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이상의 거리는 늘 멀다. 터전을 잃고 다쳐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는 야생동물이 살아갈 시설, ‘생츄어리’를 만들고 싶은 마음은 매일 몰아치는 구조, 진료 활동과 간신히 공존한다. 동물원에 발을 딛고 생츄어리를 바라보는 청주동물원의 수의사 김정호, 사육 곰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당장 농장에 해먹이라도 달기 위해 애쓰는 동물복지 활동가 최태규, 하루하루 야생동물을 구조하고 돌보는 데 온 마음을 쏟는 야생동물구조센터의 활동가들. <생츄어리>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은 열악한 지반 위에서 오늘, 이곳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장소로 만들기 위해 고투한다. 왕민철 감독은 현실에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 고발하거나 이상이 얼마큼 아름다운지 웅변하는 대신, 이들의 구체적 활동을 통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명료한 설명보다 고민의 장을 여는 게 더 중요하다고 여겨서다. 그 역시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흔들리며 계속해서 고민하고 때로 주저앉는 사람이기 때문일 거다. 촬영을 시작할 때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다짐들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만나 이런저런 우회로를 찾아간다. 결과적으로 ‘이상한 혼종’이 만들어지는 게 아닌가 싶다고 감독은 말하지만, 우리 삶에 어디 혼종 아닌 게 있을까. 솔직한 고민을 들려준 왕민철 감독과의 대화는 현실을 살피고 이상을 그리는 이들이 섞여 만들어낸 혼종의 세계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
영화를 완성하고 2년 정도가 지났다. 지금은 다른 촬영 중이라고 들었는데, 그간 어떻게 지냈나.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글쎄, 그 사이에 뭘 했더라? (웃음) 202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생츄어리>를 처음 공개했고 다른 데서도 몇 번 상영했다. 이후 다른 일들을 좀 했고, 작년 연말부터 지금 찍는 영화를 준비했다. 지금도 마음은 거기에 많이 가 있다. <동물, 원>을 개봉한 뒤, 짧은 시간 동안 청주동물원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런데 <생츄어리>를 만들고 개봉하는 2년 사이에는 변화가 거의 없었던 듯하다. 그간 변화가 많았다면 이미 영화의 실효성이 떨어졌을 텐데, 현실은 그대로인 느낌이 좀 있다. 좋은 일은 아니지.
지금은 어떤 작업을 하고 있나.
<동물, 원>, <생츄어리>와 주제적으로 이어지는 영화다. 3부작의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있다. 앞의 두 영화에는 좀 큰 담론들이 있잖나. 이번에도 연장되는 담론은 있지만 그건 배경 정도다. 그 안에서 캐릭터 영화를 찍듯 인물 중심으로 작업해 보려고 한다. 근데 아직 제작비도 없고, 말하기 좀 조심스럽다.
<생츄어리>를 작업할 때부터 동물원 3부작 이야기가 있던 거로 안다. 감독 입장에서 고민스럽지는 않았나. 활동가나 전문가가 아닌데 비슷한 주제로 작업을 이어간다는 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을 텐데.
고민스럽다. 인터뷰할 때도 영화보다 동물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된다. 물론 당연한 일이다. 다큐멘터리라는 게 다루는 내용이 중요한 거니까. 하지만 나는 ‘영화’에 더 방점을 찍다 보니 고민은 계속된다. 그래서 다음 영화를 인물 중심으로 작업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첫 영화를 찍고는 부담이 컸는데,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다. 내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지, 한다. (웃음) 계속 이렇게 소재가 있는 것도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동물, 원> 이후에 했던 인터뷰들을 찾아보니, 그때도 이미 생츄어리에 대한 언급을 좀 했더라. 어떻게 관심을 두게 됐나.
<동물, 원> 촬영하면서 생츄어리라는 개념을 접했다.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익숙한 개념이지만 일반 대중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개념이기도 하다. 청주동물원에서는 현대 사회에서 동물원이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쭉 해왔다. 그 방향성을 명확히 생츄어리로 잡고 나아가는 시점이 <생츄어리>에 담겼다. 사실 영화에 생츄어리가 나오지는 않는다. 모두의 바람으로만 등장하지. 결국 이건 청주동물원의 이야기라고 본다. 전작에서 일반적인 동물원이 지금 어떤 곳인가를 개괄적으로 보여줬다면, 이번에는 동물원이 정말 동물들에게 도움이 되는 장소로 적극적으로 변해가는 모습과 그 안의 바람을 담으려고 했다.
<생츄어리>를 만들게 된 계기로 <동물, 원>을 만들며 마음에 남은 동물들의 죽음에 대해 말한 적 있다. 첫 장편을 만드는 동안 남았던 아쉬움이 있었던 듯한데.
이번 영화 제목을 ‘생츄어리’가 아니라 ‘안락사’라고 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사실 동물원에서 동물들이 굉장히 많이 죽는다. 수명이 인간에 비해 짧기도 하고, 또 여러 이유가 있겠지. <동물, 원>에서 호랑이 박람이의 죽음이 큰 비중을 차지하기도 하는데, 당시 담을 수 없었던 다른 죽음들도 분명히 있었다. 그 이야기가 계속 마음에 남았다. 한편 내가 한국에서 처음 참여했던 다큐멘터리가 이창재 감독님의 <목숨>(2014)이다. 호스피스의 말기 암 환자들에 관한 영화인데, 그때도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그즈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키우던 개가 죽고 하면서 그 주제가 알게 모르게 남아 있던 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죽음은 <동물, 원>을 찍으면서 계속 미뤄둬야만 했고 꺼내기 힘든 이야기였다. 말했듯 동물원에서 동물들이 많이 죽지만 우리는 접할 기회가 거의 없잖나. 그런 얘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죽음이라는 주제를 늘 염두에 뒀던 거로 들린다.
그런가. 아무래도 남아있겠지. <동물, 원>에 이어 이번에도 편집 감독을 맡아준 안지환 감독과는 프로덕션 초반부터 이야기를 나눴다. 돌이켜보니 처음에 그런 얘기를 했더라. 이 영화는 죽음을 다룰 거라고. 찍는 동안에는 잊고 있었다. 완성하고 어느 날 극장에서 보다가 둘 다 문득 그걸 떠올렸다. “우리 처음부터 죽음에 대해서 얘기하기로 했지?”
영화 만들고 나서 뭔가 매듭이 지어졌나.
그럴 수 없는 주제라고 본다. 다만 안락사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논의가 필요하다는 공론화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지금은 그런 논의 자체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 최소한 동물원, 유기동물보호센터, 야생동물구조센터처럼 동물을 구조하고 보호하는 단체에서라도 그런 자리가 만들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한편으로는 영화에서 죽음을 다루는 게 참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죽음을 지켜보는 데서 오는 심리적 어려움도 있겠지만, 방법의 문제 역시 고민해 볼 일이다. <생츄어리>에도 많은 사체가 나온다. 그 광경을 담는 것을 넘어 죽음을 다루는 법에 대해 고민한 바가 있다면.
<목숨>에도 누군가 돌아가시는 순간을 찍은 게 몇 장면 있다. 그때도 고민이 많았다. 동물이 죽는 건 사람이 죽는 것과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자극적인 형태로 보이기에 이번 작업 초반에도 고민했다. 하지만 그 죽음은 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 처참한 죽음을 보인 다음에 다른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기에 스스로 정당화한 면도 있었을 거다. 그보다 더 고민이 됐던 건 충남 야생동물구조센터 활동가들이 동물 사체를 수습하고 처리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그분들은 매일 그걸 겪는다. 그러니까 죽음이 일상화돼 있는 거다. 죽음을 일상적으로 다루는 행위와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동시에 보여주기 위해 고심했다.
<동물, 원>의 주요 등장인물인 김정호 수의사의 활동에 또다시 주목하면서, 영화에는 자연스럽게 청주동물원이 변화해 가는 과정이 담긴다. <동물, 원> 이후 김정호 수의사와의 관계는 어떻게 이어져 왔나.
<동물, 원>의 관객 수가 많지는 않다. 그런데 관계자분들은 영화를 꽤 보셨다. 그게 계기가 돼서 청주동물원의 호랑이사가 고쳐지기도 했다. 영화로 인해 청주동물원이 관심을 받았고, 동물원이 김정호 수의사가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고마워하시는 면이 있었지. 이후에도 꾸준히 관계가 이어졌다. <동물, 원>에 나왔던 표범 직지가 죽었을 때, 같이 명패도 붙이고 그랬다. 그러다 <생츄어리>에 나오는 곰 반순이가 병원에서 진료받는 장면을 남기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걸 계기로 <생츄어리> 촬영이 시작된 것이기도 하다.

당시 김정호 수의사가 홍보 영상도 부탁했다고 들었는데.
반순이 사례처럼 김정호 수의사는 청주동물원이 수의학 쪽으로 발전되기를 바라는 면이 있다. 동물원을 알려서 더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지원을 받아 진료를 더 구체적으로 잘하고 싶은 거다. 그래서 반순이 진료 과정을 담고 그걸로 홍보 영상 같은 걸 만들고 싶었던 거지. 그런데 다큐멘터리 만드는 사람으로서 내가 찍었던 영화의 주인공이나 소재를 가지고 홍보 영상을 만든다는 게 좀 맞지 않는 일로 느껴졌다. 그래서 그 부분은 거절하고, 동물원에서의 죽음에 관한 영화를 찍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그걸 찍게 해주면 그 소스 중 일부를 제공해 드리겠다고. 그런 식으로 촬영이 진행됐다.
요청받기 전에도 감독으로서 다음 작업에 시동을 걸고 있었던 듯하다.
이전에 김정호 수의사가 ‘곰 보금자리 프로젝트’ 대표인 최태규 수의사에 대해 말해준 적이 있다. 흥미롭고 좋은 사람이라며 만나보라더라. 영화 소재가 되지 않겠냐면서. 그런데 그분이 청주동물원에서 수의사로 일하게 됐다고 하기에 그럼 뭔가 되겠다 싶었다. 그게 반순이 일과 겹치면서 시작하게 됐다.
동물원 쪽에서 우려하거나 어려워하지는 않았나.
아마 어려움이 있었을 테지만 설득하는 과정은 거의 없었다. 이미 서로 어느 정도 신뢰가 쌓여있었고, 김정호 수의사도 그 필요성은 인식하고 있었다.
동물원을 다시 촬영하게 됐을 때, 좀 더 집중하기로 선택한 지점이 있는지.
초반의 기획은 지금의 완성본과 꽤 거리가 있다. 활동가인 최태규 수의사와 공무원 사회에서 계속 일해 온 김정호 수의사, 두 세계가 충돌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거든. 그 관계나 거기서 벌어지는 균열 같은 게 담기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는 전혀 생각을 못 했다. 그러다 중간에 최태규 수의사가 청주동물원을 나오면서 영화가 점점 다른 방향으로 확장됐다.
영화를 보면 이들의 하루에 정말 많은 일이 몰아친다는 게 체감된다. 일단 하루하루가 너무나도 정신없구나, 하는?
결론적으로 영화가 좀 정신없게 완성됐다.
아쉬운 점이 있나.
담아야 할 건 너무 많은데, 그걸 영화 한 편으로 응집하는 과정이 어려웠지. 가편집은 거의 3시간 가까이 나왔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둘로 쪼개야 하나 싶었다. 관객에게 무거운 주제를 3시간 동안 보여주는 게 좀 부담스럽기도 했고. 그래도 너무 길면 안 되겠더라. 조정래 선생님 정도 돼야 대하소설 쓰는 거지. (웃음)
최태규 수의사는 무척 흥미로운 인물이다. 결단이 빠르고 머뭇거림이 적은 데다, 그의 활동과 의견이 계속해서 고민할 지점을 던진다.
처음 최태규 수의사를 만난 건 인디다큐페스티발이었다. <동물, 원>을 상영하는데 혼자 영화를 보러 오셨더라. 처음엔 그분인 줄 몰랐는데, 질의응답 할 때 본인을 밝혀서 알게 됐다. 말해준 대로 영화적으로 매력적인 인물이다. 확고함이 있는 한편, 그것과 다른 순수한 면모도 지니고 있다. 그건 김정호 수의사도 비슷하다.
영화 속에서 최태규 수의사가 반달곰 티셔츠를 계속 입고 다니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니까. (웃음) 다른 옷 입은 걸 거의 본 적이 없다.
촬영하며 대상과 허물없이 가까워지는 편은 아닌 듯하다. 어떤 식의 거리두기가 느껴진다. 그런데 필요한 질문을 던져야 하는 순간도 있을 거 아닌가. 인물들과 관계 맺고 말을 건네는 과정은 어떻게 소화하고 있나.
진짜 극 ‘I’ 타입이다. 사람들 만나는 걸 그렇게 즐기지 않고, 낯선 사람과 쉽게 친해지는 편도 아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를 찍는 건 어쨌든 일이니까, 할 수 있는 선에서 하는 거다. 또 그 두 분은 자기 일이 있고 그걸 알리기 위한 필요를 느끼고 있잖나. 가까워지기보다는 신뢰를 보여주면 되는 게 아닌가 싶다. 다큐멘터리를 찍다 보면 상대가 불편해할 만한 질문을 던지고 그 불편함을 담으려고 할 수도 있을 거다. 그런데 난 그렇게는 못 하는 사람 같다. 사실 최태규 수의사와 김정호 수의사가 대립하는 부분이 더 많이 찍혀야 이 영화가 말이 되긴 한다. 그게 더 극적이고 더 명확하기도 하겠지. 그걸 못 찍었던 이유도 결국 내 자세 때문인 듯하다. 서슴없이 카메라를 들이대야 하는데 그렇게 안 된다. 한편으로는 그게 꼭 필요한가 싶기도 하고. 그런 걸 찍을 수 없다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표현하는 거다. 그게 자연스럽게 거리감을 만들어주는 게 아닐까. 어쨌든 저 사람의 삶에 내가 개입해서 뭔가를 찍어야 하잖나. 그 거리감은 꼭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여전히 고민이다. 내가 너무 게으른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여기서 카메라를 켜야 하나 말아야 하나, 오늘 카메라를 가져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게 항상 어렵다.
고라니를 구조하는 충남 야생동물구조센터의 활동으로 영화가 시작하는데, 숨 가쁜 현장에 일원으로 동행하는 느낌이 강하다. 이들은 어떻게 만나게 됐나.
이전부터 충남 야생동물구조센터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그곳이 가장 모범적이고 활발하다고 하더라. 그런데 이 영화를 찍으면서 거기를 갑자기 갈 이유는 없잖나. 그냥 연락 한 번 해봐야지 하고 미루다가 자연스럽게 충남에 갈 일이 생겼다. 김정호 수의사가 청주동물원의 동물종 수를 줄이고, 야생동물구조센터의 동물들을 데려오는 과정에서 생긴 일이었다. 충남에서 삵을 데려오게 됐거든. 그게 계기가 돼서 촬영하게 됐다.
삵을 데려오는 장면은 최종본에서 왜 빠졌나.
그게 김정호 수의사와 충남 센터를 이어주기 위한 고리였는데, 너무 기능적인 숏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무언가 설명하기 위해 장면들을 엮는 데 저항감이 있는 걸까.
다큐멘터리를 하다 보면 기본적으로 계속 설명하게 될 수밖에 없는 듯하다. 영화에 등장하는 장면이 관객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상황이기 때문에 설명은 물론 필요하다. 그렇지만 어디까지 설명해야 하는가는 고민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다. <생츄어리>의 어떤 상황들은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되는 부분이 있고, “이게 지금 왜 이렇게 됐지?” 하고 질문하는 게 오히려 중요한 순간도 있다. 그런 걸 다 설명해버리면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이래서 그렇게 됐구나.” 하고 끝내버릴 수도 있잖나. 그보다는 계속 질문을 남기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물론 뭔가 속 시원하게 알려주지 않는다고 이 영화를 답답해하시는 분들도 있다. “그래서 동물원을 가야 돼, 말아야 돼? 이런 게 있어야 해, 없어야 해?” 하는 이야기가 계속 나올 수 있게 하는 게 나의 방향성이라고 생각한다.
구조 현장을 촬영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너무 급박한 현장이라, 뭔가 잘 보이게 찍기가 어려웠다. 처음 농수로 장면은 구조하시는 분들이 착용한 바디캠 영상과 우리가 찍은 걸 섞은 거다. 기록용으로 그렇게 촬영하시더라. 그게 현장감을 살리는 데 도움이 됐다.
김정호, 최태규 수의사와 더불어 동물구조 활동가, 재활 관리사 등 다양한 인물이 카메라에 담기는데, 전작만큼 인터뷰의 비중이 크지 않다. 대신 활동 자체에 집중했다. 어떤 고려가 있었나.
초반부터 인터뷰는 많이 쓰지 않으려 했다. 사실 <동물, 원> 때도 그랬다. 특히 앉아서 하는 인터뷰는 쓰지 말자고 생각하며 항상 영화를 찍기 시작한다. 더욱이 이번 영화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맞겠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또 인터뷰가 아니더라도 <생츄어리>에는 말이 많다. 윤리위원회 회의에서 중요한 이야기가 주로 나오기 때문에 그걸 중심에 뒀다. 상황 파악과 리서치를 위한 인터뷰는 기본적으로 다 진행했지만,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인터뷰는 되도록 쓰지 않았고 쓰더라도 정서나 감정이 드러나는 부분을 사용했다.

명료한 서사를 만들기 위해 내용을 다듬는 과정에 거리를 두는 듯하다. 어떤 식의 반작용이기도 한 걸까.
동물원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는다고 하면 떠올리는 선입견이 있을 거다. 동물원을 비판하는 내용일 것이다, 도덕적인 손가락질을 할 것이다 하는. 처음부터 그런 건 만들지 말자고 생각했는데, 두 번째 영화를 찍고 나니까 점점 그렇게 되는 듯한 느낌이 들더라. 담론에 묶이게 된다고 할까. 영화가 나왔는데, 내가 어느 순간 영화가 아니라 그 담론에 관해서만 얘기하게 되고 말이다. 반작용이라고 한다면 그에 대한 반작용이 좀 크다고 본다. 그래서 좀 더 미시적인 부분에 집중해 보려고 하는 듯하다.
아까 이야기한 대로 <생츄어리>에는 회의와 논의 장면이 무척 많이 등장한다. 안락사를 둘러싼 논의나 생츄어리를 현실화할 방안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이 눈에 띄는데, 애초 짐작한 장면들이었나.
사실 회의 장면은 내가 적극적으로 개입한 부분이기도 하다. 최태규 수의사가 청주동물원에 들어가면서 윤리위원회 설치를 제안했다. 그런데 너무 바쁘니까 계속 미뤄두시더라. 나로서는 그게 중요하게 찍힐 거로 생각해서 강력하게 말씀드렸다. 빨리 만들어서 운영하시라고.
각자 고민하고 있어도 공적 회의 자리가 없으면 의견을 나누기 어려우니까.
인물들끼리 각자 말하는데도 한계가 있고 말이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대립하는 의견도 중재될 수 있고, 더 다양한 이야기가 오가리라고 봤다. 생각해 보면 내가 회의 장면을 되게 좋아하는 것 같다. <동물, 원> 때도 회의해달라고 요청했었다. (웃음) 회의가 있으면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잖나. 평소 말을 안 하시던 분도 어쩔 수 없이 하게 된다. 또 집단 대화 신이 주는 매력이 있다. 내용 전달은 물론이고, 표정으로 정서도 충분히 전달할 수 있다.
<생츄어리>는 윤리위원회와 현장의 목소리를 통해 동물 안락사에 관한 여러 고민을 남긴다. 다친 동물이 많이 등장하지만 회생 불가의 기준은 명확히 나뉘기 어렵고, 누군가는 강력히 주장하며 누군가는 끝내 주저한다. 이 논의는 현재 어떻게 이어지고 있나.
윤리위원회가 얼마큼 잘 운영되고 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안 그래도 인원이 굉장히 부족하고 일 자체도 힘든데,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게 아닌 기구를 설치해서 운영할 여력이 현실적으로 있나 싶기도 하다. 물론 나는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업에 있는 누군가는 요식행위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실 복잡한 마음이다. 다만 우리 사회가 동물 윤리에 대한 고민을 그렇게 일상적으로 하는 사회는 아니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최소한 세금으로 운영되는 기관에는 그런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거다. 현재 안락사 기준이라는 건 거의 없다고 봐도 될 정도다. 실제로 안락사도 별로 실행되지 않는다. 동물원 수의사들은 대개 1~2년 순환보직이다. 안락사라는 건 굉장히 적극적인 개입 행위잖나. 동물이 계속 아프고 고통을 느끼리라고 판단해서 삶의 질을 고려해 생명을 끊는다는 결정을 그분들이 책임지고 할 수 있겠나. 그냥 계속 항생제 놔주고 살려놓다가 자연사했다고 얘기하는 게 더 나은 거다. 실은 방임인 거지. 아무도 책임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츄어리> 속 안락사는 그럼 드문 경우라고 봐야 하는 건가.
확실한 통계를 살펴본 적은 없는데, 아마 드문 경우일 거다. 어떤 동물원에서는 안락사를 한 번도 안 했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일단 기관에서는 굉장히 꺼내기 어려워하는 이야기다. 보통 악한 행위로 생각되잖나. 영화에서 최태규 수의사가 안락사에 적극적인 입장이라, 혹여 개인에 대한 공격이 있진 않을지 우려스럽긴 하다.
영화에 등장한 분들은 영화 보고 뭐라고 하시던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를 처음 보여드렸다. 편집본을 먼저 보여드린 적이 없어서 굉장히 긴장했다. 다행히 영화제의 분위기가 모든 걸 좋게 만들어주더라. (웃음) 근데 최태규 수의사가 자기반성을 많이 하셨다. 내가 저렇게 세게 얘기했나 싶은 거겠지. 이후 볼 기회가 되면 항상 영화를 보고 계신다. 벌써 대여섯 번 보셨다고. 보면서 메모를 막 하신다.
<생츄어리>를 보고 나면 자연에 대한 인간의 개입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된다. 개입하지 않겠다는 결정에도 이미 적극적인 판단이 들어있는 게 아닌가 싶다. 최태규 수의사의 고민에는 인간이 이미 자연에 개입하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는 듯하다.
그런 질문 자체가 이미 의미가 없는 게 사실이다. 목에 칼을 들이밀고 더 넣을까, 말까를 물어보는 느낌이지.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 자체가 커다란 개입이다. 야생동물들의 서식지를 빼앗고, 기후에 대한 영향도 크게 미치고 있잖나. 인제 와서는 개입이라는 말을 쓰기에도 애매하게 느껴진다. 책임을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그 책임의 한 형태가 안락사라고 생각하게 되는 지점이 있다.


<봉명주공>(2022)을 만든 김기성 감독이 영화 제작에 왕민철 감독의 공이 크다고 얘기한 적 있다. <동물, 원>을 촬영하느라 청주와 서울을 오가는 길에 봉명주공을 발견하고 기록을 제안했다고. 평소에도 그런 일이 잦은 편인가.
프로듀서로서의 그런 활동을 좀 하면 좋겠는데 기회는 많지 않은 듯하다. 당시 나무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에 그곳을 발견했고, 마침 김기성 감독이 근처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맞아서 된 일이다.
길을 잃어서 봉명주공을 발견했다고 들었는데.
그건 아니다. (웃음) 배회를 좀 했달까. 시간이 남으면 좀 돌아다니는 편이다. <동물, 원> 개봉하고 청주에 작업실을 만들었다. 오래된 도시라 그런지 다녀보면 재밌는 구석이 많다. 한옥과 양옥의 혼종 같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건물들이 있다니까.
김기성 감독과 유학 시절을 같이 보냈다고. 독일 쾰른에서 영화를 공부했는데, 학교와 현장에서 얻은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학교와 현장의 차이가 물론 크긴 한데, 그보다는 독일에 있을 때와 한국에 있을 때의 차이가 더 크다고 느낀다. 처음 독일에 가서 베를린에 2년 정도 머물며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정말 많이 봤다. 오즈 야스지로, 테오 앙겔로풀로스 등 비디오로만 보던 감독들의 영화를 필름으로 볼 수 있으니 너무 좋았다. 쾰른 예술학교는 순수 미술과 영화를 가르치는 곳이라, 학교에서 굉장히 다양한 걸 볼 수 있던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처음부터 다큐멘터리를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TV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어떤 장면을 봤다. 물이 저수지 가운데로 계속 떨어지는 장면이었던가. 채널 한 바퀴를 다 돌렸는데 아직도 그 장면이더라. 그때부터 멈추고 봤다. 아마 제임스 베닝의 영화였을 거다. 다큐멘터리가 이런 게 되는구나 싶었지. 영화를 만들 때 항상 초반에는 불친절하게 만들자, 내가 하고 싶은 걸 하자고 생각한다. 그런데 편집할 때 되면 어떻게 더 잘 알아들을 수 있게 만드나 고민한다. 그렇게 이상한 혼종이 만들어지는 것 같다. (웃음)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이 주는 고민이 있다면.
방금 말한 부분이다. 관객이 어느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게 이야기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거. 코로나 직전에 단편을 하나 찍었다. 원래는 장편을 만들려고 했다. 우리나라 지역 축제를 달마다 돌아가면서 찍는 거다. 하나에 10분씩 열두 달을 찍으면 120분이잖나. 축제를 세 개 찍었는데 코로나로 모든 축제가 없어졌다. 그래서 하나 찍은 걸로 단편을 만들었다. 대천 연어 축제. 돌아오는 연어를 잡는 축제다. <동물, 원>과 연결되는 지점도 있고 해서 만들어 몇 군데 보냈는데, 어디서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웃음) 제목은 <금의환향>,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영화다.
현재 촬영하는 작업 외에 다른 계획이 있나.
<동물, 원>과 <생츄어리>를 만들며 인터뷰를 많이 했잖나. 다 녹취하고 기록해 놓았는데, 영화에 쓰이지 않은 게 많아서 너무 아깝더라. 그걸 정리해서 책을 내려고 생각하고 있다. 다음 영화가 공개될 즈음에 그게 일정 정도의 형태를 갖춰 나온다면, 전체적인 프로젝트가 그렇게 마무리되면 좋겠다. 청주에 작업실을 구하기 전, <생츄어리> 촬영을 막 시작했을 때 한 1년 정도 청주에서 살았다. 그때 동네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좀 찍어뒀다. 청주에서 전시 기획하시는 분이 그걸로 사진전을 제안하셔서 9월에는 아마 전시를 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