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보면 배부른 소리라고 핀잔할지도 모르겠다. 적당한 부모 밑에 자라 적당한 대학을 나왔고 적당한 회사에 취직했다. 겨우 제 몫을 하려는가 싶은 이십 대 후반, 계나(고아성)는 갑자기 다 관두고 뉴질랜드로 떠나겠노라 선언한다. “한국이 싫어서.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 가족은 물론이고 오랜 연인 지명(김우겸)도 계나를 만류한다. 그들 말대로 외국이 곧 천국은 아니라는 것쯤은 계나도 안다. 새로운 인생 찾겠다고 시간 낭비할 만큼 넉넉한 형편도 아니다. 하지만 온도와 압력이 극에 달해 임계점을 넘는 순간, 계나의 눈앞에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어 보였다. 냉골이 된 집에서 재건축만 바라보며 버티는 식구들, 문을 나서자마자 죽고 싶어지는 통근길, 언제나 더 힘센 욕망이 더 약한 욕망을 잡아먹는 도시. 계나는 자신을 멸종 위기 동물로 여긴다. 자본도 경쟁력도 없는 주제에 세간의 논리를 곧이곧대로 따르지 못한다. 삶에서 생존 이상의 것을 원한다. 자신보다 불행한 사람을 보며 경각심을 갖기도, 위안을 얻기도 싫다. 계나는 조용히 비명을 지르다 끝내 제 몸집만 한 짐을 싼다. 영화는 그 틈을 파고든다. 소리 없이 악을 쓰던 시간과 무표정한 얼굴로 등을 돌린 시간 사이에서 계나가 무엇을 견뎠고, 또 무엇에서 달아나려고 하는지 찬찬히 듣는다.
영화 중반, 계나는 오클랜드 해변에 걸터앉아 있다. 친구와 서핑을 나온 참이다. 이주한 지 3년이 흐른 지금, 섬나라에 사는 이답게 까무잡잡해진 계나는 전보다 자유롭고 건강해 보인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래가 계나의 발가락 사이를 간지럽힌다. 카메라는 고개를 들어 바다로 시선을 옮긴 다음, 밀려오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파도를 잠시 응시한다. 그러다 다음 장면에서는 대야를 수북히 채운 멸치 더미에 초점을 맞춘다. 햇빛과 바람을 즐기던 계나는 그렇게 두 차례의 오버랩을 거치며 돌연 집안 거실에서 엄마(오민애)와 마주 앉아 멸치를 다듬는 순간으로 돌아간다. 엄마는 “참고 기다리면서 이 악물고 살다 보면 보상받”는 날이 올 거라고 타이른다. 불행한 현재를 행복한 미래의 필수 조건처럼 간주하는 말투에 계나는 결국 입을 다문다. 영화는 이처럼 이미지를 중첩하고 시공간을 이동하길 거듭한다. 뉴질랜드에서 펼쳐지는 새롭고 아름다운 삶의 풍경을 기대한 관객에게는 다소 아쉬운 결정이겠으나, <한국이 싫어서>는 플래시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이야기한다. 이는 한국과 뉴질랜드의 일상을 비교하고 대조하려는 의도라기보다는 계나의 내면 상태를 시각화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기억은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다. 눈부신 남태평양 바다 앞에서 인천 구월동의 낡아빠진 아파트로 넘어갈 만큼 자의적이고 끈질기다. 낮과 밤도 계절도 뒤바뀐 공간에서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한다, 이런 마음으로” 적응한다 한들, 계나는 중력처럼 자신을 잡아끄는 존재와 관계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나기 어렵다. 영화는 연쇄하는 기억을 이미지로 다루며 “한국이 싫어서”라는 짤막한 동기가 포함하는 감정을 서술한다. 선형적 흐름을 거부하기에 관객 입장에서는 정보를 받아들이고 조합하는 과정에서 시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인물과 상황을 끊임없이 재조명하는 효과를 낳는다. 예컨대 계나가 엄마와 다듬던 멸치는 더 앞선 장면에서 이미 등장한 바 있다. 그 멸치 한 줌을 안주 삼아 홀로 술을 마시던 아빠(장유)에게 계나는 울면서 부탁했다. “아빠 그냥 18평에 사시면 안 돼요?” 아마도 그 밤에 계나는 마음을 굳혔을 것이다. 재건축을 기다리는 부모가 24평 아파트를 욕심내는 대신 18평에 만족한 덕분에, 맏딸에게 돈을 보태라는 요구를 철회했기에, 계나는 여태 모은 적금을 들고 뉴질랜드행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된다.
<한국이 싫어서>는 ‘요즘 애들’의 이면을 비춘다. 계나는 주어진 것에 감사할 줄 모르고 투덜대는 철부지가 아니라, 계급적 서열에서 하위를 감당하는 여성 청년이다. 뉴질랜드 이주는 낭만 넘치는 모험이라기보다는 겨우 숨통을 틔우는 행위에 가깝다. 지진을 감지하고 서둘러 대륙 이동하는 새처럼 계나는 자신을 둘러싼 위기를 기민하게 알아차린다. 영화는 계나를 중심으로 위태롭고 자유로운 청춘 시절을 통과하는 동시에, 주변 인물 또한 성실히 묘사한다. 계나의 여동생 미나(김뜻돌)는 언니와 비슷한 무력감을 공유하면서도 저만의 자리를 유연하게 일궈 나간다. 지명은 계나와의 차이 혹은 제 한계를 인지하는 와중에도 관계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미덥고 성숙한 태도를 간직한다. 계나가 뉴질랜드에서 처음 사귄 친구 재인(주종혁)은 얼빠진 첫인상과 달리 꿈을 찾아가는 다부진 면모를 보여준다. 한편, 영화는 국가 고시에 매달리던 20대 청년과 ‘행복 전도사’로 활약하던 40대 스타 강사, 또 다른 가능성을 좇아 뉴질랜드에 이민한 일가족 등 한국 사회를 상징하는 인물들의 죽음을 언급하며 현실에 편재한 부조리와 절망을 살펴보기도 한다.


동명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연출했으나, 영화는 필연적으로 소설의 많은 부분을 각색해야 했다. 소설이 출간된 시점은 이미 10년 전이고, 당시 사회를 반영했던 ‘헬조선’ 담론은 오래전 유행어처럼 남은 상태다. 영화는 한국과 뉴질랜드를 이분하여 어느 한쪽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대신, “행복이란 말 있잖아. 왠지 과대평가 된 말 같아.”라는 대사를 통해 ‘소확행’에 몰두하는 흐름과도 거리를 둔다. 중요한 것은 행복을 추구하라는 보편적 메시지가 아니라, 사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에 안달해야 할 만큼 숨 가쁘게 달리는 이들에겐 그런 메시지마저 압박을 가중한다는 사실이다. 영화는 그 속에서 옳고 그름을 논하거나 정답을 제시하기를 거부하고, 가능한 한 여러 욕망과 좌절을 포용하려 한다.
<한국이 싫어서>는 <한여름의 판타지아>(2014) <괴이>(2022)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2023) 등을 연출했던 장건재 감독의 신작이자, 배우 고아성이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종필, 2020) 이후 오랜만에 주연으로 선보이는 작품이다. 과거와 현재를 겹겹이 두르며 동심원 형태로 리듬을 확장하는 영화 속에서 중심을 잡아내는 배우의 역량이 특히 눈에 띈다. 활기와 우울이 공존하는 얼굴 위에 영화가 서울의 겨울과 뉴질랜드의 여름을 옮겨 놓는 사이, 계나는 또 다른 시공간으로 넘어갈 채비를 마친다.
한국이 싫어서 Because I Hate Korea 감독 장건재 출연 고아성, 주종혁, 김우겸, 김뜻돌 제공 엔케이컨텐츠 배급 디스테이션 제작 모쿠슈라 공동제작 영화적순간, 싸이더스, 인디스토리 제작연도 2023년 상영시간 107분 등급 12세이상관람가 개봉 2024년 8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