팰린드롬
<메이 디셈버>
손시내 / Choice / 2024-03-15

놀라운 실제 사건에 대한 창작자들의 호기심과 욕망은 끝이 없다. 그들은 이목을 끌 이야기만 있다면 사람들의 일상을 파고들고 과거를 헤집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메이 디셈버>의 엘리자베스(나탈리 포트만)도 그런 부류의 인간이다. 그는 연극과 TV 시리즈로 인기를 얻은 배우인데 이번에는 세기의 스캔들을 일으킨 여자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에 출연할 예정이다. 20여 년 전, 그레이시(줄리안 무어)는 30대 중반에 13살 남학생과의 성관계를 들켜 현장에서 체포됐고 감옥에서 아이를 낳았다. 그레이시의 출소 이후 둘은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메이 디셈버>는 엘리자베스가 영화 촬영을 위해 그레이시와 조(찰스 멜튼) 부부를 방문하며 시작한다. 여전히 사건이 있던 동네를 떠나지 않고 지내는 그들은 얼핏 평온해 보인다. 마당의 바비큐 파티, 이웃들과의 원만한 관계, 엘리자베스에 대한 거리낌 없는 태도로 짐작할 수 있는 건 그들의 안정된 삶이다. 어느새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아이들과 부부 사이도 별다를 것 없이 평범하게 느껴진다. 심지어 한 이웃은 엘리자베스에게 다가와 사랑스러운 부부가 힘들어지지 않기를 바란다는 뜻을 내비친다. 이제 여기엔 아무런 갈등도 남아있지 않은 것일까?

하지만 여전히 끄집어낼 게 더 있다고 여기는 엘리자베스는 부부 사이에 점점 깊이 들어간다. 수첩을 들고 사람들 사이를 활보하는 엘리자베스는 흡사 필름 누아르 세계의 탐정이나 기자처럼 보인다. 사건의 한쪽 면만 보고 접근했다가 더 큰 진실을 목도하고 혼란에 빠지게 마련인 관찰자 말이다. 영화는 취재를 시작한 엘리자베스를 따라 20년 전 사건을 직접 보고 겪은 이들의 입으로 당시 정황을 듣기 시작한다. 그레이시의 전남편, 사건을 맡았던 변호사, 그레이시와 조의 관계가 시작된 애완동물 가게 주인 등 주변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비교적 평이하다. 비록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사건에 모두 충격을 받긴 했지만, 어쨌든 그 주인공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이웃이라는 게 골자다. 기사로 쓰인다면 당시를 복기하고 부부의 소소한 근황을 전하는 단신 정도로 정리됐을 법하다. 여기서 엘리자베스가 배우라는 사실이 중요해진다. “복잡하고 인간적인 이야기”, “이해하기 힘든 인물”, “도덕의 회색지대”를 탐색하고 싶다는 그는 그레이시의 모든 것을 흡수하려 든다. 그레이시가 사용하는 화장품 목록을 꼼꼼히 메모하는가 하면, 그레이시의 자세와 말투, 특유의 표정까지 똑같이 따라한다. 이것이 그의 배우로서 자세일까. 체포 현장인 애완동물 가게 창고에서 흥분한 얼굴로 성적인 제스처를 취할 때, 정말로 의뭉스러운 인물은 엘리자베스인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 관계자의 우려에도 그는 멈추지 않는다. 엘리자베스의 혼란은 숨겨진 진실이 아니라 극도의 몰입에서 비롯된다.

<메이 디셈버>
<메이 디셈버>

<메이 디셈버>는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 연구로서 매력적인 작품이다. 영화는 사회적 규범을 질문하고 도덕적 기준을 심문하는데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대신 그 경계에서 자기 욕망을 내보이며 자신만만하게 행동하다 길을 잃거나, 뒤늦게 삶을 뒤흔들 질문에 빠져 고뇌하는 인물들을 클로즈업한다. 그레이시를 모방하는 건 기본이고 조에게 미묘한 유혹의 시선까지 보내며 부부의 삶에 깊이 개입하는 엘리자베스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더 신뢰하기 어려운 주인공이 된다. “자기 행동에 대한 창피함도 모르는 것 같아.” 그레이시에 대한 판단을 이미 내린 채로 연기 준비에 몰두하는 그는 점차 쏟아지는 다양한 정황에 중심을 잃는다. 나탈리 포트만에게 <메이 디셈버>는 <블랙 스완>(대런 아로노프스키, 2011)의 배우 버전인 듯 보이는데, 훨씬 여유롭게 즐기는 티가 난다. 사실 이상한 걸로 따지자면 그레이시도 만만찮다. 겉으로는 차분하고 온화한 모습을 보이지만, 뒤돌아서면 완전히 딴판이다. 그의 내면을 짐작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남편을 어떻게 만났냐는 질문에 “조는 내 아들 조지와 동갑이이에요.”라며 천진하게 답하고, 밤에는 엉엉 울며 조의 품에 얼굴을 묻는 그레이시. 딸들에게 대학교 입학 선물로 체중계를 선물하며 은근히 자식을 통제하려 드는 이 여성의 맨얼굴은 대체 어떤 모습일까. “순진한 게 내 재능이에요.” 그가 엘리자베스에게 던지는 말은 조금 섬뜩하기까지 하다. <세이프>(1995)부터 <원더스트럭>(2017)까지 토드 헤인즈와 네 번의 작업을 함께 한 줄리안 무어는 감독과의 다섯 번째 협업을 통해 여전히 그들이 탐색할 미지의 영역이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엘리자베스와 그레이시의 외관은 점차 비슷해진다. 아이들 졸업식에서 마주 선 두 여자는 마치 거울을 보고 있는 듯 닮았다. 그런데 둘은 다른 부분에서도 유사하다. 감독이 “<메이 디셈버>는 인간이라는 종이 가진 훌륭한 재능들 중 하나를 탐구하는 영화입니다. 그 재능은 바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에 대한 거부감’입니다.”라며 근사하게 표현한 지점이다. 온 세상의 비난을 뒤로한 채 자기만의 담벼락을 쌓은 사람이든, 남의 삶에 개입하는 행위를 성찰하지 않은 채 기만의 길로 빠지는 사람이든 자기를 제대로 보는 건 어렵기만 하다. 영화는 거울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며 그에 대한 질문을 능청스럽게 던진다. 엘리자베스와 그레이시가 나란히 있을 때, 카메라는 종종 거울의 위치에서 미동 없이 그들을 관조한다. 그들은 거울이 반사하는 그들의 표면만을 본다. 만약 거울에서 시선을 떼고 질문을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 과묵하고 신중한 조는 영화에서 유일하게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인물이다. 30대 중반에 자식들을 모두 대학에 보낸 그는 지나간 시간을 돌이키며 묻어두었던 질문을 고통스럽게 마주한다. 찰스 멜튼의 공허한 눈은 관록의 배우들 사이에서 단연 인상적인 순간을 만들어낸다.

<메이 디셈버>
<메이 디셈버>

<메이 디셈버>는 <파 프롬 헤븐>(2002), <아임 낫 데어>(2007), <캐롤>(2015) 등 굵직한 작품을 만들어온 토드 헤인즈의 열 번째 장편이다. 영화는 각각의 인물을 묘사하는데 힘을 쏟으면서도, 과장된 기법으로 극에 대한 기묘한 거리감을 만들어낸다. 갑작스러운 줌인이나 “핫도그가 떨어졌네.”처럼 뜬금없이 등장하는 드라마틱한 독백은 이상한 방식으로 웃음을 유발한다. 매번 도약 없이 고조돼 마음을 졸이게 하는 음악은 <사랑의 메신저>(조셉 로지, 1971)의 오리지널 스코어를 편곡한 것이다. 미국 남부의 후덥지근한 기후를 한껏 담아낸 촬영 덕에 종종 어지럼증도 찾아온다. 이처럼 독특하게 완성된 영화의 스타일은 끝까지 사태의 핵심에 접근하지 못하고 표면만 더듬는 엘리자베스의 행보와도 겹친다. 캐스팅 디렉터로 경력을 시작한 신인 각본가 새미 버치의 시나리오는 1996년에 체포된 메리 케이 르투어노의 실제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창작 활동에 대한 자기 반영적 조소처럼 보이기도 한다.

 

메이 디셈버 May December 감독 토드 헤인즈 출연 나탈리 포트만, 줄리안 무어, 찰스 멜튼 수입·배급 판씨네마 제작연도 2023년 상영시간 117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개봉 2024년 3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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