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교에 솟은 고층 아파트를 바라보던 문호(임후성)가 공인중개사 사무실에 들어가 묻는다. “방 2개인 집은 얼마예요?” “매매는 10억입니다. 전세는 5억에 나와 있어요.” 기가 찬 숫자에 그는 갈 데까지 가보자는 듯 내처 묻는다. 방 3개는요? 방 4개는요? 억 단위로 뛰는 집값을 들으며 그는 웃지도 울지도 않고 손에 든 종이컵만 말없이 비운다. <한 채>의 등장인물들은 집을 소유하지 못한다. 문호는 지적 장애가 있는 딸 고은(이수정)과 버려진 여관을 찾아 전전하고, 도경(이도진)은 이혼 후 어린 딸 사랑을 누나 집에 맡긴 채 홀로 반지하 셋집에서 숙식한다. 문호와 도경은 딸을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하려 하지만, 자신의 역할과 책임에 부담을 느낀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대단히 부유한 삶이 아니라, 적당히 평범한 울타리를 원한다. 이를테면 딸과 함께 살 수 있는, 가족의 안전을 보장받을 만한 집. 이미 생활은 정상 범주에서 이탈했고 합법적으로는 현실을 타개할 길이 요원하다. 그리하여 문호와 도경이 브로커를 가운데 두고 마주 앉는다. 그들은 위장 결혼을 통해 신혼부부에게 특별 공급되는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할 작정이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고은에게는 이 모든 것이 “소꿉놀이”로 설명된다. “그냥 삶이 부부이게끔” 꾸며달라는 브로커의 지시에 따라 문호와 고은은 도경의 셋집에서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다.
내 집 없는 이들이 모여 우리 집을 만드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놀랍게도 셋은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 간다. 한 방에서 나란히 잠들고, 한 상에서 아침밥을 차려 먹는다. 문호는 막걸리를 마시고 고은은 자꾸 딴 길로 새려 하고 도경은 담배를 태우면서, 그렇듯 제각각인 채로 함께 산을 오른다. 일상을 필연적으로 공유할 수밖에 없기에, 그들 셋은 투박한 문장들만 주고받으면서도 상대의 버릇과 고민을 알아차린다. <한 채>는 언뜻 사각지대에 내몰린 사회적 약자의 주거 문제를 다루는 듯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어떤 관계를 시작하고 또 지속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 무엇인지 구체화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위법과 범법의 영역에서 그들은 우연히 한 배를 탔고, 목표를 달성하기 전까지는 불안정한 경제와 주거를 공유하기로 한다. 영화는 도경의 노동에 고은이 동참하는 과정과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나은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쓰는 문호의 뒤를 쫓는다. 인물 각자의 의중을 속 시원히 알려주지 않지만, 그들 내면에 자리한 불안뿐만 아니라 조용히 꿈틀대는 희망까지 영화 속에서 무시하지 못할 기운으로 감지된다.


<한 채>는 집이라는 공간의 물리적 조건보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위태로운 집에서도 유대가 쌓이고, 인물들은 선악의 기로에 선 존재가 아닌 오늘 저녁 식사 메뉴와 다음 달 월세를 궁리하는 이들로 그려진다. 예컨대 문호는 딸의 위장결혼을 결정하고 보호자 동의서를 쓴다. 고은에게 새 옷을 사주기 전에는 장애인 명찰을 건 고은 홀로 옷 가게에 들여보낸다. 당황하던 주인은 문호를 발견하자 옷값을 순순히 깎아주며 부녀를 가게 밖으로 내보낸다. 영화는 질문한다. 문호는 딸의 장애를 이용해 생계를 유지하는 아버지인가? 인물이 비정한가 혹은 상황이 비참한가? 어쩌면 그런 감상 따위는 끼어들 자리 없는, 삶에서 터득한 생존전략뿐이지 않을까? 영화는 인물들의 선택을 한 가지 층위로만 묘사하지 않는다. 앞선 장면은 문호 부녀의 궁핍한 생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동시에, 문호가 고은에게 어떻게든 더 나은 삶을 제공하고자 분투하는 보호자라는 사실도 전달한다. 도경 또한 어린 딸과의 관계에서 비슷한 과정을 겪는다. 여기엔 실수와 실패가 잇따르고 가장들의 계획은 좀처럼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다만, 영화는 인물 사이에 오가는 옅은 공감을 포착한다. 필요에 의해 묶인 관계이니 깨지기도 어긋나기도 쉬운데, 생이 질긴 만큼 인연도 말끔히 끊어내기란 어렵다. 영화는 인물들의 미세한 변화를 지켜보며, 집이 결국 물질적 공간을 넘어 정서적 공간으로 확장되는 순간을 설득해 낸다.
카메라는 인물과 너무 멀거나 너무 가깝다. 무력하게 관전하는 시선과 집요하게 뜯어보는 시선이 영화에 공존하는데, 어느 쪽이든 프레임 바깥을 상상하기 어렵게 한다. 도경 한 명이 살기도 빠듯한 방에 식구가 셋으로 늘어나면서 화면은 숨이 찰 만큼 비좁아진다. 문호의 뒷모습을 중앙에 꽉 채우고 좌우에 난 틈에 고은과 도경의 얼굴을 위치하게 할 때, 문자 그대로 문호의 양 어깨는 짓눌리는 듯 보인다. 반지하 공간에 빛은 늘 풀죽은 사람처럼 모로 꺾여 들어오고, 텔레비전 화면의 미약한 조명은 인물들의 실루엣을 간신히 비춘다. 택배 배달과 대리운전으로 먹고사는 도경은 어두컴컴한 차와 밤거리, 아무도 없는 아파트 복도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처럼 영화는 주요 배경으로 등장하는 실내 공간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기록하고자 한다. 별다른 조명 장치 없이 촬영한 탓에 조도는 낮고, 인물들의 움직임을 제한할 정도로 면적은 좁다. 이와 같은 장면을 반복하며 영화는 감정을 쌓는다. 부지불식간에 폭발하는 에너지를 보여주는 대신에, 차츰 누추해지고 구석진 마음을 전달한다. 때로는 얼굴만으로, 때로는 얼굴을 제외한 몸만으로 포화 상태에 다다를 만큼 화면 구성은 단출하다. 이는 이미지로서든 서사로서든 시야를 차단하고, 인물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을 효과적으로 노출한다.
<한 채>는 많은 부분을 물음표로 남겨 놓는 영화다.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으며 그들이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영화는 일일이 설명하지 않는다. 그 모호함을 견지하는 동시에 배반하는 것은 배우들이다. 연극 연출가이자 근래 시인으로 등단하기도 한 임후성은 그중 최전선에 선다. 문호는 딸을 먹이고 씻기고 웃음 짓게 한다. 그러면서도 딸을 위한다는 이유로 딸의 위험을 모른 척하기도 한다. 임후성은 다정하고 강인한 모습에 무력감과 울분을 덧입히며 문호를 못내 알 수 없는 사람으로 빚는다. 주로 상업영화와 드라마에서 조단역으로 출연했던 이수정은 과장된 표현이나 지나친 감상에 휘둘리지 않고, 경계선 지능 장애를 지닌 수정을 저만의 방식으로 소화한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공개한 데뷔작 <통잠>(김솔해 공동연출, 2024)에서 연출과 연기를 겸했던 이도진은 다시 한번 집중력 높은 연기를 선보인다. 현실에 못 이겨 갈팡질팡하면서도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 도경의 행보는, 타인의 삶에 옳고 그름을 논하기란 얼마나 어렵고도 무례한 일인지 되새기게 한다.
한 채 The Berefts 감독 정범, 허장 출연 임후성, 이수정, 이도진 제작 DGC & 타이거시네마 배급 씨네소파 제작연도 2023년 상영시간 90분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개봉 2024년 11월 20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