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일회(一期一會)
<패스트 라이브즈>
차한비 / Choice / 2024-03-08

대체 무슨 사이일까. 건너편 바 테이블의 세 남녀를 보며 수군대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가운데에 앉은 아시안 여성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리더니 이내 물기를 머금는다. 그녀의 연인은 왼쪽에서 그녀와 눈을 맞추는 아시안 남성일까, 아니면 대화에 거의 끼지 못하는 오른편의 백인 남성일까. 멀리서 구경하던 취객들은 설전 끝에 “진짜 모르겠다”며 무례한 추측을 관두지만, 영화는 지금부터 그들이 누구며 그날이 어떤 날인지 공들여 알려주려 한다. 그러려면 24년 전과 12년 전으로 시계태엽을 두 차례 감아야 한다. 24년 전, 노라(그레타 리)는 아직 나영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열두 살 동갑내기 해성(유태오)과 매일 붙어 다녔다. 둘은 서로 좋아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스스럼없이 결혼을 생각할 만큼 어렸다. 노라 가족이 캐나다 이민을 결정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12년 전, 노라는 극작가를 꿈꾸며 두 번째 이주를 감행했다. 뉴욕에서 대학을 다니며 바쁘게 지내던 와중에 스물넷이 된 해성을 페이스북에서 발견했다. 낮밤이 뒤바뀐 세계에서 둘은 모니터 화면으로나마 얼굴을 마주 보려 애쓰지만, 불안정한 인터넷 신호처럼 마음은 갈수록 우왕좌왕했다. 노라 앞에 남편 아서(존 마가로)가 나타난 시점이 바로 그때였다. 그리고 현재, 세 사람은 뉴욕 술집에 나란히 앉아 수많은 가정에 휩싸인다. 어느덧 새벽 4시, 동트기 전에 또 한 번 이별이 예정된 참이다. 중단과 재개를 반복한 인연, 변화와 선택을 거듭한 인생은 이제 어디로 흘러갈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 노미네이트되며 이목을 끈 <패스트 라이브즈>는 한국계 캐나다인 감독 셀린 송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데뷔작으로, 긴 세월에 깃든 사랑과 관계의 깊이를 탐구한다. <미나리>(정이삭, 2021) <라이스보이 슬립스>(안소니 심, 2023) <리턴 투 서울>(데이비 추, 2023) 등 근래 공개된 이민 2세대 감독의 영화에 속하지만, 이민 가정의 고단한 삶과 유년기를 재현하는 작업과는 거리가 멀고 정체성을 찾아 헤매는 디아스포라의 여정에도 꼭 들어맞지 않는다. ‘이민자 영화’로 묶이는 작품 중에서는 차라리 작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7개 부문 트로피를 거머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다니엘 콴·다니엘 샤이너트, 2023)와 비교할 만하다. 두 작품 모두 이민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가지 않은 길’을 상상하며 삶의 또 다른 가능성을 살핀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멀티버스 세계관을 차용해 새로운 자아를 연거푸 생산한다면, <패스트 라이브즈>는 전생과 연기라는 불교적 세계관을 끌어와 만남과 이별을 해석하는 식이다. 전자가 모녀의 결속과 갈등을 서사의 커다란 줄기로 데려오는 것과 달리, 후자는 로맨스와 자립에 초점을 맞추는 것 또한 차이점이다. <패스트 라이브즈>에도 가족 공동체가 등장하긴 하나 극을 이끄는 주요 동력원은 아니다. 이 영화에서 부모는 주인공의 문화적 배경을 유추하게 하는 존재로 남는다. 영화감독인 아버지와 미술가인 어머니는 젊고 자유롭다. 그들은 마주 앉아 담배를 피우며, 영어를 사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을 정도로 교육받았다. 영화는 그들 부부가 생활고 아닌 다른 문제로 한국과 결별함을 암시한다.

<패스트 라이브즈>
<패스트 라이브즈>

나영은 그러한 문화 및 교육 자본을 밑거름 삼아 노라가 되기로 결심한다. 노라를 추동하는 것은 더 크고 넓은 세계를 경험하고 싶다는 욕망이다. 24년 전 노라는 노벨문학상을 꿈꾸는 소녀였고, 그로부터 12년이 흐른 후에는 퓰리처상을 동경하는 작가 지망생이 된다. 노라가 스스로 소개하듯 “글쟁이”로서 아버지와 비슷한 길을 걷는 사이, 해성은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하고 여느 한국 남자처럼 군대를 다녀온다. 영화는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두 청년의 세계를 번갈아 비춘다. 노라는 셰익스피어의 희곡과 습작 노트가 쌓여 있는 책상에서, 해성은 레쓰비와 아로나민 골드가 놓인 책상에서 스카이프에 접속한다. 책상 풍경만큼 삶의 방식도 사뭇 다르다. 노라는 일찌감치 부모의 품을 떠났으나, 해성은 성인이 되고 나서도 부모님과 함께 산다. 식탁에서 말 한마디 없이 신문을 읽는 아버지와 숙취에 시달리는 아들을 위해 콩나물국을 끓이는 어머니, 해성의 문화유산은 그러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결국 두 인물은 영화의 절반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같은 프레임 안에 등장하지 못한다. 노트북을 붙잡고 부지런히 대화를 이어 가지만, 그들은 서로 다른 세계에 머문다는 현실을 깨달은 나머지 물리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좀처럼 거리를 좁히지 못한다. 

영화의 짜임새와 섬세한 감정 표현과는 별개로, 이쯤에서 배우들의 언어 문제를 잠시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한국계 미국인인 그레타 리도, 독일에서 출생해 미국과 영국 등 다양한 문화권에서 성장한 유태오도 한국어 사용이 다소 부자연스럽다. 노라가 이민 2세대로서 “이제 한국어는 엄마랑 너(해성)하고만 쓴다”고 말하는 것과 달리, 유태오가 연기한 해성은 전형적 한국 남자로 설명되기에 별다른 방패도 없다. 두 배우의 언어 구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속도다. 그들은 매 음절을 분리해 정확히 발음하려 애쓰고 자연스레 말하는 속도가 느려진다. 이는 장단점을 고루 지닌다. 끊어질 듯 느릿느릿 이어지는 대화는 대면하지 못하는 두 인물의 상황을 반영한다. 민망함과 설렘이 동시에 피어나는 대화의 분위기라든지,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한 채 제자리를 맴도는 관계에 어울리는 속도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색한 발화와 번역체 말투는 어쩔 수 없이 국내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패스트 라이브즈>
<패스트 라이브즈>

덜컹거리면서 달려가는 기차처럼 <패스트 라이브즈>는 그럼에도 종착지까지 방향을 잃지 않는다. 영화가 시간 축을 세 차례 옮기는 동안, 노라의 테마는 이주와 도전에서 안정과 정착으로 변화한다. 노라에게 해성은 뒤를 돌아보게 하는 사람이다.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시공간을 갈망하게 만드는, 과거에 묻었다고 여긴 불안과 추억을 가시화한 존재. 그런가 하면 해성은 노라의 뒤를 지켜보는 사람이다. 그는 남겨지고 기다리며 경로를 이탈하는 것에 주저한다. 가슴 아픈 엇갈림이지만 마냥 소용없지는 않다. 둘을 가로막는 시차와 거리가 결국 그들에게 전생을, 억겁과 찰나로 연결되는 인연의 신비를 곱씹어 볼 기회를 선사한다. 해성과 노라는 24년 만에 뉴욕에서 재회하고 영화는 다시 바 테이블을 바라본다. 카메라는 그곳에 오직 둘만 있다는 듯 아서를 모른 척하며 해성과 노라를 클로즈업한다. ‘만약’으로 시작하는 질문을 되풀이하는 해성 옆에서 노라는 그제야 한 시절을 갈무리한다. 이 클로즈업 신은 영화 말미에 등장하는 트래킹 숏과 이어지며 감흥을 자아낸다. 해성과 함께 길 왼편으로 걸어간 노라는 그를 떠나보낸 후, 반대로 몸을 돌려 집 앞까지 걸어온 다음 아서의 품에 안겨 눈물을 쏟는다. 삶은 그렇게 연속하는 페이지처럼 계속되고 노라는 끝내 한 장을 넘겼다. 영화는 그 순간 이끌림과 그리움,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미련, 현재를 향한 감사까지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인연’을 전한다.

 

패스트 라이브즈 Past Lives 감독 셀린 송 출연 그레타 리, 유태오, 존 마가로 제작 2AM Killer Films 배급 CJ ENM 제작연도 2023년 상영시간 106분 등급 12세이상관람가 개봉 2024년 3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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