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소를 끝내니 앞장만 쓴 노트가 대여섯 권 나온다. 마키오(아라가키 유이)는 그중 하나를 골라 미련 없이 앞장을 뜯어내고 조카 아사(하야세 이코이)에게 내민다. 좋아하는 것, 생각한 것, 남기고 싶은 것, 말하고 싶지 않은 것 등 일기처럼 뭐든 써보라는 제안이다. 꼭 사실만 써야 할 의무는 없다고 덧붙이자 아사의 눈이 동그래진다. 위국일기, 한자를 풀면 어긋난 나라에서 쓴 일기라는 뜻이다. 말 그대로 아사는 다른 나라에 막 도착한 이방인과 같다. 친하기는커녕 왕래한 적도 없는 이모 집으로 거처를 옮겼고, 중학교를 떠나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무엇보다 아사는 부모의 부재에 적응해야 한다. 낯선 나라로 갑작스럽게 입국한 것은 마키오도 마찬가지다. 절연하고 살던 언니가 죽었고, 어린 조카는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됐다. 장례식을 찾은 친척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듣다 못 한 마키오는 아사에게 “홧김에” 동거를 제안한다. 고양이를 돌보는 일조차 힘들어하는 마키오에게 아사의 존재는 매일 물음표를 던진다. 삼십 대 중반의 소설가 마키오와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은 사춘기 소녀 아사. 그들은 과연 식구가 될 수 있을까? 새로운 나라의 일기장은 이미 펼쳐졌다.
<위국일기>는 서로 다른 세대의 여성들이 관계 맺는 과정을 그리며 독자에게 꾸준한 지지를 얻은 야마시타 토모코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삼는다. 만화는 마키오와 아사의 첫 만남부터 아사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시기까지 긴 시간을 다루는데, 영화는 시간대를 축약하여 둘의 동거 초반에 초점을 맞춘다. 이는 만화 속 에피소드를 충실히 재현하려는 의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는 마키오와 아사를 중심으로 인물 관계도를 뻗어 나가며,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이들의 일상 변화를 차분히 묘사한다. 동거를 결정한 둘에겐 한동안 일어날 법한 일이 발생한난다. 아사는 씩씩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는 듯하다가도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소화하지 못해 종종 헤맨다. 마키오는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사를 집에 들인 다음부터 소설 휴재를 반복한다. 영화는 두 사람 사이에서 피어나는 갈등을 단지 죽음이라는 거대한 사건에만 기인하는 것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같은 사람을 떠나보냈으나 한쪽은 사랑하는 엄마를 잃은 딸이고, 다른 한쪽은 미워하는 언니를 잃은 동생이다. 영화는 이처럼 어긋난 입장과 마음을 응시하며, 하나의 근사한 공동체를 결과로 내놓기보다는 그를 이뤄내기까지 인물들이 통과하는 과정에 주목한다.


<위국일기>는 독특한 성장 영화다. 결핍과 상처를 지닌 인물들이 서로 의지하며 공동의 보금자리를 꾸려 나간다는 서사 자체는 익숙하다. 다만, 여기서 둘의 성장을 방해하는 주범은 어떤 외부적 요인이 아니라, 자신의 기억이다. 아사는 엄마와 작별한 후 더는 누군가에게 ‘첫 번째’로 사랑받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혼란스럽고, 마키오는 언니가 죽고 나서도 어린 시절 그에게 받은 모욕을 별일 아니라는 듯 털어낼 수는 없다고 판단한다. 영화는 쉽고 원만한 길을 택하지 않는다. 막이 내릴 때까지 아사 앞에 너를 엄마만큼, 엄마처럼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는다. 마키오도 끝까지 언니를 용서하지 않는다. 그렇게 원하는 바를 쟁취하지도, 해묵은 원망을 털어내지도 않은 채 그들은 동행한다. 아무리 가깝고 중요한 상대일지언정 “너와 나는 별개의 인간”이라는 것을 이해해 보려고 애쓴다. 영화는 빠른 속도로 불행과 방황을 뒤쫓는 대신에, 느린 호흡을 유지하며 인물들의 시행착오를 지켜본다. 끝내 닿을 수 없을지도 모르는 서로의 심연을 짐작하면서 아사와 마키오는 거리를 조정해 간다. 다름을 인정하고 기다리기,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스스로 감당하기, 그것이 영화가 전하는 성장이다.
이는 사회적 기준에 갇히지 않고 저만의 ‘어른’을 정의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아사에게 마키오는 이제껏 본 적 없는 유형의 어른이다. 이모를 관찰하면서 아사는 어른에 관한 오해를 조금씩 풀어간다. 어른도 정리 정돈에 서툴 수 있고, 십 대처럼 친구와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낄낄댈 수 있다. 적당히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모두 결혼하는 것은 아니며, 심지어 “그 제도는 나와 맞지 않아”라고 덤덤히 이유를 밝힌다. 무엇보다 마키오는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북돋는 어른이다. 엄마가 살아 있었다면 반대했을 거라며 밴드부 활동을 주저하는 아사에게 마키오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일러준다. 애도는 애도의 영역으로 남겨두되, 세상에 없는 사람이 싫어할까 봐 도망쳐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좋아하는 일을 찾는 과정에서 아사는 마키오에게 묻는다. “이모는 왜 글을 쓰는 거야?” 그때 답한 사람은 마키오가 아니다. 조카의 뜬금없는 질문에 그대로 얼어버렸다는 마키오의 얘기를 깔깔대며 듣던 친구 나나(카호)가 10년 전 마키오가 들려줬던 대답을 돌려준다. “누군가를 위해 용기 내 싸우는 걸 좋아하니까. 그래서 쓰고 싶어.” 어쩌면 마키오와 아사도 그런 사이가 되어 가는지 모른다. 다시 없을 한 시절을 함께 버티며, 새로운 기억을 축적하며, 자신조차 잊고 말 자신을 기억해 주는 관계로 나아가는지도. 그렇게 각자의 싸움을 회피하지 않으며 그들은 어른 되기를 택한다.


첨언하고 싶은 <위국일기>의 커다란 매력 중 하나는 주변 인물, 특히 친구 관계를 성실하게 그린다는 점이다. 마키오와 나나는 기억을 겹겹이 두른 굳건한 사이면서도 유연함과 유쾌함을 동시에 지닌다. 한편, 아사는 단짝 에미리를 포함해 동급생 모리모토, 밴드부 스타 미모리 등 학교 안팎에서 여러 인물과 관계를 맺는다. 속속들이 안다고 생각했던 친구의 비밀을 마주하는가 하면, 걱정도 불안도 없이 의연해 보였던 친구의 속내를 알아채기도 한다. 연애, 학업, 꿈, 미래 등을 주제로 대화하며 저만의 세계로 성큼성큼 입장하는 여성 청소년들은 극에 활기를 더할 뿐 아니라, 영화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 또한 한층 넓혀 놓는다.
위국일기 Worlds Apart 감독 세타 나츠키 출연 아라가키 유이, 하야세 이코이, 카호, 세토 코지 수입·배급·제공 영화사 진진 제작연도 2024년 상영시간 139분 등급 12세이상관람가 개봉 2024년 10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