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량한 사막 도시 풍경만큼이나 루(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얼굴도 메말라 있다. 체육관엔 콧수염을 기르는 남자들과 다이어트에 열중하는 여자들뿐이고, 화장실 변기는 오늘도 막힌다. 루는 가급적 입을 다문 채 체육관 카운터를 지키다가 퇴근한다. 라디오에서 흡연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오든 말든 끊임없이 담배를 태우고, 전자레인지에 냉동식품을 데워 먹고, 자위하다 소파에서 홀로 잠드는 일상. 먼지 낀 듯 흐리멍덩하던 루의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한 것은, 이 도시에 새로운 인물이 도착하면서부터다. 잭키(케이티 M. 오브라이언)는 체육관에 들어서자마자 시선을 잡아끈다. 그녀의 성난 등근육과 터질 듯한 허벅지, 땀에 젖은 곱슬머리와 목덜미를 정신없이 훑어보던 루는 결국 형형한 눈빛과 마주하고 만다. 그 최초의 눈 맞춤만으로 둘은 서로를 알아본다. 다만, 레즈비언인 루는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듯 흥분에 휩싸인 상태에서도 애써 침착하게 묻는다. “남자 좋아하는데 한 번 해보는 건 아니죠?” 잭키의 자신만만한 웃음은 곧 키스로 이어지고, 루는 이제 무료했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한다. 그간 쌓인 불만과 허기, 외로움을 순식간에 날려버릴 정도로 이 사랑은 압도적이다.
<러브 라이즈 블리딩>은 루와 잭키를 유독한 관계로 묘사한다. 그들은 스테로이드 주사를 놔주다가 첫 섹스를 치르고, 연인을 괴롭히는 인물을 제거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른다. 애초 둘은 함께하기 이전부터 폭력에 긴 시간 노출된 채로 살아왔다. 루는 어릴 적 자신에게 총을 쥐게 한 아버지 루 시니어(에드 해리스)를 증오하지만, 그와 그가 점령한 동네를 벗어나지 못한다. 아버지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형부 JJ(데이브 프랑코)로부터 매일 구타당하는 언니 베스(제나 말론)를 지켜야 해서다. 어머니는 오래전에 실종됐고, 범죄 흔적을 찾는 FBI는 시도 때도 없이 루의 근처에 출몰한다. 한편, 잭키는 통제할 수 없는 팜므파탈이다. 어머니에게 ‘괴물’이라 비난받는 그녀는 집을 떠난 후, 줄곧 방랑자로 살았다. 히치하이크, 성매매, 노숙을 반복하며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고, 길에서 마주친 이들과 맞고 때리며 몸을 단련했다. 머나먼 미래를 계획하는 대신에 눈앞의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잭키의 다음 목적지는 라스베가스. 보디빌딩 대회에서 트로피를 거머쥐는 자신을 상상하며 젝키는 점차 스테로이드에 의존한다. 육체적 매력의 과시와 관음증적 욕망이 연인을 결속하는 가운데, 그들 각자 지닌 위험 요소가 도화선에 불을 당긴다.


요동치는 몸과 마음, 두 캐릭터가 이루는 화학 작용을 바탕으로 영화는 예상치 못한 궤도에 진입한다. 어느 날, 베스가 죽기 직전까지 구타당하다가 의식 없는 상태로 발견된다. 병원을 찾은 아버지는 별일 아니라는 투로 관대함을 가장하고 가해자인 형부는 연락조차 닿지 않는다. 루는 슬픔과 분노에 차서 포효한다. 그때 병실 구석에 말없이 앉아 있던 잭키가 일순 꿈틀거린다. 피부 아래에서 거대한 분열이 일어나는 듯, 혹은 그러한 변화를 억누르려는 듯 근육에 잔뜩 힘을 주다가 곧 자리를 박차고 달려 나간다. 그때부터 이야기는 가속 페달을 밟는다. 약물, 폭력, 섹스, 살인이 뒤엉키며 영화가 막무가내로 내달리는 사이, 두 여자의 사랑도 우당탕 소리를 내며 폭주한다. 성적 긴장과 친밀감으로 충만했던 퀴어 로맨스는 범죄 스릴러, 블랙 코미디, 서부극 등 온갖 장르를 혼합하여 기동력을 얻는다. 루는 ‘죽음의 골짜기’를 몇 번씩 넘나들며 잭키의 범죄를 수습하려 애쓰지만, 그럴수록 연인은 손에 잡히지 않고 상황은 악화하기만 한다. 잭키는 환시와 환청에 시달린다. 보디빌딩 대회는 엉망으로 끝나고, 루 시니어의 회유와 협박이 집요하게 따라붙는다. 이 미친 사랑은 고전 누아르의 장면을 복원한다. 한없이 강인했던 잭키가 피투성이 몰골로 주저앉는다. 전화기를 붙잡고 잭키는 고향에 사는 여동생에게 엉엉 울며 말한다. “넌 절대 사랑 같은 거 하지 마.”
<러브 라이즈 블리딩>은 고장 난 트럭처럼 질주하는 영화다. 등장인물 모두 부조리와 결함을 지녔으며, 악을 처단하는 악으로 쾌감을 자아낸다. 코엔 형제의 <블러드 심플>(1984)이 보여준 필름 누아르의 유산,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1994)이 선보인 다종다양한 장르의 결합, 데이빗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에서 목격한 괴상한 버디무비의 가능성 등을 계승하면서도 영화는 저만의 길을 개척하려는 야심을 드러낸다. 한동안 사랑을 혼란과 동의어로 사용하며 수렁에서 허우적대던 연인은, “왜 하필 널 만나서!” 원망을 터뜨린 끝에 기어코 혼란을 승리로 바꿔 놓는다. 루와 잭키가 사랑의 폭발적 힘을 실현하며 승리를 거머쥔 순간, <러브 라이즈 블리딩>은 히어로 영화로 탈바꿈한다. 하늘을 뚫어버릴 정도로 거대한 두 여자가 전신에서 빛을 내뿜으며 오로라 속을 달려간다. 그들이 여태 피 흘리며 헤쳐온 시간이 워낙 말도 안 되는 바람에, 환상은 차라리 현실처럼 보인다. 선이나 정의가 아니라, 오직 사랑만이 살아남는다는 외침. 이 영화의 백미는 모든 열기가 식고 난 후에 찾아온다. 엔딩에서 연인의 평화로운 낮잠을 지켜주고자 구슬땀 흘리며 말 그대로 삽질하는 루를 보고 있노라면, 연애를 두 종류로 나눈다는 말이 떠오른다. 빡센 연애와 진짜 빡센 연애. 당연히 둘은 후자다.


지나치게 과장된 내용을 뒷받침하는 것은 배우들의 연기와 에너지다.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반항적이고 과묵한 외골수 이미지를 내세우는 동시에, 내면의 파장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아버지의 어두운 비밀을 간직한 딸, 애인을 잃을까 봐 노심초사하는 여자, 목숨 걸고 도망칠 때도 고양이를 잊지 않는 레즈비언 등 위치를 민첩하게 옮기며 이야기에 집중하게 만드는 능력 또한 돋보인다. 케이티 M. 오브라이언은 영화 내내 혼돈에 빠진 인물을 연기하면서도 매력을 잃지 않고, 팜므파탈과 히어로라는 상징적 역할을 대담하게 소화한다. 덕분에 잭키는 최악의 선택을 반복하는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대신, 영화의 초현실적 분위기를 이끄는 존재로 우뚝 선다.
러브 라이즈 블리딩 LOVE LIES BLEEDING 감독 로즈 글래스 출연 크리스틴 스튜어트, 케이티 오브라이언, 에드 해리스, 데이브 프랑코, 안나 바리시니코프, 제나 말론 수입·배급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키노라이츠 제작연도 2024년 상영시간 104분 등급 청소년관람불가 개봉 2024년 7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