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김금순)의 이름은 ‘정순하다’라는 단어에서 빌려 왔다. 마음이 곧고 정성스럽다는 뜻이다. 헛된 욕심을 거두고 남에게 피해 주지 않으며 이름처럼 바르게 살았던 그는 50대에 접어 들어서야 한숨 돌릴 여유가 생겼다. 먹고살기 바빴던 젊은 날과 마찬가지로 매일 공장에 출근 도장을 찍지만, 정순은 예전처럼 쫓기는 기분에 시달리지 않는다. 오히려 조금 외롭다. 딸 유진(윤금선아)이 결혼하고 나면 혼자 사는 집은 더 고요해질 테다. 정순에게 예기치 못한 불행이 닥치는 것은 그때다. 속옷 차림으로 찍은 동영상이 직장 동료와 이웃의 휴대전화에 퍼지면서 단조로운 생활은 무너진다. 하지만 <정순>의 주인공은 디지털 성범죄 사건이 아니라 정순이다. 영화는 정순을 둘러싼 소문을 헤집거나 애인과 가해자의 얼굴을 오가는 영수(조현우)를 뒤쫓는 대신에, 웅크렸다가 겨우 한 발짝 떼는 정순을 바라본다. 어쩌면 <정순>은 외로움에 관한 영화인지도 모른다. 함께 걷겠노라 약속한 이들과 손잡으려면 혼자 일어서야 하기에 정순은 한동안 외로운 시간을 통과한다. 그가 가능하면 덜 아프도록 영화는 정순 곁을 맴돌며 “멈춰서 들여다볼 시간”을 마련한다. 그토록 곧고 정성스러운 마음 씀씀이는 어떻게 갖출 수 있는지 궁금해 정지혜 감독에게 대화를 청했다.
<정순>으로 2022년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문 대상을 차지했다. 한창 영화에 몰입했던 시기의 나와 지금의 나는 꽤 다를 텐데, 이렇게 시차를 두고 개봉하는 기분이 어떤가.
영화 준비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감독님, 왜 이렇게 어려요?”였다. 사람들은 지금도 어린 나이라고 할 텐데, 당시엔 만으로 스물다섯 살이었다. 솔직히 그때만 해도 ‘내가 어리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 않나?’ 했다. 올해 개봉 준비하고 시사회에서 영화를 다시 보며 새삼 놀랐다. 나 진짜 어렸구나, 사람들이 놀랄 만했구나 싶더라. 어쨌든 시간이 지난 덕분에 영화를 관객으로서 볼 수 있게 됐다. 촬영 마치고 나서도 후반 작업 과정에 끝까지 참여하다 보니 한동안 객관화가 어려웠다. 이제야 영화가 영화로 좀 보인다.
그렇게 보는 <정순>은 어떤 작품인가.
마음 아픈 영화다. 이전에 <정순>은 내가 쓴 글이자 우리가 같이 찍은 작품으로 다가왔다. 작품을 설계한 과정과 현장 풍경이 자연스레 떠올라서 작업자의 시선으로 영화를 바라봤는데, 이제 와서는 그냥 정순이란 사람이 보인다. 너무 안타깝고 속상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정순을 보며 용기도 얻는다. 내가 시나리오를 썼지만 ‘왜 이렇게까지 정순을 힘들게 했을까?’ 하는 생각도 뒤늦게 든다.
<정순>은 정순이 이름 없는 존재로 취급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제목 같다. 영화에서 정순은 주로 엄마, 이모, 아줌마 등으로 불린다.
제목에 관해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도 주인공 이름을 그대로 쓰기보다는 좀 더 관객에게 힌트를 줄 만한 제목을 짓고 싶어서 계속 고민했다. 처음 주인공을 상상할 당시, 정순이라는 이름 자체가 인물에게 부여된 정체성을 의미한다고 봤다. 착하게 살아라, 순하게 굴어라. 그런 가르침이 정순을 가두는 틀이었던 셈이다. 근데 다른 제목을 궁리하며 이야기를 쓰는 사이, 문득 ‘정순은 정순으로 불리기조차 힘든 상황에 놓여 있잖아’라는 생각이 들더라. 정순이 자기 이름을 찾아가는 과정을 영화에 담겠다는 마음으로 제목을 <정순>으로 확정했다. 영화 막바지에 정순은 운전면허 시험에 도전한다. 그 자리에서 정순이 엄마나 이모, 아줌마 등이 아니라 “정순 씨”라고 불리는 모습을 영화에 남기고 싶었던 것 같다. 금순 선배님도 시나리오 보자마자 이름 얘기했다. 선배님은 예전에 본인 이름을 무척 싫어했다고 하더라. 왠지 정순도 그랬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금순 배우는 제목대로 “착하고 순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했다. 현장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고.
스태프들 연령대가 낮은 편이었다. 대부분 기존에 나와 작업을 함께했던 친구들이었고 시간 내어 현장에 도와주러 온 거였다. 전체 인원도 서른 명 미만으로 작은 규모였다. 그 가운데서 선배님들이 분위기를 잘 만들어주셨다. 금순 배우님과 선아 배우님이 다방면으로 살펴주셨고, 특히 <정순>으로 독립영화 현장을 처음 경험하신 현우 배우님은 사람을 불러 모으는 에너지가 엄청나게 좋으셨다. 촬영하면 다 같이 모이는 자리를 마련하면서 단역으로 온 배우님들도 빠짐없이 어울릴 수 있도록 신경 쓰셨다. 내가 도움을 많이 받았다. 장편 연출은 처음이라서 서툰 면이 있었을 텐데, 선배님들이 내색하지 않고 채워주셨다.
실제로 엄마와 공장에서 일하던 시기에 <정순>을 구상했다고 들었는데 자료 조사 목적으로 일했던 건가.
같이 일했던 것은 아니고 엄마에게 일을 추천받았다. 엄마가 공장에서 잠시 일했던 적이 있다. 영화에 나온 공장보다 규모가 큰 곳으로, 식품 가공 및 포장이 주 업무였다. 엄마가 근무할 당시, 난 고등학생이었기에 엄마가 공장에서 어떤 시간을 보내는지 세세히 알지 못했다. 대학 진학하고 나서 휴학 기간에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그 공장에 취직했다. <정순>에 대사로 나오지 않나. 방학 맞이한 대학생들이 목돈 벌려고 이곳에 많이 일하러들 온다고. 내가 그중 하나였던 거다.


공장 일은 어땠나.
각 업체에서 들어온 주문에 맞게 물량을 쳐내는 식이었다. 별의별 것을 다 만들었다. 정관장 건강제품, 컵밥에 들어가는 마파두부 소스, 라면 스프 등등. 엄마 생각이 나더라. 우리 엄마가 이런 환경에 놓여 있었구나, 하루를 이렇게 보내겠구나. 같이 일하는 분들 대부분은 엄마와 비슷한 또래의 여성들이었다. 그분들을 지켜보며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정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딸의 시선으로 중년 여성 노동자를 관찰하는 순간이 많았을 텐데, 영화는 오히려 유진이 아닌 정순에게 초점을 맞춘다.
공장에 들어가면 이모들이랑 붙어서 보통 12시간씩 일한다. 말 그대로 반복 작업이다. 뭔가를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지만, 어떻게 보면 딴생각을 하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몸에 저장된 리듬에 맞춰서 동일한 동작을 반복하면 되니까. 같이 일하는 이모들이 자꾸 눈에 들어오더라. 아무래도 연령대와 입장이 다르다 보니 색다르게 다가오는 면이 많았고, 인물마다 지닌 개성과 특징이 흥미롭기도 했다. 난 엄마의 삶을 전해 들으며 자라난 딸이다. 이모들과 휴게 시간에 대화를 나눠 보면 우리 엄마와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삶의 경험이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그런 이야기가 자연스레 내 안에 쌓였던 것 같다. 시나리오를 쓸 때만 해도 중년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가 많지 않았기에, 내가 그걸 한번 해보고 싶다는 마음도 생겼다.
디지털 성범죄를 다루면서도 사건의 자극성을 쫓는 기색이 없다. 피해와 가해 구도에 휩쓸려 가기보다는 인물을 우직하게 따라가는 뚝심이 돋보인다. 첫 장편을 만드는 감독으로서 조바심이 날 법도 한데, 어떻게 자신을 다독이며 침착함을 유지했는지 궁금하다.
부산 동서대학교 영화과를 졸업했다. 임권택 감독님이 석좌 교수님으로 계신 학교이고, 김대승 감독님께 영화를 배웠다. 두 분의 영화와 연출에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 김대승 감독님이 임권택 감독님 작품을 레퍼런스 삼아 연출 수업을 진행하시기도 했고. <정순> 촬영 직전에 김대승 감독님을 찾아갔다. 단편영화 작업과는 전혀 다를 것 같아서 걱정이 컸다. 현장에 가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여쭤봤는데, 감독님이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만약에 네가 두 인물의 사랑을 찍고 싶다면 사랑이 아니라, 사랑에 흔들리는 배우들의 표정을 카메라에 담아야 한다. 바람을 찍고 싶다면 바람이 아니라, 바람에 흔들리는 낙엽을 봐야 하는 거다. 그때까지 기다려라.” 현장에서도 그 이야기를 떠올리며 감독님의 가르침대로 진행하려고 했다. 무엇보다 함께한 배우들 모두 경험이 풍부한 분들 아닌가. 인물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배우들의 의견을 제한하지 않고 최대한 수용하고자 했다.
감독이 염려한 대로 장편은 작업 규모와 내용, 현장 운영 방식 등 단편과 여러 면에서 차이가 난다. 예기치 못한 변수가 발생한 적도 많을 텐데.
나름 차분히 대응하려고 했는데 잘 됐는지는 우리 스태프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다. (웃음) 변수가 많아도 너무 많은 현장이었다. 제작비가 워낙 적은 데다 코로나19가 가장 심한 시기에 촬영을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진혁 촬영 감독과 사전 준비를 촘촘하게 했다는 점이었다. 콘티 작업에 한 달 넘는 시간을 할애했고, 그와 동시에 콘티에만 매몰되지 말자고 약속했다. 우리 스스로 가장 경계했던 부분이다. 너무 경직되지 말자. 이번 현장에서는 우리가 단편 찍듯이 할 수 없을 거다. 배우들의 동선이나 감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카메라가 최대한 비켜주며 유연하게 움직여야 한다. 그렇게 둘이 다짐하고 촬영에 들어갔다.
정진혁 촬영 감독도 장편 촬영은 처음이었나.
맞다, 그 친구에게도 데뷔작이었던 셈이다. 지금껏 단편 작업을 해오면서 학교라는 틀을 무시할 수 없었다. 각자 연출과 촬영의 기본을 익히고 훈련하는 시간을 거쳤던 거다. 이번에는 우리가 하고 싶은 걸 해보자고 욕심을 냈다. <정순>의 경우,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만들어지는 것들을 잘 담아 내자는 목표로 임했다.

공장, 경찰서, 여관, 폐차장 등이 주요 공간으로 등장한다. 팬데믹 상황에서 로케이션 섭외하기가 만만치 않았을 듯한데.
내 고향이자 부모님이 거주하고 계신 양산에서 촬영 대부분을 진행했다. 엄마와 지인 찬스로 운 좋게 공간 섭외를 마쳤다. 다들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신 덕분에 촬영도 원활했다. 실은 공장을 못 구해서 촬영이 밀릴 뻔했는데 촬영 딱 일주일 남겨 놓고 해결했다. 다만, 관공서 섭외는 정말 어렵더라. 경찰서는 미술 감독이 빈 공간을 미술로 채워서 만든 거다. 아, 미술 감독도 <정순>이 첫 장편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 촬영 감독, 미술 감독 등 각자의 처음을 모아서 완성한 작품이다. 금순 선배님한테도 첫 장편 주연작이었고.
말이 나온 김에 영화의 첫 장면도 말해 보면 좋겠다. 힘을 주지 않고 흘려보내듯 주고받는 대사들이 곳곳에 있는데, 그중 오프닝에서 모녀가 나누는 대화가 기억에 남는다. 너무 익은 김치가 처치 곤란이라는 딸에게 엄마는 이것저것 넣어서 찌개를 끓이라며 해결책을 일러준다. 피로와 평온이 동시에 묻어나는 장면이다.
그 대사는 전부 배우들의 애드리브다. 그날 마지막 촬영으로 오프닝 신을 찍었다. 유진이 운전하는 트럭에 카메라를 거치해 놓고 동네 한 바퀴 돌았다. 카메라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이야기 나눠 달라 부탁드렸다. 나중에 편집 과정에서 전체 영상을 확인한 후, 그 부분을 선택하게 됐다.
오프닝과 엔딩은 수미상관 구조를 이루고, 엔딩에서는 운전대를 잡은 사람이 정순으로 바뀐다. 주체성을 회복하는 행위로 운전을 선택했던 특별한 이유가 있나.
내가 면허가 없어서 답답했던 순간이 많다. 이동 범위가 좁아지거나 선택지가 줄어들더라. 수동적인 내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얼른 면허를 따야 하는데…’ 생각했고, <정순> 시나리오에 그런 개인적인 감정이 들어간 것 같다. 정순은 운전을 배워서 자신이 원할 때, 원하는 곳으로 가기를 바랐다. 편집 과정에서 삭제한 대화 중 그런 게 있다. 정순이 여느 날처럼 유진 차를 타고 출근하는 길에 넌지시 말을 꺼낸다. 얼마 전 직장 동료가 면허를 따서 쉬는 날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던데 좋아 보이더라. 나도 한번 해볼까. 그렇게 정순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모습이 영화 마지막에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50대 여성과 디지털 성범죄는 언뜻 엉뚱한 조합처럼 다가오지만, 영화는 이를 친밀한 관계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범주로 바라보며 일상적 장면을 포착한다.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에서 어떤 고민을 했나.
시나리오 피드백하는 과정에서 “사건 이전을 이렇게까지 길게 다룰 필요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시점을 사건 발생 직후로 옮겨서 이야기를 시작하면 영화가 훨씬 강렬하지 않겠냐는 의견도 나왔고. 내 생각은 달랐다. 사건 이후만큼 이전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디지털 성범죄에 관해 조사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이 범죄를 어떻게 바라보고 느끼는지 종종 물었다. 자기 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별로 없더라. 대부분 어떤 특수한 상황에 놓인, 자신과는 굉장히 동떨어진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로 인식했다. 특히나 중년 세대가 디지털 성범죄에 노출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안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근데 현실은 그렇지 않거든. 알게 모르게 피해자를 압박하는 시선이 사회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성범죄 영상이 퍼지는 과정에도 그런 시선이 힘을 더 얹겠구나 싶었다. 디지털 성범죄가 특정 인물에게만 혹은 아주 특수한 상황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님을 이야기하려 했다. 우리 가까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할 필요성이 있기에, 초반에는 정순과 정순을 둘러싼 모든 인물을 매우 보편적이고 정형성을 따르는 인물로 구성했다. 다만, 그렇게 되면 관객 입장에서 다른 영화와 구별되는 차이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으니 정순과 유진이 조금씩 변화해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 집중했다. 특히 유진은 정순과 비슷한 결을 갖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엄마와는 다른 삶을 살 거야!’라는 의지가 드러나는 인물이다. 보통의 모녀처럼 보이면서도 서로 속도가 확연히 다른 두 인물을 배치함으로써 다양한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모녀가 주고받는 대화의 패턴이 재밌더라. 딸은 제 속도를 맞추지 못하는 엄마를 답답해하고, 엄마는 “너 똑똑해서 좋겠다”라며 맞받아친다. 구체적 상황과 환경이 달라도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법한 순간이다.
나도 엄마와 그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엄마가 “그래, 넌 참 똑똑해서 좋겠다!”라고 원망을 토했을 때,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 나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사람이 엄마라고 생각했거든. 근데 어떻게 보면 엄마를 내 속도에 맞춰 끌고 오려고 하는 행동이 엄마에게는 폭력일 수도 있는 거더라. 어떤 관계에서는 사이가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정순과 유진도 마찬가지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김세인, 2022) <윤시내가 사라졌다>(김진화, 2022) <경아의 딸>(김정은, 2022) 등 모녀 서사는 근래 여성 감독의 데뷔작에서 자주 등장하는 구조다. 데뷔작에서 감독 본인의 경험과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늘 엄마를 동시에 소환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감독에게는 무엇이 동력으로 작동했나.
엄마뿐만 아니라 공장 이모들과 소통하는 과정에서도 종종 난처함을 느꼈다. 나보다 먼저 세상을 경험한 여성으로서 그들이 당연히 날 이해해 줄 거라고 여겼다. 세대가 다르긴 해도 그들 또한 내가 겪는 문제에 관심을 보이겠지, 날 옹호해 주겠지. 그런 막연한 생각에 기대는 순간, 그들과 나 사이에 갈등이 불거지는 것 같다. 생각해 보면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절대 당연하지 않은 일이다. 누군가는 날 이해하고 내 편에 서주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삶에서 어떤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 사람마다 다르게 반응하지 않나. 시스템에 순응한 사람도 있고, 어떻게든 그걸 돌파하려고 애썼던 사람도 있다. 살아가는 방식은 각양각색이다. 근데 내가 딸이니까, 우리는 같은 여성이니까, 상대는 당연히 날 받아들여 줄 거다? 그건 뭐랄까, 정말 일차원적인 생각이었다. 다름을 인정하되, 한편으로는 마냥 틀어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삶의 방식이 다르다고 해서 “내 편이 아니야”라며 선을 그을 필요는 없다. 엄마 세대는 또 다른 문제를 마주했을 테고, 어느 정도 타협하고 못 본 척하는 것이 그 시대 여성들의 생존법이었을 수도 있다. 지금 세대의 기준에 못 미친다는 이유로 그들을 질타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정순> 시나리오 쓰면서 여러 번 자문하게 됐다. 아마도 나와 비슷한 연령대의 감독들 또한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앞서 언급한 영화들을 보면서도 비슷한 고민을 공유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엄마이고 같은 여성일지언정 타인의 삶을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들린다. 세대가 다른 여성 간의 자본과 계급 차이도 인지했는지 궁금하다. “너 똑똑해서 좋겠다”라는 말이 유독 아픈 이유는, 실제로 딸이 엄마보다 많이 가졌고 그에 관해 죄책감을 안고 살기 때문이다. 정순의 일터에서도 나이 든 여성과 젊은 여성이 반목하는 모습을 비춘다. 약자들이 서로 힘을 합치기보다는 경계하는 분위기를 짚어 냈는데.
공장이라는 환경에 처음 딱 들어갔을 때, 제일 생경했던 것이 조직 문화였다. 젊은 여성을 배척하는 기류에 당황했지. 새로 들어온 나보다 오랜 시간 일한 이모들이 더 능숙한 것은 당연했다. 손도 빠르고 일 처리도 깔끔하다. 그런데도 이게 단순노동이다 보니 언제든 자리를 빼앗길 수 있다는 불안을 느끼더라. 처음에는 왜 이렇게까지 배척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한동안 버티면서 이모들과 친해지고 나니 시스템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몇 년을 성실하게 일해도 관리자 혹은 어떤 평가 기준에 의해 하루 만에 직장을 잃을 수도 있는 환경에 놓인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경계심을 이해할 만했다. 결국 이모들이 불안을 표출할 대상은 조직 내 최하단에 위치한 사람, 그러니까 나처럼 새로 입사한 젊은 여성 정도였던 거다.
정순이 그 조직에서 동영상 유포 사실을 알게 된 후 조기 퇴근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흰 작업복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거리를 걷는데, 카메라가 뒷모습과 앞모습을 나눠 찍는다. 유령처럼 형체를 감추고 죄인처럼 얼굴을 가린 정순, 상징적이면서도 직접적인 이미지다.
처음 식품 공장을 선택할 때부터 인물들에게 새하얀 작업복을 입히겠다고 고집했다. 흰색은 깨끗하고 순수한 느낌을 주는 색이고, 공장은 청결을 강조하며 매일 노동자를 소독한다. 근데 알고 보면 그 공장은 그리 깨끗하지도 순수하지도 않은 공간이다. 청결에 신경 쓰면서 잘못된 문화를 양산하고 심지어 범죄를 은폐한다. 그러한 아이러니가 재밌게 다가왔다. 조기 퇴근하는 정순은 평소처럼 유진에게 데려와 달라고 부탁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맨몸으로 거리를 걷기엔 굉장히 두려운 상태다 보니 작업복으로 얼굴을 가리고 갔을 거로 상상했다. 어떻게 보면 시선을 피하겠다는 정순의 의도와 달리, 시선을 집중시키는 행동이기도 하다. 이미지의 경우, 오래된 단편을 레퍼런스 삼기는 했다. 지금 영화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데, 거기서 한 여인이 흰 천을 뒤집어쓰고 숲속을 걸어 다니는 장면이 나오거든.
정순의 얼굴 정면을 보여주지 않아서 궁금했던 장면들이 몇 가지 있다. 집에 고립된 정순이 베개로 얼굴을 막고 버둥대는 장면의 경우, 카메라는 위에서 내려다보며 정면을 찍는 대신에 정순의 옆모습을 찍는다. 영수가 사정을 앞세워 선처를 요구하는 장면에서도 정순을 타이트하게 담지만 옆얼굴을 찍는 데서 멈춘다.
베개 신은 촬영 감독과 재차 고민했던 장면이다. 이전 장면에서 정순을 부감으로 찍은 컷이 나온다. 정순이 소파에서 등을 보이고 누운 상태라 부감 샷이 아니면 상황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달리 선택지가 없어서 찍긴 했는데, 그렇게 위에서 아래로 눌러 찍는 샷이 정순에게 너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개 신은 수평에서 옆모습을 담는 것만으로도 정순의 행위가 충분히 설명된다. 촬영 감독이 정순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가는 느낌으로 무빙했는데, 이를 통해 관객에게도 정순의 감정이 다 전해질 거라고 봤다. 영수가 방문한 신의 경우, 영수와 정순을 나눠서 두 컷으로 촬영을 진행했다. 둘을 번갈아 찍다가 영수가 마지막 대사를 할 때는 아예 영수 얼굴을 보여주지 않기로 했다. 영수가 아닌 정순의 반응에만 집중하면서, 이후 정순이 문을 잠그고 정면으로 돌아서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기까지 한 호흡으로 담기를 원했다.
영수를 찍지 않기로 선택한 이유는 뭐였나.
영수의 말이 아니라 정순의 행위가 중요했다. 그 장면에서 영수는 전형적인 대사를 읊는다. 선처를 바라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으레 늘어놓는 변명. 정순이 그 말을 끝까지 들어야 할까. 정순은 아니라고 판단했고 영수가 말하는 도중에 문을 닫는다. 영수의 말을 듣는 정순이 아니라, 그 말을 차단하는 정순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 또한 촬영 감독과 사전에 논의하며 콘티를 짰던 장면이다.


촬영 감독과 현장에서 의견이 충돌했던 순간은 없었나.
현장에서는 부딪힐 일이 없었다. 콘티를 만들면서 이미 싸울 만큼 싸웠거든. (웃음) 장면 하나하나를 놓고 충돌했다. 둘 다 만족할 만한 그림을 찾아가는 과정이었고, 다행히 합의를 이룬 상태에서 촬영을 시작했다. 현장에서는 서로 굳이 말하지 않아도 속내를 알 정도였다.
진통을 사전에 치렀네. 정순이 딸과 언성을 높이며 싸우다가 결국 주저앉아 “엄마” 하며 울부짖는 장면에 관해서도 듣고 싶다. 김금순 배우가 가장 힘들었던 장면으로 꼽기도 했다. 배우들을 지켜보는 입장에서 감독도 마음 다잡고 버티기가 쉽지 않았을 듯한데, 그래도 테이크를 네댓 번은 갔다고.
네 번쯤 찍은 걸로 기억한다. 정순이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신이고, 정순과 유진 모두 서로를 위하는 마음은 같은데도 방식이 달라서 부딪히는 장면이다. 배우들에게는 대사 첫 줄부터 마지막 줄까지 감정을 천천히 쌓으며 소화하면 좋겠다 정도로만 말씀드렸다. 나머지는 두 배우를 믿고 맡긴 것이나 다름없다. 배우들이 자유롭게 표현하기를 바랐고, 스태프들에게도 배우들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촬영 감독에게도 중간에 끊지 말고 최대한 롱테이크로 연결하자고 말했고. “엄마”를 부르는 건 금순 배우님의 아이디어다. 대본에 없는 대사이고 사전 리딩이나 리허설 과정에선 별말씀 없으셨는데, 그 신을 촬영하기 직전에 얘기를 꺼내셨다. 지금 정순이한테도 엄마가 너무 필요한 상황이라고.
두 배우는 촬영장에서 어떤 스타일인가. 테이크마다 다른 연기를 시도하나.
매번 다르다. 솔직히 금순 배우님은 거의 모든 테이크가 마음에 들었다. 첫 번째 테이크도 아쉬운 데가 딱히 없을 정도였는데, 혹시 모른다는 생각으로 다른 버전을 요청드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선아 배우님도 비슷하다. 아이디어가 넘치는 배우이고, 매 테이크를 다르게 도전하는 편이다. 두 배우의 공통점이라면 감각이 뛰어나다는 것. 어떻게 설명할지 모르겠는데, 둘 다 인물을 언어가 아닌 감각으로 받아들인다. 진짜 동물적이다 싶을 만큼 표현력이 좋고, 때마다 다양한 버전으로 연기를 보여준다.
줄곧 괜찮은 척하며 씩씩하게 굴던 유진이 딱 한 번 애인 앞에서 무너진다. 위악을 부리는 와중에 설움, 공포, 외로움, 슬픔 등 다채로운 감정을 쏟아내는 윤금선아 배우를 보며 새삼 감탄했다.
나도 그 장면이 제일 슬프더라. 시나리오 쓸 때부터 개인적으로 아꼈던 장면이다. 엄마의 피해 사실을 알고 난 후, 유진은 흔들리지 않겠다는 집념으로 하루하루를 버틴다. 동시에 정순에게는 그 무엇보다 딸이 결혼을 앞둔 상황이 가장 치명적으로 다가올 거다. 금순 선배님도 시나리오를 읽고 그 점을 짚어 내셨다. 유진은 그런 엄마의 마음을 너무나 아는 딸이다. 자기 결혼 때문에 엄마가 걱정하고 위축될까 봐 밖에서는 최대한 꿋꿋한 모습을 보이려고 애쓴다. 근데 애인 성호(고은렬)와 마주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까. 속내를 투명하게 털어놓을 사람이 유진에게 한 명쯤 있기를 바라며 그 장면을 썼다. 성호는 유진에게 말 한마디 건네기가 조심스러웠을 거다. 오히려 유진이 결혼을 미뤄도 좋다고 말할 때, 말속에 담긴 불안을 눈치채면서 안도했을 것 같더라. 적어도 자기한테는 힘들다고 티를 내는구나 싶어서. 한편, 영화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성호는 정순에게 있어서 태도 변화가 가장 적은 인물이기도 하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이든 후든 같은 모습으로 정순을 대하는 인물로 구상했다.
배우들이 감독 칭찬을 많이 하더라. 서로 모자란 곳을 채우며 작업했고, 감독을 비롯해 다들 선하고 성실한 사람들이었다고. 배우와 스태프의 지지를 골고루 얻은 듯한데 본인 리더십의 핵심은 뭐라고 생각하나.
사람들 의견을 잘 듣는다. 타고난 성향이 그렇다. 아무리 바쁘고 정신없어도 일단 듣는다. 힘에 부칠 때가 없는 건 아닌데, 그래도 그렇게 해야 내 마음이 편하다. 배우들뿐만 아니라 스태프의 의견에도 최대한 귀 기울인다. 현우 선배님이 그걸 굉장히 좋아해 주셨다. 마음먹어도 쉽지 않은 일인데 늘 대화에 응해 줘서 고맙다고 하시더라. 프리 프로덕션이 짧았던 탓도 있다. 미팅은 리딩 포함해서 두 번 정도만 겨우 진행했고 그 외에는 전화로 소통했다. 특히 현우 배우님은 영수를 어떻게 표현할지 많이 고민하셨다. 내게도 어려운 부분이라 선배님과 대화하며 맞춰 나갔다.
조현우 배우가 가장 어려워했던 건 뭐였나.
도윤(김최용준)과의 관계. 예를 들면 탈의실에서 도윤이 여자 친구랑 싸운 이야기를 꺼내며 “아저씨는 없어요? 뭐 여자 친구 아니더라도 그런 거.”라며 영수를 은근히 비웃고 무시하지 않나. 남성 세계에서는 연령이 위계를 만드는 주요한 요소 중 하나인데 그 질서를 헝클어뜨리는 도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관리자라는 위치가 얼마나 막강한 위력을 지녔는지, 그래서 영수는 어디까지 웃어주고 어느 순간부터 기분 나쁘다는 반응을 할지 등등. 선배님의 궁금증은 대부분 감정과 리액션의 균형에 관한 것이었다. 현장에서 선배님과 함께 대사를 한 줄씩 살펴보며 톤 앤 매너를 정리했다.

캐스팅 과정은 어땠나. 오디션을 통해 만난 배우도 있나.
오디션은 따로 진행하지 않았다. 먼저 최원욱 PD가 시나리오 읽자마자 김금순 배우와 김최용준 배우를 추천했다. 실제로 두 배우는 사이가 좋다. 용준 배우가 현장에서 정순을 차갑게 바라보려고 노력했다더라. 도윤은 정순을 깔보는 자세를 유지해야 하는데, 금순 배우님이 연기하는 걸 보면 자기도 모르게 자꾸 감탄했다고. (웃음) 윤금선아 배우는 <이장>(정승오, 2020) <여름의 끝자락>(곽새미·박용재, 2015) 등 오래전부터 작품을 지켜봤다. 날 것의 매력이 돋보였고 언젠가 작업을 같이 해보고 싶었다. 우선 정순 역부터 캐스팅을 완료한 다음, 결이 맞다면 유진 역을 제안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만 해도 김금순 배우와 윤금선아 배우가 닮았다고 여기지 못했는데, 캐스팅을 확정하고 나니 주변 반응이 좋더라. 정말 엄마와 딸처럼 보인다고. 조현우 배우는 윤금선아 배우 덕분에 만났다. 당시 두 분이 같은 소속사에 계셔서 프로필을 보게 됐는데, 내가 원래 알던 현우 배우님의 센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더라. 우수에 찬 눈이 매력적이었다. 사람 마음을 동하게 하는 눈이라고 해야 하나. 다행히 현우 배우님이 시나리오를 재밌게 읽어주셔서 출연이 성사됐다.
영화에서 정순이 부른 노래가 엔딩곡으로 사용됐다. “어느새 지난지도 모르게 다. 희미해져 간 기억들이 다. 잊어 버린지도 모르게 난 또. 모두 지나가 그저 지나가. 세상에서 잊혀 지나가느냐.”라는 가사와 멜로디가 귓가에 맴도는데 이번 작품을 위해 특별히 만든 노래라고.
단편 작업할 때부터 친구가 음악을 도와줬다. 고등학교 동창이고 원래 음악 하는 친구다. 어릴 적부터 걔는 음악 한다고 그러고, 나는 영화 한다고 그러고. 주변에서 걱정했지. (웃음) 내 부탁을 외면하지 못한 바람에 이번에도 친구가 음악 감독을 맡았다. 본래 시나리오에는 정순이 노래하는 장면이 없었다. 뒤늦게 변경한 시나리오를 보내주며 80년대 트로트풍이 가미된 단순한 발라드곡을 요청했다. 워낙 오래 알고 지낸 데다 작업을 몇 번 같이 해본 터라 그 정도 요청 사항만으로도 찰떡같이 이해하고 만들어주더라. 가사도 그 친구가 직접 썼다.
노래와 춤을 소화한 김금순 배우에게는 어떤 요청 사항을 전달했나.
그냥 촬영 전에 선배님 숙소에서 노래 틀어놓고 우리끼리 리허설 겸 아이디어 회의를 했다. 이렇게 해볼까, 저렇게 해볼까. 그러다 여관 장면에서 빗을 마이크처럼 든다는 설정도 나오고. 공장에서 노래하는 장면의 경우, 나는 최대한 개입하지 않고 선배님이 표현하는 감정에 맞추기로 했다. 노래도 춤도 당일 현장에서 선배님이 가능한 만큼만 이루어지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정순이 그 공간의 규율과 위선을 무너뜨리는 순간 아닌가. 제품 박스를 밀쳐 쓰러뜨리고, 작업복을 벗어 던진다. 금순 선배님이 그 김에 작업모까지 벗고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면 어떻겠냐고 의견을 내셨다. 식품 공장이다 보니 머리카락에 굉장히 예민해서 원래는 작업모를 절대 못 벗게 하거든. 포장 팔레트에 올라가서 노래하는 것도 선배님 아이디어였다. 함께 현장을 답사했는데 그 과정에서 동선과 소품 등 다양한 부분을 미리 살펴볼 수 있었다.
배우, 스태프와 머리 맞대고 하나씩 만드는 재미가 쏠쏠했겠다.
어릴 적부터 영화를 무지 좋아하긴 했는데, 내가 만드는 사람이 될 줄은 몰랐다. 나는 그냥 감상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가 고등학교에서 영상 동아리 활동하며 꿈을 구체화했다. 글로 쓴 것이 실제로 눈앞에 펼쳐졌을 때, 이 작업의 재미를 실감했다. 친구들과 같이 촬영하고 편집해서 결과물을 내놓으니 성취감도 컸다. 지금도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마음이다.
대신에 지금은 영화 만드는 기쁨만큼이나 그 과정의 지난함도 속속들이 알지 않나.
영화가 아닌 다른 매체의 영향력이 너무 커진 시대다. 영화의 앞날을 두고 이런저런 논의도 이어지고. 나 역시 고민이 많지만, 그 와중에도 극장에서 좋은 영화를 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건 영화만 할 수 있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면 빨리 다음 영화를 찍고 싶어진다. 그 마음을 동력 삼아 계속 작업하는 것 같다. 영화만 할 수 있는 걸 하고 싶고,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 나에게는 영화 만들기가 제일 재밌는 일이다.


영화만 할 수 있는 거, 그게 뭐라고 생각하나.
영화는 멈춰서 들여다볼 시간을 준다. 외부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영화 스스로 조금 더 살펴봐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래도 괜찮은 매체가 바로 영화 아닐까.
좋아하는 영화를 말해 본다면.
블랙 코미디. <슬픔의 삼각형>(루벤 외스틀룬드, 2023)과 <이니셰린의 밴시>(마틴 맥도나, 2023)를 보면서 속으로 몇 번이나 말했다. 와, 이건 진짜 영화밖에 못 하는 거다.
학교에서 교과서처럼 배웠다는 영화와는 거리가 먼 느낌인데.
되게 다르지만 이상하게 끌린다. (웃음) 예전에는 이야기로 그 영화를 기억했던 것 같은데, <정순>을 쓰고 난 다음부터는 인물로 기억한다. 새로운 영화를 발견하면 ‘여기엔 또 내가 몰랐던 어떤 인물이 등장할까?’ 하며 기대감이 생긴다.
요즘 마음이 가는 인물은?
<이니셰린의 밴시>에서 콜린 파렐이 연기한 파우릭이라는 인물이 너무 재밌더라. 절교를 선언한 친구 곁에서 한참 질척대지 않나. 이해 못 하겠다면서도 계속 그 친구를 신경 쓰고. 인간적이고 유아적이다. 다 큰 어른에게서 그런 모습을 발견하면 마음이 간다.
덜 깎여 나간 모습?
정제되지 않은 마음이 막 드러나고 자신도 어쩔 줄 몰라 할 때.
<정순>을 영화제에서 공개했을 당시, 장편 시나리오를 쓰는 중이라고 인터뷰했더라. 차기작 시나리오는 완성했나.
이제 그런 말하면 안 되겠다. 아직도 쓰고 있다. (웃음) 성장 코미디이고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다. 탈고를 앞둔 상태인데 문제가 있다. 코미디인데 안 웃기다.
블랙 코미디를 염두에 두고 쓴 건가.
처음에는 그랬는데 쓰다 보니 정통 코미디라고 봐야 하지 않나 싶더라. 근데 정통 코미디치고 너무 안 웃겨서 톤 앤 매너를 다시 고민하는 중이다. 중학생 두 명과 그 애들의 엄마들이 주인공이다. 또 다른 모녀 이야기가 될 듯하다. 올해 기획 개발을 마쳐서 내년에 촬영하는 것이 목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