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잼 도시’ 안양을 떠나려던 순간, 감독은 이상한 기분에 휩싸인다. 나고 자란 동네에 대한 미련인지, 막상 고향이라기엔 지식도 추억도 없다는 반성인지, 감독도 그 이유를 몰라서 무작정 카메라를 든다. 머지않아 운명의 날이 찾아온다. 길을 걷던 감독은 어디선가 소요가 벌어졌음을 감지한다. 여럿이 들고일어난 듯 떠들썩하게 술렁대는 목소리가 그의 뒤통수를 잡아채고 발길을 돌려세운다. 써놓고 보니 메시아의 예언이라도 받은 것처럼 들리는데, 영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니다. 안양은 본래 극락을 뜻하고, 극락은 산스크리트어로 ‘수카바티’, 즉 구원자 아미타불의 터를 가리키니까. 하여간 그날이 기점이다. 난데없는 소란에 이끌려 안양종합운동장에 들어간 후, 감독은 ‘축덕’ 세계에 입문한다. 소음은 우레 같은 함성으로 변해 심장을 뛰게 하고, 그 포효 속에 울분과 긍지가 섞였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쯤 안양은 전혀 다른 얼굴이 되어 있다. <수카바티: 극락축구단>은 축구에 미친 서포터즈 레드의 이야기이자, 지나치게 평범해서 별볼 일 없다고 여겼던 ‘노잼 도시’가 비로소 ‘내 고장’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기록한 영화다.
영화는 레드를 창단하고 지켜 온 최지은과 최캔디를 중심으로 일종의 구술사 작업을 펼친다. 축구팀 서포터즈를 통해 재편한 역사는 어떤 모습일까? 여기엔 도미노처럼 연쇄하는 흐름이 있고, 그에 저항하여 발버둥 쳤던 흐름도 있다. 영화는 레드의 탄생 배경을 파악하기 위해 1970년대 생산직 노동자들이 안양을 비롯한 수도권에 정착한 상황을 짚고,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이 내세운 3S 정책으로 프로축구가 출범했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1990년대 확산한 PC 통신은 각 분야의 ‘애호가’를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엮어 주었으며, 개중엔 IMF 외환위기 사태에서 축구만이 유일한 해방구였던 이들이 존재한다. 죽음과 생활고가 만연하고, 끊임없는 절망감 속에서 뭔가를 계속 포기해야 했던 시절. 1990년대 후반 앞길이 막혀 무력했던 청춘에게 축구 경기장은 ‘극락’에 가까운 희열을 맛보게 하는 공간이었고, 그들은 팬이 아닌 서포터즈로 정체화하며 능동적으로 축구장 문화를 만들어 나갔다.


레드는 알아주는 ‘강성’이었다. 그들만큼 분출에 능하고 도취에 진심인 곳도 드물었다. 트레이드마크는 이름처럼 경기장을 시뻘겋게 물들이는 홍염. 레드는 아편굴에 입장한 망나니처럼 화약을 터뜨리고 시야를 가로막는 연기 속에서 승리를 만끽했다. 2002년 FIFA 월드컵은 서포터즈의 조직력을 전 세계에 떨친 무대였다. 레드를 포함한 각 지역 K리그 서포터즈가 연합체를 꾸렸고, 국가대표팀 공식 서포터즈 클럽 ‘붉은 악마’는 대한민국 축구를 새로운 장으로 이끌었다. 영화에서 길잡이로 나선 인터뷰이들이 그 무렵을 회고할 즈음이면, 홍염은 더는 단순한 놀이나 응원 문화로 보이지 않는다. 함께 도취된 듯 카메라는 붉게 출렁이는 군중을 말없이 비춘다. 홍염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겠구나’ 싶을 만큼 폭발적이고 집단적인 체험을 선사한다. 우리만 경험할 수 있는, 우리 전부를 압도하는 의식에 가깝다. 문제는 이렇듯 애정과 헌신, 자부심으로 일궈온 역사를 송두리째 빼앗기는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 안양 LG 치타스의 구단주인 대기업 LG는 팀 연고지를 서울로 옮긴다. 구단을 그저 기업 재산으로 여기는 인식과 서울중심주의가 결합한 결과였다. 자본의 논리로는 지극히 당연했던 결정이지만, 레드에게 이는 일상을 뒤흔드는 끔찍한 사건이 된다.
짧은 스포츠 머리에 억센 말투, 최캔디는 돈만 있으면 화약 터트리고 싶다며 배짱을 부리다가 팀 얘기가 나오자 왈칵 눈물을 쏟는다. 팔뚝 한가득 FC안양 클럽 로고를 새긴 최지은은 본인을 평범한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어릴 적 학교는 재미없어서 안 다녔지만 만화는 열심히 그렸고, 97년 레드를 창단한 이래 단 한 순간도 레드가 아니었던 적 없는 인물이다.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큼 흥미로운 캐릭터들이지만 영화엔 오히려 그들에게 기대지 않으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카메라는 일과 가정을 둘러싼 개인사 노출을 최소화하고, 인물들이 서포터즈로서 통과한 세월을 파헤치는 데 집중한다. 직업을 특정하거나 신상을 캐묻지도 않는다. 최지은이 만화가를 꿈꿨던 청년 시절을 회고하며 당시 잡지에 투고했다가 고배를 마셨던 일을 들려주긴 하지만, 이는 그의 아웃사이더 기질을 보여주는 일화로 작용한다. 중요한 것은 그런 사람들 또한 레드에서는 소속감과 연대를 느껴 왔다는 사실이다. 지역 공동체로 기능하며 집단적 기억을 누린 덕분에 레드는 팀이 사라진 후에도 결속력을 유지했고, “목숨을 걸어야 되겠다”는 각오로 ‘안양FC 창단 시민 궐기 대회’를 연다.


영화는 레드가 쌓아온 낭만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말한다. 한때 그러했듯 레드는 전국 K리그 서포터즈와 연계하여 경기마다 “안양FC 창단을 적극 지지합니다” 걸개를 옮겨 걸고, 흩어졌던 사람들을 다시 모으고, 시장을 설득하고, 서명 운동과 피켓 시위에 부지런히 나선다. 결국 시의회 표결을 거쳐 안양은 기업이 아닌 시장이 구단주가 되는 시민 구단을 창립하기에 이른다. 그야말로 영화 같은 스토리가 우르르 지나갔지만, 아직 러닝타임은 절반이나 남았다. 카메라는 계속 안양을 맴돈다. 뭔가 더 대단한 결론, 그림이 될 만한 장면을 기다리는 낌새는 아니다. 감독은 이제 안양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리 뜯어봐도 특색이라곤 없던 그 도시에 자신이 응원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겨서다. 영화는 승리라고 부를 수 있는 가슴 벅찬 순간을 포착한 후에도 레드를 뒤쫓는다. FC안양은 환상이 아니다. 시민 구단의 자금력이란 기업 구단에 비할 바가 못 되고, 선수와 감독이 의지를 불태운다 한들 경기는 스코어로 남는다. 다만, 그것이 곧 레드가 애타게 갈망하던, 그래서 되찾고자 긴 시간 분투했던 ‘일상’이다.
“잘했어! 기죽지 마!” 레드는 선수들에게 최후의 보루를 자처한다. 져도 좋고 이기면 더 좋을 뿐이다. FC안양이 FC서울과 붙는 날, 레드는 보란 듯이 횃불을 쳐들고 경기장에 홍염을 쏘아 올린다. 이는 “팀 없어지는 거 못 막았”다는 오랜 치욕과 설움에 이별을 고하는 행위이며, 내 역사와 우리 존재를 향한 긍정을 상징한다. <수카바티: 극락축구단>은 음악과 푸티지를 적극적으로 삽입하여 증언에 생기를 더한다. PC통신으로 축구 동호회 붐이 일었던 1990년대를 회고하는 장면에서는 영화 <접속>(장윤현, 1997)의 한 장면을 보여주고 배경음악으로는 주주클럽의 ‘나는 나’(1996)가 울려퍼지는 식이다. 눈에 띄는 푸티지 중 하나는 최초의 SF영화로 일컫는 조르주 멜리아스의 <달세계 여행>(1902)이다. 백년 전 달에 도착한 천문학자의 모험을 다루며 영화사에 남은 이 독특한 무성영화는, 레드가 처음으로 홍염을 뿜어낸 과정을 진술하는 들뜬 목소리에 발맞춰 삽입된다.
수카바티: 극락축구단 FC Sukhavati 감독 선호빈, 나바루 출연 최지은, 최캔디, 최대호 제작 드래곤클라우드, 영화연구소 공동제작 나바루필름 배급 영화연구소 공동배급 영화사 진진 제작연도 2023년 상영시간 102분 등급 12세이상관람가 개봉 2024년 7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