그래도 미안해” “미안한 건 미안한 거야” 등 비슷한 대사를 반복하는데, 특유의 담백한 태도 덕분에 미련하거나 약하게 느껴지지 않더라. 

이명하_ 지금 깨달았다. 나 미안하다는 말을 계속하는구나. 

김태양_ 아니, 누나 나한테 그거 질문한 적도 있다. 

이명하_ 내가?

김태양_ “이 사람은 왜 자꾸 미안하다고 해?”

이명하_ 그래서 뭐라고 답해줬나. 

김태양_ 사과할 줄 아는 사람, 관계나 감정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미안한 일에 대해서 미안해하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했다. 고마운 건 오래도록 고마워하는 사람이면 좋겠고.

이명하_ 미안. 내가 물어보고선 까먹다니. (웃음)

김태양_ 나도 까먹는다. 이렇게 얘기하다 보니 기억이 들춰지는 거지. 

 

하성국 배우가 기타 치며 장기하의 ‘별거 아니라고’를 부르는 장면도 이야기 안 할 수 없는데.

하성국_ 안 해도 된다. (웃음) 감독이 선곡한 노래다. 시나리오에 가사를 이미 써놨다. 말하다 보니 궁금하네. 왜 노래를 넣었나?

김태양_ 그 가게에서 사람들이 실제로 노래를 많이 한다. 성국 배우가 어릴 적 밴드를 했다는 걸 알고 있기에, 자연스레 노래하는 상황을 떠올렸다. 영화 속 성국은 속내를 시원하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명하에게 만나는 사람 있냐고 물었을 때 딴에는 용기를 낸 것일 텐데, 명하가 있다고 하니 곧장 마음을 접어버린다. 별일 아닌 척하고. 자기 마음을 얼른 접어서 안 보이게 감추는 이유가 뭘까. 내 생각엔 창피해서가 아니라 배려하려는 것 같았다. 제 감정을 드러내면 명하가 미안해하거나 불편할 수 있으니 알아서 물러나는 거다. 그럼에도 노래를 빌어 마음을 전달하고 싶은 욕심도 있겠다고 봤다. 동시에 ‘별거 아니라고’는 세상을 떠난 친구 정수에게 전하는 노래이기도 하다. 사랑했던 친구에게 불러주고 싶은 노래. ‘너한테 참 고마웠어’라는 말을 들려주고 싶겠구나 생각하며 그 노래를 선택했다. 

이명하 ⓒ이영진

‘우리가 함께였을 때는 남은 시간을 모두 약속했었지. 잡은 손 놓칠 일 없이 무덤까지 걸어갈 거라며 깔깔거리며 웃곤 했었지.’로 시작하는 가사가 절묘하다. 

김태양_ 성국 배우가 노래하는 장면을 좋아한다. 듣기 좋다. ‘깔깔거리며 웃곤 했었지’를 부를 때 실제로 웃어 달라고 지문에 썼는데, 진짜로 그렇게 해줬다. 가사 하나하나를 잘 얘기해서 불러주는 게 고마웠다. 사실 성국이 촬영하며 힘들어했다. 되게 오래 여러 번 불렀거든.

하성국_ 콘서트 하는 줄 알았다. 편집점 생각해서 끊어 찍어도 될 법한데, 무조건 처음부터 원테이크로 찍어야 한다고 하더라.

이명하_ 성국이 노래하다가 일순 울컥하는데 끝까지 안 울고 참지 않나. 그 장면을 좋아한다. 차라리 얘가 울면 나는 안 울 것 같은데, 얘가 안 우니 보는 내가 목이 메더라. 그리고 노래를 잘 부르지 않아서 좋다. (웃음) 거기서 막 기교 부리고 가수처럼 멋지게 부르면 안 될 것 같다. 성국이 담백하게 끌고 가서 좋았다.

하성국_ 테이크를 여러 차례 갔는데, 울컥했던 건 딱 한 번 뿐이었다. 지문에도 없던 내용이고 의도했던 액팅도 아니다. 글쎄, 모르겠다. 자꾸 노래하니까 힘들어서 울었나 보다. (웃음) 실은 노래하며 가사랑 멜로디를 계속 반복하다 보니 순간 감정으로 오는 게 있더라. 눈물 참으면서 속으로 ‘안 되는데. 이거 한 번 더 불러야 하는데.’ 걱정했다.

김태양_ 내가 절대 울지 말라고 했거든.

이명하_ 어쩐지 엄청나게 참더라. 

하성국_ 현장에서는 그 테이크를 못 쓰겠다고 했다. 울컥하는 게 과해 보여서. 근데 나중에 편집본을 보니 수십 가지 테이크 중에 그거를 골라 썼더라.

 

편집실에서 왜 마음을 바꿨나.

김태양_ 담담하게 부르는 모습이 센 척하는 것처럼 다가오더라. 그러니까 연출의 선택인 건데 난 청승맞게 굴고 싶지 않았다. 노래에 본인을 이입하며 울고, ‘난 멋있는 남자고 이건 서글픈 슬픔’이라는 식으로 자신을 스스로 연출하는 모습은 꼴사납다고 여겼다. 그건 자아도취이지, 상대를 배려하거나 사랑하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울지 말라고 했다. 감정이 크게 오면 느끼고 드러내기도 하되, 눈물은 흘리지 말자. 얼른 숨겨보자. 다행히 그 장면에서 성국이 울컥했다가 금세 추스렸다. 나중에 보니 그게 좋더라. 눈빛에서도 여러 가지 생각과 감정이 보이고. 

하성국_ 장기하 님이 노래를 정말 잘한다는 걸 알게 됐다. 듣기에 쉬운 노래가 오히려 부르긴 어렵다. 원래 고수들이 그렇지 않나. 어려운 일도 쉽게 쉽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노래를 그렇게 가볍게 부르다니 존경심이 생겼다.

 

<소우>라는 소제목처럼 영화 내내 작은 비가 내린다. 필름 질감을 구현한 화면과 잘 어울리는 설정이다. 도시의 불빛, 저녁 어스름, 비에 젖은 거리 등이 한데 섞여 영화의 무드를 만들더라.

김태양_ 실제로는 비가 내리지 않아도 그레인 효과를 주면 비처럼 보이지 않나. 촬영감독과 필름 질감을 구현하려고 굉장히 노력했다. 평소 필름 사진 찍는 걸 좋아한다. 이번에 화면비도 16:9가 아닌 필름 사진 비율로 맞췄다. 필름으로 찍지 않았지만 최대한 그 느낌을 내고자 여러 장치를 활용했고, 테스팅도 많이 했다. 모니터가 아닌 극장 스크린에 맞춰 색 보정했다. 스크린 자체가 매끈한 평면이 아니다. 미세한 입자로 구성된 스크린과 색 보정한 영상이 맞물리면서 좀 더 필름 같은 느낌을 내더라. 그리고 이건 나만 아는 이스터에그인데, 두 사람이 마지막 파트에서 광화문을 걸을 때 자세히 보면 뒤쪽에 “너와 내가 함께 빗속을 걷는다”고 적혀 있다. 교보생명 건물에 걸리는 현수막에 마침 그 문장이 있었다.

<미망>
<미망>

후반작업을 하며 모니터링할 수는 없으니 배우들은 촬영 내내 영화가 어떤 룩으로 완성될지 궁금했겠다. 

이명하_ 작품 준비에 참고하라며 감독이 시를 한 편 보내줬다고 하지 않았나. 영화에 삽입한 노래도 아주 빨리 공유해줬다. 시와 노래 등을 바탕으로 이 영화를 계속 상상했다. 촬영하기 전인데도 혼자 버스 타고 가면서 ‘별거 아니라고’ 듣다가 막 울었다. 영화의 기본 정서가 내 일상으로 꾸준히 들어왔던 거다. 그 상태에서 촬영에 들어가니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김태양_ 그리고 사실 촬영 끝나면 그날그날 사진을 보내줬다. 색 보정까지 다 해서. 배우들이 불안하지 않기를 바랐다. ‘내가 잘했나? 잘하고 있나?’ 괜히 자문하는 날이 있지 않나.

이명하_ 항상 불안하지. 감독에 대한 불안이 아니라 나에 대한 거다. 

김태양_ 불안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싶었다. ‘나를 믿어!’라는 건 무책임한 말 같아서, 이들의 불안을 낮추는 데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방안을 구하려 했다. 당일 촬영분의 스틸 컷을 보내는 것이 그중 하나였다. 계속 보냈더니 성국이는 좀 귀찮아했지만. (웃음)

이명하_ 나한테는 도움이 됐다. 불안을 잠재울 뿐만 아니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머릿속으로 그 이미지를 계속 그려보면서 영화를 따라가게 됐거든. 

하성국_ 태양이가 어느 정도로 열심이냐면, 테스트 촬영한 분량까지 다 공유해줬다. 사진은 색 보정해서 보내고. 리허설도 대충 동선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 나눠서 찍을 만큼 찍은 후에 본 촬영을 시작하는 식이다. 타인을 생각하는 자세이지만, 동시에 본인 스스로 즐기는 마음도 분명히 있다고 본다. 프로젝트의 전 과정을 동료들과 다 같이 나누며 동행하기. 그걸 즐거워하지 않으면 무리한다고 느꼈을 거다.

김태양_ 진심을 털어놓으면 잘하고 싶어서 그렇다. “내가 짱이야!”라는 걸 증명해야 하니까. (웃음) 과정을 즐기는 것 또한 좋은 결과를 내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명하_ 여하간 내 것을 좋아한다는 뜻이잖나. 내가 쓴 글, 내가 만들 영화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는 거다.

김태양_ 배우를 포함해 우리 팀원들을 전적으로 믿으며 작업했다. 배우들이 불안하다고 하면 자연히 말이 나왔다. “왜 불안해? 누나가 얼마나 잘하는데. 봐봐, 성국이도 너무 멋있지?” 다들 충분히 잘해줬고, 각자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게 느껴주길 바랐다. 내가 좋다, 잘한다, 고맙다 하면 상대는 더 열심히 해주더라. 자신감이 생기니 심리적으로 안정되고. 결과적으로 팀원이 만족하면, 감독인 내게도 도움이 된다.

하성국_ 리더가 애쓰고 있으면 뭐라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나. 아무리 자기 영화, 자기 일이라고는 해도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내가 돕지는 못할망정 해를 끼치면 안 되지. 그런 마음도 들고. 

 

영화에 셋의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있겠거니 했는데, 오늘 대화를 나누면서 알았다. 시간만큼 정도 덕지덕지 붙었구나. 각자에게 현재 <미망>은 어떤 작품으로 남아 있는지 들려준다면.   

하성국_ 표현이 조심스럽긴 한데 <미망>은 내게 청춘의 기록이다. 청춘이 고스란히 담긴 영화. 영화를 좋아하고 공부하고 잘하고 싶어서 애썼던 시간, 그 시절에 만난 친구들, 우리가 주고받은 마음까지 모든 것이 이 영화에 들어가 있다. 스태프들도 다 친구다. 오랜 인연이자 가장 가까운 영화 동료이기도 하다. 실제 영화엔 2019년~2022년 모습이 담겼지만, 그 역사를 생각하면 <미망>은 훨씬 더 이전의 시간까지 포함하는 것 같다. 오늘은 청춘을 응축한 작품, 아끼는 친구이자 감독의 영화로 정리하겠다.

이명하_ 한계에 다다라서 연기로부터 도망치려 했던 시기에 <미망>이 계속 옆을 지켜줬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미망>이 없었다면, 이렇게 나를 응원하고 지지해 주고 같이 하자고 끌어주는 이들이 아니었다면 정말로 연기를 관뒀을지도 모르겠다. 더 멋지게 말하면 좋을 텐데, <미망>은 내게 고마운 영화다. 아무래도 1막부터 3막까지 다 나오니 어떻게 보면 변화가 가장 다양하지 않나. 시사회에 온 지인들이 “너를 기록해 준 영화”라고 하더라. 좀 더 나이 들면 이 영화가 더 아름답게 다가올 것 같다.

김태양_ <미망>은 나를 편안하게 해줬다. 20대를 정리하는 기분으로 완성했다. <소우> 시나리오를 성국에게 보냈을 때, “형이 참 예쁘게 큰 것 같아”라고 하더라. 모난 데가 정리돼서 예쁜 사람이 됐다고, 그 예쁜 마음이 보여서 자기는 이 글이 좋다고. 무슨 말인지 알겠더라. <미망>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많은 일이 벌어졌다. 기쁘고 반가운 와중에 확실히 깨달은 것이 있다. 한동안 ‘왜 나 영화 못 찍게 해? 왜 자꾸 괴롭혀? 언제까지 감내해야 해?’ 생각했는데, 사실 날 괴롭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더라. 찍으려면 당장 내일도 나가서 찍으면 될 일이었다. 마음을 좀 더 편안하게 먹기로 했다. 거창한 의미를 두지 않고, 좋아하는 마음에 집중하기로. 영화를 만드는 것이 좋고 그 일을 함께하는 친구들이 좋다. 영화와, 또 친구들과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다. 예전에는 성공하고 싶다거나 멋진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는데, 지금은 ‘계속하자. 그러다 안 되면 뭐 어쩔 수 없지.’라고 편안하게 생각한다. 대신에 원칙은 있다. 최선을 다할 것, 진실할 것, 사람들에게 나쁘게 굴지 않을 것, 하지만 미우면 밉다고 말할 것. <미망>을 찍으면서 많이 얻었다.

하성국_ 진짜 예쁘게 컸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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