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선물
<미지수> 권잎새·이돈구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4-05-13

이돈구 감독과 권잎새 배우는 비슷한 부류다. 그들의 시작을 듣고 있으면 덩달아 마음이 바빠진다. 가슴 뛰게 하는 일을 찾은 뒤, 둘은 잠도 안 자고 즐거운 일에 매달렸다. 카메라를 들고 영화를 뚝딱 만들어 내거나 무대에 서서 연기하는 건 그들에게 벅찬 설렘을 안겼다. 샘솟는 에너지를 어쩔 줄 몰라 마구 달려 나갔던 감독과 배우는 누구보다 성실히 준비해 현장에 도착하는 이들이 됐다. 면밀한 분석과 왕성한 탐구 정신은 세계와 인물을 창조하는 단단한 기초체력을 만들었다. ‘로케이션’이라고 이름 붙인 휴대폰 사진첩에 온갖 장소를 저장해 뒀다는 감독은 초콜릿 상자를 예로 든다. 그는 하나씩 꺼낸 초콜릿으로 집을 짓고 작은 소품에까지 신경 쓰며 내부를 설계한다. 감독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그 안에서 편안하고 자유롭게 연기하는 배우다. 배우에게서 발하는 순간의 유일무이한 힘을 믿어서다. 작품과 인물이 맺는 관계에 집중해 매번 다른 방법을 고안해 내는 권잎새 배우는 이돈구 감독이 만든 세상에 가뿐히 안착했다. 발붙인 땅이 종종 뒤집히고 그리움과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드는 알 수 없는 세상에. <미지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의 ‘하늘이 무너지는’ 경험을 독특하게 그려낸 ‘SF 멜로 판타지’다. 죽었던 이들이 살아나고, 멀쩡한 건물이 부서지는 이 이상한 곳에서는 대체 어떻게 걸어야 할까? 한참을 달리던 두 사람이 <미지수>에서 찾은 속도가 궁금해 만남을 청했다.

 

 

봄은 충분히 즐겼나. 감독 전작이 <봄날>이기도 한데.

이돈구_ 가끔 산에 간다. 봄이 되며 새싹이 올라오고 파릇파릇해지는 게 벅차더라. 나이 들수록 봄이 좋아진다. 밖에서 친구들이랑 얘기하거나 커피 한잔하기 좋은 날씨잖나. 그런 걸 즐기고 있다. 가정의 달이라는 5월에 영화를 개봉하는 게 의미가 있다고 본다. <미지수>는 남녀의 이야기면서 가족의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권잎새_ 개봉을 손꼽아 기다리며 봄을 보냈다. 감기에 걸려 한동안 밖에는 잘 못 나갔다. 연습실에서 글 쓰며 지냈다.

 

글이라면.

권잎새_ 연극이나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는 걸 써보고 있다.

 

연출의 꿈도 있는 건가.

권잎새_ 먼 훗날? (웃음)

 

연습실은 어떤 공간인가.

권잎새_ 집을 제외하면 거의 연습실에서 시간을 보낸다. 가서 그냥 누워있기도 하고 영화도 본다. 일단 나가 있으면 조금이라도 연습하게 되니까 꼭 가려고 한다. 이사는 종종 다녔지만 연습실은 지난 10년간 옮기지 않았다.

 

영화 보고 울었다는 반응이 꽤 있더라. 감독이랑 배우도 많이 운 것 같던데.

이돈구_ 자기 영화 보고 우는 감독님들은 거의 없을 거다. 나도 그랬다. 내 전작들 보고 운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해봤다. 극장에서는 DI가 어떻게 됐는지, 사운드 수정할 데는 없는지만 생각한다. 그런데 <미지수>는 좀 다르더라. 이상하게 젊은 날의 내가, 열정을 다해 누군가를 좋아했던 그때의 내가 생각나서 알 수 없는 울음이 났다. 슬픈 건 아니었다. 계속 운 거 아니다. (웃음) 극장에서 처음 봤을 때 살짝 눈물이 맺힌 정도? 처음 해보는 경험이었다.

권잎새_ 난 볼 때마다 운다. (웃음) 근데 나도 내 영화 보고 운 적이 없었다. 감독님이랑 비슷하다. 여기서 호흡을 이렇게 써야 하는데, 하며 보는 거다. 그런데 <미지수>를 볼 때는 어느 순간 내가 아니라 영화를 보게 된다. 두 번째 봤을 땐 거의 오열했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시온 오빠랑 같이 앉아서 봤는데 둘 다 울었다. 인물들의 정서와 이야기를 다 느끼면서, 영화에 풍덩 빠져서 그렇게 보게 되더라.

<미지수>
<미지수>

볼 때마다 같은 부분에서 눈물이 나는지.

권잎새_ 비슷한 지점에서 마음이 울렁울렁해지며 눈물이 난다. 초반에는 사건이 벌어지기 때문에 인물의 깊은 내면이 잘 안 보이는데, 퍼즐이 맞춰지는 순간이 오면 그때부터 마음이 동한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가늠이 잘 안되는 초반에도 외로움이나 슬픔 같은 인물들의 감정은 꽤 진하게 다가온다. 다만 과장해서 표현하지 않는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돈구_ 특별히 어떤 감정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장면을 디자인하지는 않았고, 그냥 솔직하게 상황과 행동을 나열하려고 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더 외로워야 한다거나 이쯤에서 더 슬퍼야 한다는 식은 아니었다. 그저 계단을 오르듯 인물들이 놓인 상황, 장면만 생각하며 올라갔다. 사실 되게 플랫하게 생각했다. 아마 성향인 것 같다. 신파 같은 이야기를 선호하지 않는 편이고, 특정한 장면을 위해 영화를 만들지도 않는다.

 

<미지수>는 감독의 개인적 경험에서 출발한 영화라고. 장르적 색채가 강했던 기존 작업과 꽤 달라 보이지만, 인물의 얽힘과 정서를 깊이 다룬다는 점에서는 전작들과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돈구_ 출발은 기존 방식과 다르지 않았다. 난 항상 내 이야기로 시작하거든. 오래 알던 친구를 잃고 상실감을 느끼는 순간이 있었다. 그런데 개인적인 이야기로 끝낼 게 아니란 생각이 들더라. 그런 감정에 공감할 사람들이 더 있나 눈을 돌리게 됐다. 상실을 이야기하면서,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뜬금없는 살인사건으로 궁금증을 증폭하는 지금의 구조는 어떻게 만든 건가.

이돈구_ 원래 스릴러를 좋아한다. 평범한 일상생활 말고, 지수의 상황을 영화적으로 더 확 보여줄 방법을 고민하다 그런 스릴러적인 부분을 자연스럽게 가지고 왔다.

 

권잎새 배우는 오디션을 통해 합류했다고. 오디션에서는 시나리오의 일부만 보게 되는데, 당시 연기한 장면을 기억하나.

권잎새_ 감독님 전작인 <팡파레>를 보고 나서 오디션 대본을 받았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웃음) 대본은 내가 욕조에서 눈을 뜨고, 옆에서 우주가 칼을 찾는 상황을 그리고 있었다. 속으로 ‘지금 누가 죽었네. 일단 죽고 시작하네. 큰일이네.’ 했다. 무서워서 막 울었다. 그랬더니 감독님이 다시 살아난다고 하시더라. 무슨 소리인가 했다. (웃음) 시나리오의 다른 부분이 너무 궁금해졌다.

이돈구 ⓒ이영진

첫인상이 꽤 강렬했겠다.

권잎새_ 감독님과는 이미 아는 사이였다. 감독님은 좀 특이하고 재밌는 분이다. 감독님 전작을 보면서는 영화 톤이 되게 무섭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미지수> 시나리오는 좀 달랐다. 슬프고 외롭더라. 시나리오도 울면서 읽었다.

 

권잎새 배우와 함께 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뭔가. 지수라는 캐릭터를 생각할 때 원했던 지점이 있었을 텐데.

이돈구_ 일단 연기를 잘 한다. 그게 가장 중요했다. 권잎새 배우는 생각보다 되게 대범하다. 그런 성격으로는 안 보이는데 막상 두려움이 없더라. 오디션 볼 때도 그랬지만 그전에도 느껴졌다. 에너지도 참 좋고. 안 할 이유가 없었다. 시나리오 쓸 때는 배우를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다만 ‘우리들의 여자 친구’ 같은 지수를 찾고 싶었다.

 

방금 권잎새 배우가 엄청나게 좋아했는데.

권잎새_ 그동안 여러 작업을 하면서 누군가의 연인을 연기해 본 적이 거의 없다. 멜로가 없었지. 나한테 여자 친구 같은 느낌이 없는 건가? 그런 역할과는 거리가 좀 먼가? 싶어서 고민이었다.

 

이돈구 감독은 다섯 편의 장편을 만들면서 줄곧 다양한 배우들과 함께했다. 배우를 만나고 함께 작업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 있다면.

이돈구_ 일단 영화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게 배우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배우를 선택할 때 특별한 기준이 있는 건 아니다. 우선 작품과 잘 어울리는지를 본다. 사실 연기 잘하는 게 중요해서 배우의 전작을 쭉 보면서 체크한다. 그렇게 함께 하기로 하면, 처음에 이미지가 좀 안 맞았더라도 배우가 어느새 그 캐릭터의 모습으로 현장에 온다. 정말 신기하다.

 

권잎새 배우는 <순환소수>(정승오, 2017), <할머니의 외출>(장병기, 2019) 등을 시작으로 여러 독립영화에 출연하며 꾸준히 다작 중이다. 작품을 결정할 때의 기준이 있나.

권잎새_ 독립영화가 다루는 일이 현실적이다 보니 비슷하게 겹치는 캐릭터를 연기하게 될 때가 많다. 그래서 좀 더 재밌는 역할, 평범한 줄 알았는데 반전 매력이 있는 캐릭터에 눈길이 더 가는 듯하다. 분석을 진짜 열심히 하는 편이다. 캐릭터에 접근하는 방법은 그때그때 다르게 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정서가 중요하다고 판단하면 그 정서가 있는 곳에 가서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림을 그려보기도 하는 식이다. 결과적으로 어떤 느낌이 나와야 하는지 계속 생각하며 접근하려고 한다.

 

지수는 어땠나. 그리움처럼 영화의 중심이 되는 감정을 계속 간직하면서도 한 번에 폭발하지는 않아야 하는 역할이다. 단단한 표면 아래 일렁이는 감정을 조금씩 표현하는 연기는 권잎새 배우의 강점이기도 한데.

권잎새_ 지수는 엄청나게 특별한 인물은 아니다. 아마 지수의 감정에는 누구든 공감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걸 계속 느끼고 있으면 너무 소모적일 것 같아서 오히려 깊게 빠져들지는 않으려고 했다. 대본을 너무 많이 읽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익숙해져 버리면 안 될 것 같았다. 시온 오빠랑 대사를 주고받는 정도만 연습했고 그 외의 시간에는 라이트하게 보려고 노력했다. 마지막 내레이션은 아예 안 읽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권잎새 ⓒ이영진

지금도 조금 울먹인다.

권잎새_ 눈물을 미리 흘려버리면 안 되니까, 안 읽으려고 했다. 역할에 가장 잘 맞는 상태가 되고 싶어서 요리조리 시도해 보는 거다.

 

이번에 찾은 방법은 ‘가뿐하게 움직이기’인 듯하다.

권잎새_ 지수라는 인물 자체가 되게 복합적인 상황에 놓여 있잖나. 그걸 다 담아서 연기하면 내가 너무 힘들어지고 무거워질 것 같았다. 일단 놓인 상황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 생각의 흐름을 찾는 게 첫 번째였다. 그렇다고 행동의 이유를 하나하나 다 찾으면 정말 못 움직이게 되더라. 그래서 최대한 상황에 충실하려고 했다.

 

감독은 배우들한테 영화에 관해 많이 설명하는 편인가?

이돈구_ 대본을 주니까 더 할 얘기가 없다. 물론 대본에 대한 디테일한 이야기는 나눈다. 근데 개인적인 사건으로 인해 이걸 시작했고,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는 안 한다. 배우들은 딱 그 인물로만 있으면 되니까.

 

성향인 것 같다. 구구절절한 걸 싫어하는 것 같은데.

이돈구_ 현장에서도 별로 말이 없다. 우스운 농담은 많이 한다.

권잎새_ 이렇게 농담이 많은 현장은 처음이었다.

이돈구_ 농담에 관심이 많다. (웃음) 이전 작품을 할 때도 그랬는데, 프리 단계에서 이미 다 끝내놓는다. 소품 하나까지 다 끝내놓고 촬영에 들어간다. 그러면 현장에서 할 얘기가 없어진다.

 

연습 과정이 굉장히 중요하겠다.

이돈구_ 한두 달 정도 일주일에 한두 번씩 만나서 계속 연습한다.

 

그 과정에서 분명해지는 건 무엇인가.

이돈구_ 심플하게는 동선 같은 걸 맞춰보는 거다. 그런데 그걸 떠나서 배우들이 서로에게 익숙해진다. 그게 중요하다. 우주와 지수가 정말 친해지길 바랐다.

권잎새_ 아직도 시온 오빠는 나를 간간이 지수라고 부른다.

이돈구_ 안 친해지면 어쩌나 고민했는데 다행히도 정말 가까워지더라. 그게 가장 큰 목적이고 또 가장 큰 수확이다.

<미지수>
<미지수>

웃음 많은 현장을 만든 비결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돈구_ 현장이 힘드니까 자꾸 웃기려고 했던 것 같다. 현장은 안 힘들 수가 없다. 시간에 쫓길 수밖에 없으니 계속 예민해진다. 챙겨야 할 것들이 정말 많다. 근데 계속 그러고 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유연해지려고 노력하는 거다. 아직 내공이 부족하다. (웃음)

권잎새_ 시나리오에 대한 첫인상도 실은 유머러스하다는 거였다. 감독님이 원래 유머러스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웃겼다. “여기서 이런 말을 한다고?” 싶은 거 있잖나. 지금도 돌이켜보면 정말 재밌다. 여전히 <미지수>를 생각하면 그리운 마음이 든다. 내가 사랑했던 것들, 아끼는 사람들에 대한 그리운 마음이 똘똘 뭉쳐있는 느낌이라고 할까. 촬영 끝났을 때 너무 아쉬웠다. 안 끝났으면 좋겠더라. 촬영이 끝나면 “이제 안녕”하고 다음 작품을 해야 하는데, 지수는 아직도 나한테 계속 남아있다.

이돈구_ 보통은 배우와 스태프들이 떠나고 감독이 영화를 계속 안고 사는데. (웃음) 그런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는 게 정말 고맙다. 보람도 느껴지고.

 

권잎새 배우가 짚어준 유머는 <미지수>의 독특한 매력이기도 하다. 미묘하게 어긋나는 상황과 대사가 웃음을 부른다.

이돈구_ 내 초창기 영화들에는 유머가 없다. 좀 건조하달까. 근데 <팡파레>를 보고 관객분들이 막 웃으시더라. 거기에 맛 들였다. (웃음) <봄날>도 많이들 웃으며 좋아해 주셨다. <미지수>는 유머를 적극적으로 의도한 작품은 아니다. 다만 너무 진지해지고 싶지 않았다. 정통으로 하면 한없이 무거워질 수 있는 주제인데, 그러고 싶지 않더라. <미지수>를 만드는 시간에 대한 내 기억이 그렇게 어둡게 남지 않기를 바랐던 듯하다. “여기서 이렇게 하면 진짜 웃기겠지?” 하면서 만든 건 아니고, 너무 무겁게 하고 싶지 않다는 바람에서 생겨난 장면들이라고 본다.

 

전작을 함께 한 김철환 음악감독과 이번 작업도 같이 했다. <미지수>의 미묘한 리듬에는 음악도 큰 역할을 한다.

이돈구_ 감독님이 시나리오대로 음악을 안 만들어준다. (웃음) 근데 영상에 넣어보면 언밸런스하면서 재밌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창작자의 즐거움이다. 그걸 다들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 관객을 염두에 두는 건 물론 중요하지만, 창작자의 마음에 들고 내가 만족하는 결과물을 만들어야 관객분들한테 소개할 때도 부끄럽지 않다. 음악감독님은 영화에 젖어서 음악을 엄청 많이 만들어서 보내주는 스타일이다. 그러면 내가 장면에 어울리는 음악을 3~4곡씩 배치하고, 감독님이랑 같이 최종 결정을 한다.

권잎새_ 나머지 음악은 어떻게 되는 건가?

이돈구_ 감독님 외장하드에 있겠지. (웃음)

 

<미지수>는 SF로도 볼 수 있는 영화다. 현실적으로 말이 되게 이어지지 않는 부분들이 곳곳에 있다. 일상적 세계와 우주적 시간이 뒤엉키고, 다른 차원에서 우리의 현실을 들여다보는 느낌이라고 할까. 감독에겐 우주적인 관점에서 삶을 보는 건 어떤 의미인가.

이돈구_ 그동안 되게 명확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근데 상실감을 겪고 나니까 그게 흔들리더라. 내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하철을 타도 그렇고 어딜 가더라도 추억이 계속 같이 떠올랐다. 몽환적으로 뒤엉켜 있었다고 할까. 그런 정체를 알 수 없는 삶의 결이 영화에 투사된 게 아닌가 한다. 그렇게 <미지수>의 현실 세계도 현실적이지 않은 느낌이 됐다. 사실 우주를 무서워한다. 우주 포비아가 있다. 심해를 무서워하는 사람은 많은데 우주를 무서워하는 사람은 별로 없더라. 우주에는 죽어있는 게 너무 많잖나. 그런 두려움, 알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막역함이 치킨집 사장 기완(박종환)이나 지수의 마음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주를 가져오게 됐다.

 

그런데 영화에 우주 장면을 넣었다. 두려움을 직면하고 싶었던 건가?

이돈구_ 현실적인 우주는 아니다. 약간 애니메이션처럼 귀엽게 그려지지 않았나? (웃음) 나는 항상 내가 직면한 극한의 공포를 영화로 옮기는 작업을 해왔다. <미지수>도 그렇다.

 

줄곧 인물들의 얽히고설키는 관계를 다뤄왔다. 주제가 달라져도 그 부분은 늘 중심에 있었던 듯하다. 이유가 있나.

이돈구_ 배우를 중요하게 생각해서인 듯하다. 배우들이 서로 엉켜서 뭔가 풀어나가고 이야기하는 현상 자체를 좋아한다. 일반적으로 두 명 이상만 모이면 서로 거미줄 같이 엉킨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여러 정치적 관계가 생긴다. 인간은 다 그런 것 같다. 예민하게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그런 관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 데 호기심이 많다. 저 사람들의 관계는 무엇일까, 저 사람은 오늘 이 상황에 놓이기까지 어떤 역사를 지녀왔을까. 그래서 누구를 특별히 미워하지 않게 된다. 다들 사정이 있거든. 그런 호기심이 시나리오에 많이 드러나는 것 같다.

<미지수>
<미지수>

배우 역시 인간을 면밀히 관찰하고 궁금해하는 사람들이잖나.

권잎새_ 난 요새 타인을 알 수 없다는 생각을 진짜 많이 한다. 그래서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된다고 다짐하게 된다. 예전에는 은연중에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구나, 저 사람은 저렇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요즘은 그 누구도 파악할 수 없다고 느낀다. 그렇구나, 그래 그럴 수 있지, 딱 그 정도.

 

여러 인물을 다루다 보면 구조를 만들고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도 꽤 어려울 텐데, 보통 어떤 방법을 쓰나.

이돈구_ 구조 잡는 데 시간을 오래 쓴다. 펜으로 메모하는 편이다. 인물과 구조가 잡히면 시나리오 쓰는 데는 오래 안 걸린다.

 

두 사람은 <미지수>의 어떤 장면을 가장 좋아하나.

권잎새_ 연기할 때는 모든 장면이 똑같이 애틋했다. 그중에서 다리 위에서 우주와 같이 뛰어다니며 노는 장면을 좋아한다. 우주와 지수의 행복했던 시간이니까.

이돈구_ 나도 그 장면이 계속 생각난다. 반시온 배우가 권잎새 배우를 업고 걷는 장면을 작은 모니터로 보고 있었는데, 두 사람 표정이 너무 순수해서 슬펐다. 치킨집에서 찍은 장면들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박종환 배우와 양조아 배우의 에너지가 엄청 좋았다. 내가 뭘 할 필요가 없겠다, 잘 담기만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배우를 정말 좋아한다는 게 느껴진다. 배우 때문에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돌려보던 어린 시절이 있는 거 아닌가.

이돈구_ 그랬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웃음) 영화는 고등학교 때부터 봤다. 원래 되게 활동적인 사람이었다. 춤을 췄거든. 온종일 춤만 추던 아이였고, 영상 매체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러다 어떤 계기로 연기를 하게 됐다. 아는 형 캠코더를 빌려서 친구들이랑 찍고 그랬는데,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어설프게 편집도 하고 음악도 넣어봤다. 너무 재밌고 설렜다. 잠을 못 잘 정도였다. 직업이 될 줄 몰랐는데 어느새 영화를 만들고 있더라.

 

연기를 더 해 볼 생각은 안 했나.

이돈구_ 내가 잘하는지 모르겠더라. 그때는 또 영화를 직접 만드는 배우가 거의 없어서 앞이 좀 캄캄하기도 했다. 뭘 해야 하는데 할 수 있는 게 없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친구들 데리고 나가서 영화 찍고 그랬다. 살아있는 것 같았다.

이돈구 ⓒ이영진

권잎새 배우는 연기하기로 결심한 계기가 있나. 눈에 띄는 이력 중 하나는 <프로듀스 101> 출연인데, 그 전부터 뮤지컬을 했다. 연기에 대한 열망이 항상 있었던 듯한데.

권잎새_ 특별한 계기는 없다. 어릴 때부터 어렴풋이, 하지만 당연히 이 일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 어릴 때 찍은 사진을 보면 항상 가족 앞에서 끼를 부리고 있다. (웃음) 그런데 부모님은 반대하셨다. 엄마, 아빠가 원하는 대학교에 갔다가 자퇴했다. 그리고 부모님께 이제 연기하겠다고 선전포고했지.

이돈구_ 선전포고?

권잎새_ 이런저런 계획을 담은 7장짜리 글을 써서 드리고, 집에서 말도 안 하며 시위를 했다. 그러다 부모님이 어느 극단 대표님을 만나게 해주셨다. “너는 연기 못 해”라는 말을 들을 줄 알고 그러셨다더라. 근데 그분이 나보고 주인공감이라고 하신 거지. 거기서부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입시도 준비했는데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그때는 막 시작할 때라서 일주일만 해도 연기가 느는 게 보였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으면 붙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잠도 안 자고 연습했다. 새벽에 주차장에서 몰래 연습할 정도였다.

 

두 사람의 에너지가 좀 비슷한 듯하다. (웃음) 연기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끼나.

권잎새_ 일단 너무 재밌다. 현장에서 받는 에너지가 정말 크거든. 또 다양한 역할을 만나서 하나하나 내 것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좋다. 퀘스트 깨는 느낌, 계단을 오르고 산을 정복하는 기분이다.

 

좋은 현장은 무엇인지 늘 궁금하다. <미지수> 촬영 현장에서 갑자기 비가 내려서 양조아 배우가 걱정하고 있는데, 감독이 “괜찮아요. 다 되게 되어있어요.”라고 말한 게 기억에 남았다고 하더라.

이돈구_ 배우들은 절대 그런 걸 신경 쓰면 안 된다. 물론 나는 조급했다. 하지만 배우들한테는 안정감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현장에서는 천천히 말하는 편이다. 그리고 실제로 다 된다. 더한 일도 많이 겪어봤다. 차가 뒤집힌 적도 있는걸. 이건 안 된다, 접어야 한다 싶은 일도 있었지만 결국 다 되더라.

권잎새_ 생각해 보니 진짜 천천히 말씀하셨다. 난 되게 여유 있던 현장으로 기억한다. 시간이 오버된 적도 없었다.

이돈구_ 오히려 더 일찍 끝났지.

권잎새_ 난 그래서 아쉬웠다. (웃음) 편안하고 평온한 현장이었다.

 

뒤에서는 엄청난 노력을 했던 거고.

이돈구_ 사실 성격이 급하다. 처음에는 성격대로 일을 했다. 그랬더니 배우들도 스태프들도 좀 불안해했다. 그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는 걸 알고는 그러지 않으려고 한다. 지금도 방법은 찾는 중이다. 조금이라도 배우가 더 집중할 수 있게 하려고 한다.

 

<미지수>를 통해 변화한 부분이 있다고 느끼나. 이 영화는 각자에게 어떤 의미인가.

이돈구_ 일단 콘티 없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게 큰 변화다. 원래 콘티 작업을 시나리오보다 더 오래하고, 콘티 그대로 찍는 스타일이거든. 그런데 너무 콘티에 갇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딜레마였다. 이번에는 본능적으로 지수와 우주를 콘티에 가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이 더 자유롭게 이야기하며 서로를 살폈으면 좋겠더라. 배우들이 자유롭고 현장감이 살아있는 느낌이 참 좋았다. 인간적으로는 세상에 아직 나를 아껴주는 사람이 많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진심으로 하게 됐다. 이 이야기를 다른 분들이 공감해 줄 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듯하다. 거창한 얘기일 수 있지만, 이 영화가 나를 성장하게 했다고 생각한다.

권잎새_ <미지수>는 내가 주연을 맡아 처음으로 개봉하는 영화라서 되게 특별하다. 벅차기도 하고 정말 소중하다. 최근에 감독님이 나한테 건강한 배우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계속 건강하게 연기를 해나가고 싶다. 단단하고 바람직하게, 또 즐겁게 하고 싶은 연기를 해나가면서 살고 싶다.

 

좀 더 시도해 보고 싶은 게 있다면.

이돈구_ 일단은 작업을 계속하는 게 목표다. 항상 글을 쓰고 있다. 거의 다 써가는 시나리오가 하나 있다. 좀 더 익사이트한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고, 상업적인 이야기도 풀어보고 싶다. 어디 갇히지 않고 자유롭게, 또 도전적으로 해나가고 싶다.

권잎새_ 내가 쓴 극을 무대에 올리고 싶은데, 아마 내년에는 가능하지 않을까. 요새는 당구를 잘 치고 싶어서 영상을 열심히 보고 있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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