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에게 중요한 것은
<오늘부터 댄싱퀸>
차한비 / Choice / 2024-06-02

“모든 건 7학년 첫날에 시작됐어. 내 인생을 더할 나위 없이 악화시킨 날.” 출발은 나쁘지 않았다. 평소처럼 아빠(안데스 바스모)는 아침부터 땀을 뻘뻘 흘리며 거실에서 사이클을 탔고, 엄마(안드레아 브라인 호빅)는 출근 준비로 분주한 와중에도 틈틈이 딸을 챙겼다. 부모에게 응원받으며 집을 나선 후, 미나(리브 엘비라 쉬퍼순 라르손)는 늘 그렇듯 소꿉친구 마르쿠스(스툴라 하르비츠)와 만나 학교까지 자전거로 내달렸다. 노르웨이에서 가장 큰 호수가 자리한 도시, 하마르는 마침 온화한 계절을 통과하는 중이었다. 첫 번째 사건은 학교에 도착한 직후 벌어졌다. 커다란 사운드박스를 든 전학생 E.D.윈(빌야르 크누센 브야달)이 교정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또래라고 보이지 않을 만큼 여유와 멋이 흘러넘치는 남자애,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16만 명에 육박하는 인플루언서, “노르웨이 최고의 힙합 댄서 중 하나”로 손꼽히는 스타. 그날 미나는 무려 두 번이나 첫사랑에 빠진다. E.D.윈에게 첫눈에 반하고, 댄스 크루를 모집한다는 그 애 손에 이끌려 난생처음 춤춰본 힙합에 온정신을 빼앗긴다. 호수처럼 잔잔하던 ‘모범생’ 미나의 일상은 그렇게 파도를 타고 출렁이기 시작한다.

지난해 제73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K플러스 부문에서 소개된 <오늘부터 댄싱퀸>은 어린이와 청소년의 경계에 선 아이들을 화면 중앙에 데려온다. 열두 살 소녀 미나에게 찾아온 변화는 단순하지 않다. E.D.윈을 향한 이끌림엔 호기심과 동경이 뒤섞이고, 춤은 타고난 재능과 각고의 노력이라는 과제를 동시에 던진다. 제72회 베를린국제영화제 동일 부문에 초청됐던 <비밀의 언덕>(이지은, 2023)의 주인공 명은(문승아) 또한 미나와 같은 열두 살이었다. 나와 다른 사람을 비교하고, 부러움과 부끄러움을 번갈아 느끼며 지금과 다른 나를 꿈꾸는 나이. 두 작품은 주제도 배경도 서로 상이하지만, 상처받고 좌절하면서도 나름의 성장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영화 속 동갑내기 소녀들은 뚜렷한 공통점을 지닌다. 그들은 이제 부모 품에서 벗어나 독립된 개인으로 사고하려 애쓰고 또래 집단의 인정을 갈망한다. 명은이 글쓰기를 통해 새로운 세계에 입문한다면, 미나는 춤추기를 통해 그 과정을 겪어 나간다. 경쟁과 도전을 거듭해야겠지만, 소녀들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업적이 아니라 깨달음이다. 명은이 그러했듯 미나도 누군가를 이길 수 있는 춤이 아니라, 자신만의 춤을 춰야 한다.

<오늘부터 댄싱퀸>
<오늘부터 댄싱퀸>

미나에게 최초의 춤은 해방감을 안긴다. 운동장은 강렬한 비트의 음악으로 들썩이고, 원을 그리며 선 개성 넘치는 아이들은 리듬에 맞춰 발을 구른다. 그 속에 둘러싸여 한바탕 몸을 흔들고 난 후, 미나는 예전처럼 얌전히 공부만 할 수는 없다. 인터넷에서 ‘힙합을 배우는 방법’을 검색하고, 팔다리를 움직이다가 흥에 겨워 식탁 위로 올라간다. 미나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사람은 할머니(안네 마리트 야콥센)다. 젊은 시절 20년 가까이 샤누아르에서 춤을 췄다는 할머니는 미나를 흐뭇하게 바라본다. “소심한 범생이가 자신의 껍데기를 깨고 싶어 한다는 걸” 누군가는 꼭 알아줄 거라며 미나를 격려하고, 미나가 댄스 크루를 선발하는 오디션에 합격한 다음에는 비밀 스승으로 나선다. 할머니의 어둡고 낡은 창고에서 음악이 울려 퍼진 날부터 영화 속 춤은 미나의 자기표현 수단 외에 또 다른 의미를 띠기 시작한다. 춤은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던 할머니의 역사를 전수하는 행위이자, 할머니와 엄마의 해묵은 갈등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된다.

<오늘부터 댄싱퀸>은 겉보기엔 미나의 춤 실력이 차근차근 향상하는 과정을 뒤쫓는 듯하지만, 알고 보면 그 틈에서 연결고리가 녹슬거나 헐거워진 관계를 복원하는 일에 좀 더 주력한다. 미나는 E.D.윈과 댄스 듀오를 결성하면서 마르쿠스에게 소홀해지고, 엄마는 점점 변해 가는 미나를 보며 유년기의 트라우마를 떠올린다. 마르쿠스가 마음을 닫고 돌아선다면, 엄마는 할머니에게 “내 유년기는 망쳐놨어도 미나는 안 돼요!”라며 오래 쌓아둔 원망을 터뜨리는 식이다. 한편, 더 나은 나로 ‘변신’하고자 했던 미나는 춤을 출수록 생기를 잃어 간다. E.D.윈이 요구하는 기준에 미치려 자신을 몰아붙인 탓이다. 결국 미나를 집어삼킬 만한 파도가 몰아친다. 과연 미나는 꼬여만 가는 상황을 정리하고 무사히 일어설 수 있을까. 친구의 손을 잡고 가족들과 마주 볼 기회를 다시 한번 얻을 수 있을까. 미나는 크게 휘청거리지만, 할머니가 일러준 가르침을 되새긴다. 좋은 댄서가 되는 법과 좋은 사람이 되는 법은 그리 다르지 않고, 기본을 익혀야 조화로운 에너지를 기를 수 있다는 조언은 단지 춤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늘부터 댄싱퀸>
<오늘부터 댄싱퀸>

소녀의 성장과 가족의 화합이라는 익숙한 서사를 따라가면서도 영화가 매력을 잃지 않는 데는 배우들의 공이 크다. 이전까지 연기 경력이 없던 리브 엘비라 쉬퍼순 라르손은 <오늘부터 댄싱퀸>에서 자유로운 매력을 선보인다. 영화 초반 수줍고 인기 없는 여자애로 등장한 후, 미나는 “완전히 바보가 될 가능성”을 무릅쓴 채 헤어 밴드까지 야무지게 착용하고 재등장한다. 거울에 제 얼굴과 몸을 연신 비춰 보며 마음을 무럭무럭 키워가는 소녀, 리브 엘비라 쉬퍼순 라르손은 변화무쌍한 표정으로 미나의 시행착오를 그린다. 그와 호흡을 맞춘 안네 마리트 야콥센 또한 독창적인 연기를 펼친다. 영화 속 할머니는 그저 인자한 노인이 아니라, “멍청한 자기 연민 따위는 그 작은 머리통에서 떨어트리고 정신 차려라!”라며 촌철살인을 쉼 없이 날리는 인물이다. 실제로 여든을 바라보는 배우는 죽음을 앞둔 노인의 회한, 딸을 아끼는 엄마의 애정, 그리고 손녀에게 좋은 기억을 물려주려 하는 성숙한 결심까지 두루 표현하며 극의 정서를 한층 다채롭게 채운다. 두 배우 덕분에 <오늘부터 댄싱퀸>에서 춤은 해방을 넘어 애도와 회복의 몸짓으로 변모한다.

 

오늘부터 댄싱퀸 Dancing Queen 감독 오로라 고세 출연 리브 엘비라 쉬퍼순 라르손, 스툴라 하르비츠, 빌야르 크누센 브야달, 일바 뢰스텐-하가, 안네 마리트 야콥센, 안드레아 브라인 호빅, 안데스 바스모, 센지스 알 수입·배급 그린나래미디어 제공·공동배급 스튜디오 산타클로스엔터테인먼트 제작연도 2023년 상영시간 92분 등급 전체관람가 개봉 2024년 5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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