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에서 위로를 얻다
BIFF 2018 <오리의 웃음> 김영남 감독
글 손시내 사진 소동성 / Festival / 2018-10-18

한 남자가 사업에 실패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과거의 인연이었던 어떤 여자를 찾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의 주변에선 곧 기묘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찾고 있는 여자의 행방은 묘연한데 다른 여자들이 하나씩 그를 찾아오고,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상황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오리의 웃음>은 사건과 서사만으로 이해되는 영화는 아니다. 이런저런 사건이 일어나지만 그것을 대하는 인물의 태도와 감정 속으로 함께 뛰어들자고 영화는 제안한다. 오랜만에 장편영화를 들고 영화제를 찾은 김영남 감독을 만나 미로와도 같은 이 영화에 대해 물었다.

 

<내 청춘에게 고함>(2006)과 <보트>(2008) 이후 10년만의 장편영화다. 기획, 제작, 각본, 감독을 모두 맡았다. 

영화의 첫 시작 지점은 2006년 부산 PPP(부산프로모션플랜)에서였다. 하지만 그 당시엔 <내 청춘에게 고함>이후에 바로 이 작품을 진행할만한 직접적인 여건이나 환경이 되지 못했고, 또 일본에서 공동제작으로 <보트>의 연출의뢰가 들어와서 좋은 기회이고 재미있겠다 싶어서 그걸 진행하게 됐다. 그러면서 약간 묻혔던 프로젝트였는데 그 이후에 점차 시간이 가면서 하기 어려워진 부분도 있고 그러다보니 10년이 흘렀다. 그러다가 이제 안 되겠다, 내가 의지를 갖고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2015년에 영화진흥위원회 프로그램을 통해서 프랑스 지역 국제공동제작 기획개발작에 지원한 것이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다행히 다섯 작품 안에 선정되어서 진행할 수 있었고 영화평론가 샤를 테송과 영화제작자 자비에 카스타노가 멘토로 참여했다. 이후 자비에 카스타노가 좀 더 같이 진행해보기를 원했고 지금 영화에 공동제작자로 올라있다. 2016년 전주국제영화제 피칭에서 공식적으로 소개하는 자리를 가졌고 영화진흥위원회 예술영화제작지원에 운 좋게 선정이 돼서 프로젝트 완성까지 가게 되었다.

 

이전 영화들의 인물들이 무엇 하나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행동하고 선택하면서 살아가는 청춘들의 모습에 가까웠다면, <오리의 웃음>의 인물들은 그런 시기가 지나고 난 이후의 사람들이다. 연령도 그렇고 후회도 더 짙어지고 선택의 폭도 좁아져있다. 자연스러운 변화인걸까.

아무래도 지난 10년간 여러 생각을 하게 됐다. 이를테면, 왜 지금 이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생각할 때 보통 원인이 되는 문제에 집착하게 되는데, 어느 순간 그런 문제 자체보다는 그 문제를 대하는 태도, 어떤 시선을 갖게 되는 마음의 근원에 관심을 갖게 되더라. 두 번째 영화 <보트>가 잘 안된 게 원인이 되었다고 수동적으로 생각하기도 했었지만, 그런 두려움이나 불안을 좀 더 마주하고 다가가려는 노력을 했을 때는 내게 다시 돌아오는 반향도 있고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부분들도 생겼다. <오리의 웃음>이라는 영화 안에서도 주인공 무철(김영필)과 아내 사이의 문제는 아기의 유산이라는 사건이기도 하지만 그 문제를 대하는 무철의 태도, 아내를 회피하려고 했던 모습들 때문에 생기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것들을 좀 마주하고 직면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영화가 흘러온 것 같다.

 

영화의 시작이 강렬하다. 검은 옷을 쓴 괴한들이 숲 속에서 무철을 쫓아오더니 빨간 풍선이 되어버리는, 무철이 꾸는 악몽이다. 빨간 풍선은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기도 하는 사물이다. 또 무언가에 쫓기는 심리상태와 풍선의 조합이 재미있기도 하고 뜬금없기도 하고 그야말로 꿈에서나 가능한 연상 작용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꿈 작업이라고 해서 내가 꾸었던 꿈이나 주변 사람들이 꾸었던 꿈을 인터뷰도 하고 채집도 하면서 미술 작업을 겸하고 있었다. 불안한 심리나 두려움의 마음을 어떻게 시각적으로 표현할까가 고민이었다. 그 이전의 영화들과는 다르게 그런 부분들을 시각적으로 좀 더 드러내놓고 표현한 것이 그 악몽 장면이다. 빨간 풍선과 같은 그런 잔상들이 영화 곳곳에 다시 등장했을 때 관객들이 서사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시각적인 부분을 통해서도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입이라는 기관이 얼굴이 아니라 어깨에 붙어있으면 완전히 달라지는 것처럼 전혀 상관없는 단어나 조합들이 떠돌다가 만났을 때 생기는 생경한 느낌들, 익숙한 것으로부터 탈피하는 데서 오는 자극이 있는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오리의 웃음>
<오리의 웃음>
<오리의 웃음>

꿈 작업이 흥미로운데 좀 더 얘기해줄 수 있나.

특별한 건 아니고, 그냥 사람들을 만나면서 꾸었던 꿈, 기억나는 꿈, 불안하거나 두려웠던 꿈, 위로가 되었던 꿈 이런 것들을 인터뷰하고 꿈을 채집했다. 그 중에서 영화의 흐름 안에 배치한 것도 있고 결국 쓰지 않은 것도 있고 편집에서 삭제된 부분도 있는데, 어쨌거나 꿈의 시각적 이미지를 찾는 과정이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아직 시작하진 않았지만 요즘에는 직업별로 작업을 해보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지하철을 운전하시는 기관사나 간호사분들의 꿈을 가지고 작업을 하는 거다. 심리나 정신적인 상태가 꿈에 반영되는 것에 관심이 가고 꿈 작업도 그래서 하게 되었다. 영화가 개봉될 즈음에는 영화에는 쓰이지 않았던 꿈들을 갤러리에서 설치 작업을 통해 재조합하고 전시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처음에는 주인공이 어떤 여자를 찾으러 고향에 내려가고 그곳에서 친구들을 만난다는 내용으로 진행되는가 싶더니 점차 무언가 뒤섞이기 시작한다. 꿈과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고 인물의 지위도 불안정해진다. 일종의 미로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재미있는 건 민박집이 있는 골목, 무철이 돌아다니는 공간들도 미로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 안에서 주인공이 걸어 다니는 장면이 재미있다. 무철이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사건을 경험하지만, 혼자 있거나 혼자서 사건들을 겪기도 한다. 그렇게 혼자일 때는 무언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을 찾고 방황한다. 그런 공간을 시나리오에 썼었다. 로케이션은 제주도이지만 영화에서는 명확하게 지명이 드러나진 않는다. 물론 사람들이 알아보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공간이 특정되지 않기를 바랐다. 마치 김승옥의 <무진기행>처럼 알 수 없는 곳에 와서 알 수 없는 곳을 헤매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꿈인지 환상인지 현실인지도 모를 그런 공간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또 제주도는 섬, 산, 바다 이런 여러 가지 요소들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눈이 쌓인 풍경이 드물어서 조금 아쉽기는 했다.

 

영화가 무철의 머릿속이나 마음속을 헤매는 것 같이 느껴진다. 마음의 미로와 같은 느낌을 주게 되는데, 불현듯 아주 젊은 시절을 떠올리기도 하고 잠에서 깨는 장면들도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래서 결국에는 이 사람이 여기 내려와서 보낸 기간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증이 생기기도 한다. 다른 인물들이 실제로 존재한 것이 과연 맞는지 모호해지기도 하고.

모호하게 느끼라고 그렇게 만든 거다.(웃음) 작업을 하지 못한 지난 10년간 느낀 건데, 영화를 준비하는 많은 과정에서 제작사는 명확한 것을 요구하지 않나. 하지만 명확하다고 당시에는 생각했던 것들이 2~3년 지나면 결국은 또 변화하고 바뀌었고, 명확한 것에 대한 믿음을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게 되는 계기가 있었다. 영화에서도 주인공이 무얼 하고 누굴 만났는지,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명확하지 않은데, 그런 모호함이 사실 내게는 마음의 위로가 되었다. 명확한 것이 흔들리고 고민했을 때 남미소설이나 스페인소설, 굳이 분류하자면 환상 문학이나 초현실 문학 같은 것들이 삶에 힘이 되거나 키가 되는 부분이 있었다. 환상이 꼭 현실과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그 환상 자체가 현실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 정말 마음속의 미로처럼 주인공의 감정의 행로를 어떻게 구성할까 고민하다가 그렇게 모호하고 경계가 흐릿하고 불투명하게 구성하는 것이 이 남자의 마음을 오롯이 전해줄 수 있겠다 싶어서 그렇게 하게 되었다.

ⓒ소동성

반면, 세부를 이루는 에피소드나 사연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사업에 실패한다거나 카지노가 들어서면서 땅을 사고팔고, 돈이 얽혀있는 문제가 되고 또 부부사이의 문제가 나오기도 한다.

만약 환상이란 단어를 쓴다면, 그것이 완전한 판타지가 아니라 이를테면 땅이라거나 사람들의 삶과 맞닿아있는 현실에서 생겨나는 환상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주인공이 처한 상황이나 문제도 현실적이어야 했고, 그래야 주인공이 갖게 되는 불안이나 두려움, 공포도 밀접하게 다가올 거란 생각이 들었다. 돈을 벌려고 하는 욕망처럼 삶과 관련된 세속적인 문제들이 등장하지 않나. 영화에서 계속 현실적인 것들을 보고 있다가 어느 순간 내가 있는 이 자리가 현실이 아니라 주인공의 환상 속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으면, 관객의 위치를 변화시킬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차례 상영을 했는데. 오늘은 관객과의 대화도 남아 있고. 

반응이 궁금하다. 앞선 상영 중에 한 번은 몰래 가서 보기도 했다. 일찍 나가시는 분도 계셨고, 어떤 분은 이런 영화는 딱 본인 스타일이라고 말하기도 하더라. 어쨌든 해석의 여지를 많이 남겨서 보시는 분들이 느끼는 대로 찾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이제 나이도 좀 들고 변화되었다는 말을 했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어떻게든 열심히 살아보려고 애쓰는 우리들”이라는 대사가 등장하는 등 과거와 현재에 대한 일말의 긍정의 제스쳐가 눈에 띄기도 한다.

이렇게 회고적인 느낌의 대사를 쓴 게 처음인 것 같다. <내 청춘에게 고함>은 그냥 달리는 기차처럼 무언가 지속되는 순간에 영화도 끝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이었는데, 그러게 왜일까. 흘러왔던 시간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되는 것 같다. 현재라는 것이 현재에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결국은 앞에 켜켜이 쌓아왔던 것들이 지금을 만들어내지 않나. 또 과거와 비교해보면 부모님에 대한 생각들도 달라졌고. 무철과 친구가 길을 걸으며 하는 대사에 부모님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그런 대화를 통해서 현재 무철이 품고 있는 생각이나 감정이 드러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청춘에게 고함>(2006)
<보트>(2009)

꼭 무철이 아니더라도 등장하는 인물들이 벗어나지 못하고 연루되어있는 감정적인 덫 같은 것이 있다고 느꼈다. 잠에서 깨는 모습이 반복되거나 꽃병이 깨지는 장면 같은 것은 여기서 그만 깨어나고 벗어나라는 일종의 요청처럼 보였는데, 그럼에도 결국 그 감정에 다가가려는 안간힘이 영화를 끌고 간다. 무철에게 바란 것은 무엇이었나.

영화의 마지막까지 가게 되는 변곡점이 어쩌면 깨어진 유리창 너머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는 그 부분이었던 것 같다.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 좀 힘들지 않나. 되돌아보고 싶지 않거나 회피하고 싶지만 결국 긴 여행을 거쳐서 그걸 마주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동굴이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까지 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마지막에 이르러 도착한 동굴이 위안을 줄지 치유를 해줄지 무철이 거기서 그냥 다시 돌아올지는 알 수 없지만, 힘들고 두려웠던 순간을 바라보지 않았다면 그런 마지막 기회조차 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무철이 헤매고 돌아다니고 스스로도 환상인지 현실인지 헤매는 그런 시간들이 있고 나서야 정서적으로 무언가 서서히 터져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사실 잘 모르겠다. 그래야만 된다는 느낌이 들어서.

 

영화에 중요하게 등장하는 ‘벙어리 바이올린’이라는 곡이 있다. 개인적인 향수나 사연이 있는 노래인가.

그 노래는 군대에서 같이 보초를 서던 선임이 가르쳐줬다. 물론 그 이후 그 분을 다시 만난 적도 없고 노래를 잊기도 했는데, 그 순간은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가사가 좋았고, 너무 빨리 나온 선구적인 노래라는 생각을 했다. 영화에 사용하면서 알게 된 건데 유명한 작곡가의 곡이고 ‘벙어리 바이올린’은 번안곡이더라. 노래 자체도 좋지만 노래를 처음 알게 된 순간의 기억이 마치 꿈과 같은 것이었다. 마치 극 중에서 민지가 무철에게 노래를 슥 가르쳐주고 사라지는데 그 노래는 계속 혼자 듣게 되는 느낌과 비슷하달까.

 

헤맴과 분열을 거듭하는 무철의 곁에 있는 친구(임형국)의 존재가 중요하게 느껴졌다. 사려 깊고 따뜻하고, 현실의 차원에 굳건히 버티고 있는 인물이라는 생각도 들고.

무철은 근원부터 마치 물결 위에 서있는 사람처럼 흔들리고 부침이 많은데, 병석은 좀 따뜻하고 온화하고 마음도 평온한 인물이다. 어쩌면 세상을 좀 빨리 알았을 수도 있고. 실존 인물인지 무철이 위로를 받고 싶어서 만들어낸 인물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하다보니까 영화에서 중요한 순간마다 등장해서 뭔가를 전해주고 전달해주고 그런 역할을 하게 됐다.

 

극 중 중요한 공간으로 섬이 등장하는데 거기 오리가 있다. 오리의 웃음이라는 제목이 재미있기도 하고,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나.

오리가 사실 웃을 수는 없는데, 오리의 웃음을 기다린다는 것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기다리는 것, 사랑하는 사람이 웃어주기를 기다리는 그런 의미이다. 우연히 알게 된 재미있는 사실은 지원과 난파선 여자를 연기한 엄수정 배우의 어렸을 때 별명이 오리였다는 거다.

 

기분이 어떤가. 다음 작업이나 계획도 알려달라. 

무엇보다 관객과 만나게 된 점이 가장 즐겁고 기대가 된다. 그동안 틈틈이 쌓아왔던 시간들, 고민들과 감정들이 관객들에게 전달된다면 좋겠다. 어떤 작가가 ‘구멍난 현실’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었는데, 이 영화도 그런 영화라고 생각한다. 현실에 맞닿아 있는 환상의 이야기. 그렇게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지만 묻어두었던 소외된 감정들을 조금 더 꺼내는 작업을 하고 싶다. 우선은 이 영화의 개봉까지 잘 마무리 짓는 것이 가장 큰 계획이다. 애착이 있고, 또 개인적인 프로젝트같은 느낌도 있어서.

ⓒ소동성
Festival
천진한 호기심
SIFF 2024 <허밍> 박서윤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2024-11-30
Festival
아무렇지 않게
SIFF 2024 <환희의 얼굴> 정이주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2024-11-29
Festival
웃기는 영화, 무해한 남자
SIFF 2024 <인서트> 남경우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2024-11-29
Festival
나도 내가 궁금해
SIFF 2024 <3학년 2학기> 유이하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2024-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