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성 좋은 여자애들은 라지 사이즈 피자 두 판에 스파게티까지 금세 해치웠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멈출 줄 몰랐고, 덩달아 마음이 환해진 유경근 씨는 카메라를 들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이 으레 그러하듯 귀찮다며 피할 법도 한데, 딸 예은이를 포함해 거실에 둘러앉은 다섯 명 모두 포즈를 취해 줬다. 두고두고 고마운 일이다. “다 같이 갔거든요. 한 명도 빼지 않고.” 기억은 얄궂다. 삶을 이끄는 것도, 주저앉히는 것도 기억이라서 딸을 잃은 그날 이후 유경근 씨는 재차 물을 수밖에 없다. “근데 진짜 세월이 약인가요?” <세월: 라이프 고즈 온>은 2017년 4.16연대 미디어위원회 활동을 시작으로 그간 세월호 참사를 꾸준히 기록해 온 장민경 감독의 첫 번째 장편영화다. 제13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제26회 인천인권영화제 등을 통해 본래 2021년에 공개했던 작품인데,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이한 올해 극장 개봉한다. 감독은 재작년에 발생한 10.29 이태원 참사를 일례로 들며 사회적 참사가 거듭되는 상황이 뒤늦은 개봉을 결심하는 데 영향을 줬다고 설명했다.
처음 선보이고 관객과 만나기까지 3년간의 공백이 있으나, 영화에서 시차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세월: 라이프 고즈 온>의 카메라는 시간 경과에 따른 특정 사안의 변천을 추적하는 대신, 한 지점에 오래 머무를 수밖에 없는 이들 사이를 맴돈다. 참사 발생을 기점으로 삼으며 타임라인을 횡으로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대에 속한 인물들을 기록하며 그들의 관계와 사건에 거미줄을 치는 식이다. 2014년 세월호 참사에서 딸을 잃은 유경근 씨,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로 딸을 잃은 황명애 씨, 1999년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참사로 두 딸을 잃은 고석 씨, 그리고 1987년 6월 민주항쟁에서 아들을 잃은 배은심 씨까지 주요 등장인물은 총 네 명이다. 그들은 각자의 ‘그날’을 안고 팟캐스트 <세상 끝의 사랑> 녹음실에 방문한다. 짐작하기로는 누구 하나 말을 선뜻 꺼내기가 어려울 듯하지만, 상실이라는 공통 경험이 대화의 발판을 마련하며 다양한 기억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다.
유경근 씨는 팟캐스트 방송의 진행자이자 이 영화의 길잡이다. ‘유족이 묻고 유족이 답하다’라는 인터뷰 방식에서 묻는 역할을 맡은 그와 동행하며, 영화는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비슷한 양상으로 반복된 참사를 톺아본다. 불에 타고 물에 가라앉은 곳들 모두 언제 그랬냐는 듯 참사 흔적을 말끔히 지웠고, 거센 반발로 인해 유족들은 그 자리에 추모비 하나 세우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참사 원인, 미흡한 희생자 구조 과정, 정부의 기만적 태도 역시 유족들이 동일하게 지적하는 문제다. 화재가 발생한 수련원은 불법 증축한 건물이었고, 참사 하루 만에 시신 수습을 종결하고 군인까지 동원해 물청소한 대구 지하도에서는 유족들이 손수 유골과 유품을 찾아냈다. 영화에 등장하는 부모들은 결국 아이의 영정을 품에 안고 거리로 나서야 했다. 그때마다 외친 요구사항도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안전 사회 건설로 한결같다.
특히 일관된 증언 중 하나는 트라우마다. 참사가 자신의 일생을 어떻게 뒤흔들었는지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인물들은 몸과 마음의 통증을 털어놓는다. 이때 유경근 씨는 화자보다 청자에 가깝다. 카메라는 그가 질문을 던지며 대화를 끌어가는 순간이 아니라, 거의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순간에 집중한다. 유경근 씨는 “네, 맞아요”라고 간신히 맞장구치거나 고개를 떨군 채 울음을 삼킨다. 기침, 불안, 우울 같은 증상이 불시에 터져 나오고 대화는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영화가 유경근 씨를 길잡이로 선택한 이유는 그가 자주 침묵하는 사람이어서인지도 모른다. 그는 상대에게 말을 재촉하지 않는다. 대화에 깃드는 정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말을 이어 가려고 얼마나 애쓰는지 알기에 함께 침묵을 견딘다. “천천히 하세요. 괜찮습니다.” 영화는 유경근 씨처럼 듣고자 하며, 그의 자세를 빌려 참사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 제시하고자 한다.
<세월: 라이프 고즈 온>에서 지속되는 시도는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 장면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익숙한 단어이자 지향해야 할 가치처럼 여기지만, 때로는 막연하게 다가오는 것. 이를테면 연대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한열이 엄마’ 배은심 씨는 ‘유족 선배’를 자처한다. 세월호 참사로 아이를 잃은 엄마들은 그에게 안겨 목놓아 울기도 하고, 그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해 주며 안부를 묻기도 한다. 유경근 씨는 고석 씨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씨랜드 참사 유족들이 외로운 싸움을 감당할 당시, 자신이라도 달려가서 힘을 보탰더라면 그들이 “조금 더 버텼”을 거라는 사실을 이제는 알아서다. 영화는 연대를 유족과 유족의 만남으로, 유족과 시민의 연결로 그린다. 그 속에서 온전한 애도가 시작되고 변화가 싹튼다. 참사는 슬픔과 고통을 안겼으나, 동시에 타인의 슬픔과 고통에 감응하는 능력을 키우게 했다. 황명애 씨는 이름 없이 묻힌 희생자 가운데 고아나 이주노동자가 있을지 모른다며 안타까워하고, 유경근 씨는 “내 아이가 안전하려면 우리 동네에 있는 다른 아이가 안전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들려준다.
참사가 벌어진 장소와 인물들의 사적 공간을 오가는 사이, 영화에 주로 삽입된 인서트 컷은 자연이다. 풀잎과 들꽃, 이슬 맺힌 거미줄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듯 조심스럽게 흔들린다. 죽음과 삶이 그토록 맞닿아 있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그보다는 죽음을 기억하는 자리에서 삶을 이어간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가늠해 보려는 듯하다. 바람에 흔들리면서, 빛과 그림자를 모두 끌어안으면서 인물들은 “살아가는 법”을 처음부터 다시 배운다. 세월이 약이라는 헛된 위로 앞에서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던 유경근 씨는 마침내 납득할 만한 답을 구한다. 배은심 씨가 물끄러미 한 곳을 바라보며 말한다. “어디가 약이 있어요. 약이 없죠. 안고 사는 게 약이여.” 한시도 허투루 흘려보낼 수 없던, 긴 세월을 일일이 겪어내느라 잘게 부서진 이가 남긴 사금 같은 말이다.
세월: 라이프 고즈 온 Life goes on 감독 장민경 출연 유경근, 황명애, 고석, 배은심 제작 독바위프로덕션 배급 영화배급협동조합 씨네소파 제작연도 2024년 상영시간 98분 등급 전체관람가 개봉 2024년 3월 27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