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마르지 않는
<열 개의 우물>
차한비 / Choice / 2024-11-08

“하얀 건 종이떼기고 까만 건 글씨, 이거밖에 모르는데 난 못한다. (그렇게 거절하다가) 애들하고 해보기로 했어. 근데 농협에서 딱 긴장한 거야. 저 여편네가 와서 앉아 있는 것만 해도 싫은 거야. 아이고 개자식들.” 안순애가 말 중간중간 마른 웃음을 섞으며 지난 시절을 회고하는 사이, 화면이 이분할된다. 왼쪽은 푸른 논밭을 배경으로 인터뷰하는 안순애가 차지하고, 오른쪽엔 빛바랜 사진이 영사된다. 사진 속 여자들은 머리띠를 두르고 행진한다. 그들 뒤로 ‘WTO 박살내고 민족농업 사수하자’라고 적힌 현수막이 펄럭인다. <열 개의 우물>은 종종 그렇게 현재와 과거를 나란히 놓는다. 초연한 태도와 결연한 표정, 못내 사라지지 않는 울분과 합심해서 한 발 내딛던 열정을 동시에 보여주려는 선택이다. 이는 단지 정보를 풍성하게 전달하겠다는 욕심이 아니라, 인물들의 시간을 갈무리하여 영화 스스로 역사를 다시 쓰고자 하는 의지와 맞닿아 있다. 현재 인터뷰 장면과 과거 활동 사진이 공존하는 스크린 속에서 인물들은 독자적으로 인과를 설명하고 근거를 제시한다. 미련과 회한을 드러내거나, 생기 넘치는 시절을 자랑하며 그리움을 표현하기도 한다. 영화는 그러한 모든 이야기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하려 한다.

<열 개의 우물>은 김미례 감독의 여섯 번째 장편 다큐멘터리다. 감독은 <노동자다 아니다>(2003), <노가다>(2005), <외박>(2009), <산다>(2013) 등을 통해 근 이십 년간 한국 사회에 자리한 빈곤과 불평등의 문제를 꾸준히 탐구했고, 최근작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2020)에서는 일제 전범 기업 연속 폭파 사건의 가해자이자 자국의 제국주의 침략에 저항했던 활동가들을 추적하며 연대운동의 가능성을 질문했다. 평범한 이들이 삶에서 어떤 차별과 폭력을 맞닥뜨리는지, 그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어떤 경험과 관계를 쌓는지 포착하는 것이 감독에게 주요한 주제였다. <열 개의 우물> 역시 사회와 인간을 향한 예민한 감수성이 돋보인다. 감독이 제일 먼저 찾아간 사람은 김현숙. 인천 빈민 지역에서 어린이집과 공부방 선생님으로 살다가 현재 강화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인물이다. 그는 젊은 날을 “행복했다”고 추억하며 “가장 좋은 책”이 될 만한 이로 안순애를 소개한다. 이후 영화는 1970년대 노동운동과 1980년대 빈민운동을 거쳐 1990년대 농민운동에 이르는 장대한 시간을 여행한다. 이 여정을 기록하는 주체는 그간 운동사에서 번번이 누락되곤 했던 여성들이다. 일하고 돌보고 싸우는 여자들과 만남으로써, 영화는 한세월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책을 여러 권 보유한다.

<열 개의 우물>
<열 개의 우물>

<열 개의 우물>은 절대적 계급 격차 속에서 살아가던 가난한 여성들의 일상에 깊숙이 다가선다. 안순애는 열세 살에 동일방직에 입사했다. 가난은 지긋지긋했고 엄마는 가여웠다. 그에 불평하거나 아쉬움을 토로할 겨를도 없이, 삶은 생계를 위한 끊임없는 노동으로 채워졌다. 거창한 포부를 갖고 노동운동에 뛰어든 것이 아니라 “내 꼬라지가 그렇게 살 수밖에 없”어서 공장 언니들과 동생들 옆을 지켰다. 어머니 세대가 먹고살기 위해 안간힘 쓰던 노동의 궤적은 딸에게 고스란히 이어졌다. 정치인 홍미영은 여성평우회 활동을 통해 인천 만석동과 연을 맺었다. 주거, 위생, 교육, 보육 등 다방면에서 열악한 환경에 충격을 받았고, 그곳 여자들과 아이들 속에 섞여 살기 시작했다. 십정동에서 해님방 교사로 일했고 현재는 해님지역아동센터를 운영하는 신소영은 당시 소식지를 펼쳐 보인다. 주민들이 직접 쓴 수필은 대부분 자신에게 쓴 편지가 됐다. “이를 악물고 열심히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 다짐하는 밤이 고됐으나, “내 삶이 뼈아프게 가련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라며 다독였다. 김현숙이 말한 대로 함께해서 행복했던 시절이다. 아이 생일에 겨우 닭 한 마리를 삶으면 이웃을 불러 나눠 먹었다. 공동 부업으로 자산을 늘리고 모금 활동을 전개해 주민 공간을 마련했으며, 머리 맞대고 쓴 탄원서를 모아 시·구청을 찾아갔다.

영화는 이처럼 여성의 노동과 돌봄은 하나로 얽혀 있음을, 가장 약하고 낮은 존재로 여겨지던 이들이 힘을 합쳐 생의 무게를 버티고 크고 작은 문제를 해결해 왔음을 이야기한다. 더 나은 삶을 향한 욕구는 단순히 생존을 위한 고군분투를 넘어서 연대와 공동체 가치를 확산하는 길로 뻗어 나갔다. 사회적 지원이 부재한 상황에서도 서로 곁을 지키며 동고동락했던 여성들은 영화에서 불굴의 역사를 증거하는 얼굴로 재조명된다. 십정동에서 자모회 활동을 지속하는 박순분은 과거에 이웃끼리 밥을 꿔주곤 했다고 회상한다. 카메라 뒤에 있는 감독이 꿔준 밥은 돌려받았냐고 농담 섞인 질문을 던지자, 박순분은 “밥보다 더 큰 걸 받았을 거예요”라고 답한다. 노동운동 과정에서 내상을 입은 안순애는 도시를 떠나 농촌에 터를 잡는데, “그 이후의 삶” 또한 이전과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는다. 그는 운동하는 후배들에게 계속해서 버팀목 역할을 했고, 마을 할머니들의 지지를 얻어 이장을 두 번이나 맡는다. 요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현실을 몸소 깨달았기에 마을을 소외시키는 정책에 반발했으며, 함께라서 용기 냈던 경험을 밑거름 삼아 타인의 목소리를 경청한다.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가 뿔뿔이 흩어져도, 십정동이 헐리고 초고층 아파트 단지로 변모해도, 그렇듯 어떤 가치와 배움은 여전히 남아 있다. 영화는 인물들의 입을 빌려 우리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되짚는다.

<열 개의 우물>
<열 개의 우물>

<열 개의 우물>은 십정동을 한글로 풀어 쓴 제목이다. 영화는 깊고 맑은 우물이 되기로 한 여자들을 여럿 비춘다. 노동자, 활동가, 시민, 엄마, 이웃, 교사, 학생 등 수많은 역할을 통과하며 제 자리에서 스스로, 또한 더불어 공동체를 일구어낸 인물들이다. 영화에 기입된 그들 각자의 개성과 신념만큼이나 이야기를 잇는 방식도 흥미롭다. 인터뷰를 포함해 기록 영상과 사진 등 아카이브 자료를 징검돌 삼아 영화는 꼬리에 꼬리를 물듯 자연스럽고 폭넓게 역사를 구성한다. 이는 결국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도록 촉구하며,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질문하는 데 다다른다. 두레박을 끌어 올려 물을 길듯 나이 든 여자들이 지난날을 더듬어 옛 풍경을 묘사하는 사이, 현재는 조금 더 두껍고 든든한 책이 된다.

 

열 개의 우물 Ten Wells 감독 김미례 출연 안순애, 홍미영, 유효순, 신소영, 김현숙 제작·배급 감 픽쳐스 제작연도 2023년 상영시간 82분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개봉 2024년 10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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