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했고 후회하지 않아요. 이유는 묻지 마세요. 어떻게 되는 난 상관없어요. 우리의 운명은 알 수 없죠.” 캐나다 유학을 포기하고 사랑을 택한 <천장지구>의 죠죠(오천련)가 떠올랐다. 투명한 눈동자를 빛내며 낯선 세계를 두리번거리던 죠죠는 한없이 연약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피 흘리는 남자에게 겁 없이 입을 맞출 정도로 저돌적인 면도 있다.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입고 오토바이에 올라탄 위태로운 연인은 바람을 가르며 도시를 달린다. 푸른 새벽이 내려앉은 고가도로에 “이 짧은 사랑에 후회는 없어요”라는 노랫말이 울려 퍼질 때, 옛 영화 <천장지구>를 좋아한다는 배우 장해금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좌우명처럼 되뇌는 말이 있어요. 후회하지 말자. 그러려면 주어진 시간에 모든 것을 쏟아내야 하잖아요. 저는 불안해지면 아주 작고 사소한 것부터 해결하려고 해요.”
장해금은 박석영 감독의 <재꽃>(2016)으로 데뷔했다. 배우만큼이나 그가 처음 맡은 인물 해별의 등장도 갑작스러웠다. 아빠를 찾겠다며 고요한 마을에 불쑥 도착했던 어린 소녀. 장해금은 <샤인>에서 할머니를 잃고 홀로 남은 예선이 됐다. 8년 전 자신과 꼭 닮은 아이 새별(송지온)을 집에 들여 보살필 정도로 컸고, 속내를 들키지 않는 법을 터득하는 사이 십 대의 끝자락에 접어들었다. 데뷔 이후 장해금은 학교생활과 연기 활동을 부지런히 병행했다. 단편 <컨테이너> (김세인, 2018) <우리는 서로에게>(김다솜, 2019) <둥지>(조경원, 2020) 등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동시에, 박석영 감독과의 인연도 긴 호흡으로 이어 갔다. 그에게 연기는 “온 힘을 다해” 쌓는 사랑이고, <샤인>은 그중 가장 생생해서 애틋한 기억이다. 아직도 여운에 잠겨 있다는 장해금을 만나서 천천히 써 내려간 그간의 이야기를 들었다.
여름방학은 어떻게 보내는 중인가?
고등학교 3학년이다 보니 방학에도 입시 준비로 쉴 틈이 없다. 오전에는 학교에서 연기, 무용 수업 등을 받고 오후에는 레슨이나 외부 일정을 소화한다. 개봉 앞두고 시사회, 인터뷰, GV 등에 참여하는 중이다.
안양예고에 진학했고 현재 연극영화과 입시를 준비하고 있다. 이미 배우로 데뷔했으니 현장에서 경력을 쌓을 수도 있을 텐데, 굳이 연기를 전공하려고 마음먹은 이유는?
본래 활동하면서 일반고등학교에 다닐까 생각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전문 교육에 대한 갈증이 생겼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친구들이 “너 배우야?”라고 물어볼 때마다 약간 부담스럽기도 했다. 같은 꿈을 꾸는, 좀 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친구들과 학교 생활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예고 진학을 결심했다. 확실히 여기 와서 많이 배운다. 뭔가를 배우는 행위 자체를 워낙 좋아한다.
배워보니 어떤가.
연기를 더 잘하고 싶고 사람들한테 더 보여주고 싶어진다. 물론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긴 한데 그만큼 성장하는 것 같다. 연기가 더 재밌어졌다. 중간에 막히면 ‘이거 꼭 해결하고 만다!’라는 생각이 든다. 악바리 같은 면이 생겼다.
목표가 비슷한 친구들과 만나면 덜 외롭지만, 버거울 것 같다. 끊임없이 경쟁을 의식하니까.
초반에는 그런 구도가 무겁게 다가왔다. 적응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는데 요즘엔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오히려 경쟁 속에서 뭔가를 배울 기회가 많다. 친구들은 어떻게 연기하는지 관찰하고 서로 대화도 나누고, 그러면서 혼자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발견한다. 함께 배워 나가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
8년 전 <재꽃> 출연했을 당시엔 연기를 업으로 삼겠다는 생각까진 못했을 것 같다. 연기를 제대로 해보자, 배우의 길을 걷겠다, 그렇게 다짐한 계기가 있나.
<재꽃>을 찍으면서부터 그랬다. 오디션 볼 때만 해도 경험에 의미를 뒀다. ‘연기는 꼭 한번 해보고 싶었던 일이니까 재밌게 해야지.’ 근데 촬영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평생 이거 하고 싶다! 이것만 하고 싶다!’
그렇게까지 확신에 찰 수 있다니 신기하다. 열 살 무렵 아니었나.
내 성격이다. 음식이나 노래도 한 가지에 꽂히면 그것만 고집한다. 요새도 플레이리스트에 노래 한 곡만 자동 재생 설정해 놓고 듣는다.


무슨 노래?
KISS OF LIFE의 ‘Sticky’. 여름이다 보니 시원한 노래가 좋더라. 주야장천 그것만 반복한다.
박석영 감독이 아역 오디션을 꼼꼼하게 본다던데 당시 어땠는지 기억하나.
생생하다. 첫 오디션 장소가 지하였다. 되게 깜깜했고 소극장 느낌이 났다. 검은색 바닥에 앉아서 어떤 언니랑 같이 대화 신을 연기했다. 별생각 없이 편하게 봤는데 2차 오디션에 오라더라. 그때는 감독님이랑 재밌게 수다 떨었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감독님은 또 어떤 사람인지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느낌으로 대화를 나눴다. 총 3차까지 오디션을 봤는데 말이 3차이지 기간으로 따지면 굉장히 길었다. 4~5개월 정도?
촬영도 하기 전에 정들겠다. (웃음)
이 작품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여기까지 왔는데, 감독님과도 가까워졌는데 이제 와서 못 한다고 하면 너무 아쉬울 것 같더라. 기대하면서 마지막 오디션에 갔다. 야외에서 진행했는데 감독님이 ‘한 아이가 캐리어 끌고 무작정 길을 걸어가며 아빠 집을 찾는다’는 상황을 주셨다. 뭘 모를 때여서 처음엔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다. 감독님은 뒤에서 핸드폰 카메라 들고 쫓아오고. 아빠 찾으러 가라고 하니까 일단 가자, 하며 출발했다. 근데 걷다 보니 걱정은 사그라들고 점차 기분이 좋아지더라. 종로의 골목 풍경도 정겹고, 길가에 핀 꽃도 예쁘고. 감독님의 조급한 마음과는 달리, 난 여기저기 구경하며 길을 걸었다. 오디션을 즐겼던 셈이고, 감독님도 그런 나를 보며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고 하셨다.
생각이 바뀌었다면?
감독님은 아이가 아빠 집을 찾으러 가는 상황에 집중하다 보니 촬영하면서 속으로 ‘쟤가 빨리 가야 하는데 뭐하지? 저기까지 들어가야 하는데 왜 안 가지?’ 생각하셨다더라. 근데 결과물을 보고 나서 아이들은 이렇게 걷겠구나 싶으셨던 거다. 어른들은 목적지를 염두에 두다 보니 마음이 조급한데, 아이들은 진짜 걷는 거다. 아빠 찾으러 가는 건 맞지만 중간에 군것질할 수도 있고, 신발 끈이 풀리면 묶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나도 그랬다. 낯선 동네 구경하면서 천천히 움직였다. 꽃을 발견한 다음엔 그 앞에 앉아서 가만히 바라보기도 하고.
무슨 꽃이었는지도 기억하나.
예쁜 진달래였다. ‘진달래인가? 철쭉인가?’ 했던 기억이 난다. 얼핏 철쭉에 독이 있다는 말을 들었거든. ‘독이 있다니 무섭긴 한데 예쁘긴 예쁘다’ 하면서 한참 바라봤다. 옆에 캐리어 세워 놓고.
말이 나온 김에 물어보자. 박석영 감독에게 캐리어란 뭘까? 해금 배우는 어떻게 해석했는지 궁금하다.
휴식이 필요하다는 뜻이었을 텐데. 어디론가 떠날 때 캐리어를 들고 가니까. 그래서 쉬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 자연스레 캐리어에 눈길이 가는 것 같다. 저기에 내 짐들을 챙겨서 빨리 떠나고 싶다, 감독님도 그 마음 아닐까.
만약 <재꽃> 오디션에 참가하지 않았다면, 박석영 감독과 안 만났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지금까지 연기를 계속했을 거라고 보나.
어디서든 하고 있었을 것 같은데, 감독님 작품이 아니었다면 이만큼 관객을 만날 수 있었을까 싶다. 감독님 덕분에 여기까지 올라왔다고 생각한다. 아직 작품을 많이 만나지 못했지만, 그래도 단편을 포함해 좋은 작품에 꾸준히 출연했다. 영화제 수상 작품도 여럿이고. 첫 영화를 잘 만난 덕분에 좋은 인연과 기회가 이어졌으니 감사한 일이다.

<샤인>은 어떻게 시작했나. 일반적 캐스팅 과정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이 작품에 참여했을 텐데, 언제쯤 작품을 인지했는지 궁금하다.
감독님이 <바람의 언덕> 마치고 연락 주셔서 단편 <너의 오름>을 같이 찍었다. 제주에서 촬영했는데 중간에 <샤인> 이야기를 꺼내셨다. 간략한 내용을 소개해 주시면서 함께하면 좋겠다고 하셨다. 근데 좀 어렵다고, 아주 힘들 거라고 하시더라. 당시 내게 제안하신 역할은 시각 장애인 수녀 견습생이었다. 울면서 기도하고, 얼굴에 빗방울 떨어지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그런 내용이었는데 전체적으로 무척 어두운 작품이었다. 감독님이 여러 가지를 시도하려고 하셨다. 그러다 나랑 대화하고 감독님 스스로 정리도 하시면서 영화가 점차 밝아졌다. 장선 배우님도 합류하시고. 이후 나와 감독님 주변에 있는 비전문 배우들이 함께하게 되면서 미팅을 엄청나게 했다. 만날 때마다 거의 5시간씩 영화 얘기했을 정도다.
그게 일종의 캐스팅 과정이었나? 아니면 사전 리딩?
리딩에 가깝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본이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면서 서서히 <샤인>의 캐릭터와 내용이 완성됐는데, 제주도 가면서 확 바뀌었다. 날씨, 배우들 컨디션, 배우들 간의 관계 등이 영화에 변수로 작용하면서 대본과 다른 방향으로 진행됐다. 그러다 여름 촬영하면서부터 대본을 버렸다. 특히 새별 역할의 송지온 배우가 현장에 오면서 크게 바뀌었다. 지온이와 연기하는 과정에서 나도 감정이 좀 더 복잡해졌다. 덕분에 대본에 없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감정도 많이 나왔다. 예를 들면 영화 후반부에 예선이 새별을 떠나보내야 할 때, 예선은 새별을 보지 않은 채 방에 혼자 앉아 있다. 본래 그 장면에서 새별은 그냥 수녀님과 조용히 떠나기로 했다. 근데 새별이가 “예선이 언니, 예선이 언니” 하면서 자꾸 나를 부르더라. 그 목소리를 들으니 새별이랑 같이 지나온 시간, 우리가 마주한 상황 등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카메라에는 전혀 안 잡히는데 실은 그때 쪼그려 앉아서 울고 있었다.
시나리오 없이 촬영했다면 배우들이 직접 대사를 만들었을 텐데.
서로 대화를 많이 했다. 감독님과도 마찬가지다. 촬영하기 전에 어떤 내용이 나왔으면 좋겠다거나 대사에 들어갈 키워드를 알려주셨다. 인물의 과거부터 현재, 미래까지 열어놓고 이야기를 나눴다. 기도하는 장면의 경우, 예선이 어떻게 성장했고 앞으로는 어떤 마음으로 살기를 바라는지 얘기하면서 구체적인 내용을 정리해 나갔다.
예선이라는 캐릭터에 관해서 감독과는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나.
대부분 스스로 만들었으나 감독님이 강조하셨던 부분은 “아픔이 있는데 티를 안 냈으면 좋겠다. 잘 이겨냈으면 좋겠다.”였다. 캐릭터 분석하면서 ‘감춘다고 진짜 티가 안 날까?’ 생각했고, 연기하면서는 친구들과 라파엘라 수녀님을 대하는 예선의 말투나 행동에 아픔이 무심하게 묻어나도록 표현하려고 했다.
예선은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캐릭터였나, 아니면 이해할 수 없어서 애먹은 순간도 있나.
정말 어려운 인물이다. 근데 신기하게도 공감할 수 있었다. 나와 거리가 있는 캐릭터다 보니 의문점을 해결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예선의 상황에 최대한 나를 대입하려고 했다. 일례로 할머니 돌아가시고 홀로 남은 예선을 보면서 고등학교 진학할 당시 내 모습을 떠올렸다. 중학교 친구들과 떨어져 낯선 곳에 혼자 도착했을 때의 마음. 결과적으로 인물에게 나를 비춰 보는 경험이 연기에 큰 도움이 됐던 것 같다. 답을 맞추는 과정에서 이것저것 다 해보는 거다. 동그라미가 안 맞으면 세모로 끼워 넣기도 해보고, 동그라미 크기를 줄여서 틀에 욱여넣기도 해보고. 그렇게 하나씩 채움으로써 더 좋은 예선이 만들어지지 않았나 싶다.
여러 가지를 자유롭게 시도할 만큼 열린 현장이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되게 여유로웠다. 대본도 없고. 하고 싶은 거 다 해보게 되더라. ‘이런 상황이라면 이런 느낌은 또 어떨까?’ 하는 식으로 다양하게 시도했다. 기본적으로 컷 수가 많았을뿐더러 때로는 촬영 중이라는 사실조차 몰랐다. 감독님이 안 알려 주셨거든. 예선, 새별, 라파엘라 수녀님 셋이 노는 장면의 경우, “이제 촬영 시작할게요”라는 말없이 그냥 카메라가 쭉 돌았다.

이번 작업은 배우에게 인연을 곱씹는 시간 아니었을까 싶다. <샤인>의 플롯은 <재꽃>과 유사하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 사는 10대 소녀에게 어느 날 그보다 어린 소녀가 찾아온다. 부모 없이 혼자가 된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소녀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인다.’ <재꽃>에서 정하담 배우가 연기했던 역을 장해금 배우가 물려받는 느낌인데.
그래서 초반에는 ‘이제 내가 하담 언니가 됐다고 생각하자’라는 마음으로 연기했다. 근데 누군가를 돌보는 연기가 힘들더라. 새별을 돌볼수록 오히려 외로워졌다. 그 감정이 연기에 도움을 줬다. 영화를 보면 몇몇 장면에서 예선의 외로움이 느껴진다. 분명히 사람들과 같이 있는데도 동떨어져 보이고, 혼자 있는 모습은 더 쓸쓸해 보인다. 당시 현장에서 느꼈던 감정이 인물에게 잘 녹아든 것 같다. 한편으로는 치유받기도 했다. 장선 배우님이 촬영 끝나고 “오히려 내가 예선에게 돌봄을 받는 느낌이 들었어”라고 하셨는데, 나도 비슷한 걸 느꼈거든. 예선으로서 새별과 함께 사는 동안, 나도 새별에게 보살핌받았던 순간이 있다.
어떤 의미로 외로워졌다고 했는지 알겠다. 타인을 돌보는 사람은 으레 자신을 뒤로 미뤄두게 되니까.
원래 누군가를 보살펴주는 사람은 마음에 여유가 넘치는, 멋진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막상 내가 그 입장에 놓이자, 생각처럼 수월하지 않았다. 계속 의문점이 남더라.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해야 이 친구를 더 편하게 해줄 수 있을까? 나는 이 친구를 돌보고 있는데 나를 돌봐줄 사람은 없나? 내가 누군가를 챙길수록 나를 챙기는 사람은 없어지는 건가?’ 그런 생각이 쭉 이어지면서 외로워졌다. 영화 마치고 결심했다. 나를 돌봐주는 분들한테 잘하기로. (웃음)
<재꽃>의 해별이 커서 예선이 되고, 자신과 꼭 닮은 아이 새별을 만나는 셈이다. 새별 역의 송지온 배우를 보며 이런저런 생각이 스쳤겠다.
촬영장 안에서든 밖에서든 ‘진짜 어렸을 적 내 모습 같다’고 느꼈던 순간이 많다. 무엇보다 지온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말과 행동을 하든지 그저 예뻐서 나도 모르게 한참 바라봤다. 영화에 새별이 “바다에 가고 싶다”라거나 “달을 좋아한다”라고 말하는 대사가 있는데, 이 또한 나와 겹치는 부분이다. 예선으로서는 물론이고, 장해금으로서도 동질감을 느꼈다. 지온은 제주에서 캐스팅됐다. 다희 역을 맡은 채요원 배우의 친척이 제주에 거주하시는데, 그분 앞집에 사는 아이가 지온이다. 신기한 인연이지. 다행히 지온과 지온의 부모님이 영화 작업을 흔쾌히 수락해 주셔서 함께할 수 있었다.
해금 배우의 부모님도 현장에 함께했나. 가족들 또한 자연스레 딸의 어릴 적 모습을 떠올렸을 듯한데.
다 같이 제주에서 살았다. 아빠는 일정 문제로 먼저 떠나셔야 했는데, 엄마랑 강아지랑 나는 제주 한 달 살기를 하고 왔다. 엄마도 지온이를 보며 <재꽃> 찍었을 때가 잠시 생각났다고 하더라. 숙소랑 촬영장에 엄마가 같이 있다고 하면 누군가는 불편하지 않으냐고 묻는데, 난 되려 편했다. 평소처럼 친구들이 곁에 있는 상황도 아니라서 엄마에게 많이 의지했다. 오히려 집에 있을 때보다 덜 싸우고 항상 사이좋게 지냈다. 트러블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생했다. 우리가 한 달 살기를 위해 민박집을 따로 빌렸는데, 집에 바퀴벌레며 거미며 온갖 벌레가 나오더라. ‘제주에서 한 달간 살며 영화를 찍었다’고 하면 다들 여유로운 시간을 상상하는데, 알고 보면 전혀 여유롭지 않았다.
일하지 않는 시간에도 일을 생각할 수밖에 없고.
그렇지, ‘휴촬’도 ‘휴촬’이 아니었다. 감독님이랑 하루에 40분씩은 통화했던 것 같다. 쉬는 날도 영화 얘기하러 만나고. 정말 대화를 많이 하면서 찍었던 작품이다.
이번 현장에는 장해금, 정은경, 장선 등 감독과 줄곧 호흡을 맞춰 온 배우들과 그렇지 않은 배우들이 섞여 있었다. 양쪽을 오갔던 해금 배우의 경우, 현장에서 리더 역할을 해야 했던 때도 있었을 텐데.
정은경, 장선 배우님에게 감사했다. 두 분과 함께할 때는 내가 가장 경력도 적고 나이도 어린 상황이었는데, 워낙 잘 챙겨주신 덕분에 긴장을 풀고 촬영에 임할 수 있었다. 한편, 또래 친구들과 연기할 때는 말마따나 리더가 되어야 했다. 내가 정신을 제대로 붙잡고 있지 않으면 현장 분위기가 어디로 튈지 모르니 더 조심하게 되더라. 보통 내 장면에서는 나만 신경 쓰고 바깥에 신경을 안 쓰는데, 이번엔 달랐다. 계속 눈으로 마음으로 친구들을 살폈다. 근데 예선 자체가 남에게 신경을 많이 쓰는 인물이다 보니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현장에서 긴장하고 부담을 느끼는 것처럼 예선도 친구들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으니까. 그런 상태가 카메라에 잘 담기길 바랐다.
‘박석영 영화 유경험자’로서 동료 배우에게 조언했던 것들이 있다면. (웃음)
다들 이렇게 대본 없이 연기한 적이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본인 대사를 외우고 연기하는 데 익숙한 친구들이라서 아무래도 평소 훈련해 왔던 틀에 갇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나로서는 그 틀을 좀 깨부숴 주고 싶었다. 어떤 편견도 갖지 말고 그저 편하게 놀았으면, 우리끼리 새로운 것을 만들어 갔으면 했다. 분위기를 풀려고 일부러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걸었던 것 같다.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냥 우리끼리 논다고 생각해~


원래 리더십이 있는 편인가.
먼저 나서지는 않는데 역할이 주어지면 어떻게든 한다. 학교 무용반에서도 조장을 맡고 있다. 그러고 보면 분위기를 유쾌하게 이완하려고 노력할 때가 잦다. 긴장한 상태에서 나오는 훌륭함도 있겠지만, 결국 자연스러운 상태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거든. 편하게 하자고, 그냥 준비한 대로만 하면 된다고 다독인다.
일종의 크루처럼 작업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연출자와 배우, 혹은 배우들 간에도 서로 욕구가 다를 수 있다. 누구는 지난번 경험이 좋아서 이번에도 같은 것을 구현하려 하는가 하면, 누구는 이번에는 저번과 다르게 해보겠다고 계획한다. 해금 배우는 <샤인> 작업하면서 어느 쪽이었나.
지금까지는 주로 밝기보다는 좀 더 내면으로 들어간 인물을 맡곤 했다. 예선 또한 겉으로는 그런 캐릭터로 보이는데, 사실 내가 느끼기엔 여태 했던 역할 중 가장 밝았다. 속은 어두울 지 몰라도 밖으로는 밝고 아무렇지 않은 모습을 꺼내야 했다. 확실히 새로운 느낌이었다. 똑같이 우울해도 감정이 한 층 더 쌓여 있다고 해야 하나. 덕분에 또 다른 내면 연기를 할 수 있었고, 스스로 연기 폭이 넓어졌다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10대 마지막에 찍은 작품 아닌가. 그런 상황이 겹치면서 뭔가 더 아름다운, 청춘을 기록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구체적으로 어떤 면에서 성장했다고 느꼈나.
영화와 연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던 시간이 알차게 다가왔다. 한 계단 올라선 느낌. 영화에서 예선이 “단단한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데, 요새 그 문장을 마음에 품고 다닌다. 예전의 어렸던 생각과 태도를 고쳐 나가는 중이다. 단단한, 좀 더 성숙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극 후반으로 갈수록 라파엘라 수녀 역의 장선 배우와 주고받는 신이 늘어난다. 따지고 보면 생판 남이지만 모녀, 사제, 자매 등 다양한 관계가 겹쳐 보이더라. 현장에서 같이 연기한 경험은 어떤 기억으로 남았나.
촬영장 밖에서 배우님과 대화를 나누며 합을 맞추는 식은 아니었다. 현장에서 그때그때 나오는 감정으로 연기했던 것 같다. 동시에 각자 놓인 상황에 관해 공유했다. 라파엘라 수녀와 예선이 붙어 다닌다고 해도, 아무리 마음을 나눈다고 해도, 깊은 아픔까지는 서로 털어놓지 못한다고 봤다. 진짜 속마음은 자신만 아는 거다. 그래서 감정을 누르려고 하는 모습이 종종 영화에 나왔던 것 같다. 일부러 ‘예선은 이런 사람이다. 지금 감정은 이렇다.’라는 얘기를 잘 안 했거든. 속내를 더 숨기고 또 누르고 싶어서. 다만, 촬영 전에 오늘 대화를 어떻게 시작할 지는 매번 상의했다. “어떤 대사로 시작할까? 이번에는 정적을 가져 볼까?” 이런 얘기를 편하게 주고받았다. 진짜 친한 친구여도 서로 침묵하고만 있으면 좀 어색하지 않나. 화났나 싶기도 하고. 나는 예선이랑 수녀님 사이가 친구 같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다희 역의 채요원 배우와 함께한 장면도 언급하고 싶다. 긴말 없이도 속내를 눈치채는 오랜 친구처럼 보여서 인상적이었는데, 이미 단편 <창밖의 혜선>(박초아, 2018)에 나란히 출연했던 적이 있더라.
오래전 연기를 시작했을 무렵, 광고 촬영장에서 처음 만났다. 이후 다른 보조 출연 현장에서도 꽤 마주쳤는데 <창밖의 혜선>을 찍으면서 친구가 됐다. 속얘기를 터놓는 사이이고 같이 가족 여행을 다닐 만큼 친하다. 가장 오래된 친구인데, <샤인>에 우리 실제 모습이 많이 담긴 것 같다. 현장에서 진짜 진짜 마음이 잘 통했다. 나이, 성별, 하는 일이 같은 데다, 성격도 워낙 잘 맞는다. 요원이랑 나랑 유머 코드도 비슷하거든. 생각해 보면 가족이나 친구처럼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되레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은 부분이 생기지 않나. 내가 요원에게 그러하듯, 예선도 힘에 부칠수록 다희에게 마음을 숨기려고 하는구나 싶었다.

친구들과 만나면 보통 어떻게 시간을 보내나. 요즘 관심사도 궁금하다.
우선 밥을 먹는다. 난 배부른 것이 중요한 사람이거든. 그날 메뉴가 하나로 안 모인다 싶으면 가위바위보로 메뉴를 정한다. 밥 먹고 나서는 카페에서 수다 떨고. 학교 남자애 중에 영화를 되게 좋아하는 친구가 있다. 가끔 걔랑 영화 이야기를 하면, 진짜 몇 시간은 훌쩍 가버린다. 최근에 무슨 영화 봤는지, 앞으로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은지, 요즘 뭐가 유행하는지 등 대화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걔는 놀라울 정도로 열정적이다. 나중에 뭘 해도 성공하겠구나 싶을 만큼. 주변에 같은 꿈을 꾸는 친구들이 있으니 대화 주제가 늘 풍성하다. 나 생각보다 진지하거든. 학교에서는 좀 다른 이미지인 것 같지만.
친구들 사이에서는 어떤 캐릭터인데?
유머러스하고 잘 까부는 애. 이상하게 놀거든. 말투를 바꾼다든지 막춤을 춘다든지. 근데 또 일대일로 만나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아는 애들만 안다. 소수의 친구를 깊게 만나는 성격이다.
나름 교내 유명 인사 아닐까 했다. 대다수 학생과 비교하면 벌써 필모그래피가 화려하지 않나.
안 그래도 요새 영화 개봉 시즌이다 보니, 영화에 관해 생각하고 말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주변에 <샤인> 보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 많은데, 난 솔직히 못 보게 하고 싶다. 많은 관객이 이 영화를 봐주길 누구보다 진심으로 바라면서도 친구들이 극장에 안 왔으면 싶다. 왜 그러지? 영화를 보러 와주는 건 고마운 일인데 그다음이 걱정이다. 나 놀려댈 게 뻔하거든.
대사 따라 하면서?
이미 그런다니까. 예고편에 나오는 대사들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웃음)
참여했던 작품이 개봉하거나 영화제 상영할 경우, 친구를 초대했던 적이 있나. 배우를 꿈꾸는 청소년들은 최근 독립영화를 보고 어떻게 반응하는지 궁금하다.
영화제에서 <하나의 마음>(이지우, 2022)을 상영했을 때, 친구들 초대해서 같이 극장에 갔다. 기존에 접한 영화랑 달라서 새로웠다고 하더라. 지금까지 막연하게 독립영화는 곧 실험적인 영화라고 생각했기에 ‘어떻게 봐야 하지?’라는 난처함을 안고 왔는데, 실제로 보니 딱히 어렵지는 않았다고. 편견을 내려놓자 오히려 재미를 많이 느꼈다며 다들 즐기고 갔다. 그중 한 친구는 사실 당시에 별로 안 친했거든? 근데 그날 GV까지 다 보고 간 다음, 따로 소감을 전해줬다. 엄청 좋은 경험이었다고, 평소 나를 유쾌한 친구로만 여겼는데 극장에서 보니 참 멋있더라면서 “나도 나중에 너처럼 될 거야”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기분이 묘했다. 누군가 날 보며 꿈을 꿀 수도 있구나 싶어서 더 잘해야겠다는 책임감도 생기고, 무엇보다 감사한 마음이 밀려들었다.
해금 배우처럼 독립 장⋅단편영화에 출연하고 싶어 하는 친구들은 없나.
많지. 친구들이 여러 가지를 물어본다. 소속사 들어가면 어떤지, 지금 우리가 준비하는 입시 연기와 실제 영화 연기가 많이 다른지, 연극이랑 영화 연기의 차이점은 무엇인지, 오디션을 보러 다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등. 진짜 다 물어본다. 나도 아는 선에서 최대한 자세히 얘기해주려고 한다. 다 같이 잘 되면 좋은 거니까. 친구들이 특히 궁금해하는 건 촬영장이다. 다만, 촬영장마다 규모도 성격도 분위기도 다르다 보니 내가 경험한 것들만 얘기해 준다. 다른 건 직접 겪어 보라고. 가끔 보면 이 길을 쉽게 생각하는 애들도 있다. 길 가다가 갑자기 캐스팅돼서 영화를 찍는다든지 한 작품으로 단번에 확 뜬다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접근하는 친구들도 많았는데 지금은 달라졌다. 진심으로 그 친구들이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기를 바라서 아주 구체적으로 얘기해 줬거든. 장점과 능력이 확실한 친구라서 그렇게 쉽게 생각하는 태도만 바꾸면 진짜 크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안일하게 생각하면 안 돼. 여기는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야.”라고 정말 온 힘을 다해 말했지. 내가 겪은 힘든 일, 좋은 일 전부 공유하면서.
사람을 참 좋아하는구나 싶다. 기본적으로 상대를 아끼는 마음이 없으면 그렇게 대화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지도 않을 테니까.
친구들을 진짜 좋아한다. 걔네는 나한테 꼰대라고 하지만. (웃음)

말 그대로 인생 절반을 연기하며 보냈는데 지금까지 배우로서 경험한 일 중 가장 강렬했던 것은?
아무래도 <샤인> 아닐까. 인터뷰라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촬영장에서의 모든 경험이 뜻깊다. 뇌리에 딱 박혀 있는 느낌이다. 이렇게 대본을 몽땅 버리고 연기한 것도 처음이었고, 충동적으로 나오는 감정에 몸을 맡긴 것도 처음이었다. 열정을 쏟아부으며 애썼던 만큼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더 좋은 무언가를 찾으려고, 더 좋은 작품을 만들려고 감독님과 거듭 대화했던 시간도 내게는 최초의 경험처럼 남아 있다. 촬영장 풍경, 그곳에서 겪은 일들, 예선의 상태 등이 아직도 눈앞에 선명하다. 솔직히 계속 촬영하고 있는 느낌이다.
학교 수업에서나 입시 과정에서도 당연히 즉흥 연기를 준비할 텐데, <샤인>이 유독 특별했던 이유는?
나도 똑같을 줄 알았다. 기존에 즉흥으로 연기했던 것처럼 현장에서도 그러면 된다고 여겼다. 근데 확실히 다르긴 하더라. 영화에서 했던 즉흥 연기는 인물의 살아 있음에 초점을 맞춘다. 예선이 그곳에서 실제로 숨 쉬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한편, 입시 과정에서 준비한 즉흥 연기는 아무래도 조금 꾸며내고 다듬게 되더라. 진실성이 담겨는 있지만, 현장에서 느낀 것과는 차이가 있다. 어려웠는데 그만큼 ‘연기 너무 재밌다!’라고 생각했다. 입시 준비하다 보면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 때문에 마음가짐이 흐트러지는 상황이 간혹 발생하는데, 즉흥 연기하며 순수한 재미를 느낀 덕분에 생각이 정리됐다. 막 해봐야겠다. 날 것을 보여줘야겠다. 그렇게 다짐하며 어려운 시간을 극복했다. 성인이 되면 마이즈너 테크닉을 비롯해 다양한 연기 훈련법을 배우고 싶다.
배우는 걸 좋아한다고 했는데, 요즘엔 뭘 배울 때가 가장 즐거운가.
연기. 소속사 대표님한테 “저는 진짜 연기하려고 태어난 것 같아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여전히 재밌고, 심지어 하면 할수록 더 재밌다. 몸 쓰는 것도 좋아한다. 언젠가 액션에 필요한 아크로바틱도 배우고 싶고, 원래 연기하기 전에는 발레를 했다. 춤은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다. 아, 삼촌이 교회에서 기타를 치는데 덕분에 베이스 기타를 잠깐 취미로 배우기도 했다. 요새 음악에 더 관심이 생겨서 기타도 꾸준히 연습해 볼 예정이다. 또 뭐가 있지? 요리도 한 번 배웠으면 싶고, 그림도 워낙 좋아한다.
그림은 보는 것, 아니면 직접 그리는 것?
보는 것을 좋아한다. 신기하게 같은 그림이어도 볼 때마다 다르다. 내 기분과 컨디션에 따라서 그림 크기, 색감, 느낌이 전부 다르게 다가온다. 향에도 관심이 많아서 향수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다. 내가 후각, 미각, 시각, 청각 등이 다 예민한 편이다. 지하철이나 카페처럼 사람 많은 곳을 지나갈 때면 ‘이건 무슨 향이지?’ 하며 나도 모르게 두리번거린다. 관찰하고 음미하고, 그런 걸 좋아하나 보다.
선호하는 향은?
꽃향기. 아, 꽃도 되게 좋아한다. 격주로 집안의 화병을 새 꽃으로 갈아주곤 한다.
<재꽃> 오디션에서도 길가에 핀 꽃을 구경하느라 감독을 애태웠다고 했지.
말하다 보니 나 너무 엄마 같다. 매일 꽃 사진 찍고, 지금 휴대전화 메신저 배경화면도 꽃 사진이거든. (웃음)


꽃과 영화, 그러고 보면 ‘꽃 3부작’을 완성한 박석영 감독과의 만남은 필연 같다. 본인 작품 외에 근래 흥미롭게 본 영화가 있다면.
<인사이드 아웃2>(켈시 맨, 2024) 즐겁게 봤다. 친구들은 전작이 더 재밌다던데, 현재 상황을 라일리에게 비춰 보며 무척이나 공감했다. 내가 사춘기 고등학생이지 않나. 특히 불안이한테 공감했다. 다들 불안이가 빌런이라고 하는데, 난 오히려 기쁨이가 빌런 같다고 반박했지. 내면을 구성하는 수많은 감정을 어쩌면 저렇게 세밀하게 표현했을까 하며 감탄했다. 음, 그리고 실은 최신작만큼이나 옛날 영화를 다시 보는 것도 좋아한다. <천장지구>(진목승, 1990)를 보고 홍콩 영화에 관심이 생겼다. 다른 작품도 찾아볼 예정이다. 오래전부터 좋아했던 영화는 <러브레터>(이와이 슌지, 1999)다. 영화의 색감, 분위기, 배우들의 호흡이 전부 마음에 든다. 눈 내리는 산에서 나카야마 미호가 “오겡끼데스까!”라고 외치는 장면을 보며 슬픔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꼈다. 나중에 나도 그런 연기를 해보고 싶다. <리틀 포레스트>(임순례, 2018)도 좋아한다. 그러고 보면 좀 한적하고 잔잔한 영화에 끌리는 것 같다. 그저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나도 저런 삶을 살아보고 싶어’라는 생각이 든다.
<샤인>에서 예선은 “그냥 좀 더 멋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게 해주세요”라며 혼자만의 기도를 올린다. 배우가 그리는 좀 더 멋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배우로서 기도하는 바가 있다면.
앞서 말했던 대로 단단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고 싶다. 예선은 ‘더는 누군가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던 것 같다. 나는 종종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멋있다, 예쁘다, 그런 말이 추상적이면서도 정확한 표현이라고 느껴진다. 제 일을 열정적으로 하는 사람은 분명히 빛나거든. 예쁘고 멋있다. 나도 나를 잘 돌보고 책임지면서 빛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 기도 내용은 소박하다. 특히 연기하면서 불안할 때면 칭찬이든 질타든 평가에 신경 쓰지 않고, 딱 한 가지에만 집중한다. ‘주님, 제가 준비한 것만 다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오늘 발만 안 흔들리게 해주세요. 눈만 잘 뜨게 해주세요.’ 사소한 것에 집중하며 마음을 비우면 오히려 잘 풀리더라. 좌우명처럼 되뇌는 말이 있다. ‘후회하지 말자!’ 연기하는 순간에 내 모든 것을 다 쏟고 오려고 하는데, 그 과정에서 후회하지 않으려면 일단 작은 것부터 해결해야 하더라.
장래 희망을 들은 듯하다. 후회하지 않는 배우.
기억에서 잊히지만 않으면 될 것 같다. 누군가의 기억에서 지워진다는 건 굉장히 슬픈 일 아닌가. ‘언젠가 맡아본 향인데? 어디선가 먹어본 맛인데?’ 그만큼이라도 내 존재를 기억한다면 감사할 것 같다. 어쩌다 한 번이라고 할지언정 내가 생각났다는 거니까. 또 기억에 남으면 언젠가 좋은 기회로 연이 닿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실은 내 이름을 옛날엔 되게 싫어했다. 장금이라는 별명이 붙는 것도 마뜩잖고. (웃음) 근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름에 애정이 생겼다. 상대는 내 이름과 이미지를 함께 인식할 텐데, 특별한 이름을 가졌다는 건 오히려 좋은 일이더라. 그리고 이건 갑자기 생각났는데, 내가 책을 보고 나서 기억에 남는 단어나 문장 등을 기록해 놓는 습관이 있다. 얼마 전 책을 읽다가 ‘온화한 우아함’이라는 문구를 발견했다. 죽은 이에게 우러나오는 분위기를 그렇게 표현했는데, 문득 ‘나도 나중에 죽어서도 우아한 사람으로 기억에 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투엔 생기가 넘치는데 이상하게 아련한 구석이 있다. 잊히지 않고 싶다거나 <러브레터>에서 슬픔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꼈다거나. <천장지구>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당대 홍콩 배우 느낌이 있다. 희고, 호리호리하고, 그러면서도 강단 있는. 순백의 웨딩드레스 입고 오토바이 타던 오천련이 떠오른다.
많이들 얘기하더라. 친구들도 “너 홍콩에 가면 잘 통할 듯”이라고 한다. (웃음)
20대는 어떻게 보내고 싶나.
겉으로는 여유로워 보이는데 속으로는 바삐 움직였으면 좋겠다.
백조처럼?
백조처럼! 끊임없이 연기하고 싶다. 끈기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먼 훗날 “얘 아직도 이거 하네?”라는 말을 들으면 행복할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