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쾌한 추락
<양치기> 손수현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4-06-20

<양치기>의 손수현은 낯설다. 보육 봉사 현장에서 어린 여자애의 머리를 묶어주는 수현(손수현)은 한없이 다정하고 어른스러운데, 담임 교사를 맡은 반에서 요한(오한결)과 대면했을 때는 어쩐지 자꾸 뒷걸음치는 모양새다. 위태로운 소년은 수현을 하나 남은 끈처럼 붙잡으려 하고, 수현은 소년의 불행을 잠시 외면한 대가로 일상이 뒤흔들리는 위기에 처한다. 단편 <코끼리 뒷다리 더듬기>(김남석, 2022)와 <힘찬이는 자라서>(김은희, 2022), 최근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공개한 장편 <럭키, 아파트>(강유가람, 2024) 등에 이르기까지 그간 거쳐온 작품에서 손수현은 대개 조용히 싸우는 인물을 그려내고는 했다. 신념을 간직한 채 자신이 목표한 방향대로 말없이 전진하는 사람 특유의 결의가 그의 얼굴에 반짝였다. 한데, <양치기>의 손수현은 다르다. 이성을 잃고 재차 이기지 못할 싸움에 휘말린다. 얼굴은 분노와 집착, 광기로 얼룩지고 목소리마저 수시로 갈라진다. 관객이 생경한 모습에 눈을 끔뻑대는 사이, 손수현은 벌써 영화에서 한 발짝 벗어나 “짜릿함”과 “속 시원함”을 털어놓는다. 수습하려 할수록 망하는 길에 들어선 인물 덕분에 끝없는 내리막길을 경험했고, 진실과 거짓을 단언할 수 없는 상황에 갇혀 괴성도 질러봤다. 새로운 과제를 받아 들고 오히려 신이 났다는 그에게 통쾌한 추락이 어떤 기억으로 남았는지 물었다.

 

 

<럭키, 아파트>를 공개한 직후, <양치기>(손경원, 2024)를 개봉한다. 분주한 초여름을 보내는 중인데. 

어쩌다 보니 일정이 그렇게 이어졌다. <양치기> 개봉 소식도 감독님께 갑작스레 전해 들었다. 촬영은 2년 전쯤 했다. 코로나19 여파가 남았을 때고 아이들과 함께하다 보니 현장에서 신경을 많이 썼던 기억이 난다. 학교 신을 폐교에서 찍었다. 처음엔 좀 무섭지 않을까 했는데 아이들 덕분에 금세 걱정이 사라졌다. 귀신도 도망가겠다 싶을 정도로 쾌활하더라.

 

며칠 전 무주산골영화제에서 책 『아무튼, 할머니』를 펴낸 신승은 감독과 북토크를 진행하기도 했다. 재작년 인터뷰에서 언급했던 손수현 배우의 ‘창작자 인터뷰집’은 어떻게 됐나.

기억하고 있네? 인터뷰를 전부 진행하긴 했는데,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내게 인터뷰어로서 자질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아무나 하는 일 아니구나 싶더라. 인터뷰집으로 글을 풀어 내기엔 어렵고 부담스러워서 다른 방식을 찾기로 했다. 인터뷰한 내용을 글에 녹여서 에세이를 쓸 예정이다. 출판사와 재계약해야 한다. (웃음)

 

개봉 앞두고 <양치기> 다시 봤나? 시나리오를 보고 얼추 예상한 대로 영화가 나왔는지, 아니면 의외라고 느꼈던 부분도 있는지 궁금하다.

시나리오는 좀 더 서사적이었다면, 영화는 확실히 스릴러의 장르적 특성이 부각됐다. 연출을 한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라는 느낌을 받았다. 어쨌든 촬영하고 시간이 꽤 흐른 터라 온전히 관객 입장으로 영화를 볼 수 있게 됐다. 촬영 당시엔 수현의 감정에 빠져 있었다. 상황이 점차 악화하는 가운데 억울하고 초조했다. 근데 영화를 보니 ‘요한이가 수현 집에 찾아왔을 때, 그렇게 보냈으면 안 됐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기할 당시엔 요한의 대사를 들으면서도 뼈저리게 와닿지는 않았거든. 관객의 눈으로 그 장면을 보니 ‘저기서 모든 일이 시작됐구나. 저 때가 바로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구나.’ 싶더라.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은 셈이지. 영화 속 수현에게 굉장히 몰입했나 보다. 

촬영할 때는 그랬다. 어쨌든 수현을 연기하는 입장에서 어떤 후회가 머릿속을 지배하면 이 서사 자체가 진행되지 않는다고 봤다. 위기가 시시각각 밀려오니까 다른 가능성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영화를 보면서야 뒤늦게 후회했다. ‘애가 맞았다는데 그냥 보낸다고? 몸에 멍이 든 애가 우리 집에 와 있는데? 수현이 미쳤구나.’ 수현을 나름대로 사명감을 가지고 교직에 임하는 인물로 여겼는데, 그 순간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말이 떠올랐다.

<양치기>
<양치기>

<양치기> 출연을 결정했던 이유는 뭐였나. 작품이 말하려는 바에 동의하지 못했다면 망설였을 텐데.

결과적으로 아이를 탓하는 영화가 아니라서 마음이 갔다.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 첫 감상은 ‘다행이다’ 였고, 다음엔 ‘나라면 요한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그렸을까?’ 묻게 됐다. 아이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바로 그 거짓말로 인해 수현의 삶이 망가진다. 그러면 수현에게 요한은 가해자라는 뜻이다. 만약 내가 이 관계를 이야기한다면 지금의 영화보다 납작한 방식으로, 선악 구도에서 요한을 표현할 듯했다. 한편, 요한이 마냥 순진하고 착한 어린이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애초에 요한은 그럴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기도 하지만, 요한을 딱 떨어지는 인물로 표현하지 않는 것은 감독님의 선택이다. 그러한 태도가 용감하게 느껴졌다. 또 내가 경험하지 않은 장르와 역할이기에 끌렸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영화가 끝까지 애매모호하기만 했다면 이 작품을 선택하지 않았을 거다. 감독님이 보호 대상과 영역을 명확히 설정했다고 판단했기에 나도 안심하고 출연을 결정했다.

 

손경원 감독의 단편 <방과 후>를 장편으로 발전시킨 작품이다. 몇 가지 설정이 바뀌긴 했으나, 주인공 이름은 계속 수현이더라. 결국 수현 배우가 수현을 맡게 됐는데, 감독과의 첫 만남은 어땠나. 

시나리오를 먼저 받고 감독님과 미팅했다. 정작 감독님은 나와 인물의 이름이 똑같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 했던 것 같은데. (웃음) 그리 수다스러운 자리는 아니었다. 감독님이 되게 숫기 없고 내성적인 분이거든. 평범하게 시나리오 관련해서 이야기하고 헤어졌다. 

 

보통 첫 만남에서 느낌이 오나. 이 작품을 하겠구나, 아니면 말겠구나. 

느껴질 때도 있는데 <양치기>는 진짜 알 수 없었다. 감독님이 무슨 생각하는지 표정을 읽을 수가 없더라. 지금은 어떤 사람인지 좀 알겠는데, 그때만 해도 갈피가 안 잡혔다. 아마 감독님도 나와 미팅한 후에 여러 배우를 만나 봤겠지? 시간이 좀 지난 후에 같이 하자고 연락을 받았다.

 

그러면 촬영 준비하면서도 대화는 거의 없었나. 

배역과 상황에 대한 이야기는 나눴지만 사적인 대화는 드물었다. 감독님도 장편 데뷔작이다 보니 준비할 부분이 많았을 테고, 나도 실은 정신이 온전치 않았거든. 서로 여력이 없었던 것 같다.

 

유난히 힘든 시기였나.

제주에서 <나의 여신>(최자영, 2022)을 막 찍고 나온 다음이었다. 무당 역을 맡았는데 제주가 또 피를 많이 흘린 땅이지 않나. 촬영하면서 이래저래 꽤 고생했다. 그러고 나서 <양치기> 찍으러 부산으로 넘어갔다. 부산 올 로케이션으로 진행했는데, 다행히 자주 여행했던 곳이라 적응하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손수현 ⓒ이영진

감독과 의견을 조율하는 데 어려웠던 부분은. 

그게 없었다. 시나리오에 설계된 상황을 따라가면 됐거든. 영화 속 수현의 행동을 합리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건 인물을 한 발짝 떨어져서 지켜보는 ‘나’의 판단이다. 정말 그 상황에 놓였을 때는 눈앞에 다가오는 일을 해결하기에 급급하다. 내 이성적 자아가 튀어나와서 “감독님, 저는 수현이 왜 이러는지 이해가 안 가요”라고 하면, 전체 서사가 흔들리는 거다. 수현이 왜 말도 안 되는 선택을 하는지, 왜 자꾸 제 무덤 파는 짓을 하는지 이성적으로 분석하려고 하지 않았다. 본능적인 행동이니까. 딱히 조율할 부분은 없었는데 촬영하면서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맞닥뜨렸던 적은 있다. 요한의 노트를 펼쳐보는 신이었다.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은 신이라는 건 없지만, 사실 그 장면은 어려운 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거든. 근데 노트를 펼치고 수현이 뒤를 돌아보는 그 순간이 문제였다. 어떤 속도로, 어떤 타이밍에 돌아볼 것인가. 그에 따라 장면 분위기가 달라지는 거다. 누가 봐도 부담스러운 장면은 사전에 서로 준비를 많이 하기에 오히려 빠르게 넘어 가는데, 그 장면은 예외였기에 감독님이나 나나 애를 먹었다. 결국 촬영을 중단하고 감독님과 한참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양치기>는 손수현 배우의 새로운 모습을 보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다. 전작에서 맡은 인물과의 차이를 배우도 인지했을 텐데.

인물이 지켜 내려는 대상이 다른 작품에 비해 매우 구체적이라고 해야 할까. 전작에서는 개인을 넘어서는 어떤 가치를 지켜야만 했던 것 같은데, <양치기>는 ‘나’가 전부였다. 수현은 ‘여기서 나 망하면 안 돼’라는 목표 하나로 행동하는 인물이다. 촬영하며 이따금 힘들었지만 실은 엄청나게 속 시원하기도 했다.

 

의지하거나 옹호하기엔 쉽지 않은 캐릭터인데 연기하며 수현에게 어떤 감정을 느꼈나. 

감정이라고 말한다면 수현이든 요한이든 다들 자신을 불쌍히 여겼던 것 같다. 오한결 배우도 인터뷰에서 “요한이가 불쌍했다”라는 말을 참 많이 하거든. 지금 영화를 보면서 수현을 불쌍하다고 말하긴 어렵다. 왠지 죄짓는 기분이고. 근데 촬영할 당시엔 솔직히 수현이 불쌍했다. 불쌍하고, 처절하고, 이렇게까지 코너에 몰려야 할 이유가 대체 뭔가 싶어 요한이 너무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덕분에 새삼 깨달았다. 그렇게 제 감정에 매몰된 상태에선 중요한 걸 놓치는구나. 머리로 아는 것도 눈에 안 보이는구나. 이건 좀 다른 얘기인데 실제로 범죄를 저지르거나 잘못한 사람들이 자기방어에 급급한 이유도 알게 됐다. 자신에게서 딱 빠져나와서 ‘내가 이러이러한 맥락을 무시했네. 내가 잘못했네.’ 인정하기 쉽지 않다. 상황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는 사람도 곁에 없다면 더할 거다. 그래서 요즘 사회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가 많은가 싶더라.

 

중요한 지적이다. “아무도 날 몰라준다”라는 억울함은 영화를, 또 근래 사회를 지배하는 감정이기도 하다. <양치기>를 보며 최근 뉴스로 접한 여러 사건이 떠오르는 이유와도 맞닿는다.

그러게, 감정에 매몰된 수현을 연기하며 나도 머릿속이 복잡해지더라. 실은 영화를 공개하고 난 후에 난처함을 느끼기도 한다. <양치기>를 보며 수현에게 이입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게 됐거든. 심지어 “주변 사람들은 수현이 어떤 인간인지 모르냐. 수현의 평소 행실이 어땠기에 다들 이렇게까지 한순간 등을 돌리냐.”라고 말하는 분도 봤다. 수현은 열심히 사는, 정직하고 멀쩡한 사람인데 주변 반응이 잘못됐다는 의미였다. 그러면서 세상에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이 얼마나 많냐고 덧붙이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이거 좀 위험한데?’ 싶었다. 영화가 그러한 방향으로 확장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보느냐에 따라서 이 영화에 대한 평가도, 영화에서 이입하는 대상도 많이 달라지는 것 같다.

손수현 ⓒ이영진

말하자면 어른 역할을 못 하는 모두를 비판하는 영화다. 편협한 개인과 무책임한 시스템이 얽혀 최악의 상황을 빚어내지 않나. 다만, 최근 공론화된 초등교사 관련 사건을 겹쳐 보며 영화가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겠구나 싶다. 

감독님은 나보다 더 난처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영화는 가정폭력에 노출된 요한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처음엔 굳이 이렇게까지 보여줄 필요가 있는지 의문을 품기도 했다. 보여주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으니까. 근데 감독님의 이유는 명확했다. 요한이 어떤 상황에 부닥쳤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했다. 수현과 요한을 놓고 봤을 때, 수현의 서사가 더 선명히 드러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면 관객 입장에서 요한보다 수현에게 이입할 확률이 높지 않겠나. 관객 연령대도 수현에게 가깝고. 관객이 요한을 그저 ‘맹랑한 꼬마’로 치부하지 않도록, 요한이라는 인물을 보호하고자 감독님이 그런 판단을 내렸다고 이해했다. 사실 누구나 가정폭력이 나쁘다고는 생각해도, 실제로 경험한 적이 없기에 그것이 얼마나 잔인한지는 모르지 않나. 난 기본적으로 영화에서 폭력을 최대한 보여주지 않는 것이 미학이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선택을 내려야 하는 경우도 있다는 걸 처음으로 생각하게 됐다. 윤리적 고민 자체가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감독님이 너무 오해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좋은 사람이거든. (웃음) 우리한테 일일이 말해 주지는 않았지만 감독님 나름의 기준과 원칙은 존재했다. 감정 표현도 거의 없고 무뚝뚝한 사람인데, 현장에서 어린 배우들을 대할 때는 모든 에너지를 쏟는 것이 느껴졌다. 감독님이 단지 자극적인 연출을 위해 이러한 묘사 방식을 선택한 사람으로 인식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손수현 배우도 어린이 배우와 장편에서 호흡을 맞춘 것은 처음이었는데 어땠나. 

일차적으로는 걱정이 컸다. 어쨌든 어린이 배우가 흡연이나 폭력에 노출되는 신이 있다 보니 긴장했는데, 결국 그 상황을 다루는 것은 감독님 몫이라고 봤다. 다행히 감독님이 상황을 잘 책임지셨다. 동시에 한결 배우가 시나리오에 적힌 상황과 감정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어서 솔직히 좀 놀랐다. 이 말도 이상한가. 근데 난 유년기가 잘 기억나지 않거든. 아무리 어려도 아이 스스로 가치 판단할 줄 안다는, 인과를 따져 어떤 결론을 도출해 낸다는 사실을 그새 잊고 있었다. 한결 배우와 함께 작업하는 경험이 곧 <양치기>의 주제와 연결되는 듯했다. 돌이켜보면 유치원 선생님이 소리 지르는 것만으로도 무서움을 느끼는 등 나도 비슷한 경험을 안 했던 것이 아니다. 근데 난 성인이다 보니 필연적으로 어린이 입장에 이입하기란 쉽지 않다. 촬영할 때도, 그리고 지금도 난 요한의 마음을 완벽하게 헤아릴 수 없다. 난 요한이 아니니까, 적어도 요한보다는 더 능동적으로 상황에 대처할 수 있으니까. 이런 한계와 차이를 외면하면 요한을 보며 ‘쟤 너무 안타깝다’라는 감상에 머무를 뿐, 실제 자신의 상황에 대입해 고민하기는 어려울 거라고 본다. 내가 요한을 바라보는 나이브한 시각, 아마도 그건 다른 어린이를 볼 때도 마찬가지겠지. 그걸 의식하려고 했다. ‘어린이 배우를 동등한 직업인으로 존중하려면 최소한 내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기억이라도 해야 한다’라는 생각이었다. 

 

참 어려운 것 같다. 독립된 개인이자 동료로서 대함과 동시에, 나의 우위를 인정하며 책임지고 배려해야 할 부분도 있으니까. 어느 때엔 과잉 친절도 차별이라는 생각이 들고.

어린이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약자로 일컬어지는 대상과 마주할 때면 늘 고민하는 지점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기득권을 가진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지 모르겠다는 사실 자체가 불평등을 가리키는 것 아닐까.

 

설상가상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수현의 요동치는 내면을 보여줘야 했다. 감정을 폭발하는 연기가 힘들거나 부담스럽지는 않았나. 리허설도 진 빠지는 일이었을 텐데 어떻게 준비했나. 

아무래도 화가 난 상태에서 말하다 보면 좀 어지럽더라. 그런 역할을 여러 번 맡아본 것도 아니어서 처음엔 낯설기도 했다. 근데 오히려 쾌감이 컸다. 여태 작품 안에서든 밖에서든 극한의 감정을 표출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일상에서 소리 내어 울어본 지도 오래됐다. 당연히 체력적으로 힘들긴 했지만, 촬영장에서 감정을 크게 발산하고 나면 왠지 모르게 시원하더라. 집에 갈 때 ‘오늘 할 일 다 했다!’ 싶더라. 하루를 알차게 보낸 느낌. 말 그대로 밥값 했다는 만족감이 있었다. 현장에서 감정을 다 쏟아 버리니까 잠도 잘 왔다.

손수현 ⓒ이영진

학교 폭력, 가정 폭력, 아동 학대 등 영화에서 다루는 소재 자체가 소화하기 쉽지 않다. 그 가운데 관객이 인물과 내용을 따라오도록 수현의 감정선을 구체적으로 그려 나가야 했다. 장면에 맞춰 연기 톤과 에너지를 달리하려면 계산이 필요했을 듯하다.  

말한 대로 감정이 계속 쌓이고 증폭하다 보니 에너지 배분이 필요했다. 내가 생각한 정도가 맞는지, 표현의 세기가 적절한지 감독님과 상의했다. 감독님이 편집점을 고려하며 감정을 다시 잡아주시기도 하고, 때로는 자유롭게 놔주시기도 했다. 수현의 감정을 요약하면 ‘억울함’이지만, 상황과 대상에 따라 세부적인 감정은 달라진다. 엄마, 예비 신랑, 학생, 동료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호소하는데, 때마다 느끼는 배신감의 폭이 다를 거라고 봤다. 그런 차이가 잘 포착되기를, 필터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를 바랐다. 화면에서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 진짜 하나도 신경이 안 쓰였다. 으레 여자 배우는 화면에 예쁘게 담겨야 한다고들 하는데, <양치기>에서는 그런 부담이 전혀 없었다. 카메라와 호흡이 잘 맞아서 수현을 순간순간 휘감는 억울함이 잘 보였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촬영하면서 심리적으로 가장 압박을 받았던 장면은? 

두 장면이 있다. 하나는 식탁을 엎는 신. 실수 없이 한 번에 엎어야 했거든. (웃음) 다른 하나는 요한의 뺨을 때리는 장면이다. 수현의 폭력성이 드러나는 신이자 영화의 클라이맥스이기도 하다. 수현이 계속 부정했던 것을 제 손으로 증명하는 순간이니까.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압박감이 밀려들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수현은 결국 요한을 때리고 만다. 그다음 지문에 “일순 후련해지는 수현”이라고 적혀 있었다.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다. 감독님은 절망과 괴로움뿐만 아니라, 묘한 해방감까지 함께 담고 싶어 했다. 그걸 표현하고자 나도 최선을 다했다. 

 

하나로 정리되지 않는 감정이 표정에 드러난다. 그러고 보면 격앙된 순간보다 침묵하는 순간, 특히 요한과 마지막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보여준 얼굴이 기억에 남는다. 선하고 깨끗하고 예민하고 겁에 질린 얼굴. 

실은 그 장면을 촬영 첫날에 찍었다. 현장 여건상 보육원 장면을 초반에 몰아 찍어야 했거든. 그때도 감독님 붙잡고 계속 물어봤다. “이 감정 맞아요? 맞아야 하는데. 감독님 혹시 편집하다가 안 붙으면 다시 찍어요.” (웃음) 난 수현으로서 요한을 줄곧 수상하게 여겼다. 가해자 혹은 피해자로 확정했다기보다는 의심 가득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했다. 그래야 영화에 수현의 불안과 공포가 나타날 테니까.

 

문득 수현 배우는 연기를 통해 무엇을 표현하고 싶을까, 왜 표현하려고 할까, 그런 게 궁금해졌다.

표현하고 싶은 마음보다는… 아니, 결국 표현하고 싶은 마음과 연결되기는 하는데, 그 순간 인물이 느끼는 바를 잘 전달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크다. 다만, 그런 욕구를 현장에서 의식하지는 않는다. ‘잘 전달해야 해!’라고 생각하는 순간, 망하는 것 같거든. 이상한 데에 힘이 실린다든지, 집중을 못 한다든지. 전달하자고 마음먹는 순간, 인물에서 튀어나오고 작품에서 벗어난 존재가 되는 거다. 그러니까 현장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평소엔 전달에 관한 고민을 꽤 하는 것 같다. 영화에선 여러 인물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지 않나. 사회의 이면을 보여주는 이야기도 있고, 재미를 추구하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거나 모두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들이고 그 속에서 내가 어떤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실이 좋다. 그렇기에 인물이 왜곡되지 않고 관객에게 오롯이 전달되기를 바란다. 서사뿐만 아니라 연기, 배우가 그리는 인물의 감정선 또한 개연성을 만드는 요소 아닌가. 내 역할을 잘 해내고 싶다. 

 

연기를 ‘내가 할 일, 내게 맞는 일’로 느낄 때는 언제인가. 

항상 의심한다. 사주 보러 갈 때마다 “이 일이 저한테 맞나요?” 꼭 물어보거든. (웃음) 여전히 의심스럽고 불확실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연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하는 일을 잘하면 가장 좋을 테지만, 설령 못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좋아하면 내 일로 삼을 수 있는 것 아닌가. 현장에서 연기할 때보다 되려 현장에 못 갈 때, 일이 없을 때 연기 생각을 많이 한다. 친구들이 다른 현장 이야기하는 걸 들으면서 속으로 되뇐다. ‘아, 연기하고 싶다. 나도 작품 만났으면 좋겠다.’ 그럴 때면 내가 연기를 진짜 좋아하긴 하는구나 싶다. 

손수현 ⓒ이영진

곁에 없어야 소중함을 안다니까.

원래 자기 손에 쥔 것은 별로 아쉽지 않거든. 담배도 안 피우고 못 피울 때 가장 피우고 싶지 않나. (웃음) 현장에서는 몸도 마음도 고되다 보니 ‘빨리 집에 가서 고양이 보고 싶다!’ 하는데, 막상 시간이 흐른 후에 돌이켜 보면 현장에 있을 때가 제일 신나고 행복했더라. 이상하지? 

 

사주를 봐준 사람들은 뭐라고 하던가. 

사람마다 말이 다르다. 아마 그래서 맨날 물어보는 것 같다. 누구는 잘하고 있다고 하는데, 또 누구는 “여기 불 하나만 있었으면 딱인데”라며 아쉬운 얘기하고. 그러면 흘려듣는다. 안 좋은 얘기는 안 믿기로 했다. 

 

연기하는 나와 연기하지 않는 나를 구분하는 편인가. 또는 그런 구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굳이 분리하지 않는다. 직업인으로서의 나와 삶을 사는 내가 별개라고 생각하지 않거든. 나라는 사람이 이 일을 하는 거니까. 다만, 연기라는 건 결국 나와 떨어져야 하는 일이다. 내 가치관과 경험에서 벗어나서 인물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연기는 ‘그래, 세상엔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지’라며 나와 다른 존재를 인정하고, ‘내가 아닌 이 인물이라면 어떻게 행동할까?’ 상상해 보는 작업이다. ‘연기하는 나’와 ‘연기하지 않는 나’를 아예 다른 사람으로 여기는 것처럼 들릴 수 있는데, 사실 이 작업을 하려면 무엇보다 일관성이 중요한 것 같다. 배우로서든 생활인으로서든 나를 일관성 있게 유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을 만큼 단단해질 테니까.

 

배우는 모순적인 환경에 있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자의식을 끊임없이 일깨워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끊임없이 비워내야 한다. 연예인이라는 위치는 남보다 더 돋보여야 유지되는데, 연기라는 행위는 남에게 스며들어야 가능하다. 그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배우마다 다르겠지만, 본인 직업의 카테고리를 어디에 두느냐에 관한 문제 같다. 물론 나도 어렸을 적엔 연예인이 되고 싶었고, 연기하는 일을 곧 연예인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근데 그 시간이 나를 불행하게 하더라. 배우를 직업이 아닌 어떤 특권적 위치로 받아들이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진다.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거다. 그만큼 제약이 따르니까. 예컨대 정치인과 비교하면 완전히 다르다. 정치인이 타인을 위해 살아야 하는 직업이라면, 배우에게 그런 의무는 없다. 타인이 아닌 자신을 위해 산다. 근데 연기는 자의식 과잉으로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타인을 향한 시선과 마음에서 출발하거든. 그 일을 해내려면 나를 잘 지켜야 한다. ‘내가 짱이야!’ 같은 생각은 필요하지 않다. 그저 주변에 지나치게 휩쓸리지 않을 정도로만 힘을 기르고, 자신을 믿어주면 된다고 본다. 내 경우엔 비교를 멈추는 것이 나를 지키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각자 생긴 모양대로 사는 거지, 꼭 누구처럼 되어야 하나. 비교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다 보니 자연스레 편안함을 찾았고 예전보다 행복해졌다. 요새도 종종 “상업(영화나 드라마)은 안 하세요? 하고 싶지 않으세요?”라는 말을 듣는데, 진짜로 신경 쓰이지 않는다. 하면 좋지. 근데 안 한다고 해서 불행하거나 누구 말처럼 망한 것도 아닌 거다. 내가 소속사 없이 혼자 현장에 다니는 것을 안쓰럽게 보는 사람들도 있다. 예전엔 그런 시선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는데, 이젠 그렇게 보든 말든 상관없는 상태가 됐다. 오히려 연기하는 과정에서 도움이 되는 면도 있다. 배우가 ‘난 특별해, 특별 대우를 받아야 해’라고 생각하면, 선택의 폭이 줄어들면서 작품을 만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거든. 

 

그런 단단함을 어떻게 마련했나. 다들 괜한 비교와 착각에 빠지지 않으려고, 자신을 잘 보살피고 싶어서 노력한다. 명상, 요가, 달리기 등 방법도 제각각이다. 수현 배우는 어떤가.

나도 말은 이렇게 했지만 때때로 흔들린다. 난데없이 “상업 안 하고 싶으세요?” 질문받으면 자존감 뚝 떨어지면서 쪼그라들기도 하고. 마음속에서 계속 싸우는데, 최근엔 상담을 받으면서 많이 좋아졌다. 내 안에 있는 수많은 나를 만나게 되더라. 내게서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그간 풀지 못했던 여러 문제를 정리할 수 있었다. 막연하게 흩어져 있던 기억이 하나의 줄기로 연결되기도 하고. 덕분에 나를 별로 미워하지 않게 됐다.

<백차와 우롱차>
<나의 여신>

요새는 한결 산뜻한 기분으로 살겠네.

과거의 나, 조금 부끄럽긴 해도 미워할 수는 없는 존재다. 그러면 현재의 나도 좋아하기 어렵거든. 내가 나를 너무 미워하고 불쌍해하면 괴로움이 한도 끝도 없는 것 같다.

 

올해 하반기 계획은?

7월에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철봉하자 우리>(목충헌, 2024)를 공개한다. 즐겁게 작업했던 작품이라서 관객 반응이 궁금하다. <럭키, 아파트>(강유가람, 2024)를 상영하는 춘천영화제에도 방문할 예정이다. 그러고 나면 가을쯤 신승은 감독의 첫 장편영화 촬영이 시작된다. 손예원 배우가 주인공이고, 나도 잠시 출연하기로 했다. 시나리오를 먼저 읽어 봤는데 되게 재밌다.   

 

그밖에 기다리는 작품이 있나. 어떤 영화 혹은 인물을 만나면 반가울 것 같나.

요즘에 일거리가 없어서 뭐든 반가울 듯한데, <철봉하자 우리> 시나리오 받았을 때 진짜 좋았다. 자기혐오가 덕지덕지 달라붙은 두 여자의 이야기다. 특히 내가 맡은 석주는 도저히 자신을 좋아할 수가 없는 인물이다. 영화 내내 미친 짓이라고 할 법한 일들이 연속하고, 인물들은 관계를 망치느라 바쁘다. 그토록 철딱서니 없는 인물을 연기하자니 통쾌했다. 언제 또 이런 연기를 해보나 싶고. 생각해 보면 <양치기>와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나의 못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역할에 끌리는 것 같다. 당당하고 멋진 인물만큼 지질하고 꼴사나운 인물도 매력적이다.  

 

평소에 솔직하지 못하다는 뜻인가?

<철봉하자 우리>에서 상대 역인 송예은 배우한테 욕하는 장면이 있다. 살면서 큰소리치는 경우도 거의 없고, 더구나 친구한테 그러기는 어렵지 않나. 내가 다 망쳤어, 또 망쳤어, 후회하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캐릭터라 재밌었다. 못나고 모난 구석은 대체로 숨기면서 살다 보니 그걸 표현할 수 있는 작품을 만나면 짜릿한 것 같다. 악역도 해보고 싶다. 주인공은 늘 선하고, 정직하고, 정의를 추구한다. 그와 달리, 어딘가 비틀리고 꼬인 캐릭터를 보면 흥미롭다.

손수현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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