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부산국제영화제 화제작으로 이옥섭 감독의 첫 장편 <메기>(2018)를 빼놓을 수 없다. 시민평론가상, CGV아트하우스상, 올해 신설된 KBS독립영화상에 이어 주연 배우인 이주영이 올해의 배우상까지 수상했다. <메기>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영화 프로젝트로, ‘청년’이라는 키워드에서 시작된 영화다. 청년이라고 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상황, 예컨대 어둑한 일상의 풍경이 <메기>에서도 드러난다. 하지만 <메기>는 현실에 천착하거나 압도되기보다는 다양한 양상으로 터져 나오는 이 시대의 불안과 두려움을 특유의 상상력과 유머 감각으로 거침없이 표현하는 영화다.
<메기>는 비밀 섹스 장면이 찍힌 X-Ray 사진이 유출되는 사건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X-Ray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한 병원 직원들. 누가 문제의 사진을 찍었는가는 아예 관심 밖이다. 간호사 윤영(이주영)과 애인 성원(구교환)은 X-Ray의 주인공이 자신들이라고 결론 낸다. 한데, 어찌된 일일까. 다음 날 병원에 출근한 이는 윤영뿐이다. 확신으로 변한 의심, 믿음이 된 두려움. 원인 불명의 대형 싱크홀까지 도심 곳곳에서 발견되면서 인물들은 혼란에 빠진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메기>가 처음 공개된 후, 이옥섭 감독과 성원 역의 구교환 배우를 만났다. 이옥섭, 구교환은 함께 각본을 썼고 구교환은 프로듀서로도 참여했다.
<메기>는 젊은이들이 일상에서 느낄 관계의 불안과 사회 곳곳에서 감지되는 위험 등이 여러모로 녹아 있으며, 몰래카메라나 데이트 폭력과 관련된 문제까지도 건드리고 있다. 지금의 이야기를 어떻게 떠올렸는지 궁금하다.
이옥섭_ 우울할 때면 뭔가를 배우는 게 좋더라. <창작과 비평>에서 진행하는 김성중 소설가의 단편소설 쓰기 수업을 들었다. 정말 재밌어서 구교환 선배에게 추천해 같이 또 들었다. 소설을 써야 했는데, 우리는 영화 시놉시스를 썼다. 그게 <메기>의 모티프였다. 애초에는 <홀>이라는 제목이었는데 작가님께서 <메기>가 어떻겠냐고 하셨다. 작가님께 영화를 보여드리고 싶은데 긴장이 돼 부산영화제에 왔다는 말도 아직 못 드렸다.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청년’이라는 키워드를 받고 고민하고 있을 때 권해효 선배는 “너희가 청년이니 너희 이야기를 쓰면 그게 곧 청년을 주제로 한 인권영화가 될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다. 이야기를 쓰는데 힘이 됐다. 처음에 쓴 시나리오는 섹스하는 장면이 찍힌 X-Ray가 병원에 돌게 되자 세 명이 직장을 그만두는 이야기였다. X-Ray의 주인공이 자기라고 오해한 사람, X-Ray에 찍힌 여자를 짝사랑한 사람, 진짜 X-Ray의 장본인이 중심이었다.
구교환_ 지난해 4월 국가인권위원회의 제안을 받고 7월께 그런 내용의 시나리오가 나왔다. 그때 쓴 시나리오는 지금 보다 훨씬 규모가 커서, 그해 정동진독립영화제를 다녀온 후 본격적으로 수정 작업을 했다. “신념은 계속 바뀐다”는 영화 속 대사처럼 <메기>도 그렇게 시작해 조금씩 계속 바뀌어왔다. 걱정과 불안의 나날을 보내며 지금까지 온 것 같다.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영화펀드에 지원해 마감일이 생기자 탄력을 받았다.
이옥섭_ 요즘 불법 몰래카메라 촬영이 상당히 많잖나. 공중화장실에 갈 때면 여기도 카메라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어느 정도 포기한 상태이기도 하다. 무슨 일이 발생하면 그게 나일 수도 있겠다는 불안이 계속 있었다. 그런 마음이 영화에서는 X-Ray에 찍힌 게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설정으로 조금은 가볍고 장난스럽게 표현됐다. 2년에 한 번꼴로 계속해서 이사해야 하는 경험도 들어가 있고. <메기> 찍을 때 한국의 여기저기서 땅이 흔들리는 일이 많아 그런 상황도 들어가 있다. 어딘가에 발붙이고 서 있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불안이 재밌게 전달되게끔 하고 싶었다. 실제 세계에서는 상당히 고통스러운 일이니까.
구교환_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딱 이 영화의 정량을 관객들이 봐준다면 좋겠다. 톤이 주는 즐거움이 있으니까. 또 보고 나면 ‘만약 나라면’이라는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이옥섭_ 불안 속에서 “어떤 믿음을 갖고 사세요?”라고 묻고 싶었다. 엔딩 이후, 윤영이 어떤 선택을 할지 나조차 아직 정하지 못했다. 관객은 어떤 선택을 할까 궁금하다. 의견을 구하고 싶고 나를 설득해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다. 관계에서 오는 불안이 항상 있는 것 같다.



그런 불안을 감지하는 중요한 매개로 물고기 메기(목소리 출연 천우희)를 등장시켰고 심지어 메기의 내레이션을 넣었다. 또 도심의 싱크홀이라는 소재로 일자리 문제를 보여주고 사람들의 불안 심리를 시각화한 점 역시 흥미롭다.
이옥섭_ <창작과 비평> 수업 때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SF 단편 <보이지 않는 여자들>을 읽었다. 비행기 추락으로 무인도에 떨어진 모녀와 두 명의 남자가 등장한다. 남자들은 모녀에게 자신은 해롭지 않다며 끊임없이 주장한다. 하지만 결국 모녀는 이들과 있을 바에는 정체 모를 외계로 가는 게 낫다고 판단한다. 이 소설이 1973년도 작품이다. 읽는 내내 그 당시 쓰인 소설이나 지금의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음에 소름이 돋더라. 말로 설명하긴 힘들지만, 책을 읽고 든 생각과 감정이 싱크홀로 이어진 것 같다. 인력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외계가 싱크홀과 닮은 것도 같다.
구교환_ 이옥섭 감독님이 말을 정말 잘 한다. 이렇게 홀로서기에 성공하는 건가. (웃음) 이옥섭 감독은 동물이나 사물이 말하는 걸 좋아한다. 최근까지 쓴 시나리오에도 바다에 빠진 볼링공이 말을 한다. SF물 연출을 해야 한다.
이옥섭_ 이제 SF 물을 쓸 거다. 내가 좋아하는 동물이나 사물이 말하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
구교환_ 나도 SF 물을 써야겠다.
이옥섭_ 따라 하는 건가.
구교환_ 버려질까 봐 무섭다. (웃음) <메기>의 인물들은 서로가 한 말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말의 전이, 전염이랄까. 그런 면도 불안을 증폭시키는 것 같다.
<플라이 투 더 스카이>(2015), <방과 후 티타임 리턴즈>(2015), <연애다큐>(2015) 등에서 협업하고 분업해왔다. 어떤 식으로 작업하나.
이옥섭_ 교환 선배의 시나리오를 보면 그림이 명확하게 그려진다. 찍을 때도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쓴다.
구교환_ 옥섭 감독의 시나리오는 읽었을 때 결과물이 잘 상상이 안 되다가도, 현장에서 보면 ‘그게 이거였어’하고 깜짝 놀라곤 한다. 이번엔 프로듀서로 합류하다 보니 제작 리스크를 줄이려고 좀 더 구체적인 그림을 만들어 가고 싶었다. 근데 결과를 보니 그렇게 했으면 영화가 경직됐을 것 같다. 내가 안정적인 걸 원하고 그려둔 그림을 향해 달려가는 걸 좋아한다면, 옥섭 감독은 끝이 어딘지 모르지만 일단 달려가 보는 식이다. 우리 둘 사이에 시너지가 발생한다면 바로 서로 다른 이 지점의 충돌에서 오는 것 같다.
이옥섭_ 선배는 내가 시나리오를 마음속으로 쓴다, 마음을 쓴다고 말한다.
구교환_ 그래서 불안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부분을 내가 또 신뢰한다. 정확하게 가늠할 수 없어 불안한데 한편으로 기대하게 된다.
이옥섭_ 시나리오를 쓰면 선배한테 보여주고 확인을 받는다고 해야 하나. (웃음) 선배가 컴퓨터로 시나리오를 보며 스크롤을 내릴 때 내가 의도한 부분에서 어떤 표정을 짓는지 유심히 본다.
구교환_ 옥섭 감독의 시선을 느끼는 척 연기할 때도 있다. (웃음)
<메기>는 어떤 식으로 함께 시나리오를 썼고 연출을 정했나.
구교환_ <메기>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시나리오를 썼다. 처음엔 기존처럼 핑퐁식으로 서로 주거니 받거니 했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수정 작업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영화의 정확한 구조는 옥섭 감독이 장악했고 나는 신 안에서의 호흡과 유머를 챙겼다. 내가 구사하는 코미디는 직관적인 데 반해 옥섭 감독님은 레이어가 있는 유머를 쓴다. 내 유머는 너무 투명하다. 그래도 관객분들의 반응을 보니 웃음의 타율은 내가 생각한 부분에서 좀 더 나은 것 같더라. 사실 처음에는 공동 연출을 하려 했는데 옥섭 감독이 생각한 아이디어를 들을수록 이 작품엔 내가 영향을 미치면 안 되겠구나 싶더라. 그래서 쿨하게 포기할 수 있었다. 아, 근데 며칠 뒤에 갑자기 또 연출이 막 하고 싶어지더라.
이옥섭_ 시나리오를 다듬는 힘든 작업이 다 끝나니까 선배가 갑자기 연출을 같이하면 안 되냐고 하는 거다. (웃음)
구교환_ 말 한 번 잘못 했다가…. (웃음) 이번에 맡은 성원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어 좋았다. 이런 인물을 연기해 보고 싶었다. <우리 손자 베스트>(2016), <꿈의 제인>(2016)에서 맡았던 인물들은 세게 빵빵 치고 나가는 인물이었다면, 성원은 윤영의 주변을 빙빙 도는 위성 같은 사람이다. 처음부터 뭔가를 해 보이기보다 계속 신경을 쓰게 하는 캐릭터다.
윤영은 어떤 계기로 성원을 의심하게 되고 관계에 회의를 느낀다. 성원과 속 시원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대신 결국 자기 판단으로 끝을 본다.
이옥섭_ 내 성향이다. 말을 꺼내면 바로 끝날 수 있는 일인데 말을 하지 않아서 결국 일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구교환_ 쉽게 할 수 있는 걸 고민하다 실패로 끝나는, 악수를 둘 때가 있다. 윤영은 이상한 지연의 상태에 있다. 우리 성향이 반영된 인물 같다.
이옥섭_ 우리는 윤영을 지켜보는 입장이라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원래 남의 상황은 잘 보이니까. 근데 정작 본인은 자신이 왜 여기서 이렇게 헤매는지 모를 때가 많다.
구교환_ 많은 경우 인간관계는 깔끔하기보다는 찝찝하게 남는 게 많으니까.


'여윤영 역의 이주영을 비롯해 권해효, 동방우, 김꽃비, (앞선 이주영과 동명이인인) 이주영 등 그간 함께 작업했던 배우들이 비중에 상관없이 참여했다. 병원 부원장 이경진 역의 문소리는 이번에 처음으로 함께 작업했다.
구교환_ 평소 신뢰하는 배우로 가득 찬 영화다. 제작 여건상 리허설을 많이 할 수 없어서 처음에 서로 인사 한번 하고 곧바로 현장에서 만나 진행해야 했는데 다들 함께해주셨다.
이옥섭_ <꿈의 제인>에서 이주영 배우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무표정일 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목소리도 그렇고 주영 씨가 가진 것들이 좋다. 내가 문소리 선배의 엄청난 팬이다. 장소 섭외가 잘 되지 않아 힘들어 하고 있을 때였는데 선배가 출연하겠다고 연락을 주셔서 굉장히 기뻤다. 내가 말을 얼버무리며 설명을 잘 못 해도 선배는 바로 의도를 파악하시고 연기해주신다. 교환 선배는 나약한 느낌의 성원을 잘 표현해 줬다. 연기할 때 선배 특유의 유머를 많이 넣어 연기해줬다.
구교환_ 내가 이 영화의 내부 관계자이기도 하다 보니 연기할 때 일종의 스파이처럼 애드리브로 영화에 대한 정보성 말을 넣기도 한다. 협업하며 연기할 때 누릴 수 있는 재미다.
이옥섭_ 교환 선배는 매 테이크마다 강에서부터 약까지 다 다르게 연기한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소스를 많이 만들어준다.
구교환_ 스케줄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배우 한 명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PD가 주연배우까지 하면 이런 게 좋다. 사실 내가 연기하는 걸 되게 좋아한다. 온전히 연기할 때가 제일 편한 것 같다. 연출만 해야 하면 좀 섭섭하고 이번에도 연기 안 하고 프로듀서만 했다면 우울했을 거다.
다음 작품 구상도 이미 시작했을 것 같다.
구교환_ 장편영화로 배우 데뷔했으니 내가 연출하는 장편도 써봐야지. 온전히 내가 원톱으로 연기하는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 옥섭 감독이 ‘이건 혼자서 연출하라’고 할 만한 영화를 써야하는데. 그땐 옥섭 감독이 프로듀서가 돼 도와주시겠지.
이옥섭_ 바짝 쓰시라. (웃음) <메기> 시나리오를 쓰던 때가 마침 교환 선배와 상업영화 시나리오를 쓰던 때였다. 나름 지켜야 할 조건들이 있었는데 거기에 매여 있는 듯했다. 사실 그 조건을 지키며 써내지도 못하면서 답답하기만 했던 거다. 그때 국가인권위원회의 제안을 받아 하고 싶은 거 다 풀어내자는 심정으로 작업했다. <메기>로 분방한 전개의 영화를 해봤으니 다음엔 하나의 플롯으로 쭉 가보는 걸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