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기한 마주침
<벗어날 탈 脫>
손시내 / Choice / 2024-02-18

<벗어날 탈 脫>의 두 주인공은 각자 무언가를 찾거나 기다리는 중이다. 영목(임호준)은 깨달음에 이르고자 매일 108배에 명상에 묵언수행까지 한다. 무슨 사연일까. 죽을병에 걸려서다. 전화기 너머 애인은 잘 먹고 잘 쉬면 낫는 병이라며 그만 돌아오라고 하나 영목은 멈출 생각이 없다. 죽기 전에 혼자 찾아야 하는 게 있다고 단기로 방을 구해 수양에 매진한다. 하지만 반복되는 일상은 그를 좀 더 피로하게 만드는 듯 보인다. 먹는 것도 삼가며 거의 수도자의 자세로 지내는데도 딱히 대단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얼굴 없는 여자가 그를 따라다니는 것만 빼고. 지우(위지원)는 영감을 원한다. 미술작가인 그는 다가오는 전시에 새 작업을 내놓고 싶다. 늘 하던 걸 또 해도 된다지만 아무래도 성에 차지 않는다. 마감을 독촉하던 담당자는 애니메이션을 시도하는 게 어떻겠냐고 한다. 예전에 해본 적 있는 작업이다. 그러나 선뜻 내키지 않는다. 서사에는 언제나 끝이 있다는 사실이 지우를 두렵게 한다. 죽음을 떠올리게 해서다. 대상을 영원한 현재성에 가두는 사진이 차라리 덜 불편할 것만 같다. 어찌 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말이다.

깨달음이나 영감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알쏭달쏭한 단어를 이야기 중심에 두지만, 영화는 “관념 속에 머물러있지 마.”라는 영목 애인의 말에 좀 더 귀를 기울이려 한다. 영목은 행하는 자다. 끊임없이 몸을 움직여 원하는 곳에 도달하려 한다. 땀으로 온몸이 흠뻑 젖을 때까지 절하고, 발끝의 감각을 온전히 느끼며 한 걸음씩 정성스레 걷는다. 그게 그가 찾은 방법이다. 그렇게 영목은 없을 무(無)의 세계로 빠져들고자 한다. 몸과 마음을 어지럽히는 모든 것을 거두고 ‘없다’의 상태로 접어들기. 물론 어려운 일이다. 정신은 자꾸 분산되고 신체는 매번 흔들린다. 얼굴 없는 귀신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온다. 그런데도 영목이 수행을 멈추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죽을병이라는 단서가 제시되긴 하나 영화는 병명이나 증상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어쩌면 별로 큰 병이 아닐 수도 있다. 여기서는 그런 이유보다 영목이 가닿으려는 상태가 더 중요해 보인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 자기에게서 벗어나 보려고 하는 듯하다. ‘나’라는 형식을 유지하면서 비우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지우가 원하는 작업 또한 그런 형태를 띤다. “가벼워지고 싶다.” 그는 서사가 작동하고 대상이 존재하는 작업을 무겁게 느낀다. 선의 율동이 주를 이루는 지우의 애니메이션은 존재의 무거움을 덜고 행위만 남기는 작업의 근사한 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염원과 바람은 구체적 움직임이라는 공통 분모 안에서 만난다.

<벗어날 탈 脫>
<벗어날 탈 脫>

주체와 대상이 희미해진 상태를 영화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벗어날 탈 脫>은 공포와 미스터리에서 답을 엿본다. 영목은 수행을 거듭하며 자꾸만 이상한 기척을 느끼고,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기이한 장소에 도착한다. 영화는 주인공이 안정적이고 통합된 시공간을 경험할 수 없게 한다. 여기서는 허구적 시공을 매끄럽게 다듬는 각종 촬영과 편집 기법이 물러나고 틈새와 빈칸이 투박하게 노출된다. 그 사이에서 공포가 피어오른다. 화면의 빈 영역에서는 언제 귀신이 솟아날지 모르고, 때로 덜컹거리는 시점 쇼트는 불안을 야기한다. 서보형 감독은 전작 <탈날 탈 頉>(2019)에서도 시공간이 제대로 맞물리지 않는 상황을 기묘하게 다뤘는데, ‘탈 시리즈’의 연장이자 확장이라 할 수 있을 <벗어날 탈 脫>은 그보다 좀 더 공포심을 자극한다. 없어야 할 것이 있을 때도 기겁하게 되지만, 무언가 없는 상태도 그 자체로 무섭다. 관객이 빈틈을 인식하게 되고, 의식적으로 채우게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공포는 영화의 기법과 문법을 가장 직설적으로 언급하는 장르 중 하나일 것이다. <벗어날 탈 脫>은 그러한 이해의 즐거움을 던져준다.

세계를 비집고 침투하는 형상이 지우에게는 궁금함과 매혹의 대상으로 다가온다. 새로운 작업의 실마리를 찾지 못해 고뇌할 때부터 그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성용훈)를 봤다. 도무지 보통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 그 이상한 존재는 대체 무엇인가. 남자는 부서진 의자를 들고 다니는가 하면, 공터에서 빙글빙글 도는 괴이한 춤을 추기도 한다. 그 움직임을 마주하며 지우는 시작과 끝으로 이뤄진 답답한 이야기 바깥으로 나갈 가능성을 더듬는다. 어쩌면 검은 옷의 남자는 언젠가 큰 화재로 죽었다고 알려진 바로 그 사람인지도 모른다. 탄생과 죽음을 기점으로 삼는 선형적 시간은 이제 무너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작업도 지속될 것이다. 혹시 과거 외국의 바닷가에서 지우가 카메라로 찍었던 남자, 곧바로 사망 사고를 당해 지우의 애니메이션 작업을 멈추게 했던 사진 속 ‘해변의 사나이’도 살아나게 할 수 있을까? 작업을 통해 그 답에 다가가고자 하는 지우는 서사뿐 아니라 끝내 정지하고 마는 이미지의 운명까지 고심하는 순수한 예술가의 면모를 지녔다. 예술의 깊은 곳을 건드리는 그의 고민은 영화 밖으로도 질문을 던진다.

<벗어날 탈 脫>
<벗어날 탈 脫>

<벗어날 탈 脫>에서 지우의 시간과 영목의 시간은 기이하게 마주친다. 두 사람이 거주하는 공간은 방 구조부터 냉장고 모양까지 똑같다. 영목이 나간 집에 지우가 들어왔나 싶지만, 얽혀있는 모양새가 희한하다. 지우가 떨어뜨린 물건을 영목이 줍고, 영목이 내는 소리를 지우가 듣는다. 영목이 삼계탕을 원하자 지우가 요리를 하기도 한다. 선후관계로 설명하기보다 평행한 두 세계에 구멍이 뚫렸다고 하는 게 외려 그럴듯할 것이다. 이런 우주에서는 내가 너에게 귀신으로 보이고, 너는 나에게 환영으로 나타날 거다. <벗어날 탈 脫>은 이 이상한 공존 상태를 최종 목적지로 여기지 않고 그보다 조금 더 가본다. 영화는 각자가 속한 차원을 연결하고 끊어내며 거대한 몽타주를 시도한다. 여기서 물과 불, 여자와 남자, 정신과 육체, 태어남과 죽음은 서로 대비되는 요소로 등장했다가 “결국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상태”로 어우러진다. 지우의 세계와 영목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얼핏 모호한 도착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들이 숨결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마주하는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이 영화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벗어날 탈 脫>은 ‘불일불이(不一不二)’, 즉 너와 내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라는 불교철학을 기묘하고 관능적인 이미지로 구현해 냈다.

 

벗어날 탈 脫 Not One and Not Two 감독 서보형 출연 임호준, 위지원 제작 사보타지 필름 배급 씨네소파 제작연도 2024년 상영시간 72분 등급 15세이상관람가 개봉 2024년 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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