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앞에서 멀쩡한 사람이 있을까. 적당히 아프면 좋을 텐데, 누군가는 모조리 고장 나 버린다. 일을 마치고 귀가한 지수(권잎새)는 헤어진 애인 우주(반시온)의 신발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그는 허락도 없이 지수 집에 들어왔을 뿐만 아니라, 화장실에 죽은 친구 영배(안성민)를 눕혀 놓기까지 했다. 잠시 후 태연히 몸을 일으킨 영배를 보며 지수는 안도하지만, 우주의 기행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또다시 영배를 죽였다며 실수라고 변명하더니, 급기야 제 어머니 선애(윤유선)의 시체까지 지수 집에 옮겨 놓는다. 지수가 성질을 부릴 만도 하다. “왜 나를 찾아와서 이렇게 미치게 만드는 거야?” 한편, 악몽에 시달리던 기완(박종환)은 땀에 푹 젖은 채 잠에서 깬다. 아내 인선(양조아)과 작은 치킨집을 운영하는 그의 최대 관심사는 장사가 아닌 우주다. 꿈에선 우주를 헤매느라 정신이 없고 현실에선 누리호 발사 뉴스에 집착한다. 비가 온다며 배달 주문을 모조리 거절하는 기완에게 인선이 원망을 쏟아 낸다. “그 사고가 오빠 잘못이야? 산 사람은 살아야 할 거 아니야!” 대체 이게 다 무슨 이야기일까. <미지수>는 실체와 진위가 불분명한 상황을 연달아 제시한다. 지수는 밥 먹듯 죽음을 겪고, 기완은 현실과 비현실을 분간하지 못한다. 그러나 접점이 없는 인물들과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은 서서히 같은 궤도에 진입한다. 지수와 기완, 두 사람 다 고장 난 상태다. 영화는 우주를 상실한 이들의 마음속을 표류한다.
<미지수>에서 우주는 다의적 존재다. 우주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 그가 살았고 그와 함께했던 세계, 그리고 항공 발사체를 쏘아 올리는 미지의 영역 모두 우주라고 불린다. 한 사람으로 범위를 좁혔을 때조차 관계 맺는 상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지수에게는 애인이고 기완에게는 배달 직원이며, 선애에게는 아들이다. 영화는 그토록 거대한 우주가 사라진 이후의 시간을 담는다. 기억과 환상이 뒤섞이고 그리움과 죄책감이 맞물린다. 이는 곧 남겨진 사람들이 수시로 맞닥뜨리는 트라우마에 관한 묘사다. 연인과 마지막 인사를 제대로 나누지 못한 지수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우주를 재차 소환한다. 퇴근하려는 우주를 붙잡아 빗길에 배달을 부탁했던 기완은 이제 화창한 날에도 빗소리를 듣는다.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막지 못한 선애는 전시 상황에 대비하여 베란다에 장총을 세워 둔다. 그중 무엇이 실제로 벌어진 일인지, 얼마나 사실에 가까운지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실연이 몰고 온 어둠 속에서 인물들은 각자 가정법을 사용하는 중이다. 만약 내가 그랬다면, 혹은 그러지 않았다면 네가 여전히 내 곁에 있을까. 가정법은 미련과 후회에 기반한 말하기다. 인물들은 우주를 붙잡아 보고자 ‘만약’으로 시작하는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그러한 상상 속에는 우주를 향한 애정과 슬픔이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우주에 관한 폭넓은 증언이 포함된다.
<미지수>는 <가시꽃>(2013), <현기증>(2014), <팡파레>(2020), <봄날>(2022)에 이은 이돈구 감독의 다섯 번째 장편영화다. 폭력과 공포 등 인간 내면에 자리한 암흑을 집요하게 파고들던 감독은, 신작에서 상실과 그에 따른 혼란을 그리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성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만큼 심각한 고통에 무너진 인물을 대변하듯 서사는 개연성을 잃은 채 조각나 있다. 파편으로 흩어진 이야기들은 차츰 한자리에 모여 맥락을 구성하지만, 영화는 끝내 인물들의 트라우마 증상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찾는 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미지수>는 SF적 표현을 통해 앞뒤 안 맞는 상상을 증폭시킨다. 웜홀을 마주한 우주비행사의 두려움을 비추거나 붕괴 직전의 아파트 위로 폭격을 퍼붓는 식이다. 의도적으로 어긋난 사운드, 일상 공간에 배치한 비일상적 풍경, 아이러니한 질의응답 등 또한 상실감을 강조하는 장치다. 영화가 주로 시선을 던지는 대상은 연인을 잃은 지수이지만, 우주의 죽음이 일터와 가정에서 재현됨에 따라 상실감은 좀 더 확장된 형태로 그려진다. 우주는 안전망 없이 일하다가 길에서 목숨을 잃은 청년 노동자이자, 부모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아이다. 영화는 자연스레 영화 바깥에 넘쳐나는 참사와 연결고리를 만들어 낸다.
다소 얼기설기 엮어 간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지만, 후반부로 접어들고 나면 <미지수>는 상실을 넘어 회복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얼마간 고립을 자처하며 홀로 이별을 감당하던 인물들은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기완 옆에는 그만큼이나 괴로워하는 인선이 함께 버티고 있으며, 지수는 선애를 찾아가 끌어안는다. 그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우주가 건넨 방정식에 답한다. 내 삶에서 너를 빼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 미지수를 구하는 일은 요원하고 방정식을 푸는 일은 사는 내내 과제가 될지 모른다. 다만, 영화는 우주라는 사람이 사라져도 광활한 우주는 남아 있다고, 그곳 어딘가에 우주가 살아 숨 쉬는 세계 하나쯤 있을 거라 믿는 것도 괜찮지 않으냐고 묻는다. 혼란과 슬픔에 갇혀 한참 우왕좌왕하던 이들은 커튼을 열어젖히고 먼 곳을 응시한다. 아마도 눈길이 닿는 곳에 우주가 있기를 기대하면서.
형식적 실험과 비유가 가득한 작품에서 배우들은 저마다 보편성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은 영화의 불친절한 도입부를 견인할 뿐만 아니라, 서사의 공백을 메우며 내밀한 감정을 설득하기에 이른다. 반시온이 해맑고 평범한 청년 우주를 연기하고 지수 역의 권잎새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이별을 헤아리는 사이, 기완을 맡은 박종환은 자포자기에 빠진 사람처럼 군다. 그는 후회와 분노에 압도당한 채 자신을 감옥에 가두고 스스로 벌을 주려 한다. 인선 역으로 등장한 양조아는 <가시꽃> <현기증> <팡파레>에 이어 이돈구 감독과 네 번째 호흡을 맞춘다. 인선은 단지 기완을 보조하는 역할이 아니라, 고통을 겪는 이들의 몸과 마음에 어떤 변화가 찾아오는지 드러내는 인물이다. 숨도 못 쉴 정도로 조마조마해하고 숨 좀 쉬자고 절규하며 양조아는 죽음의 무게에 짓눌린 상태를 생생하게 표현한다. 윤유선은 특유의 선한 이미지와 따뜻한 분위기로 극 전체를 아우른다. 우주와 작별하고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지수를 위로할 때, 선애는 안정감과 포용력을 갖춘 어른으로 보인다. 여기에 윤유선은 아이를 두 번 다시는 허망하게 잃지 않겠다는 절박함을 더하며, 영화에 예상치 못한 에너지를 심어 놓는다.
미지수 Unknown 감독 이돈구 출연 권잎새, 반시온, 박종환, 양조아, 윤유선 제작 DK FILM 배급 인디스토리 제작연도 2023년 상영시간 69분 등급 12세이상관람가 개봉 2024년 5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