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든 기록하는 것이 저에게 최우선이었어요.” 디지털 복원으로 되살아난 필름들을 따라 역사를 되짚는 <되살아나는 목소리> 곳곳에는 절박한 기록의 몸짓이 새겨져 있다. 인생의 경로를 바꾼 사건을 만난 이후 카메라를 들고 찍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찍었다는 박수남 감독은 20세기의 절반을 기록자의 자세로 살았다. 강제징용, 원폭 피해, 오키나와 전투, ‘위안부’ 피해 등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을 온몸으로 겪은 이들을 찾아 나선 그 길에서, 기억을 전하는 일의 필요를 힘주어 말하는 사람들도 만났다. “목격한 일을 전해주는 것이 인간이라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인류 역사에 기록해 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역사의 한복판을 살았던 사람들은 언젠가 죽고 목소리 역시 희미해질 테지만, 어떻게든 기억을 보존해 후대에 전달하려는 마음만큼은 아득한 시간을 건너 또렷하게 울려 퍼진다. 그렇게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부지런히 촬영한 결과물은 <또 하나의 히로시마>(1986), <아리랑의 노래 - 오키나와의 증언>(1991), <누치가후 - 옥쇄장으로부터의 증언>(2012), <침묵>(2017) 등으로 완성됐다. 하지만 창고 한쪽에는 작품화되지 못한 10만 피트, 약 50시간 분량의 16mm 필름이 쌓여가고 있었다. 별도 녹음한 음성 테이프 역시 30년 동안 아무도 듣지 않은 채 잠자고 있었다. 박수남과 그의 딸 박마의는 그 기록을 복원하기로 한다.
피폭의 흔적이 새겨진 몸으로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 참혹한 조선인 학살을 기억하고 말하는 사람들, 지옥 같았던 노동의 현장을 회상하는 사람들. 되살아난 필름 속에는 신음이 가득하다. 가려진 역사의 증인이자, 존재 자체로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을 증명하는 이들은 카메라 앞에서 자기 경험을 생생하게 털어놓는다. 그중에는 말이 되지 못하는 몸짓과 침묵도 있다. 처음에는 펜을 들고 그 목소리를 기록하고자 했다는 박수남 감독은 끝내 글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떨리는 몸, 떨리는 말을 담기 위해 카메라를 들기 시작했다고 회상한다. “가슴이 답답해서 할 수가 없어요. 제가 할 말이 많았는데.” “영화가 말 없는 사람의 말을 표현하니까 제가 영화를 만드는 겁니다.” 역사 속에 묻힌 기억들, 몸에 새겨진 흔적들을 수집하는 여정은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한 피해자들의 소송과 맞물리며 중요한 증거를 만들기도 한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원폭 피해 지원을 받지 못한 이들은 기록을 근거로 재판을 이어가며 끈질기게 저항하고 투쟁한다. 피해자의 기억이 없어지지 않는 한 가해자의 책임 역시 사라지지 않는다는 일념이 박수남 감독을 계속해서 움직이게 했다. 하지만 여기 그처럼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신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기록 그 자체만큼이나 그것을 기록한 이의 위치와 경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영화다. 1935년에 일본에서 태어난 조선인 아이, 재일조선인 2세로서의 정체성을 찾지 못해 현실에서 도망치던 어린 박수남은 재일조선인 1세들이 세운 조선학교에서 일본 경찰과 대치하며 ‘나’를 찾는 경험을 한다. 1958년, 23살이 된 그는 이후 여정의 시발점이 될 중요한 사건을 만난다. 일본인 여학생을 살해하고 붙잡힌 재일조선인 2세 청년 이진우와의 만남이다. “조국도, 이름도, 소중한 자기 자신조차도 빼앗긴 채 성장”한 청년을 위해 일본의 지식인들은 구명 운동을 시작했고, 박수남 감독은 놀라운 마음으로 그 과정에 동참하며 이진우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조선의 역사와 말을 가르쳤다. 내가 누구인지 알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것, 그러니까 나 자신으로 사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한 삶의 과제임을 깨달은 젊은 감독은 그렇게 “이진우를 길동무 삼아” 기록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제국주의의 피해 경험이 어떤 구조 속에서 만들어지는지 가늠하고, 피해자들의 기억을 모아 세상에 알리는 활동은 단지 대의나 신념 같은 차원을 넘어 그처럼 감독의 영원히 긴급한 질문과 맞닿은 일이었던 셈이다. 그러한 절실함이 영화에 남다른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박수남 감독의 딸이자 영화의 공동 연출자인 박마의 감독 역시 나의 자리가 어디인가에 관해 고민한 기억을 슬며시 들려준다. 복원된 필름과 거기 얽힌 기억에 관한 모녀의 대화가 곳곳에 표지를 세우는 이 영화에서, 박마의 감독의 경험과 질문은 생각의 폭을 열어줄 중요한 길잡이가 된다. 내가 왜 일본에서 태어났는지 그 역사를 알게 되며 정체성을 찾아갔다는 말만큼이나, 일본인 아버지를 둔 재일조선인 3세의 위치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립하는 입장이 함께 역사를 극복하는 것에 관해 고민한다는 그의 이야기는 솔직하고 귀하다. 한편 ‘한국 원폭 피해자를 돕는 시민 모임’의 일본인 활동가들은 일본인 피폭자들과 조선인 피폭자들이 선 서로 다른 자리를 이해하는 일을 중요하게 언급한다. 같은 원폭 피해를 입었지만, 그들은 절대 같지 않다.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이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역사 인식의 한 방향을 제시한다. 피해자와 소수자를 만드는 구조를 이해하면서, 개인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차이를 무시하지 않고 선명히 되살리기. 사람들의 얼굴, 몸, 목소리를 세밀하게 기록하고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박수남의 카메라는 바로 그러한 태도로 역사에 접근할 것을 요청한다.


영화의 화면은 가끔 뿌옇게 흐릿해진다. 열화된 필름을 불러오는 과정에 생긴 현상일 수도 있겠으나, 왠지 카메라에 눈물이 맺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신발 살 돈이 없어 맨발로 다녔다는 이들, 차별과 가난 속에 너무나 힘겹게 살았던 이들을 도저히 외면하지 못한 감독의 마음이 영화의 표면에 일렁인다. 이는 결국 실명에 이르는 난치병을 얻은 박수남 감독의 상태와도 공명한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발병해 이제는 빛의 방향 정도만을 느낄 수 있다는 그는 복원된 필름을 소리와 음성으로 식별하며 현장의 기억을 되살린다. 점차 부식되는 필름들과 점차 쇠하는 몸들. <되살아나는 목소리>를 이루는 요소들은 모두 유한한 조건과 물리적 한계를 지닌 것들이다. 하지만 그때 그곳에서 촬영된 영상에 담겨있던 목소리들, 몸에 각인된 기억을 되짚는 말 없는 몸짓은 영화 속에서 되살아난다. 이 역시 언젠가는 사라질 운명을 타고나겠지만, 기록을 다음 세대에 전할 방법을 누군가는 다시 찾을 것이다. 그렇게 기억은 그것이 만들어진 조건과 한계를 껴안은 채 다음 세상을 향해 간다.
되살아나는 목소리 Voices of the Silenced 감독 박수남, 박마의 출연 박수남, 박마의 제작 영화사 하르빈, 아리랑의 노래 제작위원회, 박수남 배급 시네마 달, 푸른영상 제작연도 2023년 상영시간 148분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개봉 2024년 11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