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뿌연 수증기로 뒤엉킨 실내 공간. 공장에서 일하는 이들의 윤곽을 더듬더듬 파악할 때쯤 첫 번째 대사가 비명처럼 들려온다. “아이고, 문 열어라 문. 이러다 죽겠다!” 이는 흡사 문호 개방을 외치는 백성들의 원망 섞인 목소리와 같아서, 오프닝에 등장한 두부공장은 노동보다 쇄국의 현장처럼 보인다. 성진(강승호) 눈에 비친 제 집안과 가족은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채 자멸해 가는 공동체다. 숨이 차거나 말거나 두부공장은 돌아가야 하고, 세상이 변하든 말든 성진이 귀하디귀한 ‘장손’인 것은 틀림없다. 임신한 손녀 미화(김시은)가 제사상에 올릴 전을 부치느라 땀을 뻘뻘 흘려도 본체만체하던 할머니 말녀(손숙)는 서울에서 내려온 손자를 보자마자 에어컨을 틀라고 재촉한다.
오정민 감독에 따르면 <장손>은 “온 가족이 함께 보면 좋은 추석 맞이 오락영화”다. 문중을 이루고 사는 가족 삼대가 얽혀 세 계절을 보내는 사이, 영화에는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는 몇 개의 사건이 등장한다. 그것은 개인의 치부이자 집단의 약점을 드러내는 한편, 한국 현대사에 자리한 질곡을 노출하기에 이른다. 아무리 따져 봐도 “오락영화”라는 선전엔 갸우뚱할 수밖에 없지만, “온 가족이 함께 보면 좋”다는 감독의 장담에는 근거가 있다. 나이, 성별, 경험, 욕망 등 공통보다 차이가 더 많은데도 가족이라는 한 덩어리로 불리는 이들에게 <장손>은 기다려온 작품이 될 만하다. 여기엔 헛된 환상도, 과한 저주나 연민도 없다. 그저 최선을 다하며, 저무는 시절을 배웅할 뿐이다.
2019년부터 2024년까지 제작, 배급, 개봉 지원을 시도하며 만들었다. 매번 고비를 넘는다는 기분이었을 듯한데, 마지막 관문만 남겨 놓은 지금은 어떤가. 시원섭섭한 기분이려나.
슬픈 얘기부터 시작하게 됐는데 투자받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영화를 선보이기까지 오래 걸렸던 이유와 연결된다. 본래 대중 영화로 풀고 싶었다. 제도권 안에서 찍기를 바랐고, 내가 한국영화아카데미를 졸업했던 2018년 무렵만 해도 영화계 상황이 지금과는 천지 차이였다. 당시 시나리오 들고 제작사를 찾아가면 대부분 우호적으로 반응했고, 누구누구를 캐스팅해서 만들자는 구체적인 얘기도 나왔다. 원대한 꿈을 꿨지. 상황이 바뀌었으니 꿈에서 빨리 깨야 했는데. (웃음) 결국 긴 과정을 거쳐서 영화를 완성했다. 지금 이대로 굉장히 만족한다. <장손> 작업하면서 언제 가장 행복했냐는 질문을 받곤 하는데, 매번 마지막 촬영일이라고 답한다.
마지막 촬영 신은 뭐였나.
바로 전날 화재 신을 찍었다. 마지막 날은 불에 탄 집을 바라보는 가족, 화재를 조사하는 현장, 그 모습을 지켜보는 성진, 이렇게 세 컷을 찍고 마쳤다. 그날 현장에서 눈물 한 방울 뚝 흘렸다. 그러고 나서는 감상에 젖을 겨를 없이 계속 일하는 중이다. 후반작업도 일, 시사회도 일. 뭐가 특별히 기쁘거나 감동적이진 않다. 영화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나름대로 사명을 다했고,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잘 마무리하고 싶다.
“이 집안 종자가 문제다, 종자가!”라는 대사처럼 씨족사회의 민낯을 드러내는 영화인데, 엔딩 크레디트를 보니 고마운 분들 명단에 유독 오 씨가 많더라. 할아버지 성함도 그대로 빌려 쓴 듯하고, 영화 속 두부공장 ‘대명식품’ 또한 실재하는 곳이다. 감독의 자전적 배경이 영화에 얼마나 투영됐는지 듣고 싶다.
내 이야기에서 출발한 것은 사실이다. 마음에 어떤 응어리가 있어서, 그걸 풀어내고 싶어서 시작했다. 근데 5년간 시나리오를 준비하다 보니 개인적 욕망이나 원망은 글 쓰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해소되더라. 그러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 말고 관객이 보고 싶은 영화는 뭘까? 이 영화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출발점은 나와 내 가족이지만 어떻게 하면 이 이야기가 보편적 역사까지 다룰 수 있을까? 비단 한국만이 아니라 외국 관객 또한 공감하려면 뭐가 필요할까? 그렇게 자문하며 영화를 점차 확장해 갔다. 대부분의 내용과 세부 사항을 창작했으나,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관한 기억이라든지 가족끼리 나누는 사소한 대화 등 자전적 요소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라고 해봤자 누가 궁금해하겠나. 내가 봉준호 감독님이 아닌 이상. (웃음)


그렇다면 ‘장손’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들겠다, 가족 얘기를 해보겠다 결심한 것은 언제쯤?
스무 살에 할머니를 떠나보냈다. 맞벌이로 바쁜 부모님 대신에 날 길러주셨고,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 할머니, 할아버지와 같은 방에서 잘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난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경험했다. 근데 가족들이 재산 다툼으로 갈등하기 시작하더라. 사실 돈은 명분에 불과했고, 평생에 걸쳐 묵은 감정들이 막 쏟아져 나왔던 거다. 할머니라는 집안의 중심이 사라지자마자. 어린 눈에 그 풍경이 너무 혐오스럽다고 해야 할까. 팍팍한 어른의 세계를 목격한 기분이었고 오래도록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근데 시간이 지날수록 인정하게 됐다. 내가 욕했던 어른들의 민낯 혹은 어두운 면을 나도 갖고 있구나. 나 또한 저들처럼 명암과 선악을 동시에 지녔구나. 그렇게 자신을 돌아보면서 서서히 주변 사람들을 긍정할 수 있었다. 영화와 비교하면 초고에서는 어른들을 훨씬 적대적으로 그렸다. ‘가족은 없어져야 해!’라는 프로파간다 같은 지점도 있었는데, 나이를 먹다 보니 좀 더 열린 시선으로 인물을 묘사하게 됐다.
시나리오 작업하는 5년간 지난한 싸움을 거쳤구나 싶다. 제작비는 어떻게 마련했나.
이 영화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스무 살부터 했고, 초고는 이미 2016년에 나온 상태였다. 그 시나리오로 2017년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입학했다. 2018년부터 제작지원 공모에 참가했는데, 결국 5전 6기로 영화진흥위원회 지원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초고와 어마어마하게 다르지는 않다. 좀 더 객관적 시선으로 시나리오를 보려고 했다. 초고는 더 시적이다. 대사도 지금보다 적고 풍경 위주의 영화였다. 거기에 캐릭터의 입체감을 살릴 만한 요소를 입히는 식이었다. 투자와 제작지원을 시도하면서 타인을 설득해 가는 과정이 곧 퇴고 과정이었던 것 같다.
여름의 제사, 가을의 장례, 겨울의 사십구재와 출산. 영화는 계절 변화에 따라 집안 경조사를 나란히 비춘다. 계절을 담으려 했던 이유와 해당 사건을 고른 이유 모두 궁금하다.
할머니의 죽음에서 출발한 작품이기에, 애초 죽음과 탄생을 모두 아우르는 대가족의 ‘세월’을 담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 세월이라고 부를 만큼 긴 시간. 영화는 결국 시간을 다루는 매체 아닌가. 기존 단편 작업에서 항상 아쉬운 지점이 많았다. 예산 한계로 포기했던 것을 장편에서 구현하고 싶었는데, 그중 하나가 시간이었다. 영화에서 시간은 이미지와 사운드로 표현되고, 그렇다면 계절을 순차적으로 담아 보자는 결론이 나왔다. 계절과 그사이 흐르는 며칠간의 이야기를 담는 것이 영화의 기본 틀이었다. 계절에 따라 가족들의 모습도 차츰 변화한다. 여름엔 다 같이 모여서 복작복작하다가 가을엔 누군가 떠나고 겨울엔 아주 소수만 남는다. 그 정도 맥락만 잡고 시작했다. 어쩌면 스토리보다 계절을 잘 담겠다는 목표가 오히려 컸던 것 같기도 하다.
시간 흐름에 따라 축소되고 와해하는 가족의 풍경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나.
가족의 계절을 담는다고 여겼다. 어떤 서사나 갈등보다는 ‘변화하는 계절을 담는다’는 원초적 목표에 집중했다. 시나리오 쓸 때만 해도 이 영화를 만들기가 이토록 어려운 줄은 몰랐다. 막상 시작해 보니 엄청나게 힘든 프로젝트더라. 일단 난 신인 감독인데 배우가 10명이나 된다. 거기에 계절이 3개. 보통 독립영화가 2~3개월 정도의 프로덕션을 통해 제작되는데, 우리는 인건비가 2배로 나가야 했던 거다. 다들 5~6개월로 계약 기간을 잡으니 아무리 적게 받는 사람도 천만 원을 넘기더라. 총예산이 6억인데 4억 가까이 인건비에 썼다. 영화계 일자리 활성화에 기여했다는 자부심이 있다. (웃음)

여태 단편에서 다뤘던 인물을 전부 합해도 이 영화를 따라오지 못한다. 가족 삼대라는 대규모 인원이 등장하는데, 현장에서 지휘자 역할을 맡으며 벅차지는 않았나.
매번 인물 한두 명이 등장하는 영화를 만들다가 갑자기 많은 인원을 마주하니 겁났다. 게다가 빛나는 선배님들과 부모 세대 배우들이 과반이고. 스케줄을 어떻게 맞출지, 다들 내 말에 따라줄지 걱정했는데, 우습게도 그런 건 하나도 문제가 아니었다. 되려 선배들이 있으니 현장 체계가 금세 잡혔다. 손숙 선배님을 중심으로 배우들이 딱 모이더라. 불만이 있을지언정 내 귀에 안 들어오는 거지. (웃음) 나도 디렉팅을 ‘빡세게’ 하는 스타일이 아닌 데다 배우들 대부분 연극 경험이 풍부하다 보니 촬영도 수월했다. 내가 순서와 그림을 제시하면, 동선과 타이밍 등은 배우들 스스로 고안했다. 현장에서 시간이 뜬다 싶을 때도 본인들이 나서서 해야 할 일을 해주고. 예산 외엔 문제라고 할 것이 없었다. 롱테이크가 많아서 내심 막막했는데 오히려 쉬워 보이는 장면들이 찍기 어렵고, 또 어려워 보이는 장면들이 찍기 쉽고 그랬다.
캐스팅 디렉터가 따로 있었나.
나랑 피디들이 캐스팅 디렉터 역할을 맡았다. 감사하게도 차미경 선배님은 출연을 일찌감치 약속해 주셨다. 내가 졸업 영화를 만들 때부터 장편을 함께하기로 했거든. 어떤 역할이든. 본격적인 캐스팅은 손숙 선생님부터 시작했다. 시나리오를 보내드리고 일주일도 안 돼서 연락을 받았다. 너무 감사했지. 그 나이대에 경상도 사투리가 가능한 배우를 찾으려다 보니 선택지가 많이 없었다. 경상도 출신이 아닌 배우랑은 작업할 수 없다는 것이 내 원칙이었거든. 그 지점에 부합하는 분이 손숙 선생님뿐이었다. 선생님이 출연을 확정해 주신 덕분에, 다른 배우들도 호의적으로 다가와 줬던 것 같다. 바쁜 시기인데 다들 배려하며 스케줄을 조정했고, 출연료도 예의만 갖추는 선에서 정리해 주셨다. 안 그랬으면 제작비가 10억도 부족했을 거다.
처음 작업하는 배우들이 대부분이었고, 배우마다 소통하는 방식도 달랐을 텐데.
사전에 같이 했던 배우는 차미경 선배님밖에 없다. 현장에서 대화할 시간이 많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기에 프리 단계에서 굉장히 여러 번 만났다. 작품이나 캐릭터에 관해 말하기보다는 인간적으로 가까워지려고 했다.
전체 리딩도 몇 번은 해봤나?
한두 번쯤 했다. 원래 다 같이 모여서 런스루도 하고 블락킹도 맞췄으면 했는데, 현실적으로 모든 배우가 동시 참석하는 건 어려웠다. 대신에 그룹별로 대화를 많이 나눴다. 처음부터 리딩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배우들 목소리 들으면서 시나리오 리듬을 파악하는 정도일 뿐, 어차피 연기를 판단하는 자리는 아니라고 봤다. 그러니까 리딩보다는 수다 떨고 밥 먹고 술 마시면서 친해지는 것이 우선이었다. 카메라가 되게 정직하지 않나. 인물간 거리를 정확하게 담아내는 매체이기에 배우들끼리, 그리고 나와 배우들도 실제로 가까워져야 한다는 생각이 컸다. 소통에 관해서는 앞서 말했던 것처럼 선배님들 덕을 본 것 같다. 나름대로 질서가 생겨서인지 후배들이 눈치껏 행동하기도 했고, 다들 나를 배려하는구나 싶었다. 현장에서도 내가 너무 지치거나 힘들까 봐 ‘오구오구’ 해주더라. 배우들이 한마디씩만 해도 나한테는 열 마디로 돌아오지 않나. 사실 대화할 시간을 내려면 어떻게든 냈을 것이다. 우리는 하루에 딱 10컷만 찍었거든. 총 27회차로 촬영을 마쳤는데 컷이 280개를 넘지 않는다. 그만큼 한 컷 한 컷 공들여 찍었고, 대화도 못 할 만큼 여유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배우들이 날 생각해서 어떤 부분은 먼저 이해해 주기도 하고, 애초 배우들끼리 직접 채웠던 부분도 많다.
촬영 기간은 어떻게 되나.
2022년 9월에 촬영을 시작했다. 여름 12회차, 가을 6회차, 겨울이 9회차. 이렇게 총 27회차다. 초반에 야외를 먼저 찍었다. 논 색깔이 변하기 전에 여름 야외 신을 찍고, 그다음 여름 실내 신 찍고, 거기에 가을 실내 신을 이어서 찍었다. 그렇게 16회차를 쭉 촬영하고 나서 한 달 쉬다가 단풍이 절정에 달했을 무렵에 다시 모였다. 상여 나가는 장면과 장지 신을 2회차로 찍었다. 그 후 두 달 정도 또 쉬다가 겨울 신을 2주 촬영하고 마쳤는데, 사실 중간에 1회차 촬영이 있었다. 성진이 택시 타고 가는 한 컷을 찍기 위해 부산까지 갔다가 서울로 올라왔다.
계절마다 영화 캠프를 떠난 셈이다. 배우들도 다 같이 합숙했을 테니까.
그래서 굳이 내가 끼어들지 않아도 배우들이 의견을 활발히 주고받았던 것 같다. 한 번 떠나면 아예 같이 사니까. 서울에서 촬영지까지 4시간 거리였다. 왔다 갔다 하기 쉽지 않으니 중간에 쉬는 날이 생겨도 계속 촬영지 근처에서 지내더라. 배우들끼리 시간 맞춰서 해인사도 놀러 가고, 그러다 저녁에 돌아오면 나랑 술 한잔 같이하고.
현장에서 가장 의지했던 사람은 누구였나.
정조은, 장지원 피디. 둘 다 학교 동기이고 오래 본 사이다. 이진근 촬영 감독과도 늘 소통했다. 배우 중 한 명만 꼽으라면 역시 강승호다. 우리는 “여기 모인 사람 전부 도망가도 승호는 남을 거다”라고 농담하기도 했다.


강승호는 독립영화에 자주 출연한 배우는 아니다. 어떻게 캐스팅하게 됐나.
성진이 영화의 구심점이 되는 인물이다 보니 다각도에서 고민했다. 내 또래 경상도 출신 배우, 마스크가 너무 뚜렷하지 않으면서도 멜랑꼴리를 깊이 있게 표현하는 배우가 필요했다. 독립영화 경험이 적다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극단적으로 생각했거든. 톱스타를 캐스팅하거나, 가장 신선한 얼굴을 찾거나. 강승호 배우는 예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만났다. 우리 둘 다 류경수 배우랑 친해서 친구의 친구로 금세 가까워졌다. 승호 배우의 공연을 여러 번 봤기에 연기 잘한다는 거야 익히 알았고. 사실 처음에는 성진 역을 맡기엔 너무 잘생겼다고 생각했는데, 보면 볼수록 이 친구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많겠다 싶더라. 원래 강승호 배우에게 다른 배우를 추천받았다. 친구다 보니 시나리오를 계속 읽어 줬거든. 본인이 연기하고 싶다는 말은 일절 없었고. 고민 끝에 내가 같이 하자고 승호를 꼬셨다. 결과적으로 내 선택에 굉장히 만족한다. 승호가 보여준 태도가 좋았다. 자신이 돋보이려고 안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살피면서 연기하더라. 성진이라는 인물 자체가 액션보다는 리액션 위주이지 않나. 보고 듣고 느끼고 감응하고 수용하는 캐릭터다. 상황에 잘 반응해야 하는데, 강승호 배우가 그런 면을 흥미로워하며 도전하고 싶어 했다.
성진은 집안의 기대와 달리, 배우가 되겠다고 상경한 인물이다. 캐릭터를 설정하는 과정에서 강승호 배우에게 영향받은 부분도 있나.
시나리오 작업 초기부터 그 설정은 확고했다. 나는 성진이 가족들 앞에서 역할놀이를 한다고 봤다. 진심을 감추고 거짓을 드러내는, 그 묘한 경계에 있는 직업으로서 배우가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더라. 동시에 성진은 집안 어른들과 무관하게 저만의 꿈을 품은 사람이기를 바랐다.
감독 입장에서는 가부장제를 상징하는 인물들을 묘사하는 데 있어 고민이 많았을 거다. 악의 축처럼 그리고 싶지도, 그렇다고 이들을 향한 연민을 부추겨 감정 이입을 유도하고 싶지도 않았을 텐데.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에서 어떻게 거리를 조절했나.
스무 살엔 그들을 미워하고 배척했다. 공격적 태도로 일관했는데, 언젠가부터 그들이 궁금해지더라. 무조건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왜’라는 질문을 던지게 됐던 거다. 왜 그럴까? 지금껏 어떻게 살았을까? <장손>은 그 이유와 맥락을 밝히는 작업이었다. 성진이 아버지를 제압하면서 이불을 뒤집어씌우는 장면이 나오지 않나. 애초 그 장면은 싸늘하고 무서운 느낌으로 예상했다. 아버지가 난데없이 주정을 부리면서 상황이 폭력적으로 흘러가니까. 근데 막상 촬영하고서 제3자의 시선으로 보니 너무 슬펐다. 슬픔을 예상하지는 못했는데, 이상하게 그렇더라. 누군가가 옳다거나 그르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옳고 그름을 내가 재단해서는 안 된다고 봤다. 그것이 내가 생각한 예의다. 혹자는 이 영화를 보고 “가부장제를 지나치게 따뜻하고 안온한 시선으로 그리는 것 아니냐?” 반문할 수 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누군가는 저 정도로 고통스럽구나' 하고 새삼 깨닫기도 한다. 다만, 어른 세대의 잘못보다 삶 자체를 더 조명하고 싶었다. 김진경 시인이 쓴 <30년에 300년을 산 사람은 어떻게 자기 자신일 수 있을까>(당대, 1997)라는 산문집이 있다. “60년대 이래 30년 동안에 서구의 300년을 압축해 따라갔”던 한국 사회에서 한 개인이 자신을 자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는 뜻이다. 개인적으로 <장손>은 할아버지에게 바치는 영화인데,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그 책 제목이 떠오른다.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세대 아닌가. 왕을 섬기는 봉건시대에 태어났는데, 하필 일제강점기였다. 식민지에서 고생하며 살다가 해방 이후에는 전쟁을 겪었다. 민주 정부가 들어서나 했는데 다시 독재가 시작되고. 민주화에 성공한 다음에도 신자유주의, 정보화 등 변화가 연속했다. 이만큼 세상을 다양하게 겪은 세대도 없을 것이고, 마치 역사에 휩쓸리듯 살아온 사람처럼 보였다. 우리 아버지 세대를 보는 감각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결국 그들이 통과한 삶의 여정과 그 이유에 관심을 뒀을 뿐, 그들을 옹호하거나 공격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라고 봤다.
영화 속 ‘장손’을 보면서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오롯이 자신으로 존재하기가 어려운 상태. 성진은 태어나면서부터 집안의 기둥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테고, 식구 모두 그를 제 아들처럼 여긴다. 때때로 한 인격이 아닌 공공재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 속에서 성진은 수치심에 시달리는 표정을 내비친다.
성진은 주인공이자 관찰자다. 카메라를 대리하는 역할로서 성진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한때 성진을 좀 더 적극적인, 가족의 죽음이나 갈등을 통해 변화하고 투쟁하는 인물로 수정할까 생각했던 적도 있다. 사실 그것이 훨씬 일반적인 극작의 흐름이기도 하고. 근데 아무래도 가짜 같더라. 성진이 가족을, 집안의 규칙과 문화를 어떻게 바꾸겠나. 할머니의 죽음은 분명히 중대한 일이었지만, 나 역시 할머니를 떠나보낸 것을 계기로 단숨에 뭔가를 깨닫거나 배우지는 못했다. 시간과 경험이 쌓이면서 미세하게 다른 방향을 바라볼 수 있었던 거다. 수치심이라고 표현했는데, 결국 성진은 이율배반적 인물이다. 장손이기에 집안의 지원을 받아서 제 꿈을 좇아갈 수 있지만, 반대로 가족 행사를 치러야 해서든 돈이 필요해서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집으로 소환당한다. 장손의 역할과 임무를 떨쳐버리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는 거다. 그렇게 가족 곁에 돌아오면 밖에서와는 또 다른 의미로 연기를 해야 하고. 강승호 배우에게 특별히 캐릭터 플레이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다만, 진솔하게 반응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뭔가를 애써 만들어 내려 하지 말고, 상황과 감정에 충분히 집중하기를 바랐다. 그에 관해 느끼고 해석하는 것은 결국 관객의 몫이니까. 앞선 질문과도 좀 연결된다. 인물과 거리를 조정하는 방식에 하나 덧붙이면, 사실 나라는 연출자의 강점은 ‘인물’에 있다고 보거든. 근데 <장손>에서는 캐릭터만 파고들어 다루는 순간, 이 영화의 본질을 놓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인물에게 거리를 둔 채 풍경 위주로만 가면 너무 실험적 영화가 될 듯하고. ‘어떻게 설득할 것이냐’를 놓고 두 방식 사이를 줄타기했던 것 같다.
인물을 다루는 솜씨는 여전하다. 특히 성진이 집안의 여자/남자와 관계 맺는 방식이 각각 다른 점이 눈에 들어온다. 정확히 말하면 여성들과의 관계에 포함되는 것, 예를 들면 일상적 대화나 편안한 침묵, 스킨십 등이 남자들과의 관계에서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성진은 각각의 인물에게 태도가 조금씩 다르다. 심지어 아버지한테는 원체 거리감을 느끼다 보니 사투리조차 쓰지 않고 서울 말로 대한다. 할아버지한테는 안팎에서 태도 차이를 보인다. 사람들이 볼 때는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지만, 단둘이 있으면 애처럼 투정을 부리는 식이다. 내 어린 시절과 이어지는 감각이고, 이러한 것을 아울러 ‘역할놀이’로 표현했던 거다. 가부장제를 피상적으로 보면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는 구조’라고 이야기할 테고, 물론 그 지점도 무시할 수 없다. 다만, 좀 더 들어가서 보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각자 역할놀이를 하는 중이구나 싶다. 우리 할머니는 내가 부엌에 들어가면 질색하셨다. “이곳은 여성의 공간이기에 남자는 함부로 들어와선 안 된다”라는 말을 어릴 적부터 들었다. 성 역할이 명확히 구분된 세계였고, 동시에 모순이 늘 따라다녔다. 우리 아버지도 요리를 무척 좋아하는데 부엌에 갈 때마다 할머니한테 혼났거든. 그러면서도 내가 남자로서 어떤 역할을 해내야 한다고 생각하시고. 결국 스스로 동의하든 안 하든 가족들과 있으면, 집안의 어떤 공식 행사를 치를 때면, 나는 항상 TK 특유의 가부장 문화 속에서 움직이게 된다. 게임을 할 때처럼 룰을 숙지하고 따르는 거다. 나만의 시공간으로 복귀하면 그 룰이 또 사라지고. 이렇듯 관계와 상황마다 감각이 달라지는 지점이 흥미롭게 다가왔기에 영화에서도 표현하고 싶었다.


성진이 아버지 태근을 제압하는 신처럼 역할놀이가 불가능해지는 순간도 이따금 등장한다. 그 장면에서는 손숙 배우가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태근이 나타나기 직전까지 성진은 할머니 말녀의 한글 공부를 지켜보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데, 이후 태근과 씨름하는 손자 앞에서 말녀는 한동안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군다.
마치 단편 <연지>에서 상습적 폭력의 결과를 보여줬던 것처럼 그 장면도 만성이 된 폭력을 담는다. 말녀고 승필(우상전)이고 아들을 고치려고 얼마나 애썼겠나. 하지만 평생을 노력해도 태근은 그대로이고 부모인 두 사람도 더는 변화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니 할아버지는 깨어 있는데도 자는 척하고 말녀는 참고 참다가 ‘그래도 내 아들 살려야 한다’는 마음으로 방에서 뛰쳐나왔을 거다. 며느리와 손자를 보기가 부끄러웠겠지. 그런데도 하나뿐인 아들이기에 또 불쌍하고 안쓰럽고. 어떤 사건을 바라보는 이들의 인식과 태도가 각각 다르듯, 그 가족 사이에 놓인 비극들 또한 복합적이라고 생각했다.
오만석 배우에 관해서도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울화와 울분을 형상화하면 저런 모습이구나 싶던데, 배우가 직관적으로 이 인물을 받아들였는지 아니면 부연 설명이나 전사를 공유하는 과정이 필요했는지 궁금하더라.
오만석 선배님은 경북 영주 출신이다. 어린 나이에 배우가 되겠다고 결심하셨고 고생도 많이 하셨다. 집안에서 엄청나게 핍박받으시고. 그렇게 가부장적인 집에서 아들이 소위 ‘딴따라’를 하겠다고 나섰으니 얼마나 반대가 심했겠나. 만석 선배님께 시나리오를 보냈을 때 “이 역할은 대한민국에서 내가 제일 잘할 수 있겠다”라며 꼭 같이 하고 싶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본인과 맞닿은 지점이 참 많은 인물이라고 하시더라. 선배님과 무척 깊은 대화를 나눴다. 시나리오의 맹점들도 짚어주셨고, 다양한 방면에서 이야기가 오갔다. 태근은 극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인물 중 하나다. 만약 내가 중년 감독이었다면 성진이 아닌 태근을 주인공으로 삼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갈등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니까. 캐릭터를 표현하는 방식에 관해선 굳이 말씀드리지 않았다. 선배님을 믿고 맡기면 충분하다고 봤다.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태근과 혜숙 남매가 두드러진다. 둘 다 복잡한 인물인데, 태근이 비교적 투명한 인물이라면 혜숙은 영화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그녀의 심연이, 그녀 삶에 자리한 어둠이 너무나 깊어서 차마 들여다보지 못할 정도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나와 차미경 선배님의 목표였다. 혜숙은 이질적인 인물이다. 당장 집을 떠날 것처럼 보이는데, 이상하게 근처를 서성이며 계속 집에 붙어 있는다. 집안을 지키는 사람인가 했더니 돌연 등을 돌리고. 영화 말미에 나오는 화재의 경우, 원인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지만 혜숙과 집을 잇던 끈이 떨어져 나가는 장면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이성이나 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선택은 아니겠으나, 감정적으로는 혜숙의 마음이 전달되지 않을까 싶었다.
엔딩의 불타는 집은 오프닝의 수증기 가득 찬 공장과 맞물리면서 수미상관을 이룬다. 예산이 부족했다면서 재주 좋게 집 한 채를 태웠다.
오프닝에서도 그 수증기가 화재 연기처럼 보이기를 바랐다. 원래 시나리오에선 집의 별채가 불타는 설정이었다. 고모는 본채에 딸린 별채에 기거하는 사람이고, 화재 신으로 그 별채가 떨어져 나가는 과정을 이미지화하려는 생각이었다. 근데 현실적으로 해당 구조의 집을 찾는 일이 쉽지 않았던 데다, 별채만 태우는 것도 불가능했다. 결국 고모는 옆집에 사는 것으로 시나리오를 수정하고, 폐가를 구해서 미술에 공을 들였다.

디테일에 신경을 많이 썼구나 싶다. 거실에 온도계를 두고 실시간으로 체크하며 에어컨을 튼다든지, 스탠드에 할머니의 삐뚤빼뚤한 필체로 “한 번은 켜진다. 두 번은 꺼진다.”라는 메모를 붙여 놓는다든지. 이런 디테일도 직접 경험한 데서 가져왔나.
롱테이크가 많고 주로 픽스로 찍었기에 미장센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프로젝트였다. 인물의 삶이 공간에 묻어 있어야 한다고 미술팀에 얘기했다. 그 과정에서 미술 감독님이 아이디어를 많이 줬고, 세부 공간마다 콘셉트를 지정했다. 이를테면 성진 방은 예전에는 성진이 썼지만 현재 창고처럼 사용된다. 할머니가 그곳에 성진의 모든 물건을 보관해 놓고, 가끔 공부하러도 들어간다. 이런 식으로 세세하게 내용을 채워 나갔다. 게다가 우리가 대관한 집 자체가 이미 소품을 풍부하게 갖고 있는 공간이었다. 벽걸이형 전화기도 그 집에 원래 있던 거다. 가까이서 보니 글자가 일본어로 적혀 있더라. 선풍기도 50년쯤 돼 보였는데 전원을 켜려면 ‘도란스’가 필요했다. 제기도 정말 관리를 잘한 놋그릇이었고. 집안 역사를 담은 소품이 많아서 오히려 우리가 채워 넣는다기보다는 덜어내고 정리하는 과정이 길었다.
장례 조의금 확인하는 장면에서 동료 이름을 사용했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2022)를 만든 김세인 감독도 등장하고, 올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은빛살구>를 공개한 장만민 감독의 이름은 거의 너덧 번을 외치던데.
그냥 이스트 에그라고 해두자. 소소하게 웃기는 장면을 넣고 싶었다. 이름이 워낙 많이 나오는 신인데, 아무렇게나 지어 내려니 어렵기도 하고. ‘나중에 고쳐야지’ 하고 동기들 이름을 썼다. 시나리오 쓸 무렵, 항상 눈앞에 보이던 사람들이니까. 본래 다른 동기들도 더 많이 등장했는데 신을 중간에 걷어 내며 몇몇이 빠졌다. 장만민 감독은 자기 이름 나오기 전에 컷하라고 했다. 딱 그 타이밍이라면서 뒤는 사족이니 빼라고. (웃음)
영화 안팎으로 좋은 파트너가 여럿이었다. 그중 이진근 촬영감독도 빼놓을 수 없다. <장손>은 당분간 이진근의 대표작이 되지 않을까.
평생 대표작이지! (웃음) 농담이고, 물론 형의 대표작은 계속 갱신될 거다. 그래도 난 일찌감치 형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촬영상을 받을 거라고 예상했다. 이번 작업하며 대화를 가장 많이 나눴던 상대가 이진근 촬영감독이다. 형은 진짜 아티스트다. 본인이 구현하고 싶은 것도 많은 동시에, 내 생각을 항상 궁금해했다. 기본 콘티는 내가 짰거든. 일단 콘티를 그린 다음, 어떻게 이것을 이미지화할지 같이 논의했다. 순서를 나누면 내가 먼저 컷 구성과 인물 동선을 정하고, 다음엔 카메라 위치와 사이즈를 함께 상의하고, 그 후 카메라를 움직이는 타이밍과 빛의 질감 등은 형이 담당하는 식이었다.
이전에 손발을 맞춰본 적이 따로 없던데.
한국영화아카데미 재학 시절, 내 교수님이었다. 이진근 촬영감독이 조희영 감독과 작업할 때, 나도 동시녹음으로 일하면서 함께 현장을 다녔다. 태도가 너무 좋더라. 앵글 취향도 비슷하고. 이진근 촬영감독과는 작업 내내 갈등이 전혀 없었다. 서로 놀리느라 바빴지. 촬영 끝나면 내가 “형, 로저 디킨스랑 찍는 코엔 형제의 마음이 이런 걸까요?” 묻고, 형은 “오늘도 이렇게 전설적 연출이랑 함께 일해서 즐거웠다” 받아치고. (웃음) 말도 안 되는 덕담을 주고받으며 으쌰으쌰 했던 것 같다.
가족과 집안이라는 유무형의 집단을 비추기에 필연적으로 풀샷이 많다. 촬영감독과 사전에 어디까지 계획하고 약속했는지 궁금하다.
백 퍼센트 준비하고 촬영에 들어갔다. 콘티까지 완벽하게 세팅했고, 현장에서 거의 변화가 없었다. 카메라의 미세한 위치 변화 정도? 우리가 약속한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루에 10컷만 찍는다, 그리고 자연광을 최대한 활용한다. 새벽이든 해 질 녘이든 그 시간대를 맞춰서 찍으려고 했다. 촬영감독으로서는 욕심이 날 수밖에 없는 현장이다. 현실적으로 어려운 점이 많았지만, 어떻게든 해내고 싶어서 의기투합했다.


공간을 모르면 찍을 수 없는 컷이 많다. 애초 로케이션 답사부터 같이 다녔나.
당연하다. 최소한 세 번씩은 방문했다. ‘영화 캠프’가 그런 면에서도 유효했다. 원하면 언제든 시간 내서 현장을 확인하러 갈 수 있었다. 특히 촬영 전날에는 무조건 촬영장에 가서 위치를 다시 체크했다. 어떤 변화가 있는지 살펴보고, 그에 따라 콘티를 수정하고 나서야 잠을 잤다. 그러니 촬영 도중에 형한테 딱히 말할 것이 없었다. 너무하다 싶을 수도 있는데, 내가 그렇게 해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다. 영화는 프리 프로덕션이 전부인 것 같다. 롱샷을 되게 잘 찍고 싶었다. 어느 순간부터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롱샷을 잘 찍는 영화를 찾기가 어려워진 것 같다. 난 <장손>을 사라지는 것에 관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클로즈업 위주의 인물 영화처럼 찍고 싶지 않았다. 점점 세트 중심으로 촬영이 이루어지는 추세고, 앞으로는 이런 방식으로 영화를 찍기 어려울 거라고 본다. 다만, 자연과 풍경을 품으며 하나하나 공들여 찍는 것이 내 취향이기도 하고, 이번에는 그렇게 영화를 찍겠다고 마음먹었다. 상여 행렬 장면 촬영하는 날, 선배님들이 오랜만에 보조 출연하러 온 것 같다며 농담하시더라. 얼굴도 안 보이는데 계속 걸으라고 하니까.
의도한 바인지 모르겠으나 <장손>은 한국 전통 제례와 풍습을 기록했다는 점에서도 유의미한 작품이다. 방금 말한 상여소리부터 장지, 제사 등 여러 장면이 볼거리를 풍성하게 만든다.
영화의 주요 기능 중 하나는 아카이빙이다. <축제>(임권택, 1996), <학생부군신위>(박철수, 1996) 등이 좋은 레퍼런스였다. <장손>은 비교적 건조한 극이고 내가 그들 작품을 뛰어넘을 수도 없지만, 그 속에 담긴 해학과 멜로드라마 감성을 잘 배우고 싶었다. 한국적인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이 영화가 시간을 견뎌서 오래오래 살아남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장손>에서 상여소리를 해주신 송문창 선생님은 대구 무형문화재 전수자인 전문 소리꾼이다. 소리를 듣고 찾아가긴 했지만, 본래 선생님께 참여를 부탁드리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솔직히 선생님이 살아계신 줄도 몰랐거든. 우리가 촬영할 때 선생님 연세가 아흔둘이었다. 근데 너무 정정하시더라. 당신께서 직접 하고 싶다고 말씀하셔서 처음엔 걱정했는데, 그것도 기우였다.
음성 듣고 50대 정도로 예상했다.
아침 식사로 국밥에 소주 한잔하시면 선생님이 딱 그 목소리를 찾으신다. 술 없으면 소리 힘이 떨어지고, 술 들어가면 다시 힘이 나온다. 선생님이 이제 아흔넷 되셨겠다. 누가 물으면 자랑스레 말한다. 우리 영화엔 생후 30일부터 90대까지 다 출연한다고. (웃음)
인물과 환경, 촬영 합이 절묘하게 들어맞는 장면 중 하나는 엔딩이다. 카메라가 프레임 가장자리로 걸어가는 인물을 뒤쫓다 보면, 어느새 산등성이가 화면을 꽉 채운다. 그의 행로를 짐작할 즈음, 길이 꺾이면서 인물이 프레임 중간으로 들어오고 때마침 눈발이 거세게 날린다. 카메라 무빙부터 눈 내리는 타이밍까지 우연이라면 최고의 행운인데.
원래 눈이 내리길 기대하지는 않았다. ‘승필이 눈 쌓인 길을 걷는다’ 정도로 구상했는데, 이 또한 우리에겐 도박이었다. 눈이 언제 올지 모르니 우상전 선생님과 약 2주를 잡고 대기했다. 언제든 눈이 쌓이기만 하면 바로 찍으러 갈 작정이었다. 로케이션 근처에 사시는 분께 수시로 전화했다. “눈 오나요? 눈 왔나요?” 그러던 차에 드디어 눈 소식이 들렸다. 눈이 좀 쌓이기를 기다렸다가 촬영을 시작했는데, 첫 테이크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라. 당시엔 난감했다. ‘안 되는데, 이런 그림을 상상한 건 아니었는데.’ 너무 영화적이라고 해야 할까. 예상했던 느낌이 아니라서 두 번째 테이크를 찍었다. 그랬더니 이번엔 해가 뜨는 거다. 결국 첫 번째 장면을 쓸 수밖에 없었는데 결과적으로 만족한다. 그날 우상전 선생님께 모퉁이를 돌면 더 걷지 말고 멈추시라 말씀드렸다. 근데 어째선지 연출부가 신호를 줬는데도 선생님이 괜찮다면서 계속 걸으셨다고 하더라. 승필이 화면에서 사라지고 등장하길 반복하는 효과가 생기며, 덕분에 좀 더 진실한 장면이 담겼다. 실은 다른 겨울 장면처럼 엔딩도 애초 픽스로 계획했는데, 몇 차례 로케이션을 가보고 나서 마음이 바뀌었다. 자연으로 가려고 하는 할아버지와 어떻게든 그를 집안에 가둬두려고 하는 카메라 간의 충돌을 담고 싶었다.


장면마다 세세하게 기억한다. 그만큼 치열하게 고민했다는 뜻이겠지?
영화에 한해서는 전부 기억한다. 어떻게 찍고, 누구와 무슨 대화를 나눴으며, 당시 내 감정이 어땠는지까지.
제작일지 같은 걸 써두는 편인가?
안 썼다. 현장에서는 잘 시간도 부족해서 제작일지 써야겠다는 생각조차 못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아쉽긴 하다. 짧게라도 남겨둘걸. 근데 뭔가를 남겼다고 해도 그게 촬영 내용에 대한 복기는 아니었을 듯하다. 욕하고 하소연하고 그런 얘기들뿐이겠지. (웃음)
영화 속 본가는 대구로 나오는데 촬영지는 합천, 거창, 고령 등 다양하더라.
대구에 남아 있는 전통 마을은 대개 관광지로 바뀌었다. 찍으면 가짜 같은 느낌이 들었고, 무엇보다 집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경상도 일대로 촬영지를 확장하고 여기저기 찾으러 다녔는데, 결국 제작진이 합천에서 현재 집을 발견했다. 딱 보자마자 “우리 베이스는 여기다!” 싶더라. 집주인 선생님께서도 오랫동안 지켜왔던 집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하셨다. 영화 촬영에 굉장히 호의적이셨고 여러모로 도움을 받았다. 마을 어르신들도 마찬가지였다. 동네 주민이나 할머니 친구로 나오는 분들은 진짜 그 동네에 사는 할머니들이다. 연기자를 섭외할 수도 있지만 그것도 되게 가짜 같더라. 촬영 초반에는 다들 긴장하셨는데, 같이 찍는 오만석, 안민영 선배 등이 워낙 전문가다 보니 할머니들도 금세 긴장을 푸셨다. 만석 선배님이 “어머님, 저 그냥 아들 친구라고 생각하시고 막 대해 주세요” 하시더라. (웃음) 그 장면 오케이 할 때 너무 기뻤다. 날씨든 비전문배우든 그렇게 현장에서 예상치 못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뭔가를 발견하면 참 재밌다. 감독으로서 쾌감을 느끼는 순간인 것 같다.
마을에서 상영회 했나.
합천에서 동네 분들 모시고 여러 번 했다. 도와주신 분들 다 초대하고 싶어서 극장을 빌렸다. 영화도 보여드리고, 어르신들 덕분에 무사히 마쳤다고 절도 올렸다. 집주인 선생님도 뿌듯해 하셨다. 물론 영화는 재미없게 보셨을 수도 있지만, 본인 공간이 영상으로 기록된 것을 행복하게 받아들이시더라.
<장손> 제외하면 가장 최근에 만든 영화가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작품 <성인식>(2018)이다. 차기작 진행 상황은 어떤지 궁금하다. 다음 영화까지 또 5-6년이 걸리면 안 되지 않겠나.
일단 그 정도 걸릴 예정이고. (웃음) 테마는 좀 비슷할지언정 매번 다른 결의 작품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아마 차기작은 <장손>과는 전혀 다른 판타지 영화가 될 것 같다. 시나리오는 이미 완성했다. <장손>이 워낙 부침을 겪었기에 기다리면서 틈틈이 차기작을 썼다. 근데 인생이 참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장손> 진행이 더뎌지기에 차라리 차기작을 먼저 찍으려 했는데, 그 순간 <장손>이 투자와 제작지원을 받으면서 차기작 작업을 중단했다. 다음 작품은 대중 영화가 될 것 같다. 혹은 드라마일 수도 있고. 아무튼 젖과 꿀이 흐르는, 훨씬 돈 냄새 풍기는 작품이 될 테니 기대해도 좋다. (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