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김금순)은 제 이름을 좋아했을까. 이름만큼 평범한 삶에는 대체로 만족했다. 태어나고 자란 지역에 평생 붙박였고, 남들처럼 결혼해서 애를 낳았다. 딸 유진(윤금선아)에겐 자신보다 세련된 이름을 지어줬다. 먼저 떠난 남편의 빈자리를 감당하는 사이, 딸은 훌쩍 커서 어느새 결혼을 앞두고 있다. 혼자 사는 정순의 하루는 단조롭다. 면허가 없는 엄마를 대신해 유진이 정순을 공장에 데려다주고, 교대 근무를 마친 후 집에 돌아온 정순은 TV를 보다 잠든다. 특별히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없는 일상에 바람이 불기 시작한 건 영수(조현우)가 공장에 신입 직원으로 오면서부터다. 영 숫기가 없는 데다 요령 부릴 줄도 모르는 그에게 눈길이 가서 몇 번 챙기다 보니 정순의 마음이 간지럽다. 남녀는 서로 친절을 베풀고, 장난치고, 남의 눈을 피해 한 이불을 덮는다. 하지만 어디서 잘못됐을까. 연애가 무르익던 어느 날, 기분 좋게 불던 산들바람은 예고 없이 돌풍으로 돌아온다. 속옷 차림으로 여관 침대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정순의 동영상이 일터에,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얼굴인 작은 동네에 퍼진다.
정지혜 감독의 데뷔작 <정순>은 중년 여성의 디지털 성범죄 피해를 주요 사건으로 다룬다. 자발적 촬영과 비자발적 유포 사이에서 피해 사실을 입증해야 하는 어려움에 앞서, 정순은 우선 본인을 가로막는 편견에 부딪힌다. 영화에서 50대 여성과 디지털 성범죄는 나란히 엮일 수 없는 것으로 치부된다. “아줌마가 빨개벗고 춤춰.” 정순의 동영상은 당사자가 인지하지 못하는 틈에 동료뿐만 아니라 딸의 직장 사람들에게까지 급속도로 퍼지는데, 동영상을 전달받은 이들은 대개 비슷하게 반응한다. 그들은 성범죄 영상을 본다거나 타인의 경계를 침범한다는 자각 없이 웃고 비아냥댄다. 경찰 역시 회의적으로 임한다. 보통의 경우처럼 도시에 거주하는 젊은 여성이 같은 피해를 겪었다면 훨씬 일이 복잡해졌을 거라는 그의 말은 사건 해결 과정에서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정순을 비롯한 특정 집단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영화는 50대 여성, 지역 소도시 주민, 공장 노동자, 엄마 등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의 보편적 이미지와 곧장 연결되지 않는 인물을 통해 사회에 만연한 고정관념을 파헤친다.


<정순>은 절제력이 돋보이는 영화다. 평범한 중년 여성과 동영상 유포라는 다소 엉뚱하고 난처한 조합이 흥미를 끌지만, 영화는 성범죄 사건의 자극적 요소에 몰두하지 않는다. 가해 동기와 과정 등은 뉘앙스로 처리할 뿐이고, 사건 이후 피해자와 가해자의 만남을 그리는 것도 최소한에 그친다. 파괴적 사건을 시시각각 쫓는 대신에 <정순>은 제목대로 정순이라는 한 인물에게 집중한다. 정순은 순식간에 많은 것을 잃는다. 심심할 만치 평온한 일상이 무너지고, 티격태격하면서도 살가운 딸과의 대화도 중단된다. 세상에 대한 기본적 신뢰를 상실한 나머지, 집안에 스스로 갇힌다. 정순은 창과 거울을 죄다 가리고 입을 다문다. 그렇게 자기 얼굴과 목소리를 지운 곳에서 정순이 고립을 자처하는 사이, 영화는 자책, 체념, 원망, 분노, 슬픔 등 그녀를 할퀴고 지나가는 다양한 감정을 포착한다. 물론 정순 곁에는 함께 싸우기로 각오한 딸 유진이 있고, 정순을 대신해 불순한 소문을 차단하는 동료도 몇몇 있다. 다만, 그 어떤 염려와 위로도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라는 듯 영화는 정순의 몫을 남겨둔다. 홀로 궁리하고, 가해자와 대면하고, 다시 세상에 나서기까지 정순은 더디게 힘을 낸다.
인물만큼 영화가 공들여 묘사하는 것 중 하나는 조직문화다. 정순이 일하는 식품 포장 공장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관리직과 생산직, 남성과 여성 등 계급 차이가 뚜렷하게 존재하는 곳이고, 이에 따른 위계질서는 폭력을 부추기고 방임하는 분위기를 마련한다. 젊은 관리직 남성 도윤(김최용준)은 권력의 상징과도 같다. 그는 자신보다 더 오래 일하고 나이가 많은 생산직 노동자를 상대로 고압적 태도를 유지한다. 반말과 명령 어투, 훈계를 빙자한 공공연한 모욕을 일삼는 그에게 전면으로 대항하기란 불가능하다. 도윤은 채용과 해고를 결정할 권한을 지녔으므로 사내 여론 또한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움직일 수 있다. 영화는 도윤과 영수를 통해 남성 세계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도윤의 직위는 영수의 나이를 깔볼만큼 막강하다. 영수가 도윤에게 덜 무시당하는, 그의 무리 속에 포함되는 길은 ‘여자와 섹스한 사실을 공유하기’다. 자존심을 지킨다는 핑계로 범죄를 저지른 후, 영수는 정순을 찾아가서 “우리 둘 다 벌어 먹고 살아야지”라며 선처를 바란다. 손쉽고 일방적인 반성은 무엇을 바꿔 놓을까. 몇 달이 지나서 겨우 용기 내어 외출한 날, 정순은 사건 이전보다 가깝게 어울려 다니는 두 남자를 목격한다.


빛이 꺼진 정순의 눈동자에 불길이 타오른다. 인내심을 갖고 정순을 지켜보던 영화는 후반부에 거대한 폭발을 비춘다. 그것은 단지 한두 명의 가해자를 향한 복수나 응징이 아니라, 주변 전체를 얼어붙게 만드는 선언이다. 청결을 강조하며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했던 공동체의 위선을 고발하는 몸부림이다. <정순>은 배우 김금순에게도 일종의 데뷔작이다.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장편영화에서 김금순은 한 인물을 정성껏 그려내며 극을 이끄는 역량을 증명한다. 그는 평범해 보이던 얼굴에 그늘을 뒤집어쓰는가 하면, 두려움에 떨면서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울부짖는다. 모녀 사이 보편적 애정과 갈등을 표현하며 관객이 이입할 만한 여지를 열어주다가 일순 돌변해 광기 어린 에너지로 긴장감을 빚어내기도 한다. 김금순이 보폭을 노련하게 조절하는 사이, 정순은 위축된 몸을 펼쳐 조금씩 제 이름과 자리를 찾아간다. 유진 역을 맡은 배우 윤금선아 또한 정순의 동반자로서 제 몫을 충실히 완수한다.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엄마를 다그칠지언정 엄마 앞에서 눈물 한 번 흘리지 않는 딸, 자신은 아무래도 괜찮다는 말을 주문처럼 외우던 유진은 영화의 행간을 채우는 중요한 존재다. 배우들의 열정적인 협업과 더불어, 인물과의 거리를 수시로 자문하는 듯 보이는 촬영도 언급할 부분이다. 캐묻고 질책하는 시선에서 벗어나 피사체를 존중하려 애쓰는 카메라는 영화의 주제를 든든히 뒷받침한다.
정순 Jeong-sun 감독 정지혜 출연 김금순, 윤금선아, 조현우, 김최용준 제작 시네마루 배급 더쿱디스트리뷰션 제작연도 2023년 상영시간 104분 등급 15세이상관람가 개봉 2024년 4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