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을 앞둔 아버지의 유산 문제를 정리하기 위해 자식들이 한 데 모인다. 아버지의 유산은 자그마치 20억인데, 유서의 내용에 따르면 그 절반은 큰아들에게 돌아가고 두 아들과 딸은 남은 돈을 나누어 갖게 됐다. 각자가 불만을 표출하는 사이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아이를 납치했다며 20억의 몸값을 요구하는 유괴범이다. <멀리가지마라>는 독특한 설정과 맛깔나는 대사로 관객을 시종일관 사로잡는 영화다. 돈과 관련되어 속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가족들의 모습은 쓴웃음을 짓게 한다.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고 놀라운 결말에 이를 때까지 능숙하게 속도를 조절하는 영화의 뒷이야기를 박현용 감독에게서 들었다.
유산 상속에 얽힌 가족들의 이야기와 유괴 사건이 등장하는 등 독특한 설정의 영화다. 또 영화의 대부분이 전개되는 공간이 마치 연극무대처럼 연출되어 있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연극도 연출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일단은 영화를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가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다른 감독들도 그렇겠지만 영화학교를 나오고 단편을 연출하면서 장편을 찍기 위한 기회를 보고 있었다. 좀 더 큰 다른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가 미리 써두었던 <멀리가지마라>의 시나리오를 저예산으로 진행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런데 예산이 적다보니까 포기해야 하는 부분은 포기하고 진행해야 했다. 집 세트를 짓거나 실제 집을 섭외할만한 여건이 되지 않아서 고민하다가 미니멀리즘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런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연극무대를 선택하게 됐다. 내용에 대해 말하자면 이 영화가 납치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2016년에 찍었던 단편영화, 올 초에 연출한 연극, 그리고 <멀리가지마라>까지 3부작을 이룬다. 시리즈의 대단원을 부산에서 끝내게 됐다.
손병호, 박명신, 손진환 등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의 면면도 흥미롭다.
단편을 연출할 때부터 한 번씩 같이 작업을 했거나 인연이 있는 배우들이다. 뉴욕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6년 전에 한국에 들어와서 영화를 하면서 같이 작업을 하고 만났던 분들인데, 저예산 영화지만 다들 흔쾌히 함께 해주었다.
촬영과정이 어땠을지 궁금하다. 쉽지 않은 상황이었을 것 같은데.
정말 편하게 찍었다. PD님 덕분에 현장 운영도 잘 됐고. 스탭들이나 배우들도 힘들게 했다기보다는 다들 즐기면서 찍었다. 회차는 총 9회차였다. 그런데 프리 프로덕션 과정이 좀 힘들었다. 2주 정도밖에 시간이 없었는데, 결정을 해야 하는 부분들이 힘들더라. 집을 섭외하다가 극장으로 들어가자고 결정했던 게 촬영 3일 전이었다. 그 때문에 미술감독, 조명감독님이 고생하셨다. 캐스팅이 촬영 직전에 이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촬영 시작 일을 미루지 않겠다는 원칙이 있었고, 그래 ‘그냥 갑시다’ 하고 진행했다.


오랜만에 만난 남매들이 서로에게 가시 돋친 말을 내뱉는다. 그러다가 유산상속에 대한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오면 관계의 민낯이 확 드러난다. 대사가 많은 영화다. 대사를 통해 인물의 성격과 관계를 드러내고 부조리한 상황을 보여주는 것을 선호하는 편인가.
영화는 물론 시각적인 예술이지만 개인적으로 말을 상당히 좋아한다. 연출했던 단편이나 연극도 대사량이 많은 편이고 또 시나리오를 빨리 쓰기도 한다. 이 시나리오는 일주일 만에 썼다. 말 안에 모든 게 다 있는 것 같다. 사실 하루를 살면서 했던 말들을 돌이켜보면 70퍼센트 정도는 다 쓸데없는 말이다. 그런데 그 쓸데없는 말들을 돌이켜보면 생각 없이 던진 말들이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기도 하고, 또 나에게 득이 되어 돌아오는 말들도 있다. 그래서 누군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이 말에서 다 드러나지 않나 생각한다.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머리에 넘쳐나서 이야기를 쟁여 놓을 것 같다.
다른 재능은 별로 없는데, 글은 좀 빨리 쓰는 편이다. 시나리오를 제일 많이 쓰긴 하지만 소설을 쓰기도 한다. 영화는 어쨌든 산업이다 보니 예술적인 면을 100퍼센트 다 표현할 수 없는 측면이 있는데, 소설과 연극은 그걸 다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은 장편까지는 쓰지 못하고 단편을 쓰는 중이다. 소설은 아니지만 2년쯤 전에 <서른, 여행은 끝났다>(스토리닷)라는 책을 하나 냈다. 미국 횡단 여행기다.
뉴욕에서 학교를 다니던 시기에 여행을 한 건가.
미국에서 영화공부를 할 때 어떻게 하다가 1억 5천만원 정도의 장편 영화를 찍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래서 1년 정도 열심히 준비했는데 그게 엎어져서 무기력함에 빠져있었다. 뉴욕에 비둘기가 많은데, 항상 아침에 창문에 날아와서 비둘기들이 앉아 있었다. 그때 비둘기를 보는 순간, 내가 늘 쫓아내도 비둘기가 매일 오는데 내가 이렇게 포기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할리우드 제작자에게 내 열정을 시각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됐다. 자전거를 타고 횡단을 해야겠다 싶어서 가지고 있던 것을 다 팔아서 자전거와 작은 카메라를 사고 짐을 꾸려서 뉴욕에서 LA까지 횡단을 했다. 일자로 쭉 횡단한 것이 아니라 W자로, 뉴욕에서 플로리다까지 갔다가 파고까지 올라갔다가 텍사스까지 갔다가 이런 식으로 6개월간 횡단을 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미국 문화를 접하고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렇게 LA에 다 도착했을 때, 내가 찍으려고 했던 시나리오가 엉망이었다는걸 깨닫게 됐다. 그때가 29살에서 30살로 접어들 때였는데, 그래서 책 제목도 ‘서른, 여행은 끝났다’가 됐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서 말을 계속 바꾸는 인물들이 참 우습고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반면 유산은 아무래도 좋으니까 조카를 위해 돈을 다 유괴범에게 주자고 말하는 셋째 아들도 사실은 폭력적인 인물이다. 또 아버지가 이 돈을 어떻게 모았는지 드러나기까지에 이르면 이들은 가족이라는 관계의 적나라한 초상을 보여준다.
납치 3부작을 쭉 하면서 돌이켜보니 중심 키워드가 그런 것들이었다. 납치, 돈 그리고 가장 가까운 사람, 평범해 보이는 사람. 평범해 보이고 멀리 떨어져서 봤을 때는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은 가족인데 세밀하게 들어가 보면 나름 문제가 많이 보인다. 또 점잖아 보이지만 위기상황이나 돈이 연관 됐을 때 난폭해질 수도 있고, 인간적으로는 나쁘고 쓰레기인데 이런 상황이 되었을 때 의리를 발휘할 수도 있는 것이 인간이다. 'Don't judge a book by its cover'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을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도 있고. 이중성이 이렇게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인간이 아닌가 싶다. 사회의 여러 가지 일이나 뉴스를 보면 남이 아니라 가족이나 가장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 그런 일이 생긴다는 것이 항상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영화에 드러나는 관계들과 묘하게 조응한다고 느낀 것 중 하나는,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족보도 없는 새끼’라는 욕설이다. 이들은 어떻게 보면 족보가 있는 사람들인데 그런 욕설의 대상과 다를 바가 없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도 맞고, 조금 더 귀를 기울여보면 둘째 아들인 헌철(손병호)이 하는 욕들이 집으로 전화를 건 유괴범이 하는 욕과 같다. ‘족보도 없는 새끼’라는 욕은 헌철이 여동생의 남편을 하대하면서 사용하는 표현인데, 지금 이렇게 돈 가지고 치사하게 싸우는 정씨 가문이 스스로는 뼈대 있는 가문이라고 생각하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이렇게 추잡스러운 가문인데 족보를 따지고 있고 이런데서 오는 실소가 있다.
그렇지 않아도 유괴범의 말투가 너무 재미있고 웃겨서 물어보려고 했다.
반전이 하나 있는데, 그 유괴범의 목소리를 연기한 것이 나다. 믹싱을 할 때 테스트를 한 번 해봤는데 믹싱기사님이 재미있다고 하셔서 그럼 제가 하겠다고 해서 하게 되었다.
부조리한 상황에서 나오는 웃음도 분명히 있다. 경찰이 등장해서 진지하게 문제를 풀어보려고 할 때도 그런데, 그렇다고 이들이 너무 무능력해서 웃긴 것은 또 아니고.
사실 배우들이 연기를 할 때도 그렇고 연출할 때도 블랙코미디라고 생각하고 접근한 건 아니다. 각자의 인물들이 정말 심각하고 돈을 빼앗기면 안 된다는 절박함을 생각하며 연기하고 연출도 그렇게 했는데 블랙코미디로 비친다는 것은 관객들이 그만큼 건강하고 순수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나쁜 사람들의 행동들이 안타깝고 폭소보다는 실소를 느끼는 거다.
영화가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불청객'이라는 소제목의 장에서 경찰이 개입을 한 이후에는 연극무대처럼 진행되던 영화가 바깥으로 나가게 된다. 완전히 추격전이 되는데, 서울의 후미지고 구석진 풍경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것이 재미있다. 장소를 정하는 과정에서 특별히 고려한 점이 있었나.
말했다시피 프리 프로덕션이 짧고 촬영 전날까지 정해지지 않은 것들도 있는 상태였다. 미루지 말자는 원칙하에 촬영에 들어가면서 추격씬은 거의 준비를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때 나와 피디님이 기존에 영화를 하면서 했던 경험들이 빛을 발했다. 그때 그 장소에서 촬영을 했었는데 후반부에는 거기서 하면 잘 되겠다 이런 식으로. 개인적으로 아쉬움도 있지만 정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했고 좋은 퀄리티가 나왔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시작지점에서 과자를 사먹으러 가는 아이들에게 둘째 헌철이 당부처럼 “멀리가지마라”라는 말을 한다. 이것은 물리적인 거리를 말하는 것인 동시에 정도에 대한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 소제목이기도 한데.
인간이 어떤 욕망을 갖는 건 본능이다. 욕망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욕망도 있고 나쁜 욕망도 있고, 행여나 인간이 나쁜 욕망을 갖고 있어도 그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끝까지 가면 안 된다는 거다. 어느 정도 절제하고 멈추면 돌아올 수 있는 지점이 있는데, 그 욕망을 갖고 끝까지 가게 되면 화를 입게 된다. 영화의 결말을 어떻게 정리할까 생각했을 때 오이디푸스를 떠올렸다. (지금의 결말이) 자기 자신이 죽는 것보다 더 큰 처벌이라고 생각했다. 멀리가지 말라는 건 자기 욕망의 끝까지 가면 안 된다는 단순한 메시지다. 헌철에게는 멈출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있었는데 결국 멈추지 못했다.
이제 납치 3부작이 끝난 셈이다. 다음 계획이 있나.
다음 작업은 재미있는 복합장르영화가 될 예정이다. 시나리오는 준비되어 있고 몇 군데의 제작사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연극도 꾸준히 하고 시나리오도 열심히 쓰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