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에도
<오키쿠와 세계>
차한비 / Choice / 2024-02-24

정갈한 흑백 화면에 불러들인 19세기 풍경을 보며 누군가는 <7인의 사무라이>(구로사와 아키라, 1954) 속 감동을 기대할지 모르겠다. 혹은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점과 제목의 유사성을 짚으며 <오하루의 일생>(미초구치 겐지, 1952) 같은 이야기를 예상할지도. 그러나 <오키쿠와 세계>에는 대의명분에 목숨을 걸거나 비장한 각오로 전투를 치르는 무사가 없다. 얼룩진 인생을 살다가 뒤안길로 스러지는 비련의 여인 또한 등장하지 않는다. 서두에서 표표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던 카메라는 이내 질펀한 똥통으로 시선을 옮긴다. 감독 사카모토 준지에게 ‘에도’는 향수가 아니며 회한은 더더욱 아니다. 영화는 에도를 지나간 시대로 박제하는 대신에, 약동하는 청춘의 시간이자 땅에 발 딛고 사는 생활인의 공간으로 되살린다. 홍수가 나면 동네마다 변소가 넘치고, 어떤 젊은이는 그 똥으로 먹고산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아서 견디는 것이 아니라, 이승이 본래 개똥밭이기에 오물을 뒤집어쓰는 치욕쯤은 웃어넘겨야 하는 존재가 곧 에도다. 그토록 낮고 낮은 자리에서 청년들은 연정을 품고, 희망과 절망을 맛보고, 태어나 처음 접한 ‘세계’라는 단어의 의미를 헤아려 간다.

1858년 늦여름, 몰락한 무사 가문의 딸 오키쿠(쿠로키 하루)는 장대비를 피하러 들어간 처마 밑에서 똥거름장수 야스케(이케마츠 소스케)와 츄지(칸이치로)를 만난다. 영화는 그날부터 1861년 늦봄까지 세 명의 젊은이들을 지켜본다. 아버지에게도 잘잘못을 따져 물을 정도로 기세 좋던 오키쿠는 크고 작은 사건을 거치며 앓아눕는가 하면, 츄지에게 반해 바보처럼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한다. 오키쿠가 제 역할과 욕망을 탐구하며 세계를 착실히 일구는 사이, “책망할 가족도 같이 죽을 여자도 없”는 야스케와 츄지도 서로 의지하며 나름의 여정을 통과한다. 우연히 마주친 세 인물이 통성명하는 모습으로 시작했던 영화는, 그들이 결국 끝없이 이어지는 삶을 함께 걸어갈 동반자가 되었음을 알리며 마무리된다. <오키쿠와 세계>는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나눠 갖는 앨범이나 문집 같은 형태를 띤다. 7개의 장으로 흐르는 시간을 축약하고 앞뒤로 서장과 종장을 붙여 꼬박 3년이라는 세월을 엮는다. 젊음에 따르는 특유의 혼란과 불안마저 탁하지 않게 드러내며, 장마다 애정 어린 시선으로 포착한 성장통이 차곡차곡 기록된다.

<오키쿠와 세계>
<오키쿠와 세계>

물론 <오키쿠와 세계>가 그리는 에도도 처절한 생존 투쟁과 맞닿아 있다. 복수를 결의하는 긴장은 없으나, 똥냄새는 피비린내만큼 지독하다. 아버지와 목소리를 동시에 잃은 오키쿠는 자립해야 하고, 애초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는 야스케와 츄지는 자구책을 마련해야 한다. 애정과 우정이 슬그머니 싹트는 와중에도 그들은 좀처럼 마음을 열지 못한다. 어깨를 짓누르는 생의 무게가 만만치 않아서다. 청춘을 마냥 긍정하기 어려운 이들에게 영화는 기회를 선사한다. 죽음을 목전에 둔 노인은 연인에게 고백하는 문장을 일러주고, 이웃들은 지친 이를 위로하는 적절한 방법을 몸소 보여준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유한하고 고유하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살아가는 데 필요한 소박한 지혜를 터득하도록 영화는 오키쿠와 두 남자를 북돋는다. 그렇게 <오키쿠와 세계>는 먹고살기의 치사함과 읽고 쓰기의 고양감이 뒤엉키는 무대로 차츰 변모한다. 인물들은 땀 흘려 일하면서 “돌고 돌아 똥이나 음식이나 똑같”다는 순환을 이해하고, 손가락으로 허공에 글자를 쓰며 “난 똑바로 살 거야”라고 다짐할 배짱을 기른다. 생활이 궁핍한 탓에 종이가 아닌 지푸라기로 뒤를 닦지만, 연인에게는 종이 한 묶음을 선물하는 정성이 그들 사이에 오고 간다.

영화는 하나의 장을 마칠 때마다 화면에 색깔을 입힌다. 방금 세수한 말간 얼굴, 붉게 타는 숯불, 멸시를 감내하는 자세 등을 빗장 풀듯 컬러로 내보인다. 그 순간 영화에 흐르는 고요함은 미추와 귀천의 경계를 허문다. 연속하는 사건들, 주고받는 말들을 멈춰 세우고 잠시 시간을 붙잡는다. 시제처럼 제시된 이미지가 마음을 함축하고 있어서다. 그것은 흔들리면서도 전진하는 용기를 상징하기도 하고 일순 밀려드는 행복과 부끄러움을 묘사하기도 한다. <오키쿠와 세계>는 종종 언어를 다른 방식으로 대체한다. 세계라는 단어는 한 사람과 다른 사람이 끌어안고 등을 두드리는 모습으로, 기다리겠다는 약속은 흰 눈이 소복하게 쌓이는 장면으로 형상화된다. 츄지는 어른들에게 배운 사랑의 문장을 써먹지 못한다. 오키쿠를 향해 말해야 할 때, 그는 “말로는 못 하겠어요”라고 고백한다. 대신 바닥에 주저앉아 가슴을 두드리고, 땅을 치고, 하늘을 휘젓고, 오키쿠를 떠받듯 두 팔을 높여 벌린다. “이 세계에서 당신이 제일 좋다”는 말을, 하염없이 사랑하는 마음을 츄지는 그렇게 전한다.

<오키쿠와 세계>
<오키쿠와 세계>

감독 사카모토 준지의 서른 번째 영화 <오키쿠와 세계>는 로테르담국제영화제, 뉴욕아시아영화제 등에서 먼저 소개됐다. 처음 시도하는 흑백 시대극에서 감독은 최대한 힘을 뺀 듯 보인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운 일본 최후의 막부 혹은 급격한 경제 발전을 이뤘으나 쇄국정책을 펼치며 외부와 단절됐던 시대로 에도를 정의하며 역사적 측면에서 접근하기보다는, 갓 도시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한 장소로 에도를 지칭한다. 분뇨업에 몸담은 하층민에게 에도는 삐걱거리는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도착하는 일터이고, 도시에 모여 사는 빈민에게는 방음 안 되는 공동주택과 교습소가 자리한 동네다. 무사의 딸은 장애인이 되고, 부잣집 문지기는 건달 노릇을 한다. 감독은 지난 팬데믹을 거치며 희망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의 말마따나 영화는 가난, 계급, 노화, 죽음, 차별 등 삶의 어두운 영역을 조명하면서도 “최하층의 사람들이 지지 않고 살아가는 그런 모습들”을 담는 데 집중한다. 단정한 짜임새 속에 배우들은 연민과 유머를 고루 심는다. 쿠로키 하루는 불행을 자양분 삼아 저만의 대지를 씩씩하게 다지는 인물로 오키쿠를 완성하고, 이케마츠 소스케는 “우리가 없으면 에도는 똥 천지가 될걸!”이라고 외치며 설움과 존엄을 동시에 펼쳐 보일 줄 안다. 츄지를 연기한 칸이치로는 깊은 낙담을 뚫고 피어나는 순정을 애틋한 몸짓으로 표현한다.

 

오키쿠와 세계 Okiku and the World 감독 사카모토 준지 출연 쿠로키 하루, 이케마츠 소스케, 칸이치로, 마키 쿠로도, 사토 코이치, 이시바시 렌지 수입·배급 엣나인필름 제작연도 2023년 상영시간 90분 등급 12세이상관람가 개봉 2024년 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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